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은 마치 지유를 품속에 녹여버릴 듯이 꽉 끌어안았다. 그녀가 더는 상처받지 않게 말이다.그는 턱을 그녀의 머리에 올려놓고 깊이 자책했다.“괜찮아, 지유야, 이제 괜찮아. 내가 왔으니 괜찮아.”지유는 이현의 품에 기댄 채 온몸을 부르르 떨며 치를 떨었다.“왜 이제야 온 거예요? 하마터면, 정말 하마터면 당신 못 보게 될 수도 있었다고요.”이현이 핏기를 잃고 창백해진 지유의 입술을 보더니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눈동자에 분노가 가득 차올랐지만 지유를 인내심 있게 다독이며 안전감을 주려고 노력했다.“미안해. 내가 늦었어.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앞으로 다시는 너 혼자 두지 않을게.”지유가 걱정돼서 나와봤는데 그래도 늦은 것이다.지유는 멘탈이 완전 나가서는 흐느꼈다. 그 속에는 그녀의 불안과 두려움과 그에 대한 원망이 들어 있었다.지유는 솜방망이 같은 주먹으로 이현의 가슴을 두드렸다.“아니에요. 당신은 나 버릴 거예요. 언젠가는 나 버릴 거예요. 전에도 그랬잖아요. 지금도 그렇고.”지금까지 지유는 수도 없이 버림을 받았다. 몇 번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지만 그렇게 버려질 때마다 남은 건 실망뿐이었다.이현은 지유를 품에 꼭 끌어안더니 슈트로 그녀를 꽁꽁 감쌌다.“앞으로 절대 그럴 일 없어. 한 번만 믿어줘. 지유야, 앞으로 너 버리지 않는다고 약속할게.”지유는 소리 없이 흐느꼈고 이현의 가슴을 두드리던 손도 힘없이 옆으로 축 늘어졌다. 아직도 두려움이 가시지 않는지 지유는 이현의 품에 안겨 사시나무 떨듯 떨기만 했다. 될 수만 있다면 영원히 단단한 이현의 품에 숨어있고 싶었다. 이현은 인내심 있게 그녀를 다독이며 이마를 천천히 쓰다듬었다.지유의 정서가 어느 정도 가라앉고 몸에서 전해지는 떨림도 살짝 약해지자 이현은 허리를 숙여 지유를 소파에 올려주고 데려온 사람에게 보살피라고 했다.이현은 느긋하게 소매를 걷어 올리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바닥에 누워 비몽사몽한 이 대표를 쏘아봤다.물 한 바가지가 이 대표의 얼굴에 쏟아졌다.꿈에서 깬 이
이현이 나가고 나서도 안에서는 처참한 비명이 끊임없이 들려왔다.지유는 길고 긴 꿈을 꿨다. 꿈에서 어떤 악마가 그녀를 쫓아오고 있었다.달리고 싶었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고 그로 인한 거대한 공포에 숨이 턱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지유는 울먹이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이를 본 이현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려고 했다.지유는 지금 고열을 앓고 있었다.윤정은 옆에서 계속 울기만 했다.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으러 나가는데 문 앞에서 마침 이현을 만나게 되었다. 다행히 이현이 제때 도착해 지유를 구해줬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정말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른다.윤정은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온 비서님 잘 못 챙겼어요. 온 비서님 지금 열나고 있으니 병원에 데려갈까요?”이현은 지금 차가운 얼음처럼 전혀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아니에요. 배 비서, 온 비서 집으로 가요.”이현은 이렇게 말하며 지유를 안고 차에 올랐다.윤정은 아직도 자책하며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그만 울어요. 어서 집에 돌아가요. 대표님이 있으니 온 비서님 괜찮을 거예요.”진호가 이렇게 타일렀다.윤정은 다리까지 부들부들 떨며 흐느꼈다.“온 비서님 이렇게 되니까 대표님 마치 딴사람이 된 것 같았어요. 그렇게 살기등등한 모습은 처음이에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 진호는 말해줄 수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진호도 이를 이상하게 여겼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진호는 윤정에게 당부했다.“지금은 상황이 정리됐잖아요. 그래도 앞으로 조심해야 해요. 온 비서님 대표님께 특별한 존재예요.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요.”윤정은 약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어두운 침실, 지유가 꿈속에서 놀라 깨어났다.“안돼!”잠에서 덜 깬 상태였지만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아직 시야가 또렷해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누군가 자기를 만지는 걸 강력하게 거부했다.“이거 놔!”“나야, 지유야.”이
욕실 문을 열자 지유가 욕조에 앉은 채 온 힘을 다해 몸을 벅벅 문질렀다. 혹시나 이현이 들을까 봐 그러는지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지유야, 그만해!”이현은 얼른 그쪽으로 다가가 자기 몸에 상처를 내고 있는 손을 낚아챘다.지유는 눈시울이 빨개서는 이현의 손을 뿌리치며 발버둥 쳤다.“건드리지 마요. 나 더러워요…”“너 안 더러워.”이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 두 손으로 지유의 몸을 끌어안으며 더는 상처를 내지 못하게 막았다.“너 아주 향긋해.”지유의 머릿속엔 온통 이 대표의 배에 단단히 눌려있는 장면이 떠올라 속이 메슥거렸다. 이현이 살짝 건드려도 지유는 자기가 더럽다고 생각해 고개를 저었다.“위로하지 마요. 나 더러워진 거 맞아요. 내가 생각해도 역겨워요.”지유는 이미 빨갛게 달아오른 몸을 마구 비벼댔다.“온지유.”이현이 어떻게 부르든 지유는 들리지 않았다. 몸 곳곳을 벅벅 문지르며 계속 중얼거렸다.“나 더럽혀졌어. 씻어야 해.”“나…”지유가 같은 말을 반복하려다 멈췄다. 떨리는 입술로 경악을 금치 못하며 촉촉한 눈빛으로 이현을 바라봤다. 이현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에 키스한 것이다.“지유야, 너 안 더러워. 깨끗해. 더러운 건 다른 사람이야.”이현의 차가운 목소리는 마치 따스한 햇살처럼 그녀를 어둠에서 끌어냈다. 목소리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행동도 바로 보였다.이현의 입술은 지유가 벅벅 긁어서 빨갛게 달아오른 자리에 놓였고 이 대표가 만졌던 곳에 놓였다. 그는 마치 보물을 대하듯 부드럽게 그녀의 몸 곳곳에 키스하며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여기도 내가 소독했어. 여기도. 그리고 앞으로 절대 너를 괴롭힐 사람은 없을 거야.”이현은 아까 있었던 일로 지유를 역겨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상처에 키스하는 것으로 모든 흔적을 지워주려 했다.지유의 눈동자엔 눈물이 가득 차올랐고 발버둥 치던 것도 멈추었다. 힘을 주며 버티던 손도 스르르 풀렸고 흐느끼는 말투로 이현을 불렀다.“이현 씨.”“응?”이현이 고개를 들어
지유는 이현의 목을 휘감으며 이렇게 말했다.“옆에 있어 줘요.”“여기 있을게. 아무 데도 안 가.”이현이 지유의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몸이 빨갛게 달아올랐어. 잘 때 얌전하게 자야 상처가 덧나지 않는 거 알지?”지유는 그제야 승아가 왜 이현에게만 늘 그렇게 약하게 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아픈 손가락에 눈길이 더 가기 마련이니까.살짝만 약하게 나가도 이현은 정말 너무 부드러워졌다.“네.”지유는 아쉬움을 감추며 두 손을 풀었다.이현은 지유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침대 가에 앉았다.“추워?”지유가 고개를 저었다.“춥지는 않아요.”“너 약간 미열이 있어.”이현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젖은 수건 좀 가져올게.”“고마워요, 남편이 제일이네.”지유는 제일 진실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이현이 웃으며 지유의 코를 꼬집었다. 지유도 피하지 않고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이현을 바라봤다. 잠깐이지만 이런 모습을 마음속에 영원히 새기고 싶었다.하지만 이현이 이렇게 말했다.“지유 님, 사람은 함부로 믿는 게 아니에요.”이현이 수건으로 얼음을 감싸더니 지유의 이마에 놓아주며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없을 때 누가 잘해준다고 바로 따라가면 안 돼.”이를 들은 지유는 찡해 나는 코끝에 입을 앙다물고 억지로 웃으며 강한 척했다.“그럴 리가요.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쉽게 안 속아요.”“내 생각엔 잘 넘어갈 것 같은데, 그 우석이라는 남자한테 홀라당 반한 거 아니야?”이현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지유가 멈칫하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에 이현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그 남자 어떤 사람인지 물어본 적도 없네. 어떤 남자길래 지금까지 잊지 못하는 거야?”지유가 시선을 돌리며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이현 씨랑 닮았어요. 근데 더 부드럽죠.”이현은 물어본 게 살짝 후회될 정도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우석이라는 남자보다 못하다는 소리로 들렸다.“얼른 자.”이현은 더 물어보기 싫었다. 지유도 사실 이 얘기를 꺼내는 게 싫었다.제
윤정이 이렇게 말했다.“아니에요. 찾을 새가 없었어요. 나가자마자 마침 식당으로 부랴부랴 건너오는 대표님을 만났어요. 온 비서님, 대표님 혹시 점쟁이 아니에요? 온 비서님을 진짜 많이 걱정하는 것 같더라고요.”윤정은 아직도 그날 일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온 비서님은 아마 모를 거예요. 대표님이 도착했을 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니까요. 이 대표님을 아예 아작낼 듯한 기세였어요. 그리고 몇몇 선동자까지 같이 처단했고요. 대표님은 많이 화났는지 온 비서님을 품에 안고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했어요.”윤정의 말에 지유가 멈칫하더니 옆에 놓인 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온 비서님, 대표님이 원래 부하를 이렇게 아끼나요? 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요. 만약 다친 사람이 나라도 그렇게 신경 쓰셨을까요?”윤정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이렇게 중얼거렸다.“아무리 대표님 곁을 오래 지켰다 해도 이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잖아요. 온 비서님, 대표님 혹시 온 비서님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켁켁켁…”물을 한 모금 마시는데 윤정이 이렇게 말하자 바로 사레가 걸렸다.윤정이 지유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온 비서님, 왜 물 마시는데도 사레가 걸리는 거예요?”켕기는 게 있는 지유는 얼른 부정했다.“아니에요. 대표님이 어떻게 저를!”윤정이 의아해하며 계속 토론을 이어갔다.“다른 사람들은 대표님이 노승아 씨를 좋아한다 그러던데요. 그 가수 있잖아요. 노승아 씨 웃는 거 보려고 돈을 억 단위로 쏟아붓는대요. 노승아 씨 대표님 첫사랑이라는 소문이 있는데 이제 돌아왔으니 다시 대표님과 사귀겠죠?”“온 비서님이 더 잘 알고 아니에요?”윤정은 지유가 몇 년간 이현의 곁을 지키면서 수행 비서로 있었으니 개인적인 일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지유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저도 몰라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아니다, 아니다.”윤정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였다.“이게 만약 진짜라면 증거가 안 나올 리
“에이, 다들 몰라도 너무 모른다. 온 비서님이 신분 상승을 위해서 일부러 꼬신거라던데요? 대표님 비서까지는 올라갔지만 대표님 와이프 자리는 넘볼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봤겠죠. 예쁜 얼굴을 무기 삼아 이 대표님 애인이라도 해볼까 했는데 그것도 안 될 것 같으니까 이 대표님이 성폭행했다고 적반하장으로 나오기까지 하고. 이 대표님 지금 너무 불쌍하더라고요. 감옥살이 해야 된다던데?”“평소에 온 비서님 얼마나 서글서글해요. 근데 뒤에서는 이렇게 약삭빠른 줄 몰랐네요. 그러니까 대표님 옆에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거죠. 얼마나 더러운 수단을 썼을까요?”“흥, 온 비서님 대단한 거 이제 알았어요? 전 진작에 알아봤는데. 막말해서 우리 회사에 온 비서님보다 실력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 온 비서님이 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그게 다 얼굴 믿고 저러는 거 아니겠어요? 그 여우 같은 얼굴로 대표님 꼬드긴 거예요. 그러다 제대로 걸린 거죠. 똑같은 방법으로 이 대표님 꼬시려다가 성폭행이나 당하고…”쾅 하는 소리와 함께 지유가 화장실 문을 걷어차고 나와 그들 뒤에 자리하고 섰다.화장을 고치던 여사원들은 지유를 보고 너무 놀라 립스틱까지 삐뚤게 그렸다.“온, 온 비서님…”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만 있던 몇몇 여사원이 공손하게 지유를 불렀다. 하지만 유언비어를 퍼트린 그 사원은 머리를 빳빳이 든 채 지유를 힐끔 쳐다보고는 불만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진예림의 부하 고세리였다.집안 관계로 여진그룹에 들어온 고세리는 갓 사회에 나온 애송이였다.바닥부터 천천히 위로 올라온 진예림은 당연히 뭐가 더 수지가 맞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고세리에게 꽤 잘해줬다.지유의 얼굴에는 별로 표정이 없었다. 고세리를 욕하지도 않고 그저 옆에서 손만 열심히 씻었다.그들은 지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불안했다. 하지만 유독 고세리만 지유가 겁먹었다고 생각하고는 앞으로 팔짱을 낀 채 우쭐거렸다.“어떤 사람은 참 낯짝이 두껍다니까요. 그러게 소문이 나는
고세리는 반항할 기회가 없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종래로 이런 수모를 겪은 적이 없었기에 화가나 미칠 지경이었다.지유가 차갑게 말했다.“안 때리면? 앞으로 여진그룹에서 어떻게 지내야 할지도 모르는 사람인데.”“온 비서님. 왜 제 사람을 때리고 그러세요?”큰 소동이 일자 사람들이 달려와 구경했다.진예림은 그들이 여기 있다는 소식을 알고 달려왔다가 고세리가 맞는 장면읗 목격하고는 두 눈이 휘둥그레서 얼른 두 사람을 뜯어말렸다.진예림의 사람을 때렸다는 건 진예림을 때린 거나 마찬가지였다.고세리는 자기를 구해줄 사람이 나타나자 얼른 울먹거리며 이렇게 말했다.“예림 언니!”고세리는 얼굴을 부여잡고 진예림 곁으로 달려가더니 이렇게 말했다.“온 비서님이 저 때렸어요.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진예림은 고세리를 등 뒤로 빼더니 성질을 내기 시작했다.“온 비서님, 미쳤어요?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에요? 정말 여진그룹이 온 비서님 거라도 되나 봐요? 모든 사람이 온 비서님 말을 들어야 되는 것도 모자라 제는 사람까지 때리고. 저는 이제 안중에도 없다 이거죠?”지유는 아까 귀싸대기를 너무 심하게 갈겨 얼얼해진 손을 툭툭 털더니 이렇게 말했다.“진예림 씨 사람이라니 잘됐네요. 앞으로 부하 관리 철저히 하세요. 이런 헛소리나 퍼트리고 다니게 하지 말고. 진예림 씨가 해야 하는 일을 내가 직접 했을 뿐이에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내가 때릴 이유도 없겠죠?”“헛소리는 누가 헛소리를 했다고 그래요? 다 사살이고만. 당신이 저지른 일 회사에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진예림이 거만하게 말했다.“그런 수단으로 올라간 거 아니에요?”“아, 고세리 씨가 왜 헛소리하나 했더니 다 진예림 씨가 가르친 거군요?”어떤 상사가 있으면 어떤 부하가 있기 마련이다.진예림이 이렇게 헛소리를 늘어놓는 것도 지유의 명성에 금이 갔으면 해서였다.처음은 아니었지만 전에는 직접적으로 지유의 생활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기에 그냥 흘러 넘겼다. 하지
구경하러 온 다른 사람들은 지유를 불쌍하게 생각했다. 일개 비서가 어떻게 전무를 이기겠는가, 결국 가차 없이 나가떨어지고 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고 전무가 고세리를 데리고 뛰어왔다. 조카를 걱정하는 마음에 오자마자 바로 따져 묻기 시작했다.“누구야. 누가 우리 세리 괴롭힌 거야?”고세리가 탕비실에 있는 지유를 가리키며 말했다.“삼촌 저 여자예요. 저 여자가 나를 때렸어요. 삼촌, 어릴 적부터 부모님도 저를 때린 적이 없는데 저 여자가 지금 나를 때린 거예요.”진예림은 이 상황이 매우 흥미진진했다. 그녀는 얼른 불쌍한 척하면서 좋은 사람인 양 쇼를 하기 시작했다.“전무님, 죄송합니다. 제가 세리를 잘 챙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무실에서 제 입지가 작으니 말에 힘이 실리지 않습니다.”뜻인즉 직급은 지유와 같지만 항상 지유에게 눌린다는 뜻이었다. 진예림은 지유가 이 사무실에서 너무 우쭐댄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전무는 예전부터 지유의 안 좋은 소문을 익히 들어서 알았다. 하지만 이현의 옆에서 일하는 사람이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그의 머리 꼭대기로 기어오르려고 하니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온지유 씨, 비서 주제에 감히 우리 조카에게 손을 댄 거예요? 여 대표님 옆에서 일한다고 내가 아무것도 못 할 줄 알고? 내 말 한마디면 바로 여진그룹에서 쫓겨날 수도 있어요.”고 전무는 여진그룹을 다닌 시간이 지유보다 훨씬 길었다. 하지만 같은 부서가 아니었기에 회사에서 활동할 때를 빼고는 거의 마주칠 일이 없었다.지유도 원칙적인 사람이라 모든 뒷담화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못 되었다. 대부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넘겼지만 이번엔 그러기 싫었다. 지유의 한계를 건드린 것이다.고 전무가 아무리 발악해도 지유는 자기 입장을 지켰다.“고 전무님, 저도 고세리씨가 전무님 조카인 건 압니다. 아끼고 보호하는 게 마땅하지요. 하지만 그것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해야죠.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도 않으면서 내 얘기를 함부로 지껄이는데
문지원은 아버지가 이런 결정을 내릴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물론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고 언젠가 유언장에 자신의 지분이 있을 거란 건 당연히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높은 비율일 줄은 몰랐다. 게다가 아버지의 건강은 이제 막 회복된 상태가 아니던가.“아빠, 이러지 마세요.”문지원은 아버지가 회사 내의 헛소문들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린 건 아닐지 걱정했다.“사람들이 하는 말은 전 전혀 신경 안 써요.”문용석은 딸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그런 말 때문이 아니야. 원래 진작 너한테 넘겨야 했을 것을 아빠가 미처 생각하지 못해서 네가 고생만 했구나.”문지원은 순간 울컥했다.회사에서 주주들의 뻔뻔한 비난을 들었을 때도 그녀는 그다지 억울하거나 분하지 않았고 심지어 이상한 소문이 돌아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하지만 아버지가 이런 말을 하자 가슴 속에서 갑자기 견딜 수 없는 서운함이 밀려왔다.지금껏 억눌렀던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듯했고 자신은 정말 최선을 다했다. 아버지가 병으로 쓰러지고 오빠는 연락조차 닿지 않아 혼자서 회사를 짊어지고 파산 위기를 막아냈다. 빚을 갚고 다시 회사를 상장시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던가.그런데 결국 자신이 이뤄낸 성과와 노력은 단지 여자라는 이유 하나로 평가절하되고 있었으니 어찌 억울하지 않을 수 있을까.“아빠는 네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다 알아.”문용석의 머리카락은 이미 희끗해져 있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여전히 어린 시절의 문지원을 바라보던 따뜻하고 자애로운 그대로였다.“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에 신경 쓰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아빠가 전부 네 편이 되어줄 테니까.”그날 이후 회사에서 사람들이 어떤 소란을 피워도 문지원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회의실에서 유 이사 일파는 다시 한번 문지원을 비난하며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압박했다.하지만 문지원은 덤덤히 듣기만 하다가 비서에게 무언가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비서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 유 이사는 그녀의 태
더욱이 그들이 보기에 문지원은 그저 딸일 뿐이었다. 딸이 아무리 잘난들 뭘 하겠는가. 결국엔 결혼해서 남이 될 운명인데 말이다.그렇게 급하게 권력을 넘기게 될 바에야 차라리 지금 일찌감치 그녀 손에 쥔 권력을 회수해서 자기들 손에 넘기는 게 더 나았다.문지원은 의기양양한 유 이사가 너무 일찍 기뻐한다고 생각했다.“유 이사님, 이 문제에 대해 혹시 저희 아버지께 직접 여쭤보기나 하셨나요?”유 이사가 순간 얼어붙었고 그 모습을 보자 문지원은 더욱 냉소가 나왔다.“설마 제가 물러나라는 얘기를 제 입으로 직접 아버지께 전하라는 건 아니겠죠? 뭐예요? 다들 직접 가서 말씀드릴 용기가 없으신가요?”이 말은 정확히 그들의 약점을 찔렀고 그들은 당연히 문용석에게 가서 직접 얘기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비록 문용석이 한 번 위기를 겪긴 했지만 이들 원로들 사이에서 그의 위상은 여전히 높았다.그런 문용석 앞에서 그의 딸을 회사에서 몰아내자고 말한다면 아마 문용석은 빗자루라도 들어 그들을 당장 내쫓을지 모른다.“정말 제가 아버지께 권한을 돌려드리길 원하신다면... 좋습니다.”그녀는 그들이 숨을 돌리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단, 그 이야기는 직접 아버지께 가서 하세요. 전 절대 하지 않을 거니까요.”주주들이 분노를 터뜨리기 전에 문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왔다.비서가 급히 뒤를 따르며 몹시 화를 냈다.“진짜 저 늙은 사람들 너무 뻔뻔한 거 아니에요? 조금 지분 있다고 회사 일은 하나도 안 하고 결정적인 순간에만 나타나서 참견이나 하고. 대표님이 아무 말 없이 놔둔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할 판인데 오히려 대표님한테 불만이라니... 정말 얼굴도 두껍지!”그러나 문지원은 오히려 차분했다.“원래 어떤 사람들은 그래. 한 번 쓴맛을 보지 않으면 자꾸만 기어오르려고 하는 법이지.”“그럼 대표님, 어떻게 하실 건가요?”“신경 안 써.”문지원은 비서를 향해 가볍게 웃었다.“설마 내 아버지가 누군지 잊은 건 아니겠죠?”비서는 그녀와 오래 지냈기에 둘
문지원은 한동안 멍하게 있다가 직원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고는 순간 너무 창피해서 땅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어젯밤 지석훈에게 그렇게 제멋대로 하게 두지 말아야 했다. 덕분에 아침부터 이렇게 난감한 상황에 부닥치고 말았으니 말이다.그나마 다행인 건 직원이 아직 어리고 남자 친구도 없어서 그 자국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모르는 것 같았다.문지원은 화장실에 들어가 한참이나 목에 난 흔적을 감추려고 화장을 수정한 후에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대표님, 30분 뒤에 정기 회의 있으십니다.”비서가 하품하며 서류를 건넸고 문지원은 서둘러 자료를 검토했다.“참, 화진 그룹 프로젝트는 누구한테 넘겼죠?”비서가 프로젝트 책임자의 이름을 말했다.문지원은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고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놓았다.회사는 아침부터 정신없이 바빴다.문지원은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고 30분쯤 지나 곧바로 회의실로 향했다.회의실에는 이미 몇몇 주주들이 앉아 있었고 비서는 문지원 뒤에서 회의 내용을 기록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때 한 나이 지긋한 주주가 갑자기 불편한 표정으로 문지원에게 날카롭게 말했다.“회의하자고 해놓고 대표님께서 이렇게 늦게 오셔서야 쓰겠습니까? 우리 같은 노인네들이 언제까지 여기 앉아서 기다려야 합니까. 정말 대단한 권위네요!”“요즘 젊은 사람들은 참 시간관념이라고는 하나도 없네요. 어디 옛날 대표님 같습니까.”문지원은 그의 말을 금세 알아들었다.자신이 아버지인 이전 대표만 못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하지만 이전 대표는 자기 아버지였으니 부녀 사이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유 이사님,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솔직하게 하세요.”문지원이 차분히 말했다.“이렇게 빙빙 돌려서 말씀하시니 듣는 저도 힘들고 여기 계신 분들도 저희 아버지와 함께 고생해 온 분들로 나이가 있으시니 그런 말을 잘 못 알아듣습니다.”“너!”상대는 그녀의 똑 부러지는 말에 말문이 막혀 버렸고 문지원
지석훈은 품 안에 문지원을 안고 부드럽게 말했다.“필요한 것도 받았으니 우리도 가자. 밥은 먹었어? 같이 가서 먹자.”문지원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아까 그 사람은 누구예요?”“얼마 전에 그 친구한테 약을 좀 부탁했어. 네가 생리통이 심하다고 했잖아.”지석훈은 별일 아니라는 듯 담담히 말했다.“그 친구의 교수님이 업계에서 유명한 분인데 최근에 생리통 치료 약을 개발하고 계시거든. 아직 연구 단계라 완벽한 건 아니지만 효과가 있을지도 몰라서 미리 좀 얻어 본 거야.”문지원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럼 이렇게 늦은 밤에 나온 이유가... 단지 그 약을 받기 위해서였어요?”지석훈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이해했다는 듯 웃었다.“그럼 너는 뭐라고 생각한 거야?”그의 표정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장난기 어린 눈빛이라 문지원은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고 창피해 죽을 것 같았다.질투심 가득한 표정으로 현장을 덮치듯 찾아왔는데 알고 보니 완전히 헛다리였다.“미안해. 괜히 걱정하게 만들어서.”지석훈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그녀의 손을 천천히 꼭 잡았다.“내가 너한테 믿음을 제대로 못 줘서 그런 거야. 그러니까 이젠 확실한 관계로 만들어 줄래?”문지원이 순간적으로 멍해졌다.오늘 밤 너무 많은 감정의 기복을 겪어서인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멍하게 있는 그녀를 보며 지석훈이 다정하게 웃으며 덧붙였다.“정확히 말하면 공식적으로 내 여자가 되어 달라는 거야.”문지원의 얼굴이 더 붉어졌지만 사실 이건 그녀가 오랫동안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결국 그녀는 지석훈의 다정한 눈빛에 이끌려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집에 돌아온 이후로 둘 다 문지원이 처음 왜 그렇게 갑자기 찾아왔는지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문지원은 너무 부끄러워서 말하지 않았고 지석훈 역시 그녀가 난처할까 봐 일부러 말을 꺼내지 않았다.이렇게 마무리된 것이 문지원에겐 충분히 좋은 결과였다.그런데도 그녀의 마음 한구석엔 여전히 조금의 서운함이 남았다.결국 지석훈과 강윤
문지원은 더 이상 이런 문제로 머리를 복잡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당장 어디로 찾아갈지도 모르는 마당에 지금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그래서 결국 병원으로 향했다.“지금 날 보러 온 이유가 그거야?”여울은 이쑤시개에 꽂은 사과 조각을 입에 물며 투덜거렸다.“언니 진짜 답답하다니까.”문지원은 사과를 깎던 손을 멈췄다.“지금이라도 최주하 다시 불러줄까?”“아니야, 미안. 내가 답답하지. 내가.”여울은 급히 말을 바꿨다.평소였다면 문지원이 이 상황을 놓치지 않고 여울을 놀렸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서로 입장 차이가 없으니 누가 누구를 탓할 상황이 아니었다.“그럼 언니 계속 모르는 척만 할 거야?”여울이 다시 묻자 문지원은 침묵했다.모르는 척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정확히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렇게 행동했던 것뿐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지석훈에게 직접 따지기도 애매했다.“당연히 직접 물어봐야지!”여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문지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물어보지 않으면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알아? 그리고 내가 볼 때 지석훈 씨는 양다리 걸칠 사람 같진 않아. 분명히 뭔가 오해가 있을 거야.”문지원이 조금 흔들리는 듯하자 여울이 급히 덧붙였다.“게다가 언니가 전에 말했잖아. 석훈 씨가 언니랑 강윤슬 문제에 직접 개입한 적 있다고. 그럼 이미 강윤슬과 언니 사이에서 언니를 택한 거 아냐? 그러니 뭐가 겁날 게 있어?”여울의 말이 문지원의 머릿속을 환하게 밝혀주었다.문지원은 들고 있던 사과칼을 내려놓고 바로 옆에 둔 가방을 집어 들더니 벌떡 일어나 병실 문을 향했다.“어디 가? 날 줄 사과 아직 채 못 깎았잖아!”여울이 외쳤지만 문지원은 이미 병실을 나섰고 그녀는 들뜬 기분으로 병원을 나와 지석훈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어느새 거리는 어두워졌고 도로 위엔 차들이 오가고 있었다.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가운데 잠시 후 통화가 연결되었다.지석훈의 목소리는 여전히
“뭘 보고 있었어?”문지원은 살짝 긴장해 하며 미소를 지었다.“그냥 회사 문서들을 봤어요.”“늦었는데 일 그만해.”지석훈은 전혀 의심하는 기색이 없었다.문지원은 안도하고 더 이상 몰래 훔쳐보는 것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워낙 예민한 성격의 지석훈이기에 만약 들키기라도 하면 너무 난감했을 것이다.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을 굳이 건드리고 싶어 한다.깊은 밤, 문지원은 지석훈이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테이블에 손을 올려 살금살금 이동했는데 끝내 그녀가 눈독을 들였던 휴대폰에 손이 닿았다.그런데 마침 그 찰나에 지석훈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고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왜 잠이 안 와? 설마 하고 싶어?”순간 문지원은 몸이 경직되었다.만약 지석훈이 지금 정신을 차렸다면 분명 그녀가 뭘 하려고 했는지 알아챘을 것인데 다행히 그건 아니어서 문지원은 간신히 안도하며 뻗었던 손을 거두고 가만히 있지 않는 지석훈의 손을 밀어내면서 거절 의사를 전했다.“안 돼요. 내일 회사에 나가봐야 해요.”지석훈은 곧바로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녀의 이마에 뽀뽀하고 말했다.“그럼 빨리 자. 안 그러면 나 더 참을 수 없어.”문지원은 서둘러 눈을 감았는데 마음속에 일이 있으니 쉽게 잠이 들 수 없었다.역시나 그녀는 결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다음 날 눈 밑에 다크서클이 생긴 채로 집을 나가게 되었다.다행히 나가기 전에 파운데이션으로 가려서 아무도 그녀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대표님께서 확인하셔야 하는 서류들입니다.”“알았어요. 거기 두세요.”문지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비서가 나가려고 할 때 문지원이 그녀를 부르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화진 그룹에서는 오늘도 아무 소식 없어요?”비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걸 본 문지원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나가보라고 했다.문지원은 본인이 너무 예민한 거라고 생각했다.강윤슬이 직접 지석훈과 끝났다고 했기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그런데
의사가 수술실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문지원이 잽싸게 다가가서 물었다.“제 친구의 상태는 지금 어떤가요?”의사가 마스크를 벗고 말했다.“환자는 간이 칼에 찔려서 내출혈이 있었습니다만 다행히 수술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서 생명의 위험은 없습니다. 이제 잘 휴식을 취하면서 회복하시면 됩니다.”문지원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옆에 있던 최주하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미간은 조금 전보다 펴진 것 같았다.여울은 마취가 덜 풀려 계속 혼수 상태였고 문지원은 병실에 들어가서 보다가 다시 나왔다.그때 최주하가 부하에게 지시하고 있었다.“합의는 없다고 하고 변호사를 찾아서 살인 미수로 신고해.”부하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살인 미수는 너무 무겁지 않을까요?”“그 정도가 뭐가 무거워?”최주하가 코웃음을 지었다.여울이를 다치게 했는데 살려 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라는 눈치였다.문지원이 병실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고 얘기하던 최주하가 고개를 돌렸는데 그의 얼굴에는 차가운 기운이 가시지 않았다.다만 두 사람은 친한 사이가 아니었기에 최주하는 먼저 말을 건네지 않았다.“최 대표님.”문지원이 앞으로 다가가며 최주하를 불렀다.부하를 보내고 최주하가 말했다.“무슨 일이죠?”“최 대표님 때문에 다친 건데 들어가서 보지 않을 거예요?”최주하의 태도에 문지원은 화를 억지로 참고 물었다.여울이와 최주하의 일은 우연히 조금 들었는데 문지원은 최주하가 사람도 아닌 것 같았다.게다가 지금의 최주하를 봤을 때 더욱더 못마땅했다.여울이가 최주하 때문에 다쳐서 꼼짝 못 하고 누워있는데 병실에 들어가려 하질 않으니 말이다.최주하가 이마를 찌푸린 채 병실 쪽을 보는 모습을 보며 문지원이 또 말했다.“최 대표님, 잘 생각하고 선택하세요. 오늘 들어가지 않을 거면 앞으로도 절대 들어가지 마시고 다시는 여울이를 만나지도 말아요.”최주하는 문지원이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다고 느꼈지만, 워낙 사람들에게 해명하지 않는 성격이라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문지원의
문지원과 여울은 쇼핑몰에 가서 구경하기로 했다. 오랫동안 못 만났고, 또 모처럼 나왔으니 그렇게 빨리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다만 누구도 사고가 일어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뿐이다.“저 사람 강도에요. 잡아줘요.”갑자기 한 남자가 달려오자, 문지원은 잽싸게 피했는데 여울은 피하지 못하고 칼을 든 남자에게 인질로 잡혔다.강도는 과일칼을 여울의 목에 들이대고 외쳤다.“아무도 다가오지 마!”문지원이 경찰에 신고하려는 것을 보고 강도가 또 외쳤다.“경찰에 신고하면 이 여자를 죽여버릴 거야.”“알았어요. 신고하지 않을게요.”문지원은 강도가 정말로 여울을 죽이기라도 할까 봐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내려놓고 손을 들었다.“흥분하지 말아요. 사람을 죽이면 당신은 살인자가 되는 거예요.”문지원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강도는 더 이상 흥분하지 않았는데, 인질은 결코 풀어주지 않았다.쇼핑몰의 보안 인원들이 순식간에 강도 주변을 둘러쌌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봉변을 당할까 봐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그 때문에 쇼핑몰 1층은 순식간에 그들 외 텅 비었다.강도는 여울을 인질로 잡고 모두를 후퇴시켰다.같은 시각 쇼핑몰 2층에서.“왜 이렇게 시끄러워?”최주하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1층을 내려다보았는데 그 순간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여울이다!최주하가 어찌나 빨리 1층으로 움직였는지 그의 뒤를 따르던 사람들이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천천히 가세요.”여울이도 가까이에 있는 과일칼을 보더니 두려움에 떨었다.강도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모두 뒤로 물러서!”여울은 눈을 감고 지금 죽고 싶지 않으니 누구든 자기를 구해달라고 빌었다.어쩌면 그녀의 기도가 정말로 효력이 있었는지도 모른다.그때 강도 손에 있던 칼이 걷어차였고 여울이는 누군가에 의해 구원이 되었다.이 변화는 주변에 있던 모두를 충격에 빠뜨렸다.여울은 순간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느낌을 받으면서 눈을 깜빡였는데 아주 익숙한 품에 안기게 되었다.“최 대표님?”여울은 도저히 믿을 수
문이 쿵 하고 닫히고 문지원과 지석훈은 현관에서부터 거실 소파까지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소파에 쓰러질 때 문지원이 머리를 부딪힐까 봐 지석훈은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받쳐주었는데 키스는 여전히 멈추지 않았고 서로의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졌다.“잠깐만요.”문지원이 말했다.지석훈이 멈추려 하지 않자, 그녀는 아예 손으로 밀어내며 말했다.“내려가서 사와요.”지석훈은 붉게 달아오른 문지원의 얼굴을 보며 무언가 떠올리더니 고의로 안 간다고 했다.“안 써도 돼.”그는 문지원의 귓불을 깨물었고 숨소리도 점점 더 거칠어졌는데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안다고 한번 건드리면 멈출 수가 없었다.하지만 문지원은 확고했다.“안 돼요. 사 와요.”지석훈은 하는 수 없이 일어나서 문지원의 입술에 입 맞추고 옷을 입었다.“알았어. 기다려.”아파트 입구에 바로 편의점이 있기에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지석훈은 얼마나 급했는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손에 핑크색 물건을 들고 들어왔다.그동안 그의 욕망은 추호도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더 활활 타올랐다.지석훈은 뒤에서 문지원을 껴안으며 속삭였다.“당신이 뜯어줘.”문지원의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직접 해요.”“해줘.”문지원은 하는 수 없이 떨리는 손으로 비닐 포장을 뜯었다.지석훈은 그녀를 들어 올렸고 문지원은 그가 리드하는 대로 움직였다.일이 끝난 다음에도 지석훈은 부족했던지 문지원의 쇄골에 키스하더니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왜 갑자기 이렇게 열정적이야?”“싫어요? 그럼, 다음부터 조심할게요.”“아니, 너무 좋아. 다음에도 계속해.”지석훈은 그녀의 얼굴을 돌려 키스하며 말했다.두 사람은 그 뒤로도 이러한 관계를 서로 묵인했다.문지원은 가끔은 자기 집에 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지석훈의 집에서 지냈고 시간이 지나면서 지석훈의 집에는 그녀의 물건들이 화장품부터 시작해서 일상용품, 그리고 여성용품들까지 추가되었다.그들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금방 두 사람의 관계를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