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아의 매니저가 어디선가 소식을 듣고 오더니 승아에게 귓속말을 전했다.“언니, 온지유 저 여자가 한 짓이래요.”그 말에 승아의 시선이 지유에게로 향했다.지희와 얘기하며 웃음꽃을 피우는 그녀의 모습에 잔뜩 약이 오른 승아는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그쪽으로 다가갔다.‘나 골탕 먹이려는 사람이 너였어?’승아는 지유가 머리 세팅도 하고 메이크업도 받으려고 하자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혹시 지금 저 보라고 꾸미는 거예요? 아니면 오빠가 한 번이라도 봐줬으면 해서 꾸미는 거예요?”지희의 스타일리스트가 해주는 대로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던 지유는 거울로 승아가 잔뜩 비꼬며 다가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항상 지유 앞에서만 이러한 본색을 드러내고는 했다.지유는 그녀를 힐긋 보고는 더 이상 시선을 주지 않고 그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착각도 자유네요. 제가 꾸미는 건 오로지 저를 위한 거예요.”“말은 잘하네요. 그러면 제 드레스 수선은 왜 방해하려 했는데요? 예진이가 원장님하고 얘기하는 거 듣고 기분 나빠져서 수선 못 하게 막은 거잖아요?! 파티에서 저만 스포트라이트 받을까 봐 불안하기라도 한 거예요?”그 말에 옆에 있던 지희가 입을 열었다.“이봐요, 노승아 씨, 혹시 피해망상증이라도 있어요?”그러자 승아가 도끼눈을 뜨고 지희를 바라보았다.“지금 대화 중인 거 안 보여요? 그쪽은 끼어들 주제가 안 되니까 빠져요.”“대체 자기가 뭐라고 이렇게 활개를 치는지 모르겠네, 그래봤자 불륜녀인 주제...”짝.지희의 비아냥거림에 승아가 바로 뺨을 내리쳤다.“네가 뭔데 나를 모욕해?”얼떨결에 뺨을 맞은 지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승아가 눈물이 가득 고인 채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뺨을 맞은 사람이 승아인 줄 착각할 수도 있을 장면이었다.“이게 감히 나한테 손을 대?!”흥분한 지희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자 승아의 매니저들이 우르르 달려와 그녀를 포박하고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그 모습에 지희와 함
이에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 입을 떡하니 벌렸다.장다희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지유 씨, 미쳤어요? 지유 씨가 손댄 사람 노승아 씨라고요!”직장 동료가 깜짝 놀라 외쳤다.노승아는 머리가 옆으로 돌아간 채 그 자리에서 몇 초간 얼어버렸다.“이건 노승아 씨가 지희한테 손댄 거 갚아준 거예요.”지유가 담담하게 이유를 말해주었다.김예진은 설마 승아가 맞을 줄은 몰랐는지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지유를 밀어버렸다.“이봐요, 미쳤어요? 지금 누구한테 손을 대는...”짝.그때 지유가 이번에는 김예진에게도 손을 올렸다.“이런 예의도 모르고 사리분간도 하지 못하는 매니저 때문에 노승아 씨가 뺨을 맞는 겁니다.”“이, 이 미친!!”김예진은 갑작스럽게 날아든 뺨에 씩씩대며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승아는 지유에게 맞은 쪽 뺨을 감싸며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예진아, 그만해. 우리가 건드릴 수 있는 여자가 아니야...”“누굴 못 건드려?”그때 여진숙이 달려 들어와 지유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또 너야? 이번에는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너 계속 이렇게 나랑 이현이 뒤에서 승아 괴롭히고 있었지? 고작 비서 주제에 지금 어딜 감히 내 예비 며느리한테 손을 대?!”승아는 여진숙의 품에 안겨 서럽게 울었다.“아주머니...”사람들 앞에서 노승아가 자신의 예비 며느리라고 인정하는 그 모습은 참으로 여진숙다웠다.그녀의 말 때문에 이제 사람들은 승아가 미래 여씨 집안 안주인이라고 더 확신할 수 있었다.지유의 마음은 이 순간 차갑게 가라앉았다. 여씨 가문에 시집을 간지 어언 3년, 한 번도 인정받지 못한 건 둘째치고 이제는 대놓고 이런 모욕까지 받게 되었다.여진숙과 승아는 마치 친 모녀처럼 애틋하기 그지없었다.지유는 전혀 움츠러드는 기색 없이 또박또박 대꾸했다.“자고로 사람이라면 시비를 제대로 가릴 줄은 알아야죠. 노승아 씨가 무슨 짓을 하든 저랑은 상관없는 일이지만 제 친구를 건드린다면 얘기가 달라지죠.”승아가 울면서 답변
갑작스럽게 밝힌 결혼 소식에 자리에 있는 모두가 다 놀라고 말았다.승아의 혈색이 삽시간에 창백해지더니 곧 빨개진 눈으로 이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에 지대한 상처라도 받은듯했다.대체 여이현은 무슨 생각으로 사람들 앞에서 결혼을 인정한 거지?충격이 컸던 승아가 다리에 힘이 풀려 쓰려지려 하자 다행히 여진숙이 옆에서 부축해주었다.이현의 행동에 충격을 받은 건 비단 승아뿐이 아니었다. 지유 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결혼식 날 밤 만약 두 사람의 결혼을 다른 이에게 알린다면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했던 사람이 바로 이현이였으니까.지유는 지금 머리가 혼란스럽고 현실감이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몇 초간 멍하니 있던 이진환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이거 참, 여 대표님도 너무하시네요. 결혼한 사실도 얘기 안 해주시고 부인이 누군지도 얘기 안 해주시니.”“아내가 공적인 자리에 얼굴을 비추는 걸 원하지 않아서요. 저는 제 아내 말만 듣는 편이라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지유는 그 말이 마치 자기 들으라고 하는 말인 것만 같았다.그녀가 두 사람 사이를 공개하기 싫다고 하면 이현은 그에 따르겠다는 말로 들렸다.하지만 처음에 둘 사이를 공개하기 원치 않았던 사람은 바로 그였다.그런데 대체 왜 지금에 와서 갑자기 결혼을 인정하는 거지?여이현이라는 남자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다고 자부했던 지유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눈앞에 있는 남자가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었다.“완전히 아내 바라기시네요. 행복해 보이시니 저도 더는 묻지 않겠습니다. 하하하”이진환이 너털웃음을 짓자 그 뒤에 있던 몇 명의 남자들이 줄지어 축하를 보냈다.“늦었지만 결혼 축하드립니다, 여 대표님. 그리고 큰 사모님도 며느리 맞은 거 축하드립니다!”여진숙은 애써 입꼬리를 올려 인사를 받았다. 조금 전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예비 며느리는 노승아라고 얘기했는데 여이현이 나타나 자신은 이미 결혼했다고 해버리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승아는 자신에게서 이현을 뺏어간 지유가 미치도록 싫었다.왜 자신이 받아야 하는 것들을 지유가 누리고 있는지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여진숙을 티슈를 가져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승아야, 조금만 참아. 이제 곧 있으면 모든 게 다 네 것이 될 거야, 응?”승아는 그녀의 말에 오늘도 또 참아야 한다.모든 게 자신의 것이 되는 그날을 위해서.하지만 매번 이런 말밖에 듣지 못하니 이제는 점점 인내심이 바닥을 치게 된다....“지유야, 봤어? 노승아 오늘 사람들 앞에서 개망신 당한 거잖아. 그것도 여이현이 직접 그렇게 만든 거고!”지희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나 진짜 웃겨 죽을 뻔했잖아. 너 노승아 얼굴 제대로 못 봤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옆에 부축 안 해줬으면 아마 바닥에 쓰러졌을걸? 엄청나게 쪽팔릴 거야. 미래 여씨 가문 안주인이라고 있는 허세 없는 허세 다 떨었을 텐데, 꼴 좋다.”지희는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웃다가 이번에는 이현을 칭찬하기 시작했다.“그리고 이제 보니 여이현도 괜찮네. 네 편 들어준 거잖아.”사람들 앞에서 자신은 기혼자라는 사실을 밝힌 것만으로도 이현이 이 결혼을 가볍게만 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다.지희는 물론이고 지유 역시 그 말은 너무 의외였다.“지유야, 무슨 생각해? 혹시 아까 여이현이 너 지켜주던 생각? 확실히 멋있긴 했어?”지유는 자신보다 더 신난 듯한 지희를 보며 물었다.“웬일이야? 싫다고 질색할 때는 언제고.”“오늘은 네 편 들어줬잖아. 그리고 노승아 한 방 먹인 것만으로도 여이현은 오늘 충분히 칭찬받을 자격 있어. 당분간은 싫은 거 해제.”이에 지유가 웃었다.“이렇게 쉬워도 돼?”“지유 너도 똑같거든? 아, 참. 이럴 때가 아니라 빨리 마저 세팅해야지. 여이현한테 제일 예쁜 모습 보여줘야 하지 않겠어?”지유의 제일 친한 친구로서 지희는 그녀가 행복하기를 원한다. 만약 그 행복이 여이현 옆에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라면 온 마음을 다해 지지해 줄
지유가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예전의 그라면 이러한 칭찬은 안 했을 텐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분 거지?“진심이에요?”이현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미소를 지었다.“왜, 거짓말 같아? 아니면 자신이 없는 거야?”평소와는 다른 스타일링에 지유는 많이 긴장했지만 애써 그런 모습을 감추고 말했다.“아니요.”“예뻐, 너랑 잘 어울려.”이현은 그 말과 함께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다른 사람들한테 너 보여주기 싫을 정도야.”이현의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오자 지유의 얼굴이 점차 빨개지더니 헛기침을 하며 그를 밀쳐냈다.“이현 씨가 예쁘다면 확실히 예쁜 게 맞겠죠.”이현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왜 내가 예쁘다고 하면 예쁜 건데?”지유는 그에게 새침하게 웃어 보이며 답했다.“글쎄요?”이렇게 아름답게 꾸민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은 오직 여이현 이 남자뿐이니까.지유는 자신이 생각하고도 조금 민망한지 앞으로 걸어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현이 그녀의 손을 끌어당기더니 자신의 옆에 단단히 세워놓았다.“오늘 밤은 내 파트너로 옆에 있어.”전에는 항상 비서 자격으로 옆에 있었기에 지유는 잠깐 망설였다.“괜찮을까요?”“괜찮지는 않지.”지유가 멈칫했다.이현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웃었다.“자꾸 옆만 쳐다보게 될까 봐 아주 큰일이야.”지유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를 흘겼다.“말 좀 제대로 할 수 없어요?”이현은 아무런 대답 없이 또 한 번 지유를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그는 이런 모습의 지유가 싫지 않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꽤 마음에 들었다.그녀는 더 이상 아무 감정도 없는 일 기계가 아니라 화도 내도 웃을 줄도 알며 가끔은 애교도 부리는 그런 여자였다.파티장 안에는 어느새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이현과 지유가 등장하자 플래시가 전부 그들에게로 향했다.지유는 처음 받아보는 스포트라이트에 많이 긴장한 듯 자꾸 얼굴을 이현 쪽으로 가까이 가져갔다.“어머나,
“여 대표님.”그때 누군가가 다가와 이현을 부르더니 곧바로 옆에 있는 지유를 보며 인사를 건넸다.“여 대표님 옆에 미인이 누구인가 했더니 온 비서였네요. 하하하, 너무 예뻐서 깜짝 놀랐지 뭡니까.”“과찬이세요. 손 대표님 파트너분이 더 예쁘신데요, 뭘.”지유가 미소를 지으며 남자와 악수를 하려는데 이현이 막아섰다.“오늘은 파트너 자격으로 온 거 명심해.”남자는 그 모습에 뻘쭘해 하기는커녕 손을 거두어들이더니 유쾌하게 웃었다.“이거 참, 오늘은 예쁜 지유 씨 멀리서만 구경해야겠네요.”한편, 멀지 않는 곳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무리가 있었다.“여이현 대표님 파트너, 누구인가 했더니 비서였네요? 난 또 얼마나 대단한 여자인가 했네.”장다희의 매니저가 일부러 누구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얘기했다.“비서의 지위가 어디 있는 누구보다 훨씬 높나 보네요.”그 바로 옆에는 승아가 있었다.어쩔 수 없이 다른 드레스로 입게 된 승아는 지유처럼 이목을 끌지 못했다.이현이 자신은 결혼했다고 밝힌 뒤부터 그녀는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어버렸다.여진숙이 꿋꿋이 옆을 지켜줬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대놓고 조롱을 들어야만 했을 것이다.지유는 지금 멈출 줄 모르는 카메라 셔터 앞에 서서 이현의 파트너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승아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거슬려 주먹을 꽉 쥐었다.자신을 향해 쉬쉬 대는 소리가 사방팔방에서 들려왔지만 여진숙의 말처럼 지금은 참아야만 한다. 조금만 더 참다 보면 지유의 모든 것이 조만간 자신의 것이 될 테니까.장다희는 매니저의 비아냥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승아를 보더니 꼴좋다는 듯 피식 웃고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밀려드는 손님들 상대하느라 지유는 지금 죽을 맛이었다. 그녀는 평소 8센치가 넘는 힐은 신지 않을뿐더러 가지고 있는 힐들은 전부 발이 편한 통굽 힐이었다.하지만 지금은 10센치가 되는 힐을 신고 있고 게다가 통굽도 아니기에 발이 너무나도 아팠다.게다가 배고 무척이나 고팠다. 결국, 그녀는 타이밍을 보다가 적당한 이유를
아프다.지유의 입꼬리가 통제를 듣지 않고 멋대로 위로 올라갔다.아픈 걸 보니 확실히 꿈은 아니었다.여이현이 정말 발을 마사지해주고 있는 게 맞았다.이현은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자신이 아프게 한 건가 싶어 물었다.“아파?”지유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그녀는 코끝이 빨갛게 변한 채로 말했다.“그냥 이현 씨가 이런 행동을 할 줄은 몰라서요.”이런 사소한 행동도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크게 다가왔다.이현은 조금 감동한 것 같은 그녀의 눈과 마주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다.“그동안 내가 너무 무심했지?”지유는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물론 힘들 때도 있었지만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다.그리고 이현이 지금 이렇게 온기로 데워주니 그 힘들었던 마음도 어느새 다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지유는 이현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짙고 까만 눈동자와 오뚝한 콧날 그리고 빨간 입술...지유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를 불렀다.“이현 씨.”이에 이현이 마사지를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지유는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싸더니 눈을 지그시 감고 입을 맞췄다.그녀는 지금 이 순간 이 입맞춤에 그를 향한 자신의 마음과 줄곧 그만 바라보았던 애틋함을 전부 다 담았다.이현은 몇 초간 멍하니 있더니 곧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더 짙게 키스를 해왔다.“대표님, 요구하신 신발 사 왔습니다.”배진호는 헐레벌떡 뛰어왔다가 눈앞의 상황을 목격하고는 순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지유는 나쁜 짓이라도 한 아이처럼 서둘러 이현을 밀어내더니 입가의 흔적을 지우고 고개를 돌렸다.이현은 진호의 등장에 상당히 언짢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조, 조금 이따 다시 오겠습니다.”진호가 서둘러 떠나려고 하자 지유가 그를 불러세웠다.“배 비서님, 무슨 일로 오셨어요?”진호는 자신을 죽일 듯이 쳐다보는 이현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대답했다.“대표님께서 사모님 발 아프실까 봐 저한테 단화를 사 오라고 하셨거든요.”진호에게 이현과 부부 사이라는 것을
“사모님 말고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배 비서님이 사모님이라고 하는 거 습관이 안 되기도 하고 게다가 지금은 사람들도 많이 있잖아요.”진호는 부부 사이를 왜 굳이 숨기려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일단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평소 호칭으로 불렀다.“그럴게요, 지유 씨.”지유는 어느 정도 배가 부르자 경매가 열리는 쪽으로 향했다.그러다 누군가와 부딪히고는 습관처럼 먼저 사과를 했다.“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괜찮아요, 지유 씨.”고개를 들어보자 부딪힌 사람은 장다희였다.“다희 씨.”다희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악수했다.“오늘 너무 예쁘시네요. 여이현 대표님이 반할 만해요.”“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저는 대표님 비서이고 오늘은 그저 파트너 자격으로 옆에 있는 것뿐이에요. 이미 결혼하신 분인데 저와 괜한 구설에 휘말리면 안 되죠.”다희는 지유를 잠깐 바라보다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제가 경솔했네요. 앞으로는 주의하죠.”“책망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안으로 들어갈까요?”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안쪽을 가리켰다.“그래요.”두 사람은 앞뒤로 나란히 경매장 안으로 들어갔다.오늘 파티의 메인인 자선 경매가 시작되었다.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여진 그룹은 매년 자선 경매를 열었다. 경매로 벌어들인 수익금은 전부 자선 단체에 기부하게 된다.지유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현이 승아와 함께 웬 영화감독과 얘기하는 모습을 보았다. 즐겁게 얘기를 나누는 셋의 모습을 보니 어쩐지 그쪽으로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조금 떨어진 곳에서 발걸음을 멈추자 마찬가지로 그 모습을 보던 다른 사람들의 쉬쉬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이현이 결혼을 인정하기는 했으나 승아와의 관계도 여전히 애매한 상태였고 결혼 상대가 나타나지 않으니 이현과 승아가 여전히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추측이 많았다.지유는 애써 신경 쓰이지 않는 척했지만 시선은 계속 두 사람을 쫓았다.경매가 시작되고서야 세 사람은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승아는 이현의 옆이 아닌 여진숙의 옆에 앉았다. 두 사람은 정말 모녀라도
권다솔은 이미 자신을 때릴 준비가 된 아버지의 손바닥을 감당할 각오를 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예상했던 통증은 오지 않았다.눈을 뜬 그녀는 권용민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으면서 참아내는 모습을 보았다.김영은이 옆에서 권용민을 달래며 말했다.“혼자 화낸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지금 중요한 건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느냐죠. 이건 분명히 진호 씨 쪽 문제예요.”“당장 진호 씨를 불러서 해결해야 해요.”권용민은 그 말을 듣고 딸을 곁눈질로 보며 속으로 화를 다스렸다.참고 또 참고 나서야 그는 여전히 차갑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들었지.”“만약 아직도 자존심이 있다면 더는 진호 씨를 감싸선 안 돼. 그는 다 큰 남자다.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권다솔은 잠시 침묵한 후 배진호에게 문자를 보내 집으로 오라고 했다.문자를 받은 배진호는 급히 회사에서 달려왔다.거실에서 앉아 있는 권다솔을 보자마자 다가가려 했지만 권용민의 날카로운 시선에 얼어붙었다.“길게 말하고 싶지 않네요.”권용민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손으로 권다솔을 가리키며 말했다.“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당신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두 들었습니다.”배진호는 고개를 들고 권용민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제 어머니가 그날 한 말은 잘못됐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 생각도 그렇다는 뜻이 아닙니다.”권용민은 그의 단호한 눈빛을 보며 속으로 약간 안도하면서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그는 배진호를 나쁘게 보지 않았다.그를 존중한 이유는 단순히 과거에 자신을 구한 은혜 때문이 아니라 그의 능력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었다.처음에는 배진호를 단순한 비서로만 보았다. 하지만 이후 그는 자신의 실력으로 한 기업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며 능력을 증명했다.그의 경영 방식은 보통 사람이 쉽게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권용민은 배진호를 인정했다.그 기억을 떠올리며 권용민은 자신의 날카로웠던 시선을 조금 누그러뜨리며 말했다.“진호 씨, 저는
김영은은 깜짝 놀라 잠시 말을 잃었다.“너 그 집안과 엮이고 싶지 않다고 했었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왜 또?”권다솔은 고개를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김영은은 딸의 반응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걸 알았기에 굳이 캐묻지 않았다.하지만 권용민은 달랐다.“그때는 결혼하면 잘해 주겠다느니 너희가 행복하게 살 거라느니 말만 번지르르하게 했네.”권용민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런 일이 생긴 거냐?”“이건 전적으로 진호 씨의 잘못은 아니에요...”“아직도 진호 씨를 두둔하는 거야? 그럼 말해 봐. 진호 씨 잘못이 아니라면 왜 너는 이틀 동안 아무 소식도 없었던 거냐?”권다솔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테이블 아래에서 손가락을 꼬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릿속이 뒤엉켰다.그녀는 부모님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두 분 모두 불의를 참지 못하고 화를 잘 내는 성격이었다. 만약 자신이 배진호의 어머니에게서 받은 모욕을 털어놓으면 김영은은 분명 즉시 그 집으로 찾아가 난리를 칠 것이다.그리고 겨우 허락했던 권용민 역시 배진호와의 이혼을 요구할 게 뻔했다.부모님에게 있어 딸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용납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결국 권다솔은 침묵을 선택했다.그녀의 태도에 권용민은 더욱 답답함과 분노를 느꼈다. 딸이 집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좋아, 네가 말하지 않으면 내가 진호 씨에게 직접 물어봐야겠다!”권용민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결혼한 지 일주일도 안 돼서 내 딸이 이런 대접을 받는 이유가 뭔지 물어보지 않으면 안 되겠어!”그러면서 휴대폰을 들어 배진호에게 전화를 걸려 했다.권다솔은 급히 그의 손을 붙잡으며 전화를 막아섰다. 그녀는 김영은과 함께 애타게 설득하며 아버지를 저지했다.휴대폰을 간신히 빼앗았지만 권용민의 화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분명히 말한다, 다솔아. 오늘 네
남태건의 거듭되는 청혼은 권다솔에게 그의 절박함을 분명히 느끼게 했다.그 절박함은 오히려 그녀가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했다.다음 날, 열이 내린 권다솔은 남태건에게 떠나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남태건은 잠시 멈춰 서 담담하게 물었다.“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서둘러 떠나려는 거야?”“의사도 쉬라고 했잖아.”어제 공진혁이 분명히 더 쉬어야 한다고 말했었다.하지만 공진혁과 남태건의 친밀한 분위기를 본 권다솔은 그의 말을 신뢰할 수 없었다.권다솔은 단호히 떠나겠다고 했다.남태건의 눈빛은 점점 차가워졌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거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며 불안한 공기가 감돌았다.유선화와 집안 사람들은 분위기를 파악하고 입을 다물었다.오랜 침묵 끝에 남태건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는 우아하게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지금은 안 돼.”“왜 안 되는 건데요?”권다솔이 이마를 찌푸리며 물었다.“지금 인터넷에서 떠도는 소문들 잊었어? 여론이 정리되지 않으면 네가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어. 차라리 배진호에게 더 책임감 있게 행동해서 빨리 그런 소문들을 잠재우라고 해.”남태건은 입가에 냉소를 띠며 말했다.권다솔은 지금 인터넷에 떠도는 소문들을 떠올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소문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것들은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배진호는 자신이 해결하겠다고 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권다솔은 다시 한번 스스로를 다독였다.‘믿어야 해. 진호 씨를 믿어야만 해.’그녀는 깊은숨을 들이쉬며 말했다.“그래도 여기에 더 이상 머물 수는 없어요. 이미 오래 머물렀고 더 이상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아요. 오늘 밤 짐을 정리해 집으로 돌아가겠어요.”“가능하다면 차를 마련해 주셨으면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제가 알아서 갈게요.”권다솔의 단호한 태도에 남태건은 잠시 그녀를 응시했다. 그 순간 그녀를 억지로라도 붙잡아 두고 싶다는 어두운 충동이 머릿속을 스쳤다.하지만 결국 남태
권다솔의 간곡한 부탁에 유선화는 충전 중이던 휴대폰을 건네주었다.권다솔은 통화 기록을 열어보았다. 부재중 전화는 예상대로 열 통이 넘었고 가장 최근 것은 5분 전에 걸려 온 것이었다.익숙한 번호를 바라보며 그녀는 망설였다.마음 깊은 곳에서는 배진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가 자신의 안부를 묻는 다정한 목소리 걱정 어린 말들이 그리웠지만 전화를 걸 손가락이 화면에 닿을 때마다 정미진의 차가운 말투가 떠올랐다.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머뭇거리던 찰나 휴대폰이 갑자기 진동하며 울리기 시작했다.놀란 권다솔은 전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선화 씨, 이 전화 좀 대신 받아주실 수 있나요?”권다솔은 유선화를 바라보며 말했다.방금 겨우 모은 용기가 전화벨 소리와 함께 흔들려버렸다.“지금은 누구와도 연락하고 싶지 않아요.”유선화는 의아해했지만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전화기를 받아 든 유선화는 뜻밖에도 상대가 남자라는 점에 놀랐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에는 지친 기색이 가득했다.전화기 너머에서 배진호는 기쁨을 억누르지 못한 듯 말했다.“다솔 씨, 드디어 전화를 받아줬네요!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예요?”“다솔 씨를 정말 오래 찾아다녔어요. 아무리 찾아도 너를 찾을 수 없었어요. 어머니 대신 사과할게요. 제발 집으로 돌아와 주세요.”“저기... 죄송하지만, 저는 다솔 씨가 아닙니다.”유선화는 약간 어색하게 말을 끊었다.전화기 너머로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나서야 배진호의 혼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럼 당신은 누구죠?”“저는 집안일을 돕는 사람입니다. 다솔 씨께서 지금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시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도 하셨습니다. 며칠 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원하신다고 하시네요.”권다솔은 옆에서 손짓으로 유선화에게 할 말을 알려주었고 유선화는 그녀의 말을 따라 천천히 전달했다.모든 말을 전한 뒤 전화기 너머에서는 길고도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마치 시간이 멈춘 듯 그 침묵은 끝날 줄 몰랐다.한참의 침묵
남태건은 굳은 얼굴로 권다솔에게 다가가 손등을 그녀의 이마에 살짝 대었다.뜨거운 열기가 손끝으로 전해지자 그의 얼굴은 더 어두워졌다.남태건이 손을 거두며 공진혁을 부르려 했지만 그 순간 손을 붙잡혔다. 멈칫하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권다솔이 그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옆에서 지켜보던 유선화와 비서는 잠시 말을 잃었다.방 안은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 찼다.남태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려는 찰나 권다솔의 입에서 그의 인내심을 시험할 이름이 흘러나왔다.“배진호 씨...”남태건은 순간적으로 손을 뿌리치듯 빼냈다.“대표님! 제가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비서는 서둘러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유선화도 눈치를 보며 방에서 나갔다.곧 가정의인 공진혁이 도착해 기본적인 검사와 약 처방을 준비했다.하지만 약을 처방하려던 순간 남태건이 중단시켰다.“임신 중이니까 약효가 순하고 아이에게 해가 되지 않는 걸로 처방해 줘.”남태건은 침대에서 잠든 권다솔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이 사실을 알게 되면 너는 또 얼마나 나를 원망하게 될까.’공진혁은 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물었다.“아이를 임신했다고?!”남태건은 담담한 얼굴로 공진혁을 흘낏 보며 대답했다.“내 아이는 아니야. 더는 묻지 말고 진료나 계속해.”공진혁은 남태건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무언가 복잡한 사정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권다솔은 약을 먹은 뒤에도 깨어나지 않았지만 표정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하루 종일 이어진 소동 끝에 이제야 조금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공진혁은 남태건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 물었다.“아까 네 아이가 아니라고 했잖아. 그런데도 이렇게 애쓰는 걸 보면 무언가 특별한 감정이 있는 것 같은데.”“설마 남의 아이를 키울 생각이라도 있는 거야?”남태건은 그 말을 듣고 싸늘한 눈빛으로 공진혁을 쳐다보았다.비록 오랜 친구 사이였지만 그 질문은 그가 참아내기 어려운 선을 넘었다.남태건의 날카로운 시선에 공진혁은 긴장한 듯 침을 삼키며 말했다.“역시 너
얇은 입술을 살짝 다문 남태건의 검은 눈동자는 어디에도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그때, 발표를 하느라 진이 빠진 팀장이 기대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좋아요.”남태건은 무심하게 대답한 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그대로 진행하세요.”그 말을 남기고 직원들의 혼란스러운 얼굴을 뒤로 한 채 회의실을 떠났다.밖으로 나오자마자 그의 비서가 다급히 다가왔다.“대표님! 한 남성분이 회사에 무단으로 들어와 대표님을 꼭 만나야 한다고 합니다.”남태건은 발걸음을 멈췄다.1층 로비로 내려간 그는 예상대로 배진호와 마주쳤다.두 사람의 분위기는 지난번 유람선에서의 만남보다 훨씬 더 날카로웠다. 차가운 표정을 한 두 사람은 마치 당장이라도 싸울 것처럼 서로를 노려봤다.리셉션 직원은 긴장하며 상황을 지켜봤다. 혹시라도 자신이 말려들까 봐 잔뜩 몸을 움츠렸다.“남태건 씨, 다솔 씨를 어디로 데려갔죠?”배진호는 냉정하게 물었다.그는 밤새 고민했다.권다솔의 집을 찾아봤지만 그녀는 없었다. 남태건 외에 권다솔이 찾아갈 만한 사람은 없었다.권다솔은 원래 이런저런 곳을 다니는 성격이 아니었고 가까운 사람도 몇 없었기에 남태건이 가장 의심스러웠다. 과거에 이미 그녀를 데리고 간 적도 있었으니 더욱 그랬다.남태건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태연한 태도로 대답했다.“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배진호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차올랐다.“태건 씨!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을 텐데요. 다솔 씨에 대한 마음을 제가 모를 거라고 생각해요? 당신이 인터넷 여론을 조작한 것도 모를 거라고요?”두 사람의 시선이 강렬하게 부딪혔다.배진호는 분노로 가득 찬 눈빛으로 응시했다. 남태건은 도발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리셉션 직원은 충격을 받으며 조용히 입을 틀어막았다.‘이렇게 큰일을 듣게 되다니... 혹시 이 때문에 회사에서 쫓겨나는 건 아니겠지?’남태건은 끝까지 권다솔의 행방을 밝히지 않았다.시간이 지날수록
남태건은 권다솔에게 서두르거나 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집에 머물게 하며 객실을 준비해 주었다.권다솔은 지금 어디로 갈지조차 알 수 없었다.휴대폰은 꺼둔 상태였고 배진호와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으며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이곳에 머무르게 되었다.밤이 지나고, 권다솔은 휴대폰을 다시 켰다. 부재중 전화가 열 통 넘게 쌓여 있었다.모두 배진호가 걸어온 것이었다.“아가씨.”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일어나셨나요?”문을 열자 한 중년 여성이 서 있었다. 온화한 인상을 가진 그녀는 손에 새우 죽 한 그릇을 들고 있었다. 죽 위에는 은은한 기름과 짧게 썬 파가 얹혀 있었고 식욕을 자극하는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권다솔의 시선을 눈치챈 여성은 부드럽게 말했다.“저는 이 집의 가정부입니다. 유선화예요.”“도련님께서 방해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벌써 점심때가 다 됐는데 다솔 씨께서 아무것도 드시지 않은 것 같아서 몸이 상할까 걱정돼 죽을 가져왔어요.”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죽 그릇을 옆 테이블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태건 씨가 그렇게 하라고 한 거예요?”“그런 셈이죠. 다솔 씨를 많이 걱정하고 계세요. 사실 저는 가문 쪽에서 이곳으로 온 사람이에요.”유선화는 마치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친절한 눈빛으로 권다솔을 바라봤고 그 시선에 둰가솔은 조금 어색함을 느꼈다.“도련님께서 이렇게 누군가를 신경 쓰시는 건 정말 처음 봐요.”“그래요...”권다솔은 입술을 움직였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남태건의 마음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솔직히 말해 권다솔은 어젯밤 그 차에 탄 걸 후회하고 있었다.어젯밤 그녀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았고 비를 맞은 탓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남태건의 집까지 따라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이리저리 얽힌 생각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권다솔은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약간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거기 놔두세요. 조금 있다 제가 먹을게요.”그렇게 말한 뒤
차는 3층짜리 고급 별장 앞에서 멈춰 섰다.남태건은 권다솔에게 차에서 내려 옷을 바꿔 입을 것을 제안했다.그제야 권다솔은 그를 본 후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저는 안 들어갈게요. 그냥 길가 아무 데나 내려주시면 돼요.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이 상태로 길가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을 거야?”남태건이 가리킨 곳을 바라본 권다솔은 젖은 옷이 몸에 착 달라붙어 드러난 몸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 당황했다.어디를 가려야 할지도 몰라 순간적으로 경직된 얼굴이 되었다.남태건은 더 이상 말로 설득하지 않고 별장의 문으로 가서 지문 잠금을 해제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권다솔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그를 따라 들어갔다.남태건이 그녀에게 불순한 마음을 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하지만 두 집안의 오랜 인연을 고려하면 그가 실제로 그녀를 해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였다.반면 밤길에 홀로 남아 위험을 마주할 가능성은 훨씬 높았다.권다솔은 그런 상황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별장의 인테리어는 단정하면서도 차가운 느낌을 주었다.남태건이라는 사람처럼 차가우면서도 품위 있는 오만함이 묻어나는 공간이었다.처음엔 그런 분위기가 다가가기 어렵게 느껴졌지만 권다솔은 곧 자신의 생각을 바꿨다.남태건은 그녀를 위해 목욕물을 미리 준비했고 수건과 세면도구 세트는 물론, 갈아입을 옷까지도 마련해 두었다.그 세심함에 권다솔은 약간 놀라면서도 의아했다.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남태건은 그녀에게 따뜻한 우유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이거 마셔. 기분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거야.”권다솔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잔을 받아 들고 조용히 말했다.“고마워요.”잔을 손에 든 채 소파에 앉자 몸속으로 퍼지는 따뜻함이 빗속에서 느꼈던 차가움을 몰아내는 듯했다.식어 있던 마음도 몸이 따뜻해짐에 따라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남태건은 소파의 다른 쪽에 자연스럽게 앉아 다리를 꼬았다. 카키색 스웨터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약간 주름이 생겼다. 그는 솔직하게 물었다.“왜 혼자 비를
권다솔은 순간 온몸의 피가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배진호는 두 주먹을 단단히 쥔 채였다.“어머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요. 이건 다솔 씨의 잘못이 아니에요. 다솔 씨에게 사과하세요.”“사과? 그까짓 거 하면 되지.”배진호의 어머니인 정미진은 입으로는 사과한다고 말했지만 표정에는 일말의 미안함도 없었다.“다솔 씨, 이해하지? 우리 집이 큰 가문은 아니어도 나와 진호 아버지는 교직에 몸담아 왔어. 교양 있는 가문이라고. 그런 우리 집에 당신 같은 사람은 받아들일 수 없어.”정미진은 애초에 말을 순화할 의도가 없었다.권다솔은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빼앗긴 채 사람들 앞에 던져진 것 같은 굴욕감을 느꼈다. 참혹함에 권다솔은 숨을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그녀의 마음이 소리쳤다.'여기서 더는 못 버텨.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해.'권다솔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의자가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오늘은 제가 실례했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그 말을 남기고 권다솔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밖으로 뛰쳐나갔다.배진호는 그녀를 따라가려 했지만 정미진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발을 붙잡았다.“지금 나가면 다시는 이 집으로 돌아올 생각하지 마! 진호야, 내 말 잘 들어. 내가 죽기 전에는 절대로 이런 여자와 결혼 못 시켜. 결혼한 다음에도 이런저런 남자와 얽히는 여자는 절대 안 돼!”배진호가 잠깐 망설인 사이 모든 것이 틀어지고 말았다.몇 분 후, 배진호는 비를 맞으며 권다솔을 찾아봤지만 그녀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그가 건 전화도 모두 연결되지 않았다.여이현이 그의 전화를 받았을 때 배진호는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대표님! 제발 다솔 씨를 찾아주세요. 다솔 씨를 본가로 데리고 갔다가 문제가 생겼습니다.”“집 밖으로 뛰쳐나가서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비가 오는 데 혼자 있어서 걱정돼요.”배진호의 다급한 목소리에 그가 얼마나 초조한 상태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여이현은 아무런 주저 없이 돕기로 했다.하지만 두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