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스 안에는 다름 아닌 아까 이현이 낙찰받았던 에메랄드 보석 팔찌가 들어있다.지유는 안쪽으로 들어와 이현에게 말했다.“무슨 일로 부르셨어요?”“이쪽으로 와.”지유가 그의 옆으로 다가가자 이현은 케이스를 열더니 모두가 보는 앞에서 팔찌를 지유의 손목에 끼워주었다.그 모습에 승아의 얼굴은 굳어지고 여진숙은 당황한 듯 다급하게 물었다.“너, 너 그거 승아 주려고 낙찰받은 거 아니었니?”“승아는 엄마가 옆에서 챙겨주잖아요. 저까지 챙겨줄 필요 있어요?”이현이 단호하게 얘기하자 여진숙이 입을 꾹 닫고 미간을 찌푸렸다.지유는 갑자기 손목이 무거워지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건 200억짜리 팔찌였다.한 번도 이런 비싼 물건을 지닌 적 없는 그녀였던 터라 지금 상당히 어색하고 불편했다.“이건 너무 비싸요. 이 팔찌 끼고 다니다가 보석에 흠이라도 생기면 어떡해요?”지유가 서둘러 다시 팔찌를 빼려고 하자 이현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으며 의미심장한 얼굴로 얘기했다.“이건 내가 너 주려고 낙찰받은 거야. 그러니까 잃어버리지 말고 잘 간직해.”올곧게 마주 오는 그의 시선을 보고 있자니 이 팔찌가 그에게는 무척이나 큰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그리고 그 의미 있는 물건은 지금 그녀의 손목 위에서 반짝거리고 있다.이건 그가 그녀에게 주는 일종의 명분 대신일까?지유는 팔찌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한참 뒤에야 답했다.“네, 그럼 잘 간직할게요.”이현은 그녀의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위로 올리고 웃었다.“이제 와서라고 하기 민망하지만 이 팔찌 너랑 결혼할 때 못 해줬던 선물이라고 생각해.”“새삼스럽게 무슨 선물이에요. 이미 충분히 많은 걸 주셨잖아요.”그들의 혼인에 사랑은 없었지만 이현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돈 쓰는 걸 아끼지 않았다. 언제나 제일 좋은 것들로만 주었다.그런 점을 고려해 보면 이 남자는 충분히 좋은 사람이었다.승아는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을 보더니 눈물을 흘리며 방을 뛰쳐나갔다.“승아야, 승아야!”여진숙은 승아가
그 말에 지유의 발걸음이 멈췄다.싸늘한 한기가 발끝으로부터 천천히 몸을 감싸는 듯한 느낌이었다.지금 저게 무슨 말이지?그녀와 결혼한 게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지분 때문이라니?지유는 몸을 뻣뻣하게 돌려 서재 쪽을 바라보았다. 작은 문틈으로 두 사람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여희영은 지금 화가 잔뜩 난 채 서 있었고 여이현은 다리를 꼰 채 소파에 앉아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네.”짤막한 그의 대답에 지유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이현이 그녀와 결혼을 결심한 건 할아버지 지분이라는 조건 때문이었다.결혼식 당일 밤 그녀와는 아무런 사이로도 발전할 생각이 없다고, 그녀에게 주제를 알라는 듯이 말했던 것 모두 그 이유 때문이었다.그녀는 처음부터 그저 장기 말일 뿐이었다.“네가 쉽게 타협할 애가 아닌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러면 지유는? 너 이거 지유한테 못 할 짓 하는 거야.”이현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보상해줄 생각이에요.”여희영은 아무렇지도 않은 그의 태도에 더욱더 화가 났다.“지유한테 잘해준 게, 그게 다 보상이었다는 소리니?”이현은 잠깐 멈칫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 맞아요.”지유는 그의 말에 심장이 찢기는 듯한 고통이 밀려와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그녀는 뒤로 휘청거리며 벽을 짚었다.보상 때문이었다고?다정하게 챙겨주던 그 모습이 전부 다 보상 때문이라고?이용한 게 미안해서 마음에 걸려서 그래서 잘해줬던 건가?지유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울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여이현, 너 대체 왜 이렇게 됐니? 대체 언제부터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는 사람이 된 거냐고! 지금의 널 보고 있으면 네 엄마가 보이는 것 같아서 치가 떨려. 정말 실망이다.”여희영은 지금 상당히 흥분하고 있어 목소리도 무척이나 컸다. 지유는 두 사람의 대화를 더 들을 용기가 없었다. 여기서 더 많은 걸 알게 되면 상처받는 건 어차피 자신일 테니까.지유는 도망치듯 그 서재에서 멀어져 황급히 계단을 내려오더니 바
밖으로 뛰쳐나온 지유는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전혀 추운 줄 몰랐다. 그저 지금은 어디론가 도망가고만 싶을 뿐이었다.얼마나 달렸을까, 그녀는 서서히 발걸음을 멈추고 거친 숨을 토해냈다.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바닥을 바라보니 어디선가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지유는 그제야 자신이 눈물범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눈물들이 볼을 타고 쉴 틈 없이 아래로 떨어졌다.모든 게 다 가짜였다.그와 함께했던 아름다운 순간들도, 설렐 만큼 다정했던 그의 모습들도 전부 가짜였다.그는 그저 그녀에게 보상해준 것뿐이었다. 단지 그의 죄책감 때문에.지유는 이제야 노승아가 했던 말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여이현이 그녀와 결혼한 건 이용하기 위한 것뿐이라는 그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그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일말의 호감도 작은 떨림도 없었다.지유는 지금 부는 차가운 바람보다 마음이 더 시리고 추워 자신의 두 다리를 꼭 끌어안았다.마치 상처받기 싫은 아이처럼 얼굴을 묻은 채 그렇게 웅크리고 있었다.하지만 이미 상처는 받았고 마음은 너덜너덜해졌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지유는 서서히 고개를 들어 뒤에 있는 큰 별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처음부터 저 자리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지유는 지금 지갑도 핸드폰도 아무것도 손에 쥐고 있지 않아 이 밤에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두 손으로 팔을 감싸고 정처 없이 길가를 거닐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시야가 흐릿하나 싶더니 이내 그녀는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한편, 여희영은 서재 문고리를 잡고는 아직 화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이현에게 경고했다.“네가 한 말 꼭 지켜야 할 거야. 지유는 상처받아도 되는 그런 애 아니야. 그 노승아인지 뭔지 하는 애보다 훨씬 더 나은 아이니까 처신 똑바로 해. 노승아가 눈에 밟혀도 이제는 눈길도 주지 마! 만약 지유가 상처받기라도 한다면 내가 너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야, 알아들어?!”“저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이현은 냉랭한
전화기 너머에서 확신하지 못하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온지유 씨가 사무실에 있는 모습을 본 사람이 있는 건 맞습니다만 쭉 지키고 있었던 건 아니라서 확신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이현도 한때는 지유를 의심한 적이 있었으나 언제나 선을 지키고 실수 한 번 없었던 그녀였기에 그 의심도 머지않아 곧바로 사그라들었다.그날 일에 관해 물었을 때 그녀가 많이 긴장한 듯 보이긴 했지만 말이다.이현은 전화를 끊고 또 컴퓨터도 끄더니 드디어 서재에서 나왔다.안방에 도착해 보니 불은 켜져 있었지만 그 어디에도 지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녀의 핸드폰은 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이리저리 찾아보다 그 어디에도 지유가 보이지 않자 이현은 결국 도우미에게 물었다.“집사람은 어디 갔습니까?”“아까 아래로 내려오는 모습을 보긴 했습니다만...”도우미도 잘 모르는듯한 눈치였다.지유는 별장 그 어디에도 없었고 핸드폰을 지니지 않아 연락조차 할 수 없었다. 이현은 슬슬 걱정됐는지 다급하게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지유가 사라졌습니다. 지금 당장 어디 있는지 찾아내세요!”...지유는 힘겹게 눈꺼풀을 떴다.그녀는 아직도 머리가 어지러운 듯 눈을 뜨자마자 금세 미간을 찌푸렸다.그리고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병원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깨셨어요, 환자분?”그때 마침 간호사가 옆으로 다가왔다.지유는 그녀를 보며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뭐가 어떻게 된 거죠? 제가 왜 여기...”“환자분이 길가에 쓰러져있던 걸 어떤 마음 착한 분이 병원에 데리고 오셨어요. 핸드폰도 없이 왜 추운 날 혼자 밖에 돌아다니셨어요. 그분 아니었으면 환자분 정말 길가에서 동사할 수도 있었다고요.”지유는 그제야 정신을 잃기 전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밖을 보니 벌써 다음날 낮이었다.“저혈당 때문에 쓰러지셨어요. 핸드폰 빌려드릴 테니까 얼른 가족분들에게 연락하세요. 입원 절차도 아직이라 그것도 해주시고요.”가족?부모님에게 연락하면 걱정하실 게 뻔했다.여이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잖아요. 기다려요. 형한테 전화하고 올게요. 아마 금방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지유가 황급히 그를 제지했다.“알리지 말아주세요.”“아까 간호사가 한 얘기 못 들었어요? 가족분한테 연락 안 하면 퇴원은 안 된다고 한 거.”지유는 석훈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괜한 참견하지 말고 알리지 말아주세요.”지유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고집은 무척이나 셌다. 게다가 누가 부부 아니랄까 봐 말하는 태도도 이현과 똑 닮아있었다.“형 지금 형수님 찾는다고 난리에요. 그리고 저는 의사로서 형한테 연락해야겠으니까 그렇게 아세요.”지유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석훈은 이현의 동생이기에 그와 마주한 순간 이렇게 될 걸 예상했어야 했다.석훈은 행여나 지유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이현이 병원에 도착하기 전까지 계속 옆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잠시 뒤, 이현이 거친 숨을 내쉬며 병실에 도착했다. 그러고는 지유의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안심이 된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가왔다.“어떻게 된 거야?”이현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이마를 어루만지려는데 지유가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이에 손이 어색하게 공중에 굳어버린 그는 그녀의 얼굴색을 한번 보더니 천천히 손을 내렸다.“길가에서 쓰러졌다며. 대체 왜 그 시간에 집이 아닌 거기에 있었던 건데?”그는 다그치고 싶은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침착하게 물었다.지유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대답만 했다.“심심해서 산책 좀 하다가 갑자기 저혈당으로 쓰러진 것뿐이에요. 어제 얼마 못 먹어서 그런 가봐요.”이현이 고개를 돌려 석훈을 바라보았다.“저혈당은 맞아.”뭐가 됐든 일단 사람은 찾았으니 큰 근심은 덜었다.지유는 그 뒤로 줄곧 창문만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있었다.이현은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은 걸 눈치채고 있었다.하지만 대체 무엇 때문에?하룻밤 사이에 그녀는 너무나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석훈은 두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더니 일단 이현을 복도로 데리고 나
더는 그에게 분에 맞지 않는 걸 바라면 안 된다. 두 사람 사이를 원래대로 돌려놓아야 한다.이게 그녀가 해야 하는 일이다.이현은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간 것 같으면서도 또 어딘가 석연치 않은 느낌에 뭐라고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그럴 마음도 싹 사라졌다.“다음번에는 혼자 나가지 마. 나가거든 핸드폰이라도 가지고 가던가, 아니면 누구랑 같이 가던가 해. 그래야 바로바로 널 찾을 수 있으니까.”지유는 그 말에 쓰게 웃었다.대체 언제까지 걱정하는 척을 하려는 거지?그는 아마 이렇게 걱정해주는 것도 보상해주는 거라고 생각하겠지?“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지유는 고분고분 그의 말을 따랐다.이현은 의자를 가져와 병상 옆에 앉고는 그녀를 한번 쭉 훑어보다 확실히 아무 문제 없는 걸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혹시 그날 밤 일 기억해?”“그날 밤 일이라뇨?”“내가 술에 취한 그날 밤 말이야.”담담한 그의 말에 지유는 순간 심장이 움찔했다.갑자기 왜 또 그 일을 묻는 거지?혹시 뭔가 알고 있는 건가?아니면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묻는 건가?지유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날 밤 일은 왜요?”“그날 밤 그 여자 아직 못 찾았어.”이에 지유가 긴장을 내려놓으며 주먹을 쥔 손을 풀었다.“그 일 아직도 기억하고 계셨어요?”이현이 미간일 찌푸리며 물었다.“내가 기억하면 안 되나 봐?”“아니요.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지유가 서둘러 답했다.이현이 그녀를 이용했다는 걸 알아버린 이상 더욱더 그날 밤 그 여자가 자신인 걸 들킬 수는 없었다.만약 자신인 걸 알기라도 하면... 아마 그때는 큰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몰랐다.“제가 대표님 찾으러 호텔에 갔을 때 확실히 어떤 여성분이 나오셨어요.”“너는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이현이 묻자 지유가 다시 긴장하며 티 안 나게 그와 시선을 피한 뒤 답했다.“글쎄요? 뭐가 이상하다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물론 그 여성분과 함께 한 건 대표님이시
“온지유.”이현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네?”지유가 그를 바라보았다.“그 여자 너지?”지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순간 머리가 하얘졌지만 그녀는 빠르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대표님, 농담도 참. 저는 둘째 날이 돼서야 도착했잖아요. 게다가 윤정 씨 보고 대표님 옷도 가져드리라고 했고요. 만약 제가 그 여성분이었으면 대표님께서 진작 알아채지 않았겠어요? 차라리 저였으면 좋겠네요. 그러면 지금쯤 아이가 생겼을지도 모르잖아요.”웃으면서 얘기하는 그 모습을 보니 이현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하지만 분명한 건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자기 남편이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가졌다는데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그러면 쓸데없는 추측하지 말고 누군지 알아 와!”이현은 이 한마디만 남기고 병실을 나가버렸다.그가 나간 뒤 지유는 곧바로 웃음을 지워버렸다.그리고 몇 초 뒤 그녀가 한숨을 돌릴 새도 없이 의사 한 명이 병실로 들어왔다.의사는 병실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가족분은요?”“괜찮아요. 저한테 얘기해주시면 돼요.”의사는 진단서를 보더니 미간을 미세하게 찡그리고 말했다.“환자분 혹시 임신한 거 알고 있었어요?”그 말에 지유가 화들짝 놀라 자신의 배를 바라보았다.임신?설마...고작 그 한 번으로 임신이 됐다고?지유는 조금 현실감이 없었다.“선생님, 혹시 다른 환자분과 헷갈리신 거 아니에요?”의사가 단호하게 말했다.“온지유 씨 맞으시잖아요. 온지유 씨는 지금 임신한 상태입니다. 이제 막 한 달 정도 됐네요.”가만히 생각해보니 생리가 며칠 늦어지기는 했다.하지만 몸이 피곤할 때면 이런 일도 많았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설마 임신일 줄이야.“어제는 정말 위험했어요. 온지유 씨는 물론이고 아이한테도요. 그러니 다음에는 절대 이런 일 없도록 하세요. 그리고 남편분한테는 계속 옆에 있으라고 몇 마디 당부해야겠네요.”“선생님!”지유가 다급하게 말했다.“저 임신한 거 누구한테도 얘기하지 말아
그날 승아는 울면서 뛰쳐나갔지만 지금은 한껏 여유 있는 얼굴로 웃고 있다.그녀가 활짝 웃을 만한 즐거운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지유는 그녀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무시하고 지나쳤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 오르려는데 승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조만간 그쪽은 아무것도 아니게 될 테니 일단 며칠은 봐주도록 할게요. 어차피 당신은 곧 오빠한테 버림받을 테니까요.”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지유는 벌써 이긴듯한 승아의 미소를 볼 수 있었다.지유는 주먹을 꽉 쥐더니 자기도 모르게 배를 바라보았다.아이가 생긴 이상 희망은 품어야 했다.사무실에 도착한 후 그녀는 자신의 자리가 아닌 대표이사실로 향했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현은 온라인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보더니 잠깐 회의를 스톱하고 물었다.“무슨 일 있습니까?”“네.”이현은 컴퓨터를 끄고 소파에 앉아 그녀에게 물었다.“무슨 일인데?”그의 맞은편에 앉아 눈을 똑바로 마주쳐오는 모습이 뭔가 중요한 할 말이 있는 사람 같았다.지유는 순간 어디서부터 얘기를 꺼내야 할지 몰라 일단 아무 말이나 던졌다.“아까 올라오는 길에 노승아 씨를 만났어요. 즐거워 보이더라고요.”“할 말이 그거야?”지유는 입을 달싹이더니 그와 다시 눈을 마주치고 본론을 꺼냈다.“저한테 그날 밤 함께 했던 그 여성분 찾아내라고 하셨잖아요.”“그랬지?”이현은 아직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을 파악하지 못했다.“만약에 말이에요. 정말 만약에 그 여성이 임신했다고 하면 대표님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지유는 이현의 의심 가득한 눈초리에 서둘러 한마디 덧붙였다.“술 취한 상태라 아무리 대표님이어도 피임을 못 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만약 그 여성분이 임신이라도 했으면 어떡하실 생각이세요?”“나조차도 생각하지 못한 부분인데 참 세심해?”지유는 흠칫하더니 이내 최대한 자신은 그날 밤 그 여자가 아니라고 선을 그으면서 말했다.“우리 아직 이혼한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만약 다른 여자가 대표님 아이를 임신하면...
신무열은 Y국에서 높은 신분을 지니고 있지만 나라의 미래와 백성을 위해 자신의 격을 낮추고 직접 약초를 가르치고 재배법을 가르치며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그 시간 동안, 신무열은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었고, 아린에게도 작은 선물을 챙겨주었다. 신무열은 어떤 사람인가?그는 한 번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을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지금 이런 행동을 한다면 오히려 신무열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망칠 뿐이었다.신무열은 그녀를 계속 싫어할 것이고 아린은 혼자서 그를 바라만 보는 삶을 살게될것이다.그럼에도 아린은 지금은 그들에게 협조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아린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무열 씨를 좋아하는 여자는 많은데 왜 저를 선택한 거죠? 저는 작은 인물이고, 아무런 배경도 없는데요.”“바로 네가 작은 인물이기 때문이지. 그래야 의심받지 않아. 정말 신무열을 영원히 네 곁에 두고 싶지 않나? 신무열은 뛰어난 사람이고 너와 그의 아이라면 최고의 유전자를 가질 텐데.”아린이 대답하지 않자 남자는 계속 그녀를 부추겼다.남자의 말들은 아린의 머릿속에서 수없이 되뇌어졌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신무열과 함께하는 것보다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계획이 뭐죠? 말해줘요. 계획대로 따를게요.”그녀는 자신이 왜 선택되었는지도 알고 있었다. 작은 인물이기 때문에 조종하기 쉽고 조금의 이익으로도 매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계획은 내가 알려줄 거야. 하지만 그 전에, 너의 충성심을 위해...”‘푹!’남자는 말을 끝내지 않았다.아린은 피부에서 느껴오는 찌릿한 고통에 눈살을 찌푸렸다.아린은 자신에게 독이 주입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남자는 아린에게 위협하듯 말했다.“내 말을 어기기만 해봐. 이 독은 널 죽기보다도 못한 고통을 줄 테니까!”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린은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머리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표정은 고통으로 일그러졌지
아린이 아직 입을 떼기도 전에 신무열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지금 나는 이미 헤연에게 약속 했어. 남자로서 한 말은 반드시 지켜야지. 게다가 난 혜연에게 특별히 불만도 없어.”아린은 숨이 막혔다.책임감 때문에 여자를 곁에 두지 않았던 신무열. 그리고 김혜연에게는 불만이 없다는 말에 더해 김혜연이 늘 신무열 곁에 있으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의 진심을 확인했다는 점에 속이 검게 타들어 갔다.“가까이 있는 자가 먼저 기회를 얻는다”는 말과 “오랜 시간이 지나야 진짜 모습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참으로 딱 들어맞았다.아린의 마음은 아팠다. 그녀는 평민일 뿐이었고 김혜연과는 신분 자체가 달랐다.신무열이 원하는 건 그와 나란히 설 수 있는 우수한 여성이자 내조자였지 빈민가 출신의 이름 없는 소녀는 아니었다.아린은 여러 해 동안 큰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들 사이의 신분 격차는 변할 리 없었다.“선생님, 당신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축복할게요. 당신이 늘 행복하길 바라요.”이것이 아린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고마워.”신무열도 그녀의 말에 감사를 표했다.아린은 돌아섰다.자신의 위치와 지위를 바꾸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 왔지만 목표가 사라진 지금은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다.신무열의 거처를 벗어난 아린은 얼마 가지 않아 무리에게 가로막혔다.그녀보다 키도 크고 체격이 다부진 남자들이 점점 다가왔다.아린은 본능적으로 총을 꺼내려 했지만 상대가 더 빨랐다.총구가 그녀의 머리에 겨눠지며 차갑고 위협적인 목소리가 들렸다.“죽기 싫다면 조용히 우리 말을 듣고 따라와라!”전쟁 중 매일 총탄에 대한 공포 속에 살았던 그녀였다. 몸은 총구를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여긴 신무열의 구역이었다. 그녀 같은 작은 존재가 신무열에게 폐를 끼칠 순 없었다.아린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그들의 요구에 순응했다.얼마나 걸었는지 모른 채 끌려간 곳은 작은 방이었다. 그들은 무기를 꺼내 그녀를 겨눴다.“할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하세요. 괜히 쇼하지 말고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김혜연은 신무열을 위해 오랜 시간 노력해 왔다. 그렇다면 자신이 어렵게 얻은 결과를 지키려고 해야 하는 게 아닐까?하지만 김혜연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태도였다.여인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만약 내가 무열 씨의 마음을 얻어도 정말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어요?”김혜연은 미소를 잃지 않으며 대답했다.“왜 그런 걱정을 하는 거죠? 만약 당신이 신무열의 마음을 얻는다면 그건 당신의 능력이에요. 오히려 축복해야겠죠.”김혜연이 신무열을 붙잡으려 애썼던 큰 이유 중 하나는 신무열의 곁에 다른 여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신무열의 곁에 다른 여자가 생긴다면 지금처럼 그녀도 그 관계를 축복했을 것이다.여자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그런 말로 날 속이려는 거죠? 사실은 내가 당신을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걱정 마세요. 당신도 곧 제 실력을 알게 될 거니까요!”김혜연은 이해했다.“선전포고라는 뜻이군요.”김혜연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그 여자는 곧장 신무열을 찾아갔다.신무열은 그녀를 보고 곧바로 시선을 돌리며 차갑게 말했다.“날 찾아온 이유가 뭐죠?”“선생님, 저를 잊으셨나요? 저 아린이에요. 5년 전...”아린은 숨을 깊이 들이쉬며 급한 마음을 드러냈다.그 말을 들은 신무열이 그녀를 기억해 냈다. 아린은 5년 전 북부에서 온지유와 갈등을 빚었던 소녀였다. 그리고 그녀의 동생 케빈도 떠올랐다.“아린? 무슨 일로 온 거야?”신무열은 그녀를 기억해 냈지만 여전히 말투에서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의 태도에서는 큰 반가움이 보이지 않았다.아린은 신무열이 Y국을 책임지고 있으며 많은 일을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그녀는 신무열과 김혜연의 결혼 소식을 듣고 발길을 멈출 수 없었다. 이 결혼식은 Y국 전체가 주목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아린은 그가 김혜연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만약 신무열이 김혜연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김혜연이
김혜연은 믿기 어렵다는 듯 물었다.“제가 했어도 탓하지 않는다고요?”자신의 노력이 드디어 그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은 걸까? 자신이 그의 삶에 뿌리내리고 꽃을 피우는 것을 허락한 걸까?“그래.”신무열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김혜연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물었다.“왜죠? 그건 저랑 결혼할 생각이 있다는 말인가요?”신무열은 김혜연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그동안 네가 나의 곁에서 어떻게 해왔는지 난 다 보고 있었어. 넌 정말 훌륭한 내조자였어. 지금 모든 사람들이 우리 관계를 알고 있는데 너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너에게 너무 불공평하잖아.”특히 김혜연이 모든 책임을 혼자 짊어지려고 했던 것을 떠올리면 너무 잔인한 일이었다.김혜연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무열 씨가 저랑 결혼한다는 건 상상도 못 했어요. 결혼하기 싫으시다면 저 때문에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요.”“이 모든 건 제가 원해서 한 일이에요.”김혜연의 목소리는 점점 더 메말라 갔다.설령 마지막에 자신이 상처받고 죽더라도 그것 역시 그녀가 원한 결과였다.신무열은 그녀를 안으며 말했다.“그런 말 하지 마. 네가 나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도, 그리고 네가 나를 위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돼 있다는 것도 알아. 나는 네가 나 때문에 힘들어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신무열은 그녀를 꼭 안아주며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넌 우리 결혼식이 어땠으면 좋겠어?”“저는... 잊지 못할 결혼식을 원해요.”결혼식을 떠올리는 김혜연의 얼굴엔 기대감이 가득했다.사실 결혼식 자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신무열이 그녀 곁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드디어 결혼에 대해 마음을 열었다는 점이었다.“좋아.”신무열은 김혜연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는 한 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었다.결혼식 준비는 요한에게 맡겼고 김혜연이 직접 준비를 도울 수 있도록 했다.김혜연은 모든 준비에 만족하며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러 간 날, 한 여인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비난하다니?“아버지가 틀리지 않았다고요?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한 번도 우리 두 형제에게 있지 않았잖아요.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주고 믿어주셨다면, 지금 이 지경까지는 오지 않았을 겁니다!”“아버지는 언제나 고집대로예요. 여이현이 대통령 자리에 뜻이 없다고 해서, 우리를 아버지의 기대에 못 미친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을 찾아내서 아버지 말을 따르는 꼭두각시로 세뇌하려 하신 거 아니에요?”두 아들이 한마디씩 비난을 쏟아내자, 브람은 얼굴을 굳히며 각각 한 발씩 걷어차 둘을 바닥에 내리 눕혔다.“너희 머릿속에는 두부라도 들어 있냐? 내가 너희 편이 아니라면, 지금까지 너희가 저지른 짓거리만으로 진작에 끝장났을 거야, 그것도 모르겠냐?”브람은 말할수록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브람의 자식 교육은 아무도 간섭할 수 없었다.온지유는 여이현에게 슬쩍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여이현은 온지유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온지유는 여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내란은 이제 다 정리됐고 당신 일도 다 마무리됐네. 언제쯤 돌아갈 수 있을까?”여인들 사이의 갈등도 복잡하지만 남자들 사이의 싸움은 종종 더욱 잔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법이다.여이현은 온지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이 일이 없었더라도 이틀 후엔 돌아갈 생각이었어. 괜찮아?”온지유가 불편하다고 하면 그는 더 빨리 떠날 계획이었다.“괜찮아.”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브람은 여이현이 있는 동안의 두 아들의 암살 시도를 공개하고 대통령을 선거를 통해 뽑겠다고 발표했다.많은 사람들이 선거에 참여했으나 결국 브람이 재선에 성공했다. 브람은 화국의 방식을 따라 5년 임기를 추가했다.그의 두 아들은 개조 프로그램에 보내져 일반인의 신분으로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다.여이현은 S국이 평온을 되찾은 모습을 바라보며 온지유와 함께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신무열과 김혜연은 Y국으로 함께 돌아갔다.Y국도 현재 평화를 되찾았고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김씨 가문의 옛
지금 온지유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였다.바로 가족들의 인정과 축복이었다.브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걱정하지 마라. 이제 더는 너와 이현이에게 방해가 되지 않겠어.”그는 여이현이 자신의 자리를 이어받아 S국의 새로운 대통령이 되길 바랐다.하지만 여이현은 그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그는 평범한 삶을 원했다. 여이현의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과 그동안의 부재가 가슴에 남아 있는 브람은 아이가 고통 속에서 살아가길 원치 않았다.“감사합니다.”온지유의 뜻밖의 감사 인사에 브람은 묘한 감정이 일었다.온지유와 여이현은 부부였고 이미 5년 전부터 함께해온 사이였다. 그녀는 긴 시간여이현의 곁에 머물렀다.서로에게 운명이라 믿어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온지유는 여전히 둘을 갈라놓으려 했던 브람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었다.특히 자신과 여이현 사이의 거리감에 더욱 가슴 아팠다.순간, 브람은 깊은 후회를 느꼈다.여이현과 온지유는 한동안 S국에 머물렀고 그 사이 여이현은 브람의 일을 돕고 있었다.그간 뜻밖에도 형과 이복형이 여이현을 암살하려 했다.다행히도 여이현은 이미 준비를 해 두었고 신무열이 미리 사람을 배치해 둔 덕분에 형제들의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형제들은 붙잡힌 후에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여이현을 보자마자 끌어내려 함께 죽으려 했다.그들은 여이현을 증오에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여이현은 그들의 눈빛에서 비교당하는 삶의 불행함을 느꼈다.여이현은 형제들에게 말했다.“아버지가 구해주셨을 때 저는 중상을 입어 모든 것을 알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제게 자리를 물려주려 하셨지만 전 처음부터 대통령 자리에 관심이 없었어요. 제가 원하는 건 소소한 가정일 뿐입니다.”“이곳에 온 건 단지 아버지를 돕기 위해서일 뿐이에요. 믿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지만 떠나면 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 겁니다.”암살은 실패로 돌아갔다. 여이현은 형제를 해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브람은 그들을 심하게 혼냈다. 그
“그래.”브람이 대답한 후 여이현은 바로 돌아섰다.말은 그렇게 했지만 브람은 이번이 여이현과의 마지막 만남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여이현이 받지 않으려 해도 억지로 카드를 손에 쥐여주었다.“모두 화국 돈으로 바꿔뒀다. 너에게 주는 게 아니고 내 손자에게 주는 거다. 내가 그 아이를 너무 엄하게 대했다.”그래서인지 별이는 이렇게 오랜 시간 떠나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별이에게도 필요 없다느니 그런 말은 하지 마라. 모두 별이를 위해 모아둔 거니까!”브람이 엄숙하게 말했다.그러고는 문득 온지유를 떠올렸다.“지유와 잠시 단둘이 얘기할 수 있을까? 걱정 마. 상황이 이렇고 사람도 많은데 내가 해코지 할리 있겠느냐.”여이현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온지유를 브람 앞에 불러 세웠다.온지유는 예의를 지키며 말했다.“아버님.”브람은 여이현의 친아버지이자 별이의 친할아버지였다. 온지유는 브람을 아버님이라 부를 수밖에 없었다.브람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온지유를 바라보았다.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널 죽이려 했던 나를 그리 불러주는 게냐?”브람의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온지유는 브람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누구에게나 사랑받기를 요구할 수는 없죠. 아버님이 저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아버님과 이현 씨의 혈연은 끊을 수 없는걸요.”그녀는 여이현의 아내로서 당연히 브람을 아버님이라 불러야 했다.브람은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지유야, 솔직히 내가 이현이를 처음 찾았을 때 너희가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듣고 이현이는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여자라면 어떤 약속이나 의식도 없이 지나칠 수는 없으니까.”“그때 나는 이현이가 너와 이혼하고 S국에 와서 새로운 결혼을 하길 바랐어. 하지만 이현이는 원하지 않았어. 나중에 그 애가 너에게 한 모든 것을 보며 너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알게 되었지. 지유야, 난 이현이에게 참 못된 짓을 했다. 이제 너희가 행복하게 살기를 진심으로
여이현은 말이 없었다.침묵은 곧 긍정이다. 온지유는 화가 나서 바로 여이현의 가슴을 향해 주먹을 세게 내리쳤다.“다시 한번 그딴 생각 하기만 해봐, 내가 직접 죽여버릴 테니까!”온지유는 진심으로 화가 났다. 5년이다. 그 긴 시간을 고통 속에서 아이를 생각하며 버텨왔다.여이현은 살아 있으면서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처음에는 정신이 돌아오지 않아 어쩔 수 없다 쳐도, 그럼 그 뒤에는?여이현은 한마디도 뻥긋하지 않았다. 그걸 떠올릴 때마다 온지유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이 사람은 또 같은 짓을 반복하려 하는 게 아닌가!신무열은 덤덤하게 여이현을 한번 흘겨보았다.“맞아도 싸죠. 저의 하나 뿐인 동생이 그 몇 년간 어떻게 지내왔는데 또 그 고통을 다시 겪게 하려니 말이에요. 이현 씨, 남자라면 정정당당하게 이 모든 걸 해결하고 돌아오세요.”“잘 알고 있습니다.”여이현은 자신이 완벽히 처리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온지유와 약속한 것들을 꼭 지켜야만 했다.신무열은 시선을 거뒀다. 할 말은 이미 다 했다. 남은 건 여이현 본인이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다.그렇게 여이현과 온지유는 함께 S국으로 떠났다.브람은 여이현이 홀로 돌아올 줄 알고 있었다. 온지유가 함께 돌아온 것을 본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심지어 온지유측에는 사람이 여럿 딸려있었고 화국의 군대도 동행했다.여러세력의 동원하에 내란은 작은 파도에 불과했고, 신속히 가라앉았다.가장 주요한 병력은 화국의 군대였다.여이현은 직접적으로 태도를 밝혔다.“다음에 또 같은 사건이 발생하면 될수록 내부에서 해결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화국인이고 타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닙니다.”여이현은 브람이 자신의 친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된 뒤에도 별 감흥이 없었다. 온지유처럼 받아들이지 못할 일도 아니라고 여겼다. 여이현은 어릴 적부터 화국에서 자랐고 몸에 밴 습관도 모두 화국의 것이었다. S국의 사람들에게 있어 여이현은 밖에서 온 타국인이었다.그런 신분으로 어떻게 이 나라를 통치
그 속에는 나라를 향한 것도, 브람을 향한 것도 있었다.브람이 그의 친아버지가 아니더라도 목숨을 구해 준 은혜는 갚아야 했다.온지유는 이 상황에 대한 억울함과 세상의 불공평함에 화가 났다. 거기다 여이현의 말을 들으니 더더욱 속이 무너져 내렸다.온지유는 여이현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이현 씨가 짊어진 책임이 크다는 걸 알아. 그러니까 이번에야말로 당신 곁에 있고 싶어. 제발 나도 데려가 줘.”“절대 발목 잡는 일이 없도록 노력할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기자로서 보도를 낼게. 우리는 부부고 아이도 있잖아.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함께 해결해 나가자.”여이현은 온지유의 각오를 느꼈다. 그는 과거 자신이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그리고 눈앞의 온지유의 얼굴도.여이현은 결국 마음이 녹아내렸다.그는 온지유를 끌어안고 가볍게 키스했다.“그래, 데려갈게. 내 곁에 있어 줘. 무슨 일이 일어나든 꼭 지켜줄 테니까.”자신의 목숨을 내주더라도 온지유만은 지키고 말 테다.S국으로 향하기로 결정했으니 신무열에게도 한마디 보고할 필요가 있었다.신무열은 온지유가 S국으로 가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이현 씨는 처리할 업무가 있어서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너는 따라갈 필요 없잖아. 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별이는 어쩌려고.”여이현은 휴가를 즐기러 외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가는 것이다. 지금의 S국은 바뀌기 전의 Y국과 같은 상황이었다. Y국에는 신무열이 온지유 손목의 푸른 구슬을 알아봐 도와줄 수 있었다 하지만 S국에는 도와줄 사람은 누구도 없다.여이현의 친아버지인 브람조차 온지유를 좋게 보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할까. 만일 돌아가서 그들이 쳐둔 덫에 걸리기라도 하면?정말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여이현 혼자서라면 탈출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온지유를 데려가는 이상 그에게는 짐이 늘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다.“별이는 아버지가 봐주고 계시잖아요. 난... 이기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난 무슨 일이 있든 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