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잘라 말하는 모습에서 이현이 지유에 대한 소유욕이 느껴졌다.이현도 민우가 지유를 좋아해서 자꾸 지유 앞에서 알짱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기회는 없다고 당연히 알려줘야 한다.민우는 그런 이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분위기가 점점 딱딱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대치하다가 민우가 이렇게 말했다.“여 대표님, 너무 확신하는 거 아니에요?”민우는 화내지 않고 점잖게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요. 인연이 닿는다면 누구도 막을 수는 없는 거죠.”이현은 기분이 나빴지만 지유의 손을 잡는 걸 잊지 않았다.지유는 이현의 정서를 느낄 수 있었다. 민우가 오고 나서부터 이현은 이상했고 말끝마다 꼬투리를 잡고 있었다.하지만 지유는 이성적이라 기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현에게서 손을 빼며 분위기를 만회하려 했다.“다들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분위기 좋았는데 내 얘기는 왜 해서. 엄마, 얼른 아빠 모시고 들어가요. 더 마시다간 실수하겠어요.”“그래.”정미리도 상황이 더 걷잡을 수 없이 발전할까 봐 이렇게 말했다.“여보, 가서 눈 좀 붙이면서 술 깨요.”온경준은 꽤 협조적이었지만 그래도 흐뭇한 눈빛으로 민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민우야, 나는 너 좋게 보고 있어. 뒤에 한잔 거하게 하자.”“네.”민우가 공손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온경준의 말에 대답했다.온경준은 그렇게 정미리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들어갔다.이현은 얼굴을 굳힌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식탁엔 세 사람만 덩그러니 남았다. 온경준과 정미리가 가자 갑자기 주방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이에 지유가 불편해졌다.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튀기는 걸 느낄 수 있었다.민우는 이현의 눈빛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나긋한 목소리로 지유에게 말했다.“아까 별로 못 먹던데 너무 멀어서 그런 거 아니야?”민우는 지유에게 반찬을 집어줬다. 하지만 이현이 한발 빠르게 가로챘다.“괜찮아요. 지유는 이거 안 좋아해요.”민우가 시선을 돌려
그러니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녀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당연히 알게 되었다.민우는 남자의 품위를 지키며 부연 설명은 하지 않았다.“아니야, 밥 먹어.”지유는 약간 얼굴이 뜨거웠다. 그녀에게 민우는 그저 옛 동창일 뿐 친구에도 속하지 못했지만 민우는 그녀를 매우 신경 쓰고 있었다.지유는 젓가락을 들어 접시에 담은 고기반찬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비릿한 냄새에 지유는 속이 메슥거렸고 이에 밥맛이 뚝 떨어졌다.“왜 그래? 못 먹겠어?”민우가 물었다.지유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못 먹겠다는 말은 못 하고 이렇게 말했다.“요즘 식단 조절해서 그런지 위가 작아져서 좀만 먹어도 배부르네.”이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배부르면 이제 먹지 마.”지유는 이현의 불쾌함을 느끼고는 얼른 고개를 들어 이현을 힐끔 살폈다. 하지만 이현은 그저 냉정하기만 했다.정미리는 온경준을 챙기고 있었기에 지유가 민우를 배웅해 줄 수밖에 없었다.민우는 지유의 표정이 좋지 않자 이렇게 당부했다.“몸이 안 좋으면 나 데려다줄 필요 없어. 돌아가서 푹 쉬어. 다음에 또 보러 올게.”지유는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이현이 보고 있어 따로 묻지는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면 조심해서 가.”“응, 또 봐.”민우는 오래 머물지 않고 지유를 돌아보더니 자리를 떠났다.이현이 외투를 가지고 문 쪽으로 걸어오더니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나민우가 왜 너를 그렇게 잘 알아? 전에 사이가 그렇게 좋았어?”“나도 몰라요.”이현이 캐묻기 시작했다.“보면 몰라? 나민우가 너 엄청 신경 쓰는 거?”지유가 고개를 들어 이현을 바라봤다.“없는 얘기 지어내지 마요. 민우랑 나 그냥 친구예요. 오랫동안 연락 한번 한 적 없어요. 그런데 나한테 신경 쓸 리가 있나?”만난 게 고작 몇 번이나 된다고, 이런 생각은 무리였다.“앞으로 연락하지 마.”지유는 그러기 싫었다.“왜 연락하면 안 되는데요? 친구인데.”“내가 싫어.”“이현 씨가 싫어하는 사람이 좀
지유는 몸이 너무 안 좋아 창백해진 얼굴로 벽을 붙잡고 쉴 새 없이 밖으로 토해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현은 이를 보더니 얼른 걱정에 찬 눈빛으로 지유를 부축했다.“왜 그래? 많이 안 좋아?”지유는 이현의 손을 밀어내더니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아까는 이혼하자고 그러더니, 지금은 또 왜 이러는 거예요?”이현은 지유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는 상태가 진짜 안 좋다는 걸 눈치채고 부드럽게 말했다.“먼저 집에 가자. 이 일은 나중에 얘기해.”이현은 지유의 허리를 잡더니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지유는 거절하지 않았다. 문 앞에서 이현과 다퉜다가 부모님이 보기라도 하면 걱정할 것이다.결혼이 불행하다 해도 부모님을 걱정하게 해서는 안 된다.차 앞으로 걸어간 이현은 지유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더니 품에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지유야, 내가 너를 어떡하면 좋을까?”지유는 이현의 어깨에 기댔다. 코가 찡했다. 언제부턴가 지유는 건드리면 바로 깨질 만큼 나약했다.아마 이현의 조금 달라진 모습에 지유는 없었던 엄살이 생겨나는 것 같았다. 원하는 게 많아지면 전처럼 고분고분할 수가 없다.“이현 씨.”지유는 이현의 품에 기대 말을 이어 나갔다.“나를 위해 해준 모든 것에 고마워요.”이현이 지유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내가 뭘 했다고 고맙다는 거야?”지유가 말했다.“우리 집에 와줘서 고마워요. 부모님이 나 잘 지내는 거 알면 더는 걱정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전에 20억을 써서 우리 집 구해준 것도 고맙고요. 이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을게요.”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또, 나를 살려줘서 고마워요.”이현의 이 말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조금 전까지 기분이 안 좋았지만 지유가 이렇게 다독이자 이현의 화도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 버렸다.이현은 지유를 잃을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지유를 꼭 끌어안고는 이렇게 말했다.“나 네 남편이야. 다 내가 해야 되는 일이야.”지유가 입꼬리를 당기더니
“너 잘 왔다. 너한테 줄 것도 있어.”여진숙이 도우미에게 말했다.“내가 지유 주려고 끓인 거 좀 올려와요.”지유는 지금 이 상황이 약간 신기했다. 온 정성을 승아에게 쏟아도 모자란 여진숙이 왜 갑자기 이렇게 나오는 걸까?여진숙의 눈길이 지유의 배로 향했다.“이 약, 내가 자주 다니는 한의사가 지어준 거야. 마시면 바로 애가 들어선다는데 마셔. 애가 들어설지도 모르니.”도우미가 약을 올려왔다. 냄새를 맡은 순간 속이 메슥거렸다. 지유는 온몸으로 거부하며 도우미에게 치우라고 했다.“가져가세요. 못 마셔요.”지유가 거절하자 여진숙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너 어떻게 된 거야? 내가 힘들게 구해온 약인데 왜 안 마셔? 능력이 없으면 약이라도 먹어야지. 얼른 마셔.”도우미가 약을 다시 지유 앞에 대령했다.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러 지유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안 되겠어요...”지유는 바로 화장실로 향했다.“아니 얘가...”여진숙은 화장실로 달려가는 지유를 보며 성질을 냈다.“쓸모없긴. 뭐가 그렇게 역겹다고. 마시기 싫어서 일부러 저러는 거 아니야?”지유는 위가 너무 더부룩했지만 한참을 토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하여 찬물로 얼굴을 씻고 나왔다.여진숙은 더는 약을 먹으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승아를 만나러 가기 급급했던 여진숙은 가져갈 물건이 많자 지유에게 말했다.“너 오늘 회사 나가지 마. 나 승아 보러 가는 길에 손 좀 보태. 병원에 입원한 거 너도 알고 있지? 아마 이현이는 이미 보러 갔다 왔을 거야.”이 말을 들은 지유가 입을 앙다물며 말했다.“저 출근 지각할 거 같아요.”여진숙이 지유를 보며 입꼬리를 당겼다.“회사로 나가는 것도 현이 위해서 그러는 거 아니야? 병원 가면 현이 마주칠 수도 있어. 그럼 너는 땡큐 아니야?”맞는 말이긴 했다. 지유는 이현의 아내이자 이현의 수행 비서였다. 하여 여진숙과의 동행을 선택했다.여진숙은 크고 작은 보따리를 안고 집을 나섰다. 병문안을 간다기보다는 친척 방문이 더 적합해 보였다.
승아의 말에 지유가 멈칫했다.이용해? 이용할 게 뭐가 있다고? 이현처럼 총명한 사람이 이용할 사람이 없을까?승아는 지유가 멈칫하자 궁금해하는 줄 알고 우쭐거리며 말했다.“어떻게 이용하는지 궁금하지 않아요?”이용이라고 하기엔 너무 현실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지유는 승아가 온갖 방법으로 이간질하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아니나 다를까 지유가 고개를 돌려보니 승아가 희망에 찬 눈빛으로 지유가 물어봐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지유는 승아의 기대에 부응할 생각이 없었기에 하고 싶은 말을 주저 없이 내뱉었다.“내가 궁금해하는 게 아니라 승아 씨가 말해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에요?”=승아의 얼굴이 굳었다. 지유가 자기 뜻대로 나와주지 않자 약이 잔뜩 오른 것 같았다.지유가 그런 승아를 똑바로 쳐다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노승아 씨 목적이라면 내가 그이와 이혼하는 거겠죠. 그러면 여씨 집안으로 시집갈 수 있으니까. 근데 지금은 뭔가 불안한가 보죠?”승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그래도 바락바락 악을 썼다.“언젠간 이혼할 텐데 내가 왜 불안해요? 전혀요.”짜증 섞인 승아의 말투에 지유가 웃었다.“불안하지 않은 사람이 나를 보자마자 이혼 얘기나 꺼내고. 우리 그이보다 더 급해하는 것 같아요. 이현 씨가 나랑 이혼하기 싫어하니까 조급해졌나 보죠? 이현 씨는 설득이 안 되니까 나를 어떻게 해보려고?”“온지유 씨, 너무 잘난 척 마요. 다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니까.”승아는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나를 위해서 하는 소리다?”지유는 세상 우스운 소리를 들었다는 듯 비아냥거렸다.“핑계를 찾을 거면 설득력 있는 걸 찾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노승아 씨가 나를 위한다? 무슨 꿍꿍이인지 아는데 틀렸어요. 그렇게 우리가 이혼하길 바란다면 나를 찾을 게 아니라 그이를 찾아요. 이혼하나 안 하나.”고작 몇 마디에 승아는 약이 바짝 올라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시울을 붉혔다.눈 깜짝할 사이에 승아가 사라지자 여진숙이 그녀를 찾으러 왔다. 마침 그 뒤
의사와 간호사가 안으로 들어와 승아를 들것에 들어갔다.여진숙은 아직 지유에게 따지고 싶은 게 많았지만 일단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승아의 상처가 더 걱정되었기 때문이다.승아가 들것에 올려지는 순간부터 여진숙은 곁을 떠나지 않았고 응급실 입구까지 따라가 두 손을 꼭 모은 채 기도했다.의사는 이현과 승아의 상태에 관해 토론하느라 지유를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옆에 서 있는 지유는 그들이 승아를 위해 분주히 돌아치는 걸 보고 자신이 아웃사이더 같다고 생각했다.승아가 응급실에서 나오자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여진숙이 그녀를 병실로 옮겨갔다.이현은 따라 들어가지 않고 뒤에 서 있는 지유에게 이렇게 말했다.“승아 지금 자극받으면 안 돼. 일단 단둘이 만나는 건 삼가해줘.”지유는 목구멍이 메어왔다. 지금 탓하는 건가?왜 승아를 화나게 했는지 따지면서 앞으로 승아를 괴롭히지 말라는 말처럼 들렸다.이현은 지유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지유가 오해했음을 눈치채고는 지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왜? 기분 상했어?”“현아, 빨리 들어와!”여진숙이 눈물을 훔치며 병실 문을 열고 소리쳤다.“승아가 너 찾아. 네가 없는데 승아가 어떻게 낫겠어.”지유는 급해서 눈물을 흘리는 여진숙을 보며 지유에게 말했다.“일단 밖에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 갔다 금방 올게.”지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승아와 그녀 사이에서 버려지는 걸 늘 그녀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밖에 선 지유는 마치 아무 관련 없는 방관자 같았다.그렇게 옆에서 승아가 이현의 품에 안겨 힘없이 우는 모습을 지켜봤고, 이현이 그런 승아를 밀어내지 않고 차분하게 승아의 등을 토닥이는 걸 지켜봤다.지유는 허리가 시큰거렸다. 둘이 꽁냥대는 모습을 보기가 싫어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 조용히 이현이 나오기를 기다렸다.얼마나 지났을까, 온 세상이 멈춰버린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혀 있는데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지유야.”여희영이 다급하게 뛰어왔다. 지유가 멀쩡하게 벤치에 앉아 있자
여희영은 깜짝 놀랐다. 놀라움 뒤에 남은 건 분노와 실망뿐이었다.이때 이현이 병실에서 나왔다. 고개를 든 이현이 지유와 함께 있는 여희영을 보며 공손하게 불렀다.“고모.”“그렇게 부르지 마.”화가 치밀어오른 여희영은 이현을 나무라기 시작했다.“내가 고모긴 하니? 지유와 이혼한다며? 이렇게 큰일을 왜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거야? 할아버지 당부 잊었어? 지유 잘 보살펴주라고 했는데 이따위로 보살피는 거야? 여이현. 너 자라는 거 옆에서 쭉 지켜봤지만 이렇게 책임감 없는 사람인 줄은 몰랐다. 이혼? 침대에 누워서 별의별 생쇼는 다하는 세컨드 년 때문에 부부간의 연을 끊겠다고?”“어머, 아가씨, 말은 가려서 해야죠. 세컨드 년이 뭐예요? 그리고 책임감 소리는 왜 하시는 거예요? 이게 책임감이랑 무슨 상관있다고?”여진숙은 거북하게 들리는 여희영의 말에 처음으로 앞에 나서서 반박했다.“현이가 이혼하든 말든 알아서 할 일이지 아가씨가 무슨 상관이에요? 어른이랍시고 우리 아들 자꾸 혼내시는데 보기 안 좋아요.”지유는 자신이 한 말로 여희영과 여진숙이 다투게 될 줄은 몰랐다. 하여 사람들이 몰리기 전에 얼른 여희영을 뜯어말렸다.이 일이 아니어도 여진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여희영이 하찮다는 듯 코웃음 치며 말했다.“내가 내 조카랑 얘기하고 있는데 왜 끼어들죠? 올케, 지금 나랑 말할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요?”“아가씨, 이렇게 나온다 이거죠?”여진숙이 이렇게 말했다.여희영은 늘 여진숙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여진숙도 마찬가지였다. 하여 둘은 마주칠 때마다 대화가 별로 없었고 모르는 사람보다 못한 사이었다.여희영은 늘 여진숙을 무시했기에 말을 가려 하는 법이 없었다. 여희영은 여진숙을 향해 다가가더니 오만하게 여진숙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이렇게 말했다.“내가 할 소리예요. 엄마가 돼서 현이한테 잘해준 게 뭐에요? 내가 일일이 다 말할 필요 없죠? 여기서 제일 말할 자격 없는 사람이 올케예요. 내가 조카를 어떻게 혼내든 올케랑은 아무 상관이 없어요.”
지유도 자책하고 있었다. 오래 참았는데 왜 갑자기 충동적으로 행동한 걸까? 그러지만 않았다면 여희영이 아는 일도 없었을 텐데.“미안해요.”지유는 이현에게 폐를 끼치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은 거둘 수 없었다.이현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로 지유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많은 것들을 생각했다. 그러다 끝내 입을 열었다.“그렇게 이혼하고 싶어?”지유도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이현과 이혼하고 싶은 걸까?사실 지유가 원하는 건 새로운 삶을 살고 싶은 게 더 컸다. 더는 막연하고 희망이 없는 것에 갇혀 있기 싫었다.지유가 아무 대답이 없자 이현이 다시 물었다.“나랑 같이 있는 게 그렇게 힘들어?”이 말에 지유는 더는 참지 못하고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고 곧 흘러넘칠 것 같았다. 이현이 오히려 온화하게 말하자 지유는 밀려오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힘들다기보다는 그가 승아와 꽁냥거리는 걸 더는 보기 싫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중요하지 않다.“조금?”지유는 감정을 들키기 싫어 고개를 숙였다.이현은 생각했다. 비록 결혼한 지 3년이 되긴 했지만 그녀가 그의 곁에 계속 남아있는 건 그 계약서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우석이라는 남자다.우석이라는 남자를 위해 3년간 아무 요구도 꺼낸 적 없었고 그 남자를 위해 한결같이 몸을 지켰다.이렇게 생각한 이현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가슴이 돌에 짓눌린 듯 너무 불편했다.그녀를 놓아줘야 할까?이현이 움켜쥐었던 주먹을 풀더니 덤덤하게 말했다.“계약 기간 3년이 차면 그때 이혼하자.”지유는 하마터면 울음을 참지 못하고 울먹일 뻔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고 지유는 그렇게 서러움을 겨우 눌렀다.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억지로 눈물을 삼켰다. 지금 이 순간 체면을 잃기는 싫어 고개를 들고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그래요.”지유의 어여쁜 얼굴을 본 순간 이현은 그제야 그녀가 진심으로 웃는다고 생각했다.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녀는 조금도
문지원은 정말로 일부러 강윤슬을 찾아간 것이 아니었다. 지석훈은 그녀의 말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빤히 그녀를 보았다. 문지원의 얼굴엔 진지함과 단호함만 담겨 있었다. 그는 확실히 문지원이 일부러 찾아갔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해야 모든 사람들이 그와 문지원의 관계를 알게 될 거고 경성의 모든 사람들도 어떻게든 문지원을 도와주려고 할 것이니 말이다. 문지원의 야망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듯 솔직하게 말해줄 줄은 몰랐다.그녀가 애초에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이번에는 정말로 강윤슬이 일부러 문지원을 찾아온 것이 맞았다. 그 순간 지석훈은 대충 뭔가를 짐작하게 되었다.그러나 문지원은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어서 말했다.“혹시 저한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하지 마세요. 전 제 주제를 알고 과욕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요. 석훈 씨와 석훈 씨 아버지는 이미 충분히 저를 도와주고 있어요.”그녀에게 정말로 다른 생각이 있었다면 티가 나지 않았겠는가. 게다가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지나친 욕심은 오히려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그녀와 지석훈은 결국엔 다른 세계 사람이었고 주건 때문에 그녀는 더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알았어. 그럼 협력 업체를 만나러 온 거야?”지석훈은 더는 그녀와 이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다.“네. 프로젝트를 더 많이 받아보려고 왔어요. 저희 직원들이 일을 너무도 잘하는데 아무래도 제가 부족한 것 같아 조금이라도 더 노력해보려고 온 거예요.”직원들이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해주고 있는 덕분에 주문도 밀리지 않고 제때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미 파산해버린 회사를 버리고 도망쳤을 테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런 직원들이 자신 때문에 힘들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지석훈은 입술을 달싹였다.“내가 사업하는 내 친구들을 소개해줄게. 내 친구들이라면 널 도와줄 수 있을 거야. 최근에 제약 회사에서도 뭔가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한번 생각해
한쪽 입꼬리만 올라간 것이 지석훈이 그들을 비웃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임혁수의 안색이 더 일그러졌지만 강윤슬은 난감하기만 했다. 예전에 지석훈이 자신에게 어떻게 애절하게 사랑 고백했었는지 전부 지켜보았었다. 그런 지석훈이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의 편을 들어주고 있으니 오히려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강윤슬은 그런 그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석훈아, 말 좀 가려서 해. 사람을 존중해야 할 줄 알아야지. 우리가 언제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했다고 그래?”강윤슬도 어느새 미간을 찌푸렸다. 임혁수는 계속 강윤슬의 편을 들어주었다.“지석훈, 너 지금 윤슬이를 갖지 못했으니까 질투하고 있는 거잖아. 너 그런 모습 추해. 애초에 네가 강아지처럼 꼬리 살살 흔들며 멋대로 윤슬이 옆에 있었던 거였으면서.”임혁수의 날카로운 눈빛과 말에 지석훈은 정곡을 찔리게 되었고 틀린 말도 아니었다. 예전의 지석훈은 한 마리의 개처럼 강윤슬의 주위만 맴돌았고 비굴하고도 애절하게 사랑 고백하면서 잘해주었지만 결국 지석훈에게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프러포즈를 몇 번이나 했지만 강윤슬은 단 한 번도 받아주지 않았고 임학수의 전화 한 통에 강윤슬은 바로 그의 곁을 떠나버렸다. 심지어 강윤슬은 아무런 조건도 없이 임혁수의 편을 들어주었고 자신과 혈연관계도 없는 임혁수의 딸까지 받아주었다. 그렇게 생각한 지석훈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그래. 맞아. 내가 개처럼 꼬리를 흔들었지. 인정해. 그런데 너희들이 한 건? 너희들은 이 세상이 너희들을 둘러싸고 돌아간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아니야?”“네가 질투한다고 말한 게 그렇게 큰 잘못이냐?”임혁수는 고개를 빳빳이 쳐들며 강윤슬의 편을 들어주었다. 문지원은 더는 뻔뻔한 두 사람을 봐줄 수가 없었다.“만약 우리가 정말 그런 거라면 틀린 말도 아니겠죠. 하지만 이미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하는데 뭔 이유가 필요하겠어요. 안 그래요? 두 사람은 그렇게 평생 함께 살아요. 다른 사람 해칠 궁리는 하지 말고요. 두 사람의 피해망상증이 다른 사람에게도
문지원은 반드시 회사를 다시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회사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으려면 방법이 단 하나뿐이었다. 바로 돈을 많이 버는 것.그녀는 프로젝트를 더 많이 받으려고 나온 것이지만 강윤슬과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강윤슬은 연분홍색 정장을 입고 있어 청순하고 아름다운 매력이 있었다. 비록 강윤슬과 친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난번 강윤슬이 했던 말을 지금도 잊지 않았다.이번에 우연히 만나도 문지원은 당연히 먼저 인사할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강윤슬은 먼저 그녀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강윤슬의 두 눈엔 여전히 그녀를 깔보는 듯한 거만함이 담겨 있었다.“오늘은 석훈이랑 같이 있지 않네요?”다른 사람이 듣기엔 별다른 의미가 없지만 문지원이 듣기엔 이상하게도 말 속에 가시가 느껴져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저희 인사할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설령 강윤슬과 지석훈이 친한 사이라고 해도 그건 두 사람의 사이에서만 통할 뿐 그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강윤슬의 모습은 꼭... 일부러 그녀를 골탕 먹이려고 먼저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강윤슬은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그렇죠. 우리가 친한 사이는 아니죠. 하지만 석훈이 봐서라도 인사를 해주는 거예요. 석훈이 도움으로 문정 그룹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하고 있잖아요. 확실히 좋은 방법이긴 하죠.”문정 그룹의 상황이 점차 나아지고 있는 것도 지석훈의 공로였다. 만약 지석훈이 여이현을 소개해주지 않았더라면 여이현은 아마 끝까지 그녀가 누구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녀는 알고서도 지석훈의 도움을 받는 것이었고 강윤슬의 말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말을 강윤슬이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맞아요. 아주 좋은 방법이죠. 그런데 그쪽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강윤슬 씨, 혹시 사람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예요?”문지원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죠?”강윤슬이 대꾸하기도 전에 누군가 끼어들며 강윤슬의 편을 들어주었다. 목소리를 들은 문지원은
이 말은 손기영만 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직원들이 하고 싶은 말을 그가 해준 것이다. 그들은 심지어 문지원이 없을 때 젊은 나이에 큰일을 하고 있는 문지원을 칭찬하고 있었고 몇 년만 더 지나면 아주 문용석을 뛰어넘는 훌륭한 사장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문지원이 자기 사무실로 돌아가려던 때 갑자기 무언가가 떠올라 다시 몸을 돌렸다.“공장장님, 직원들 점심은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 거예요? 다들 도시락이라도 준비해오는 거예요?”“어떤 사람은 집에서 도시락을 준비해오고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근처에서 간단히 사 먹고 있어. 어차피 우린 힘 쓰는 일을 해야 하니까 배만 든든하게 채우면 되거든.”“그렇군요. 알겠어요. 전 이만 돌아가 볼게요.”문지원은 이미 무언가를 생각해두고 있었다. 직원들이 더 열심히 일하게 해주려면 사장으로서 직원 복지 정도는 만들어 줘야 했다. 예시를 들면 점심 식사 같은 것을 챙겨주는 직원 복지 말이다.물론 지금 공장의 상황으로는 직원들을 위해 식당을 만들어줄 정도의 돈도 없고 그럴 가치도 없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근처 식당과 협력해 점심마다 대량의 도시락을 주문하는 것이 더 나았다. 대량으로 도시락을 주문하니 가격도 협상할 수 있었다.직원들도 매일 따듯한 도시락을 먹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고기와 채소를 곁들여 영양도 챙길 수 있으니 분명 더 열심히 일할 수 있을 것이었다. 문지원은 행동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던지라 사무실에 앉아 한참 고민한 후 공장의 이틀간 생산량을 훑어보았다. 그러고 나서 직접 운전해 공장 근처를 둘러보았다. 아무리 직원을 위해 도시락을 주문한다고 해도 문지원은 대충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깨끗한 식당에서 주문해 직원들에게 점심을 주고 싶었던 그녀는 결국 어느 한 식당 앞에서 멈춰 섰다.“사장님, 도시락 하나에 얼마씩 해요?”“도시락마다 다 다르죠. 고기반찬 둘에 나물 반찬 하나 들어간 건 2400원 정도 하고 고기반찬 하나와 나물 하나면 2000원 정도 해요. 두 가지 모두 생수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어
“문 사장, 내가 며칠 동안 지켜봤는데 다들 아주 열심히 일하고 있더라고. 농땡이 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 다들 어렵게 찾아온 일할 기회를 소중히 하고 있는 것 같아.”손기영은 문지원의 옆에 서서 말했다. 그가 한 말은 전부 사실이었고 직원들을 위해 감싸주는 말이 아니었다. 비록 그도 일하러 온 것이지만 공장장이었던지라 공과 사는 확실하게 구분했다. 문지원도 그런 그를 믿고 있었다.“공장에 아저씨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아저씨는 이 공장의 원로급 임원이나 다름이 없잖아요. 예전에 우리 아빠랑 일하셨을 때도 아빠가 항상 아저씨 일 잘한다고 하셨거든요. 아저씨는 언제든 잘하실 거예요.”그녀의 말을 들은 손기영은 미소를 지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뒤 손기영은 문을 꼭 닫았다.“문 사장, 내가 문 사장한테 보고해야 할 일이 하나 있어. 전에 우리 공장 직원 중 진태준이라는 직원을 기억해?”“네. 기억해요. 그 사람이 왜요?”문지원은 어렴풋이 진태준이라는 직원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그가 손기영에게 연락을 부탁했을 때 진태준은 다시 돌아와 일해달라는 부탁을 거절했기에 직원 리스트 중에 그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진태준은 문지원에게 이미 지나간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손기영은 한숨을 내쉬었다.“진태준 생활 형편도 아주 좋지 않아. 자식이 네 명이나 있는데 그동안 변변한 일자리도 없었나 보더라고. 막내아들이 학원도 다녀야 하는데, 형편이 좋지 않아 망설이는 듯한 눈치였어. 전에 내가 연락했을 때 다시 일하기 싫다면서 거절했잖아. 아마 한번 망하고 월급이 밀리니까 불안했나 봐. 우리가 다시 전처럼 출퇴근하고 있으니까 돌아오고 싶은지 얘기를 꺼내더라고. 문 사장은 어떻게 생각해?”문지원은 미간을 구겼다. 손기영의 말을 들으니 진태준의 형편도 확실히 좋지 않고 이 일도 그에게 아주 중요한 일인 것 같았다. 하지만 애당초 이 기회를 거절한 것은 진태준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이 일을 이미 포기했다는 것이었던지라 만약 불쌍하다고 해서 받아준다면 다른
문지원은 자기 입술을 찰싹찰싹 때리며 원망했다.‘왜 야밤에 배가 고픈 거냐고! 배고픈 건 그렇다고 쳐도 이 차림으로 석훈 씨 앞에 서 있었다니! 정말 창피해 죽겠어!'“잠깐.”지석훈이 그녀를 불러세웠다.“나도 조금 허기진 것 같네. 야식 만들려고 하는데 먹고 싶으면 옷 갈아입고 나와. 아니면 내가 만들어서 방 앞에 놓고 갈 테니까 들고 가서 먹어.”“아니요. 얼른 옷 갈아입고 나올게요.”문지원은 당연히 집주인에게 야식을 만들어 문 앞까지 가져다 달라고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아주 빠른 속도로 옷을 갈아입은 후 거울에 이리저리 비추어보더니 이내 화장실로 들어가 찬물로 세수했다. 덕분에 얼굴의 붉기는 조금 전보다 가라앉은 상태였고 그제야 방에서 나와 거실로 향했다.지석훈은 이미 야식을 만들어 놓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부대찌개를 본 그녀는 저도 모르게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석훈 씨 요리를 아주 잘하나 봐요.”“전에 사둔 밀키트가 있어서 쉽게 만든 거야. 그냥 안에 있는 재료를 다 때려 넣고 끓이면 되는 거거든. 얼른 와. 내가 냉장고에 있는 치킨도 데워줄게.”지석훈은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다시 나왔을 때 잊지 않고 문지원에게 앞치마를 챙겨주었다.“이거 하고 있어. 그래야 먹을 때 양념이 튀어도 네 옷에 튀지 않을 테니까.”문지원은 갑작스럽게 그의 집에서 지내게 된 것이라 가져온 옷이라곤 없었다. 입고 온 것이 전부였던지라 더러워지면 골치 아팠다.“석훈 씨도 얼른 먹어요. 저 혼자 먹기엔 눈치가 보이네요.”문지원은 옆으로 자리를 옮기며 그가 앉을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문용석이 병원에 입원한 뒤로 집안에 자꾸만 안 좋은 일이 일어났던지라 이렇게 야식으로 부대찌개를 먹는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어느 새부터인가 그녀는 살기 위해 음식을 먹을 뿐이었지만 이렇게 지석훈과 함께 야식을 먹으니 이상하리만큼 행복했다.아마도 점점 나아지는 집안의 상황에 이런 행복을 느끼는 것으로 생각했다. 회사의 상황도 나아지
지석훈의 상처를 치료해줄 때 문지원은 아주 열심이었다. 지석훈은 저도 모르게 그런 그녀를 빤히 보게 되었고 은은한 조명 아래에 있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예뻤다. 연고가 상처에 닿은 순간 지석훈은 저도 모르게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아, 미안해요. 혹시 방금 아프게 했어요?”문지원은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상처에 대고 후후 바람을 불었다.“이러면 조금 나을 거예요. 최대한 살살 발라볼 테니까 조금만 참아줘요.”“문지원, 난 어린애가 아니야. 이런 통증쯤이야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그러니까 애 취급하지 마.”지석훈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문지원이 말했다.“석훈 씨가 아이가 아니라는 거 당연히 알고 있죠. 하지만 아이만 다치면 아픈 게 아니잖아요. 어른도 다치면 똑같이 아파요. 그리고 이런 통증은 줄일 수 있는 거예요. 제가 최대한 살살 바르면요.”최대한 살살 약 발라주겠다고 하면서 대체 왜 자꾸만 그에게 참으라고 하는 것일까.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지석훈은 더 말하지 않았다. 팔을 치료한 뒤 문지원은 그의 다리를 치료해주었다. 전부 치료해주고 나니 어느새 반 시간이 훌쩍 지났다.“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씻고 쉬어. 내일 공장으로 갈 거면 내가 데려다줄게.”지석훈은 소파에서 일어나며 손님방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저 방에 새 이불도 있으니까 그냥 덮으면 돼.”“고마워요.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를 모르겠네요.”문지원은 농담을 반쯤 담아 그에게 말했다. 그녀는 현재 제 코가 석 자인 상황이었다. 집안에 들이닥친 일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던지라 지석훈에게 보답할 여력은 없었기에 정말로 보답할 수 있을지 몰랐다.지석훈은 그런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우린 친구잖아. 친구 사이에 그런 부담은 가질 필요 없으니까 얼른 들어가서 쉬어. 넌 피곤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내가 피곤해.”“그럼 쉬는 데 방해하지 않게 전 이만 먼저 방으로 들어가 볼게요.”문지원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손님방으로 들어온 그녀는 먼
두 사람이 서로를 알게 된 후 지석훈은 이미 문지원에게 충분히 많은 것을 도와주었다. 그에게 진 빚도 갚지 못할 정도였던지라 만약 그가 그녀를 구해주다가 다치게 된다면 그녀는 정말로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몰랐다.눈 앞에 펼쳐진 위험한 상황을 지석훈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이대로 가버린다면 문지원 혼자서 그 위험을 감당해야 했기에 그는 그녀를 두고 절대 혼자 도망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두 남자에게 달려들어 싸웠다.문지원이 초조해하고 있던 때 마침 그녀가 신고했던 경찰들이 도착했다. 경찰들은 차에서 내려 그들에게 총을 겨눴다.“움직이지 마! 두 손 들어!”두 남자는 빠르게 도망치려고 했지만 자신들의 차로 문지원의 차를 쳤던지라 더는 시동을 걸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도망칠 수 없었던 그들은 이내 경찰에게 제압당했다. 문지원과 지석훈도 경찰서로 따라가 진술서를 작성했다.진술서를 작성하고 나니 어느새 밤이 되었고 피로 물든 그의 셔츠를 보던 문지원은 눈가가 붉어졌다.“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이런 일에 휘말리게 했어요. 만약 제가 아니었다면 석훈 씨가 다칠 일도 없었을 텐데...”“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뭘. 괜찮아.”지석훈은 애초에 자기 상처에 신경 쓰지 않았다.“오늘 밤은 우리 집에서 지내. 거기가 더 안전할 거야.”그러나 문지원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누구 집이 더 안전한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친 사람이 있으니 당연히 병원부터 가야 한다.“다쳤잖아요. 그러면 병원 가서 치료부터 받아야죠. 온몸에 이상 없나 확인해야 저도 마음이 놓일 것 같아요.”지석훈도 그녀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고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자꾸만 올라갔다.“문지원,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잊은 거야? 내가 의사야. 이 정도 상처는 별거 아니니까 병원까지 갈 필요 없어.”“아무리 별거 아닌 상처라고 해도 치료는 해야죠. 그렇게 내버려 두면 안 되는 거잖아요.”문지원은 여전히 그가 걱정되었다. 그러자 지석훈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더 짙
그 순간 두 남자는 문지원을 향해 빠르게 달려왔다. 문지원은 급하게 차에 올라탄 뒤 사람이 많은 시내로 향했다. 시내엔 사람이 많았던지라 아무리 두 사람이 그녀에게 범죄를 저지르려고 해도 수많은 시선이 느껴지는 앞에서는 대놓고 하지 못할 것이었으니까.다행히 차가 옆에 있어 그녀는 바로 문을 열어 차에 올라탔다. 안전벨트를 할 새도 없이 시동을 걸었고 멈춰선 두 남자는 서로 마주 보았다.“도망치고 있어요!” “뭘 멍청하게 서 있어! 얼른 차 시동 걸어! 쫓아가야지!”옆에 있던 남자가 그의 머리를 내리치며 말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이런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두 사람은 애초에 돈을 받고 무엇이든 해주는 흥신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만약 이대로 문지원을 놓친다면 의뢰인이 난리를 피우며 돈을 달라고 할 것이 뻔했다.두 사람의 차도 근처에 주차되어 있었던지라 남자는 빠르게 차를 몰고 다른 남자가 있는 곳으로 와서 태웠다. 차에 올라탄 남자는 이내 지휘했다.“속도 올려서 일부러 부딪쳐.”“네!”남자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속도를 꾹 울린 후 문지원의 차를 쫓아갔다. 엄청난 소리가 울려 퍼지고 두 차는 서로 부딪치게 되었다. 문지원의 몸이 그 충격에 앞으로 확 나갔고 다행히 제때 펴진 에어백 덕에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그녀는 두 남자가 돈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두 남자는 차에서 내린 후 그녀가 있는 운전석으로 달려와 끊임없이 창문을 두드렸다. 문지원은 당연히 열어줄 생각이 없었다. 두 남자도 그녀의 생각을 알고 있었던지라 한 사람은 계속 밖에서 그녀를 협박하고 다른 한 사람은 차로 돌아가 망치를 들고 왔다.“문지원 씨, 우린 문지원 씨랑 싸우려고 온 게 아니에요. 일단 내려서 평화롭게 잘 얘기를 나눈다면 우리도 조용히 물러갈 거예요. 굳이 이렇게까진 할 필요 없잖아요. 안 그래?”문지원은 당연히 남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흉흉한 두 남자의 얼굴만 봐도 신뢰도가 떨어졌다. 만약 남자의 말을 믿고 문을 열었다면 그들에게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