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 대표님.”그때 누군가가 다가와 이현을 부르더니 곧바로 옆에 있는 지유를 보며 인사를 건넸다.“여 대표님 옆에 미인이 누구인가 했더니 온 비서였네요. 하하하, 너무 예뻐서 깜짝 놀랐지 뭡니까.”“과찬이세요. 손 대표님 파트너분이 더 예쁘신데요, 뭘.”지유가 미소를 지으며 남자와 악수를 하려는데 이현이 막아섰다.“오늘은 파트너 자격으로 온 거 명심해.”남자는 그 모습에 뻘쭘해 하기는커녕 손을 거두어들이더니 유쾌하게 웃었다.“이거 참, 오늘은 예쁜 지유 씨 멀리서만 구경해야겠네요.”한편, 멀지 않는 곳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무리가 있었다.“여이현 대표님 파트너, 누구인가 했더니 비서였네요? 난 또 얼마나 대단한 여자인가 했네.”장다희의 매니저가 일부러 누구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얘기했다.“비서의 지위가 어디 있는 누구보다 훨씬 높나 보네요.”그 바로 옆에는 승아가 있었다.어쩔 수 없이 다른 드레스로 입게 된 승아는 지유처럼 이목을 끌지 못했다.이현이 자신은 결혼했다고 밝힌 뒤부터 그녀는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어버렸다.여진숙이 꿋꿋이 옆을 지켜줬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대놓고 조롱을 들어야만 했을 것이다.지유는 지금 멈출 줄 모르는 카메라 셔터 앞에 서서 이현의 파트너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승아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거슬려 주먹을 꽉 쥐었다.자신을 향해 쉬쉬 대는 소리가 사방팔방에서 들려왔지만 여진숙의 말처럼 지금은 참아야만 한다. 조금만 더 참다 보면 지유의 모든 것이 조만간 자신의 것이 될 테니까.장다희는 매니저의 비아냥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승아를 보더니 꼴좋다는 듯 피식 웃고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밀려드는 손님들 상대하느라 지유는 지금 죽을 맛이었다. 그녀는 평소 8센치가 넘는 힐은 신지 않을뿐더러 가지고 있는 힐들은 전부 발이 편한 통굽 힐이었다.하지만 지금은 10센치가 되는 힐을 신고 있고 게다가 통굽도 아니기에 발이 너무나도 아팠다.게다가 배고 무척이나 고팠다. 결국, 그녀는 타이밍을 보다가 적당한 이유를
아프다.지유의 입꼬리가 통제를 듣지 않고 멋대로 위로 올라갔다.아픈 걸 보니 확실히 꿈은 아니었다.여이현이 정말 발을 마사지해주고 있는 게 맞았다.이현은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자신이 아프게 한 건가 싶어 물었다.“아파?”지유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그녀는 코끝이 빨갛게 변한 채로 말했다.“그냥 이현 씨가 이런 행동을 할 줄은 몰라서요.”이런 사소한 행동도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크게 다가왔다.이현은 조금 감동한 것 같은 그녀의 눈과 마주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다.“그동안 내가 너무 무심했지?”지유는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물론 힘들 때도 있었지만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다.그리고 이현이 지금 이렇게 온기로 데워주니 그 힘들었던 마음도 어느새 다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지유는 이현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짙고 까만 눈동자와 오뚝한 콧날 그리고 빨간 입술...지유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를 불렀다.“이현 씨.”이에 이현이 마사지를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지유는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싸더니 눈을 지그시 감고 입을 맞췄다.그녀는 지금 이 순간 이 입맞춤에 그를 향한 자신의 마음과 줄곧 그만 바라보았던 애틋함을 전부 다 담았다.이현은 몇 초간 멍하니 있더니 곧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더 짙게 키스를 해왔다.“대표님, 요구하신 신발 사 왔습니다.”배진호는 헐레벌떡 뛰어왔다가 눈앞의 상황을 목격하고는 순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지유는 나쁜 짓이라도 한 아이처럼 서둘러 이현을 밀어내더니 입가의 흔적을 지우고 고개를 돌렸다.이현은 진호의 등장에 상당히 언짢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조, 조금 이따 다시 오겠습니다.”진호가 서둘러 떠나려고 하자 지유가 그를 불러세웠다.“배 비서님, 무슨 일로 오셨어요?”진호는 자신을 죽일 듯이 쳐다보는 이현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대답했다.“대표님께서 사모님 발 아프실까 봐 저한테 단화를 사 오라고 하셨거든요.”진호에게 이현과 부부 사이라는 것을
“사모님 말고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배 비서님이 사모님이라고 하는 거 습관이 안 되기도 하고 게다가 지금은 사람들도 많이 있잖아요.”진호는 부부 사이를 왜 굳이 숨기려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일단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평소 호칭으로 불렀다.“그럴게요, 지유 씨.”지유는 어느 정도 배가 부르자 경매가 열리는 쪽으로 향했다.그러다 누군가와 부딪히고는 습관처럼 먼저 사과를 했다.“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괜찮아요, 지유 씨.”고개를 들어보자 부딪힌 사람은 장다희였다.“다희 씨.”다희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악수했다.“오늘 너무 예쁘시네요. 여이현 대표님이 반할 만해요.”“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저는 대표님 비서이고 오늘은 그저 파트너 자격으로 옆에 있는 것뿐이에요. 이미 결혼하신 분인데 저와 괜한 구설에 휘말리면 안 되죠.”다희는 지유를 잠깐 바라보다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제가 경솔했네요. 앞으로는 주의하죠.”“책망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안으로 들어갈까요?”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안쪽을 가리켰다.“그래요.”두 사람은 앞뒤로 나란히 경매장 안으로 들어갔다.오늘 파티의 메인인 자선 경매가 시작되었다.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여진 그룹은 매년 자선 경매를 열었다. 경매로 벌어들인 수익금은 전부 자선 단체에 기부하게 된다.지유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현이 승아와 함께 웬 영화감독과 얘기하는 모습을 보았다. 즐겁게 얘기를 나누는 셋의 모습을 보니 어쩐지 그쪽으로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조금 떨어진 곳에서 발걸음을 멈추자 마찬가지로 그 모습을 보던 다른 사람들의 쉬쉬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이현이 결혼을 인정하기는 했으나 승아와의 관계도 여전히 애매한 상태였고 결혼 상대가 나타나지 않으니 이현과 승아가 여전히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추측이 많았다.지유는 애써 신경 쓰이지 않는 척했지만 시선은 계속 두 사람을 쫓았다.경매가 시작되고서야 세 사람은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승아는 이현의 옆이 아닌 여진숙의 옆에 앉았다. 두 사람은 정말 모녀라도
10캐럿은 되는 메인 보석 옆에 1캐럿 이상의 다이아몬드가 붙어 있어 상당히 소장 가치가 있는 액세서리였다.지유는 여진숙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 마침 승아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승아는 그녀를 보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는 일말의 도발도 묻어있었다.확실히 자랑할 말도 했다.지유는 결혼하고 나서 여진숙에게서 그 어떤 선물도 받은 적 없으니 말이다.첫 입찰 결과 사파이어 목걸이 세트는 여진숙에게 60억이라는 거금으로 낙찰 당했다.경매품은 곧바로 승아의 앞에 전달되었다. 사람들 앞에서 여진숙의 선물을 받게 된 승아는 이제야 체면이 사는 것 같아 활짝 웃었다.“너무 예뻐요. 고마워요, 아주머니.”여진숙은 꿀이 뚝뚝 떨어지는 표정으로 답했다.“그래. 네가 좋아하는 것 같으니 나도 기쁘구나.”사람들은 모두 승아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자기 며느리도 아닌데 이렇게 챙기는 게 말이 돼? 부럽다.”“누가 알아? 조만간 며느리가 될지.”“하지만 여이현 대표 결혼했다며?”“아직 와이프가 누군지는 얘기 안 했잖아. 그리고 아까 뒤쪽에서 사모님이 노승아가 자기 예비 며느리라고 했다는 거 못 들었어? 여이현 대표가 노승아 연예계 진출에 힘 써주는 것도 그렇고 확실히 평범한 사이는 아닐 거야. 이러다 며칠 뒤에 사실 그 와이프는 노승아였습니다 라고 할지 또 누가 알겠어, 안 그래?”“어머, 그럴 수도 있겠네. 아니지, 지금으로 봐서는 확실히 그럴 것 같아!”지유는 이 대화들을 전부 묵묵히 듣고 있었다.경매는 어느새 막바지를 달리고 있었고 드디어 제일 마지막 경매품이 모습을 드러냈다.지유가 담담한 얼굴로 구경하는데 갑자기 옆에서 이현이 입을 열었다.“30억.”“40억.”그때 누군가가 입찰해왔다.“100억.”이현이 또다시 외쳤다.2배가 넘는 가격이기에 상대도 포기하나 싶던 찰나 또다시 음성이 들려왔다.“110억!”이현도 지지 않고 또다시 불렀다.“120억!”지유는 이현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경매품 쪽을 바라보았
케이스 안에는 다름 아닌 아까 이현이 낙찰받았던 에메랄드 보석 팔찌가 들어있다.지유는 안쪽으로 들어와 이현에게 말했다.“무슨 일로 부르셨어요?”“이쪽으로 와.”지유가 그의 옆으로 다가가자 이현은 케이스를 열더니 모두가 보는 앞에서 팔찌를 지유의 손목에 끼워주었다.그 모습에 승아의 얼굴은 굳어지고 여진숙은 당황한 듯 다급하게 물었다.“너, 너 그거 승아 주려고 낙찰받은 거 아니었니?”“승아는 엄마가 옆에서 챙겨주잖아요. 저까지 챙겨줄 필요 있어요?”이현이 단호하게 얘기하자 여진숙이 입을 꾹 닫고 미간을 찌푸렸다.지유는 갑자기 손목이 무거워지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건 200억짜리 팔찌였다.한 번도 이런 비싼 물건을 지닌 적 없는 그녀였던 터라 지금 상당히 어색하고 불편했다.“이건 너무 비싸요. 이 팔찌 끼고 다니다가 보석에 흠이라도 생기면 어떡해요?”지유가 서둘러 다시 팔찌를 빼려고 하자 이현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으며 의미심장한 얼굴로 얘기했다.“이건 내가 너 주려고 낙찰받은 거야. 그러니까 잃어버리지 말고 잘 간직해.”올곧게 마주 오는 그의 시선을 보고 있자니 이 팔찌가 그에게는 무척이나 큰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그리고 그 의미 있는 물건은 지금 그녀의 손목 위에서 반짝거리고 있다.이건 그가 그녀에게 주는 일종의 명분 대신일까?지유는 팔찌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한참 뒤에야 답했다.“네, 그럼 잘 간직할게요.”이현은 그녀의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위로 올리고 웃었다.“이제 와서라고 하기 민망하지만 이 팔찌 너랑 결혼할 때 못 해줬던 선물이라고 생각해.”“새삼스럽게 무슨 선물이에요. 이미 충분히 많은 걸 주셨잖아요.”그들의 혼인에 사랑은 없었지만 이현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돈 쓰는 걸 아끼지 않았다. 언제나 제일 좋은 것들로만 주었다.그런 점을 고려해 보면 이 남자는 충분히 좋은 사람이었다.승아는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을 보더니 눈물을 흘리며 방을 뛰쳐나갔다.“승아야, 승아야!”여진숙은 승아가
그 말에 지유의 발걸음이 멈췄다.싸늘한 한기가 발끝으로부터 천천히 몸을 감싸는 듯한 느낌이었다.지금 저게 무슨 말이지?그녀와 결혼한 게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지분 때문이라니?지유는 몸을 뻣뻣하게 돌려 서재 쪽을 바라보았다. 작은 문틈으로 두 사람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여희영은 지금 화가 잔뜩 난 채 서 있었고 여이현은 다리를 꼰 채 소파에 앉아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네.”짤막한 그의 대답에 지유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이현이 그녀와 결혼을 결심한 건 할아버지 지분이라는 조건 때문이었다.결혼식 당일 밤 그녀와는 아무런 사이로도 발전할 생각이 없다고, 그녀에게 주제를 알라는 듯이 말했던 것 모두 그 이유 때문이었다.그녀는 처음부터 그저 장기 말일 뿐이었다.“네가 쉽게 타협할 애가 아닌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러면 지유는? 너 이거 지유한테 못 할 짓 하는 거야.”이현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보상해줄 생각이에요.”여희영은 아무렇지도 않은 그의 태도에 더욱더 화가 났다.“지유한테 잘해준 게, 그게 다 보상이었다는 소리니?”이현은 잠깐 멈칫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 맞아요.”지유는 그의 말에 심장이 찢기는 듯한 고통이 밀려와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그녀는 뒤로 휘청거리며 벽을 짚었다.보상 때문이었다고?다정하게 챙겨주던 그 모습이 전부 다 보상 때문이라고?이용한 게 미안해서 마음에 걸려서 그래서 잘해줬던 건가?지유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울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여이현, 너 대체 왜 이렇게 됐니? 대체 언제부터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는 사람이 된 거냐고! 지금의 널 보고 있으면 네 엄마가 보이는 것 같아서 치가 떨려. 정말 실망이다.”여희영은 지금 상당히 흥분하고 있어 목소리도 무척이나 컸다. 지유는 두 사람의 대화를 더 들을 용기가 없었다. 여기서 더 많은 걸 알게 되면 상처받는 건 어차피 자신일 테니까.지유는 도망치듯 그 서재에서 멀어져 황급히 계단을 내려오더니 바
밖으로 뛰쳐나온 지유는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전혀 추운 줄 몰랐다. 그저 지금은 어디론가 도망가고만 싶을 뿐이었다.얼마나 달렸을까, 그녀는 서서히 발걸음을 멈추고 거친 숨을 토해냈다.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바닥을 바라보니 어디선가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지유는 그제야 자신이 눈물범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눈물들이 볼을 타고 쉴 틈 없이 아래로 떨어졌다.모든 게 다 가짜였다.그와 함께했던 아름다운 순간들도, 설렐 만큼 다정했던 그의 모습들도 전부 가짜였다.그는 그저 그녀에게 보상해준 것뿐이었다. 단지 그의 죄책감 때문에.지유는 이제야 노승아가 했던 말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여이현이 그녀와 결혼한 건 이용하기 위한 것뿐이라는 그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그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일말의 호감도 작은 떨림도 없었다.지유는 지금 부는 차가운 바람보다 마음이 더 시리고 추워 자신의 두 다리를 꼭 끌어안았다.마치 상처받기 싫은 아이처럼 얼굴을 묻은 채 그렇게 웅크리고 있었다.하지만 이미 상처는 받았고 마음은 너덜너덜해졌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지유는 서서히 고개를 들어 뒤에 있는 큰 별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처음부터 저 자리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지유는 지금 지갑도 핸드폰도 아무것도 손에 쥐고 있지 않아 이 밤에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두 손으로 팔을 감싸고 정처 없이 길가를 거닐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시야가 흐릿하나 싶더니 이내 그녀는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한편, 여희영은 서재 문고리를 잡고는 아직 화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이현에게 경고했다.“네가 한 말 꼭 지켜야 할 거야. 지유는 상처받아도 되는 그런 애 아니야. 그 노승아인지 뭔지 하는 애보다 훨씬 더 나은 아이니까 처신 똑바로 해. 노승아가 눈에 밟혀도 이제는 눈길도 주지 마! 만약 지유가 상처받기라도 한다면 내가 너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야, 알아들어?!”“저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이현은 냉랭한
전화기 너머에서 확신하지 못하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온지유 씨가 사무실에 있는 모습을 본 사람이 있는 건 맞습니다만 쭉 지키고 있었던 건 아니라서 확신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이현도 한때는 지유를 의심한 적이 있었으나 언제나 선을 지키고 실수 한 번 없었던 그녀였기에 그 의심도 머지않아 곧바로 사그라들었다.그날 일에 관해 물었을 때 그녀가 많이 긴장한 듯 보이긴 했지만 말이다.이현은 전화를 끊고 또 컴퓨터도 끄더니 드디어 서재에서 나왔다.안방에 도착해 보니 불은 켜져 있었지만 그 어디에도 지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녀의 핸드폰은 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이리저리 찾아보다 그 어디에도 지유가 보이지 않자 이현은 결국 도우미에게 물었다.“집사람은 어디 갔습니까?”“아까 아래로 내려오는 모습을 보긴 했습니다만...”도우미도 잘 모르는듯한 눈치였다.지유는 별장 그 어디에도 없었고 핸드폰을 지니지 않아 연락조차 할 수 없었다. 이현은 슬슬 걱정됐는지 다급하게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지유가 사라졌습니다. 지금 당장 어디 있는지 찾아내세요!”...지유는 힘겹게 눈꺼풀을 떴다.그녀는 아직도 머리가 어지러운 듯 눈을 뜨자마자 금세 미간을 찌푸렸다.그리고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병원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깨셨어요, 환자분?”그때 마침 간호사가 옆으로 다가왔다.지유는 그녀를 보며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뭐가 어떻게 된 거죠? 제가 왜 여기...”“환자분이 길가에 쓰러져있던 걸 어떤 마음 착한 분이 병원에 데리고 오셨어요. 핸드폰도 없이 왜 추운 날 혼자 밖에 돌아다니셨어요. 그분 아니었으면 환자분 정말 길가에서 동사할 수도 있었다고요.”지유는 그제야 정신을 잃기 전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밖을 보니 벌써 다음날 낮이었다.“저혈당 때문에 쓰러지셨어요. 핸드폰 빌려드릴 테니까 얼른 가족분들에게 연락하세요. 입원 절차도 아직이라 그것도 해주시고요.”가족?부모님에게 연락하면 걱정하실 게 뻔했다.여이
“훌륭합니다. 양시은 변호사는 법 조항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능력이 인상 깊네요. 주장도 명확하고 논리 정연해서, 이번 사건을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줬어요.”다른 심사위원들도 잇달아 동의하며 양시은의 변론을 높이 평가했다.대회가 끝난 뒤, 양시은은 관중의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서 내려왔다.그녀는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탈락한 여성 변호사가 갑자기 주먹을 쥐고 외쳤다.“이건 불공평합니다.”조금 전 무대에서 사용했던 마이크가 꺼지지 않았던 터라, 그 소리는 대회장 안팎으로 크게 울려 퍼졌다.순식간에 장내가 조용해졌다.“이번 변론은 양시은 변호사 쪽이 훨씬 수월하게 짜여 있습니다. 게다가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까지 있는 데 왜 참가 자격을 박탈하지 않은 거죠?”그녀의 말에 주위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양시은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표정은 차분하면서도 단호했다.“상황을 잘 모르시는 것 같네요.”양시은의 목소리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저는 어떤 특혜도 받지 않았어요. 모든 절차는 대회 운영위원회의 엄격한 심사를 거쳤고, 온라인상의 소문은 실력 있는 사람을 함부로 정의하지 못한다고 믿습니다.”여성 변호사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여전히 목소리를 높였다.“그래도 지금 누리는 편의가 전부 다 나도현 변호사 덕분이잖아요. 이게 뒤를 봐주는 게 아니면 뭐겠어요?”양시은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나도현 변호사는 대회의 스폰서 중 한 명이고, 스폰서가 추가로 한 명을 뽑을 수 있다는 건 공개된 조항이에요. 그건 운영위원회의 결정이고, 저는 그 범위 안에서 경쟁했을 뿐이죠. 만약 이게 뒤를 봐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스폰서의 추천을 받는 모든 참가자를 그렇게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요?”주위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양시은의 말은 많은 이들에게도 나름의 설득력이 있었다.“게다가 대회 중 제가 보여 준 실력은 심사위원과 관중들이 다 지켜봤다고 생각해요.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결과가 아니었다면, 저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양시은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곧 오늘 대회가 시작되겠네요. 저는 제가 가진 전문성으로 끝까지 가볼 거예요. 설령 못 간다고 해도 떳떳하게 임할 거고요.”그 말을 남기고 양시은은 돌아섰다.곧이어 대회가 시작됐다. 유언비어 때문인지, 방청석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를 편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무시하는 기색까지 드러냈다.그러나 양시은은 전혀 개의치 않고 법 조항을 들고 무대에 올라 당당하게 변론을 펼쳤다.“이모 씨가 몸싸움을 하는 과정에, 증언에 따르면 가해자는 여전히 행동 능력이 있었고 침해 행위가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모 씨의 생존을 위한 반항은 정당방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봅니다.”상대 변호사는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반박했다.“법의학자가 부검한 결과, 피해자는 당시 이미 행동 능력을 상실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도 이모 씨가 공격을 이어간 건 방어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죠.”양시은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이모 씨는 체구가 작아서 키가 160도 안 되는 반면 가해자는 180에 달합니다. 체격 차이가 꽤 크기 때문에 가해자가 완전히 재공격 능력을 잃었다고 확신하기 전까지는 손을 뗄 수 없었겠죠? 이모 씨에게 가해자를 고의로 해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양시은의 목소리는 단단했고, 사건에 대한 이해와 법 조항 활용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 줬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의 전문성에 저절로 감탄하는 분위기였다.상대 변호사 역시 그녀의 논리에 흔들린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반박했다.“그래도 이모 씨의 행동은 필요한 한도를 이미 넘어섰습니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가상 판사가 기침을 하며 둘 사이의 공방을 제지했다.“핵심은 이모 씨의 행동에 주관적 고의가 있었는지를 어떻게 판단하느냐입니다.”양시은은 미묘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실무에서 주관적 고의 판단은 언제나 가장 복잡하고 까다로운 문제였기 때문이다.“이모 씨는 가해자가 이미 행동 불능 상태인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양시은은 차분하게 설명했다.“이
누군가 일부러 여론을 몰아가는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유명한 계정이나 언론 매체들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었다.양시은은 부정적인 댓글들을 보며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다.그녀는 알았다. 이런 때에는 근거 없는 비난이나 헛소문을 굳이 상대하지 않는 게 가장 현명하다는 걸 말이다.더군다나 내일 대회가 있으니 지금은 준비에 전력을 다해야 했다.그녀는 뜬소문에 휘둘리지 않고 대회에 집중하기로 했다. 다음 날 현장에 도착하자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예선에 임했는데 라운드가 거듭될수록 꽤 힘이 들었다.이때 권 변호사가 다가왔다.“요즘은 뒤봐주는 사람만 있으면 뭐든 다 돼요. 뭐 하러 이기겠다고 애쓰겠어요?”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으로 쏠렸다.양시은은 고개를 들고 차가운 눈빛으로 권 변호사를 바라봤다.“다른 사람이 어떻게 말하든 상관없지만 권 변호사님은 변호사시잖아요. 근거 없는 소문을 함부로 떠드는 건 잘못 아닌가요?”양시은의 단호한 말에 주변의 수군거림이 잠시 잦아들었다.권 변호사는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시은 씨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누가 알겠어요? 딱 봐도 뭔가 수상쩍잖아요.”“저는 한낱 신인일 뿐인데 왜 예민하게 구세요? 설마 저한테 지면 체면이 구겨질까 봐 걱정되시는 건가요? 소문이 뭐라고 하든 실력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믿어요.”양시은은 조금도 밀리지 않고 되받아쳤다.“그런 건 시은 씨가 지닌 오점을 다 털어낸 다음에 말씀해요.”권 변호사는 콧방귀를 뀌었다.양시은이 대답할 틈도 없이 나도현이 그녀 뒤에 나타나 어깨를 감싸안았다.“제가 제안한 자리는 맞습니다. 매년 대회 주최 측은 스폰서에게서 참가자를 추천받거든요. 권변이 그 사실을 모르진 않았을 텐데요.”나도현이 나타나자 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그는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운 기세를 뿜어냈다.주위 사람들은 호기심과 놀라움이 뒤섞인 시선을 보냈다.권 변호사는 나도현의 기에 눌린 듯 얼굴이 굳었지만 여전히 억지를 부렸다.“그렇다 해
나도현은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 수건 하나만 두른 채 이리저리 둘러봤지만 양시은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서재에 있을 거라고 짐작했고, 곧 문틈 아래로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확인했다.그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순간 그의 모습은 마치 날개를 활짝 펼친 공작새 같았다. 허리에 둘러맨 건 수건 한 장뿐이었고, 머리카락에는 작은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탄탄한 가슴 근육을 따라 물방울 하나가 서서히 흘러내렸다.그러나 양시은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고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너 먼저 자. 나 아직 판례 보고 있어.”“이거 몇 번이나 봤잖아?”나도현은 그녀의 앞에서 어슬렁거렸다.“그래도 부족해. 내가 제일 뒤떨어지는 건 경험이잖아. 그건 짧은 시간 안에 메우기 힘들어.”양시은이 한숨을 쉬었다.“다음 라운드까지 며칠 남았으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마.”나도현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거의 그녀의 손을 자기 가슴팍에 갖다 댈 뻔했다.하지만 양시은은 여전히 분위기를 몰랐다. 법 조항을 들여다보느라 고개도 들지 않고 다시 말했다.“며칠 안 남았는데, 이렇게 많은 사례를 언제 다 보겠어!”나도현은 답답함을 느꼈다. 법 조항이나 판례가 자신보다 더 매력적인가 싶을 정도였다. 뭐가 됐든 그녀가 통나무인 탓이겠지만 말이다.그는 여러 번 시도했지만 결국 허탕이었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방금 샤워를 마친 양시은의 머릿결에 남아 있는 습기를 보고 드라이어를 꺼냈다. 그러면서 말했다.“머리 젖은 채로 오래 두면 두통 생길 수도 있어.”그는 양시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말려 주고 빗으로 차분히 빗겨 주었다.한참 뒤에야 양시은이 반응하며 고개를 들었다.“고마워, 도현 씨.”이제야 나도현의 어깨가 훤히 드러난 모습을 본 그녀는 잠시 다정한 눈빛을 보이더니 시선이 저절로 아래로 내려갔다. 허리에 수건 한 장만 두른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유혹적이었다.오래된 부부 같은 사이인데도 양시은은 얼굴이 빨개졌다.“안 추워?”“추워
“앞로 하민이를 자주 데리고 올게요.”양시은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요. 그런데 그건 대회 끝나고 나서 얘기해요.”온지유는 그녀의 호의에 감사하면서도 사려깊게 덧붙였다. 지금은 대회가 먼저이기 때문이다.날이 저물 무렵에서야 그들은 집으로 돌아갔다.하민은 가는 길 내내 신이 나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별이랑 잘 놀았나 보구나. 앞으로 자주 놀러올까?”양시은이 그의 의견을 물었다.“좋아요! 저 이제 형아랑 친구예요. 더 자주 만날래요.”하민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잘 통하는 친구가 생겨서 다행이구나. 엄마가 또 약속을 잡아볼게.”양시은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도했다. 별이가 슬픔에서 벗어나는 데 하민이가 도움이 되길 바라며 말이다.집 앞에 도착하자 나도현이 마중 나왔다.“왜 이렇게 늦었어? 오래 기다렸는데.”“기다릴 필요까지 있었어?”양시은은 그와 함께 현관문을 들어섰다.나도현은 담담하게 웃었다.“승리는 같이 축하해야지.”“예선 통과일 뿐인데 아직 기뻐하기엔 일러.”양시은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녀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줄곧 독학 해왔다. 그래도 신인이라는 점은 변함 없었다. 실전 경험이 없는 그녀에게 본선은 더 험난한 길이 될 것이다.“작은 승리도 축하할 가치가 있어.”나도현이 미소를 지었다.하민을 도우미에게 맡기고 그는 양시은을 침실로 안내했다. 촛불이 어둠을 밝히는 공간에서 정성스러운 식탁이 차려져 있었다.양시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도현 씨, 정말 고마워.”“앉아봐.”나도현은 신사답게 의자를 당겨줬다.와인 잔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스테이크를 조심스럽게 썰었다.“네가 직접 구운 거야?”“역시 요리사 수준은 따라가지 못하겠어. 금방 알아차리네.”“특별한 맛이야. 정성이 더 중요하지.”그녀는 한 입 더 먹고는 아쉬운 듯 말을 이었다.“이것저것 먹고 왔더니 배가 고프지 않아서 아쉬워. 이럴 줄 알았으면 아무것도 안 먹고 올 걸 그랬어.”나도현은 레코드 플레이어에
시간을 정한 후, 양시은은 하민을 데리고 온지유의 집으로 갔다.최근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탓에 온지유는 조금 피곤해 보였다. 문을 열고 양시은을 맞이하며 그녀는 물 한 잔을 내주었다.“앉아요.”“미안해요,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지유 씨 곁에 있지 못해서.”양시은은 온지유의 모습을 보며 점점 속상해졌다.온지유는 살짝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양시은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우리 사이에 그런 말은 필요 없어요.”양시은은 흔한 말로 그녀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온지유는 별다른 말 없이 하민과 놀기 시작했다. 하민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별이 형아가 기분이 안 좋다고 해서 제가 놀러 왔어요. 선물도 가져왔어요.”“별이는 위층에 있어.”온지유는 위쪽을 가리키며 한숨을 쉬었다.“별이는 외할아버지랑 많이 친했거든. 그래서...”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양시은은 다 알았다. 그래서 하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하민아, 가서 별이랑 놀래?”하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스스로 계단을 올라갔다.양시은은 하민이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물었다.“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엉망진창인 일들부터 정리해야죠.”온지유는 이마를 문질렀다. 그녀는 매우 힘들어 보였다.“나머지 일들은 나중에 생각하려고요.”양시은은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묻지 않기로 했다.“알겠어요.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요.”“그럼 필요할 때 편하게 부탁할게요.”대답하고 난 온지유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핸드폰을 들고 말했다.“근데 어쩌다 대회에 참가했어요?”“아, 봤어요?”양시은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온지유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드디어 일을 다시 시작하기로 한 거예요?”“네, 늦지 않았기를 바라고 있어요.”양시은은 감회가 담긴 표정으로 말했다.“당연히 늦지 않았죠. 결혼 후에는 오로지 가정에만 집중할 줄 알았는데, 점점 좋아지는 걸 보니 제가 다 기뻐요.”“이제는 특별히 신경 쓸 게 없어요. 그러니 앞으로 나아가야죠.”
나도현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차분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자신 있으면 고소해요. 저도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거니까요. 공정하게 법정에서 승부를 보죠.”권 변호사는 흥미를 잃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됐어요, 저도 그냥 구경꾼 입장이라서요. 그리고 그 유명한 나 변호사를 왜 건드리겠어요? 저는 의문을 표한 것이지 주장을 한 건 아니에요.”나도현은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건 무대에서 확인하면 되겠네요.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지 두고 봐요.”권 변호사는 한쪽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그렇게까지 양시은 씨를 믿어요?”나도현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네.”무대에서 MC가 승리한 변호사의 명단을 발표했다. 양시은의 이름 또한 크게 불렸다. 양시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마음속에 기쁨과 만족으로 가득 찼다.곧, 양시은은 무대에서 내려왔다. 나도현이 몸을 일으켜 비서에게서 꽃을 받아 들며 말했다.“축하해.”“이 꽃 미리 준비한 거지?”양시은은 꽃향기를 맡았다. 그녀는 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물론이지.”나도현은 다정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양시은은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었다.“내가 이길 거라고 어떻게 확신했어?”“넌 반드시 이길 거야.”나도현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네 실력으로는 끝까지 가는 것도 아무 문제 없어.”나도현의 확신에 찬 말을 듣고 양시은은 마음속에 따뜻한 기운이 퍼졌지만 겸손하게 말했다.“최선을 다할게. 네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나도현은 그녀를 품에 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결과가 어찌 되든 너는 이미 최고야.”양시은은 그의 품에서 안정감을 느꼈다.잠시 그렇게 있다가, 양시은이 먼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 한 발짝 물러섰다.“왜 그래?”나도현은 그녀가 멀어진 걸 느끼며 약간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우리 이제 좀 조심하자. 네가 스폰서라는 걸 알고 이상한 소문이라도 퍼지면 어떡해.”나도현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너 정말...”그때, 전화가 울렸다
기자회견이 끝난 후 양시은은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때 나도현이 다가와 옆에 앉으며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는 격려의 표시였다.양시은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나 때문에 얼마나 투자했어?”“이건 스폰서의 권한이라 다른 사람과는 상관없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어. 시은아, 너만 마음먹으면 이건 정말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어.”나도현은 진지하게 말했다. 작은 일에 얽매여 괜한 고민하지 말고 눈앞의 일에 집중하자는 뜻이었다.양시은은 곧 결심을 내린 듯 말했다.“알았어. 널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거야.”“내가 아닌 너 자신을 실망시키지 말아야 해.”나도현은 진지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양시은의 마음속에서 감동이 여울처럼 퍼졌다.이튿날 바로 첫 경기가 시작되었다. 변호사의 토론 대회는 심플했다. 한 문제로 찬성팀과 반대팀이 나뉘어 각자의 의견을 주장하는 것이었다.옳고 그름은 나뉘지 않는다. 주최 측은 일부러 애매한 문제를 선정해서 참가자의 언변을 시험했다.양시은은 운 좋게도 작은 로펌을 상대로 뽑았다. 무대로 올라간 다음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옷매무시를 정리했다. 무대에 서 있으니, 자신감으로 넘쳐나던 대학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그녀는 당당한 눈빛으로 무대에 서 있었다. 눈빛 속에는 법조인의 꿈을 향한 열망으로 가득했다. 이 무대는 그녀의 전쟁터자, 그녀의 가치를 다시 증명하는 곳이다.“시작합니다!”MC의 말에 따라 토론이 시작되었다.상대는 경력이 풍부한 것이 분명했다. 논리 정연한 말은 토론이 시작되자마자 마구 쏟아져나왔다.양시은도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또렷한 목소리로 자신의 입장을 지켰고 실제 사례까지 들며 논리를 완성시켰다. 모든 말이 승리를 향한 발걸음이 되었다.무대 아래에서 지켜보던 관객과 심사위원은 보잘것없는 줄 알았던 신입 변호사인 그녀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그녀의 실력은 단순히 법에 대한 이해를 넘어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는 힘을 발산했다. 그것은 정의에 대한 갈망과 공정함
“네!”양시은은 들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사람들은 점점 더 모여들었다.그러다 한 대형 로펌 변호사가 그녀의 앞에 놓인 명패를 힐끗 보더니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나진 그룹 로펌도 이제 영 시원찮네. 아무나 막 끌어들이는 모양이야.”양시은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자신이 이 업계에서 출신이나 지위가 마땅히 인정받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경멸에 기죽을 생각은 없었다.그녀는 대형 로펌 변호사를 똑바로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누구나 출발점이 있는 거잖아요. 중요한 건 얼마나 더 멀리 갈 수 있느냐가 아니겠어요?”그 변호사는 그녀의 침착한 태도와 단호한 눈빛에 잠시 움찔하더니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분수를 모르는 신참 변호사를 비웃는 표정이었다.“어찌 됐든 올해 상은 다른 로펌에 가겠네요.”“글쎄요, 그건 모르는 일이죠.”다른 몇몇 변호사들이 다가와 말했다.“뭐요?”대형 로펌 변호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오랜만이네요, 권변.”무리 중 리더 격인 변호사가 손을 내밀어 자연스럽게 악수했다.권 변호사는 그들을 슥 훑어보더니 상황을 이해한 듯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나진은 투자자로서 스폰서 자격으로 두 팀을 내보낼 수 있는 거였네요. 수상 확률을 높이려고 한 일인 것 같은데 왜 이름도 없는 신인 변호사한테 기회를 줬어요. 이렇게 큰 무대를 연습장으로 삼다니, 나변도 참 통이 커요.”“과찬이십니다. 근데 뭐가 됐든 나 변호사님의 계획이 아닐까요.”리더 변호사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래도 저는 이해가 안 되는데요. 나진이 스폰서가 돼서 은변도 좋았죠? 근데 이 좋은 기회를 신인한테 넘기다니...”권 변호사는 말끝을 흐리다가 다시 한번 크게 웃어넘긴 뒤 손을 내저었다.“그냥 헛소리였어요. 못 들은 걸로 해요.”은 변호사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답했다.“나 변호사님도 다 생각이 있으십니다. 부러우면 따라 해보시죠.”권 변호사는 더 말해봤자 손해만 볼 것 같았는지 형식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