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 너머에서 확신하지 못하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온지유 씨가 사무실에 있는 모습을 본 사람이 있는 건 맞습니다만 쭉 지키고 있었던 건 아니라서 확신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이현도 한때는 지유를 의심한 적이 있었으나 언제나 선을 지키고 실수 한 번 없었던 그녀였기에 그 의심도 머지않아 곧바로 사그라들었다.그날 일에 관해 물었을 때 그녀가 많이 긴장한 듯 보이긴 했지만 말이다.이현은 전화를 끊고 또 컴퓨터도 끄더니 드디어 서재에서 나왔다.안방에 도착해 보니 불은 켜져 있었지만 그 어디에도 지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녀의 핸드폰은 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이리저리 찾아보다 그 어디에도 지유가 보이지 않자 이현은 결국 도우미에게 물었다.“집사람은 어디 갔습니까?”“아까 아래로 내려오는 모습을 보긴 했습니다만...”도우미도 잘 모르는듯한 눈치였다.지유는 별장 그 어디에도 없었고 핸드폰을 지니지 않아 연락조차 할 수 없었다. 이현은 슬슬 걱정됐는지 다급하게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지유가 사라졌습니다. 지금 당장 어디 있는지 찾아내세요!”...지유는 힘겹게 눈꺼풀을 떴다.그녀는 아직도 머리가 어지러운 듯 눈을 뜨자마자 금세 미간을 찌푸렸다.그리고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병원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깨셨어요, 환자분?”그때 마침 간호사가 옆으로 다가왔다.지유는 그녀를 보며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뭐가 어떻게 된 거죠? 제가 왜 여기...”“환자분이 길가에 쓰러져있던 걸 어떤 마음 착한 분이 병원에 데리고 오셨어요. 핸드폰도 없이 왜 추운 날 혼자 밖에 돌아다니셨어요. 그분 아니었으면 환자분 정말 길가에서 동사할 수도 있었다고요.”지유는 그제야 정신을 잃기 전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밖을 보니 벌써 다음날 낮이었다.“저혈당 때문에 쓰러지셨어요. 핸드폰 빌려드릴 테니까 얼른 가족분들에게 연락하세요. 입원 절차도 아직이라 그것도 해주시고요.”가족?부모님에게 연락하면 걱정하실 게 뻔했다.여이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잖아요. 기다려요. 형한테 전화하고 올게요. 아마 금방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지유가 황급히 그를 제지했다.“알리지 말아주세요.”“아까 간호사가 한 얘기 못 들었어요? 가족분한테 연락 안 하면 퇴원은 안 된다고 한 거.”지유는 석훈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괜한 참견하지 말고 알리지 말아주세요.”지유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고집은 무척이나 셌다. 게다가 누가 부부 아니랄까 봐 말하는 태도도 이현과 똑 닮아있었다.“형 지금 형수님 찾는다고 난리에요. 그리고 저는 의사로서 형한테 연락해야겠으니까 그렇게 아세요.”지유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석훈은 이현의 동생이기에 그와 마주한 순간 이렇게 될 걸 예상했어야 했다.석훈은 행여나 지유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이현이 병원에 도착하기 전까지 계속 옆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잠시 뒤, 이현이 거친 숨을 내쉬며 병실에 도착했다. 그러고는 지유의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안심이 된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가왔다.“어떻게 된 거야?”이현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이마를 어루만지려는데 지유가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이에 손이 어색하게 공중에 굳어버린 그는 그녀의 얼굴색을 한번 보더니 천천히 손을 내렸다.“길가에서 쓰러졌다며. 대체 왜 그 시간에 집이 아닌 거기에 있었던 건데?”그는 다그치고 싶은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침착하게 물었다.지유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대답만 했다.“심심해서 산책 좀 하다가 갑자기 저혈당으로 쓰러진 것뿐이에요. 어제 얼마 못 먹어서 그런 가봐요.”이현이 고개를 돌려 석훈을 바라보았다.“저혈당은 맞아.”뭐가 됐든 일단 사람은 찾았으니 큰 근심은 덜었다.지유는 그 뒤로 줄곧 창문만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있었다.이현은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은 걸 눈치채고 있었다.하지만 대체 무엇 때문에?하룻밤 사이에 그녀는 너무나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석훈은 두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더니 일단 이현을 복도로 데리고 나
더는 그에게 분에 맞지 않는 걸 바라면 안 된다. 두 사람 사이를 원래대로 돌려놓아야 한다.이게 그녀가 해야 하는 일이다.이현은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간 것 같으면서도 또 어딘가 석연치 않은 느낌에 뭐라고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그럴 마음도 싹 사라졌다.“다음번에는 혼자 나가지 마. 나가거든 핸드폰이라도 가지고 가던가, 아니면 누구랑 같이 가던가 해. 그래야 바로바로 널 찾을 수 있으니까.”지유는 그 말에 쓰게 웃었다.대체 언제까지 걱정하는 척을 하려는 거지?그는 아마 이렇게 걱정해주는 것도 보상해주는 거라고 생각하겠지?“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지유는 고분고분 그의 말을 따랐다.이현은 의자를 가져와 병상 옆에 앉고는 그녀를 한번 쭉 훑어보다 확실히 아무 문제 없는 걸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혹시 그날 밤 일 기억해?”“그날 밤 일이라뇨?”“내가 술에 취한 그날 밤 말이야.”담담한 그의 말에 지유는 순간 심장이 움찔했다.갑자기 왜 또 그 일을 묻는 거지?혹시 뭔가 알고 있는 건가?아니면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묻는 건가?지유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날 밤 일은 왜요?”“그날 밤 그 여자 아직 못 찾았어.”이에 지유가 긴장을 내려놓으며 주먹을 쥔 손을 풀었다.“그 일 아직도 기억하고 계셨어요?”이현이 미간일 찌푸리며 물었다.“내가 기억하면 안 되나 봐?”“아니요.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지유가 서둘러 답했다.이현이 그녀를 이용했다는 걸 알아버린 이상 더욱더 그날 밤 그 여자가 자신인 걸 들킬 수는 없었다.만약 자신인 걸 알기라도 하면... 아마 그때는 큰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몰랐다.“제가 대표님 찾으러 호텔에 갔을 때 확실히 어떤 여성분이 나오셨어요.”“너는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이현이 묻자 지유가 다시 긴장하며 티 안 나게 그와 시선을 피한 뒤 답했다.“글쎄요? 뭐가 이상하다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물론 그 여성분과 함께 한 건 대표님이시
“온지유.”이현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네?”지유가 그를 바라보았다.“그 여자 너지?”지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순간 머리가 하얘졌지만 그녀는 빠르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대표님, 농담도 참. 저는 둘째 날이 돼서야 도착했잖아요. 게다가 윤정 씨 보고 대표님 옷도 가져드리라고 했고요. 만약 제가 그 여성분이었으면 대표님께서 진작 알아채지 않았겠어요? 차라리 저였으면 좋겠네요. 그러면 지금쯤 아이가 생겼을지도 모르잖아요.”웃으면서 얘기하는 그 모습을 보니 이현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하지만 분명한 건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자기 남편이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가졌다는데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그러면 쓸데없는 추측하지 말고 누군지 알아 와!”이현은 이 한마디만 남기고 병실을 나가버렸다.그가 나간 뒤 지유는 곧바로 웃음을 지워버렸다.그리고 몇 초 뒤 그녀가 한숨을 돌릴 새도 없이 의사 한 명이 병실로 들어왔다.의사는 병실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가족분은요?”“괜찮아요. 저한테 얘기해주시면 돼요.”의사는 진단서를 보더니 미간을 미세하게 찡그리고 말했다.“환자분 혹시 임신한 거 알고 있었어요?”그 말에 지유가 화들짝 놀라 자신의 배를 바라보았다.임신?설마...고작 그 한 번으로 임신이 됐다고?지유는 조금 현실감이 없었다.“선생님, 혹시 다른 환자분과 헷갈리신 거 아니에요?”의사가 단호하게 말했다.“온지유 씨 맞으시잖아요. 온지유 씨는 지금 임신한 상태입니다. 이제 막 한 달 정도 됐네요.”가만히 생각해보니 생리가 며칠 늦어지기는 했다.하지만 몸이 피곤할 때면 이런 일도 많았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설마 임신일 줄이야.“어제는 정말 위험했어요. 온지유 씨는 물론이고 아이한테도요. 그러니 다음에는 절대 이런 일 없도록 하세요. 그리고 남편분한테는 계속 옆에 있으라고 몇 마디 당부해야겠네요.”“선생님!”지유가 다급하게 말했다.“저 임신한 거 누구한테도 얘기하지 말아
그날 승아는 울면서 뛰쳐나갔지만 지금은 한껏 여유 있는 얼굴로 웃고 있다.그녀가 활짝 웃을 만한 즐거운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지유는 그녀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무시하고 지나쳤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 오르려는데 승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조만간 그쪽은 아무것도 아니게 될 테니 일단 며칠은 봐주도록 할게요. 어차피 당신은 곧 오빠한테 버림받을 테니까요.”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지유는 벌써 이긴듯한 승아의 미소를 볼 수 있었다.지유는 주먹을 꽉 쥐더니 자기도 모르게 배를 바라보았다.아이가 생긴 이상 희망은 품어야 했다.사무실에 도착한 후 그녀는 자신의 자리가 아닌 대표이사실로 향했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현은 온라인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보더니 잠깐 회의를 스톱하고 물었다.“무슨 일 있습니까?”“네.”이현은 컴퓨터를 끄고 소파에 앉아 그녀에게 물었다.“무슨 일인데?”그의 맞은편에 앉아 눈을 똑바로 마주쳐오는 모습이 뭔가 중요한 할 말이 있는 사람 같았다.지유는 순간 어디서부터 얘기를 꺼내야 할지 몰라 일단 아무 말이나 던졌다.“아까 올라오는 길에 노승아 씨를 만났어요. 즐거워 보이더라고요.”“할 말이 그거야?”지유는 입을 달싹이더니 그와 다시 눈을 마주치고 본론을 꺼냈다.“저한테 그날 밤 함께 했던 그 여성분 찾아내라고 하셨잖아요.”“그랬지?”이현은 아직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을 파악하지 못했다.“만약에 말이에요. 정말 만약에 그 여성이 임신했다고 하면 대표님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지유는 이현의 의심 가득한 눈초리에 서둘러 한마디 덧붙였다.“술 취한 상태라 아무리 대표님이어도 피임을 못 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만약 그 여성분이 임신이라도 했으면 어떡하실 생각이세요?”“나조차도 생각하지 못한 부분인데 참 세심해?”지유는 흠칫하더니 이내 최대한 자신은 그날 밤 그 여자가 아니라고 선을 그으면서 말했다.“우리 아직 이혼한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만약 다른 여자가 대표님 아이를 임신하면...
그녀의 행동에 이현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손을 거두어들였다.“내가 무서워?”지유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그녀에게 거절당했다는 사실에 어쩐지 심기가 불편해진 그는 그녀에게 축객령을 내렸다.“다른 일 없으면 이만 나가 봐.”지유는 오랜 시간 생각을 정리한 후에야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아이가 생기고 나니 어딘가 변한 것 같기도 했다.지유는 아이를 꼭 지켜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이 생겼다.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예를 갖춰 말했다.“회의 중 실례했습니다. 분부하신 일은 꼭 완수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그러고는 그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바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그녀의 말에 이현은 또다시 기분이 나빠졌다.몇 분 뒤 진호가 들어와 그에게 말했다.“대표님, 회의가 아직...”“나가.”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이현의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사무실에서 나온 지유는 그만 다리가 풀려버렸다.이제부터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충동적으로 감정적으로 굴면 안 된다. 항상 이성적으로 절대 이현에게 임신했다는 사실을 들키지 말아야 한다.결혼식 당일에도 선을 넘지 말라는 엄포를 놓았던 그였기에 방금 한 말도 허투루 들어서는 안 된다.여기까지 생각한 지유는 서둘러 지희에게 문자를 보냈다.[지희야, 나 좀 도와줘.][무슨 일인데?][여자 한 명 알아봐 줄래? 여이현이 반할 만한 여자가 필요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두 사람 잘 되어 가고 있는 거 아니었어? 여이현이 반할 만한 여자가 왜 필요한데 네가??]지유는 이현의 성격을 잘 알고 있다. 그가 직접 포기하겠다고 얘기하지 않는 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날 밤 그 여자를 찾아내고 말 것이다.만약 인내심이 다 한 여이현이 직접 그 여자를 찾아내게 되면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그에게 들키는 순간 배 속의 아기는 빛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게 될 것이다.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러니 지금은 어떻게든
“주소영이요...”주소영이라는 아이는 풍성하고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고 무척이나 연약하고 또 낯도 가리는 듯했다.체형은 지유와 비슷했지만 얼굴은 승아와 닮아 있어 청순하고 여린 것이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성상이었다.사장이 지유에게 그녀를 소개했다.“우리 클럽에 막 들어온 신입인데 얼굴이 반반해요. 아직 교육 기간이라서 제대로 된 일은 해본 적이 없어요. 집은 시골이고 엄마가 아프다고 돈이 필요하다고 왔고요. 문제 될 거 아무것도 없이 깔끔해요.”그녀는 지유의 조건에 딱 들어맞았다.예쁘고 청순하며 남자들의 보호 욕구를 자극할 수 있는, 이현도 좋아할 만한 그런 여자였다.“이분으로 할게요.”지유의 말에 소영은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듯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저, 저는 신입이라 아무것도 몰라요. 그리고 뭘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몸 같은 거 안 팔아요.”지유는 그녀의 두려움을 캐치하고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주소영 씨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요. 돈은 만족할 만큼 줄 생각이에요. 물론 강요는 안 해요. 하고 싶으면 연락 줘요.”그녀는 소영에게 명함을 내밀었다.소영은 잔뜩 겁먹은 채로 명함을 받았다.지유는 행여나 일이 어그러질 것을 염려해 사장에게 말했다.“몇 명 더 알아봐 줄 수 있으실까요? 돈은 추가로 드릴게요. 제가 하루빨리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서요.”사장은 돈을 더 주겠다는 말에 싱긋 웃으며 답했다.“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원하는 대로 더 찾아드릴게요.”지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룸을 빠져나왔다.소영은 명함을 손에 꽉 쥐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다 지유가 룸을 나간 1분 뒤 그녀 역시 룸을 빠져나와 지유를 불렀다.“저기요, 잠시만요!”지유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소영은 그녀 앞에 서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금방이라도 피가 날 것만 같았다.“돈... 돈은 얼마나 주실 거예요?”그녀는 돈이 필요했다.엄마의 병원비를 대줘야 했고 어린 남동생 두 명도 돌
“생긴 것도 예쁜데 어리기까지 하잖아. 남자들은 이런 유혹 쉽게 못 떨쳐내.”지희는 그녀가 걱정되었다.아무리 이성적인 남자라도 어리고 예쁜 여자 앞에서는 충동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하지만 지유는 이 방법 말고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가 없었다.“나한테 다른 선택지는 없어, 지희야.”지유는 그녀를 향해 애써 웃어 보였다.“만약 여이현이 정말 저 애를 좋아하게 된다고 해도 나는 이렇게 해야만 해.”그녀는 자신의 아이로 도박을 걸 수는 없었다.지희는 그녀의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이렇게까지 얘기하는 걸 보면 분명히 그만한 사정이 있을 거로 생각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지유가 쉽게 털어놓을 수 있는 얘기였으면 진작에 털어놓았을 테니까.고작 며칠 안 본 사이에 이런 결정을 했다는 건 분명히 심각한 사정이 있는 게 분명했다.솔직히 가끔은 여이현이라는 남자와 엮이지 않았더라면 지유는 훨씬 더 행복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뭐가 됐든 조심해. 여이현 뿐만 아니라 저 여자애도. 생긴 건 순진무구한데 또 누가 알겠어. 이상한 마음이라도 먹을지.”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어차피 그때가 되면 이미 이혼하고 난 뒤일 테니 당장은 크게 걱정은 되지 않았다.이혼하고 나면 여이현과는 더 이상 접점이 없게 되고 그러면 앞으로 그에게 어떤 여자가 달라붙든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 된다.지유는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도와주는 친구를 보며 이제껏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이 지희와 친구가 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그 생각에 마음이 따뜻해져 지희를 와락 끌어안았다.지희는 갑자기 안겨 오는 지유에 조금 의아한 눈길로 물었다.“뭐야 갑자기?”“그냥. 너밖에 없다 싶어서.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항상 나 도와주잖아.”“그 사실을 새삼 깨달은 거야? 나도 원해서 하는 거야. 너도 나 도와준 거 많잖아. 아무것도 없던 내가 여기까지 오는 데 네 도움이 컸어.”지유가 지희에게 고마운 마음이 있듯이 지희 역시 지유에게 고마웠다. 두 사
하지만 나도현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박은희도 하민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천지개벽하고 피와 살이 뒤섞이는 상황에까지 끌고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녀가 숨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나도현이 화가 가라앉으면 자연스럽게 그녀를 놓아줄 것이라 믿었다. “그 아이가 누구의 애인지 물어봐서 뭐 해? 나도현, 우리는 말할 건 다 했잖아. 더 이상 서로 힘들게 하지 말자.” “네 엄마가 그렇게 많은 돈을 주는데 내가 바보냐? 그걸 왜 거절해야 해? 예전에 20억에 너를 포기했던 것처럼 지난 4년 동안 우리는 이미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어. 넌 내가 울며 매달려서 싫다고 말할 걸 기대했어?” 양시은은 담담하게 나도현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무섭기도 했지만 점점 그녀는 상황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도현이 그녀에게 죽으라고 할 리는 없으니까. 죽지 않으면 언젠가는 나도현에 의해 풀려날 날이 있을 것이다. 지금 나도현의 마음속엔 그저 그때 분노로 가득 찼을 뿐이다. “그게 가능할 리가 있냐?” 나도현은 비꼬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양시은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잖아. 그러니 내가 책임질 순 없어. 지금 나를 여기에 가두고 있을 바엔 차라리 양채은을 찾아가. 양채은은 진짜로 널 사랑해. 뱃속의 아이도...” “그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야. 그 여자가 날 사랑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지? 난 널 사랑하지만 너는 나한테 어떻게 했지?” 양시은이 말을 계속하려는 순간 나도현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더욱 어두워진 채 양시은의 몸에 머물렀다.나도현의 깊은 사랑을 양시은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현이 예전에 사랑했던 만큼 지금은 증오도 그만큼 깊어졌다. 나도현은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말했다. “너 같은 사람한테 사랑을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 지금까지 아이 아빠는 보지도 못한 걸 보니 네가 죽인 거 아니냐?” 양시은의 마음이 처참하게 찔렸다. 아이의 아버지는 바로 눈앞에
바로 핸드폰 속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도현은 그 번호를 비서에게 보내며 지시했다. “철저히 조사해.”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갑작스러운 결심이 떠올랐다. ‘더 이상 양시은이 밖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놔둘 순 없어.’ 그리고 나흘 뒤 박은희가 찾아왔다. “네가 가업을 물려받는 걸 싫다고 한 건 이해한다. 근데 지금 또 나랑 대항해서 그 아이를 다시 데리고 오겠다는 거야?” 나도현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박은희는 더욱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나도현, 양시은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눈으로 똑똑히 봤잖아. 그런데 왜 아직도 그 여자에게서 헤어 나오질 못하는 거야? 내가 너한테 소개해 준 약혼녀는 네가 고른 여자보다 어디가 못 해?” 임씨 가문도 경성의 명문가다. 나씨 가문과 임씨 가문은 비록 여씨 가문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경성에서 두 번째로 손꼽히는 대가문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나민우 집안과 친척 관계다. ‘나민우 역시 처음에는 결혼은 원하지 않았지만 결국 부모의 뜻을 따랐고 가문의 이익을 위해 결혼하게 되지 않았나?’이런 생각이 들자 박은희는 더욱 불쾌한 마음에 불만을 터뜨렸다. “나도현, 네가 내 말을 듣기 싫으면 나민우를 좀 본받으면 안 되겠니? 나민우가 어떻게 했는지 알잖아. 넌 도대체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야? 내가 진짜로 나민우를 내 아들로 삼아야 속이 시원하겠어?” 부모들이 자녀를 나무랄 때 자녀들이 흔히 하는 말처럼 ‘남이 그렇게 좋으면 그 쪽한테 가서 아들이나 돼달라고 하세요.’와 같은 뉘앙스였다. 하지만 박은희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나도현에게 상황을 잘 파악하고 나인우를 따라 배우라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가문의 발전과 명성을 위해 양시은과는 반드시 거리를 두어여 한다. “왜 그렇게 남들과 비교하기를 좋아해요? 나민우는 나민우의 선택이 있는 겁니다. 그리고 양시은에 대한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해요.” 나도현은 등을 돌리고
양시은은 눈을 감았지만 깊은 절망이 그녀를 감쌌다.나도현이 언제 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퇴원하려고 했지만 지켜보는 이가 있어 병실 밖을 나갈 수 없었다. 오후가 되자 간호사가 들어오며 약을 갈아주었고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괜찮아요.”“안 돼요. 이건 임 선생님이 직접 시키신 일이니 전 대충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환자분도 치료에 협조 좀 해주세요.”간호사는 난처한 얼굴로 말했고 양시은은 고개를 들더니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나가서 바람 좀 쐬고 싶어요.”“알았어요. 일단 약부터 갈고 휠체어 가져올게요. 환자분은 아직 무리하게 움직이면 안 되거든요.”간호사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날씨는 좋아도 너무 좋았던지라 휠체어를 타고 밖으로 나가면서 양채은에게 또 전화를 걸어보았다. 여전히 꺼져있다는 음성이 들려오는 것을 보니 양채은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 다시는 그녀의 앞에 나타나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양시은은 순간 불안감에 휩싸였다. 옆에 있던 간호사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임 선생님께선 왜 안 오신 거예요?”“모르겠네요. 혹시 휴가 내신 건 아닐까요?”“예전에 단 한 번도 휴가를 낸 적 없었잖아요. 게다가 이틀 동안 계속 회진하는 것을 봐서는 절대 환자를 두고 휴가 낼 것 같진 않았어요.”“그래요? 임 선생님은 우리 병원에서 알아주는 미남이라 매일 임 선생님 얼굴 보고 싶어서 찾는 건 아니고요?”“당연하죠. 임 선생님 얼굴만 봐도 힘든 게 싹 정화되는 기분이라니까요. 오늘도 보고 싶은데 안 보이네요.”원래부터 농담으로 한 말이었던지라 분위기도 쉽게 풀렸다. 간호사들은 서로 웃으며 대화를 나누면서 양시은 앞으로 지나갔다. 하지만 양시은은 이상함을 눈치챘다.“임 선생님께서 언제 사라지신 거예요?”“아마 오전 일 거예요. 일이 있다고 나가신 뒤로 돌아오지 않으셨거든요. 아마 급한 일이 생긴 거겠죠. 안 그래도 휴가 한번 안 내던 사람이었는데 이참에 휴가 내셨을 수도 있을 것 같네요.”간호사는
“너는 환자고 나는 의사니까 보살피는 건 당연한 거야.”임지욱은 웃으며 그녀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상을 차린 후 그는 수저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먹어 봐.”배가 고프긴 했지만 입맛이 없었다. 그렇다고 거절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이대로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면 하민이를 찾아다닐 체력도 없었기에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으려고 했다. 그 순간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곧이어 병실 문이 열리고 나도현이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발견하곤 표정을 굳혔다.“의사가 이런 식으로 환자를 보살피는 건가요? 아니면 양시은한테만 그런 건가요?”“오랜만에 만난 후배를 챙겨주는 건데 뭐가 문제죠?”임지욱은 심기 불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병실 안의 분위기는 싸늘하게 얼어붙었다.나도현은 눈알을 돌리며 양시은과 임지욱을 번갈아 보더니 결국엔 양시은의 창백한 얼굴에 고정하게 되었고 아주 복잡한 눈빛이었다.양시은은 병실에 흐르는 분위기를 읽어내고 음식을 먹으려던 손을 멈추었다.“나 변호사님.”그러자 나도현은 픽 웃더니 어두운 아우라는 사라지고 조롱 가득한 어투로 말했다.“쓰러지기 전에는 눈물까지 흘리며 아들을 살려달라고 하기에 너한테 아들뿐인 줄 알았지. 그런데 고작 며칠이 지났다고 아들은 뒷전으로 미뤄두고 여기서 의사한테 작업을 걸고 있는 거지?”양시은의 표정이 변해버렸다. 하민이는 그녀의 약점이자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가족이었다.느껴지는 배신감에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고통이 상처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졌다.그런 그녀의 상태를 임지욱이 먼저 발견하곤 얼른 부축했다.“시은아, 아직 상처가 다 낫지 않았으니까 화를 내면 안 돼. 할 말이 있으면 나중에 해. 알았지?”양시은은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았다.“괜찮아요.”나도현은 원래 아이를 언급하며 임지욱이 양시은을 포기하길 바랐지만 임지욱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오히려 양시은을 더 걱정해주고 있었다. 순간 분노가 치민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을 정도였고 목
“하민아, 눈 좀 떠봐!”양채은은 하민이를 데려가고 싶었을 뿐 아프게 할 생각은 없었다. 이때 어둠 속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발걸음 소리와 함께 키가 큰 남자가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밤이었던지라 남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신비로운 분위기 탓에 양채은은 바로 남자의 정체를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 남자는 바로 자신에게 강태경이 나도현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사람이었다.“여긴 왜 왔어요? 제 꼴을 보니 이제야 만족했어요?”“멍청하긴. 사기를 당했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있겠어요?”남자는 픽 웃어버렸다.“상처만 가득한 진실이었다면 전 차라리...”양채은은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그런 억지는 그만 부려요.”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대체 원하는 게 뭐죠?”양채은은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를 보며 그의 목적을 알아내려고 했다.“이대로 넘어가려고요?”남자의 질문에 양채은은 입술만 틀어 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온하고 행복했던 인생이 엉망진창이 되었는데 어떻게 그냥 넘어갈 수 있단 말인가.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남자는 이런 그녀의 마음을 눈치챈 듯했다.“그 아이가 없으면 양시은은 분명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될 거예요.”양채은은 고개를 떨구고 하민이를 보았다. 하민이는 아직 어렸고 몸도 약했으며 그녀는 아이의 이모였다. 그런데 어떻게 아이가 죽게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안 돼요.”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전 하민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봐야 해요. 근처에 가까운 병원 아는 곳 있어요?”“아직도 이성이 남아 있나 보네요.”남자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차갑게 말했다.“우리가 손을 잡으면 될 텐데요.”양채은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대체 뭘 원하는 거죠?”남자는 아무런 감정의 파동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각자가 원하는 바를 이루는 거죠.”양채은은 뜸을 들였다.“아직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급하지 않으니 천천히 생각해요.”남자는 그녀에게 명
더는 통증을 참을 수 없었던 양시은은 점점 숨이 거칠어졌다.“연기 그만해.”나도현의 내정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고 그녀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양시은은 한참 지나도 몸을 일으킬 수 없었고 이를 악물며 온몸으로 퍼지는 극심한 통증을 참아보려고 했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은 어느새 주르륵 흘러내리며 하얀 병원 이불에 떨어지고 있었다.“나도현, 네가 무슨 계획을 꾸미든 상관없어. 나한테는 소용이 없으니까. 난 내 아이만 무사하면 되거든.”양시은은 겨우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그럼에도 목소리엔 확고함이 묻어났다.나도현의 눈빛이 살짝 번뜩였고 차갑게 말했다.“일단 치료부터 받아.”이 말을 던진 후 그는 빠르게 병실을 나섰고 양시은은 힘없이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차는 남쪽으로 향해 달리고 있었고 양채은은 내비게이션만 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어디로 가는지 몰랐고 아주 외진 곳을 향해 달렸다. 해는 아직 저물지 않았지만 도로엔 차가 보이지 않았다.하민이는 눈을 비볐다.“이모, 우리 어디 가요?”아이의 목소리에 양채은은 정신이 들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그녀의 안색은 창백했고 마치 구천을 떠도는 귀신 같았다.“재밌는 곳으로 가는 거야.”하민이는 하품을 했다.“이모, 졸려요. 하민이 눈이 너무 무거워요.”“그래, 이따가 자게 해줄게.”양채은은 여전히 하민이에게 다정했다.하민이는 고개를 끄덕인 후 장난감을 안고 의자에 기대어 자버렸다. 그녀는 발 디딜 수 있는 곳에 차를 세운 뒤 하민이를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하민이가 자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가방에서 약병을 꺼내 몇 알 삼켰다. 온몸을 지배하던 고통이 그제야 가시는 기분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 전원을 켜고 문자를 확인하려고 했지만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아 침대에 기대어 떨어지는 노을을 보다가 잠들어 버렸다.그녀는 하민이가 웅얼대는 소리에 잠에서 깨게 되었다.“오지 마세요. 우리 이모랑 엄마한테 다가가지 마세요.”양채은은 눈을 번쩍 뜨게 되었고
어쩌면 몸에 다친 곳이 있었던 탓인지 양시은은 힘을 쓸 수 없었고 그녀의 행동은 고양이가 버둥거리듯 했다. 임지욱은 그녀를 데리고 병실로 돌아온 뒤 아주 진지한 얼굴로 꼼꼼하게 검사를 해주었다.“그동안 동창회에 한 번도 빠짐없이 참석했는데 단 한 번도 널 보지 못한 것 같아. 혹시 해외에 있었던 거야?”양시은은 고개를 저었다.“사정이 있었어요. 말해봤자 좋을 것도 없는 사정이에요.”“그래도 힘든 거나 도움이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면 도와줄 테니까.”임지욱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세월이 흘렀지만 그녀의 얼굴엔 세월의 흔적이라곤 거의 없었다. 다만 피곤함에 찌든 두 눈은 예전의 빛을 잃어버린 듯했다.양시은은 침묵하다가 한참 뒤에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선배.”임지욱은 무의식적으로 물었다.“그럼 변호사 일 하고 있는 거야?”이 질문은 그녀의 아픈 곳을 쿡 찌르게 되었다. 순간 울컥 감정이 밀려온 그녀는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상처 부위는 어때요?”그녀가 일부러 화제를 돌리고 있음을 눈치챈 임지욱은 더는 묻지 않았고 상처 부위를 더 꼼꼼하게 살펴보았다.“또 터졌네.”“어쩐지 아프더라고요.”양시은은 창백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넌 예전이랑 변한 게 하나도 없네. 여전히 힘든 거 억지로 참고 있네. 하지만 이번에 퇴원하면 절대 상처 부위에 물 닿게 하지 마. 그래야 빨리 나을 수 있으니까.”치료해주며 당부하는 임지욱의 눈빛은 아주 다정했다.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인 후 억지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 선배.”“내가 나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의사한테 작업을 거는 거지?”언제부터 문 앞에 서 있었는지 모를 나도현이 눈을 가늘게 접으며 두 사람을 경멸의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언제 온 거지?'양시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괜스레 긴장하게 되었다.임지욱은 고개를 돌리자마자 나도현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 사이엔 스파크가 튀기고 있었다. 긴 침묵 끝에 그가
양시은은 입술을 짓이겼다. 피가 많이 흘러나왔던지라 안색이 창백해져 자조적으로 웃었다.“나는 내 주제를 알아.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너한테 상처를 주겠어?”나도현은 가슴이 갑갑해졌고 커다란 돌덩이가 가슴을 누르고 있는 것처럼 불편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싸늘한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양시은, 너 정말 뻔뻔하다.”박은희는 찬 바람만 부는 두 사람 사이를 보며 속으로 기뻐했고 이내 맞장구를 쳤다.“그깟 돈 때문에 너를 버리는 여자인데 왜 미련을 가지고 있는 거니.”“그만 하세요.”나도현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다시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이 여자에게 돈을 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럴 만한 가치도 없으니까요.”그는 시선을 돌려 양시은을 차갑게 보았다. 박은희는 속으로 아주 기뻐했다.“네가 정신을 차렸다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세상엔 좋은 여자는 많고 많단다. 너랑 결혼할 여자는 더 많고.”“나가서 말하죠.”나도현은 차갑게 말을 내뱉으며 밖으로 성큼성큼 나가버렸다.양시은은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더는 참을 수 없어 침대에 털썩 엎드리게 되었다. 상처를 금방 치료했던지라 여전히 아팠고 바늘로 꿰맨 곳이 찢어질 듯 아팠다.하지만 하민이는 여전히 양채은의 손에 있었기에 마음 놓고 편히 있을 수 없었다. 결국 비틀대며 병원을 나선 뒤 양채은에게 전화를 걸어보려고 했다. 모든 일은 그녀 때문에 일어난 것이고 하민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병실 밖을 나가자마자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주었고 청량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조심해요.”“고맙습니다.”양시은은 고개도 들지 않고 상대의 손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상대는 다시 그녀를 잡았다.“양시은?”상대의 목소리에선 놀라움과 반가움이 묻어나 이어 그녀는 창백한 얼굴을 들 수밖에 없었다.그녀의 눈앞에는 잘생긴 얼굴이 있었고 품이 좀 너른 의사 가운은 유난히도 남자에게 잘 어울려 보였다.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양시은은 조금 생각이 나지 않아 뜸을 들이며 말했다.
양시은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나도현이 자신을 포기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8억보다는 아니라니...나도현이 강태경으로 살 때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돈을 아껴 쓰라는 말을 한 적 없었고 나중에 나도현이 된 후에도 손에 돈이 부족했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양시은의 말을 들으니 두 사람이 쌓았던 감정이 전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가소로웠다.“양시은, 돈이 필요하면 나한테 말해. 내 기분만 맞춰주면 8억보다 더 많은 돈을 얻을 수 있지 않나?”나도현은 상처받은 두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양시은이 한 말이 제발 전부 거짓이길 바랐다. 그녀는 나도현이 자신에게 잘해줬던 시절은 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입을 열려던 순간 밖에서 콰당 소리가 났다. 박은희가 있는 힘껏 문을 밀어 연 것이다.엄청난 기세를 내뿜던 박은희는 바로 양시은에게 시선을 돌렸다. 양시은은 그녀가 좋은 의도로 찾아온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입을 꾹 다문 채 박은희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박은희는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지 않고 문에 서 있었다. 거리가 조금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쩌렁쩌렁하게 들려왔다.“양시은 씨, 전에 8억 주면서 내가 뭐라고 했지? 내 아들 곁에서 떨어지라고 했잖아. 난 지금도 내 아들이랑 함께 있는 꼴 보고 싶지 않으니까 서로 좋게 합의 보자고. 얼마를 원하는지 말해.”박은희는 나도현이 양시은을 향한 마음을 접길 바랐다. 그래서 나도현이 보는 앞에서 양시은에게 얼마나 요구를 하는 것이냐고 물은 것이다. 양시은도 박은희가 대놓고 물어볼 줄은 몰랐다. 목구멍에 커다란 돌멩이가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고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다. 하지만 그녀에겐 다른 선택은 없었다.“그때는 8억이지만 지금은 적어도 2배 정도는 주셔야 할 거예요. 하지만 전에 거래한 것이 있으니 12억만 주시면 영원히 눈앞에서 사라져 드릴게요. 아니, 죽으라고 하셔도 돼요.”양시은은 한 글자씩 내뱉을 때 나도현을 똑바로 바라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