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실 문을 열자 지유가 욕조에 앉은 채 온 힘을 다해 몸을 벅벅 문질렀다. 혹시나 이현이 들을까 봐 그러는지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지유야, 그만해!”이현은 얼른 그쪽으로 다가가 자기 몸에 상처를 내고 있는 손을 낚아챘다.지유는 눈시울이 빨개서는 이현의 손을 뿌리치며 발버둥 쳤다.“건드리지 마요. 나 더러워요…”“너 안 더러워.”이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 두 손으로 지유의 몸을 끌어안으며 더는 상처를 내지 못하게 막았다.“너 아주 향긋해.”지유의 머릿속엔 온통 이 대표의 배에 단단히 눌려있는 장면이 떠올라 속이 메슥거렸다. 이현이 살짝 건드려도 지유는 자기가 더럽다고 생각해 고개를 저었다.“위로하지 마요. 나 더러워진 거 맞아요. 내가 생각해도 역겨워요.”지유는 이미 빨갛게 달아오른 몸을 마구 비벼댔다.“온지유.”이현이 어떻게 부르든 지유는 들리지 않았다. 몸 곳곳을 벅벅 문지르며 계속 중얼거렸다.“나 더럽혀졌어. 씻어야 해.”“나…”지유가 같은 말을 반복하려다 멈췄다. 떨리는 입술로 경악을 금치 못하며 촉촉한 눈빛으로 이현을 바라봤다. 이현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에 키스한 것이다.“지유야, 너 안 더러워. 깨끗해. 더러운 건 다른 사람이야.”이현의 차가운 목소리는 마치 따스한 햇살처럼 그녀를 어둠에서 끌어냈다. 목소리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행동도 바로 보였다.이현의 입술은 지유가 벅벅 긁어서 빨갛게 달아오른 자리에 놓였고 이 대표가 만졌던 곳에 놓였다. 그는 마치 보물을 대하듯 부드럽게 그녀의 몸 곳곳에 키스하며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여기도 내가 소독했어. 여기도. 그리고 앞으로 절대 너를 괴롭힐 사람은 없을 거야.”이현은 아까 있었던 일로 지유를 역겨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상처에 키스하는 것으로 모든 흔적을 지워주려 했다.지유의 눈동자엔 눈물이 가득 차올랐고 발버둥 치던 것도 멈추었다. 힘을 주며 버티던 손도 스르르 풀렸고 흐느끼는 말투로 이현을 불렀다.“이현 씨.”“응?”이현이 고개를 들어
지유는 이현의 목을 휘감으며 이렇게 말했다.“옆에 있어 줘요.”“여기 있을게. 아무 데도 안 가.”이현이 지유의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몸이 빨갛게 달아올랐어. 잘 때 얌전하게 자야 상처가 덧나지 않는 거 알지?”지유는 그제야 승아가 왜 이현에게만 늘 그렇게 약하게 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아픈 손가락에 눈길이 더 가기 마련이니까.살짝만 약하게 나가도 이현은 정말 너무 부드러워졌다.“네.”지유는 아쉬움을 감추며 두 손을 풀었다.이현은 지유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침대 가에 앉았다.“추워?”지유가 고개를 저었다.“춥지는 않아요.”“너 약간 미열이 있어.”이현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젖은 수건 좀 가져올게.”“고마워요, 남편이 제일이네.”지유는 제일 진실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이현이 웃으며 지유의 코를 꼬집었다. 지유도 피하지 않고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이현을 바라봤다. 잠깐이지만 이런 모습을 마음속에 영원히 새기고 싶었다.하지만 이현이 이렇게 말했다.“지유 님, 사람은 함부로 믿는 게 아니에요.”이현이 수건으로 얼음을 감싸더니 지유의 이마에 놓아주며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없을 때 누가 잘해준다고 바로 따라가면 안 돼.”이를 들은 지유는 찡해 나는 코끝에 입을 앙다물고 억지로 웃으며 강한 척했다.“그럴 리가요.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쉽게 안 속아요.”“내 생각엔 잘 넘어갈 것 같은데, 그 우석이라는 남자한테 홀라당 반한 거 아니야?”이현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지유가 멈칫하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에 이현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그 남자 어떤 사람인지 물어본 적도 없네. 어떤 남자길래 지금까지 잊지 못하는 거야?”지유가 시선을 돌리며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이현 씨랑 닮았어요. 근데 더 부드럽죠.”이현은 물어본 게 살짝 후회될 정도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우석이라는 남자보다 못하다는 소리로 들렸다.“얼른 자.”이현은 더 물어보기 싫었다. 지유도 사실 이 얘기를 꺼내는 게 싫었다.제
윤정이 이렇게 말했다.“아니에요. 찾을 새가 없었어요. 나가자마자 마침 식당으로 부랴부랴 건너오는 대표님을 만났어요. 온 비서님, 대표님 혹시 점쟁이 아니에요? 온 비서님을 진짜 많이 걱정하는 것 같더라고요.”윤정은 아직도 그날 일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온 비서님은 아마 모를 거예요. 대표님이 도착했을 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니까요. 이 대표님을 아예 아작낼 듯한 기세였어요. 그리고 몇몇 선동자까지 같이 처단했고요. 대표님은 많이 화났는지 온 비서님을 품에 안고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했어요.”윤정의 말에 지유가 멈칫하더니 옆에 놓인 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온 비서님, 대표님이 원래 부하를 이렇게 아끼나요? 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요. 만약 다친 사람이 나라도 그렇게 신경 쓰셨을까요?”윤정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이렇게 중얼거렸다.“아무리 대표님 곁을 오래 지켰다 해도 이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잖아요. 온 비서님, 대표님 혹시 온 비서님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켁켁켁…”물을 한 모금 마시는데 윤정이 이렇게 말하자 바로 사레가 걸렸다.윤정이 지유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온 비서님, 왜 물 마시는데도 사레가 걸리는 거예요?”켕기는 게 있는 지유는 얼른 부정했다.“아니에요. 대표님이 어떻게 저를!”윤정이 의아해하며 계속 토론을 이어갔다.“다른 사람들은 대표님이 노승아 씨를 좋아한다 그러던데요. 그 가수 있잖아요. 노승아 씨 웃는 거 보려고 돈을 억 단위로 쏟아붓는대요. 노승아 씨 대표님 첫사랑이라는 소문이 있는데 이제 돌아왔으니 다시 대표님과 사귀겠죠?”“온 비서님이 더 잘 알고 아니에요?”윤정은 지유가 몇 년간 이현의 곁을 지키면서 수행 비서로 있었으니 개인적인 일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지유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저도 몰라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아니다, 아니다.”윤정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였다.“이게 만약 진짜라면 증거가 안 나올 리
“에이, 다들 몰라도 너무 모른다. 온 비서님이 신분 상승을 위해서 일부러 꼬신거라던데요? 대표님 비서까지는 올라갔지만 대표님 와이프 자리는 넘볼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봤겠죠. 예쁜 얼굴을 무기 삼아 이 대표님 애인이라도 해볼까 했는데 그것도 안 될 것 같으니까 이 대표님이 성폭행했다고 적반하장으로 나오기까지 하고. 이 대표님 지금 너무 불쌍하더라고요. 감옥살이 해야 된다던데?”“평소에 온 비서님 얼마나 서글서글해요. 근데 뒤에서는 이렇게 약삭빠른 줄 몰랐네요. 그러니까 대표님 옆에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거죠. 얼마나 더러운 수단을 썼을까요?”“흥, 온 비서님 대단한 거 이제 알았어요? 전 진작에 알아봤는데. 막말해서 우리 회사에 온 비서님보다 실력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 온 비서님이 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그게 다 얼굴 믿고 저러는 거 아니겠어요? 그 여우 같은 얼굴로 대표님 꼬드긴 거예요. 그러다 제대로 걸린 거죠. 똑같은 방법으로 이 대표님 꼬시려다가 성폭행이나 당하고…”쾅 하는 소리와 함께 지유가 화장실 문을 걷어차고 나와 그들 뒤에 자리하고 섰다.화장을 고치던 여사원들은 지유를 보고 너무 놀라 립스틱까지 삐뚤게 그렸다.“온, 온 비서님…”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만 있던 몇몇 여사원이 공손하게 지유를 불렀다. 하지만 유언비어를 퍼트린 그 사원은 머리를 빳빳이 든 채 지유를 힐끔 쳐다보고는 불만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진예림의 부하 고세리였다.집안 관계로 여진그룹에 들어온 고세리는 갓 사회에 나온 애송이였다.바닥부터 천천히 위로 올라온 진예림은 당연히 뭐가 더 수지가 맞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고세리에게 꽤 잘해줬다.지유의 얼굴에는 별로 표정이 없었다. 고세리를 욕하지도 않고 그저 옆에서 손만 열심히 씻었다.그들은 지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불안했다. 하지만 유독 고세리만 지유가 겁먹었다고 생각하고는 앞으로 팔짱을 낀 채 우쭐거렸다.“어떤 사람은 참 낯짝이 두껍다니까요. 그러게 소문이 나는
고세리는 반항할 기회가 없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종래로 이런 수모를 겪은 적이 없었기에 화가나 미칠 지경이었다.지유가 차갑게 말했다.“안 때리면? 앞으로 여진그룹에서 어떻게 지내야 할지도 모르는 사람인데.”“온 비서님. 왜 제 사람을 때리고 그러세요?”큰 소동이 일자 사람들이 달려와 구경했다.진예림은 그들이 여기 있다는 소식을 알고 달려왔다가 고세리가 맞는 장면읗 목격하고는 두 눈이 휘둥그레서 얼른 두 사람을 뜯어말렸다.진예림의 사람을 때렸다는 건 진예림을 때린 거나 마찬가지였다.고세리는 자기를 구해줄 사람이 나타나자 얼른 울먹거리며 이렇게 말했다.“예림 언니!”고세리는 얼굴을 부여잡고 진예림 곁으로 달려가더니 이렇게 말했다.“온 비서님이 저 때렸어요.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진예림은 고세리를 등 뒤로 빼더니 성질을 내기 시작했다.“온 비서님, 미쳤어요?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에요? 정말 여진그룹이 온 비서님 거라도 되나 봐요? 모든 사람이 온 비서님 말을 들어야 되는 것도 모자라 제는 사람까지 때리고. 저는 이제 안중에도 없다 이거죠?”지유는 아까 귀싸대기를 너무 심하게 갈겨 얼얼해진 손을 툭툭 털더니 이렇게 말했다.“진예림 씨 사람이라니 잘됐네요. 앞으로 부하 관리 철저히 하세요. 이런 헛소리나 퍼트리고 다니게 하지 말고. 진예림 씨가 해야 하는 일을 내가 직접 했을 뿐이에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내가 때릴 이유도 없겠죠?”“헛소리는 누가 헛소리를 했다고 그래요? 다 사살이고만. 당신이 저지른 일 회사에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진예림이 거만하게 말했다.“그런 수단으로 올라간 거 아니에요?”“아, 고세리 씨가 왜 헛소리하나 했더니 다 진예림 씨가 가르친 거군요?”어떤 상사가 있으면 어떤 부하가 있기 마련이다.진예림이 이렇게 헛소리를 늘어놓는 것도 지유의 명성에 금이 갔으면 해서였다.처음은 아니었지만 전에는 직접적으로 지유의 생활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기에 그냥 흘러 넘겼다. 하지
구경하러 온 다른 사람들은 지유를 불쌍하게 생각했다. 일개 비서가 어떻게 전무를 이기겠는가, 결국 가차 없이 나가떨어지고 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고 전무가 고세리를 데리고 뛰어왔다. 조카를 걱정하는 마음에 오자마자 바로 따져 묻기 시작했다.“누구야. 누가 우리 세리 괴롭힌 거야?”고세리가 탕비실에 있는 지유를 가리키며 말했다.“삼촌 저 여자예요. 저 여자가 나를 때렸어요. 삼촌, 어릴 적부터 부모님도 저를 때린 적이 없는데 저 여자가 지금 나를 때린 거예요.”진예림은 이 상황이 매우 흥미진진했다. 그녀는 얼른 불쌍한 척하면서 좋은 사람인 양 쇼를 하기 시작했다.“전무님, 죄송합니다. 제가 세리를 잘 챙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무실에서 제 입지가 작으니 말에 힘이 실리지 않습니다.”뜻인즉 직급은 지유와 같지만 항상 지유에게 눌린다는 뜻이었다. 진예림은 지유가 이 사무실에서 너무 우쭐댄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전무는 예전부터 지유의 안 좋은 소문을 익히 들어서 알았다. 하지만 이현의 옆에서 일하는 사람이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그의 머리 꼭대기로 기어오르려고 하니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온지유 씨, 비서 주제에 감히 우리 조카에게 손을 댄 거예요? 여 대표님 옆에서 일한다고 내가 아무것도 못 할 줄 알고? 내 말 한마디면 바로 여진그룹에서 쫓겨날 수도 있어요.”고 전무는 여진그룹을 다닌 시간이 지유보다 훨씬 길었다. 하지만 같은 부서가 아니었기에 회사에서 활동할 때를 빼고는 거의 마주칠 일이 없었다.지유도 원칙적인 사람이라 모든 뒷담화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못 되었다. 대부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넘겼지만 이번엔 그러기 싫었다. 지유의 한계를 건드린 것이다.고 전무가 아무리 발악해도 지유는 자기 입장을 지켰다.“고 전무님, 저도 고세리씨가 전무님 조카인 건 압니다. 아끼고 보호하는 게 마땅하지요. 하지만 그것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해야죠.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도 않으면서 내 얘기를 함부로 지껄이는데
이현이 밖에서 사람들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강력한 아우라와 차가운 기운에 사람들이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진예림은 어떻게 지유를 혼내줄지 상상까지 끝냈는데 공교롭게도 이현이 도착한 것이다.진예림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아무리 지유를 혼내주고 싶어도 이현이 나타난 순간 너무 두려워 차마 손이 내려가지 못했다.“여 대표님.”사무실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길을 비켜주었다.이현은 그쪽으로 걸어가며 혼란스러운 상황을 살피다 꼭꼭 묶여있는 지유를 발견하고는 미안을 찌푸린 채 차가운 얼굴로 주위를 빙 둘러봤다.“직접 마주한 게 아니라면 여진그룹이 제 회사가 아니라 고 전무님 회사인 줄 알겠어요.”고 전무는 안색이 살짝 변하더니 기염이 확 줄어서는 이렇게 말했다.“아, 아닙니다. 온지유 씨가 저희 조카에게 손을 댔거든요. 우리 집안에서 이 조카를 워낙에 아껴서요. 집에서도 한번 맞은 적이 없는 애가 이런 수모를 당했으니 삼촌이 돼서 힘이 되어주려고 그랬던 겁니다. 아니면 온지유 씨가 점점 더 무서운 게 없이 나올 것 같아서요. 지금도 사람을 때리고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제게 훈수를 두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대표님을 모시겠어요.”고 전무는 지유의 트집을 잡으며 이현에게 지유의 성품이 좋지 못하니 자르라고 유도하고 있었다.지유가 아무리 날고뛰어봤자 결국 비서 나부랭이인데 이현은 결국 자기 편을 들어줄 거라 고 전무는 생각했다.이현이 지유를 바라보며 물었다.“고 전무님이 한 말씀 인정해요?”“아니요, 인정할 수 없습니다. 고세리 씨는 사실이 아닌 유언비어를 터트리다 제게 들키고도 뻔뻔하게 저를 도발했습니다. 고세리 씨의 행위는 제게 상처를 주었고 제가 고세리 씨를 때린 건 저의 정당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대표님이 말씀해 보세요. 제가 잘못했나요? 저는 사과는 하지 않겠습니다.”“대표님 보십시오. 아직도 저렇게 정신을 못 차리고 거만하기 그지없습니다.”고 전무가 씩씩거리며 말했다.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고 전무를 쏘아봤다.“고 전무님
고 전무는 고세리가 말을 많이 했다가 무슨 사달이라도 날까 봐 그녀를 잡아당겼다. 까딱 잘못하면 회사 초기 멤버였던 그도 쫓겨날 위기였다. 고 전무는 사태를 파악하고 얼른 아부했다.“대표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자초지종을 잘 파악하지도 않고 섣불리 대처했으니 온 비서님께 실례가 많았습니다.”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이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말투는 여전히 엄숙했다.“고 전무님은 아셨지만 조카 되는 분도 알았을까요?”고 전무가 고세리를 앞으로 당겨오며 말했다.“온 비서님께 큰 실례를 끼쳤으니 얼른 사과해. 그리고 앞으로 더는 헛소리하지 말고.”고세리는 뺨을 맞은 것도 억울한데 사과까지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렇게 말했다.“삼촌, 내가 왜 사과해야 하는데요? 싫어요!”고세리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떼를 쓰며 울기 시작했다.고 전무는 이현을 힐끔 살폈다. 이현은 이미 인내심을 잃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여진그룹에서 이현이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피를 보고 싶지 않으면 이쯤에서 그만하는 게 상책이었다.고 전무는 냉큼 고세리의 뺨을 후려갈겼다.“제멋대로 굴지 마. 얼른 사과해. 아니면 여기 계속 무릎 꿇고 있든지!”고 전무는 한 번도 고세리를 때린 적이 없었다. 늘 이쁨을 받고 자란 고세리는 처음 삼촌이 이렇게 불같이 화내는 모습을 봤다. 깜짝 놀란 고세리가 얼굴을 부여잡고 지유를 힐끔 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온, 온 비서님, 제가 눈에 뵈는 게 없이 말실수를 했어요. 죄송합니다.”진예림은 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고 전무도 지유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이현은 지유를 지켜주기 위해 고 전무의 체면도 마다했다.이현이 지유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지유에게 눈치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걸 진예림은 깨닫게 되었다.지유도 이현이 무조건적으로 자기를 도울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비록 이현이 친분보다는 도리를 따져야 한다고 했지만 이현도 무의식적으로 그녀 편에 서 있었
문지원은 정말로 일부러 강윤슬을 찾아간 것이 아니었다. 지석훈은 그녀의 말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빤히 그녀를 보았다. 문지원의 얼굴엔 진지함과 단호함만 담겨 있었다. 그는 확실히 문지원이 일부러 찾아갔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해야 모든 사람들이 그와 문지원의 관계를 알게 될 거고 경성의 모든 사람들도 어떻게든 문지원을 도와주려고 할 것이니 말이다. 문지원의 야망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듯 솔직하게 말해줄 줄은 몰랐다.그녀가 애초에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이번에는 정말로 강윤슬이 일부러 문지원을 찾아온 것이 맞았다. 그 순간 지석훈은 대충 뭔가를 짐작하게 되었다.그러나 문지원은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어서 말했다.“혹시 저한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하지 마세요. 전 제 주제를 알고 과욕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요. 석훈 씨와 석훈 씨 아버지는 이미 충분히 저를 도와주고 있어요.”그녀에게 정말로 다른 생각이 있었다면 티가 나지 않았겠는가. 게다가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지나친 욕심은 오히려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그녀와 지석훈은 결국엔 다른 세계 사람이었고 주건 때문에 그녀는 더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알았어. 그럼 협력 업체를 만나러 온 거야?”지석훈은 더는 그녀와 이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다.“네. 프로젝트를 더 많이 받아보려고 왔어요. 저희 직원들이 일을 너무도 잘하는데 아무래도 제가 부족한 것 같아 조금이라도 더 노력해보려고 온 거예요.”직원들이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해주고 있는 덕분에 주문도 밀리지 않고 제때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미 파산해버린 회사를 버리고 도망쳤을 테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런 직원들이 자신 때문에 힘들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지석훈은 입술을 달싹였다.“내가 사업하는 내 친구들을 소개해줄게. 내 친구들이라면 널 도와줄 수 있을 거야. 최근에 제약 회사에서도 뭔가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한번 생각해
한쪽 입꼬리만 올라간 것이 지석훈이 그들을 비웃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임혁수의 안색이 더 일그러졌지만 강윤슬은 난감하기만 했다. 예전에 지석훈이 자신에게 어떻게 애절하게 사랑 고백했었는지 전부 지켜보았었다. 그런 지석훈이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의 편을 들어주고 있으니 오히려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강윤슬은 그런 그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석훈아, 말 좀 가려서 해. 사람을 존중해야 할 줄 알아야지. 우리가 언제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했다고 그래?”강윤슬도 어느새 미간을 찌푸렸다. 임혁수는 계속 강윤슬의 편을 들어주었다.“지석훈, 너 지금 윤슬이를 갖지 못했으니까 질투하고 있는 거잖아. 너 그런 모습 추해. 애초에 네가 강아지처럼 꼬리 살살 흔들며 멋대로 윤슬이 옆에 있었던 거였으면서.”임혁수의 날카로운 눈빛과 말에 지석훈은 정곡을 찔리게 되었고 틀린 말도 아니었다. 예전의 지석훈은 한 마리의 개처럼 강윤슬의 주위만 맴돌았고 비굴하고도 애절하게 사랑 고백하면서 잘해주었지만 결국 지석훈에게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프러포즈를 몇 번이나 했지만 강윤슬은 단 한 번도 받아주지 않았고 임학수의 전화 한 통에 강윤슬은 바로 그의 곁을 떠나버렸다. 심지어 강윤슬은 아무런 조건도 없이 임혁수의 편을 들어주었고 자신과 혈연관계도 없는 임혁수의 딸까지 받아주었다. 그렇게 생각한 지석훈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그래. 맞아. 내가 개처럼 꼬리를 흔들었지. 인정해. 그런데 너희들이 한 건? 너희들은 이 세상이 너희들을 둘러싸고 돌아간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아니야?”“네가 질투한다고 말한 게 그렇게 큰 잘못이냐?”임혁수는 고개를 빳빳이 쳐들며 강윤슬의 편을 들어주었다. 문지원은 더는 뻔뻔한 두 사람을 봐줄 수가 없었다.“만약 우리가 정말 그런 거라면 틀린 말도 아니겠죠. 하지만 이미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하는데 뭔 이유가 필요하겠어요. 안 그래요? 두 사람은 그렇게 평생 함께 살아요. 다른 사람 해칠 궁리는 하지 말고요. 두 사람의 피해망상증이 다른 사람에게도
문지원은 반드시 회사를 다시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회사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으려면 방법이 단 하나뿐이었다. 바로 돈을 많이 버는 것.그녀는 프로젝트를 더 많이 받으려고 나온 것이지만 강윤슬과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강윤슬은 연분홍색 정장을 입고 있어 청순하고 아름다운 매력이 있었다. 비록 강윤슬과 친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난번 강윤슬이 했던 말을 지금도 잊지 않았다.이번에 우연히 만나도 문지원은 당연히 먼저 인사할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강윤슬은 먼저 그녀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강윤슬의 두 눈엔 여전히 그녀를 깔보는 듯한 거만함이 담겨 있었다.“오늘은 석훈이랑 같이 있지 않네요?”다른 사람이 듣기엔 별다른 의미가 없지만 문지원이 듣기엔 이상하게도 말 속에 가시가 느껴져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저희 인사할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설령 강윤슬과 지석훈이 친한 사이라고 해도 그건 두 사람의 사이에서만 통할 뿐 그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강윤슬의 모습은 꼭... 일부러 그녀를 골탕 먹이려고 먼저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강윤슬은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그렇죠. 우리가 친한 사이는 아니죠. 하지만 석훈이 봐서라도 인사를 해주는 거예요. 석훈이 도움으로 문정 그룹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하고 있잖아요. 확실히 좋은 방법이긴 하죠.”문정 그룹의 상황이 점차 나아지고 있는 것도 지석훈의 공로였다. 만약 지석훈이 여이현을 소개해주지 않았더라면 여이현은 아마 끝까지 그녀가 누구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녀는 알고서도 지석훈의 도움을 받는 것이었고 강윤슬의 말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말을 강윤슬이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맞아요. 아주 좋은 방법이죠. 그런데 그쪽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강윤슬 씨, 혹시 사람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예요?”문지원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죠?”강윤슬이 대꾸하기도 전에 누군가 끼어들며 강윤슬의 편을 들어주었다. 목소리를 들은 문지원은
이 말은 손기영만 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직원들이 하고 싶은 말을 그가 해준 것이다. 그들은 심지어 문지원이 없을 때 젊은 나이에 큰일을 하고 있는 문지원을 칭찬하고 있었고 몇 년만 더 지나면 아주 문용석을 뛰어넘는 훌륭한 사장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문지원이 자기 사무실로 돌아가려던 때 갑자기 무언가가 떠올라 다시 몸을 돌렸다.“공장장님, 직원들 점심은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 거예요? 다들 도시락이라도 준비해오는 거예요?”“어떤 사람은 집에서 도시락을 준비해오고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근처에서 간단히 사 먹고 있어. 어차피 우린 힘 쓰는 일을 해야 하니까 배만 든든하게 채우면 되거든.”“그렇군요. 알겠어요. 전 이만 돌아가 볼게요.”문지원은 이미 무언가를 생각해두고 있었다. 직원들이 더 열심히 일하게 해주려면 사장으로서 직원 복지 정도는 만들어 줘야 했다. 예시를 들면 점심 식사 같은 것을 챙겨주는 직원 복지 말이다.물론 지금 공장의 상황으로는 직원들을 위해 식당을 만들어줄 정도의 돈도 없고 그럴 가치도 없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근처 식당과 협력해 점심마다 대량의 도시락을 주문하는 것이 더 나았다. 대량으로 도시락을 주문하니 가격도 협상할 수 있었다.직원들도 매일 따듯한 도시락을 먹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고기와 채소를 곁들여 영양도 챙길 수 있으니 분명 더 열심히 일할 수 있을 것이었다. 문지원은 행동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던지라 사무실에 앉아 한참 고민한 후 공장의 이틀간 생산량을 훑어보았다. 그러고 나서 직접 운전해 공장 근처를 둘러보았다. 아무리 직원을 위해 도시락을 주문한다고 해도 문지원은 대충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깨끗한 식당에서 주문해 직원들에게 점심을 주고 싶었던 그녀는 결국 어느 한 식당 앞에서 멈춰 섰다.“사장님, 도시락 하나에 얼마씩 해요?”“도시락마다 다 다르죠. 고기반찬 둘에 나물 반찬 하나 들어간 건 2400원 정도 하고 고기반찬 하나와 나물 하나면 2000원 정도 해요. 두 가지 모두 생수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어
“문 사장, 내가 며칠 동안 지켜봤는데 다들 아주 열심히 일하고 있더라고. 농땡이 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 다들 어렵게 찾아온 일할 기회를 소중히 하고 있는 것 같아.”손기영은 문지원의 옆에 서서 말했다. 그가 한 말은 전부 사실이었고 직원들을 위해 감싸주는 말이 아니었다. 비록 그도 일하러 온 것이지만 공장장이었던지라 공과 사는 확실하게 구분했다. 문지원도 그런 그를 믿고 있었다.“공장에 아저씨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아저씨는 이 공장의 원로급 임원이나 다름이 없잖아요. 예전에 우리 아빠랑 일하셨을 때도 아빠가 항상 아저씨 일 잘한다고 하셨거든요. 아저씨는 언제든 잘하실 거예요.”그녀의 말을 들은 손기영은 미소를 지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뒤 손기영은 문을 꼭 닫았다.“문 사장, 내가 문 사장한테 보고해야 할 일이 하나 있어. 전에 우리 공장 직원 중 진태준이라는 직원을 기억해?”“네. 기억해요. 그 사람이 왜요?”문지원은 어렴풋이 진태준이라는 직원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그가 손기영에게 연락을 부탁했을 때 진태준은 다시 돌아와 일해달라는 부탁을 거절했기에 직원 리스트 중에 그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진태준은 문지원에게 이미 지나간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손기영은 한숨을 내쉬었다.“진태준 생활 형편도 아주 좋지 않아. 자식이 네 명이나 있는데 그동안 변변한 일자리도 없었나 보더라고. 막내아들이 학원도 다녀야 하는데, 형편이 좋지 않아 망설이는 듯한 눈치였어. 전에 내가 연락했을 때 다시 일하기 싫다면서 거절했잖아. 아마 한번 망하고 월급이 밀리니까 불안했나 봐. 우리가 다시 전처럼 출퇴근하고 있으니까 돌아오고 싶은지 얘기를 꺼내더라고. 문 사장은 어떻게 생각해?”문지원은 미간을 구겼다. 손기영의 말을 들으니 진태준의 형편도 확실히 좋지 않고 이 일도 그에게 아주 중요한 일인 것 같았다. 하지만 애당초 이 기회를 거절한 것은 진태준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이 일을 이미 포기했다는 것이었던지라 만약 불쌍하다고 해서 받아준다면 다른
문지원은 자기 입술을 찰싹찰싹 때리며 원망했다.‘왜 야밤에 배가 고픈 거냐고! 배고픈 건 그렇다고 쳐도 이 차림으로 석훈 씨 앞에 서 있었다니! 정말 창피해 죽겠어!'“잠깐.”지석훈이 그녀를 불러세웠다.“나도 조금 허기진 것 같네. 야식 만들려고 하는데 먹고 싶으면 옷 갈아입고 나와. 아니면 내가 만들어서 방 앞에 놓고 갈 테니까 들고 가서 먹어.”“아니요. 얼른 옷 갈아입고 나올게요.”문지원은 당연히 집주인에게 야식을 만들어 문 앞까지 가져다 달라고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아주 빠른 속도로 옷을 갈아입은 후 거울에 이리저리 비추어보더니 이내 화장실로 들어가 찬물로 세수했다. 덕분에 얼굴의 붉기는 조금 전보다 가라앉은 상태였고 그제야 방에서 나와 거실로 향했다.지석훈은 이미 야식을 만들어 놓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부대찌개를 본 그녀는 저도 모르게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석훈 씨 요리를 아주 잘하나 봐요.”“전에 사둔 밀키트가 있어서 쉽게 만든 거야. 그냥 안에 있는 재료를 다 때려 넣고 끓이면 되는 거거든. 얼른 와. 내가 냉장고에 있는 치킨도 데워줄게.”지석훈은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다시 나왔을 때 잊지 않고 문지원에게 앞치마를 챙겨주었다.“이거 하고 있어. 그래야 먹을 때 양념이 튀어도 네 옷에 튀지 않을 테니까.”문지원은 갑작스럽게 그의 집에서 지내게 된 것이라 가져온 옷이라곤 없었다. 입고 온 것이 전부였던지라 더러워지면 골치 아팠다.“석훈 씨도 얼른 먹어요. 저 혼자 먹기엔 눈치가 보이네요.”문지원은 옆으로 자리를 옮기며 그가 앉을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문용석이 병원에 입원한 뒤로 집안에 자꾸만 안 좋은 일이 일어났던지라 이렇게 야식으로 부대찌개를 먹는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어느 새부터인가 그녀는 살기 위해 음식을 먹을 뿐이었지만 이렇게 지석훈과 함께 야식을 먹으니 이상하리만큼 행복했다.아마도 점점 나아지는 집안의 상황에 이런 행복을 느끼는 것으로 생각했다. 회사의 상황도 나아지
지석훈의 상처를 치료해줄 때 문지원은 아주 열심이었다. 지석훈은 저도 모르게 그런 그녀를 빤히 보게 되었고 은은한 조명 아래에 있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예뻤다. 연고가 상처에 닿은 순간 지석훈은 저도 모르게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아, 미안해요. 혹시 방금 아프게 했어요?”문지원은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상처에 대고 후후 바람을 불었다.“이러면 조금 나을 거예요. 최대한 살살 발라볼 테니까 조금만 참아줘요.”“문지원, 난 어린애가 아니야. 이런 통증쯤이야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그러니까 애 취급하지 마.”지석훈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문지원이 말했다.“석훈 씨가 아이가 아니라는 거 당연히 알고 있죠. 하지만 아이만 다치면 아픈 게 아니잖아요. 어른도 다치면 똑같이 아파요. 그리고 이런 통증은 줄일 수 있는 거예요. 제가 최대한 살살 바르면요.”최대한 살살 약 발라주겠다고 하면서 대체 왜 자꾸만 그에게 참으라고 하는 것일까.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지석훈은 더 말하지 않았다. 팔을 치료한 뒤 문지원은 그의 다리를 치료해주었다. 전부 치료해주고 나니 어느새 반 시간이 훌쩍 지났다.“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씻고 쉬어. 내일 공장으로 갈 거면 내가 데려다줄게.”지석훈은 소파에서 일어나며 손님방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저 방에 새 이불도 있으니까 그냥 덮으면 돼.”“고마워요.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를 모르겠네요.”문지원은 농담을 반쯤 담아 그에게 말했다. 그녀는 현재 제 코가 석 자인 상황이었다. 집안에 들이닥친 일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던지라 지석훈에게 보답할 여력은 없었기에 정말로 보답할 수 있을지 몰랐다.지석훈은 그런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우린 친구잖아. 친구 사이에 그런 부담은 가질 필요 없으니까 얼른 들어가서 쉬어. 넌 피곤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내가 피곤해.”“그럼 쉬는 데 방해하지 않게 전 이만 먼저 방으로 들어가 볼게요.”문지원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손님방으로 들어온 그녀는 먼
두 사람이 서로를 알게 된 후 지석훈은 이미 문지원에게 충분히 많은 것을 도와주었다. 그에게 진 빚도 갚지 못할 정도였던지라 만약 그가 그녀를 구해주다가 다치게 된다면 그녀는 정말로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몰랐다.눈 앞에 펼쳐진 위험한 상황을 지석훈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이대로 가버린다면 문지원 혼자서 그 위험을 감당해야 했기에 그는 그녀를 두고 절대 혼자 도망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두 남자에게 달려들어 싸웠다.문지원이 초조해하고 있던 때 마침 그녀가 신고했던 경찰들이 도착했다. 경찰들은 차에서 내려 그들에게 총을 겨눴다.“움직이지 마! 두 손 들어!”두 남자는 빠르게 도망치려고 했지만 자신들의 차로 문지원의 차를 쳤던지라 더는 시동을 걸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도망칠 수 없었던 그들은 이내 경찰에게 제압당했다. 문지원과 지석훈도 경찰서로 따라가 진술서를 작성했다.진술서를 작성하고 나니 어느새 밤이 되었고 피로 물든 그의 셔츠를 보던 문지원은 눈가가 붉어졌다.“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이런 일에 휘말리게 했어요. 만약 제가 아니었다면 석훈 씨가 다칠 일도 없었을 텐데...”“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뭘. 괜찮아.”지석훈은 애초에 자기 상처에 신경 쓰지 않았다.“오늘 밤은 우리 집에서 지내. 거기가 더 안전할 거야.”그러나 문지원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누구 집이 더 안전한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친 사람이 있으니 당연히 병원부터 가야 한다.“다쳤잖아요. 그러면 병원 가서 치료부터 받아야죠. 온몸에 이상 없나 확인해야 저도 마음이 놓일 것 같아요.”지석훈도 그녀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고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자꾸만 올라갔다.“문지원,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잊은 거야? 내가 의사야. 이 정도 상처는 별거 아니니까 병원까지 갈 필요 없어.”“아무리 별거 아닌 상처라고 해도 치료는 해야죠. 그렇게 내버려 두면 안 되는 거잖아요.”문지원은 여전히 그가 걱정되었다. 그러자 지석훈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더 짙
그 순간 두 남자는 문지원을 향해 빠르게 달려왔다. 문지원은 급하게 차에 올라탄 뒤 사람이 많은 시내로 향했다. 시내엔 사람이 많았던지라 아무리 두 사람이 그녀에게 범죄를 저지르려고 해도 수많은 시선이 느껴지는 앞에서는 대놓고 하지 못할 것이었으니까.다행히 차가 옆에 있어 그녀는 바로 문을 열어 차에 올라탔다. 안전벨트를 할 새도 없이 시동을 걸었고 멈춰선 두 남자는 서로 마주 보았다.“도망치고 있어요!” “뭘 멍청하게 서 있어! 얼른 차 시동 걸어! 쫓아가야지!”옆에 있던 남자가 그의 머리를 내리치며 말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이런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두 사람은 애초에 돈을 받고 무엇이든 해주는 흥신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만약 이대로 문지원을 놓친다면 의뢰인이 난리를 피우며 돈을 달라고 할 것이 뻔했다.두 사람의 차도 근처에 주차되어 있었던지라 남자는 빠르게 차를 몰고 다른 남자가 있는 곳으로 와서 태웠다. 차에 올라탄 남자는 이내 지휘했다.“속도 올려서 일부러 부딪쳐.”“네!”남자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속도를 꾹 울린 후 문지원의 차를 쫓아갔다. 엄청난 소리가 울려 퍼지고 두 차는 서로 부딪치게 되었다. 문지원의 몸이 그 충격에 앞으로 확 나갔고 다행히 제때 펴진 에어백 덕에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그녀는 두 남자가 돈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두 남자는 차에서 내린 후 그녀가 있는 운전석으로 달려와 끊임없이 창문을 두드렸다. 문지원은 당연히 열어줄 생각이 없었다. 두 남자도 그녀의 생각을 알고 있었던지라 한 사람은 계속 밖에서 그녀를 협박하고 다른 한 사람은 차로 돌아가 망치를 들고 왔다.“문지원 씨, 우린 문지원 씨랑 싸우려고 온 게 아니에요. 일단 내려서 평화롭게 잘 얘기를 나눈다면 우리도 조용히 물러갈 거예요. 굳이 이렇게까진 할 필요 없잖아요. 안 그래?”문지원은 당연히 남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흉흉한 두 남자의 얼굴만 봐도 신뢰도가 떨어졌다. 만약 남자의 말을 믿고 문을 열었다면 그들에게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