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우는 여기서 이현을 만난 게 퍽 의외라 이렇게 물었다.“여 대표님도 계시네요?”그러자 시선이 이현에게로 쏠렸다. 다들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듯한 눈치였다.그대 지유가 입을 열었다.“오늘 대표님이 집에 놀러 왔어. 민우야, 너도 앉아.”정미리가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민우야, 지금 요리 중인데 먹고 가. 가면 안 돼.”“네, 감사합니다, 아주머니.”민우가 예의 바르게 말했다.소파는 자리가 넉넉했다. 민우는 이현의 대각선 방향에 자리를 잡았다.온경준은 옛이야기를 꺼내며 민우와 담소를 나누었다.지유는 그제야 학창 시절 민우가 멀지 않은 곳에 살았고 부모님끼리 잘 아는 사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왜 그땐 몰랐을까? 참 신기한 관계였다.이를 들은 이현의 표정이 점점 굳었고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같이 앉아 있긴 하지만 옛날얘기를 하니 마치 아웃사이더가 된 기분이었다.밥을 먹을 때도 민우는 지유를 살뜰히 챙기며 바나나 우유를 가져다주었다.“마셔.”“고마워.”지유가 대답했다.이현은 이를 지켜보더니 차갑게 물었다.“나 대표님도 지유 씨가 바나나 우유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어요?”민우가 대답했다.“전에 학교 다닐 때 마시는 거 자주 봤어요. 근데 지금도 좋아하는지는 모르겠네요.”지유는 민우가 이를 알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하지만 이현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지유가 바나나 우유를 좋아한다는 걸 아는 사람이 자기 말고도 또 있다는게 거슬렸다.식탁 끝에 놓인 컵을 보며 이현은 두 손으로 식탁을 살짝 두드렸고 그렇게 바나나 우유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면서 우유도 바닥에 흩뿌려졌다.이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민우를 쏘아보더니 이렇게 말했다.“바꿔줄게요.”지유는 그런 이현을 힐끔 쳐다보며 오늘따라 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현이 우유를 하나 더 가지고 오며 이렇게 말했다.“따듯한 거야. 날이 춥잖아.”지유는 마음이 따듯해져 얼른 우유를 가져다 손에 움켜쥐었다. 그런 지유를 보며 이현의 기
딱 잘라 말하는 모습에서 이현이 지유에 대한 소유욕이 느껴졌다.이현도 민우가 지유를 좋아해서 자꾸 지유 앞에서 알짱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기회는 없다고 당연히 알려줘야 한다.민우는 그런 이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분위기가 점점 딱딱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대치하다가 민우가 이렇게 말했다.“여 대표님, 너무 확신하는 거 아니에요?”민우는 화내지 않고 점잖게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요. 인연이 닿는다면 누구도 막을 수는 없는 거죠.”이현은 기분이 나빴지만 지유의 손을 잡는 걸 잊지 않았다.지유는 이현의 정서를 느낄 수 있었다. 민우가 오고 나서부터 이현은 이상했고 말끝마다 꼬투리를 잡고 있었다.하지만 지유는 이성적이라 기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현에게서 손을 빼며 분위기를 만회하려 했다.“다들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분위기 좋았는데 내 얘기는 왜 해서. 엄마, 얼른 아빠 모시고 들어가요. 더 마시다간 실수하겠어요.”“그래.”정미리도 상황이 더 걷잡을 수 없이 발전할까 봐 이렇게 말했다.“여보, 가서 눈 좀 붙이면서 술 깨요.”온경준은 꽤 협조적이었지만 그래도 흐뭇한 눈빛으로 민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민우야, 나는 너 좋게 보고 있어. 뒤에 한잔 거하게 하자.”“네.”민우가 공손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온경준의 말에 대답했다.온경준은 그렇게 정미리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들어갔다.이현은 얼굴을 굳힌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식탁엔 세 사람만 덩그러니 남았다. 온경준과 정미리가 가자 갑자기 주방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이에 지유가 불편해졌다.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튀기는 걸 느낄 수 있었다.민우는 이현의 눈빛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나긋한 목소리로 지유에게 말했다.“아까 별로 못 먹던데 너무 멀어서 그런 거 아니야?”민우는 지유에게 반찬을 집어줬다. 하지만 이현이 한발 빠르게 가로챘다.“괜찮아요. 지유는 이거 안 좋아해요.”민우가 시선을 돌려
그러니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녀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당연히 알게 되었다.민우는 남자의 품위를 지키며 부연 설명은 하지 않았다.“아니야, 밥 먹어.”지유는 약간 얼굴이 뜨거웠다. 그녀에게 민우는 그저 옛 동창일 뿐 친구에도 속하지 못했지만 민우는 그녀를 매우 신경 쓰고 있었다.지유는 젓가락을 들어 접시에 담은 고기반찬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비릿한 냄새에 지유는 속이 메슥거렸고 이에 밥맛이 뚝 떨어졌다.“왜 그래? 못 먹겠어?”민우가 물었다.지유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못 먹겠다는 말은 못 하고 이렇게 말했다.“요즘 식단 조절해서 그런지 위가 작아져서 좀만 먹어도 배부르네.”이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배부르면 이제 먹지 마.”지유는 이현의 불쾌함을 느끼고는 얼른 고개를 들어 이현을 힐끔 살폈다. 하지만 이현은 그저 냉정하기만 했다.정미리는 온경준을 챙기고 있었기에 지유가 민우를 배웅해 줄 수밖에 없었다.민우는 지유의 표정이 좋지 않자 이렇게 당부했다.“몸이 안 좋으면 나 데려다줄 필요 없어. 돌아가서 푹 쉬어. 다음에 또 보러 올게.”지유는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이현이 보고 있어 따로 묻지는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면 조심해서 가.”“응, 또 봐.”민우는 오래 머물지 않고 지유를 돌아보더니 자리를 떠났다.이현이 외투를 가지고 문 쪽으로 걸어오더니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나민우가 왜 너를 그렇게 잘 알아? 전에 사이가 그렇게 좋았어?”“나도 몰라요.”이현이 캐묻기 시작했다.“보면 몰라? 나민우가 너 엄청 신경 쓰는 거?”지유가 고개를 들어 이현을 바라봤다.“없는 얘기 지어내지 마요. 민우랑 나 그냥 친구예요. 오랫동안 연락 한번 한 적 없어요. 그런데 나한테 신경 쓸 리가 있나?”만난 게 고작 몇 번이나 된다고, 이런 생각은 무리였다.“앞으로 연락하지 마.”지유는 그러기 싫었다.“왜 연락하면 안 되는데요? 친구인데.”“내가 싫어.”“이현 씨가 싫어하는 사람이 좀
지유는 몸이 너무 안 좋아 창백해진 얼굴로 벽을 붙잡고 쉴 새 없이 밖으로 토해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현은 이를 보더니 얼른 걱정에 찬 눈빛으로 지유를 부축했다.“왜 그래? 많이 안 좋아?”지유는 이현의 손을 밀어내더니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아까는 이혼하자고 그러더니, 지금은 또 왜 이러는 거예요?”이현은 지유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는 상태가 진짜 안 좋다는 걸 눈치채고 부드럽게 말했다.“먼저 집에 가자. 이 일은 나중에 얘기해.”이현은 지유의 허리를 잡더니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지유는 거절하지 않았다. 문 앞에서 이현과 다퉜다가 부모님이 보기라도 하면 걱정할 것이다.결혼이 불행하다 해도 부모님을 걱정하게 해서는 안 된다.차 앞으로 걸어간 이현은 지유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더니 품에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지유야, 내가 너를 어떡하면 좋을까?”지유는 이현의 어깨에 기댔다. 코가 찡했다. 언제부턴가 지유는 건드리면 바로 깨질 만큼 나약했다.아마 이현의 조금 달라진 모습에 지유는 없었던 엄살이 생겨나는 것 같았다. 원하는 게 많아지면 전처럼 고분고분할 수가 없다.“이현 씨.”지유는 이현의 품에 기대 말을 이어 나갔다.“나를 위해 해준 모든 것에 고마워요.”이현이 지유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내가 뭘 했다고 고맙다는 거야?”지유가 말했다.“우리 집에 와줘서 고마워요. 부모님이 나 잘 지내는 거 알면 더는 걱정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전에 20억을 써서 우리 집 구해준 것도 고맙고요. 이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을게요.”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또, 나를 살려줘서 고마워요.”이현의 이 말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조금 전까지 기분이 안 좋았지만 지유가 이렇게 다독이자 이현의 화도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 버렸다.이현은 지유를 잃을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지유를 꼭 끌어안고는 이렇게 말했다.“나 네 남편이야. 다 내가 해야 되는 일이야.”지유가 입꼬리를 당기더니
“너 잘 왔다. 너한테 줄 것도 있어.”여진숙이 도우미에게 말했다.“내가 지유 주려고 끓인 거 좀 올려와요.”지유는 지금 이 상황이 약간 신기했다. 온 정성을 승아에게 쏟아도 모자란 여진숙이 왜 갑자기 이렇게 나오는 걸까?여진숙의 눈길이 지유의 배로 향했다.“이 약, 내가 자주 다니는 한의사가 지어준 거야. 마시면 바로 애가 들어선다는데 마셔. 애가 들어설지도 모르니.”도우미가 약을 올려왔다. 냄새를 맡은 순간 속이 메슥거렸다. 지유는 온몸으로 거부하며 도우미에게 치우라고 했다.“가져가세요. 못 마셔요.”지유가 거절하자 여진숙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너 어떻게 된 거야? 내가 힘들게 구해온 약인데 왜 안 마셔? 능력이 없으면 약이라도 먹어야지. 얼른 마셔.”도우미가 약을 다시 지유 앞에 대령했다.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러 지유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안 되겠어요...”지유는 바로 화장실로 향했다.“아니 얘가...”여진숙은 화장실로 달려가는 지유를 보며 성질을 냈다.“쓸모없긴. 뭐가 그렇게 역겹다고. 마시기 싫어서 일부러 저러는 거 아니야?”지유는 위가 너무 더부룩했지만 한참을 토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하여 찬물로 얼굴을 씻고 나왔다.여진숙은 더는 약을 먹으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승아를 만나러 가기 급급했던 여진숙은 가져갈 물건이 많자 지유에게 말했다.“너 오늘 회사 나가지 마. 나 승아 보러 가는 길에 손 좀 보태. 병원에 입원한 거 너도 알고 있지? 아마 이현이는 이미 보러 갔다 왔을 거야.”이 말을 들은 지유가 입을 앙다물며 말했다.“저 출근 지각할 거 같아요.”여진숙이 지유를 보며 입꼬리를 당겼다.“회사로 나가는 것도 현이 위해서 그러는 거 아니야? 병원 가면 현이 마주칠 수도 있어. 그럼 너는 땡큐 아니야?”맞는 말이긴 했다. 지유는 이현의 아내이자 이현의 수행 비서였다. 하여 여진숙과의 동행을 선택했다.여진숙은 크고 작은 보따리를 안고 집을 나섰다. 병문안을 간다기보다는 친척 방문이 더 적합해 보였다.
승아의 말에 지유가 멈칫했다.이용해? 이용할 게 뭐가 있다고? 이현처럼 총명한 사람이 이용할 사람이 없을까?승아는 지유가 멈칫하자 궁금해하는 줄 알고 우쭐거리며 말했다.“어떻게 이용하는지 궁금하지 않아요?”이용이라고 하기엔 너무 현실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지유는 승아가 온갖 방법으로 이간질하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아니나 다를까 지유가 고개를 돌려보니 승아가 희망에 찬 눈빛으로 지유가 물어봐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지유는 승아의 기대에 부응할 생각이 없었기에 하고 싶은 말을 주저 없이 내뱉었다.“내가 궁금해하는 게 아니라 승아 씨가 말해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에요?”=승아의 얼굴이 굳었다. 지유가 자기 뜻대로 나와주지 않자 약이 잔뜩 오른 것 같았다.지유가 그런 승아를 똑바로 쳐다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노승아 씨 목적이라면 내가 그이와 이혼하는 거겠죠. 그러면 여씨 집안으로 시집갈 수 있으니까. 근데 지금은 뭔가 불안한가 보죠?”승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그래도 바락바락 악을 썼다.“언젠간 이혼할 텐데 내가 왜 불안해요? 전혀요.”짜증 섞인 승아의 말투에 지유가 웃었다.“불안하지 않은 사람이 나를 보자마자 이혼 얘기나 꺼내고. 우리 그이보다 더 급해하는 것 같아요. 이현 씨가 나랑 이혼하기 싫어하니까 조급해졌나 보죠? 이현 씨는 설득이 안 되니까 나를 어떻게 해보려고?”“온지유 씨, 너무 잘난 척 마요. 다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니까.”승아는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나를 위해서 하는 소리다?”지유는 세상 우스운 소리를 들었다는 듯 비아냥거렸다.“핑계를 찾을 거면 설득력 있는 걸 찾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노승아 씨가 나를 위한다? 무슨 꿍꿍이인지 아는데 틀렸어요. 그렇게 우리가 이혼하길 바란다면 나를 찾을 게 아니라 그이를 찾아요. 이혼하나 안 하나.”고작 몇 마디에 승아는 약이 바짝 올라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시울을 붉혔다.눈 깜짝할 사이에 승아가 사라지자 여진숙이 그녀를 찾으러 왔다. 마침 그 뒤
의사와 간호사가 안으로 들어와 승아를 들것에 들어갔다.여진숙은 아직 지유에게 따지고 싶은 게 많았지만 일단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승아의 상처가 더 걱정되었기 때문이다.승아가 들것에 올려지는 순간부터 여진숙은 곁을 떠나지 않았고 응급실 입구까지 따라가 두 손을 꼭 모은 채 기도했다.의사는 이현과 승아의 상태에 관해 토론하느라 지유를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옆에 서 있는 지유는 그들이 승아를 위해 분주히 돌아치는 걸 보고 자신이 아웃사이더 같다고 생각했다.승아가 응급실에서 나오자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여진숙이 그녀를 병실로 옮겨갔다.이현은 따라 들어가지 않고 뒤에 서 있는 지유에게 이렇게 말했다.“승아 지금 자극받으면 안 돼. 일단 단둘이 만나는 건 삼가해줘.”지유는 목구멍이 메어왔다. 지금 탓하는 건가?왜 승아를 화나게 했는지 따지면서 앞으로 승아를 괴롭히지 말라는 말처럼 들렸다.이현은 지유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지유가 오해했음을 눈치채고는 지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왜? 기분 상했어?”“현아, 빨리 들어와!”여진숙이 눈물을 훔치며 병실 문을 열고 소리쳤다.“승아가 너 찾아. 네가 없는데 승아가 어떻게 낫겠어.”지유는 급해서 눈물을 흘리는 여진숙을 보며 지유에게 말했다.“일단 밖에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 갔다 금방 올게.”지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승아와 그녀 사이에서 버려지는 걸 늘 그녀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밖에 선 지유는 마치 아무 관련 없는 방관자 같았다.그렇게 옆에서 승아가 이현의 품에 안겨 힘없이 우는 모습을 지켜봤고, 이현이 그런 승아를 밀어내지 않고 차분하게 승아의 등을 토닥이는 걸 지켜봤다.지유는 허리가 시큰거렸다. 둘이 꽁냥대는 모습을 보기가 싫어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 조용히 이현이 나오기를 기다렸다.얼마나 지났을까, 온 세상이 멈춰버린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혀 있는데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지유야.”여희영이 다급하게 뛰어왔다. 지유가 멀쩡하게 벤치에 앉아 있자
여희영은 깜짝 놀랐다. 놀라움 뒤에 남은 건 분노와 실망뿐이었다.이때 이현이 병실에서 나왔다. 고개를 든 이현이 지유와 함께 있는 여희영을 보며 공손하게 불렀다.“고모.”“그렇게 부르지 마.”화가 치밀어오른 여희영은 이현을 나무라기 시작했다.“내가 고모긴 하니? 지유와 이혼한다며? 이렇게 큰일을 왜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거야? 할아버지 당부 잊었어? 지유 잘 보살펴주라고 했는데 이따위로 보살피는 거야? 여이현. 너 자라는 거 옆에서 쭉 지켜봤지만 이렇게 책임감 없는 사람인 줄은 몰랐다. 이혼? 침대에 누워서 별의별 생쇼는 다하는 세컨드 년 때문에 부부간의 연을 끊겠다고?”“어머, 아가씨, 말은 가려서 해야죠. 세컨드 년이 뭐예요? 그리고 책임감 소리는 왜 하시는 거예요? 이게 책임감이랑 무슨 상관있다고?”여진숙은 거북하게 들리는 여희영의 말에 처음으로 앞에 나서서 반박했다.“현이가 이혼하든 말든 알아서 할 일이지 아가씨가 무슨 상관이에요? 어른이랍시고 우리 아들 자꾸 혼내시는데 보기 안 좋아요.”지유는 자신이 한 말로 여희영과 여진숙이 다투게 될 줄은 몰랐다. 하여 사람들이 몰리기 전에 얼른 여희영을 뜯어말렸다.이 일이 아니어도 여진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여희영이 하찮다는 듯 코웃음 치며 말했다.“내가 내 조카랑 얘기하고 있는데 왜 끼어들죠? 올케, 지금 나랑 말할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요?”“아가씨, 이렇게 나온다 이거죠?”여진숙이 이렇게 말했다.여희영은 늘 여진숙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여진숙도 마찬가지였다. 하여 둘은 마주칠 때마다 대화가 별로 없었고 모르는 사람보다 못한 사이었다.여희영은 늘 여진숙을 무시했기에 말을 가려 하는 법이 없었다. 여희영은 여진숙을 향해 다가가더니 오만하게 여진숙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이렇게 말했다.“내가 할 소리예요. 엄마가 돼서 현이한테 잘해준 게 뭐에요? 내가 일일이 다 말할 필요 없죠? 여기서 제일 말할 자격 없는 사람이 올케예요. 내가 조카를 어떻게 혼내든 올케랑은 아무 상관이 없어요.”
하지만 나도현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박은희도 하민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천지개벽하고 피와 살이 뒤섞이는 상황에까지 끌고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녀가 숨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나도현이 화가 가라앉으면 자연스럽게 그녀를 놓아줄 것이라 믿었다. “그 아이가 누구의 애인지 물어봐서 뭐 해? 나도현, 우리는 말할 건 다 했잖아. 더 이상 서로 힘들게 하지 말자.” “네 엄마가 그렇게 많은 돈을 주는데 내가 바보냐? 그걸 왜 거절해야 해? 예전에 20억에 너를 포기했던 것처럼 지난 4년 동안 우리는 이미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어. 넌 내가 울며 매달려서 싫다고 말할 걸 기대했어?” 양시은은 담담하게 나도현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무섭기도 했지만 점점 그녀는 상황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도현이 그녀에게 죽으라고 할 리는 없으니까. 죽지 않으면 언젠가는 나도현에 의해 풀려날 날이 있을 것이다. 지금 나도현의 마음속엔 그저 그때 분노로 가득 찼을 뿐이다. “그게 가능할 리가 있냐?” 나도현은 비꼬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양시은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잖아. 그러니 내가 책임질 순 없어. 지금 나를 여기에 가두고 있을 바엔 차라리 양채은을 찾아가. 양채은은 진짜로 널 사랑해. 뱃속의 아이도...” “그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야. 그 여자가 날 사랑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지? 난 널 사랑하지만 너는 나한테 어떻게 했지?” 양시은이 말을 계속하려는 순간 나도현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더욱 어두워진 채 양시은의 몸에 머물렀다.나도현의 깊은 사랑을 양시은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현이 예전에 사랑했던 만큼 지금은 증오도 그만큼 깊어졌다. 나도현은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말했다. “너 같은 사람한테 사랑을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 지금까지 아이 아빠는 보지도 못한 걸 보니 네가 죽인 거 아니냐?” 양시은의 마음이 처참하게 찔렸다. 아이의 아버지는 바로 눈앞에
바로 핸드폰 속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도현은 그 번호를 비서에게 보내며 지시했다. “철저히 조사해.”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갑작스러운 결심이 떠올랐다. ‘더 이상 양시은이 밖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놔둘 순 없어.’ 그리고 나흘 뒤 박은희가 찾아왔다. “네가 가업을 물려받는 걸 싫다고 한 건 이해한다. 근데 지금 또 나랑 대항해서 그 아이를 다시 데리고 오겠다는 거야?” 나도현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박은희는 더욱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나도현, 양시은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눈으로 똑똑히 봤잖아. 그런데 왜 아직도 그 여자에게서 헤어 나오질 못하는 거야? 내가 너한테 소개해 준 약혼녀는 네가 고른 여자보다 어디가 못 해?” 임씨 가문도 경성의 명문가다. 나씨 가문과 임씨 가문은 비록 여씨 가문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경성에서 두 번째로 손꼽히는 대가문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나민우 집안과 친척 관계다. ‘나민우 역시 처음에는 결혼은 원하지 않았지만 결국 부모의 뜻을 따랐고 가문의 이익을 위해 결혼하게 되지 않았나?’이런 생각이 들자 박은희는 더욱 불쾌한 마음에 불만을 터뜨렸다. “나도현, 네가 내 말을 듣기 싫으면 나민우를 좀 본받으면 안 되겠니? 나민우가 어떻게 했는지 알잖아. 넌 도대체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야? 내가 진짜로 나민우를 내 아들로 삼아야 속이 시원하겠어?” 부모들이 자녀를 나무랄 때 자녀들이 흔히 하는 말처럼 ‘남이 그렇게 좋으면 그 쪽한테 가서 아들이나 돼달라고 하세요.’와 같은 뉘앙스였다. 하지만 박은희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나도현에게 상황을 잘 파악하고 나인우를 따라 배우라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가문의 발전과 명성을 위해 양시은과는 반드시 거리를 두어여 한다. “왜 그렇게 남들과 비교하기를 좋아해요? 나민우는 나민우의 선택이 있는 겁니다. 그리고 양시은에 대한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해요.” 나도현은 등을 돌리고
양시은은 눈을 감았지만 깊은 절망이 그녀를 감쌌다.나도현이 언제 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퇴원하려고 했지만 지켜보는 이가 있어 병실 밖을 나갈 수 없었다. 오후가 되자 간호사가 들어오며 약을 갈아주었고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괜찮아요.”“안 돼요. 이건 임 선생님이 직접 시키신 일이니 전 대충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환자분도 치료에 협조 좀 해주세요.”간호사는 난처한 얼굴로 말했고 양시은은 고개를 들더니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나가서 바람 좀 쐬고 싶어요.”“알았어요. 일단 약부터 갈고 휠체어 가져올게요. 환자분은 아직 무리하게 움직이면 안 되거든요.”간호사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날씨는 좋아도 너무 좋았던지라 휠체어를 타고 밖으로 나가면서 양채은에게 또 전화를 걸어보았다. 여전히 꺼져있다는 음성이 들려오는 것을 보니 양채은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 다시는 그녀의 앞에 나타나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양시은은 순간 불안감에 휩싸였다. 옆에 있던 간호사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임 선생님께선 왜 안 오신 거예요?”“모르겠네요. 혹시 휴가 내신 건 아닐까요?”“예전에 단 한 번도 휴가를 낸 적 없었잖아요. 게다가 이틀 동안 계속 회진하는 것을 봐서는 절대 환자를 두고 휴가 낼 것 같진 않았어요.”“그래요? 임 선생님은 우리 병원에서 알아주는 미남이라 매일 임 선생님 얼굴 보고 싶어서 찾는 건 아니고요?”“당연하죠. 임 선생님 얼굴만 봐도 힘든 게 싹 정화되는 기분이라니까요. 오늘도 보고 싶은데 안 보이네요.”원래부터 농담으로 한 말이었던지라 분위기도 쉽게 풀렸다. 간호사들은 서로 웃으며 대화를 나누면서 양시은 앞으로 지나갔다. 하지만 양시은은 이상함을 눈치챘다.“임 선생님께서 언제 사라지신 거예요?”“아마 오전 일 거예요. 일이 있다고 나가신 뒤로 돌아오지 않으셨거든요. 아마 급한 일이 생긴 거겠죠. 안 그래도 휴가 한번 안 내던 사람이었는데 이참에 휴가 내셨을 수도 있을 것 같네요.”간호사는
“너는 환자고 나는 의사니까 보살피는 건 당연한 거야.”임지욱은 웃으며 그녀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상을 차린 후 그는 수저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먹어 봐.”배가 고프긴 했지만 입맛이 없었다. 그렇다고 거절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이대로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면 하민이를 찾아다닐 체력도 없었기에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으려고 했다. 그 순간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곧이어 병실 문이 열리고 나도현이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발견하곤 표정을 굳혔다.“의사가 이런 식으로 환자를 보살피는 건가요? 아니면 양시은한테만 그런 건가요?”“오랜만에 만난 후배를 챙겨주는 건데 뭐가 문제죠?”임지욱은 심기 불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병실 안의 분위기는 싸늘하게 얼어붙었다.나도현은 눈알을 돌리며 양시은과 임지욱을 번갈아 보더니 결국엔 양시은의 창백한 얼굴에 고정하게 되었고 아주 복잡한 눈빛이었다.양시은은 병실에 흐르는 분위기를 읽어내고 음식을 먹으려던 손을 멈추었다.“나 변호사님.”그러자 나도현은 픽 웃더니 어두운 아우라는 사라지고 조롱 가득한 어투로 말했다.“쓰러지기 전에는 눈물까지 흘리며 아들을 살려달라고 하기에 너한테 아들뿐인 줄 알았지. 그런데 고작 며칠이 지났다고 아들은 뒷전으로 미뤄두고 여기서 의사한테 작업을 걸고 있는 거지?”양시은의 표정이 변해버렸다. 하민이는 그녀의 약점이자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가족이었다.느껴지는 배신감에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고통이 상처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졌다.그런 그녀의 상태를 임지욱이 먼저 발견하곤 얼른 부축했다.“시은아, 아직 상처가 다 낫지 않았으니까 화를 내면 안 돼. 할 말이 있으면 나중에 해. 알았지?”양시은은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았다.“괜찮아요.”나도현은 원래 아이를 언급하며 임지욱이 양시은을 포기하길 바랐지만 임지욱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오히려 양시은을 더 걱정해주고 있었다. 순간 분노가 치민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을 정도였고 목
“하민아, 눈 좀 떠봐!”양채은은 하민이를 데려가고 싶었을 뿐 아프게 할 생각은 없었다. 이때 어둠 속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발걸음 소리와 함께 키가 큰 남자가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밤이었던지라 남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신비로운 분위기 탓에 양채은은 바로 남자의 정체를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 남자는 바로 자신에게 강태경이 나도현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사람이었다.“여긴 왜 왔어요? 제 꼴을 보니 이제야 만족했어요?”“멍청하긴. 사기를 당했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있겠어요?”남자는 픽 웃어버렸다.“상처만 가득한 진실이었다면 전 차라리...”양채은은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그런 억지는 그만 부려요.”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대체 원하는 게 뭐죠?”양채은은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를 보며 그의 목적을 알아내려고 했다.“이대로 넘어가려고요?”남자의 질문에 양채은은 입술만 틀어 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온하고 행복했던 인생이 엉망진창이 되었는데 어떻게 그냥 넘어갈 수 있단 말인가.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남자는 이런 그녀의 마음을 눈치챈 듯했다.“그 아이가 없으면 양시은은 분명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될 거예요.”양채은은 고개를 떨구고 하민이를 보았다. 하민이는 아직 어렸고 몸도 약했으며 그녀는 아이의 이모였다. 그런데 어떻게 아이가 죽게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안 돼요.”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전 하민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봐야 해요. 근처에 가까운 병원 아는 곳 있어요?”“아직도 이성이 남아 있나 보네요.”남자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차갑게 말했다.“우리가 손을 잡으면 될 텐데요.”양채은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대체 뭘 원하는 거죠?”남자는 아무런 감정의 파동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각자가 원하는 바를 이루는 거죠.”양채은은 뜸을 들였다.“아직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급하지 않으니 천천히 생각해요.”남자는 그녀에게 명
더는 통증을 참을 수 없었던 양시은은 점점 숨이 거칠어졌다.“연기 그만해.”나도현의 내정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고 그녀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양시은은 한참 지나도 몸을 일으킬 수 없었고 이를 악물며 온몸으로 퍼지는 극심한 통증을 참아보려고 했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은 어느새 주르륵 흘러내리며 하얀 병원 이불에 떨어지고 있었다.“나도현, 네가 무슨 계획을 꾸미든 상관없어. 나한테는 소용이 없으니까. 난 내 아이만 무사하면 되거든.”양시은은 겨우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그럼에도 목소리엔 확고함이 묻어났다.나도현의 눈빛이 살짝 번뜩였고 차갑게 말했다.“일단 치료부터 받아.”이 말을 던진 후 그는 빠르게 병실을 나섰고 양시은은 힘없이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차는 남쪽으로 향해 달리고 있었고 양채은은 내비게이션만 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어디로 가는지 몰랐고 아주 외진 곳을 향해 달렸다. 해는 아직 저물지 않았지만 도로엔 차가 보이지 않았다.하민이는 눈을 비볐다.“이모, 우리 어디 가요?”아이의 목소리에 양채은은 정신이 들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그녀의 안색은 창백했고 마치 구천을 떠도는 귀신 같았다.“재밌는 곳으로 가는 거야.”하민이는 하품을 했다.“이모, 졸려요. 하민이 눈이 너무 무거워요.”“그래, 이따가 자게 해줄게.”양채은은 여전히 하민이에게 다정했다.하민이는 고개를 끄덕인 후 장난감을 안고 의자에 기대어 자버렸다. 그녀는 발 디딜 수 있는 곳에 차를 세운 뒤 하민이를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하민이가 자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가방에서 약병을 꺼내 몇 알 삼켰다. 온몸을 지배하던 고통이 그제야 가시는 기분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 전원을 켜고 문자를 확인하려고 했지만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아 침대에 기대어 떨어지는 노을을 보다가 잠들어 버렸다.그녀는 하민이가 웅얼대는 소리에 잠에서 깨게 되었다.“오지 마세요. 우리 이모랑 엄마한테 다가가지 마세요.”양채은은 눈을 번쩍 뜨게 되었고
어쩌면 몸에 다친 곳이 있었던 탓인지 양시은은 힘을 쓸 수 없었고 그녀의 행동은 고양이가 버둥거리듯 했다. 임지욱은 그녀를 데리고 병실로 돌아온 뒤 아주 진지한 얼굴로 꼼꼼하게 검사를 해주었다.“그동안 동창회에 한 번도 빠짐없이 참석했는데 단 한 번도 널 보지 못한 것 같아. 혹시 해외에 있었던 거야?”양시은은 고개를 저었다.“사정이 있었어요. 말해봤자 좋을 것도 없는 사정이에요.”“그래도 힘든 거나 도움이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면 도와줄 테니까.”임지욱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세월이 흘렀지만 그녀의 얼굴엔 세월의 흔적이라곤 거의 없었다. 다만 피곤함에 찌든 두 눈은 예전의 빛을 잃어버린 듯했다.양시은은 침묵하다가 한참 뒤에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선배.”임지욱은 무의식적으로 물었다.“그럼 변호사 일 하고 있는 거야?”이 질문은 그녀의 아픈 곳을 쿡 찌르게 되었다. 순간 울컥 감정이 밀려온 그녀는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상처 부위는 어때요?”그녀가 일부러 화제를 돌리고 있음을 눈치챈 임지욱은 더는 묻지 않았고 상처 부위를 더 꼼꼼하게 살펴보았다.“또 터졌네.”“어쩐지 아프더라고요.”양시은은 창백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넌 예전이랑 변한 게 하나도 없네. 여전히 힘든 거 억지로 참고 있네. 하지만 이번에 퇴원하면 절대 상처 부위에 물 닿게 하지 마. 그래야 빨리 나을 수 있으니까.”치료해주며 당부하는 임지욱의 눈빛은 아주 다정했다.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인 후 억지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 선배.”“내가 나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의사한테 작업을 거는 거지?”언제부터 문 앞에 서 있었는지 모를 나도현이 눈을 가늘게 접으며 두 사람을 경멸의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언제 온 거지?'양시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괜스레 긴장하게 되었다.임지욱은 고개를 돌리자마자 나도현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 사이엔 스파크가 튀기고 있었다. 긴 침묵 끝에 그가
양시은은 입술을 짓이겼다. 피가 많이 흘러나왔던지라 안색이 창백해져 자조적으로 웃었다.“나는 내 주제를 알아.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너한테 상처를 주겠어?”나도현은 가슴이 갑갑해졌고 커다란 돌덩이가 가슴을 누르고 있는 것처럼 불편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싸늘한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양시은, 너 정말 뻔뻔하다.”박은희는 찬 바람만 부는 두 사람 사이를 보며 속으로 기뻐했고 이내 맞장구를 쳤다.“그깟 돈 때문에 너를 버리는 여자인데 왜 미련을 가지고 있는 거니.”“그만 하세요.”나도현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다시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이 여자에게 돈을 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럴 만한 가치도 없으니까요.”그는 시선을 돌려 양시은을 차갑게 보았다. 박은희는 속으로 아주 기뻐했다.“네가 정신을 차렸다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세상엔 좋은 여자는 많고 많단다. 너랑 결혼할 여자는 더 많고.”“나가서 말하죠.”나도현은 차갑게 말을 내뱉으며 밖으로 성큼성큼 나가버렸다.양시은은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더는 참을 수 없어 침대에 털썩 엎드리게 되었다. 상처를 금방 치료했던지라 여전히 아팠고 바늘로 꿰맨 곳이 찢어질 듯 아팠다.하지만 하민이는 여전히 양채은의 손에 있었기에 마음 놓고 편히 있을 수 없었다. 결국 비틀대며 병원을 나선 뒤 양채은에게 전화를 걸어보려고 했다. 모든 일은 그녀 때문에 일어난 것이고 하민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병실 밖을 나가자마자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주었고 청량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조심해요.”“고맙습니다.”양시은은 고개도 들지 않고 상대의 손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상대는 다시 그녀를 잡았다.“양시은?”상대의 목소리에선 놀라움과 반가움이 묻어나 이어 그녀는 창백한 얼굴을 들 수밖에 없었다.그녀의 눈앞에는 잘생긴 얼굴이 있었고 품이 좀 너른 의사 가운은 유난히도 남자에게 잘 어울려 보였다.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양시은은 조금 생각이 나지 않아 뜸을 들이며 말했다.
양시은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나도현이 자신을 포기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8억보다는 아니라니...나도현이 강태경으로 살 때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돈을 아껴 쓰라는 말을 한 적 없었고 나중에 나도현이 된 후에도 손에 돈이 부족했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양시은의 말을 들으니 두 사람이 쌓았던 감정이 전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가소로웠다.“양시은, 돈이 필요하면 나한테 말해. 내 기분만 맞춰주면 8억보다 더 많은 돈을 얻을 수 있지 않나?”나도현은 상처받은 두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양시은이 한 말이 제발 전부 거짓이길 바랐다. 그녀는 나도현이 자신에게 잘해줬던 시절은 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입을 열려던 순간 밖에서 콰당 소리가 났다. 박은희가 있는 힘껏 문을 밀어 연 것이다.엄청난 기세를 내뿜던 박은희는 바로 양시은에게 시선을 돌렸다. 양시은은 그녀가 좋은 의도로 찾아온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입을 꾹 다문 채 박은희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박은희는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지 않고 문에 서 있었다. 거리가 조금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쩌렁쩌렁하게 들려왔다.“양시은 씨, 전에 8억 주면서 내가 뭐라고 했지? 내 아들 곁에서 떨어지라고 했잖아. 난 지금도 내 아들이랑 함께 있는 꼴 보고 싶지 않으니까 서로 좋게 합의 보자고. 얼마를 원하는지 말해.”박은희는 나도현이 양시은을 향한 마음을 접길 바랐다. 그래서 나도현이 보는 앞에서 양시은에게 얼마나 요구를 하는 것이냐고 물은 것이다. 양시은도 박은희가 대놓고 물어볼 줄은 몰랐다. 목구멍에 커다란 돌멩이가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고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다. 하지만 그녀에겐 다른 선택은 없었다.“그때는 8억이지만 지금은 적어도 2배 정도는 주셔야 할 거예요. 하지만 전에 거래한 것이 있으니 12억만 주시면 영원히 눈앞에서 사라져 드릴게요. 아니, 죽으라고 하셔도 돼요.”양시은은 한 글자씩 내뱉을 때 나도현을 똑바로 바라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