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리가 지유를 재촉하며 단둘이 있을 시간을 주려고 했다. 지유는 그렇게 주방으로 밀려들어 갔다.이현은 하던 일에 열중했고 모든 식자재를 깔끔하게 다듬었다.지유는 이현이 이런 일에 손을 댈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여기는 어쩐 일로 왔어요?”이현이 이렇게 말했다.“네가 내 전화를 안 받으니까, 장모님한테 어디 갔는지 물어보러 왔지.”지유는 이현과 함께 야채를 다듬었다.“전에 이런 데는 손도 안 댔잖아요.”이현이 그런 지유를 힐끔 돌아보며 장난쳤다.“장모님한테 잘 보이려고 그랬지.”“그만해요.”“전화는 왜 안 받은 거야?”이현이 다시 물었다. 지유가 멈칫하더니 대답했다.“혹시 승아 씨랑 있는 거 방해할까 봐 그랬죠.”이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지유가 물었다.“왜 웃어요?”“질투하는 거야?”지유가 부인했다.“아니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때마다 질투하면 내가 속 터져 죽지.”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지유의 얼굴에 물이 튄 걸 보고 지유가 소매로 닦으려 하자 지유의 손을 막고는 손을 말끔하게 닦고 휴지를 가져와 지유의 얼굴을 닦아주었다.지유는 이현이 자기를 살뜰하게 보살피자 그런 이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집중해서 닦아주는 보습이 참으로 부드러워 보였다. 지유는 마치 10대로 돌아간 것 같았고 이현에게서 어렴풋이 그 소년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 같았다.“조심해.”이현의 목소리는 매혹적이었다.“그냥 가만히 있어. 그러다 또 뭐 묻을라.”이현은 지유가 다듬던 야채를 가져갔다.정미리는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에 고개를 돌려 온경준에게 말했다.“여보, 빨리 와봐요. 딸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죠? 이현이 얼마나 잘해주나 봐봐요.”온경준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보여주기 위해 쇼하는 걸 수도 있잖아. 뒤에서 우리 딸 괴롭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너무 멀리 갔어요.”정미리가 말했다.“이현이가 우리 딸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결혼했겠어요?”온경준이 입술을 앙다물더니 차갑게 말했
민우는 여기서 이현을 만난 게 퍽 의외라 이렇게 물었다.“여 대표님도 계시네요?”그러자 시선이 이현에게로 쏠렸다. 다들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듯한 눈치였다.그대 지유가 입을 열었다.“오늘 대표님이 집에 놀러 왔어. 민우야, 너도 앉아.”정미리가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민우야, 지금 요리 중인데 먹고 가. 가면 안 돼.”“네, 감사합니다, 아주머니.”민우가 예의 바르게 말했다.소파는 자리가 넉넉했다. 민우는 이현의 대각선 방향에 자리를 잡았다.온경준은 옛이야기를 꺼내며 민우와 담소를 나누었다.지유는 그제야 학창 시절 민우가 멀지 않은 곳에 살았고 부모님끼리 잘 아는 사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왜 그땐 몰랐을까? 참 신기한 관계였다.이를 들은 이현의 표정이 점점 굳었고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같이 앉아 있긴 하지만 옛날얘기를 하니 마치 아웃사이더가 된 기분이었다.밥을 먹을 때도 민우는 지유를 살뜰히 챙기며 바나나 우유를 가져다주었다.“마셔.”“고마워.”지유가 대답했다.이현은 이를 지켜보더니 차갑게 물었다.“나 대표님도 지유 씨가 바나나 우유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어요?”민우가 대답했다.“전에 학교 다닐 때 마시는 거 자주 봤어요. 근데 지금도 좋아하는지는 모르겠네요.”지유는 민우가 이를 알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하지만 이현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지유가 바나나 우유를 좋아한다는 걸 아는 사람이 자기 말고도 또 있다는게 거슬렸다.식탁 끝에 놓인 컵을 보며 이현은 두 손으로 식탁을 살짝 두드렸고 그렇게 바나나 우유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면서 우유도 바닥에 흩뿌려졌다.이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민우를 쏘아보더니 이렇게 말했다.“바꿔줄게요.”지유는 그런 이현을 힐끔 쳐다보며 오늘따라 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현이 우유를 하나 더 가지고 오며 이렇게 말했다.“따듯한 거야. 날이 춥잖아.”지유는 마음이 따듯해져 얼른 우유를 가져다 손에 움켜쥐었다. 그런 지유를 보며 이현의 기
딱 잘라 말하는 모습에서 이현이 지유에 대한 소유욕이 느껴졌다.이현도 민우가 지유를 좋아해서 자꾸 지유 앞에서 알짱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기회는 없다고 당연히 알려줘야 한다.민우는 그런 이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분위기가 점점 딱딱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대치하다가 민우가 이렇게 말했다.“여 대표님, 너무 확신하는 거 아니에요?”민우는 화내지 않고 점잖게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요. 인연이 닿는다면 누구도 막을 수는 없는 거죠.”이현은 기분이 나빴지만 지유의 손을 잡는 걸 잊지 않았다.지유는 이현의 정서를 느낄 수 있었다. 민우가 오고 나서부터 이현은 이상했고 말끝마다 꼬투리를 잡고 있었다.하지만 지유는 이성적이라 기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현에게서 손을 빼며 분위기를 만회하려 했다.“다들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분위기 좋았는데 내 얘기는 왜 해서. 엄마, 얼른 아빠 모시고 들어가요. 더 마시다간 실수하겠어요.”“그래.”정미리도 상황이 더 걷잡을 수 없이 발전할까 봐 이렇게 말했다.“여보, 가서 눈 좀 붙이면서 술 깨요.”온경준은 꽤 협조적이었지만 그래도 흐뭇한 눈빛으로 민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민우야, 나는 너 좋게 보고 있어. 뒤에 한잔 거하게 하자.”“네.”민우가 공손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온경준의 말에 대답했다.온경준은 그렇게 정미리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들어갔다.이현은 얼굴을 굳힌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식탁엔 세 사람만 덩그러니 남았다. 온경준과 정미리가 가자 갑자기 주방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이에 지유가 불편해졌다.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튀기는 걸 느낄 수 있었다.민우는 이현의 눈빛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나긋한 목소리로 지유에게 말했다.“아까 별로 못 먹던데 너무 멀어서 그런 거 아니야?”민우는 지유에게 반찬을 집어줬다. 하지만 이현이 한발 빠르게 가로챘다.“괜찮아요. 지유는 이거 안 좋아해요.”민우가 시선을 돌려
그러니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녀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당연히 알게 되었다.민우는 남자의 품위를 지키며 부연 설명은 하지 않았다.“아니야, 밥 먹어.”지유는 약간 얼굴이 뜨거웠다. 그녀에게 민우는 그저 옛 동창일 뿐 친구에도 속하지 못했지만 민우는 그녀를 매우 신경 쓰고 있었다.지유는 젓가락을 들어 접시에 담은 고기반찬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비릿한 냄새에 지유는 속이 메슥거렸고 이에 밥맛이 뚝 떨어졌다.“왜 그래? 못 먹겠어?”민우가 물었다.지유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못 먹겠다는 말은 못 하고 이렇게 말했다.“요즘 식단 조절해서 그런지 위가 작아져서 좀만 먹어도 배부르네.”이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배부르면 이제 먹지 마.”지유는 이현의 불쾌함을 느끼고는 얼른 고개를 들어 이현을 힐끔 살폈다. 하지만 이현은 그저 냉정하기만 했다.정미리는 온경준을 챙기고 있었기에 지유가 민우를 배웅해 줄 수밖에 없었다.민우는 지유의 표정이 좋지 않자 이렇게 당부했다.“몸이 안 좋으면 나 데려다줄 필요 없어. 돌아가서 푹 쉬어. 다음에 또 보러 올게.”지유는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이현이 보고 있어 따로 묻지는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면 조심해서 가.”“응, 또 봐.”민우는 오래 머물지 않고 지유를 돌아보더니 자리를 떠났다.이현이 외투를 가지고 문 쪽으로 걸어오더니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나민우가 왜 너를 그렇게 잘 알아? 전에 사이가 그렇게 좋았어?”“나도 몰라요.”이현이 캐묻기 시작했다.“보면 몰라? 나민우가 너 엄청 신경 쓰는 거?”지유가 고개를 들어 이현을 바라봤다.“없는 얘기 지어내지 마요. 민우랑 나 그냥 친구예요. 오랫동안 연락 한번 한 적 없어요. 그런데 나한테 신경 쓸 리가 있나?”만난 게 고작 몇 번이나 된다고, 이런 생각은 무리였다.“앞으로 연락하지 마.”지유는 그러기 싫었다.“왜 연락하면 안 되는데요? 친구인데.”“내가 싫어.”“이현 씨가 싫어하는 사람이 좀
지유는 몸이 너무 안 좋아 창백해진 얼굴로 벽을 붙잡고 쉴 새 없이 밖으로 토해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현은 이를 보더니 얼른 걱정에 찬 눈빛으로 지유를 부축했다.“왜 그래? 많이 안 좋아?”지유는 이현의 손을 밀어내더니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아까는 이혼하자고 그러더니, 지금은 또 왜 이러는 거예요?”이현은 지유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는 상태가 진짜 안 좋다는 걸 눈치채고 부드럽게 말했다.“먼저 집에 가자. 이 일은 나중에 얘기해.”이현은 지유의 허리를 잡더니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지유는 거절하지 않았다. 문 앞에서 이현과 다퉜다가 부모님이 보기라도 하면 걱정할 것이다.결혼이 불행하다 해도 부모님을 걱정하게 해서는 안 된다.차 앞으로 걸어간 이현은 지유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더니 품에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지유야, 내가 너를 어떡하면 좋을까?”지유는 이현의 어깨에 기댔다. 코가 찡했다. 언제부턴가 지유는 건드리면 바로 깨질 만큼 나약했다.아마 이현의 조금 달라진 모습에 지유는 없었던 엄살이 생겨나는 것 같았다. 원하는 게 많아지면 전처럼 고분고분할 수가 없다.“이현 씨.”지유는 이현의 품에 기대 말을 이어 나갔다.“나를 위해 해준 모든 것에 고마워요.”이현이 지유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내가 뭘 했다고 고맙다는 거야?”지유가 말했다.“우리 집에 와줘서 고마워요. 부모님이 나 잘 지내는 거 알면 더는 걱정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전에 20억을 써서 우리 집 구해준 것도 고맙고요. 이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을게요.”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또, 나를 살려줘서 고마워요.”이현의 이 말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조금 전까지 기분이 안 좋았지만 지유가 이렇게 다독이자 이현의 화도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 버렸다.이현은 지유를 잃을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지유를 꼭 끌어안고는 이렇게 말했다.“나 네 남편이야. 다 내가 해야 되는 일이야.”지유가 입꼬리를 당기더니
“너 잘 왔다. 너한테 줄 것도 있어.”여진숙이 도우미에게 말했다.“내가 지유 주려고 끓인 거 좀 올려와요.”지유는 지금 이 상황이 약간 신기했다. 온 정성을 승아에게 쏟아도 모자란 여진숙이 왜 갑자기 이렇게 나오는 걸까?여진숙의 눈길이 지유의 배로 향했다.“이 약, 내가 자주 다니는 한의사가 지어준 거야. 마시면 바로 애가 들어선다는데 마셔. 애가 들어설지도 모르니.”도우미가 약을 올려왔다. 냄새를 맡은 순간 속이 메슥거렸다. 지유는 온몸으로 거부하며 도우미에게 치우라고 했다.“가져가세요. 못 마셔요.”지유가 거절하자 여진숙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너 어떻게 된 거야? 내가 힘들게 구해온 약인데 왜 안 마셔? 능력이 없으면 약이라도 먹어야지. 얼른 마셔.”도우미가 약을 다시 지유 앞에 대령했다.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러 지유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안 되겠어요...”지유는 바로 화장실로 향했다.“아니 얘가...”여진숙은 화장실로 달려가는 지유를 보며 성질을 냈다.“쓸모없긴. 뭐가 그렇게 역겹다고. 마시기 싫어서 일부러 저러는 거 아니야?”지유는 위가 너무 더부룩했지만 한참을 토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하여 찬물로 얼굴을 씻고 나왔다.여진숙은 더는 약을 먹으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승아를 만나러 가기 급급했던 여진숙은 가져갈 물건이 많자 지유에게 말했다.“너 오늘 회사 나가지 마. 나 승아 보러 가는 길에 손 좀 보태. 병원에 입원한 거 너도 알고 있지? 아마 이현이는 이미 보러 갔다 왔을 거야.”이 말을 들은 지유가 입을 앙다물며 말했다.“저 출근 지각할 거 같아요.”여진숙이 지유를 보며 입꼬리를 당겼다.“회사로 나가는 것도 현이 위해서 그러는 거 아니야? 병원 가면 현이 마주칠 수도 있어. 그럼 너는 땡큐 아니야?”맞는 말이긴 했다. 지유는 이현의 아내이자 이현의 수행 비서였다. 하여 여진숙과의 동행을 선택했다.여진숙은 크고 작은 보따리를 안고 집을 나섰다. 병문안을 간다기보다는 친척 방문이 더 적합해 보였다.
승아의 말에 지유가 멈칫했다.이용해? 이용할 게 뭐가 있다고? 이현처럼 총명한 사람이 이용할 사람이 없을까?승아는 지유가 멈칫하자 궁금해하는 줄 알고 우쭐거리며 말했다.“어떻게 이용하는지 궁금하지 않아요?”이용이라고 하기엔 너무 현실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지유는 승아가 온갖 방법으로 이간질하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아니나 다를까 지유가 고개를 돌려보니 승아가 희망에 찬 눈빛으로 지유가 물어봐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지유는 승아의 기대에 부응할 생각이 없었기에 하고 싶은 말을 주저 없이 내뱉었다.“내가 궁금해하는 게 아니라 승아 씨가 말해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에요?”=승아의 얼굴이 굳었다. 지유가 자기 뜻대로 나와주지 않자 약이 잔뜩 오른 것 같았다.지유가 그런 승아를 똑바로 쳐다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노승아 씨 목적이라면 내가 그이와 이혼하는 거겠죠. 그러면 여씨 집안으로 시집갈 수 있으니까. 근데 지금은 뭔가 불안한가 보죠?”승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그래도 바락바락 악을 썼다.“언젠간 이혼할 텐데 내가 왜 불안해요? 전혀요.”짜증 섞인 승아의 말투에 지유가 웃었다.“불안하지 않은 사람이 나를 보자마자 이혼 얘기나 꺼내고. 우리 그이보다 더 급해하는 것 같아요. 이현 씨가 나랑 이혼하기 싫어하니까 조급해졌나 보죠? 이현 씨는 설득이 안 되니까 나를 어떻게 해보려고?”“온지유 씨, 너무 잘난 척 마요. 다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니까.”승아는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나를 위해서 하는 소리다?”지유는 세상 우스운 소리를 들었다는 듯 비아냥거렸다.“핑계를 찾을 거면 설득력 있는 걸 찾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노승아 씨가 나를 위한다? 무슨 꿍꿍이인지 아는데 틀렸어요. 그렇게 우리가 이혼하길 바란다면 나를 찾을 게 아니라 그이를 찾아요. 이혼하나 안 하나.”고작 몇 마디에 승아는 약이 바짝 올라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시울을 붉혔다.눈 깜짝할 사이에 승아가 사라지자 여진숙이 그녀를 찾으러 왔다. 마침 그 뒤
의사와 간호사가 안으로 들어와 승아를 들것에 들어갔다.여진숙은 아직 지유에게 따지고 싶은 게 많았지만 일단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승아의 상처가 더 걱정되었기 때문이다.승아가 들것에 올려지는 순간부터 여진숙은 곁을 떠나지 않았고 응급실 입구까지 따라가 두 손을 꼭 모은 채 기도했다.의사는 이현과 승아의 상태에 관해 토론하느라 지유를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옆에 서 있는 지유는 그들이 승아를 위해 분주히 돌아치는 걸 보고 자신이 아웃사이더 같다고 생각했다.승아가 응급실에서 나오자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여진숙이 그녀를 병실로 옮겨갔다.이현은 따라 들어가지 않고 뒤에 서 있는 지유에게 이렇게 말했다.“승아 지금 자극받으면 안 돼. 일단 단둘이 만나는 건 삼가해줘.”지유는 목구멍이 메어왔다. 지금 탓하는 건가?왜 승아를 화나게 했는지 따지면서 앞으로 승아를 괴롭히지 말라는 말처럼 들렸다.이현은 지유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지유가 오해했음을 눈치채고는 지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왜? 기분 상했어?”“현아, 빨리 들어와!”여진숙이 눈물을 훔치며 병실 문을 열고 소리쳤다.“승아가 너 찾아. 네가 없는데 승아가 어떻게 낫겠어.”지유는 급해서 눈물을 흘리는 여진숙을 보며 지유에게 말했다.“일단 밖에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 갔다 금방 올게.”지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승아와 그녀 사이에서 버려지는 걸 늘 그녀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밖에 선 지유는 마치 아무 관련 없는 방관자 같았다.그렇게 옆에서 승아가 이현의 품에 안겨 힘없이 우는 모습을 지켜봤고, 이현이 그런 승아를 밀어내지 않고 차분하게 승아의 등을 토닥이는 걸 지켜봤다.지유는 허리가 시큰거렸다. 둘이 꽁냥대는 모습을 보기가 싫어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 조용히 이현이 나오기를 기다렸다.얼마나 지났을까, 온 세상이 멈춰버린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혀 있는데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지유야.”여희영이 다급하게 뛰어왔다. 지유가 멀쩡하게 벤치에 앉아 있자
은서우는 인명진이 그런 눈빛으로 누군가를 바라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확실하게 티가 난건 아니지만 자세하게 보면 알아차릴 수 있었다.더욱이 은서우는 인명진 옆에서 한동안 머물렀던 사람이라 미묘한 그의 표정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죄송해요. 원장님, 저 때문에 난처해진 거 아니에요?”고개를 들고 은서우를 바라보던 인명진은 그녀의 눈빛에 하고 싶었던 말을 또다시 목구멍으로 삼킨 채 다른 말을 꺼냈다.“앞으로 사석에서는 원장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그러면 뭐라고 부를까요? 인 선생님이라고 부를까요?”“이름 불러요.”인명진은 나이프와 포크로 접시에 놓인 스테이크를 자르며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도 은서우는 기분이 좋은 듯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그러면 앞으로 병원에서는 원장님이라고 부르고 사석에서는 인명진 씨라고 부를게요.”은서우가 부르는 이름에 인명진은 잠시 흠칫했지만 이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요.”은서우는 식사 자리가 너무 좋았다. 돈에 대한 걱정과 집사람들 때문에 받았던 스트레스들이 전부 사라질 만큼 행복한 시간이었다.병원에서 인명진이 준 차트를 받아쥔 은서우는 뿌듯한 마음에 의기양양해지기도 했다.하지만 병원 내부에서는 점점 귀에 거슬리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단순히 은서우가 인명진이 꽂은 낙하산이고 공평하지 못하다는 말이 퍼지고 있을 때는 인명진이 신경 쓰지 말라는 말에 은서우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하지만 소문은 점점 더 허황한 쪽으로 퍼졌고 심지어 근무시간에 수군거리는 사람도 있었다.“은서우 같은 배경이 어떻게 우리 병원에 들어온 거예요? 여기가 무슨 개인 진료소도 아니고 시에서도 권위 있는 병원이잖아요.”“내가 뭐라 그랬어요. 무조건 낙하산이라니까요? 원장님과 엄청 가깝게 지내잖아요. 두 사람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지도 모르죠.”“그럼 설마...”은서우는 차트를 쥐고 있던 손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수군거리던 사람들은 은서우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은서우는 인명진에게 메뉴판을 건네며 말했다.“봐봐요. 못 드시는 음식 있어요?”인명진은 간결하게 대답했다.“없어요.”은서우는 다시 메뉴판을 받아 들고 현재 자신의 경제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요리를 몇 개 주문했다.“이 정도면 될까요?”인명진은 은서우를 힐끗 쳐다봤다.분명히 덤덤한 눈빛이었지만 은서우는 쪽팔려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밥을 사주겠다고 큰소리쳐놓고 겨우 이 정도밖에 못 산다는 게 창피했다.‘분명히 날, 별로라고 생각하시겠지.’은서우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인명진이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좋아요. 그리고 내 생각만 하지 말고 은서우 씨가 좋아하는 걸 주문해요.”인명진도 은서우가 자신의 입맛을 고려해 주문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속마음을 들킨 은서우는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음식이 올라왔고 은서우는 익숙하게 젓가락을 가져왔다.“이 식당은 젓가락을 직접 가져와야 해요. 여기요. 전부 소독한 거예요.”은서우의 말에 인명진은 기분 좋게 젓가락을 받았다. 의사들은 아무래도 어느 정도 결벽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인명진도 예외는 아니었다.그는 물끄러미 은서우를 보며 말했다.“이런 것까지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은서우는 인명진의 눈길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저도 의사잖아요. 직업병인가 봐요.”은서우의 말에 인명진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무심코 주변을 훑어보던 인명진의 눈길은 갑자기 누군가에게 멈췄고 은서우는 자신이 제일 존경하던 원장의 표정이 갑자기 바뀌는 걸 즉시 알아차렸다.인명진은 누군가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온지유?”자신의 이름에 여자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여자의 얼굴을 올려다본 은서우의 눈에는 놀라움이 스쳤다.온지유는 인명진을 발견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윤별의 손을 잡고 다가왔다.“명진 씨가 여기 왜 있어요? 병원이 바쁜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요?”말을 마친 온지유의 눈길은 은서우에게 멈췄고 그녀는 잠깐 멈칫하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당장 카드에 사천만 원 보내. 휠체어를 좋은 거로 바꿔야겠어.”은서우는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타고 있는 휠체어도 산 지 얼마 안 됐잖아. 그건 그냥 핑계고, 또 다른데 탕진하고 싶은 거겠지.”속셈이 들킨 소태훈은 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헛소리 그만하고, 줄 거야 말 거야? 사천만 원만 보내주면 한동안 귀찮게 안 할 테니까 빨리 보내!”소태훈의 말에 지난 과거가 더욱 후회스럽고 원망스러워진 은서우는 휴대전화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은서우는 그날 밖에 나가지 말걸, 그 차를 타지 말걸, 수없이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랬다면 죽는 사람이 자신이었을 거고, 그랬다면 최소한 이렇게 소씨 가문 사람들한테 시달리면서 살 필요도 없었겠지.소씨 가문 사람들은 흡혈 충처럼 그녀의 골수까지 다 빨아들일 기세였다.은서우는 무기력해져 맥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지난번에도 말했잖아. 나 돈 없어. 몇 번을 물어봐도 내 대답은 똑같아. 인터넷에 올리고 싶으면 올려.”은서우는 지금까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충분히 했으니 미안해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소태훈의 협박도 오로지 그가 꼬투리를 잡은 거였다.말을 마친 은서우가 전화를 끊자, 소태훈은 끈질기게 다시 걸어왔고 지긋지긋해진 그녀는 아예 번호를 차단해 버렸다.은서우는 더 이상 소씨 가문 사람과 연계하고 싶지 않았다.몇 분 전의 기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생기를 잃은 채 은서우는 옷으로 뒤덮인 소파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시간이 얼마나 지났을지 인명진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준비가 다 됐어요? 지금 데리러 갈게요.”은서우는 그제야 몸을 뒤척이며 일어나 앉았다.“아직이요. 조금만 기다려줘요.”인명진의 전화 한 통이 그녀를 다시 숨을 쉬게 한 것 같았다.즉시 옷을 차려입고 계단을 뛰어 내려간 은서우가 주위를 훑어보자 멀지 않은 잔디밭에 아우디 한대가 보였다.차 안에서 휴대전화를 보고 있던 인명진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고 그의 눈길은 은서우가 입고 있는 베이지색
구태원은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상이 밝혀졌다.여자아이의 죽음은 우연이 아니라 구태원이 이식할 간을 몰래 바꿔치기했기 때문에 거부반응이 생겼던 거였다.조사가 끝난 뒤 병원은 구태원의 착오로 인해 많은 돈을 배상했지만, 여전히 가족들의 아픈 마음은 보상해 줄 수 없었다. 결국 돈이 죽은 사람을 대신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은서우도 슬퍼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혐의를 벗은 인명진은 병원의 최신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시키겠다는 은서우와의 약속을 지켜주었다.나이도 어리고 실력도 인증되지 않은 은서우를 어려운 프로젝트에 참여시킨대고 생각했던 병원 사람들은 인명진의 결정에 불복했다.하지만 인명진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제 조수로 선택한 사람이에요.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책임지죠.”인명진이 자기 조수로 선택한 사람이라 굳이 다른 사람의 동의는 필요 없었다.그는 사람들의 불복에도 은서우를 연구에 참여시켰다.은서우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뒤 많은 전문 지식을 배웠고 실력도 나날이 발전했다. 그녀는 인명진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원장님, 시간 괜찮으세요?”은서우는 큰 용기를 내고 인명진의 사무실에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인명진은 얇은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들어와요.”은서우가 들어오자, 인명진은 그녀를 쭉 훑어보았다. 은서우는 며칠 전과는 달리 자신감이 생긴 것 같았다.예전에 그녀는 업무 능력이 누구보다 뛰어났지만, 항상 자신을 보잘것없는 존재로 생각했고 자신감이 부족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눈빛도 일거수일투족도 지금껏 본 적이 없는 자신감 넘치는 여유가 느껴졌다.인명진은 뿌듯한 눈빛으로 은서우를 바라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무슨 일이에요?”은서우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원장님한테 신세 진 게 너무 많아서 보답으로 음식이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혹시 시간 괜찮으실까요?”인명진이 병원에 온 뒤로 많은 여자들이 은근히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고 식사 약속을 건네기도 했지만, 그는 단 한
깜짝 놀란 은서우는 인명진의 손을 잡고 여기저기 살피며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고 말했다.“손은 왜 이래요? 왜 방금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던 거예요?”은서우의 손을 피하며 상처를 숨기는 인명진의 차가운 눈매는 가로등 불빛을 받아 더욱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괜찮아요. 큰 상처도 아니고 놔두면 괜찮아져요.”“안 돼요.”은서우는 다시 인명진의 손을 끌어당겨 물티슈로 피를 닦은 뒤 상처에 밴드를 붙였다.자신의 상처를 치료하는 은서우를 조용히 지켜보던 인명진의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그는 차갑게만 느껴지던 가로등 불빛이 조금 따뜻하게 느껴졌고 복잡하고 예민했던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다음 날, 두 사람은 구태원을 찾아갔다.구태원은 외과에서 권위 있는 의사였는데, 원장 선거에서 인명진 보다 표수가 조금 모자라 원장에서 밀려났고 어쩔 수 없이 계속 외과 의사로 일하고 있었다.구태원은 모든 사실을 부정했다.“나 때문이라는 증거 있어요? 장기이식이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건 정상적인 현상이잖아요. 누굴 탓하겠어요?”“하지만, 거부반응이 있다고 무조건 죽는 건 아니잖아요. 원장님이 안 계셨으면 구 선생님이 수술했어도 되고 아니면 원장님한테 연락해도 되잖아요.”구태원은 얼굴빛이 싹 변하더니 가볍게 한마디 했다.“깜빡했어요.”어이없는 구태원의 대답에 멍하니 있던 은서우는 이내 분노가 치밀어 올라 이성을 잃었다.‘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자기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는데 사과는커녕 잘못을 인정도 안 해? 그리고 그걸 전부 원장님한테 뒤집어씌운 거야?”인명진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은서우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는 듣기 거북한 욕을 듣는 것도 괜찮았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평가하든 다 상관없었지만, 환자의 죽음만은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었다.인명진은 만약 그 당시 자신이 있었다면 그 환자는 분명 살 수 있었을 거로 생각했다.짝!이성을 잃은 은서우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채 화가
보통 사람들보다 피부가 하얗던 인명진의 등은 여드름 하나 없이 깔끔하고 매끈해 상처가 더욱 두드러지게 보였다.하지만 그런 건 신경을 쓸 여유조차 없었던 은서우는 약을 바르는 데에만 신경 썼다.반대로 인명진은 은서우의 숨결과 그녀의 손끝에 온 신경이 쏠려있었다.자신의 등이 이렇게 예민한지 이제야 알게 된 인명진은 늦은 후회를 하며 주먹을 꽉 쥐고 참고 있었다.갑자기 은서우는 상처를 입으로 호호 불어주며 말했다.“매우 아프죠? 좀 불어줄게요.”인명진은 순간 움찔하더니 즉시 셔츠를 잡아 올려 입고는 흰 가운을 걸치며 말했다.“이 정도면 됐어요. 고마워요.”텅 빈 사무실을 둘러보던 은서우는 그제야 단둘이 한 방에 있다는 걸 인식했다.누가 봐도 애매한 분위기였고,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떠오른 은서우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말했다.“원장님,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인명진은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 은서우의 말을 잘랐다. 그녀의 말을 듣기 싫어서가 아니라 자신조차 모르겠는 기분이 이상해서였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그만 가죠.”경찰서로 간 두 사람은 진술서를 작성했고 경찰의 협조하게 합의하려고 했지만, 상대방은 원만한 합의를 원하지 않았다.심지어 그 사람들은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욕설을 퍼부었다.경찰이 책상을 두드리며 말렸지만 전혀 소용없었고 그 남자는 오히려 인명진을 가리키며 분노했다.“저 새끼가 내 딸을 죽였다고!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지!”경찰은 막무가내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인상만 찌푸렸다. 은서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했다.“그렇다고 해도 법으로 해결해야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폭력을 쓰는 건 아니죠. 그리고 따지고 보면 이 일은 원장님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잖아요.”은서우의 말에 가족들은 오히려 더 크게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고 그녀가 심호흡하고 다시 사건의 전말을 설명하려는 찰나 인명진이 입을 열었다.“제가 설명할게요.”인명진은 짧고 명확하게 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했
두 남자가 다시 손을 대려고 움찔하자, 크게 다치는 것보다는 쪽팔리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한 은서우는 당장이라도 인명진을 끌고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방금 인명진이 등을 맞았을 때 은서우는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 간담이 서늘해 났다. 인명진의 등에 큰 멍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지만 지금은 옷을 걷어 올려 상처를 살필 여유가 없었다.더 이상 이 자리에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은서우는 즉시 인명진의 손을 잡았다.그의 큰 손바닥이 그녀의 손을 감쌌지만, 은서우는 그런 걸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원장님, 가시죠. 여기는 경찰들이 와서 처리할 거예요.”잡은 손을 은서우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인명진은 반대였다.자기 손을 꽉 잡은 은서우의 손은 작고 따뜻했다. 인명진은 그녀의 손이 이렇게 작다는 걸 미처 몰랐고 조금만 더 꽉 잡으면 그녀의 손 전체를 감쌀 수 있을 것 같았다.인명진은 왠지 가슴이 뜨거워져 손을 풀며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조급해진 은서우가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경찰들이 도착했다.이곳을 둘러싸고 있는 경찰들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은서우가 눈을 내리깔자, 한쪽 편에 떨어져 있는 인명진의 휴대전화가 보였다.상황을 보아하니 인명진은 이미 저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신고를 한 뒤 휴대전화를 한편에 급하게 넣어놓은 거였다.어쩐지 침착하게 대처하고 있더라니, 경찰들이 이렇게 일찍 도착할 수 있었던 것도 인명진의 신고 때문이었다.경찰들은 빠른 속도로 소란을 피우고 있던 가족들을 제압했고 인명진과 은서우는 경찰서로 가 진술서를 작성해야 했다.일단 상처 치료부터 하기로 했던 인명진은 혼자 어떻게든 등 뒤에 약을 바르고 싶었지만, 눈이 뒤통수에 달린 것도 아니고 아무래도 혼자는 어려웠다.한참을 낑낑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인명진은 매서운 눈빛으로 문 쪽을 바라보며 어림짐작으로 말했다.“은서우 씨?”문밖에서는 쟁쟁한 은서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원장님, 저예요. 상처가 등에 있어서 혼자 치료
젊은 남자가 먼저 달려들었다.인명진이 넋을 놓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한 기습을 한 것이다.몽둥이가 그대로 등에 내리꽂혔다.무겁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은서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당황한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인명진을 부축했다.“원장님, 괜찮으세요? 왜 저 대신 맞으신 거예요!”몸을 곧게 세운 인명진은 그 와중에도 덤덤히 답했다.“은 선생님 대신 맞은 게 아니라 원래부터 저를 향해 오던 거였어요.”고개를 돌려 자신의 등을 확인한 인명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충격이 상당했지만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과거 법로의 약인 이었던 그는 이런 고통에 익숙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그는 천천히 자신을 공격한 남자를 바라보며 차갑고 서늘한 시선으로 상대를 짓눌렀다.젊은 남자는 그 눈빛에 움찔했지만 순간뿐이었다.“다 너 같은 돌팔이 의사 때문에 내 동생이 죽었어! 겨우 열아홉 살이었어! 네가 아니었으면, 너만 아니었다면 내 동생은 지금도 멀쩡했을 거라고! 돌팔이 의사! 더러운 병원도 다 망해버려야 해!”은서우는 그 말에 화가 치밀어 올라 나섰다.“당신은 어떻게 우리 병원의 잘못이라고 확신해요? 사람을 살리려고 한 게 잘못인가요?”남자는 주먹을 꽉 쥐고 은서우를 노려보았고 그의 어머니가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당신들이 아니면 또 누가 있지? 간이식이 필요하다고 해서 보름 후로 수술을 잡았어. 하지만 병세가 악화해서 수술을 앞당겼지.”인명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여자의 말을 들었다.은서우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인명진을 바라봤다.그녀는 인명진이 그런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분명 뭔가 오해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우린 친척들에게 돈을 빌리고 또 빌려서 수술비를 마련해서 딸을 수술실로 보냈어.”은서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수술실에 들어갔다면 잘 된 거 아닌가요? 병세가 악화했다면 이식을 빨리 진행하는 게 맞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환자는 죽었을 거예요.”눈이 붉
“모르겠어요. 본인 말로는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면서 급히 떠났어요.”은서우는 무거운 마음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만 같았다.‘세상에 이렇게 우연이 반복될 수 있나?’오히려 그 인턴은 들통날 걸 알고 단서를 끊어 그들이 더는 추궁할 수 없도록 미리 도망친 것처럼 보였다.은서우의 무거운 분위기와 달리 인명진은 담담했다. 그는 애초에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고마워요. 수고했어요.”그는 곧 은서우를 잠시 바라보고는 뒤돌았고 은서우도 그를 따라 몸을 돌렸다.그때 간호사가 참지 못하고 은서우를 불러 세웠다.“은 선생님, 언제부터 원장님이랑 그렇게 친했어요? 그리고 요즘 다들 원장님이 선생님을 차기 부원장으로 키우려고 한다던데 진짜예요?”은서우는 순간 당황했다.인명진이 그런 말을 한 적은 있지만 아직 확정된 것도 없는 일을 떠벌일 순 없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간호사가 다른 질문을 이을까 봐 급히 자리를 떠났다.복도로 나왔을 때 인명진은 하얀 가운을 입고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주위엔 많은 사람들이 오갔지만 아무도 감히 그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인명진은 마치 그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은서우의 심장이 천천히 뛰었다.조용히 그에게 다가갔지만 차마 방해할 수 없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인명진이 먼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며 차분하게 말했다.“나중에 다시 확인해 보면 돼요. 이름이랑 신분이 가짜일 리는 없잖아요.”그가 인턴을 두고 한 말이라는 걸 깨달은 은서우는 잠시 멍하니 있다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갑자기 뒤에서 거친 외침이 들려왔다.“엉터리 의사, 거기 서!”깜짝 놀란 은서우가 뒤를 돌아보니 며칠 전 병원에서 소란을 피운 환자의 가족들이었다.한 쌍의 부부와 젊은 남성이 함께였는데 그들의 손에는 벽돌이나 나무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은서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