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세리는 반항할 기회가 없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종래로 이런 수모를 겪은 적이 없었기에 화가나 미칠 지경이었다.지유가 차갑게 말했다.“안 때리면? 앞으로 여진그룹에서 어떻게 지내야 할지도 모르는 사람인데.”“온 비서님. 왜 제 사람을 때리고 그러세요?”큰 소동이 일자 사람들이 달려와 구경했다.진예림은 그들이 여기 있다는 소식을 알고 달려왔다가 고세리가 맞는 장면읗 목격하고는 두 눈이 휘둥그레서 얼른 두 사람을 뜯어말렸다.진예림의 사람을 때렸다는 건 진예림을 때린 거나 마찬가지였다.고세리는 자기를 구해줄 사람이 나타나자 얼른 울먹거리며 이렇게 말했다.“예림 언니!”고세리는 얼굴을 부여잡고 진예림 곁으로 달려가더니 이렇게 말했다.“온 비서님이 저 때렸어요.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진예림은 고세리를 등 뒤로 빼더니 성질을 내기 시작했다.“온 비서님, 미쳤어요?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에요? 정말 여진그룹이 온 비서님 거라도 되나 봐요? 모든 사람이 온 비서님 말을 들어야 되는 것도 모자라 제는 사람까지 때리고. 저는 이제 안중에도 없다 이거죠?”지유는 아까 귀싸대기를 너무 심하게 갈겨 얼얼해진 손을 툭툭 털더니 이렇게 말했다.“진예림 씨 사람이라니 잘됐네요. 앞으로 부하 관리 철저히 하세요. 이런 헛소리나 퍼트리고 다니게 하지 말고. 진예림 씨가 해야 하는 일을 내가 직접 했을 뿐이에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내가 때릴 이유도 없겠죠?”“헛소리는 누가 헛소리를 했다고 그래요? 다 사살이고만. 당신이 저지른 일 회사에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진예림이 거만하게 말했다.“그런 수단으로 올라간 거 아니에요?”“아, 고세리 씨가 왜 헛소리하나 했더니 다 진예림 씨가 가르친 거군요?”어떤 상사가 있으면 어떤 부하가 있기 마련이다.진예림이 이렇게 헛소리를 늘어놓는 것도 지유의 명성에 금이 갔으면 해서였다.처음은 아니었지만 전에는 직접적으로 지유의 생활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기에 그냥 흘러 넘겼다. 하지
구경하러 온 다른 사람들은 지유를 불쌍하게 생각했다. 일개 비서가 어떻게 전무를 이기겠는가, 결국 가차 없이 나가떨어지고 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고 전무가 고세리를 데리고 뛰어왔다. 조카를 걱정하는 마음에 오자마자 바로 따져 묻기 시작했다.“누구야. 누가 우리 세리 괴롭힌 거야?”고세리가 탕비실에 있는 지유를 가리키며 말했다.“삼촌 저 여자예요. 저 여자가 나를 때렸어요. 삼촌, 어릴 적부터 부모님도 저를 때린 적이 없는데 저 여자가 지금 나를 때린 거예요.”진예림은 이 상황이 매우 흥미진진했다. 그녀는 얼른 불쌍한 척하면서 좋은 사람인 양 쇼를 하기 시작했다.“전무님, 죄송합니다. 제가 세리를 잘 챙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무실에서 제 입지가 작으니 말에 힘이 실리지 않습니다.”뜻인즉 직급은 지유와 같지만 항상 지유에게 눌린다는 뜻이었다. 진예림은 지유가 이 사무실에서 너무 우쭐댄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전무는 예전부터 지유의 안 좋은 소문을 익히 들어서 알았다. 하지만 이현의 옆에서 일하는 사람이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그의 머리 꼭대기로 기어오르려고 하니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온지유 씨, 비서 주제에 감히 우리 조카에게 손을 댄 거예요? 여 대표님 옆에서 일한다고 내가 아무것도 못 할 줄 알고? 내 말 한마디면 바로 여진그룹에서 쫓겨날 수도 있어요.”고 전무는 여진그룹을 다닌 시간이 지유보다 훨씬 길었다. 하지만 같은 부서가 아니었기에 회사에서 활동할 때를 빼고는 거의 마주칠 일이 없었다.지유도 원칙적인 사람이라 모든 뒷담화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못 되었다. 대부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넘겼지만 이번엔 그러기 싫었다. 지유의 한계를 건드린 것이다.고 전무가 아무리 발악해도 지유는 자기 입장을 지켰다.“고 전무님, 저도 고세리씨가 전무님 조카인 건 압니다. 아끼고 보호하는 게 마땅하지요. 하지만 그것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해야죠.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도 않으면서 내 얘기를 함부로 지껄이는데
이현이 밖에서 사람들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강력한 아우라와 차가운 기운에 사람들이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진예림은 어떻게 지유를 혼내줄지 상상까지 끝냈는데 공교롭게도 이현이 도착한 것이다.진예림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아무리 지유를 혼내주고 싶어도 이현이 나타난 순간 너무 두려워 차마 손이 내려가지 못했다.“여 대표님.”사무실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길을 비켜주었다.이현은 그쪽으로 걸어가며 혼란스러운 상황을 살피다 꼭꼭 묶여있는 지유를 발견하고는 미안을 찌푸린 채 차가운 얼굴로 주위를 빙 둘러봤다.“직접 마주한 게 아니라면 여진그룹이 제 회사가 아니라 고 전무님 회사인 줄 알겠어요.”고 전무는 안색이 살짝 변하더니 기염이 확 줄어서는 이렇게 말했다.“아, 아닙니다. 온지유 씨가 저희 조카에게 손을 댔거든요. 우리 집안에서 이 조카를 워낙에 아껴서요. 집에서도 한번 맞은 적이 없는 애가 이런 수모를 당했으니 삼촌이 돼서 힘이 되어주려고 그랬던 겁니다. 아니면 온지유 씨가 점점 더 무서운 게 없이 나올 것 같아서요. 지금도 사람을 때리고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제게 훈수를 두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대표님을 모시겠어요.”고 전무는 지유의 트집을 잡으며 이현에게 지유의 성품이 좋지 못하니 자르라고 유도하고 있었다.지유가 아무리 날고뛰어봤자 결국 비서 나부랭이인데 이현은 결국 자기 편을 들어줄 거라 고 전무는 생각했다.이현이 지유를 바라보며 물었다.“고 전무님이 한 말씀 인정해요?”“아니요, 인정할 수 없습니다. 고세리 씨는 사실이 아닌 유언비어를 터트리다 제게 들키고도 뻔뻔하게 저를 도발했습니다. 고세리 씨의 행위는 제게 상처를 주었고 제가 고세리 씨를 때린 건 저의 정당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대표님이 말씀해 보세요. 제가 잘못했나요? 저는 사과는 하지 않겠습니다.”“대표님 보십시오. 아직도 저렇게 정신을 못 차리고 거만하기 그지없습니다.”고 전무가 씩씩거리며 말했다.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고 전무를 쏘아봤다.“고 전무님
고 전무는 고세리가 말을 많이 했다가 무슨 사달이라도 날까 봐 그녀를 잡아당겼다. 까딱 잘못하면 회사 초기 멤버였던 그도 쫓겨날 위기였다. 고 전무는 사태를 파악하고 얼른 아부했다.“대표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자초지종을 잘 파악하지도 않고 섣불리 대처했으니 온 비서님께 실례가 많았습니다.”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이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말투는 여전히 엄숙했다.“고 전무님은 아셨지만 조카 되는 분도 알았을까요?”고 전무가 고세리를 앞으로 당겨오며 말했다.“온 비서님께 큰 실례를 끼쳤으니 얼른 사과해. 그리고 앞으로 더는 헛소리하지 말고.”고세리는 뺨을 맞은 것도 억울한데 사과까지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렇게 말했다.“삼촌, 내가 왜 사과해야 하는데요? 싫어요!”고세리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떼를 쓰며 울기 시작했다.고 전무는 이현을 힐끔 살폈다. 이현은 이미 인내심을 잃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여진그룹에서 이현이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피를 보고 싶지 않으면 이쯤에서 그만하는 게 상책이었다.고 전무는 냉큼 고세리의 뺨을 후려갈겼다.“제멋대로 굴지 마. 얼른 사과해. 아니면 여기 계속 무릎 꿇고 있든지!”고 전무는 한 번도 고세리를 때린 적이 없었다. 늘 이쁨을 받고 자란 고세리는 처음 삼촌이 이렇게 불같이 화내는 모습을 봤다. 깜짝 놀란 고세리가 얼굴을 부여잡고 지유를 힐끔 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온, 온 비서님, 제가 눈에 뵈는 게 없이 말실수를 했어요. 죄송합니다.”진예림은 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고 전무도 지유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이현은 지유를 지켜주기 위해 고 전무의 체면도 마다했다.이현이 지유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지유에게 눈치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걸 진예림은 깨닫게 되었다.지유도 이현이 무조건적으로 자기를 도울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비록 이현이 친분보다는 도리를 따져야 한다고 했지만 이현도 무의식적으로 그녀 편에 서 있었
지유의 말은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게 딱 맞았다.이대로 놔두면 앞으로 이혼하고 나서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다.하지만 이현의 눈엔 지유가 너무 거리를 둔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게 싫은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두 사람의 관계를 아는 게 싫은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이현의 표정이 이내 어두워지더니 거리감이 느껴졌다.“그렇게 무서워?”지유는 어두워진 이현의 표정을 눈치채고는 말을 돌려서 설명했다.“나는 이현 씨 이미지가 안 좋아질까 봐 그러는 거죠. 이혼하고 나서도 나랑 엮이는 게 싫을 거 아니에요. 그리고 내 이미지가 좋은 것도 아닌데 엮어서 좋을 게 없죠.”이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비아냥거렸다.“요만한 일도 이렇게 선을 긋는데 이미지가 안 좋을 게 뭐가 있다고?”비아냥거리는 이현의 말투에 지유는 멈칫했다.말을 잘못했나? 서로를 위한 일인데?두 사람의 사이를 추측하면서 지유가 이현의 애인이라는 말까지 나오는데 이현은 이런 말을 역겨워하고 싫어할 것이다.지유가 이렇게 귀띔하는 것도 다 이현의 이미지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혼하고 나서도 케케묵은 찌라시들이 다시 나오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그를 위해 서로 거리를 두면 좋을 것 같다고 당부했는데 이현은 오히려 지유가 너무 선을 긋는다고 생각했다.지유는 이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입을 앙다물었다.“나는 이미지가 이미 이 모양 이 꼴이니 신경 안 쓰는데 이현 씨는 신경 써야 하잖아요. 나 때문에 이현 씨 인생을 영향 줘서는 안 되죠.”이현은 지유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화가 났고 되레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나를 지극히 생각해 줘서 고마워. 몇 년간 너도 수고했고.”이 말에 지유는 잠깐 어리둥절했지만 그래도 그 말에 맞춰 이렇게 대답했다.“별말씀을. 이현 씨와 여진그룹을 위한 일인데 내 의무기도 하죠.”고분고분하고 책임감 넘치는 모습에 이현은 입을 앙다물었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넥타이를 당기더니 이렇게 쏘아붙였다.“온 비서님, 참 마음이 깊
하지만 승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번이나 착용했다. 만약 기자들에게 사진이라도 찍힌다면 무조건 이를 비웃으며 추측성 기사를 쇄도할 것이다. 그래도 승아는 흔들림이 없었다.이번 일로 승아는 살이 많이 빠져 가냘파 보였지만 스포트라이트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친화력 있는 미소를 지었다.기자들은 이번에 죽을 고비를 넘긴 일에 대해 취재했다. 승아는 기자들 앞에서 불쌍한 척하며 자기가 겪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도 적극적인 이미지를 심는 걸 빼먹지 않았고 절대 다음은 없을 거라고 약속했다.댓글은 모두 승아를 걱정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동감하는 글도 보였다.기자들은 어떤 질문을 해야 화제성이 높은지 알고 있었기에 바로 드레스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승아가 대범하게 대답했다.“다시 카메라를 마주하면서 새롭게 태어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리고 이 드레스는 제게 매우 소중한 드레스예요. 이 드레스만 입으면 살아있다는 걸 느끼죠. 모든 고난을 이겨낼 것 같은 힘도 생기고요. 이제는 아름다운 것들을 소중히 여기면서 살고 싶어요.”기자가 또 물었다.“선물 받은 드레스로 보이는데 혹시 누가 선물한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혹시 약혼자인가요?”승아는 달콤하게 웃으며 누구라고 콕 집어서 얘기하지는 않았다.“제 삶에 가장 중요한 사람이에요. 살아갈 용기과 동력을 준 사람이죠.”이 말을 뒤로 승아는 매니저의 부축을 받으며 내려갔다.아직 궁금증이 풀리지 않은 기자가 쫓아가며 물었지만 승아는 이미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하지만 이건 중요하지 않았다. 기자와 네티즌들도 놀고먹는 사람들은 아니었다.그 드레스의 의미가 남다르다는 걸 알고 그 드레스를 선물한 사람이 누군지 토론하고 있었다.승아에게 이렇게 큰 영향을 끼칠만한 남자는 과연 누구일까?얼마 지나지 않아 네티즌은 그 사람이 이현임을 알아냈고 이현은 바로 검색어 순위에 올랐다.이현은 그렇게 승아의 약혼자로 굳혀졌다.이현과 승아 중 그 누구도 얘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네티즌과 팬들
씩씩거리는 윤정의 모습에 지유는 오히려 웃음이 터졌다.“윤정 씨 말만 들어보면 대표님이 저랑 만나는 줄 알겠어요.”윤정은 착각인지 뭔지 몰라도 두 사람의 사이가 약간 묘하다고 생각했다.“대표님 확실히 온 비서님을 많이 챙기는 것 같아요.”윤정은 잠깐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했다.“두 분은 못 느끼실 수 있지만 옆에 있는 사람은 달라요. 노승아 씨가 갑자기 끼어들어서 두 사람 사이 망치게 둘 수는 없어요.”윤정은 지유가 이현과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아이고, 윤정 씨, 헛다리 짚지 마요.”지유가 윤정의 머리를 톡 건드리더니 이렇게 말했다.“저랑 대표님은 아무 사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 하는 헛소리 새겨듣지 말아요. 대표님이 누굴 만나든 저랑 아무 상관 없어요. 이런 말은 앞으로도 하지 마요. 다른 사람이 들으면 또 소문이 이상해지니까.”윤정이 이마를 매만지며 말했다.“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말 안 하죠. 근데 다른 사람이 알지도 못하면서 헛소리하는 게 싫어서 그러는 거예요.”아무리 회사에서 지유가 부정당한 방법으로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는 소문이 파다해도 윤정은 믿지 않았다.윤정이 아는 지유는 정직하고 부드럽고 부하를 잘 챙기는 사람이지 그런 비열한 방법을 쓸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윤정은 지금 퍼지고 있는 지유에 관한 소문이 뒷담화를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질투로 인해 헐뜯는 소리라고 생각했다.지유는 그 뉴스가 진짜여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도 티를 내서는 안 된다.지유는 요즘 이현이 자기와 점점 거리를 두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업무든 생활에서든 서로 간의 대화가 줄어들었고 가끔은 선택적으로 그녀가 한 말을 무시하기도 했다. 같이 퇴근하는 경우도 줄어들었고 요즘 계속 서재에서만 잠을 자면서 침실에 들어오지도 않았다.아마 이현도 뉴스를 보고 속으로 승아에게 명분을 줘야 한다는 생각에 일부러 그녀와 거리를 두려고 하는 걸 수도 있다.지유는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굉장히 실망했다.…“이런 염치없는 년을 봤나
“아니야.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겠어. 아직도 나를 몰라? 내가 어떻게 너를 탓해?”지유가 주먹을 불끈 쥐더니 말했다.“이 결혼은 처음부터 계약 결혼이었어.”“뭐?”지희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너 한 번도 나한테 얘기한 적 없잖아. 여이현이 왜 너랑 계약 결혼을 해? 뭔가 이상한데?”지유가 말했다.“내가 전에 너한테 그랬잖아. 이현 씨 할아버지가 나를 좋아해서 이현 씨와 결혼하기를 바랐다고. 나도 그때 핍박에 의해 이현 씨와 결혼한 거야.”지희도 그때 이 결혼을 의아하게 생각했다.지유가 이현을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와 결혼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지금 보니 그렇게 갑자기 결혼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잠깐만, 나 진정 좀 하자.”지희는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너와 여이현은 계약 결혼인데 여이현 할아버지가 결정한 거다? 여이현은 너를 좋아하지 않지만 할아버지 때문에 너랑 결혼한 거고…”“근데 이것도 이상한데. 여이현이 집에서 뭐라고 한다고 들을 사람이야? 그리고 그땐 잊지 못하는 첫사랑도 있었잖아. 왜 순순히 너랑 결혼한 거지?”지희는 턱을 매만지며 이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나도 그 생각 했었어. 근데 이 계약 결혼의 존속 시간은 3년이야. 3년이 지나면 우린 이혼할 거고.”“그럼 그 기한이 다 되어가네.”이를 들은 지희는 더 마음이 아팠다.“그래도 아직은 여이현의 법적 와이프니까 이 정도인데 이혼이라도 하면 노승아가 얼마나 더 기고만장하게 나올까? 이혼해도 넌 여이현 수행비서로 있을 텐데 노승아가 여이현과 결혼해서 여씨 집안 사모님이라도 되면 널 얼마나 괴롭힐 거야. 안돼, 절대 안 돼.”지희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지유가 웃음을 터트렸다.“내가 당하고만 있을 것 같아? 그리고 왜 이혼해도 내가 이현 씨 옆에 있을 거라고 생각해?”“결정한 거야? 이혼하면 여이현 곁을 떠나게?”지희가 물었다.지유는 차를 한 모금 홀짝이더니 말했다.“네가 그랬잖아. 사람은
여이현은 말이 없었다.침묵은 곧 긍정이다. 온지유는 화가 나서 바로 여이현의 가슴을 향해 주먹을 세게 내리쳤다.“다시 한번 그딴 생각 하기만 해봐, 내가 직접 죽여버릴 테니까!”온지유는 진심으로 화가 났다. 5년이다. 그 긴 시간을 고통 속에서 아이를 생각하며 버텨왔다.여이현은 살아 있으면서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처음에는 정신이 돌아오지 않아 어쩔 수 없다 쳐도, 그럼 그 뒤에는?여이현은 한마디도 뻥긋하지 않았다. 그걸 떠올릴 때마다 온지유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이 사람은 또 같은 짓을 반복하려 하는 게 아닌가!신무열은 덤덤하게 여이현을 한번 흘겨보았다.“맞아도 싸죠. 저의 하나 뿐인 동생이 그 몇 년간 어떻게 지내왔는데 또 그 고통을 다시 겪게 하려니 말이에요. 이현 씨, 남자라면 정정당당하게 이 모든 걸 해결하고 돌아오세요.”“잘 알고 있습니다.”여이현은 자신이 완벽히 처리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온지유와 약속한 것들을 꼭 지켜야만 했다.신무열은 시선을 거뒀다. 할 말은 이미 다 했다. 남은 건 여이현 본인이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다.그렇게 여이현과 온지유는 함께 S국으로 떠났다.브람은 여이현이 홀로 돌아올 줄 알고 있었다. 온지유가 함께 돌아온 것을 본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심지어 온지유측에는 사람이 여럿 딸려있었고 화국의 군대도 동행했다.여러세력의 동원하에 내란은 작은 파도에 불과했고, 신속히 가라앉았다.가장 주요한 병력은 화국의 군대였다.여이현은 직접적으로 태도를 밝혔다.“다음에 또 같은 사건이 발생하면 될수록 내부에서 해결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화국인이고 타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닙니다.”여이현은 브람이 자신의 친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된 뒤에도 별 감흥이 없었다. 온지유처럼 받아들이지 못할 일도 아니라고 여겼다. 여이현은 어릴 적부터 화국에서 자랐고 몸에 밴 습관도 모두 화국의 것이었다. S국의 사람들에게 있어 여이현은 밖에서 온 타국인이었다.그런 신분으로 어떻게 이 나라를 통치
그 속에는 나라를 향한 것도, 브람을 향한 것도 있었다.브람이 그의 친아버지가 아니더라도 목숨을 구해 준 은혜는 갚아야 했다.온지유는 이 상황에 대한 억울함과 세상의 불공평함에 화가 났다. 거기다 여이현의 말을 들으니 더더욱 속이 무너져 내렸다.온지유는 여이현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이현 씨가 짊어진 책임이 크다는 걸 알아. 그러니까 이번에야말로 당신 곁에 있고 싶어. 제발 나도 데려가 줘.”“절대 발목 잡는 일이 없도록 노력할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기자로서 보도를 낼게. 우리는 부부고 아이도 있잖아.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함께 해결해 나가자.”여이현은 온지유의 각오를 느꼈다. 그는 과거 자신이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그리고 눈앞의 온지유의 얼굴도.여이현은 결국 마음이 녹아내렸다.그는 온지유를 끌어안고 가볍게 키스했다.“그래, 데려갈게. 내 곁에 있어 줘. 무슨 일이 일어나든 꼭 지켜줄 테니까.”자신의 목숨을 내주더라도 온지유만은 지키고 말 테다.S국으로 향하기로 결정했으니 신무열에게도 한마디 보고할 필요가 있었다.신무열은 온지유가 S국으로 가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이현 씨는 처리할 업무가 있어서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너는 따라갈 필요 없잖아. 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별이는 어쩌려고.”여이현은 휴가를 즐기러 외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가는 것이다. 지금의 S국은 바뀌기 전의 Y국과 같은 상황이었다. Y국에는 신무열이 온지유 손목의 푸른 구슬을 알아봐 도와줄 수 있었다 하지만 S국에는 도와줄 사람은 누구도 없다.여이현의 친아버지인 브람조차 온지유를 좋게 보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할까. 만일 돌아가서 그들이 쳐둔 덫에 걸리기라도 하면?정말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여이현 혼자서라면 탈출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온지유를 데려가는 이상 그에게는 짐이 늘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다.“별이는 아버지가 봐주고 계시잖아요. 난... 이기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난 무슨 일이 있든 이현
브람이 상황을 정리할 사람을 찾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여이현은 이 모든 것이 음모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예상치 못하게 강서현이 다시 나타나다니.이때 강서현은 급히 여이현에게 말했다.“이현 씨, 지금 S국 상황이 정말 좋지 않아요. 대통령님이 당신을 데려오라고 하셨어요. 이현 씨가 아내와 함께 있고 싶다는 건 알지만, 그때 대통령님 덕분에 당신이 지금 이곳에서 무사히 있는 거예요.”강서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여이현은 의식을 회복한 뒤 줄곧 S국의 일을 돕고 있었다.그는 스스로 올해까지만 자신에게 시간을 주기로 결심했지만 온지유가 자신을 알아보게 되면서 일들이 꼬이기 시작했다.“잠시만 기다려줘.”여이현은 결국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잠시 기다리라고 말했고, 강서현은 조용히 기다렸다.온지유와 여이현은 누구보다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였다. 그가 S국으로 돌아가려면 온지유와 작별 인사를 나눠야 했다.대통령이 여이현을 데려오라고 명령했지만 강제적으로 데려오라는 지시는 아니었기에 그는 잠시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여이현은 온지유에게 다가갔다.그들의 대화를 들은 온지유는 단호하게 말했다.“S국으로 가야 한다면 나도 같이 갈래. 난 더는 기다리고 싶지 않아.”그녀는 이미 5년을 고통 속에 혼자 버텨왔고 다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여이현은 그녀의 마음을 알았지만 S국의 상황이 심각해 온지유를 데려가는 것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지유야. 나에게도 우리 아들이 소중하지만 너와 함께 사랑스러운 딸도 낳고 싶어. 이번에 다녀오더라도 안전하게 돌아올 테니, 여기서 나를 기다려줘. 만약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아들을 잘 키워줘.”만약 브람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미 Y국에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부득이하게 목숨을 바쳐야 한다면 빚을 갚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온지유에게 이 모든 것을 감당하게 하는 건 너무 가혹했다.그는 한때 무슨 일이 있어도 온지유와 함께할 것을 맹세했으며 어떤 일이 있어도 가족에게
강서현의 눈빛은 마치 “네가 뭐가 잘났다고 그렇게 우쭐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온지유는 전혀 우쭐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저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말했다.“강서현, 네가 모를 수도 있지만, 나보다 먼저 여이현 곁에 있었던 여자가 한 명 더 있어. 노승아라고, 나보다 먼저 나타났어.”노승아는 여이현에게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결국 여이현의 곁에 남은 사람은 온지유였다. 때로는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걸 강서현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강서현은 노승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온지유의 말을 듣고 자신과 여이현의 관계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처음 여이현을 봤을 때 그의 매력적인 외모에 이끌렸고, 그의 일 처리 능력과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도 반했다.항상 원하는 건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그녀에게 여이현 앞에서의 좌절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을 얻고 싶다는 승부욕이 그녀를 계속 부추겼다.잠시 침묵하던 강서현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온지유, 미안해.”마침내 그녀도 자신의 집착이 무의미함을 깨달았다. 온지유는 강서현이 더 이상 집착하지 않도록 일부러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강서현이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게 되어 온지유로서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사과는 받아줄게. 그렇지만 네가 내 아이섀도에 약을 넣은 일은 넘어갈 수 없어. 치료비는 네가 부담해. 그래야 두 번 다시 우리를 방해하지 않겠지.”강서현이 결혼식을 망친 데 이어 온지유에게 알레르기까지 일으켰으니, 당연히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앞으로 강서현이 여이현과 자신의 삶에 더는 개입하지 않는다면 온지유도 더 이상 벌을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알았어.”강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고, 온지유는 여이현에게 그녀를 풀어주라고 말했다.하지만 여이현은 온지유의 말을 바로 따르지 않았다. 온지유를 해친 사람을 가볍게 넘길 수는 없었다. 그는 강서현에게 온지유가 겪은 고통을 그대로 돌려주었다.눈이 부어오르는 알레르기 반응으로 괴로워하는 강서현
조사를 하다 보니 결국 강서현의 소행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강서현은 결혼식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어도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짓이 밝혀진 이상, 여이현은 강서현을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강서현은 온몸이 꽁꽁 묶인 채 여이현과 온지유 앞에 끌려왔다. 강서현은 병상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는 온지유를 보며 이를 갈듯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쏘아보았다.“나와 여이현이 여기까지 왔는데도 아직 포기하지 못했구나. 그래도 네가 여이현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건 알겠어. 아니면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겠지.”강서현은 여이현에게 아이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았고 결혼식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져도 마음을 접지 않았다. 이 정도면 진심이 아니면 뭐겠는가. 온지유는 여이현을 째려보며 말했다.여이현은 온지유가 강서현과 단둘이 있는 걸 불안해했다. 이때 온지유는 웃으며 말했다.“이미 온몸이 묶여 있는 상태고 당신과 부하들도 있는데, 쟤가 감히 날 어떻게 하겠어?”온지유는 여이현이 걱정했던 부분을 그대로 짚어서 말했다. 둘은 미리 얘기한 것도 아닌데, 단지 눈빛만으로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이는 강서현이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온지유를 보며 강서현은 부러움과 질투, 그리고 깊은 원망을 느꼈다.만약 온지유와 여이현이 재회하지 않았더라면, 여이현은 S국에 남아 대통령 자리에 오르고 자신과 함께 있었을 것이다.아이 문제도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여이현과 함께라면 자신의 아이도 생길 것이고 대통령이 된 후엔 별이도 그녀의 곁에서 자랄 수 있을 테니까.하지만 모든 계획을 망친 것은 다름 아닌 온지유였다!온지유가 여이현을 이렇게까지 사로잡은 힘이 무엇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여이현은 그녀만 바라보고, 주변 사람들도 온지유를 사랑하고 보호해 주었다는 사실이 강서현에게는 더욱 억울하고 분통 터질 일이었다.“나와 여이현이 여기까지 왔는데도 넌 왜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내가 죽으면 네게 무
그러나 신무열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머뭇거리며 말했다.“지금 말하기엔 너무 이른 것 같아. 막상 그때가 되면 네가 후회할지도 몰라.”“나라가 없으면 가정도 없는 법이잖아요. 당신을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고, 당신의 책임감과 모든 걸 잘 알고 있어요. 무열 씨의 모든 걸 조건 없이 받아들일 수 있어요. 만약 제가 거짓말을 한다면 벌을 받을 거예요!”김혜연은 진심을 보여주기 위해 손을 들며 맹세하려고 했다.신무열은 그녀의 손을 잡고 멈추게 하며 말했다.“그런 맹세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네 마음 믿어. 넌 정말 좋은 사람이고 나한테도 소중한 사람이야. 하지만 난 평범한 사람이 아니야. 내 인생은 Y족을 위해 존재하는 거야.”“그렇다고 해서 평생 Y족만 위해 살 순 없잖아요. 법로도 가정을 이루고 있는데, 당신도 혼자 외롭게 지낼 필요는 없어요. 정말이에요, 저...”김혜연은 신무열을 꼭 껴안으며 주변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엔 오직 신무열뿐이었다.“알겠어. 조금 더 생각해 볼게.”“네.”신무열은 주저하고 있었다. 평소엔 중요한 일에 망설임 없이 나서지만, 감정 문제에선 오히려 더 망설였다. 그가 걱정하는 건 김혜연이 상처받는 것이었다.김혜연은 기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당신이 어떤 결정을 하든, 저는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절대 떠나지 않을 거예요.”신무열이 필요로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돕고 싶었다. 그가 그녀 곁을 떠나더라도 언제든 그를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김혜연의 마음속엔 오직 신무열과의 평온한 삶뿐이었다.세 시간 후 두 사람은 돌아왔다. 오늘 일은 이미 뉴스에 보도된 상태였다.온지유는 두 사람을 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오빠, 새언니! 오늘 두 분이 같이 싸우는 모습 정말 멋졌어요!”김혜연은 그 호칭에 살짝 당황하며 말했다.“Y족에서 그런 상황을 많이 겪다 보니, 우리도 기본적인 자기방어는 할 수 있어야죠. 그리고... 저와 무열 씨는 아직 결혼한 사이가 아니니까
김혜연과 신무열은 순식간에 불량배들을 쓰러뜨리고 경찰에 신고까지 했다.주변에 사람들이 많자 김혜연은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이 사람, 얼마 전 제가 경찰에 넘긴 사람인데 한 시간도 안 돼 풀려나서 이렇게 사람들까지 모아 우리를 협박하네요. 혹시 조직폭력배 세력인가요?”이 말이 나오자마자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이 상황에 경찰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다.“이 사람을 잡아 비난과 교육을 했고 심지어 반성문까지 받았는데도 다시 나와 이런 소란을 일으키네요.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불법 세력은 반드시 뿌리 뽑아 시민들의 안전을 지키겠습니다!”신무열은 이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책임자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확실히 처리할 것을 요청했다.그러자 김혜연은 살짝 미안해하며 말했다.“저는 그저 그 소녀가 안쓰러워 보여서 도왔을 뿐인데, 일이 이렇게 번져버렸네요. 무열 씨가 한 말 기억할게요. 다음에 이런 일이 또 생긴다면...”“그런 말 하지 마. 네가 안 나섰어도 내가 나섰을 거야.”신무열은 김혜연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사실 그들은 같은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었고 상황이 닥치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성격이었다.“하지만 앞으로는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할게요.”김혜연은 다시 한번 약속했다.신무열은 김혜연의 이마를 톡 치며 말했다.“알았으니까 그만하고 더 볼 거 없으면 지유를 찾으러 가자.”“볼 게 있죠. 당연히 있죠!”김혜연은 신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눈이 반짝였다.그러다 김혜연은 근처에 유명한 사진작가가 있다는 말에 가슴이 설렜다.신무열은 그녀의 마음을 알아채고 말했다.“너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김혜연은 순간 당황하며 말했다.“다 들켰네요. 게다가 이미 커플 반지도 샀는데 이것도 괜찮지 않아요?”그녀는 신무열의 팔을 흔들며 부탁했다.신무열은 이런 부탁을 받아본 게 온지유가 어릴 때 투정 부릴 때 이후로 처음이라 당황했다. 김혜연이 워낙 그보다 어리다 보니 신무열은 차마 거절하기
이런저런 생각만으로도 김혜연은 기분이 좋아졌다.그런 그녀를 보며 신무열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무슨 생각하는 거야? 혼자서 그렇게 웃으면서.”신무열의 목소리에 김혜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이런 일들을 신무열에게 들키면 안 된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얼른 가요.”김혜연은 얼버무리며 걸음을 재촉했다....한편, 온지유는 김혜연과 신무열이 길을 잃을 리 없다고 생각하고 그들에게도 각자의 시간을 주고 싶어 여이현과 천천히 산책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그러다 멀리서 영화 촬영을 하고 있는 걸 본 온지유는 문득 지선율이 떠올랐다.지선율은 나중에 유명 감독이 되었고, 장다희는 인기 여배우가 되었다. 한때는 자주 연락하던 친구들이지만 지금은 각자 바빠 거의 연락하지 못했다.신혼여행이 끝나면 해야 할 일들이 하나둘 떠올랐다.이때 여이현이 조용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연예계에 관심 있으면 내가...”온지유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나이도 서른이 넘었는데 무슨 연예계야. 괜히 시간 낭비지.”“꼭 배우가 될 필요는 없잖아. 기획자나 감독, 아니면 작가도 될 수 있지. 하고 싶은 거 있어?”여이현의 말은 온지유에 대한 아낌없는 배려였다. 그녀가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그러자 온지유는 말했다.“이제 다시 생각해 볼게.”여이현이 고개를 끄덕이었다. 온지유는 여이현이 가리킨 쪽을 보니 신무열과 김혜연이 나란히 팔짱을 끼고 얘기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두 사람 이제 잘 돼 가는 것 같네. 신무열은 자꾸 아닌 척하지만.”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좋은 일이 곧 생길 것 같아.”여이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좋은 일이지.”신무열은 온지유보다 몇 살 더 많았다. 다른 사람들은 신무열 나이쯤 되면 이미 아이도 몇 명씩 있었지만 그는 이제야 겨우 여자 친구가 생긴 셈이었다.온지유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그런데 우리 정말 같이 다닐 거야?”여이현은 신무열과 김혜연에게도 각자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과거 Y국에 전쟁이 일어날 때 김혜연은 신무열을 따라다니며 최고 수준의 격투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불량배는 김혜연을 떼어내려고 애썼지만 ㄴ오히려 그녀에게 제압당해 발밑에 깔리고 말았다.“돈 안 내놓을래? 지금 당장 경찰서로 끌고 갈 거야!”그 말에 불량배는 겁에 질려 서둘러 빌었다.“돈 돌려줄게요! 두 배로 줄 테니까, 제발 경찰서에만은 데려가지 말아 주세요!”김혜연은 냉정하게 말했다.“돈부터 돌려주고 얘기해.”불량배는 어쩔 수 없이 소녀에게서 빼앗은 돈을 돌려주었고, 김혜연은 소녀의 몫만 가져와 소녀에게 돌려준 후, 한 손으로 불량배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 경찰에 신고했다.‘잡초를 뿌리째 뽑지 않으면 다시 자라듯이... 참 운도 없어. 나를 만나다니.’경찰이 도착해 불량배를 데려가고 나자, 김혜연은 소녀에게 돈을 더 건네며 말했다.“언니가 도울 수 있는 게 이것뿐이야. 이 돈으로 잘 지내길 바랄게.”어린 나이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 거리로 나온 소녀를 보니 김혜연은 전쟁 속에서 힘들어하던 아이들이 떠올랐다.‘전쟁이 없었더라면, 나라가 평화로웠다면 얼마나 좋았을까.’그랬다면 신무열도 법로도 가정을 희생하지 않고 평범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감사합니다, 언니.”소녀는 김혜연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소녀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김혜연은 소녀가 전화하며 Y국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같은 나라 사람이었구나!’같은 동포라는 생각에 김혜연은 더 정이 갔다. 하지만 소녀는 이미 저 멀리 가버렸다.이때 신무열이 다가와 말했다.“이곳에 사는 사람도 아닌데 다음에는 이런 일에 휘말려 들지 마.”김혜연은 격투 실력이 뛰어났지만 이곳은 타지이고 그녀는 혼자였다. 만약 불량배들이 무리를 지어 있었다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김혜연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그때는 그런 거 생각할 여유가 없었어요. 그리고 무열 씨도 제 옆에 있었잖아요.”그녀는 그저 소녀를 돕고 싶었을 뿐이었다. 신무열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