구경하러 온 다른 사람들은 지유를 불쌍하게 생각했다. 일개 비서가 어떻게 전무를 이기겠는가, 결국 가차 없이 나가떨어지고 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고 전무가 고세리를 데리고 뛰어왔다. 조카를 걱정하는 마음에 오자마자 바로 따져 묻기 시작했다.“누구야. 누가 우리 세리 괴롭힌 거야?”고세리가 탕비실에 있는 지유를 가리키며 말했다.“삼촌 저 여자예요. 저 여자가 나를 때렸어요. 삼촌, 어릴 적부터 부모님도 저를 때린 적이 없는데 저 여자가 지금 나를 때린 거예요.”진예림은 이 상황이 매우 흥미진진했다. 그녀는 얼른 불쌍한 척하면서 좋은 사람인 양 쇼를 하기 시작했다.“전무님, 죄송합니다. 제가 세리를 잘 챙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무실에서 제 입지가 작으니 말에 힘이 실리지 않습니다.”뜻인즉 직급은 지유와 같지만 항상 지유에게 눌린다는 뜻이었다. 진예림은 지유가 이 사무실에서 너무 우쭐댄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전무는 예전부터 지유의 안 좋은 소문을 익히 들어서 알았다. 하지만 이현의 옆에서 일하는 사람이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그의 머리 꼭대기로 기어오르려고 하니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온지유 씨, 비서 주제에 감히 우리 조카에게 손을 댄 거예요? 여 대표님 옆에서 일한다고 내가 아무것도 못 할 줄 알고? 내 말 한마디면 바로 여진그룹에서 쫓겨날 수도 있어요.”고 전무는 여진그룹을 다닌 시간이 지유보다 훨씬 길었다. 하지만 같은 부서가 아니었기에 회사에서 활동할 때를 빼고는 거의 마주칠 일이 없었다.지유도 원칙적인 사람이라 모든 뒷담화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못 되었다. 대부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넘겼지만 이번엔 그러기 싫었다. 지유의 한계를 건드린 것이다.고 전무가 아무리 발악해도 지유는 자기 입장을 지켰다.“고 전무님, 저도 고세리씨가 전무님 조카인 건 압니다. 아끼고 보호하는 게 마땅하지요. 하지만 그것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해야죠.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도 않으면서 내 얘기를 함부로 지껄이는데
이현이 밖에서 사람들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강력한 아우라와 차가운 기운에 사람들이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진예림은 어떻게 지유를 혼내줄지 상상까지 끝냈는데 공교롭게도 이현이 도착한 것이다.진예림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아무리 지유를 혼내주고 싶어도 이현이 나타난 순간 너무 두려워 차마 손이 내려가지 못했다.“여 대표님.”사무실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길을 비켜주었다.이현은 그쪽으로 걸어가며 혼란스러운 상황을 살피다 꼭꼭 묶여있는 지유를 발견하고는 미안을 찌푸린 채 차가운 얼굴로 주위를 빙 둘러봤다.“직접 마주한 게 아니라면 여진그룹이 제 회사가 아니라 고 전무님 회사인 줄 알겠어요.”고 전무는 안색이 살짝 변하더니 기염이 확 줄어서는 이렇게 말했다.“아, 아닙니다. 온지유 씨가 저희 조카에게 손을 댔거든요. 우리 집안에서 이 조카를 워낙에 아껴서요. 집에서도 한번 맞은 적이 없는 애가 이런 수모를 당했으니 삼촌이 돼서 힘이 되어주려고 그랬던 겁니다. 아니면 온지유 씨가 점점 더 무서운 게 없이 나올 것 같아서요. 지금도 사람을 때리고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제게 훈수를 두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대표님을 모시겠어요.”고 전무는 지유의 트집을 잡으며 이현에게 지유의 성품이 좋지 못하니 자르라고 유도하고 있었다.지유가 아무리 날고뛰어봤자 결국 비서 나부랭이인데 이현은 결국 자기 편을 들어줄 거라 고 전무는 생각했다.이현이 지유를 바라보며 물었다.“고 전무님이 한 말씀 인정해요?”“아니요, 인정할 수 없습니다. 고세리 씨는 사실이 아닌 유언비어를 터트리다 제게 들키고도 뻔뻔하게 저를 도발했습니다. 고세리 씨의 행위는 제게 상처를 주었고 제가 고세리 씨를 때린 건 저의 정당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대표님이 말씀해 보세요. 제가 잘못했나요? 저는 사과는 하지 않겠습니다.”“대표님 보십시오. 아직도 저렇게 정신을 못 차리고 거만하기 그지없습니다.”고 전무가 씩씩거리며 말했다.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고 전무를 쏘아봤다.“고 전무님
고 전무는 고세리가 말을 많이 했다가 무슨 사달이라도 날까 봐 그녀를 잡아당겼다. 까딱 잘못하면 회사 초기 멤버였던 그도 쫓겨날 위기였다. 고 전무는 사태를 파악하고 얼른 아부했다.“대표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자초지종을 잘 파악하지도 않고 섣불리 대처했으니 온 비서님께 실례가 많았습니다.”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이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말투는 여전히 엄숙했다.“고 전무님은 아셨지만 조카 되는 분도 알았을까요?”고 전무가 고세리를 앞으로 당겨오며 말했다.“온 비서님께 큰 실례를 끼쳤으니 얼른 사과해. 그리고 앞으로 더는 헛소리하지 말고.”고세리는 뺨을 맞은 것도 억울한데 사과까지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렇게 말했다.“삼촌, 내가 왜 사과해야 하는데요? 싫어요!”고세리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떼를 쓰며 울기 시작했다.고 전무는 이현을 힐끔 살폈다. 이현은 이미 인내심을 잃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여진그룹에서 이현이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피를 보고 싶지 않으면 이쯤에서 그만하는 게 상책이었다.고 전무는 냉큼 고세리의 뺨을 후려갈겼다.“제멋대로 굴지 마. 얼른 사과해. 아니면 여기 계속 무릎 꿇고 있든지!”고 전무는 한 번도 고세리를 때린 적이 없었다. 늘 이쁨을 받고 자란 고세리는 처음 삼촌이 이렇게 불같이 화내는 모습을 봤다. 깜짝 놀란 고세리가 얼굴을 부여잡고 지유를 힐끔 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온, 온 비서님, 제가 눈에 뵈는 게 없이 말실수를 했어요. 죄송합니다.”진예림은 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고 전무도 지유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이현은 지유를 지켜주기 위해 고 전무의 체면도 마다했다.이현이 지유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지유에게 눈치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걸 진예림은 깨닫게 되었다.지유도 이현이 무조건적으로 자기를 도울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비록 이현이 친분보다는 도리를 따져야 한다고 했지만 이현도 무의식적으로 그녀 편에 서 있었
지유의 말은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게 딱 맞았다.이대로 놔두면 앞으로 이혼하고 나서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다.하지만 이현의 눈엔 지유가 너무 거리를 둔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게 싫은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두 사람의 관계를 아는 게 싫은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이현의 표정이 이내 어두워지더니 거리감이 느껴졌다.“그렇게 무서워?”지유는 어두워진 이현의 표정을 눈치채고는 말을 돌려서 설명했다.“나는 이현 씨 이미지가 안 좋아질까 봐 그러는 거죠. 이혼하고 나서도 나랑 엮이는 게 싫을 거 아니에요. 그리고 내 이미지가 좋은 것도 아닌데 엮어서 좋을 게 없죠.”이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비아냥거렸다.“요만한 일도 이렇게 선을 긋는데 이미지가 안 좋을 게 뭐가 있다고?”비아냥거리는 이현의 말투에 지유는 멈칫했다.말을 잘못했나? 서로를 위한 일인데?두 사람의 사이를 추측하면서 지유가 이현의 애인이라는 말까지 나오는데 이현은 이런 말을 역겨워하고 싫어할 것이다.지유가 이렇게 귀띔하는 것도 다 이현의 이미지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혼하고 나서도 케케묵은 찌라시들이 다시 나오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그를 위해 서로 거리를 두면 좋을 것 같다고 당부했는데 이현은 오히려 지유가 너무 선을 긋는다고 생각했다.지유는 이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입을 앙다물었다.“나는 이미지가 이미 이 모양 이 꼴이니 신경 안 쓰는데 이현 씨는 신경 써야 하잖아요. 나 때문에 이현 씨 인생을 영향 줘서는 안 되죠.”이현은 지유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화가 났고 되레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나를 지극히 생각해 줘서 고마워. 몇 년간 너도 수고했고.”이 말에 지유는 잠깐 어리둥절했지만 그래도 그 말에 맞춰 이렇게 대답했다.“별말씀을. 이현 씨와 여진그룹을 위한 일인데 내 의무기도 하죠.”고분고분하고 책임감 넘치는 모습에 이현은 입을 앙다물었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넥타이를 당기더니 이렇게 쏘아붙였다.“온 비서님, 참 마음이 깊
하지만 승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번이나 착용했다. 만약 기자들에게 사진이라도 찍힌다면 무조건 이를 비웃으며 추측성 기사를 쇄도할 것이다. 그래도 승아는 흔들림이 없었다.이번 일로 승아는 살이 많이 빠져 가냘파 보였지만 스포트라이트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친화력 있는 미소를 지었다.기자들은 이번에 죽을 고비를 넘긴 일에 대해 취재했다. 승아는 기자들 앞에서 불쌍한 척하며 자기가 겪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도 적극적인 이미지를 심는 걸 빼먹지 않았고 절대 다음은 없을 거라고 약속했다.댓글은 모두 승아를 걱정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동감하는 글도 보였다.기자들은 어떤 질문을 해야 화제성이 높은지 알고 있었기에 바로 드레스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승아가 대범하게 대답했다.“다시 카메라를 마주하면서 새롭게 태어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리고 이 드레스는 제게 매우 소중한 드레스예요. 이 드레스만 입으면 살아있다는 걸 느끼죠. 모든 고난을 이겨낼 것 같은 힘도 생기고요. 이제는 아름다운 것들을 소중히 여기면서 살고 싶어요.”기자가 또 물었다.“선물 받은 드레스로 보이는데 혹시 누가 선물한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혹시 약혼자인가요?”승아는 달콤하게 웃으며 누구라고 콕 집어서 얘기하지는 않았다.“제 삶에 가장 중요한 사람이에요. 살아갈 용기과 동력을 준 사람이죠.”이 말을 뒤로 승아는 매니저의 부축을 받으며 내려갔다.아직 궁금증이 풀리지 않은 기자가 쫓아가며 물었지만 승아는 이미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하지만 이건 중요하지 않았다. 기자와 네티즌들도 놀고먹는 사람들은 아니었다.그 드레스의 의미가 남다르다는 걸 알고 그 드레스를 선물한 사람이 누군지 토론하고 있었다.승아에게 이렇게 큰 영향을 끼칠만한 남자는 과연 누구일까?얼마 지나지 않아 네티즌은 그 사람이 이현임을 알아냈고 이현은 바로 검색어 순위에 올랐다.이현은 그렇게 승아의 약혼자로 굳혀졌다.이현과 승아 중 그 누구도 얘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네티즌과 팬들
씩씩거리는 윤정의 모습에 지유는 오히려 웃음이 터졌다.“윤정 씨 말만 들어보면 대표님이 저랑 만나는 줄 알겠어요.”윤정은 착각인지 뭔지 몰라도 두 사람의 사이가 약간 묘하다고 생각했다.“대표님 확실히 온 비서님을 많이 챙기는 것 같아요.”윤정은 잠깐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했다.“두 분은 못 느끼실 수 있지만 옆에 있는 사람은 달라요. 노승아 씨가 갑자기 끼어들어서 두 사람 사이 망치게 둘 수는 없어요.”윤정은 지유가 이현과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아이고, 윤정 씨, 헛다리 짚지 마요.”지유가 윤정의 머리를 톡 건드리더니 이렇게 말했다.“저랑 대표님은 아무 사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 하는 헛소리 새겨듣지 말아요. 대표님이 누굴 만나든 저랑 아무 상관 없어요. 이런 말은 앞으로도 하지 마요. 다른 사람이 들으면 또 소문이 이상해지니까.”윤정이 이마를 매만지며 말했다.“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말 안 하죠. 근데 다른 사람이 알지도 못하면서 헛소리하는 게 싫어서 그러는 거예요.”아무리 회사에서 지유가 부정당한 방법으로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는 소문이 파다해도 윤정은 믿지 않았다.윤정이 아는 지유는 정직하고 부드럽고 부하를 잘 챙기는 사람이지 그런 비열한 방법을 쓸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윤정은 지금 퍼지고 있는 지유에 관한 소문이 뒷담화를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질투로 인해 헐뜯는 소리라고 생각했다.지유는 그 뉴스가 진짜여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도 티를 내서는 안 된다.지유는 요즘 이현이 자기와 점점 거리를 두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업무든 생활에서든 서로 간의 대화가 줄어들었고 가끔은 선택적으로 그녀가 한 말을 무시하기도 했다. 같이 퇴근하는 경우도 줄어들었고 요즘 계속 서재에서만 잠을 자면서 침실에 들어오지도 않았다.아마 이현도 뉴스를 보고 속으로 승아에게 명분을 줘야 한다는 생각에 일부러 그녀와 거리를 두려고 하는 걸 수도 있다.지유는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굉장히 실망했다.…“이런 염치없는 년을 봤나
“아니야.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겠어. 아직도 나를 몰라? 내가 어떻게 너를 탓해?”지유가 주먹을 불끈 쥐더니 말했다.“이 결혼은 처음부터 계약 결혼이었어.”“뭐?”지희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너 한 번도 나한테 얘기한 적 없잖아. 여이현이 왜 너랑 계약 결혼을 해? 뭔가 이상한데?”지유가 말했다.“내가 전에 너한테 그랬잖아. 이현 씨 할아버지가 나를 좋아해서 이현 씨와 결혼하기를 바랐다고. 나도 그때 핍박에 의해 이현 씨와 결혼한 거야.”지희도 그때 이 결혼을 의아하게 생각했다.지유가 이현을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와 결혼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지금 보니 그렇게 갑자기 결혼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잠깐만, 나 진정 좀 하자.”지희는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너와 여이현은 계약 결혼인데 여이현 할아버지가 결정한 거다? 여이현은 너를 좋아하지 않지만 할아버지 때문에 너랑 결혼한 거고…”“근데 이것도 이상한데. 여이현이 집에서 뭐라고 한다고 들을 사람이야? 그리고 그땐 잊지 못하는 첫사랑도 있었잖아. 왜 순순히 너랑 결혼한 거지?”지희는 턱을 매만지며 이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나도 그 생각 했었어. 근데 이 계약 결혼의 존속 시간은 3년이야. 3년이 지나면 우린 이혼할 거고.”“그럼 그 기한이 다 되어가네.”이를 들은 지희는 더 마음이 아팠다.“그래도 아직은 여이현의 법적 와이프니까 이 정도인데 이혼이라도 하면 노승아가 얼마나 더 기고만장하게 나올까? 이혼해도 넌 여이현 수행비서로 있을 텐데 노승아가 여이현과 결혼해서 여씨 집안 사모님이라도 되면 널 얼마나 괴롭힐 거야. 안돼, 절대 안 돼.”지희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지유가 웃음을 터트렸다.“내가 당하고만 있을 것 같아? 그리고 왜 이혼해도 내가 이현 씨 옆에 있을 거라고 생각해?”“결정한 거야? 이혼하면 여이현 곁을 떠나게?”지희가 물었다.지유는 차를 한 모금 홀짝이더니 말했다.“네가 그랬잖아. 사람은
“허투루 하는 거 걸리기만 해봐요. 다들 잘리고도 남을 테니까.”승아의 매니저 예진이 우쭐거리며 점원에게 이렇게 당부했다.이렇게 으름장을 놓는데 누구도 홀대할 엄두를 못 냈다. 점장이 굽신거리며 이렇게 말했다.“네, 알겠습니다. 고객님이 원하시는 드레스는 정성을 다해 만들도록 하겠습니다.”“내일은 여진그룹에서 제일 중요시하는 자선 행사에요. 그 자리에 입어야 하는 드레스니까 내일 전에 완성해야 할 거예요.”예진이 이렇게 덧붙였다.점장은 약간 난감했다. 드레스를 얼마나 많이 고쳤는데 매번 그냥 넘어갈 때가 없었다. 직장 생활을 꽤 오래 한 그녀였지만 이렇게 깐깐하게 하나하나 확인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여러 번 고쳤으니 된 줄 알았는데 이번에도 퇴짜를 받았다.점장이 이렇게 말했다.“드레스를 가져다드린지도 며칠은 되는데 이제야 가져오시니 좀 난감하네요. 수작업으로 완성한 드레스라 수선하려면 수작업으로 해야 하는데 아마 시간이 빠듯할 것 같네요.”예진은 이런 말을 새겨들을 사람이 아니었다.“그럼 하던 일 다 멈추고 우리 승아 언니가 입을 드레스에만 집중하면 되잖아요. 허투루 할 생각 마요. 이 행사 우리 승아 언니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리란 말이에요. 제때 완성하지 못해서 행사에 차질이 생기면 이 매장 닫아야 할 수도 있어요.”승아가 기자들 앞에서 인터뷰를 한 다음부터 예진은 여씨 집안 사모님 자리를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해 말하는 것도 점점 거만해졌다.점장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만약 이 드레스에 수놓은 꽃을 완성하려면 다른 고객이 예약한 드레스가 늦어지게 된다. 그러면 다른 고객의 클레임도 뒤따라오게 될 것이다.신뢰를 제일 중요시하는 매장이니 점장은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예진은 점장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손에 들었던 쇼핑백을 카운터에 올려놓으면 이렇게 말했다.“내 말이 어려워요? 사태 파악 좀 해요. 다른 사람은 밉보여도 괜찮은데 여씨 집안 미래 며느리한테 밉보이면 좋을 게 뭐에요?”점장도 눈치가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문지원은 그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지석훈의 손등을 꼬집으며 분풀이했다.하지만 지석훈은 전혀 개의치 않고 그녀를 끌어안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아까 동료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거야.”문지원은 그의 키스를 피하면서 투덜거렸다.‘지금 그걸 걱정하는 게 아닌데.’지석훈의 평판이 좋든 말든 그녀랑 상관이 없었고 그녀가 걱정하는 건 그게 아니라 그런 민망한 모습을 남에게 들켰다는 사실이었다.지석훈은 그녀가 펼친 손바닥을 코끝으로 슬쩍 밀어냈다. 사실 문지원이 제대로 힘을 준 것도 아니어서 그는 아주 쉽게 밀어낼 수 있었다.그녀가 진정으로 화를 낸 게 아니라는 걸 눈치챈 지석훈은 장난스럽게 그녀의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내가 잘못했어. 이제 화 풀어. 응?”문지원은 그런 식의 사과는 필요 없었다. 이게 그녀한테 사과하는 건지 본인한테 좋은 일 하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애교 섞인 키스를 끈질기게 요구하는 지석훈을 밀어낼 수가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반쯤 밀고 반쯤 끌려가다가 그에게 허리를 붙잡힌 채 침대에 눕혀졌고 그렇게 또 한 번 열정적인 시간을 보냈다.지석훈의 체력은 유독 좋았다.의사라는 직업이 낮 동안 그렇게 바쁜데도 어떻게 밤만 되면 이토록 넘치는 에너지를 보이는지 신기할 정도였다.그 모든 일이 끝난 뒤에 지석훈은 만족스럽게 그녀를 품 안에 안고 있었다. 문지원은 귀 뒤쪽으로 그의 따뜻한 숨결이 닿는 게 간질간질하게 느껴졌다.그때 지석훈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이제 우리 집에도 가서 부모님께 인사할 때 되지 않았어?”사실 지석훈은 문지원을 부모님께 빨리 소개하고 싶었다. 그는 자기 부모님이 그녀를 싫어할 리 없다고 생각했고 오히려 문제는 그녀의 아버지 쪽일 거라 예상했기에 그쪽이 더 우선이긴 했다.문지원은 갑작스러운 그의 제안에 잠시 멍해졌다.하지만 그들의 관계가 이미 이 정도로 깊어진 이상 슬슬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인 것도 사실이었다.그녀가 잠시 말
그 말을 마친 문지원은 주주들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먼저 회의실을 빠져나왔고 이번엔 지난번처럼 속이 답답하지 않았다.비서 역시 속이 시원하다는 듯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방금 주주들 표정 보셨어요? 정말 볼만하더라고요!”문지원은 가볍게 웃음을 지었고 비서는 다시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근데 저 사람들이 이대로 회사 권력을 쉽게 포기할까요?”문지원은 이미 예상한 듯 여유롭게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어쨌든 회사 결정권은 나에게 있으니까 앞으로 천천히 저 사람들이 맡고 있는 프로젝트를 하나씩 회수하면 돼요. 그러다 보면 결국 버티고 싶어도 버틸 수 없게 될 테니까요.”그들이 회사 지분에 그렇게 집착하는 이유는 결국 당장의 이익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 눈앞의 이익을 없애 버리면 더는 그녀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회사 내부의 일은 해결하기가 아주 까다롭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간단한 것도 아니었다. 일이 많다 보니 문지원이 지쳐 있는 모습을 지석훈이 보고 마음이 쓰였다.“요즘 아주 바쁜가 봐. 다크서클도 생겼네.”문지원은 깜짝 놀라 무의식적으로 눈 밑을 만지며 물었다.“진짜예요?”곧바로 거울을 찾으려고 하자 지석훈은 그녀를 잡아당기며 부드럽게 타일렀다.“이러다가 진짜 생기겠어. 얼른 쉬어.”“뭐야. 지금 저를 놀린 거예요?”문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도 그와 가볍게 장난을 쳤다. 두 사람이 확실한 관계를 맺은 이후로는 이전처럼 어색하거나 긴장하지 않고 자주 웃으며 서로 장난을 쳤다.지석훈 역시 그녀와 함께할 때면 눈에 띄게 편안해 보였다.“그만해. 넘어지겠어.”지석훈은 문지원이 자신을 간지럽히려고 하자 그녀의 손을 잡아 제지했다. 그제야 문지원은 자신이 지석훈의 다리 위에 엎드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순간 문지원의 얼굴이 새빨개졌다.급히 일어나려고 했지만 지석훈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의 허리를 눌러 꼼짝 못 하게 했다.문지원은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고 속삭였다.“뭐 하는 거예요. 빨리 일어나게 해줘요. 누가 보
문지원은 아버지가 이런 결정을 내릴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물론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고 언젠가 유언장에 자신의 지분이 있을 거란 건 당연히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높은 비율일 줄은 몰랐다. 게다가 아버지의 건강은 이제 막 회복된 상태가 아니던가.“아빠, 이러지 마세요.”문지원은 아버지가 회사 내의 헛소문들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린 건 아닐지 걱정했다.“사람들이 하는 말은 전 전혀 신경 안 써요.”문용석은 딸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그런 말 때문이 아니야. 원래 진작 너한테 넘겨야 했을 것을 아빠가 미처 생각하지 못해서 네가 고생만 했구나.”문지원은 순간 울컥했다.회사에서 주주들의 뻔뻔한 비난을 들었을 때도 그녀는 그다지 억울하거나 분하지 않았고 심지어 이상한 소문이 돌아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하지만 아버지가 이런 말을 하자 가슴 속에서 갑자기 견딜 수 없는 서운함이 밀려왔다.지금껏 억눌렀던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듯했고 자신은 정말 최선을 다했다. 아버지가 병으로 쓰러지고 오빠는 연락조차 닿지 않아 혼자서 회사를 짊어지고 파산 위기를 막아냈다. 빚을 갚고 다시 회사를 상장시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던가.그런데 결국 자신이 이뤄낸 성과와 노력은 단지 여자라는 이유 하나로 평가절하되고 있었으니 어찌 억울하지 않을 수 있을까.“아빠는 네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다 알아.”문용석의 머리카락은 이미 희끗해져 있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여전히 어린 시절의 문지원을 바라보던 따뜻하고 자애로운 그대로였다.“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에 신경 쓰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아빠가 전부 네 편이 되어줄 테니까.”그날 이후 회사에서 사람들이 어떤 소란을 피워도 문지원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회의실에서 유 이사 일파는 다시 한번 문지원을 비난하며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압박했다.하지만 문지원은 덤덤히 듣기만 하다가 비서에게 무언가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비서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 유 이사는 그녀의 태
더욱이 그들이 보기에 문지원은 그저 딸일 뿐이었다. 딸이 아무리 잘난들 뭘 하겠는가. 결국엔 결혼해서 남이 될 운명인데 말이다.그렇게 급하게 권력을 넘기게 될 바에야 차라리 지금 일찌감치 그녀 손에 쥔 권력을 회수해서 자기들 손에 넘기는 게 더 나았다.문지원은 의기양양한 유 이사가 너무 일찍 기뻐한다고 생각했다.“유 이사님, 이 문제에 대해 혹시 저희 아버지께 직접 여쭤보기나 하셨나요?”유 이사가 순간 얼어붙었고 그 모습을 보자 문지원은 더욱 냉소가 나왔다.“설마 제가 물러나라는 얘기를 제 입으로 직접 아버지께 전하라는 건 아니겠죠? 뭐예요? 다들 직접 가서 말씀드릴 용기가 없으신가요?”이 말은 정확히 그들의 약점을 찔렀고 그들은 당연히 문용석에게 가서 직접 얘기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비록 문용석이 한 번 위기를 겪긴 했지만 이들 원로들 사이에서 그의 위상은 여전히 높았다.그런 문용석 앞에서 그의 딸을 회사에서 몰아내자고 말한다면 아마 문용석은 빗자루라도 들어 그들을 당장 내쫓을지 모른다.“정말 제가 아버지께 권한을 돌려드리길 원하신다면... 좋습니다.”그녀는 그들이 숨을 돌리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단, 그 이야기는 직접 아버지께 가서 하세요. 전 절대 하지 않을 거니까요.”주주들이 분노를 터뜨리기 전에 문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왔다.비서가 급히 뒤를 따르며 몹시 화를 냈다.“진짜 저 늙은 사람들 너무 뻔뻔한 거 아니에요? 조금 지분 있다고 회사 일은 하나도 안 하고 결정적인 순간에만 나타나서 참견이나 하고. 대표님이 아무 말 없이 놔둔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할 판인데 오히려 대표님한테 불만이라니... 정말 얼굴도 두껍지!”그러나 문지원은 오히려 차분했다.“원래 어떤 사람들은 그래. 한 번 쓴맛을 보지 않으면 자꾸만 기어오르려고 하는 법이지.”“그럼 대표님, 어떻게 하실 건가요?”“신경 안 써.”문지원은 비서를 향해 가볍게 웃었다.“설마 내 아버지가 누군지 잊은 건 아니겠죠?”비서는 그녀와 오래 지냈기에 둘
문지원은 한동안 멍하게 있다가 직원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고는 순간 너무 창피해서 땅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어젯밤 지석훈에게 그렇게 제멋대로 하게 두지 말아야 했다. 덕분에 아침부터 이렇게 난감한 상황에 부닥치고 말았으니 말이다.그나마 다행인 건 직원이 아직 어리고 남자 친구도 없어서 그 자국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모르는 것 같았다.문지원은 화장실에 들어가 한참이나 목에 난 흔적을 감추려고 화장을 수정한 후에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대표님, 30분 뒤에 정기 회의 있으십니다.”비서가 하품하며 서류를 건넸고 문지원은 서둘러 자료를 검토했다.“참, 화진 그룹 프로젝트는 누구한테 넘겼죠?”비서가 프로젝트 책임자의 이름을 말했다.문지원은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고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놓았다.회사는 아침부터 정신없이 바빴다.문지원은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고 30분쯤 지나 곧바로 회의실로 향했다.회의실에는 이미 몇몇 주주들이 앉아 있었고 비서는 문지원 뒤에서 회의 내용을 기록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때 한 나이 지긋한 주주가 갑자기 불편한 표정으로 문지원에게 날카롭게 말했다.“회의하자고 해놓고 대표님께서 이렇게 늦게 오셔서야 쓰겠습니까? 우리 같은 노인네들이 언제까지 여기 앉아서 기다려야 합니까. 정말 대단한 권위네요!”“요즘 젊은 사람들은 참 시간관념이라고는 하나도 없네요. 어디 옛날 대표님 같습니까.”문지원은 그의 말을 금세 알아들었다.자신이 아버지인 이전 대표만 못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하지만 이전 대표는 자기 아버지였으니 부녀 사이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유 이사님,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솔직하게 하세요.”문지원이 차분히 말했다.“이렇게 빙빙 돌려서 말씀하시니 듣는 저도 힘들고 여기 계신 분들도 저희 아버지와 함께 고생해 온 분들로 나이가 있으시니 그런 말을 잘 못 알아듣습니다.”“너!”상대는 그녀의 똑 부러지는 말에 말문이 막혀 버렸고 문지원
지석훈은 품 안에 문지원을 안고 부드럽게 말했다.“필요한 것도 받았으니 우리도 가자. 밥은 먹었어? 같이 가서 먹자.”문지원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아까 그 사람은 누구예요?”“얼마 전에 그 친구한테 약을 좀 부탁했어. 네가 생리통이 심하다고 했잖아.”지석훈은 별일 아니라는 듯 담담히 말했다.“그 친구의 교수님이 업계에서 유명한 분인데 최근에 생리통 치료 약을 개발하고 계시거든. 아직 연구 단계라 완벽한 건 아니지만 효과가 있을지도 몰라서 미리 좀 얻어 본 거야.”문지원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럼 이렇게 늦은 밤에 나온 이유가... 단지 그 약을 받기 위해서였어요?”지석훈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이해했다는 듯 웃었다.“그럼 너는 뭐라고 생각한 거야?”그의 표정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장난기 어린 눈빛이라 문지원은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고 창피해 죽을 것 같았다.질투심 가득한 표정으로 현장을 덮치듯 찾아왔는데 알고 보니 완전히 헛다리였다.“미안해. 괜히 걱정하게 만들어서.”지석훈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그녀의 손을 천천히 꼭 잡았다.“내가 너한테 믿음을 제대로 못 줘서 그런 거야. 그러니까 이젠 확실한 관계로 만들어 줄래?”문지원이 순간적으로 멍해졌다.오늘 밤 너무 많은 감정의 기복을 겪어서인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멍하게 있는 그녀를 보며 지석훈이 다정하게 웃으며 덧붙였다.“정확히 말하면 공식적으로 내 여자가 되어 달라는 거야.”문지원의 얼굴이 더 붉어졌지만 사실 이건 그녀가 오랫동안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결국 그녀는 지석훈의 다정한 눈빛에 이끌려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집에 돌아온 이후로 둘 다 문지원이 처음 왜 그렇게 갑자기 찾아왔는지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문지원은 너무 부끄러워서 말하지 않았고 지석훈 역시 그녀가 난처할까 봐 일부러 말을 꺼내지 않았다.이렇게 마무리된 것이 문지원에겐 충분히 좋은 결과였다.그런데도 그녀의 마음 한구석엔 여전히 조금의 서운함이 남았다.결국 지석훈과 강윤
문지원은 더 이상 이런 문제로 머리를 복잡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당장 어디로 찾아갈지도 모르는 마당에 지금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그래서 결국 병원으로 향했다.“지금 날 보러 온 이유가 그거야?”여울은 이쑤시개에 꽂은 사과 조각을 입에 물며 투덜거렸다.“언니 진짜 답답하다니까.”문지원은 사과를 깎던 손을 멈췄다.“지금이라도 최주하 다시 불러줄까?”“아니야, 미안. 내가 답답하지. 내가.”여울은 급히 말을 바꿨다.평소였다면 문지원이 이 상황을 놓치지 않고 여울을 놀렸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서로 입장 차이가 없으니 누가 누구를 탓할 상황이 아니었다.“그럼 언니 계속 모르는 척만 할 거야?”여울이 다시 묻자 문지원은 침묵했다.모르는 척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정확히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렇게 행동했던 것뿐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지석훈에게 직접 따지기도 애매했다.“당연히 직접 물어봐야지!”여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문지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물어보지 않으면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알아? 그리고 내가 볼 때 지석훈 씨는 양다리 걸칠 사람 같진 않아. 분명히 뭔가 오해가 있을 거야.”문지원이 조금 흔들리는 듯하자 여울이 급히 덧붙였다.“게다가 언니가 전에 말했잖아. 석훈 씨가 언니랑 강윤슬 문제에 직접 개입한 적 있다고. 그럼 이미 강윤슬과 언니 사이에서 언니를 택한 거 아냐? 그러니 뭐가 겁날 게 있어?”여울의 말이 문지원의 머릿속을 환하게 밝혀주었다.문지원은 들고 있던 사과칼을 내려놓고 바로 옆에 둔 가방을 집어 들더니 벌떡 일어나 병실 문을 향했다.“어디 가? 날 줄 사과 아직 채 못 깎았잖아!”여울이 외쳤지만 문지원은 이미 병실을 나섰고 그녀는 들뜬 기분으로 병원을 나와 지석훈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어느새 거리는 어두워졌고 도로 위엔 차들이 오가고 있었다.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가운데 잠시 후 통화가 연결되었다.지석훈의 목소리는 여전히
“뭘 보고 있었어?”문지원은 살짝 긴장해 하며 미소를 지었다.“그냥 회사 문서들을 봤어요.”“늦었는데 일 그만해.”지석훈은 전혀 의심하는 기색이 없었다.문지원은 안도하고 더 이상 몰래 훔쳐보는 것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워낙 예민한 성격의 지석훈이기에 만약 들키기라도 하면 너무 난감했을 것이다.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을 굳이 건드리고 싶어 한다.깊은 밤, 문지원은 지석훈이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테이블에 손을 올려 살금살금 이동했는데 끝내 그녀가 눈독을 들였던 휴대폰에 손이 닿았다.그런데 마침 그 찰나에 지석훈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고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왜 잠이 안 와? 설마 하고 싶어?”순간 문지원은 몸이 경직되었다.만약 지석훈이 지금 정신을 차렸다면 분명 그녀가 뭘 하려고 했는지 알아챘을 것인데 다행히 그건 아니어서 문지원은 간신히 안도하며 뻗었던 손을 거두고 가만히 있지 않는 지석훈의 손을 밀어내면서 거절 의사를 전했다.“안 돼요. 내일 회사에 나가봐야 해요.”지석훈은 곧바로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녀의 이마에 뽀뽀하고 말했다.“그럼 빨리 자. 안 그러면 나 더 참을 수 없어.”문지원은 서둘러 눈을 감았는데 마음속에 일이 있으니 쉽게 잠이 들 수 없었다.역시나 그녀는 결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다음 날 눈 밑에 다크서클이 생긴 채로 집을 나가게 되었다.다행히 나가기 전에 파운데이션으로 가려서 아무도 그녀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대표님께서 확인하셔야 하는 서류들입니다.”“알았어요. 거기 두세요.”문지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비서가 나가려고 할 때 문지원이 그녀를 부르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화진 그룹에서는 오늘도 아무 소식 없어요?”비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걸 본 문지원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나가보라고 했다.문지원은 본인이 너무 예민한 거라고 생각했다.강윤슬이 직접 지석훈과 끝났다고 했기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그런데
의사가 수술실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문지원이 잽싸게 다가가서 물었다.“제 친구의 상태는 지금 어떤가요?”의사가 마스크를 벗고 말했다.“환자는 간이 칼에 찔려서 내출혈이 있었습니다만 다행히 수술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서 생명의 위험은 없습니다. 이제 잘 휴식을 취하면서 회복하시면 됩니다.”문지원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옆에 있던 최주하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미간은 조금 전보다 펴진 것 같았다.여울은 마취가 덜 풀려 계속 혼수 상태였고 문지원은 병실에 들어가서 보다가 다시 나왔다.그때 최주하가 부하에게 지시하고 있었다.“합의는 없다고 하고 변호사를 찾아서 살인 미수로 신고해.”부하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살인 미수는 너무 무겁지 않을까요?”“그 정도가 뭐가 무거워?”최주하가 코웃음을 지었다.여울이를 다치게 했는데 살려 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라는 눈치였다.문지원이 병실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고 얘기하던 최주하가 고개를 돌렸는데 그의 얼굴에는 차가운 기운이 가시지 않았다.다만 두 사람은 친한 사이가 아니었기에 최주하는 먼저 말을 건네지 않았다.“최 대표님.”문지원이 앞으로 다가가며 최주하를 불렀다.부하를 보내고 최주하가 말했다.“무슨 일이죠?”“최 대표님 때문에 다친 건데 들어가서 보지 않을 거예요?”최주하의 태도에 문지원은 화를 억지로 참고 물었다.여울이와 최주하의 일은 우연히 조금 들었는데 문지원은 최주하가 사람도 아닌 것 같았다.게다가 지금의 최주하를 봤을 때 더욱더 못마땅했다.여울이가 최주하 때문에 다쳐서 꼼짝 못 하고 누워있는데 병실에 들어가려 하질 않으니 말이다.최주하가 이마를 찌푸린 채 병실 쪽을 보는 모습을 보며 문지원이 또 말했다.“최 대표님, 잘 생각하고 선택하세요. 오늘 들어가지 않을 거면 앞으로도 절대 들어가지 마시고 다시는 여울이를 만나지도 말아요.”최주하는 문지원이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다고 느꼈지만, 워낙 사람들에게 해명하지 않는 성격이라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문지원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