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저의 말에 안에 있던 두 사람이 놀랐다.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 이현은 지유가 앞에 서 있는 걸 보고 얼른 승아를 놓아주었다.훔쳐 듣다가 들킨 지유는 어찌할 바를 몰라 황급히 머리를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이현은 그런 지유를 보며 얼른 따라나섰다.“온지유!”지유는 이현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몰라 얼른 걸음을 더 재촉했다. 하지만 이내 이현이 지유를 따라잡았다.이현을 마주한 지유의 눈시울은 이미 빨개졌고 멍한 표정으로 이현을 바라봤다.이현이 지유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지유가 고개를 돌렸다.“가서 승아 씨 챙겨줘요. 나는 상관하지 말고.”“네가 왜 병원에 있어?”이현은 지유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혹시 어디 아파? 알레르기가 더 심해진 거야?”이현은 지유의 소매를 걷으며 지유의 팔을 확인하려 했지만 마음이 더 씁쓸해진 지유는 이를 거부하듯 팔을 거두며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나 괜찮아요.”지유가 병실을 힐끔 쳐다보더니 물었다.“어제 말했던 중요한 일이 노승아 씨죠?”이현에게 승아는 늘 일 순위였다. 승아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 이현은 늘 망설임 없이 바로 튀어왔다.“승아 지금 성대도 다치고 왼쪽 귀는 청력을 잃었어. 계속 나아지지 않는다면 커리어는 여기서 끝이야.”이현의 미간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승아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 줄은 몰랐다. 커리어가 망가진다면 치명적인 타격일 수밖에 없다. 극적인 선택을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지유는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 기분이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다.“알겠어요.”승아가 이현의 뒤를 쫓아와 문 앞에 서 있었다. 매니저가 뒤에서 링거병을 들어줬다. 승아는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이현을 바라보며 그를 불렀다.“오빠.”이현은 그런 승아를 힐끔 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리고는 지유에게 말했다.“이 일만 처리하면 바로 집에 갈게. 집에서 기다려. 알았지?”이 말을 뒤로 이현은 다시 병실로 돌아갔다. 지유는 집에서 그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그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지?승아는 충격에 울음을 그치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표정으로 이현을 쳐다봤다. 그녀가 알던 이현과는 완전 다른 사람이었다.그녀를 끔찍이 아끼던 이현이었기에 절대 그녀가 서럽게 울게 놓아두지는 않았다.지금의 이현은 아예 다른 사람이었다. 그녀를 아껴주기는커녕 제일 기본적인 다독임도 하기 싫어했다. 눈앞의 이 사람이 이현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분명 다른 고충이 있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다.승아는 이현의 손을 놓아주며 억지로 웃어 보이려 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정리라니, 어떻게 정리할 건데요?”이현이 대답했다.“귀 치료되면.”“싫어요. 그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지!”승아가 점점 흥분하며 옆에 놓인 과일칼로 손목을 그으려 했다.매니저가 이를 보고는 얼른 다가가 말렸다.“언니, 이러지 마요...”승아가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오빠, 지금까지 내가 한 모든 일은 다 오빠를 위한 것이었어요. 목숨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오빠를 사랑한다고요. 오빠가 나한테 빚진 건 영원히 계산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정리란 더더욱 있을 수 없고요!”곧이어 의사가 도착했다. 승아의 정서가 불안정해 보이자 의사가 이현에게 말했다.“대표님, 지금 환자분의 정서가 안정적이지 않으니 더 자극하지 않는 게 좋아요.”이현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승아를 보고 주먹을 살짝 움켜쥐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진정제 하나 놓아주세요.”의사는 이현의 말을 듣고 승아에게 주사를 놓으려고 했다. 승아가 이를 강하게 거부했고 간호사 몇이 붙어서야 겨우 말릴 수 있었다.승아는 이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눈빛에는 이현에 대한 흠모와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오빠가 나한테 이렇게 독할 리 없어요! 오빠가 나한테 그랬잖아요, 나 영원히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 지켜야죠...”그러다 승아는 조용히 침대에 누운 채 힘없이 팔을 아래로 드리우고 눈만 깜빡거렸다.“잘 챙겨요.”이현은 매니저에게 이렇게 당부하더니 밖으로 나갔
졸업하고 나서 일에 열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정도 생겼다.부모님은 지유가 귀찮아할까 봐 거의 전화를 하지 않았고 지유도 다른 일로 바쁘다 보니 부모님을 소홀히 하게 되었다.집에 가니 아버지 온경준이 문을 열었다. 안경을 낀 온경준은 손에 신문을 들고 있었다. 지유를 보자 무뚝뚝한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내 딸 왔어? 들어와.”지유가 안으로 들어가자 온경준이 슬리퍼를 꺼내주었다.“네가 집에 와서 밥 먹는다니까 엄마가 맛있는 거 만들고 있어. 오늘 너 먹을 복 터졌어.”“정말요? 엄마가 만든 갈비찜 먹고 싶었는데.”지유가 온경준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아빠가 직접 낚은 활어회도 먹고 싶어요.”온경준이 웃으며 말했다.“어이구, 먹고 싶은 건 많아서.”지유가 외투를 벗으며 소매를 걷더니 이렇게 말했다.“주방 가서 엄마 좀 도와드려야겠어요...”“됐어. 그럴 필요 없어.”온경준이 지유를 말리려고 했다. 하지만 주방에 들어가기도 전에 정미리 옆에 큰 키를 가진 누군가가 같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비싼 슈트를 벗어둔 채 정미리 옆에 서서 싸구려 야채를 씻고 있었다.지유가 온 걸 알고 이현이 고개를 돌리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왔어?”“딸 왔어?”소리를 들은 정미리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정미리는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말했다.“아이고, 우리 딸, 엄마 좀 봐봐. 말랐나 보게.”정미리는 밖으로 걸어 나오며 지유의 손을 잡고 한 바퀴 빙 돌렸다.“마르진 않았네. 이현이가 잘 보살펴줘서 그런가?”지유는 이현을 힐끔 쳐다보며 의외라는 듯 물었다.“엄마, 그이가 왜 여기 있어요?”정미리가 말했다.“딸, 네가 이현이한테 들러보라고 한 거 아니야? 이현이 효자야. 너보다 빨리 도착해서 요리도 도와주고. 사업하는 사람이 주방에 들어오는 걸 꺼려하지 않다니, 너는 복이 많은 아이야.”정미리의 얼굴에 웃음이 만개했다. 딸 지유만 행복하다면 정미리는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했다.이현은 야채를 다 씻고 나서 이렇게 대꾸했다.“장모님,
정미리가 지유를 재촉하며 단둘이 있을 시간을 주려고 했다. 지유는 그렇게 주방으로 밀려들어 갔다.이현은 하던 일에 열중했고 모든 식자재를 깔끔하게 다듬었다.지유는 이현이 이런 일에 손을 댈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여기는 어쩐 일로 왔어요?”이현이 이렇게 말했다.“네가 내 전화를 안 받으니까, 장모님한테 어디 갔는지 물어보러 왔지.”지유는 이현과 함께 야채를 다듬었다.“전에 이런 데는 손도 안 댔잖아요.”이현이 그런 지유를 힐끔 돌아보며 장난쳤다.“장모님한테 잘 보이려고 그랬지.”“그만해요.”“전화는 왜 안 받은 거야?”이현이 다시 물었다. 지유가 멈칫하더니 대답했다.“혹시 승아 씨랑 있는 거 방해할까 봐 그랬죠.”이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지유가 물었다.“왜 웃어요?”“질투하는 거야?”지유가 부인했다.“아니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때마다 질투하면 내가 속 터져 죽지.”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지유의 얼굴에 물이 튄 걸 보고 지유가 소매로 닦으려 하자 지유의 손을 막고는 손을 말끔하게 닦고 휴지를 가져와 지유의 얼굴을 닦아주었다.지유는 이현이 자기를 살뜰하게 보살피자 그런 이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집중해서 닦아주는 보습이 참으로 부드러워 보였다. 지유는 마치 10대로 돌아간 것 같았고 이현에게서 어렴풋이 그 소년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 같았다.“조심해.”이현의 목소리는 매혹적이었다.“그냥 가만히 있어. 그러다 또 뭐 묻을라.”이현은 지유가 다듬던 야채를 가져갔다.정미리는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에 고개를 돌려 온경준에게 말했다.“여보, 빨리 와봐요. 딸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죠? 이현이 얼마나 잘해주나 봐봐요.”온경준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보여주기 위해 쇼하는 걸 수도 있잖아. 뒤에서 우리 딸 괴롭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너무 멀리 갔어요.”정미리가 말했다.“이현이가 우리 딸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결혼했겠어요?”온경준이 입술을 앙다물더니 차갑게 말했
민우는 여기서 이현을 만난 게 퍽 의외라 이렇게 물었다.“여 대표님도 계시네요?”그러자 시선이 이현에게로 쏠렸다. 다들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듯한 눈치였다.그대 지유가 입을 열었다.“오늘 대표님이 집에 놀러 왔어. 민우야, 너도 앉아.”정미리가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민우야, 지금 요리 중인데 먹고 가. 가면 안 돼.”“네, 감사합니다, 아주머니.”민우가 예의 바르게 말했다.소파는 자리가 넉넉했다. 민우는 이현의 대각선 방향에 자리를 잡았다.온경준은 옛이야기를 꺼내며 민우와 담소를 나누었다.지유는 그제야 학창 시절 민우가 멀지 않은 곳에 살았고 부모님끼리 잘 아는 사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왜 그땐 몰랐을까? 참 신기한 관계였다.이를 들은 이현의 표정이 점점 굳었고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같이 앉아 있긴 하지만 옛날얘기를 하니 마치 아웃사이더가 된 기분이었다.밥을 먹을 때도 민우는 지유를 살뜰히 챙기며 바나나 우유를 가져다주었다.“마셔.”“고마워.”지유가 대답했다.이현은 이를 지켜보더니 차갑게 물었다.“나 대표님도 지유 씨가 바나나 우유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어요?”민우가 대답했다.“전에 학교 다닐 때 마시는 거 자주 봤어요. 근데 지금도 좋아하는지는 모르겠네요.”지유는 민우가 이를 알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하지만 이현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지유가 바나나 우유를 좋아한다는 걸 아는 사람이 자기 말고도 또 있다는게 거슬렸다.식탁 끝에 놓인 컵을 보며 이현은 두 손으로 식탁을 살짝 두드렸고 그렇게 바나나 우유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면서 우유도 바닥에 흩뿌려졌다.이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민우를 쏘아보더니 이렇게 말했다.“바꿔줄게요.”지유는 그런 이현을 힐끔 쳐다보며 오늘따라 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현이 우유를 하나 더 가지고 오며 이렇게 말했다.“따듯한 거야. 날이 춥잖아.”지유는 마음이 따듯해져 얼른 우유를 가져다 손에 움켜쥐었다. 그런 지유를 보며 이현의 기
딱 잘라 말하는 모습에서 이현이 지유에 대한 소유욕이 느껴졌다.이현도 민우가 지유를 좋아해서 자꾸 지유 앞에서 알짱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기회는 없다고 당연히 알려줘야 한다.민우는 그런 이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분위기가 점점 딱딱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대치하다가 민우가 이렇게 말했다.“여 대표님, 너무 확신하는 거 아니에요?”민우는 화내지 않고 점잖게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요. 인연이 닿는다면 누구도 막을 수는 없는 거죠.”이현은 기분이 나빴지만 지유의 손을 잡는 걸 잊지 않았다.지유는 이현의 정서를 느낄 수 있었다. 민우가 오고 나서부터 이현은 이상했고 말끝마다 꼬투리를 잡고 있었다.하지만 지유는 이성적이라 기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현에게서 손을 빼며 분위기를 만회하려 했다.“다들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분위기 좋았는데 내 얘기는 왜 해서. 엄마, 얼른 아빠 모시고 들어가요. 더 마시다간 실수하겠어요.”“그래.”정미리도 상황이 더 걷잡을 수 없이 발전할까 봐 이렇게 말했다.“여보, 가서 눈 좀 붙이면서 술 깨요.”온경준은 꽤 협조적이었지만 그래도 흐뭇한 눈빛으로 민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민우야, 나는 너 좋게 보고 있어. 뒤에 한잔 거하게 하자.”“네.”민우가 공손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온경준의 말에 대답했다.온경준은 그렇게 정미리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들어갔다.이현은 얼굴을 굳힌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식탁엔 세 사람만 덩그러니 남았다. 온경준과 정미리가 가자 갑자기 주방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이에 지유가 불편해졌다.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튀기는 걸 느낄 수 있었다.민우는 이현의 눈빛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나긋한 목소리로 지유에게 말했다.“아까 별로 못 먹던데 너무 멀어서 그런 거 아니야?”민우는 지유에게 반찬을 집어줬다. 하지만 이현이 한발 빠르게 가로챘다.“괜찮아요. 지유는 이거 안 좋아해요.”민우가 시선을 돌려
그러니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녀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당연히 알게 되었다.민우는 남자의 품위를 지키며 부연 설명은 하지 않았다.“아니야, 밥 먹어.”지유는 약간 얼굴이 뜨거웠다. 그녀에게 민우는 그저 옛 동창일 뿐 친구에도 속하지 못했지만 민우는 그녀를 매우 신경 쓰고 있었다.지유는 젓가락을 들어 접시에 담은 고기반찬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비릿한 냄새에 지유는 속이 메슥거렸고 이에 밥맛이 뚝 떨어졌다.“왜 그래? 못 먹겠어?”민우가 물었다.지유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못 먹겠다는 말은 못 하고 이렇게 말했다.“요즘 식단 조절해서 그런지 위가 작아져서 좀만 먹어도 배부르네.”이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배부르면 이제 먹지 마.”지유는 이현의 불쾌함을 느끼고는 얼른 고개를 들어 이현을 힐끔 살폈다. 하지만 이현은 그저 냉정하기만 했다.정미리는 온경준을 챙기고 있었기에 지유가 민우를 배웅해 줄 수밖에 없었다.민우는 지유의 표정이 좋지 않자 이렇게 당부했다.“몸이 안 좋으면 나 데려다줄 필요 없어. 돌아가서 푹 쉬어. 다음에 또 보러 올게.”지유는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이현이 보고 있어 따로 묻지는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면 조심해서 가.”“응, 또 봐.”민우는 오래 머물지 않고 지유를 돌아보더니 자리를 떠났다.이현이 외투를 가지고 문 쪽으로 걸어오더니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나민우가 왜 너를 그렇게 잘 알아? 전에 사이가 그렇게 좋았어?”“나도 몰라요.”이현이 캐묻기 시작했다.“보면 몰라? 나민우가 너 엄청 신경 쓰는 거?”지유가 고개를 들어 이현을 바라봤다.“없는 얘기 지어내지 마요. 민우랑 나 그냥 친구예요. 오랫동안 연락 한번 한 적 없어요. 그런데 나한테 신경 쓸 리가 있나?”만난 게 고작 몇 번이나 된다고, 이런 생각은 무리였다.“앞으로 연락하지 마.”지유는 그러기 싫었다.“왜 연락하면 안 되는데요? 친구인데.”“내가 싫어.”“이현 씨가 싫어하는 사람이 좀
지유는 몸이 너무 안 좋아 창백해진 얼굴로 벽을 붙잡고 쉴 새 없이 밖으로 토해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현은 이를 보더니 얼른 걱정에 찬 눈빛으로 지유를 부축했다.“왜 그래? 많이 안 좋아?”지유는 이현의 손을 밀어내더니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아까는 이혼하자고 그러더니, 지금은 또 왜 이러는 거예요?”이현은 지유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는 상태가 진짜 안 좋다는 걸 눈치채고 부드럽게 말했다.“먼저 집에 가자. 이 일은 나중에 얘기해.”이현은 지유의 허리를 잡더니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지유는 거절하지 않았다. 문 앞에서 이현과 다퉜다가 부모님이 보기라도 하면 걱정할 것이다.결혼이 불행하다 해도 부모님을 걱정하게 해서는 안 된다.차 앞으로 걸어간 이현은 지유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더니 품에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지유야, 내가 너를 어떡하면 좋을까?”지유는 이현의 어깨에 기댔다. 코가 찡했다. 언제부턴가 지유는 건드리면 바로 깨질 만큼 나약했다.아마 이현의 조금 달라진 모습에 지유는 없었던 엄살이 생겨나는 것 같았다. 원하는 게 많아지면 전처럼 고분고분할 수가 없다.“이현 씨.”지유는 이현의 품에 기대 말을 이어 나갔다.“나를 위해 해준 모든 것에 고마워요.”이현이 지유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내가 뭘 했다고 고맙다는 거야?”지유가 말했다.“우리 집에 와줘서 고마워요. 부모님이 나 잘 지내는 거 알면 더는 걱정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전에 20억을 써서 우리 집 구해준 것도 고맙고요. 이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을게요.”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또, 나를 살려줘서 고마워요.”이현의 이 말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조금 전까지 기분이 안 좋았지만 지유가 이렇게 다독이자 이현의 화도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 버렸다.이현은 지유를 잃을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지유를 꼭 끌어안고는 이렇게 말했다.“나 네 남편이야. 다 내가 해야 되는 일이야.”지유가 입꼬리를 당기더니
여이현은 말이 없었다.침묵은 곧 긍정이다. 온지유는 화가 나서 바로 여이현의 가슴을 향해 주먹을 세게 내리쳤다.“다시 한번 그딴 생각 하기만 해봐, 내가 직접 죽여버릴 테니까!”온지유는 진심으로 화가 났다. 5년이다. 그 긴 시간을 고통 속에서 아이를 생각하며 버텨왔다.여이현은 살아 있으면서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처음에는 정신이 돌아오지 않아 어쩔 수 없다 쳐도, 그럼 그 뒤에는?여이현은 한마디도 뻥긋하지 않았다. 그걸 떠올릴 때마다 온지유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이 사람은 또 같은 짓을 반복하려 하는 게 아닌가!신무열은 덤덤하게 여이현을 한번 흘겨보았다.“맞아도 싸죠. 저의 하나 뿐인 동생이 그 몇 년간 어떻게 지내왔는데 또 그 고통을 다시 겪게 하려니 말이에요. 이현 씨, 남자라면 정정당당하게 이 모든 걸 해결하고 돌아오세요.”“잘 알고 있습니다.”여이현은 자신이 완벽히 처리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온지유와 약속한 것들을 꼭 지켜야만 했다.신무열은 시선을 거뒀다. 할 말은 이미 다 했다. 남은 건 여이현 본인이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다.그렇게 여이현과 온지유는 함께 S국으로 떠났다.브람은 여이현이 홀로 돌아올 줄 알고 있었다. 온지유가 함께 돌아온 것을 본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심지어 온지유측에는 사람이 여럿 딸려있었고 화국의 군대도 동행했다.여러세력의 동원하에 내란은 작은 파도에 불과했고, 신속히 가라앉았다.가장 주요한 병력은 화국의 군대였다.여이현은 직접적으로 태도를 밝혔다.“다음에 또 같은 사건이 발생하면 될수록 내부에서 해결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화국인이고 타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닙니다.”여이현은 브람이 자신의 친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된 뒤에도 별 감흥이 없었다. 온지유처럼 받아들이지 못할 일도 아니라고 여겼다. 여이현은 어릴 적부터 화국에서 자랐고 몸에 밴 습관도 모두 화국의 것이었다. S국의 사람들에게 있어 여이현은 밖에서 온 타국인이었다.그런 신분으로 어떻게 이 나라를 통치
그 속에는 나라를 향한 것도, 브람을 향한 것도 있었다.브람이 그의 친아버지가 아니더라도 목숨을 구해 준 은혜는 갚아야 했다.온지유는 이 상황에 대한 억울함과 세상의 불공평함에 화가 났다. 거기다 여이현의 말을 들으니 더더욱 속이 무너져 내렸다.온지유는 여이현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이현 씨가 짊어진 책임이 크다는 걸 알아. 그러니까 이번에야말로 당신 곁에 있고 싶어. 제발 나도 데려가 줘.”“절대 발목 잡는 일이 없도록 노력할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기자로서 보도를 낼게. 우리는 부부고 아이도 있잖아.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함께 해결해 나가자.”여이현은 온지유의 각오를 느꼈다. 그는 과거 자신이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그리고 눈앞의 온지유의 얼굴도.여이현은 결국 마음이 녹아내렸다.그는 온지유를 끌어안고 가볍게 키스했다.“그래, 데려갈게. 내 곁에 있어 줘. 무슨 일이 일어나든 꼭 지켜줄 테니까.”자신의 목숨을 내주더라도 온지유만은 지키고 말 테다.S국으로 향하기로 결정했으니 신무열에게도 한마디 보고할 필요가 있었다.신무열은 온지유가 S국으로 가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이현 씨는 처리할 업무가 있어서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너는 따라갈 필요 없잖아. 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별이는 어쩌려고.”여이현은 휴가를 즐기러 외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가는 것이다. 지금의 S국은 바뀌기 전의 Y국과 같은 상황이었다. Y국에는 신무열이 온지유 손목의 푸른 구슬을 알아봐 도와줄 수 있었다 하지만 S국에는 도와줄 사람은 누구도 없다.여이현의 친아버지인 브람조차 온지유를 좋게 보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할까. 만일 돌아가서 그들이 쳐둔 덫에 걸리기라도 하면?정말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여이현 혼자서라면 탈출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온지유를 데려가는 이상 그에게는 짐이 늘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다.“별이는 아버지가 봐주고 계시잖아요. 난... 이기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난 무슨 일이 있든 이현
브람이 상황을 정리할 사람을 찾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여이현은 이 모든 것이 음모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예상치 못하게 강서현이 다시 나타나다니.이때 강서현은 급히 여이현에게 말했다.“이현 씨, 지금 S국 상황이 정말 좋지 않아요. 대통령님이 당신을 데려오라고 하셨어요. 이현 씨가 아내와 함께 있고 싶다는 건 알지만, 그때 대통령님 덕분에 당신이 지금 이곳에서 무사히 있는 거예요.”강서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여이현은 의식을 회복한 뒤 줄곧 S국의 일을 돕고 있었다.그는 스스로 올해까지만 자신에게 시간을 주기로 결심했지만 온지유가 자신을 알아보게 되면서 일들이 꼬이기 시작했다.“잠시만 기다려줘.”여이현은 결국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잠시 기다리라고 말했고, 강서현은 조용히 기다렸다.온지유와 여이현은 누구보다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였다. 그가 S국으로 돌아가려면 온지유와 작별 인사를 나눠야 했다.대통령이 여이현을 데려오라고 명령했지만 강제적으로 데려오라는 지시는 아니었기에 그는 잠시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여이현은 온지유에게 다가갔다.그들의 대화를 들은 온지유는 단호하게 말했다.“S국으로 가야 한다면 나도 같이 갈래. 난 더는 기다리고 싶지 않아.”그녀는 이미 5년을 고통 속에 혼자 버텨왔고 다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여이현은 그녀의 마음을 알았지만 S국의 상황이 심각해 온지유를 데려가는 것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지유야. 나에게도 우리 아들이 소중하지만 너와 함께 사랑스러운 딸도 낳고 싶어. 이번에 다녀오더라도 안전하게 돌아올 테니, 여기서 나를 기다려줘. 만약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아들을 잘 키워줘.”만약 브람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미 Y국에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부득이하게 목숨을 바쳐야 한다면 빚을 갚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온지유에게 이 모든 것을 감당하게 하는 건 너무 가혹했다.그는 한때 무슨 일이 있어도 온지유와 함께할 것을 맹세했으며 어떤 일이 있어도 가족에게
강서현의 눈빛은 마치 “네가 뭐가 잘났다고 그렇게 우쭐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온지유는 전혀 우쭐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저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말했다.“강서현, 네가 모를 수도 있지만, 나보다 먼저 여이현 곁에 있었던 여자가 한 명 더 있어. 노승아라고, 나보다 먼저 나타났어.”노승아는 여이현에게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결국 여이현의 곁에 남은 사람은 온지유였다. 때로는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걸 강서현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강서현은 노승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온지유의 말을 듣고 자신과 여이현의 관계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처음 여이현을 봤을 때 그의 매력적인 외모에 이끌렸고, 그의 일 처리 능력과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도 반했다.항상 원하는 건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그녀에게 여이현 앞에서의 좌절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을 얻고 싶다는 승부욕이 그녀를 계속 부추겼다.잠시 침묵하던 강서현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온지유, 미안해.”마침내 그녀도 자신의 집착이 무의미함을 깨달았다. 온지유는 강서현이 더 이상 집착하지 않도록 일부러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강서현이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게 되어 온지유로서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사과는 받아줄게. 그렇지만 네가 내 아이섀도에 약을 넣은 일은 넘어갈 수 없어. 치료비는 네가 부담해. 그래야 두 번 다시 우리를 방해하지 않겠지.”강서현이 결혼식을 망친 데 이어 온지유에게 알레르기까지 일으켰으니, 당연히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앞으로 강서현이 여이현과 자신의 삶에 더는 개입하지 않는다면 온지유도 더 이상 벌을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알았어.”강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고, 온지유는 여이현에게 그녀를 풀어주라고 말했다.하지만 여이현은 온지유의 말을 바로 따르지 않았다. 온지유를 해친 사람을 가볍게 넘길 수는 없었다. 그는 강서현에게 온지유가 겪은 고통을 그대로 돌려주었다.눈이 부어오르는 알레르기 반응으로 괴로워하는 강서현
조사를 하다 보니 결국 강서현의 소행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강서현은 결혼식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어도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짓이 밝혀진 이상, 여이현은 강서현을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강서현은 온몸이 꽁꽁 묶인 채 여이현과 온지유 앞에 끌려왔다. 강서현은 병상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는 온지유를 보며 이를 갈듯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쏘아보았다.“나와 여이현이 여기까지 왔는데도 아직 포기하지 못했구나. 그래도 네가 여이현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건 알겠어. 아니면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겠지.”강서현은 여이현에게 아이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았고 결혼식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져도 마음을 접지 않았다. 이 정도면 진심이 아니면 뭐겠는가. 온지유는 여이현을 째려보며 말했다.여이현은 온지유가 강서현과 단둘이 있는 걸 불안해했다. 이때 온지유는 웃으며 말했다.“이미 온몸이 묶여 있는 상태고 당신과 부하들도 있는데, 쟤가 감히 날 어떻게 하겠어?”온지유는 여이현이 걱정했던 부분을 그대로 짚어서 말했다. 둘은 미리 얘기한 것도 아닌데, 단지 눈빛만으로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이는 강서현이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온지유를 보며 강서현은 부러움과 질투, 그리고 깊은 원망을 느꼈다.만약 온지유와 여이현이 재회하지 않았더라면, 여이현은 S국에 남아 대통령 자리에 오르고 자신과 함께 있었을 것이다.아이 문제도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여이현과 함께라면 자신의 아이도 생길 것이고 대통령이 된 후엔 별이도 그녀의 곁에서 자랄 수 있을 테니까.하지만 모든 계획을 망친 것은 다름 아닌 온지유였다!온지유가 여이현을 이렇게까지 사로잡은 힘이 무엇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여이현은 그녀만 바라보고, 주변 사람들도 온지유를 사랑하고 보호해 주었다는 사실이 강서현에게는 더욱 억울하고 분통 터질 일이었다.“나와 여이현이 여기까지 왔는데도 넌 왜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내가 죽으면 네게 무
그러나 신무열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머뭇거리며 말했다.“지금 말하기엔 너무 이른 것 같아. 막상 그때가 되면 네가 후회할지도 몰라.”“나라가 없으면 가정도 없는 법이잖아요. 당신을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고, 당신의 책임감과 모든 걸 잘 알고 있어요. 무열 씨의 모든 걸 조건 없이 받아들일 수 있어요. 만약 제가 거짓말을 한다면 벌을 받을 거예요!”김혜연은 진심을 보여주기 위해 손을 들며 맹세하려고 했다.신무열은 그녀의 손을 잡고 멈추게 하며 말했다.“그런 맹세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네 마음 믿어. 넌 정말 좋은 사람이고 나한테도 소중한 사람이야. 하지만 난 평범한 사람이 아니야. 내 인생은 Y족을 위해 존재하는 거야.”“그렇다고 해서 평생 Y족만 위해 살 순 없잖아요. 법로도 가정을 이루고 있는데, 당신도 혼자 외롭게 지낼 필요는 없어요. 정말이에요, 저...”김혜연은 신무열을 꼭 껴안으며 주변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엔 오직 신무열뿐이었다.“알겠어. 조금 더 생각해 볼게.”“네.”신무열은 주저하고 있었다. 평소엔 중요한 일에 망설임 없이 나서지만, 감정 문제에선 오히려 더 망설였다. 그가 걱정하는 건 김혜연이 상처받는 것이었다.김혜연은 기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당신이 어떤 결정을 하든, 저는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절대 떠나지 않을 거예요.”신무열이 필요로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돕고 싶었다. 그가 그녀 곁을 떠나더라도 언제든 그를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김혜연의 마음속엔 오직 신무열과의 평온한 삶뿐이었다.세 시간 후 두 사람은 돌아왔다. 오늘 일은 이미 뉴스에 보도된 상태였다.온지유는 두 사람을 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오빠, 새언니! 오늘 두 분이 같이 싸우는 모습 정말 멋졌어요!”김혜연은 그 호칭에 살짝 당황하며 말했다.“Y족에서 그런 상황을 많이 겪다 보니, 우리도 기본적인 자기방어는 할 수 있어야죠. 그리고... 저와 무열 씨는 아직 결혼한 사이가 아니니까
김혜연과 신무열은 순식간에 불량배들을 쓰러뜨리고 경찰에 신고까지 했다.주변에 사람들이 많자 김혜연은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이 사람, 얼마 전 제가 경찰에 넘긴 사람인데 한 시간도 안 돼 풀려나서 이렇게 사람들까지 모아 우리를 협박하네요. 혹시 조직폭력배 세력인가요?”이 말이 나오자마자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이 상황에 경찰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다.“이 사람을 잡아 비난과 교육을 했고 심지어 반성문까지 받았는데도 다시 나와 이런 소란을 일으키네요.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불법 세력은 반드시 뿌리 뽑아 시민들의 안전을 지키겠습니다!”신무열은 이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책임자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확실히 처리할 것을 요청했다.그러자 김혜연은 살짝 미안해하며 말했다.“저는 그저 그 소녀가 안쓰러워 보여서 도왔을 뿐인데, 일이 이렇게 번져버렸네요. 무열 씨가 한 말 기억할게요. 다음에 이런 일이 또 생긴다면...”“그런 말 하지 마. 네가 안 나섰어도 내가 나섰을 거야.”신무열은 김혜연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사실 그들은 같은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었고 상황이 닥치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성격이었다.“하지만 앞으로는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할게요.”김혜연은 다시 한번 약속했다.신무열은 김혜연의 이마를 톡 치며 말했다.“알았으니까 그만하고 더 볼 거 없으면 지유를 찾으러 가자.”“볼 게 있죠. 당연히 있죠!”김혜연은 신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눈이 반짝였다.그러다 김혜연은 근처에 유명한 사진작가가 있다는 말에 가슴이 설렜다.신무열은 그녀의 마음을 알아채고 말했다.“너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김혜연은 순간 당황하며 말했다.“다 들켰네요. 게다가 이미 커플 반지도 샀는데 이것도 괜찮지 않아요?”그녀는 신무열의 팔을 흔들며 부탁했다.신무열은 이런 부탁을 받아본 게 온지유가 어릴 때 투정 부릴 때 이후로 처음이라 당황했다. 김혜연이 워낙 그보다 어리다 보니 신무열은 차마 거절하기
이런저런 생각만으로도 김혜연은 기분이 좋아졌다.그런 그녀를 보며 신무열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무슨 생각하는 거야? 혼자서 그렇게 웃으면서.”신무열의 목소리에 김혜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이런 일들을 신무열에게 들키면 안 된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얼른 가요.”김혜연은 얼버무리며 걸음을 재촉했다....한편, 온지유는 김혜연과 신무열이 길을 잃을 리 없다고 생각하고 그들에게도 각자의 시간을 주고 싶어 여이현과 천천히 산책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그러다 멀리서 영화 촬영을 하고 있는 걸 본 온지유는 문득 지선율이 떠올랐다.지선율은 나중에 유명 감독이 되었고, 장다희는 인기 여배우가 되었다. 한때는 자주 연락하던 친구들이지만 지금은 각자 바빠 거의 연락하지 못했다.신혼여행이 끝나면 해야 할 일들이 하나둘 떠올랐다.이때 여이현이 조용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연예계에 관심 있으면 내가...”온지유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나이도 서른이 넘었는데 무슨 연예계야. 괜히 시간 낭비지.”“꼭 배우가 될 필요는 없잖아. 기획자나 감독, 아니면 작가도 될 수 있지. 하고 싶은 거 있어?”여이현의 말은 온지유에 대한 아낌없는 배려였다. 그녀가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그러자 온지유는 말했다.“이제 다시 생각해 볼게.”여이현이 고개를 끄덕이었다. 온지유는 여이현이 가리킨 쪽을 보니 신무열과 김혜연이 나란히 팔짱을 끼고 얘기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두 사람 이제 잘 돼 가는 것 같네. 신무열은 자꾸 아닌 척하지만.”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좋은 일이 곧 생길 것 같아.”여이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좋은 일이지.”신무열은 온지유보다 몇 살 더 많았다. 다른 사람들은 신무열 나이쯤 되면 이미 아이도 몇 명씩 있었지만 그는 이제야 겨우 여자 친구가 생긴 셈이었다.온지유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그런데 우리 정말 같이 다닐 거야?”여이현은 신무열과 김혜연에게도 각자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과거 Y국에 전쟁이 일어날 때 김혜연은 신무열을 따라다니며 최고 수준의 격투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불량배는 김혜연을 떼어내려고 애썼지만 ㄴ오히려 그녀에게 제압당해 발밑에 깔리고 말았다.“돈 안 내놓을래? 지금 당장 경찰서로 끌고 갈 거야!”그 말에 불량배는 겁에 질려 서둘러 빌었다.“돈 돌려줄게요! 두 배로 줄 테니까, 제발 경찰서에만은 데려가지 말아 주세요!”김혜연은 냉정하게 말했다.“돈부터 돌려주고 얘기해.”불량배는 어쩔 수 없이 소녀에게서 빼앗은 돈을 돌려주었고, 김혜연은 소녀의 몫만 가져와 소녀에게 돌려준 후, 한 손으로 불량배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 경찰에 신고했다.‘잡초를 뿌리째 뽑지 않으면 다시 자라듯이... 참 운도 없어. 나를 만나다니.’경찰이 도착해 불량배를 데려가고 나자, 김혜연은 소녀에게 돈을 더 건네며 말했다.“언니가 도울 수 있는 게 이것뿐이야. 이 돈으로 잘 지내길 바랄게.”어린 나이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 거리로 나온 소녀를 보니 김혜연은 전쟁 속에서 힘들어하던 아이들이 떠올랐다.‘전쟁이 없었더라면, 나라가 평화로웠다면 얼마나 좋았을까.’그랬다면 신무열도 법로도 가정을 희생하지 않고 평범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감사합니다, 언니.”소녀는 김혜연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소녀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김혜연은 소녀가 전화하며 Y국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같은 나라 사람이었구나!’같은 동포라는 생각에 김혜연은 더 정이 갔다. 하지만 소녀는 이미 저 멀리 가버렸다.이때 신무열이 다가와 말했다.“이곳에 사는 사람도 아닌데 다음에는 이런 일에 휘말려 들지 마.”김혜연은 격투 실력이 뛰어났지만 이곳은 타지이고 그녀는 혼자였다. 만약 불량배들이 무리를 지어 있었다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김혜연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그때는 그런 거 생각할 여유가 없었어요. 그리고 무열 씨도 제 옆에 있었잖아요.”그녀는 그저 소녀를 돕고 싶었을 뿐이었다. 신무열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