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들은 지희가 깜짝 놀라며 지유를 바라봤다.“지유 네 말은 이번에 여이현과 스캔들을 터트린 게 커리어를 위해서라는 거야? 정말 대단하다.”“여이현 씨처럼 든든한 백이 말까지 잘 듣는데 너라면 안 기대고 배기겠어?”지유가 매우 현실적인 문제를 물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든 그 기회를 잡으려 할 것이다. 흔치 않은 기회라 놓치면 다시 없다.지희는 화가 나 미칠 것 같았다.“이렇게 술술 풀리게 놔둘 수는 없지.”두 사람은 그렇게 매장으로 들어갔다.“어? 지희 님, 지유 님.”난감해서 어쩔 줄 모르던 점장이 두 사람을 보고는 활짝 웃으며 열정적으로 맞이했다.“왔어요?”점장은 지희와 아는 사이었다. 점장은 유명한 디자이너라 지희와 같은 업계나 마찬가지였다. 점장이 설계한 옷은 패션위크에 수도 없이 올라갔다. 패션계에서도 유명했고 많은 연예인이 점장이 설계한 옷을 입고 레드카펫을 걸었다.지희가 말했다.“우리 드레스 고르러 왔어요. 나 한 벌, 지유 한 벌. 예쁘고 귀티 잘잘 흐르는 걸로 주세요. 전 세계에 단 한 벌 있는 거 있잖아요. 특히 지유는 조금 더 신경 써서 골라주세요.”점장이 웃으며 말했다.“그런 걸 찾는다면 참 잘 왔어요. 우리 매장의 오트 쿠튀르랑 신상은 아직 공개하기 전이라 모델도 입어본 적이 없어요. 두 분이 오셨으니 특별히 공개하는 거예요.”지희는 구미가 당겼다.“그래요? 그럼 한번 볼까요?”점장이 이렇게 말했다.“이쪽으로 와요.”지희가 지유를 밀며 말했다.“얼른 가. 이번에는 너를 위해서 온 거니까 꼭 맞는 거 골라야 해.”점장이 그들을 데리고 다른 공간으로 향했다. 안은 꽤 컸지만 옷은 적었고 하나같이 하얀 천에 가려져 있었다.“여기에요.”점장이 하얀 천을 거두자 열몇 벌의 드레스가 보였다. 모두 점장이 새로 디자인한 드레스였고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했다.이 부분이 전문 분야인 지희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와, 드레스들이 너무 예쁜데요?”“먼저 보고 있어요.”지유는 점장이 설계한 드레스를
지유는 이 드레스를 보자마자 마음에 들어 바로 피팅룸으로 향했다.지희는 옆에서 기다리며 자기가 입을 드레스를 골랐다.지유가 나오자 고개를 돌린 지희가 우아하고 아름다운 지유를 보고 넋을 잃었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귀티 나고 도도했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던 지희가 이내 박수를 치며 이렇게 말했다.“지유야, 너 정말 너무 예쁜 거 아니야. 나 반했어 진짜.”지유는 얹었던 머리를 풀었다. 빨간 드레스가 그녀의 하얀 피부를 한층 더 빛나게 했다. 튜브톱 드레스가 지유의 완벽한 가슴라인을 감싸고 있었고 한 손에 들어올 듯 가는 허리는 라인이 죽여줬다. 치맛자락에 수놓은 장미는 마치 생화처럼 생생했다.이 드레스의 최대 장점은 너무 튀지 않으면서도 여자의 풍만함과 연약함을 완벽하게 받쳐주었다.지희는 그런 지유가 마치 덤불 사이에 빨갛게 피어난 탐스러운 장미 같다고 생각했다.꽃이 사람을 받쳐준다는 말이 있지만 지금은 사람이 꽃보다 더 어여뻤다.지유는 거울 앞에 서서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여자의 성숙함이 더해진 것 같았다.“나도 괜찮은 거 같아.”마침 안으로 들어온 점장이 드레스를 입은 지유를 마주했다. 뒷모습만 봤을 뿐인데도 완벽한 호접골과 허리 라인에 눈앞이 환해졌다. 드레스가 주인을 찾았다는 생각에 점장은 기분이 좋아졌다.“지유 님, 정말 너무 예뻐요. 제가 이 드레스를 설계할 때는 어떤 느낌도 받지 못했는데 지유 님이 입으니까 정말 지유 님을 위해 설계한 드레스네요. 아직 완성하기 전이긴 하지만 영감을 받았으니 완성하면 더 잘 어울릴 것 같아요.”“과찬이에요.”지유가 치맛자락을 살짝 들며 거울 속에 눈부시게 예쁜 자신의 모습에 만족했다.“아직 완성하기 전이라니 일단 벗을게요.”지희는 드레스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말에 매우 아쉬워했다.“이윤 점장님, 오늘 저녁에 혹시 완성될까요?”“어려울 것 같네요. 노승아 씨만 다그치지 않았으면 가능할 것 같은데 노승아 씨 드레스가 디자인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서요. 여러 장인이 같이 수
지유가 문을 두드렸다.“들어와.”이현이 차갑지도 따듯하지도 않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이현은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요즘 행사 준비에 열을 올리긴 했지만 해야 될 일은 회사에서 마쳤기에 집에 와서까지 일에 몰두할 필요는 없었다.이현은 고개를 들어 지유를 힐끔 보더니 물었다.“무슨 일이야?”“내일 여진그룹에서 하는 행사, 나도 가려고요.”이 말에 구미가 당긴 이현은 시선을 지유에게로 돌렸다.“이런 행사 참석하기 싫어했잖아.”지유가 이런 행사를 싫어하는 건 맞았다. 너무 눈에 튀기도 했고 시끌벅적한 걸 싫어해서였다.전에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부터는 필요할 것 같았다.지유가 웃으며 말했다.“사람 마음이라는 게 변할 때도 있잖아요.”“그래.”이현이 대답했다.“드레스 준비하라고 할게.”“괜찮아요. 이미 골랐어요.”지유는 이현을 힐끔 쳐다보며 한마디 덧붙였다.“당신 카드 긁었어요.”이 말을 뒤로 지유는 서재에서 나갔다.이현은 한참 동안 멍해 있었다. 하지만 자기 카드를 긁었다는 말에 이현은 입꼬리가 올라갔다.…여진그룹 자선 행사에는 많은 손님이 몰렸다.밴이 하나둘씩 현장에 도착했다.지유는 아직 드레스룸에서 화장하고 있었고 안에는 다른 연예인도 함께였다.여성 손님들에게 꾸밀 시간을 충분히 주기 위해 단독으로 드레스룸을 만든 게 참 스윗했다.지희를 기다리던 지유는 승아와 마주쳤다. 생얼이었고 차림새가 매우 소박했다. 옆엔 일고여덟 명의 매니저를 대동하고 걸어왔다. 보아하니 승아도 오늘 여기서 화장하려는 듯 보였다.승아는 지유의 옷차림을 확인했다. 까만 슈트에 머리를 얹은 모습이 평소에 비서로 일하던 모습과 같았다. 이에 승아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다른 사람은 다 예쁘게 단장하고 있는데 왜 아직도 여기 서 있어요? 설마 오늘 행사 참석 안 하는 거예요? 아니면 오빠가 초대 안 한 건가? 그냥 여기서 스태프로 있으래요?”“노승아 씨, 저는 괜찮으니 신경 좀 꺼주실래요?”지유가 차갑게 쏘아붙
그 소리가 너무 커서 드레스룸 전체가 들릴 정도였다.장다희가 웃으며 손에 든 레몬수를 마셨다. 지금 들리는 그 결과에 매우 흡족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승아와의 접점은 별로 없었지만 요새 그녀의 스케줄을 뺏는다는 소식이 들려서 기억은 하고 있었다.정글 같은 연예계에서 이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하지만 오트 쿠튀르를 입고 싶어 그녀 앞에 끼어든 건 너무 심했다. 막무가내로 끼어들었는데도 결국 입지 못했으니 그녀는 뭔가 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이윤은 지금 안에 같이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수선을 마친다 해도 승아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또 욕을 바가지로 먹을 테니 그냥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저희도 할 만큼 했어요…”“할 만큼 하긴 뭘 해요? 다른 건 멀쩡하던데 우리 승아 언니 것만 이따위로 만들었잖아요. 일부러 그런 거죠?”“오해에요.”싸우는 소리에 승아가 걸어 나오더니 활짝 웃으며 물었다.“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싸워?”예진이 말했다.“언니, 드레스 아직 완성 전이래요. 조금 있다 입어야 되는데 어떡해요. 밖에 사람이 저렇게 많은데 이 드레스를 입지 못하면 비웃음을 받을 게 뻔한데. 그걸 어떻게 두고 봐요.”승아는 예진과 이윤을 번갈아 보더니 덤덤하게 말했다.“난 또 무슨 일이라고. 예진아, 점장님 난감하게 하지 마. 백업으로 가져온 드레스 입으면 되지. 모양새가 우스워지면 우리만 손해 보는 것도 아니잖아. 화낼 거 없어.”이윤을 직접적으로 탓하진 않았지만 말뜻을 캐보면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었다. 이를 이윤이 모를 리가 없었다.승아의 체면을 세워주지 못하면 이현에게 밉보이게 되는 거겠지.지희가 이렇게 말했다.“지유야, 저것들 정말 너무 하는 거 아니야? 여기가 집이라도 되는 줄 아나?”승아는 연기에 능한 사람이었다. 순진무구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뒤에서는 누구보다 음흉했다.이윤은 지금 매우 난감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지유는 이윤이 밤새 수선해 완성한 드레스를 보며 지희에게 물었다.“너 점장님한테 큰소리쳤지?
승아의 매니저가 어디선가 소식을 듣고 오더니 승아에게 귓속말을 전했다.“언니, 온지유 저 여자가 한 짓이래요.”그 말에 승아의 시선이 지유에게로 향했다.지희와 얘기하며 웃음꽃을 피우는 그녀의 모습에 잔뜩 약이 오른 승아는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그쪽으로 다가갔다.‘나 골탕 먹이려는 사람이 너였어?’승아는 지유가 머리 세팅도 하고 메이크업도 받으려고 하자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혹시 지금 저 보라고 꾸미는 거예요? 아니면 오빠가 한 번이라도 봐줬으면 해서 꾸미는 거예요?”지희의 스타일리스트가 해주는 대로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던 지유는 거울로 승아가 잔뜩 비꼬며 다가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항상 지유 앞에서만 이러한 본색을 드러내고는 했다.지유는 그녀를 힐긋 보고는 더 이상 시선을 주지 않고 그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착각도 자유네요. 제가 꾸미는 건 오로지 저를 위한 거예요.”“말은 잘하네요. 그러면 제 드레스 수선은 왜 방해하려 했는데요? 예진이가 원장님하고 얘기하는 거 듣고 기분 나빠져서 수선 못 하게 막은 거잖아요?! 파티에서 저만 스포트라이트 받을까 봐 불안하기라도 한 거예요?”그 말에 옆에 있던 지희가 입을 열었다.“이봐요, 노승아 씨, 혹시 피해망상증이라도 있어요?”그러자 승아가 도끼눈을 뜨고 지희를 바라보았다.“지금 대화 중인 거 안 보여요? 그쪽은 끼어들 주제가 안 되니까 빠져요.”“대체 자기가 뭐라고 이렇게 활개를 치는지 모르겠네, 그래봤자 불륜녀인 주제...”짝.지희의 비아냥거림에 승아가 바로 뺨을 내리쳤다.“네가 뭔데 나를 모욕해?”얼떨결에 뺨을 맞은 지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승아가 눈물이 가득 고인 채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뺨을 맞은 사람이 승아인 줄 착각할 수도 있을 장면이었다.“이게 감히 나한테 손을 대?!”흥분한 지희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자 승아의 매니저들이 우르르 달려와 그녀를 포박하고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그 모습에 지희와 함
이에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 입을 떡하니 벌렸다.장다희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지유 씨, 미쳤어요? 지유 씨가 손댄 사람 노승아 씨라고요!”직장 동료가 깜짝 놀라 외쳤다.노승아는 머리가 옆으로 돌아간 채 그 자리에서 몇 초간 얼어버렸다.“이건 노승아 씨가 지희한테 손댄 거 갚아준 거예요.”지유가 담담하게 이유를 말해주었다.김예진은 설마 승아가 맞을 줄은 몰랐는지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지유를 밀어버렸다.“이봐요, 미쳤어요? 지금 누구한테 손을 대는...”짝.그때 지유가 이번에는 김예진에게도 손을 올렸다.“이런 예의도 모르고 사리분간도 하지 못하는 매니저 때문에 노승아 씨가 뺨을 맞는 겁니다.”“이, 이 미친!!”김예진은 갑작스럽게 날아든 뺨에 씩씩대며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승아는 지유에게 맞은 쪽 뺨을 감싸며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예진아, 그만해. 우리가 건드릴 수 있는 여자가 아니야...”“누굴 못 건드려?”그때 여진숙이 달려 들어와 지유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또 너야? 이번에는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너 계속 이렇게 나랑 이현이 뒤에서 승아 괴롭히고 있었지? 고작 비서 주제에 지금 어딜 감히 내 예비 며느리한테 손을 대?!”승아는 여진숙의 품에 안겨 서럽게 울었다.“아주머니...”사람들 앞에서 노승아가 자신의 예비 며느리라고 인정하는 그 모습은 참으로 여진숙다웠다.그녀의 말 때문에 이제 사람들은 승아가 미래 여씨 집안 안주인이라고 더 확신할 수 있었다.지유의 마음은 이 순간 차갑게 가라앉았다. 여씨 가문에 시집을 간지 어언 3년, 한 번도 인정받지 못한 건 둘째치고 이제는 대놓고 이런 모욕까지 받게 되었다.여진숙과 승아는 마치 친 모녀처럼 애틋하기 그지없었다.지유는 전혀 움츠러드는 기색 없이 또박또박 대꾸했다.“자고로 사람이라면 시비를 제대로 가릴 줄은 알아야죠. 노승아 씨가 무슨 짓을 하든 저랑은 상관없는 일이지만 제 친구를 건드린다면 얘기가 달라지죠.”승아가 울면서 답변
갑작스럽게 밝힌 결혼 소식에 자리에 있는 모두가 다 놀라고 말았다.승아의 혈색이 삽시간에 창백해지더니 곧 빨개진 눈으로 이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에 지대한 상처라도 받은듯했다.대체 여이현은 무슨 생각으로 사람들 앞에서 결혼을 인정한 거지?충격이 컸던 승아가 다리에 힘이 풀려 쓰려지려 하자 다행히 여진숙이 옆에서 부축해주었다.이현의 행동에 충격을 받은 건 비단 승아뿐이 아니었다. 지유 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결혼식 날 밤 만약 두 사람의 결혼을 다른 이에게 알린다면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했던 사람이 바로 이현이였으니까.지유는 지금 머리가 혼란스럽고 현실감이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몇 초간 멍하니 있던 이진환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이거 참, 여 대표님도 너무하시네요. 결혼한 사실도 얘기 안 해주시고 부인이 누군지도 얘기 안 해주시니.”“아내가 공적인 자리에 얼굴을 비추는 걸 원하지 않아서요. 저는 제 아내 말만 듣는 편이라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지유는 그 말이 마치 자기 들으라고 하는 말인 것만 같았다.그녀가 두 사람 사이를 공개하기 싫다고 하면 이현은 그에 따르겠다는 말로 들렸다.하지만 처음에 둘 사이를 공개하기 원치 않았던 사람은 바로 그였다.그런데 대체 왜 지금에 와서 갑자기 결혼을 인정하는 거지?여이현이라는 남자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다고 자부했던 지유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눈앞에 있는 남자가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었다.“완전히 아내 바라기시네요. 행복해 보이시니 저도 더는 묻지 않겠습니다. 하하하”이진환이 너털웃음을 짓자 그 뒤에 있던 몇 명의 남자들이 줄지어 축하를 보냈다.“늦었지만 결혼 축하드립니다, 여 대표님. 그리고 큰 사모님도 며느리 맞은 거 축하드립니다!”여진숙은 애써 입꼬리를 올려 인사를 받았다. 조금 전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예비 며느리는 노승아라고 얘기했는데 여이현이 나타나 자신은 이미 결혼했다고 해버리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승아는 자신에게서 이현을 뺏어간 지유가 미치도록 싫었다.왜 자신이 받아야 하는 것들을 지유가 누리고 있는지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여진숙을 티슈를 가져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승아야, 조금만 참아. 이제 곧 있으면 모든 게 다 네 것이 될 거야, 응?”승아는 그녀의 말에 오늘도 또 참아야 한다.모든 게 자신의 것이 되는 그날을 위해서.하지만 매번 이런 말밖에 듣지 못하니 이제는 점점 인내심이 바닥을 치게 된다....“지유야, 봤어? 노승아 오늘 사람들 앞에서 개망신 당한 거잖아. 그것도 여이현이 직접 그렇게 만든 거고!”지희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나 진짜 웃겨 죽을 뻔했잖아. 너 노승아 얼굴 제대로 못 봤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옆에 부축 안 해줬으면 아마 바닥에 쓰러졌을걸? 엄청나게 쪽팔릴 거야. 미래 여씨 가문 안주인이라고 있는 허세 없는 허세 다 떨었을 텐데, 꼴 좋다.”지희는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웃다가 이번에는 이현을 칭찬하기 시작했다.“그리고 이제 보니 여이현도 괜찮네. 네 편 들어준 거잖아.”사람들 앞에서 자신은 기혼자라는 사실을 밝힌 것만으로도 이현이 이 결혼을 가볍게만 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다.지희는 물론이고 지유 역시 그 말은 너무 의외였다.“지유야, 무슨 생각해? 혹시 아까 여이현이 너 지켜주던 생각? 확실히 멋있긴 했어?”지유는 자신보다 더 신난 듯한 지희를 보며 물었다.“웬일이야? 싫다고 질색할 때는 언제고.”“오늘은 네 편 들어줬잖아. 그리고 노승아 한 방 먹인 것만으로도 여이현은 오늘 충분히 칭찬받을 자격 있어. 당분간은 싫은 거 해제.”이에 지유가 웃었다.“이렇게 쉬워도 돼?”“지유 너도 똑같거든? 아, 참. 이럴 때가 아니라 빨리 마저 세팅해야지. 여이현한테 제일 예쁜 모습 보여줘야 하지 않겠어?”지유의 제일 친한 친구로서 지희는 그녀가 행복하기를 원한다. 만약 그 행복이 여이현 옆에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라면 온 마음을 다해 지지해 줄
여이현은 말이 없었다.침묵은 곧 긍정이다. 온지유는 화가 나서 바로 여이현의 가슴을 향해 주먹을 세게 내리쳤다.“다시 한번 그딴 생각 하기만 해봐, 내가 직접 죽여버릴 테니까!”온지유는 진심으로 화가 났다. 5년이다. 그 긴 시간을 고통 속에서 아이를 생각하며 버텨왔다.여이현은 살아 있으면서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처음에는 정신이 돌아오지 않아 어쩔 수 없다 쳐도, 그럼 그 뒤에는?여이현은 한마디도 뻥긋하지 않았다. 그걸 떠올릴 때마다 온지유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이 사람은 또 같은 짓을 반복하려 하는 게 아닌가!신무열은 덤덤하게 여이현을 한번 흘겨보았다.“맞아도 싸죠. 저의 하나 뿐인 동생이 그 몇 년간 어떻게 지내왔는데 또 그 고통을 다시 겪게 하려니 말이에요. 이현 씨, 남자라면 정정당당하게 이 모든 걸 해결하고 돌아오세요.”“잘 알고 있습니다.”여이현은 자신이 완벽히 처리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온지유와 약속한 것들을 꼭 지켜야만 했다.신무열은 시선을 거뒀다. 할 말은 이미 다 했다. 남은 건 여이현 본인이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다.그렇게 여이현과 온지유는 함께 S국으로 떠났다.브람은 여이현이 홀로 돌아올 줄 알고 있었다. 온지유가 함께 돌아온 것을 본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심지어 온지유측에는 사람이 여럿 딸려있었고 화국의 군대도 동행했다.여러세력의 동원하에 내란은 작은 파도에 불과했고, 신속히 가라앉았다.가장 주요한 병력은 화국의 군대였다.여이현은 직접적으로 태도를 밝혔다.“다음에 또 같은 사건이 발생하면 될수록 내부에서 해결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화국인이고 타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닙니다.”여이현은 브람이 자신의 친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된 뒤에도 별 감흥이 없었다. 온지유처럼 받아들이지 못할 일도 아니라고 여겼다. 여이현은 어릴 적부터 화국에서 자랐고 몸에 밴 습관도 모두 화국의 것이었다. S국의 사람들에게 있어 여이현은 밖에서 온 타국인이었다.그런 신분으로 어떻게 이 나라를 통치
그 속에는 나라를 향한 것도, 브람을 향한 것도 있었다.브람이 그의 친아버지가 아니더라도 목숨을 구해 준 은혜는 갚아야 했다.온지유는 이 상황에 대한 억울함과 세상의 불공평함에 화가 났다. 거기다 여이현의 말을 들으니 더더욱 속이 무너져 내렸다.온지유는 여이현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이현 씨가 짊어진 책임이 크다는 걸 알아. 그러니까 이번에야말로 당신 곁에 있고 싶어. 제발 나도 데려가 줘.”“절대 발목 잡는 일이 없도록 노력할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기자로서 보도를 낼게. 우리는 부부고 아이도 있잖아.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함께 해결해 나가자.”여이현은 온지유의 각오를 느꼈다. 그는 과거 자신이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그리고 눈앞의 온지유의 얼굴도.여이현은 결국 마음이 녹아내렸다.그는 온지유를 끌어안고 가볍게 키스했다.“그래, 데려갈게. 내 곁에 있어 줘. 무슨 일이 일어나든 꼭 지켜줄 테니까.”자신의 목숨을 내주더라도 온지유만은 지키고 말 테다.S국으로 향하기로 결정했으니 신무열에게도 한마디 보고할 필요가 있었다.신무열은 온지유가 S국으로 가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이현 씨는 처리할 업무가 있어서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너는 따라갈 필요 없잖아. 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별이는 어쩌려고.”여이현은 휴가를 즐기러 외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가는 것이다. 지금의 S국은 바뀌기 전의 Y국과 같은 상황이었다. Y국에는 신무열이 온지유 손목의 푸른 구슬을 알아봐 도와줄 수 있었다 하지만 S국에는 도와줄 사람은 누구도 없다.여이현의 친아버지인 브람조차 온지유를 좋게 보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할까. 만일 돌아가서 그들이 쳐둔 덫에 걸리기라도 하면?정말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여이현 혼자서라면 탈출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온지유를 데려가는 이상 그에게는 짐이 늘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다.“별이는 아버지가 봐주고 계시잖아요. 난... 이기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난 무슨 일이 있든 이현
브람이 상황을 정리할 사람을 찾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여이현은 이 모든 것이 음모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예상치 못하게 강서현이 다시 나타나다니.이때 강서현은 급히 여이현에게 말했다.“이현 씨, 지금 S국 상황이 정말 좋지 않아요. 대통령님이 당신을 데려오라고 하셨어요. 이현 씨가 아내와 함께 있고 싶다는 건 알지만, 그때 대통령님 덕분에 당신이 지금 이곳에서 무사히 있는 거예요.”강서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여이현은 의식을 회복한 뒤 줄곧 S국의 일을 돕고 있었다.그는 스스로 올해까지만 자신에게 시간을 주기로 결심했지만 온지유가 자신을 알아보게 되면서 일들이 꼬이기 시작했다.“잠시만 기다려줘.”여이현은 결국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잠시 기다리라고 말했고, 강서현은 조용히 기다렸다.온지유와 여이현은 누구보다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였다. 그가 S국으로 돌아가려면 온지유와 작별 인사를 나눠야 했다.대통령이 여이현을 데려오라고 명령했지만 강제적으로 데려오라는 지시는 아니었기에 그는 잠시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여이현은 온지유에게 다가갔다.그들의 대화를 들은 온지유는 단호하게 말했다.“S국으로 가야 한다면 나도 같이 갈래. 난 더는 기다리고 싶지 않아.”그녀는 이미 5년을 고통 속에 혼자 버텨왔고 다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여이현은 그녀의 마음을 알았지만 S국의 상황이 심각해 온지유를 데려가는 것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지유야. 나에게도 우리 아들이 소중하지만 너와 함께 사랑스러운 딸도 낳고 싶어. 이번에 다녀오더라도 안전하게 돌아올 테니, 여기서 나를 기다려줘. 만약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아들을 잘 키워줘.”만약 브람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미 Y국에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부득이하게 목숨을 바쳐야 한다면 빚을 갚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온지유에게 이 모든 것을 감당하게 하는 건 너무 가혹했다.그는 한때 무슨 일이 있어도 온지유와 함께할 것을 맹세했으며 어떤 일이 있어도 가족에게
강서현의 눈빛은 마치 “네가 뭐가 잘났다고 그렇게 우쭐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온지유는 전혀 우쭐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저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말했다.“강서현, 네가 모를 수도 있지만, 나보다 먼저 여이현 곁에 있었던 여자가 한 명 더 있어. 노승아라고, 나보다 먼저 나타났어.”노승아는 여이현에게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결국 여이현의 곁에 남은 사람은 온지유였다. 때로는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걸 강서현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강서현은 노승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온지유의 말을 듣고 자신과 여이현의 관계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처음 여이현을 봤을 때 그의 매력적인 외모에 이끌렸고, 그의 일 처리 능력과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도 반했다.항상 원하는 건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그녀에게 여이현 앞에서의 좌절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을 얻고 싶다는 승부욕이 그녀를 계속 부추겼다.잠시 침묵하던 강서현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온지유, 미안해.”마침내 그녀도 자신의 집착이 무의미함을 깨달았다. 온지유는 강서현이 더 이상 집착하지 않도록 일부러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강서현이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게 되어 온지유로서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사과는 받아줄게. 그렇지만 네가 내 아이섀도에 약을 넣은 일은 넘어갈 수 없어. 치료비는 네가 부담해. 그래야 두 번 다시 우리를 방해하지 않겠지.”강서현이 결혼식을 망친 데 이어 온지유에게 알레르기까지 일으켰으니, 당연히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앞으로 강서현이 여이현과 자신의 삶에 더는 개입하지 않는다면 온지유도 더 이상 벌을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알았어.”강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고, 온지유는 여이현에게 그녀를 풀어주라고 말했다.하지만 여이현은 온지유의 말을 바로 따르지 않았다. 온지유를 해친 사람을 가볍게 넘길 수는 없었다. 그는 강서현에게 온지유가 겪은 고통을 그대로 돌려주었다.눈이 부어오르는 알레르기 반응으로 괴로워하는 강서현
조사를 하다 보니 결국 강서현의 소행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강서현은 결혼식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어도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짓이 밝혀진 이상, 여이현은 강서현을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강서현은 온몸이 꽁꽁 묶인 채 여이현과 온지유 앞에 끌려왔다. 강서현은 병상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는 온지유를 보며 이를 갈듯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쏘아보았다.“나와 여이현이 여기까지 왔는데도 아직 포기하지 못했구나. 그래도 네가 여이현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건 알겠어. 아니면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겠지.”강서현은 여이현에게 아이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았고 결혼식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져도 마음을 접지 않았다. 이 정도면 진심이 아니면 뭐겠는가. 온지유는 여이현을 째려보며 말했다.여이현은 온지유가 강서현과 단둘이 있는 걸 불안해했다. 이때 온지유는 웃으며 말했다.“이미 온몸이 묶여 있는 상태고 당신과 부하들도 있는데, 쟤가 감히 날 어떻게 하겠어?”온지유는 여이현이 걱정했던 부분을 그대로 짚어서 말했다. 둘은 미리 얘기한 것도 아닌데, 단지 눈빛만으로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이는 강서현이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온지유를 보며 강서현은 부러움과 질투, 그리고 깊은 원망을 느꼈다.만약 온지유와 여이현이 재회하지 않았더라면, 여이현은 S국에 남아 대통령 자리에 오르고 자신과 함께 있었을 것이다.아이 문제도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여이현과 함께라면 자신의 아이도 생길 것이고 대통령이 된 후엔 별이도 그녀의 곁에서 자랄 수 있을 테니까.하지만 모든 계획을 망친 것은 다름 아닌 온지유였다!온지유가 여이현을 이렇게까지 사로잡은 힘이 무엇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여이현은 그녀만 바라보고, 주변 사람들도 온지유를 사랑하고 보호해 주었다는 사실이 강서현에게는 더욱 억울하고 분통 터질 일이었다.“나와 여이현이 여기까지 왔는데도 넌 왜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내가 죽으면 네게 무
그러나 신무열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머뭇거리며 말했다.“지금 말하기엔 너무 이른 것 같아. 막상 그때가 되면 네가 후회할지도 몰라.”“나라가 없으면 가정도 없는 법이잖아요. 당신을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고, 당신의 책임감과 모든 걸 잘 알고 있어요. 무열 씨의 모든 걸 조건 없이 받아들일 수 있어요. 만약 제가 거짓말을 한다면 벌을 받을 거예요!”김혜연은 진심을 보여주기 위해 손을 들며 맹세하려고 했다.신무열은 그녀의 손을 잡고 멈추게 하며 말했다.“그런 맹세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네 마음 믿어. 넌 정말 좋은 사람이고 나한테도 소중한 사람이야. 하지만 난 평범한 사람이 아니야. 내 인생은 Y족을 위해 존재하는 거야.”“그렇다고 해서 평생 Y족만 위해 살 순 없잖아요. 법로도 가정을 이루고 있는데, 당신도 혼자 외롭게 지낼 필요는 없어요. 정말이에요, 저...”김혜연은 신무열을 꼭 껴안으며 주변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엔 오직 신무열뿐이었다.“알겠어. 조금 더 생각해 볼게.”“네.”신무열은 주저하고 있었다. 평소엔 중요한 일에 망설임 없이 나서지만, 감정 문제에선 오히려 더 망설였다. 그가 걱정하는 건 김혜연이 상처받는 것이었다.김혜연은 기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당신이 어떤 결정을 하든, 저는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절대 떠나지 않을 거예요.”신무열이 필요로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돕고 싶었다. 그가 그녀 곁을 떠나더라도 언제든 그를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김혜연의 마음속엔 오직 신무열과의 평온한 삶뿐이었다.세 시간 후 두 사람은 돌아왔다. 오늘 일은 이미 뉴스에 보도된 상태였다.온지유는 두 사람을 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오빠, 새언니! 오늘 두 분이 같이 싸우는 모습 정말 멋졌어요!”김혜연은 그 호칭에 살짝 당황하며 말했다.“Y족에서 그런 상황을 많이 겪다 보니, 우리도 기본적인 자기방어는 할 수 있어야죠. 그리고... 저와 무열 씨는 아직 결혼한 사이가 아니니까
김혜연과 신무열은 순식간에 불량배들을 쓰러뜨리고 경찰에 신고까지 했다.주변에 사람들이 많자 김혜연은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이 사람, 얼마 전 제가 경찰에 넘긴 사람인데 한 시간도 안 돼 풀려나서 이렇게 사람들까지 모아 우리를 협박하네요. 혹시 조직폭력배 세력인가요?”이 말이 나오자마자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이 상황에 경찰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다.“이 사람을 잡아 비난과 교육을 했고 심지어 반성문까지 받았는데도 다시 나와 이런 소란을 일으키네요.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불법 세력은 반드시 뿌리 뽑아 시민들의 안전을 지키겠습니다!”신무열은 이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책임자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확실히 처리할 것을 요청했다.그러자 김혜연은 살짝 미안해하며 말했다.“저는 그저 그 소녀가 안쓰러워 보여서 도왔을 뿐인데, 일이 이렇게 번져버렸네요. 무열 씨가 한 말 기억할게요. 다음에 이런 일이 또 생긴다면...”“그런 말 하지 마. 네가 안 나섰어도 내가 나섰을 거야.”신무열은 김혜연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사실 그들은 같은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었고 상황이 닥치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성격이었다.“하지만 앞으로는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할게요.”김혜연은 다시 한번 약속했다.신무열은 김혜연의 이마를 톡 치며 말했다.“알았으니까 그만하고 더 볼 거 없으면 지유를 찾으러 가자.”“볼 게 있죠. 당연히 있죠!”김혜연은 신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눈이 반짝였다.그러다 김혜연은 근처에 유명한 사진작가가 있다는 말에 가슴이 설렜다.신무열은 그녀의 마음을 알아채고 말했다.“너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김혜연은 순간 당황하며 말했다.“다 들켰네요. 게다가 이미 커플 반지도 샀는데 이것도 괜찮지 않아요?”그녀는 신무열의 팔을 흔들며 부탁했다.신무열은 이런 부탁을 받아본 게 온지유가 어릴 때 투정 부릴 때 이후로 처음이라 당황했다. 김혜연이 워낙 그보다 어리다 보니 신무열은 차마 거절하기
이런저런 생각만으로도 김혜연은 기분이 좋아졌다.그런 그녀를 보며 신무열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무슨 생각하는 거야? 혼자서 그렇게 웃으면서.”신무열의 목소리에 김혜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이런 일들을 신무열에게 들키면 안 된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얼른 가요.”김혜연은 얼버무리며 걸음을 재촉했다....한편, 온지유는 김혜연과 신무열이 길을 잃을 리 없다고 생각하고 그들에게도 각자의 시간을 주고 싶어 여이현과 천천히 산책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그러다 멀리서 영화 촬영을 하고 있는 걸 본 온지유는 문득 지선율이 떠올랐다.지선율은 나중에 유명 감독이 되었고, 장다희는 인기 여배우가 되었다. 한때는 자주 연락하던 친구들이지만 지금은 각자 바빠 거의 연락하지 못했다.신혼여행이 끝나면 해야 할 일들이 하나둘 떠올랐다.이때 여이현이 조용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연예계에 관심 있으면 내가...”온지유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나이도 서른이 넘었는데 무슨 연예계야. 괜히 시간 낭비지.”“꼭 배우가 될 필요는 없잖아. 기획자나 감독, 아니면 작가도 될 수 있지. 하고 싶은 거 있어?”여이현의 말은 온지유에 대한 아낌없는 배려였다. 그녀가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그러자 온지유는 말했다.“이제 다시 생각해 볼게.”여이현이 고개를 끄덕이었다. 온지유는 여이현이 가리킨 쪽을 보니 신무열과 김혜연이 나란히 팔짱을 끼고 얘기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두 사람 이제 잘 돼 가는 것 같네. 신무열은 자꾸 아닌 척하지만.”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좋은 일이 곧 생길 것 같아.”여이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좋은 일이지.”신무열은 온지유보다 몇 살 더 많았다. 다른 사람들은 신무열 나이쯤 되면 이미 아이도 몇 명씩 있었지만 그는 이제야 겨우 여자 친구가 생긴 셈이었다.온지유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그런데 우리 정말 같이 다닐 거야?”여이현은 신무열과 김혜연에게도 각자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과거 Y국에 전쟁이 일어날 때 김혜연은 신무열을 따라다니며 최고 수준의 격투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불량배는 김혜연을 떼어내려고 애썼지만 ㄴ오히려 그녀에게 제압당해 발밑에 깔리고 말았다.“돈 안 내놓을래? 지금 당장 경찰서로 끌고 갈 거야!”그 말에 불량배는 겁에 질려 서둘러 빌었다.“돈 돌려줄게요! 두 배로 줄 테니까, 제발 경찰서에만은 데려가지 말아 주세요!”김혜연은 냉정하게 말했다.“돈부터 돌려주고 얘기해.”불량배는 어쩔 수 없이 소녀에게서 빼앗은 돈을 돌려주었고, 김혜연은 소녀의 몫만 가져와 소녀에게 돌려준 후, 한 손으로 불량배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 경찰에 신고했다.‘잡초를 뿌리째 뽑지 않으면 다시 자라듯이... 참 운도 없어. 나를 만나다니.’경찰이 도착해 불량배를 데려가고 나자, 김혜연은 소녀에게 돈을 더 건네며 말했다.“언니가 도울 수 있는 게 이것뿐이야. 이 돈으로 잘 지내길 바랄게.”어린 나이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 거리로 나온 소녀를 보니 김혜연은 전쟁 속에서 힘들어하던 아이들이 떠올랐다.‘전쟁이 없었더라면, 나라가 평화로웠다면 얼마나 좋았을까.’그랬다면 신무열도 법로도 가정을 희생하지 않고 평범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감사합니다, 언니.”소녀는 김혜연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소녀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김혜연은 소녀가 전화하며 Y국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같은 나라 사람이었구나!’같은 동포라는 생각에 김혜연은 더 정이 갔다. 하지만 소녀는 이미 저 멀리 가버렸다.이때 신무열이 다가와 말했다.“이곳에 사는 사람도 아닌데 다음에는 이런 일에 휘말려 들지 마.”김혜연은 격투 실력이 뛰어났지만 이곳은 타지이고 그녀는 혼자였다. 만약 불량배들이 무리를 지어 있었다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김혜연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그때는 그런 거 생각할 여유가 없었어요. 그리고 무열 씨도 제 옆에 있었잖아요.”그녀는 그저 소녀를 돕고 싶었을 뿐이었다. 신무열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