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 다들 몰라도 너무 모른다. 온 비서님이 신분 상승을 위해서 일부러 꼬신거라던데요? 대표님 비서까지는 올라갔지만 대표님 와이프 자리는 넘볼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봤겠죠. 예쁜 얼굴을 무기 삼아 이 대표님 애인이라도 해볼까 했는데 그것도 안 될 것 같으니까 이 대표님이 성폭행했다고 적반하장으로 나오기까지 하고. 이 대표님 지금 너무 불쌍하더라고요. 감옥살이 해야 된다던데?”“평소에 온 비서님 얼마나 서글서글해요. 근데 뒤에서는 이렇게 약삭빠른 줄 몰랐네요. 그러니까 대표님 옆에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거죠. 얼마나 더러운 수단을 썼을까요?”“흥, 온 비서님 대단한 거 이제 알았어요? 전 진작에 알아봤는데. 막말해서 우리 회사에 온 비서님보다 실력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 온 비서님이 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그게 다 얼굴 믿고 저러는 거 아니겠어요? 그 여우 같은 얼굴로 대표님 꼬드긴 거예요. 그러다 제대로 걸린 거죠. 똑같은 방법으로 이 대표님 꼬시려다가 성폭행이나 당하고…”쾅 하는 소리와 함께 지유가 화장실 문을 걷어차고 나와 그들 뒤에 자리하고 섰다.화장을 고치던 여사원들은 지유를 보고 너무 놀라 립스틱까지 삐뚤게 그렸다.“온, 온 비서님…”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만 있던 몇몇 여사원이 공손하게 지유를 불렀다. 하지만 유언비어를 퍼트린 그 사원은 머리를 빳빳이 든 채 지유를 힐끔 쳐다보고는 불만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진예림의 부하 고세리였다.집안 관계로 여진그룹에 들어온 고세리는 갓 사회에 나온 애송이였다.바닥부터 천천히 위로 올라온 진예림은 당연히 뭐가 더 수지가 맞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고세리에게 꽤 잘해줬다.지유의 얼굴에는 별로 표정이 없었다. 고세리를 욕하지도 않고 그저 옆에서 손만 열심히 씻었다.그들은 지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불안했다. 하지만 유독 고세리만 지유가 겁먹었다고 생각하고는 앞으로 팔짱을 낀 채 우쭐거렸다.“어떤 사람은 참 낯짝이 두껍다니까요. 그러게 소문이 나는
고세리는 반항할 기회가 없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종래로 이런 수모를 겪은 적이 없었기에 화가나 미칠 지경이었다.지유가 차갑게 말했다.“안 때리면? 앞으로 여진그룹에서 어떻게 지내야 할지도 모르는 사람인데.”“온 비서님. 왜 제 사람을 때리고 그러세요?”큰 소동이 일자 사람들이 달려와 구경했다.진예림은 그들이 여기 있다는 소식을 알고 달려왔다가 고세리가 맞는 장면읗 목격하고는 두 눈이 휘둥그레서 얼른 두 사람을 뜯어말렸다.진예림의 사람을 때렸다는 건 진예림을 때린 거나 마찬가지였다.고세리는 자기를 구해줄 사람이 나타나자 얼른 울먹거리며 이렇게 말했다.“예림 언니!”고세리는 얼굴을 부여잡고 진예림 곁으로 달려가더니 이렇게 말했다.“온 비서님이 저 때렸어요.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진예림은 고세리를 등 뒤로 빼더니 성질을 내기 시작했다.“온 비서님, 미쳤어요?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에요? 정말 여진그룹이 온 비서님 거라도 되나 봐요? 모든 사람이 온 비서님 말을 들어야 되는 것도 모자라 제는 사람까지 때리고. 저는 이제 안중에도 없다 이거죠?”지유는 아까 귀싸대기를 너무 심하게 갈겨 얼얼해진 손을 툭툭 털더니 이렇게 말했다.“진예림 씨 사람이라니 잘됐네요. 앞으로 부하 관리 철저히 하세요. 이런 헛소리나 퍼트리고 다니게 하지 말고. 진예림 씨가 해야 하는 일을 내가 직접 했을 뿐이에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내가 때릴 이유도 없겠죠?”“헛소리는 누가 헛소리를 했다고 그래요? 다 사살이고만. 당신이 저지른 일 회사에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진예림이 거만하게 말했다.“그런 수단으로 올라간 거 아니에요?”“아, 고세리 씨가 왜 헛소리하나 했더니 다 진예림 씨가 가르친 거군요?”어떤 상사가 있으면 어떤 부하가 있기 마련이다.진예림이 이렇게 헛소리를 늘어놓는 것도 지유의 명성에 금이 갔으면 해서였다.처음은 아니었지만 전에는 직접적으로 지유의 생활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기에 그냥 흘러 넘겼다. 하지
구경하러 온 다른 사람들은 지유를 불쌍하게 생각했다. 일개 비서가 어떻게 전무를 이기겠는가, 결국 가차 없이 나가떨어지고 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고 전무가 고세리를 데리고 뛰어왔다. 조카를 걱정하는 마음에 오자마자 바로 따져 묻기 시작했다.“누구야. 누가 우리 세리 괴롭힌 거야?”고세리가 탕비실에 있는 지유를 가리키며 말했다.“삼촌 저 여자예요. 저 여자가 나를 때렸어요. 삼촌, 어릴 적부터 부모님도 저를 때린 적이 없는데 저 여자가 지금 나를 때린 거예요.”진예림은 이 상황이 매우 흥미진진했다. 그녀는 얼른 불쌍한 척하면서 좋은 사람인 양 쇼를 하기 시작했다.“전무님, 죄송합니다. 제가 세리를 잘 챙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무실에서 제 입지가 작으니 말에 힘이 실리지 않습니다.”뜻인즉 직급은 지유와 같지만 항상 지유에게 눌린다는 뜻이었다. 진예림은 지유가 이 사무실에서 너무 우쭐댄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전무는 예전부터 지유의 안 좋은 소문을 익히 들어서 알았다. 하지만 이현의 옆에서 일하는 사람이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그의 머리 꼭대기로 기어오르려고 하니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온지유 씨, 비서 주제에 감히 우리 조카에게 손을 댄 거예요? 여 대표님 옆에서 일한다고 내가 아무것도 못 할 줄 알고? 내 말 한마디면 바로 여진그룹에서 쫓겨날 수도 있어요.”고 전무는 여진그룹을 다닌 시간이 지유보다 훨씬 길었다. 하지만 같은 부서가 아니었기에 회사에서 활동할 때를 빼고는 거의 마주칠 일이 없었다.지유도 원칙적인 사람이라 모든 뒷담화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못 되었다. 대부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넘겼지만 이번엔 그러기 싫었다. 지유의 한계를 건드린 것이다.고 전무가 아무리 발악해도 지유는 자기 입장을 지켰다.“고 전무님, 저도 고세리씨가 전무님 조카인 건 압니다. 아끼고 보호하는 게 마땅하지요. 하지만 그것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해야죠.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도 않으면서 내 얘기를 함부로 지껄이는데
이현이 밖에서 사람들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강력한 아우라와 차가운 기운에 사람들이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진예림은 어떻게 지유를 혼내줄지 상상까지 끝냈는데 공교롭게도 이현이 도착한 것이다.진예림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아무리 지유를 혼내주고 싶어도 이현이 나타난 순간 너무 두려워 차마 손이 내려가지 못했다.“여 대표님.”사무실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길을 비켜주었다.이현은 그쪽으로 걸어가며 혼란스러운 상황을 살피다 꼭꼭 묶여있는 지유를 발견하고는 미안을 찌푸린 채 차가운 얼굴로 주위를 빙 둘러봤다.“직접 마주한 게 아니라면 여진그룹이 제 회사가 아니라 고 전무님 회사인 줄 알겠어요.”고 전무는 안색이 살짝 변하더니 기염이 확 줄어서는 이렇게 말했다.“아, 아닙니다. 온지유 씨가 저희 조카에게 손을 댔거든요. 우리 집안에서 이 조카를 워낙에 아껴서요. 집에서도 한번 맞은 적이 없는 애가 이런 수모를 당했으니 삼촌이 돼서 힘이 되어주려고 그랬던 겁니다. 아니면 온지유 씨가 점점 더 무서운 게 없이 나올 것 같아서요. 지금도 사람을 때리고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제게 훈수를 두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대표님을 모시겠어요.”고 전무는 지유의 트집을 잡으며 이현에게 지유의 성품이 좋지 못하니 자르라고 유도하고 있었다.지유가 아무리 날고뛰어봤자 결국 비서 나부랭이인데 이현은 결국 자기 편을 들어줄 거라 고 전무는 생각했다.이현이 지유를 바라보며 물었다.“고 전무님이 한 말씀 인정해요?”“아니요, 인정할 수 없습니다. 고세리 씨는 사실이 아닌 유언비어를 터트리다 제게 들키고도 뻔뻔하게 저를 도발했습니다. 고세리 씨의 행위는 제게 상처를 주었고 제가 고세리 씨를 때린 건 저의 정당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대표님이 말씀해 보세요. 제가 잘못했나요? 저는 사과는 하지 않겠습니다.”“대표님 보십시오. 아직도 저렇게 정신을 못 차리고 거만하기 그지없습니다.”고 전무가 씩씩거리며 말했다.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고 전무를 쏘아봤다.“고 전무님
고 전무는 고세리가 말을 많이 했다가 무슨 사달이라도 날까 봐 그녀를 잡아당겼다. 까딱 잘못하면 회사 초기 멤버였던 그도 쫓겨날 위기였다. 고 전무는 사태를 파악하고 얼른 아부했다.“대표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자초지종을 잘 파악하지도 않고 섣불리 대처했으니 온 비서님께 실례가 많았습니다.”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이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말투는 여전히 엄숙했다.“고 전무님은 아셨지만 조카 되는 분도 알았을까요?”고 전무가 고세리를 앞으로 당겨오며 말했다.“온 비서님께 큰 실례를 끼쳤으니 얼른 사과해. 그리고 앞으로 더는 헛소리하지 말고.”고세리는 뺨을 맞은 것도 억울한데 사과까지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렇게 말했다.“삼촌, 내가 왜 사과해야 하는데요? 싫어요!”고세리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떼를 쓰며 울기 시작했다.고 전무는 이현을 힐끔 살폈다. 이현은 이미 인내심을 잃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여진그룹에서 이현이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피를 보고 싶지 않으면 이쯤에서 그만하는 게 상책이었다.고 전무는 냉큼 고세리의 뺨을 후려갈겼다.“제멋대로 굴지 마. 얼른 사과해. 아니면 여기 계속 무릎 꿇고 있든지!”고 전무는 한 번도 고세리를 때린 적이 없었다. 늘 이쁨을 받고 자란 고세리는 처음 삼촌이 이렇게 불같이 화내는 모습을 봤다. 깜짝 놀란 고세리가 얼굴을 부여잡고 지유를 힐끔 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온, 온 비서님, 제가 눈에 뵈는 게 없이 말실수를 했어요. 죄송합니다.”진예림은 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고 전무도 지유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이현은 지유를 지켜주기 위해 고 전무의 체면도 마다했다.이현이 지유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지유에게 눈치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걸 진예림은 깨닫게 되었다.지유도 이현이 무조건적으로 자기를 도울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비록 이현이 친분보다는 도리를 따져야 한다고 했지만 이현도 무의식적으로 그녀 편에 서 있었
지유의 말은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게 딱 맞았다.이대로 놔두면 앞으로 이혼하고 나서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다.하지만 이현의 눈엔 지유가 너무 거리를 둔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게 싫은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두 사람의 관계를 아는 게 싫은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이현의 표정이 이내 어두워지더니 거리감이 느껴졌다.“그렇게 무서워?”지유는 어두워진 이현의 표정을 눈치채고는 말을 돌려서 설명했다.“나는 이현 씨 이미지가 안 좋아질까 봐 그러는 거죠. 이혼하고 나서도 나랑 엮이는 게 싫을 거 아니에요. 그리고 내 이미지가 좋은 것도 아닌데 엮어서 좋을 게 없죠.”이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비아냥거렸다.“요만한 일도 이렇게 선을 긋는데 이미지가 안 좋을 게 뭐가 있다고?”비아냥거리는 이현의 말투에 지유는 멈칫했다.말을 잘못했나? 서로를 위한 일인데?두 사람의 사이를 추측하면서 지유가 이현의 애인이라는 말까지 나오는데 이현은 이런 말을 역겨워하고 싫어할 것이다.지유가 이렇게 귀띔하는 것도 다 이현의 이미지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혼하고 나서도 케케묵은 찌라시들이 다시 나오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그를 위해 서로 거리를 두면 좋을 것 같다고 당부했는데 이현은 오히려 지유가 너무 선을 긋는다고 생각했다.지유는 이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입을 앙다물었다.“나는 이미지가 이미 이 모양 이 꼴이니 신경 안 쓰는데 이현 씨는 신경 써야 하잖아요. 나 때문에 이현 씨 인생을 영향 줘서는 안 되죠.”이현은 지유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화가 났고 되레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나를 지극히 생각해 줘서 고마워. 몇 년간 너도 수고했고.”이 말에 지유는 잠깐 어리둥절했지만 그래도 그 말에 맞춰 이렇게 대답했다.“별말씀을. 이현 씨와 여진그룹을 위한 일인데 내 의무기도 하죠.”고분고분하고 책임감 넘치는 모습에 이현은 입을 앙다물었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넥타이를 당기더니 이렇게 쏘아붙였다.“온 비서님, 참 마음이 깊
하지만 승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번이나 착용했다. 만약 기자들에게 사진이라도 찍힌다면 무조건 이를 비웃으며 추측성 기사를 쇄도할 것이다. 그래도 승아는 흔들림이 없었다.이번 일로 승아는 살이 많이 빠져 가냘파 보였지만 스포트라이트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친화력 있는 미소를 지었다.기자들은 이번에 죽을 고비를 넘긴 일에 대해 취재했다. 승아는 기자들 앞에서 불쌍한 척하며 자기가 겪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도 적극적인 이미지를 심는 걸 빼먹지 않았고 절대 다음은 없을 거라고 약속했다.댓글은 모두 승아를 걱정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동감하는 글도 보였다.기자들은 어떤 질문을 해야 화제성이 높은지 알고 있었기에 바로 드레스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승아가 대범하게 대답했다.“다시 카메라를 마주하면서 새롭게 태어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리고 이 드레스는 제게 매우 소중한 드레스예요. 이 드레스만 입으면 살아있다는 걸 느끼죠. 모든 고난을 이겨낼 것 같은 힘도 생기고요. 이제는 아름다운 것들을 소중히 여기면서 살고 싶어요.”기자가 또 물었다.“선물 받은 드레스로 보이는데 혹시 누가 선물한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혹시 약혼자인가요?”승아는 달콤하게 웃으며 누구라고 콕 집어서 얘기하지는 않았다.“제 삶에 가장 중요한 사람이에요. 살아갈 용기과 동력을 준 사람이죠.”이 말을 뒤로 승아는 매니저의 부축을 받으며 내려갔다.아직 궁금증이 풀리지 않은 기자가 쫓아가며 물었지만 승아는 이미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하지만 이건 중요하지 않았다. 기자와 네티즌들도 놀고먹는 사람들은 아니었다.그 드레스의 의미가 남다르다는 걸 알고 그 드레스를 선물한 사람이 누군지 토론하고 있었다.승아에게 이렇게 큰 영향을 끼칠만한 남자는 과연 누구일까?얼마 지나지 않아 네티즌은 그 사람이 이현임을 알아냈고 이현은 바로 검색어 순위에 올랐다.이현은 그렇게 승아의 약혼자로 굳혀졌다.이현과 승아 중 그 누구도 얘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네티즌과 팬들
씩씩거리는 윤정의 모습에 지유는 오히려 웃음이 터졌다.“윤정 씨 말만 들어보면 대표님이 저랑 만나는 줄 알겠어요.”윤정은 착각인지 뭔지 몰라도 두 사람의 사이가 약간 묘하다고 생각했다.“대표님 확실히 온 비서님을 많이 챙기는 것 같아요.”윤정은 잠깐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했다.“두 분은 못 느끼실 수 있지만 옆에 있는 사람은 달라요. 노승아 씨가 갑자기 끼어들어서 두 사람 사이 망치게 둘 수는 없어요.”윤정은 지유가 이현과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아이고, 윤정 씨, 헛다리 짚지 마요.”지유가 윤정의 머리를 톡 건드리더니 이렇게 말했다.“저랑 대표님은 아무 사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 하는 헛소리 새겨듣지 말아요. 대표님이 누굴 만나든 저랑 아무 상관 없어요. 이런 말은 앞으로도 하지 마요. 다른 사람이 들으면 또 소문이 이상해지니까.”윤정이 이마를 매만지며 말했다.“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말 안 하죠. 근데 다른 사람이 알지도 못하면서 헛소리하는 게 싫어서 그러는 거예요.”아무리 회사에서 지유가 부정당한 방법으로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는 소문이 파다해도 윤정은 믿지 않았다.윤정이 아는 지유는 정직하고 부드럽고 부하를 잘 챙기는 사람이지 그런 비열한 방법을 쓸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윤정은 지금 퍼지고 있는 지유에 관한 소문이 뒷담화를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질투로 인해 헐뜯는 소리라고 생각했다.지유는 그 뉴스가 진짜여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도 티를 내서는 안 된다.지유는 요즘 이현이 자기와 점점 거리를 두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업무든 생활에서든 서로 간의 대화가 줄어들었고 가끔은 선택적으로 그녀가 한 말을 무시하기도 했다. 같이 퇴근하는 경우도 줄어들었고 요즘 계속 서재에서만 잠을 자면서 침실에 들어오지도 않았다.아마 이현도 뉴스를 보고 속으로 승아에게 명분을 줘야 한다는 생각에 일부러 그녀와 거리를 두려고 하는 걸 수도 있다.지유는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굉장히 실망했다.…“이런 염치없는 년을 봤나
하지만 나도현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박은희도 하민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천지개벽하고 피와 살이 뒤섞이는 상황에까지 끌고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녀가 숨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나도현이 화가 가라앉으면 자연스럽게 그녀를 놓아줄 것이라 믿었다. “그 아이가 누구의 애인지 물어봐서 뭐 해? 나도현, 우리는 말할 건 다 했잖아. 더 이상 서로 힘들게 하지 말자.” “네 엄마가 그렇게 많은 돈을 주는데 내가 바보냐? 그걸 왜 거절해야 해? 예전에 20억에 너를 포기했던 것처럼 지난 4년 동안 우리는 이미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어. 넌 내가 울며 매달려서 싫다고 말할 걸 기대했어?” 양시은은 담담하게 나도현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무섭기도 했지만 점점 그녀는 상황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도현이 그녀에게 죽으라고 할 리는 없으니까. 죽지 않으면 언젠가는 나도현에 의해 풀려날 날이 있을 것이다. 지금 나도현의 마음속엔 그저 그때 분노로 가득 찼을 뿐이다. “그게 가능할 리가 있냐?” 나도현은 비꼬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양시은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잖아. 그러니 내가 책임질 순 없어. 지금 나를 여기에 가두고 있을 바엔 차라리 양채은을 찾아가. 양채은은 진짜로 널 사랑해. 뱃속의 아이도...” “그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야. 그 여자가 날 사랑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지? 난 널 사랑하지만 너는 나한테 어떻게 했지?” 양시은이 말을 계속하려는 순간 나도현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더욱 어두워진 채 양시은의 몸에 머물렀다.나도현의 깊은 사랑을 양시은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현이 예전에 사랑했던 만큼 지금은 증오도 그만큼 깊어졌다. 나도현은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말했다. “너 같은 사람한테 사랑을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 지금까지 아이 아빠는 보지도 못한 걸 보니 네가 죽인 거 아니냐?” 양시은의 마음이 처참하게 찔렸다. 아이의 아버지는 바로 눈앞에
바로 핸드폰 속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도현은 그 번호를 비서에게 보내며 지시했다. “철저히 조사해.”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갑작스러운 결심이 떠올랐다. ‘더 이상 양시은이 밖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놔둘 순 없어.’ 그리고 나흘 뒤 박은희가 찾아왔다. “네가 가업을 물려받는 걸 싫다고 한 건 이해한다. 근데 지금 또 나랑 대항해서 그 아이를 다시 데리고 오겠다는 거야?” 나도현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박은희는 더욱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나도현, 양시은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눈으로 똑똑히 봤잖아. 그런데 왜 아직도 그 여자에게서 헤어 나오질 못하는 거야? 내가 너한테 소개해 준 약혼녀는 네가 고른 여자보다 어디가 못 해?” 임씨 가문도 경성의 명문가다. 나씨 가문과 임씨 가문은 비록 여씨 가문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경성에서 두 번째로 손꼽히는 대가문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나민우 집안과 친척 관계다. ‘나민우 역시 처음에는 결혼은 원하지 않았지만 결국 부모의 뜻을 따랐고 가문의 이익을 위해 결혼하게 되지 않았나?’이런 생각이 들자 박은희는 더욱 불쾌한 마음에 불만을 터뜨렸다. “나도현, 네가 내 말을 듣기 싫으면 나민우를 좀 본받으면 안 되겠니? 나민우가 어떻게 했는지 알잖아. 넌 도대체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야? 내가 진짜로 나민우를 내 아들로 삼아야 속이 시원하겠어?” 부모들이 자녀를 나무랄 때 자녀들이 흔히 하는 말처럼 ‘남이 그렇게 좋으면 그 쪽한테 가서 아들이나 돼달라고 하세요.’와 같은 뉘앙스였다. 하지만 박은희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나도현에게 상황을 잘 파악하고 나인우를 따라 배우라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가문의 발전과 명성을 위해 양시은과는 반드시 거리를 두어여 한다. “왜 그렇게 남들과 비교하기를 좋아해요? 나민우는 나민우의 선택이 있는 겁니다. 그리고 양시은에 대한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해요.” 나도현은 등을 돌리고
양시은은 눈을 감았지만 깊은 절망이 그녀를 감쌌다.나도현이 언제 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퇴원하려고 했지만 지켜보는 이가 있어 병실 밖을 나갈 수 없었다. 오후가 되자 간호사가 들어오며 약을 갈아주었고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괜찮아요.”“안 돼요. 이건 임 선생님이 직접 시키신 일이니 전 대충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환자분도 치료에 협조 좀 해주세요.”간호사는 난처한 얼굴로 말했고 양시은은 고개를 들더니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나가서 바람 좀 쐬고 싶어요.”“알았어요. 일단 약부터 갈고 휠체어 가져올게요. 환자분은 아직 무리하게 움직이면 안 되거든요.”간호사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날씨는 좋아도 너무 좋았던지라 휠체어를 타고 밖으로 나가면서 양채은에게 또 전화를 걸어보았다. 여전히 꺼져있다는 음성이 들려오는 것을 보니 양채은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 다시는 그녀의 앞에 나타나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양시은은 순간 불안감에 휩싸였다. 옆에 있던 간호사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임 선생님께선 왜 안 오신 거예요?”“모르겠네요. 혹시 휴가 내신 건 아닐까요?”“예전에 단 한 번도 휴가를 낸 적 없었잖아요. 게다가 이틀 동안 계속 회진하는 것을 봐서는 절대 환자를 두고 휴가 낼 것 같진 않았어요.”“그래요? 임 선생님은 우리 병원에서 알아주는 미남이라 매일 임 선생님 얼굴 보고 싶어서 찾는 건 아니고요?”“당연하죠. 임 선생님 얼굴만 봐도 힘든 게 싹 정화되는 기분이라니까요. 오늘도 보고 싶은데 안 보이네요.”원래부터 농담으로 한 말이었던지라 분위기도 쉽게 풀렸다. 간호사들은 서로 웃으며 대화를 나누면서 양시은 앞으로 지나갔다. 하지만 양시은은 이상함을 눈치챘다.“임 선생님께서 언제 사라지신 거예요?”“아마 오전 일 거예요. 일이 있다고 나가신 뒤로 돌아오지 않으셨거든요. 아마 급한 일이 생긴 거겠죠. 안 그래도 휴가 한번 안 내던 사람이었는데 이참에 휴가 내셨을 수도 있을 것 같네요.”간호사는
“너는 환자고 나는 의사니까 보살피는 건 당연한 거야.”임지욱은 웃으며 그녀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상을 차린 후 그는 수저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먹어 봐.”배가 고프긴 했지만 입맛이 없었다. 그렇다고 거절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이대로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면 하민이를 찾아다닐 체력도 없었기에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으려고 했다. 그 순간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곧이어 병실 문이 열리고 나도현이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발견하곤 표정을 굳혔다.“의사가 이런 식으로 환자를 보살피는 건가요? 아니면 양시은한테만 그런 건가요?”“오랜만에 만난 후배를 챙겨주는 건데 뭐가 문제죠?”임지욱은 심기 불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병실 안의 분위기는 싸늘하게 얼어붙었다.나도현은 눈알을 돌리며 양시은과 임지욱을 번갈아 보더니 결국엔 양시은의 창백한 얼굴에 고정하게 되었고 아주 복잡한 눈빛이었다.양시은은 병실에 흐르는 분위기를 읽어내고 음식을 먹으려던 손을 멈추었다.“나 변호사님.”그러자 나도현은 픽 웃더니 어두운 아우라는 사라지고 조롱 가득한 어투로 말했다.“쓰러지기 전에는 눈물까지 흘리며 아들을 살려달라고 하기에 너한테 아들뿐인 줄 알았지. 그런데 고작 며칠이 지났다고 아들은 뒷전으로 미뤄두고 여기서 의사한테 작업을 걸고 있는 거지?”양시은의 표정이 변해버렸다. 하민이는 그녀의 약점이자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가족이었다.느껴지는 배신감에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고통이 상처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졌다.그런 그녀의 상태를 임지욱이 먼저 발견하곤 얼른 부축했다.“시은아, 아직 상처가 다 낫지 않았으니까 화를 내면 안 돼. 할 말이 있으면 나중에 해. 알았지?”양시은은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았다.“괜찮아요.”나도현은 원래 아이를 언급하며 임지욱이 양시은을 포기하길 바랐지만 임지욱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오히려 양시은을 더 걱정해주고 있었다. 순간 분노가 치민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을 정도였고 목
“하민아, 눈 좀 떠봐!”양채은은 하민이를 데려가고 싶었을 뿐 아프게 할 생각은 없었다. 이때 어둠 속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발걸음 소리와 함께 키가 큰 남자가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밤이었던지라 남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신비로운 분위기 탓에 양채은은 바로 남자의 정체를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 남자는 바로 자신에게 강태경이 나도현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사람이었다.“여긴 왜 왔어요? 제 꼴을 보니 이제야 만족했어요?”“멍청하긴. 사기를 당했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있겠어요?”남자는 픽 웃어버렸다.“상처만 가득한 진실이었다면 전 차라리...”양채은은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그런 억지는 그만 부려요.”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대체 원하는 게 뭐죠?”양채은은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를 보며 그의 목적을 알아내려고 했다.“이대로 넘어가려고요?”남자의 질문에 양채은은 입술만 틀어 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온하고 행복했던 인생이 엉망진창이 되었는데 어떻게 그냥 넘어갈 수 있단 말인가.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남자는 이런 그녀의 마음을 눈치챈 듯했다.“그 아이가 없으면 양시은은 분명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될 거예요.”양채은은 고개를 떨구고 하민이를 보았다. 하민이는 아직 어렸고 몸도 약했으며 그녀는 아이의 이모였다. 그런데 어떻게 아이가 죽게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안 돼요.”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전 하민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봐야 해요. 근처에 가까운 병원 아는 곳 있어요?”“아직도 이성이 남아 있나 보네요.”남자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차갑게 말했다.“우리가 손을 잡으면 될 텐데요.”양채은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대체 뭘 원하는 거죠?”남자는 아무런 감정의 파동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각자가 원하는 바를 이루는 거죠.”양채은은 뜸을 들였다.“아직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급하지 않으니 천천히 생각해요.”남자는 그녀에게 명
더는 통증을 참을 수 없었던 양시은은 점점 숨이 거칠어졌다.“연기 그만해.”나도현의 내정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고 그녀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양시은은 한참 지나도 몸을 일으킬 수 없었고 이를 악물며 온몸으로 퍼지는 극심한 통증을 참아보려고 했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은 어느새 주르륵 흘러내리며 하얀 병원 이불에 떨어지고 있었다.“나도현, 네가 무슨 계획을 꾸미든 상관없어. 나한테는 소용이 없으니까. 난 내 아이만 무사하면 되거든.”양시은은 겨우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그럼에도 목소리엔 확고함이 묻어났다.나도현의 눈빛이 살짝 번뜩였고 차갑게 말했다.“일단 치료부터 받아.”이 말을 던진 후 그는 빠르게 병실을 나섰고 양시은은 힘없이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차는 남쪽으로 향해 달리고 있었고 양채은은 내비게이션만 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어디로 가는지 몰랐고 아주 외진 곳을 향해 달렸다. 해는 아직 저물지 않았지만 도로엔 차가 보이지 않았다.하민이는 눈을 비볐다.“이모, 우리 어디 가요?”아이의 목소리에 양채은은 정신이 들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그녀의 안색은 창백했고 마치 구천을 떠도는 귀신 같았다.“재밌는 곳으로 가는 거야.”하민이는 하품을 했다.“이모, 졸려요. 하민이 눈이 너무 무거워요.”“그래, 이따가 자게 해줄게.”양채은은 여전히 하민이에게 다정했다.하민이는 고개를 끄덕인 후 장난감을 안고 의자에 기대어 자버렸다. 그녀는 발 디딜 수 있는 곳에 차를 세운 뒤 하민이를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하민이가 자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가방에서 약병을 꺼내 몇 알 삼켰다. 온몸을 지배하던 고통이 그제야 가시는 기분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 전원을 켜고 문자를 확인하려고 했지만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아 침대에 기대어 떨어지는 노을을 보다가 잠들어 버렸다.그녀는 하민이가 웅얼대는 소리에 잠에서 깨게 되었다.“오지 마세요. 우리 이모랑 엄마한테 다가가지 마세요.”양채은은 눈을 번쩍 뜨게 되었고
어쩌면 몸에 다친 곳이 있었던 탓인지 양시은은 힘을 쓸 수 없었고 그녀의 행동은 고양이가 버둥거리듯 했다. 임지욱은 그녀를 데리고 병실로 돌아온 뒤 아주 진지한 얼굴로 꼼꼼하게 검사를 해주었다.“그동안 동창회에 한 번도 빠짐없이 참석했는데 단 한 번도 널 보지 못한 것 같아. 혹시 해외에 있었던 거야?”양시은은 고개를 저었다.“사정이 있었어요. 말해봤자 좋을 것도 없는 사정이에요.”“그래도 힘든 거나 도움이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면 도와줄 테니까.”임지욱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세월이 흘렀지만 그녀의 얼굴엔 세월의 흔적이라곤 거의 없었다. 다만 피곤함에 찌든 두 눈은 예전의 빛을 잃어버린 듯했다.양시은은 침묵하다가 한참 뒤에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선배.”임지욱은 무의식적으로 물었다.“그럼 변호사 일 하고 있는 거야?”이 질문은 그녀의 아픈 곳을 쿡 찌르게 되었다. 순간 울컥 감정이 밀려온 그녀는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상처 부위는 어때요?”그녀가 일부러 화제를 돌리고 있음을 눈치챈 임지욱은 더는 묻지 않았고 상처 부위를 더 꼼꼼하게 살펴보았다.“또 터졌네.”“어쩐지 아프더라고요.”양시은은 창백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넌 예전이랑 변한 게 하나도 없네. 여전히 힘든 거 억지로 참고 있네. 하지만 이번에 퇴원하면 절대 상처 부위에 물 닿게 하지 마. 그래야 빨리 나을 수 있으니까.”치료해주며 당부하는 임지욱의 눈빛은 아주 다정했다.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인 후 억지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 선배.”“내가 나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의사한테 작업을 거는 거지?”언제부터 문 앞에 서 있었는지 모를 나도현이 눈을 가늘게 접으며 두 사람을 경멸의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언제 온 거지?'양시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괜스레 긴장하게 되었다.임지욱은 고개를 돌리자마자 나도현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 사이엔 스파크가 튀기고 있었다. 긴 침묵 끝에 그가
양시은은 입술을 짓이겼다. 피가 많이 흘러나왔던지라 안색이 창백해져 자조적으로 웃었다.“나는 내 주제를 알아.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너한테 상처를 주겠어?”나도현은 가슴이 갑갑해졌고 커다란 돌덩이가 가슴을 누르고 있는 것처럼 불편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싸늘한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양시은, 너 정말 뻔뻔하다.”박은희는 찬 바람만 부는 두 사람 사이를 보며 속으로 기뻐했고 이내 맞장구를 쳤다.“그깟 돈 때문에 너를 버리는 여자인데 왜 미련을 가지고 있는 거니.”“그만 하세요.”나도현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다시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이 여자에게 돈을 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럴 만한 가치도 없으니까요.”그는 시선을 돌려 양시은을 차갑게 보았다. 박은희는 속으로 아주 기뻐했다.“네가 정신을 차렸다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세상엔 좋은 여자는 많고 많단다. 너랑 결혼할 여자는 더 많고.”“나가서 말하죠.”나도현은 차갑게 말을 내뱉으며 밖으로 성큼성큼 나가버렸다.양시은은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더는 참을 수 없어 침대에 털썩 엎드리게 되었다. 상처를 금방 치료했던지라 여전히 아팠고 바늘로 꿰맨 곳이 찢어질 듯 아팠다.하지만 하민이는 여전히 양채은의 손에 있었기에 마음 놓고 편히 있을 수 없었다. 결국 비틀대며 병원을 나선 뒤 양채은에게 전화를 걸어보려고 했다. 모든 일은 그녀 때문에 일어난 것이고 하민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병실 밖을 나가자마자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주었고 청량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조심해요.”“고맙습니다.”양시은은 고개도 들지 않고 상대의 손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상대는 다시 그녀를 잡았다.“양시은?”상대의 목소리에선 놀라움과 반가움이 묻어나 이어 그녀는 창백한 얼굴을 들 수밖에 없었다.그녀의 눈앞에는 잘생긴 얼굴이 있었고 품이 좀 너른 의사 가운은 유난히도 남자에게 잘 어울려 보였다.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양시은은 조금 생각이 나지 않아 뜸을 들이며 말했다.
양시은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나도현이 자신을 포기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8억보다는 아니라니...나도현이 강태경으로 살 때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돈을 아껴 쓰라는 말을 한 적 없었고 나중에 나도현이 된 후에도 손에 돈이 부족했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양시은의 말을 들으니 두 사람이 쌓았던 감정이 전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가소로웠다.“양시은, 돈이 필요하면 나한테 말해. 내 기분만 맞춰주면 8억보다 더 많은 돈을 얻을 수 있지 않나?”나도현은 상처받은 두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양시은이 한 말이 제발 전부 거짓이길 바랐다. 그녀는 나도현이 자신에게 잘해줬던 시절은 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입을 열려던 순간 밖에서 콰당 소리가 났다. 박은희가 있는 힘껏 문을 밀어 연 것이다.엄청난 기세를 내뿜던 박은희는 바로 양시은에게 시선을 돌렸다. 양시은은 그녀가 좋은 의도로 찾아온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입을 꾹 다문 채 박은희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박은희는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지 않고 문에 서 있었다. 거리가 조금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쩌렁쩌렁하게 들려왔다.“양시은 씨, 전에 8억 주면서 내가 뭐라고 했지? 내 아들 곁에서 떨어지라고 했잖아. 난 지금도 내 아들이랑 함께 있는 꼴 보고 싶지 않으니까 서로 좋게 합의 보자고. 얼마를 원하는지 말해.”박은희는 나도현이 양시은을 향한 마음을 접길 바랐다. 그래서 나도현이 보는 앞에서 양시은에게 얼마나 요구를 하는 것이냐고 물은 것이다. 양시은도 박은희가 대놓고 물어볼 줄은 몰랐다. 목구멍에 커다란 돌멩이가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고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다. 하지만 그녀에겐 다른 선택은 없었다.“그때는 8억이지만 지금은 적어도 2배 정도는 주셔야 할 거예요. 하지만 전에 거래한 것이 있으니 12억만 주시면 영원히 눈앞에서 사라져 드릴게요. 아니, 죽으라고 하셔도 돼요.”양시은은 한 글자씩 내뱉을 때 나도현을 똑바로 바라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