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르면서 이현은 점점 성숙해졌고 차분해졌다.이현은 지유가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왜 그렇게 봐? 무슨 생각해?”턱을 괴고 있던 지유가 이현에게 들키자 얼른 시선을 돌렸다.“아무것도 아니에요.”“아까 분명 몰래 훔쳐봤잖아.”지유가 오히려 반박했다.“이현 씨도 나 안 봤으면 내가 보고 있는지 몰랐을 거 아니에요.”“그래, 나도 너 훔쳐보긴 했어.”이현이 바로 인정했다.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행동을 살폈던 건 사실이다.이현의 말에 지유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심장이 요동치고 있는 건 확실했다.이현은 스테이크를 먹기 좋게 썰더니 그녀 앞에 놓아주었다.“자, 먹어.”이현이 그녀를 살뜰하게 챙기자 그녀의 마음도 순간 따듯해졌다.이현이 한 걸음만 다가와도 지유는 이 세상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을 것이다.지유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더니 이렇게 말했다.“아까 이현 씨 보면서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요?”이현이 와인을 홀짝거리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생각 했는데?”“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참 행운스럽다고 생각했어요. 생활에서도 일에서도 크게 고생한 적이 없거든요.”지유가 웃으며 말했다.“집안이 잘사는 건 아니었지만 부모님은 내가 고생하는 게 싫어서 대학까지 쭉 뒷바라지 해주셨죠. 그러다 이현 씨를 만났고 쭉 잘 풀렸죠. 이현 씨가 우리 아버지 빚도 갚아줬고 당신이랑 결혼까지 했죠. 이겨내지 못할 건 없다고 생각했어요. 죽을 뻔한 고비가 있긴 했지만 무사히 넘겼고요. 나는 사실 충분히 행운스러워요. 많은 사람에 비하면 정말 행운스럽죠.”그래서 지유도 늘 만족했다.이현은 지유의 말을 열심히 들어줬다. 그녀를 만난 지도 꽤 오래된지라 그녀의 집안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죽을 뻔했다고? 전에 나한테 말한 적 없었던 거 같은데?”이현이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지유는 이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한번 심호흡했다.
사실 지유에게는 뼈에 사무치는 추억이었지만 이현에게는 기억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사실 지유는 살짝 서글프기도 했다. 도대체 이현에게 기억할 가치가 있는 추억은 무엇일까?“왜 아무 말도 없어?”이현은 기분이 언짢아졌다. 지유가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지키자 이현이 지유의 턱을 들어 올렸다.“내가 정곡을 찌른 건가?”지유는 차가운 이현의 눈동자를 보며 이렇게 물었다.“이현 씨,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요?”이현이 지유를 힐끔 쳐다보더니 눈동자가 살짝 흐려졌다. 머릿속에 한 여자아이가 어렴풋이 떠올랐지만 이내 그 생각을 떨쳐내려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더니 지유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더 실었다.“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잖아. 우석이라는 사람, 그렇게 좋아?”지유가 말했다.“네, 많이 좋아해요.”이 말에 이현은 화가 치밀어올랐다.“근데... 읍...”지유가 말끝을 맺기도 전에 분노에 휩싸인 이현이 그녀에게 키스했다.약간 의외였기에 지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현은 마치 화풀이하듯 미친 듯이 키스해 왔고 손도 점점 그녀의 허리로 향했다.그는 몸이 점점 뜨거워졌고 그 열기에 지유도 점점 몸이 끓어올랐다.“이현 씨...”지유가 이현의 이름을 부르자 활활 타오르는 불에 장작이라도 더한 듯 이현의 행동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 그러더니 아예 지유를 번쩍 안아 침대로 향했다.지유는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이현을 보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막았다.“이현 씨...”이현은 지유를 침대에 눕히고는 그 위로 올라탔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더니 하얀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했다.“음...”지유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했지만 발버둥 치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이현은 지유의 손을 침대 머리에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하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가만히 있어.”이현은 몸을 지유에게 바짝 붙였다. 이현의 몸에 변화가 생긴 걸 느낀 지유는 온몸이 그대로 굳어버렸고 심장도
시끄러운 벨 소리가 두 사람을 차분해지게 했다.이현이 지유의 몸에서 내려오더니 욕망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그녀가 좋아하는 남자는 우석이라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현은 더더욱 그녀의 제일 소중한 물건을 빼앗아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이현은 심호흡으로 끝없이 끓어오르는 욕구를 잠재우더니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군지 확인한 그는 이내 핸드폰을 무음으로 설정해 두고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이현은 점점 이성을 되찾았고 갈라진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가서 샤워 좀 하고 올게. 그는 이렇게 말하더니 욕실로 향했다. 곧이어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지유는 조용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실망이 없다면 사실 거짓말이다.시작하지 않았으면 몰라도 중도에 멈춘다는 건 승아를 위해 몸을 지키겠다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그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지유는 미친 듯이 전화한 사람이 승아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리 감춘다 해도 지유는 화면에 뜬 이름을 보게 되었다.약을 탄 술을 마시고서도 이성을 잃지 않는다니, 도대체 승아를 얼마나 좋아하면 그게 가능할까?지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옷을 정리하고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거울 속에 비친 초췌한 모습이 조금 미웠다.이현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지유는 신경 쓰여 미칠 것 같았다.항상 사랑받는 쪽은 두려움이 없다. 왜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비굴해지는 걸까?기분이 잡친 지유는 소파에 기대앉았다. 그러다 테이블에 놓인 담배에 눈길이 갔고 잽싸게 한대를 입에 물었다.연기가 자욱이 피어올랐다. 이에 지유의 예쁜 얼굴이 갑자기 우울해지는 것 같았다.잔인하게도 그녀는 또렷한 정신으로 자신이 어떻게 이현에게 빠져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치명적이진 않지만 그래도 한동안 마음이 좀 쓰라릴 것이다.욕실에서 나온 이현은 이미 이성을 완전히 되찾았다. 수건으로 머리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는데 담배 연기를 맡았다.지유가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자 이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직도 우석을 많이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았다....이튿날.지유가 잠에서 깨보니 이현은 어느새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그는 잠에서 깬 지유를 보고 이렇게 당부했다.“바나나 바나나 우유는 침대맡에 뒀어. 일어나면 마셔.”지유가 침대장을 힐끔 쳐다보더니 물었다.“어디 가요?”잠에서 깨면 바로 집에 가자던 이현의 말이 떠올랐다.“일이 좀 있어.”이현이 지유를 바라보며 말했다.“기사가 집에 바래다줄 거야.”지유는 침대 가에 앉은 채 이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이현은 어느새 옷을 다 갈아입었다. 지유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그는 침대맡에 놓인 바나나 우유를 가져다주며 부드럽게 말했다.“따듯할 때 마셔.”지유는 이를 건네받더니 입술을 오므렸다.“전에 바나나 우유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어요?”“너만 좋아하면 돼.”지유는 이런 말이 이현의 입에서 나왔다는 게 몹시 의아했다.그때 이현은 바나나 우유를 보기만 해도 미간을 찌푸렸다. 도우미가 말해줘서야 지유는 이현이 달짝지근하고 느끼한 걸 싫어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뒤로 지유는 한 번도 바나나 우유를 마신 적이 없었다. 한 모금 쪽 빨아보니 역시나 익숙한 맛이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전에 학교를 다닐 때 시험 전에 긴장을 달래거나 기분이 좋지 않을 때 꼭 바나나 우유를 한잔씩 마셨고 그러면 기분이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 이현이 싫어한다는 말에 바나나 우유를 끊었다.“맛있어?”이현이 물었다.지유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이현은 지유가 웃자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좋으면 도우미 아줌마한테 집에도 좀 준비해 놓으라고 할게.”“진짜예요?”지유는 이런 이현이 너무 의외였다. 사실 그녀는 쉽게 만족하는 여자였다. 바나나 우유 하나면 바로 기분이 좋아졌다. 이현이 이런 변화를 불러왔다는게 신기했다.“내가 언제 약속 안 지킨 적 있어?”이현은 손을 빼더니 지유가 산 코트로 손을 뻗었다.마침 오늘 기온이 많이 떨어졌고 그가 입은 슈트와도 잘 어울렸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은 부부였다.그러니 진호는 지유에게 전보다 더 예의를 차려야 했다.지유는 뻔히 알면서 이렇게 물었다.“이현 씨 안에 있나요?”“대표님은... 들어간 지 얼마 안 됩니다.”진호가 주춤거리며 말했다.지유는 문 앞에 선 기자들을 힐끔 쳐다봤다. 역시 그녀의 예상이 맞았다.승아를 위해서라면 늘 이렇게 맹목적이었고 주변 사람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진호는 혹시나 지유가 생각이 많아질까 봐 설명을 덧붙였다.“사모님, 오해하지는 마세요. 병원에 온건 업무를 위해서예요.”지유가 웃으며 진호에게 말했다.“오해는 무슨, 설명하실 필요 없어요.”진호는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다행이네요.”문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을 생각해 지유는 뒷문으로 들어갔다.위층으로 올라간 지유는 승아의 매니저 예진을 발견했고 승아가 어느 병실에 있는지 알아냈다.승아는 VIP 병실에 있었기에 비교적 조용한 편이었다. 병실과 가까워지자 승아의 울음소리가 들렸다.“왜 나를 살린 거예요? 그냥 죽게 내버려두지. 살아서 뭐 해. 난 도대체 뭐냐고.”“승아야, 그만해.”이현의 목소리가 들리자 지유의 심장이 덜컹했다.“왜 이제야 온 거예요. 왜 내가 필요할 때 나타나지 않은 거예요. 전에는 이러지 않았잖아요. 내 일이라면 일 순위로 생각하고 옆에 있어 줬잖아요. 근데 왜 변해버린 거예요? 오빠가 변한 이상 내가 살아있을 이유는 없어요!”승아는 창백한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하룻밤 사이 많이 야윈 것 같았다.이를 본 이현이 얼굴을 굳히더니 승아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승아는 기회를 보고 얼른 이현의 품에 안겼다.사실 지유는 이런 광경을 정말 마주하기 싫었지만 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이현이 침대가에 서서 휴지로 승아의 눈물을 닦아주는 게 보였다.승아는 이현의 품에 안겨서도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손에는 링거 바늘도 꽂혀 있었다.겉보기에는 정말 가여워 보였다.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지유는 마음이 너무 씁쓸했다.“오빠, 나 떠나지 마요.
매니저의 말에 안에 있던 두 사람이 놀랐다.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 이현은 지유가 앞에 서 있는 걸 보고 얼른 승아를 놓아주었다.훔쳐 듣다가 들킨 지유는 어찌할 바를 몰라 황급히 머리를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이현은 그런 지유를 보며 얼른 따라나섰다.“온지유!”지유는 이현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몰라 얼른 걸음을 더 재촉했다. 하지만 이내 이현이 지유를 따라잡았다.이현을 마주한 지유의 눈시울은 이미 빨개졌고 멍한 표정으로 이현을 바라봤다.이현이 지유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지유가 고개를 돌렸다.“가서 승아 씨 챙겨줘요. 나는 상관하지 말고.”“네가 왜 병원에 있어?”이현은 지유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혹시 어디 아파? 알레르기가 더 심해진 거야?”이현은 지유의 소매를 걷으며 지유의 팔을 확인하려 했지만 마음이 더 씁쓸해진 지유는 이를 거부하듯 팔을 거두며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나 괜찮아요.”지유가 병실을 힐끔 쳐다보더니 물었다.“어제 말했던 중요한 일이 노승아 씨죠?”이현에게 승아는 늘 일 순위였다. 승아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 이현은 늘 망설임 없이 바로 튀어왔다.“승아 지금 성대도 다치고 왼쪽 귀는 청력을 잃었어. 계속 나아지지 않는다면 커리어는 여기서 끝이야.”이현의 미간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승아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 줄은 몰랐다. 커리어가 망가진다면 치명적인 타격일 수밖에 없다. 극적인 선택을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지유는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 기분이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다.“알겠어요.”승아가 이현의 뒤를 쫓아와 문 앞에 서 있었다. 매니저가 뒤에서 링거병을 들어줬다. 승아는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이현을 바라보며 그를 불렀다.“오빠.”이현은 그런 승아를 힐끔 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리고는 지유에게 말했다.“이 일만 처리하면 바로 집에 갈게. 집에서 기다려. 알았지?”이 말을 뒤로 이현은 다시 병실로 돌아갔다. 지유는 집에서 그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그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지?승아는 충격에 울음을 그치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표정으로 이현을 쳐다봤다. 그녀가 알던 이현과는 완전 다른 사람이었다.그녀를 끔찍이 아끼던 이현이었기에 절대 그녀가 서럽게 울게 놓아두지는 않았다.지금의 이현은 아예 다른 사람이었다. 그녀를 아껴주기는커녕 제일 기본적인 다독임도 하기 싫어했다. 눈앞의 이 사람이 이현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분명 다른 고충이 있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다.승아는 이현의 손을 놓아주며 억지로 웃어 보이려 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정리라니, 어떻게 정리할 건데요?”이현이 대답했다.“귀 치료되면.”“싫어요. 그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지!”승아가 점점 흥분하며 옆에 놓인 과일칼로 손목을 그으려 했다.매니저가 이를 보고는 얼른 다가가 말렸다.“언니, 이러지 마요...”승아가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오빠, 지금까지 내가 한 모든 일은 다 오빠를 위한 것이었어요. 목숨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오빠를 사랑한다고요. 오빠가 나한테 빚진 건 영원히 계산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정리란 더더욱 있을 수 없고요!”곧이어 의사가 도착했다. 승아의 정서가 불안정해 보이자 의사가 이현에게 말했다.“대표님, 지금 환자분의 정서가 안정적이지 않으니 더 자극하지 않는 게 좋아요.”이현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승아를 보고 주먹을 살짝 움켜쥐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진정제 하나 놓아주세요.”의사는 이현의 말을 듣고 승아에게 주사를 놓으려고 했다. 승아가 이를 강하게 거부했고 간호사 몇이 붙어서야 겨우 말릴 수 있었다.승아는 이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눈빛에는 이현에 대한 흠모와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오빠가 나한테 이렇게 독할 리 없어요! 오빠가 나한테 그랬잖아요, 나 영원히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 지켜야죠...”그러다 승아는 조용히 침대에 누운 채 힘없이 팔을 아래로 드리우고 눈만 깜빡거렸다.“잘 챙겨요.”이현은 매니저에게 이렇게 당부하더니 밖으로 나갔
졸업하고 나서 일에 열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정도 생겼다.부모님은 지유가 귀찮아할까 봐 거의 전화를 하지 않았고 지유도 다른 일로 바쁘다 보니 부모님을 소홀히 하게 되었다.집에 가니 아버지 온경준이 문을 열었다. 안경을 낀 온경준은 손에 신문을 들고 있었다. 지유를 보자 무뚝뚝한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내 딸 왔어? 들어와.”지유가 안으로 들어가자 온경준이 슬리퍼를 꺼내주었다.“네가 집에 와서 밥 먹는다니까 엄마가 맛있는 거 만들고 있어. 오늘 너 먹을 복 터졌어.”“정말요? 엄마가 만든 갈비찜 먹고 싶었는데.”지유가 온경준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아빠가 직접 낚은 활어회도 먹고 싶어요.”온경준이 웃으며 말했다.“어이구, 먹고 싶은 건 많아서.”지유가 외투를 벗으며 소매를 걷더니 이렇게 말했다.“주방 가서 엄마 좀 도와드려야겠어요...”“됐어. 그럴 필요 없어.”온경준이 지유를 말리려고 했다. 하지만 주방에 들어가기도 전에 정미리 옆에 큰 키를 가진 누군가가 같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비싼 슈트를 벗어둔 채 정미리 옆에 서서 싸구려 야채를 씻고 있었다.지유가 온 걸 알고 이현이 고개를 돌리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왔어?”“딸 왔어?”소리를 들은 정미리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정미리는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말했다.“아이고, 우리 딸, 엄마 좀 봐봐. 말랐나 보게.”정미리는 밖으로 걸어 나오며 지유의 손을 잡고 한 바퀴 빙 돌렸다.“마르진 않았네. 이현이가 잘 보살펴줘서 그런가?”지유는 이현을 힐끔 쳐다보며 의외라는 듯 물었다.“엄마, 그이가 왜 여기 있어요?”정미리가 말했다.“딸, 네가 이현이한테 들러보라고 한 거 아니야? 이현이 효자야. 너보다 빨리 도착해서 요리도 도와주고. 사업하는 사람이 주방에 들어오는 걸 꺼려하지 않다니, 너는 복이 많은 아이야.”정미리의 얼굴에 웃음이 만개했다. 딸 지유만 행복하다면 정미리는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했다.이현은 야채를 다 씻고 나서 이렇게 대꾸했다.“장모님,
양시은은 입술을 짓이겼다. 피가 많이 흘러나왔던지라 안색이 창백해져 자조적으로 웃었다.“나는 내 주제를 알아.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너한테 상처를 주겠어?”나도현은 가슴이 갑갑해졌고 커다란 돌덩이가 가슴을 누르고 있는 것처럼 불편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싸늘한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양시은, 너 정말 뻔뻔하다.”박은희는 찬 바람만 부는 두 사람 사이를 보며 속으로 기뻐했고 이내 맞장구를 쳤다.“그깟 돈 때문에 너를 버리는 여자인데 왜 미련을 가지고 있는 거니.”“그만 하세요.”나도현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다시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이 여자에게 돈을 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럴 만한 가치도 없으니까요.”그는 시선을 돌려 양시은을 차갑게 보았다. 박은희는 속으로 아주 기뻐했다.“네가 정신을 차렸다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세상엔 좋은 여자는 많고 많단다. 너랑 결혼할 여자는 더 많고.”“나가서 말하죠.”나도현은 차갑게 말을 내뱉으며 밖으로 성큼성큼 나가버렸다.양시은은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더는 참을 수 없어 침대에 털썩 엎드리게 되었다. 상처를 금방 치료했던지라 여전히 아팠고 바늘로 꿰맨 곳이 찢어질 듯 아팠다.하지만 하민이는 여전히 양채은의 손에 있었기에 마음 놓고 편히 있을 수 없었다. 결국 비틀대며 병원을 나선 뒤 양채은에게 전화를 걸어보려고 했다. 모든 일은 그녀 때문에 일어난 것이고 하민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병실 밖을 나가자마자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주었고 청량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조심해요.”“고맙습니다.”양시은은 고개도 들지 않고 상대의 손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상대는 다시 그녀를 잡았다.“양시은?”상대의 목소리에선 놀라움과 반가움이 묻어나 이어 그녀는 창백한 얼굴을 들 수밖에 없었다.그녀의 눈앞에는 잘생긴 얼굴이 있었고 품이 좀 너른 의사 가운은 유난히도 남자에게 잘 어울려 보였다.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양시은은 조금 생각이 나지 않아 뜸을 들이며 말했다.
양시은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나도현이 자신을 포기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8억보다는 아니라니...나도현이 강태경으로 살 때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돈을 아껴 쓰라는 말을 한 적 없었고 나중에 나도현이 된 후에도 손에 돈이 부족했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양시은의 말을 들으니 두 사람이 쌓았던 감정이 전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가소로웠다.“양시은, 돈이 필요하면 나한테 말해. 내 기분만 맞춰주면 8억보다 더 많은 돈을 얻을 수 있지 않나?”나도현은 상처받은 두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양시은이 한 말이 제발 전부 거짓이길 바랐다. 그녀는 나도현이 자신에게 잘해줬던 시절은 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입을 열려던 순간 밖에서 콰당 소리가 났다. 박은희가 있는 힘껏 문을 밀어 연 것이다.엄청난 기세를 내뿜던 박은희는 바로 양시은에게 시선을 돌렸다. 양시은은 그녀가 좋은 의도로 찾아온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입을 꾹 다문 채 박은희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박은희는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지 않고 문에 서 있었다. 거리가 조금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쩌렁쩌렁하게 들려왔다.“양시은 씨, 전에 8억 주면서 내가 뭐라고 했지? 내 아들 곁에서 떨어지라고 했잖아. 난 지금도 내 아들이랑 함께 있는 꼴 보고 싶지 않으니까 서로 좋게 합의 보자고. 얼마를 원하는지 말해.”박은희는 나도현이 양시은을 향한 마음을 접길 바랐다. 그래서 나도현이 보는 앞에서 양시은에게 얼마나 요구를 하는 것이냐고 물은 것이다. 양시은도 박은희가 대놓고 물어볼 줄은 몰랐다. 목구멍에 커다란 돌멩이가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고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다. 하지만 그녀에겐 다른 선택은 없었다.“그때는 8억이지만 지금은 적어도 2배 정도는 주셔야 할 거예요. 하지만 전에 거래한 것이 있으니 12억만 주시면 영원히 눈앞에서 사라져 드릴게요. 아니, 죽으라고 하셔도 돼요.”양시은은 한 글자씩 내뱉을 때 나도현을 똑바로 바라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아이는 양채은이 나도현과의 유일한 아이였다.이때 나도현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나도현의 전화에 그녀는 당연히 바로 받았다. 다만 그녀는 하민이에게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자리를 옮겼고 전화기 너머로 여전히 차가운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채은, 내가 예전에 쓰던 이름으로 네게 접근한 걸 인정해. 하지만 난 너한테 상처 주는 일은 한 적 없어. 네 배 속에 있는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야.”나도현의 말에 양채은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의 아이가 나도현의 아이가 아니라면 누구의 아이란 말인가. 게다가 그날 그녀의 옆에 있던 사람은 분명 나도현이었다.그러나 나도현은 그녀에게 영상 하나를 전송했고 그 영상 속엔 악취미로 가득한 재벌들이 있었다. 양채은은 바로 진실을 알게 되었다.나도현이 지금 이런 때에 그녀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있다는 건 그녀가 아무런 잘못도 없는 아이에게 화풀이하지 않기를 바라서였다. 하민이도 그녀가 예전에 온 힘을 다해 지켜주려고 했던 아이였으니까.아무리 이성을 잃었다고 해도 그녀는 직접 아이에게 손을 댈 만큼 미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결국은 어느 날 갑자기 그녀의 곁에 나타난 나도현은 그녀 때문이 아니라 양시은 때문이었다는 것이다.나도현은 그녀에게 이용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고 심지어 본명도 알려줄 생각도 없었다. 그녀에게 잘해주었던 것도 전부 그의 연기였다는 사실에 그녀는 역겨웠다.양채은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만나줄래요?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래요. 얼굴 마주 보면서 하고 싶거든요.”나도현은 이미 이 지경이 되었던지라 양채은과 만나 자세하게 얘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였다.“그래.”양채은은 먼저 시간을 알려주었다.“그럼 사흘 뒤에 봐요.”말을 마친 양채은은 전화를 끊어버렸고 나도현은 양채은과 했던 대화를 양시은에게 알려주었다. 침대에 힘없이 누워있는 양시은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이미 양채은과 좋게 얘기가 끝났고 하민이와도 사이
나도현은 양시은이 자신을 위해 대신 칼에 맞아줄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당황하고 있던 순간에 양시은이 그의 손을 잡으며 애원했다.“나도현, 제발 하민이를 구해줘...”...양시은이 다시 눈을 떴을 땐 병원이었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양채은에게 문자를 보냈다.[양채은, 죽어야 할 사람은 나야. 내가 죽을 테니까 하민이는 살려줘. 하민이는 아무 잘못도 없잖아. 그리고 넌 하민이가 제일 좋아하는 이모잖아.]양채은은 지금 이성을 잃은 상태였던지라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그간 쌓은 정으로 설득하는 것이다. 아이를 잃은 양채은에게 당연히 통할 리가 없었다.양시은과 나도현의 아이는 멀쩡히 살아있었다. 양시은이 그녀를 동생으로 여기고 나도현을 본 순간 나도현의 정체를 알려주면서 그녀를 이용하려는 것 같다고 말했었더라면 이 정도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양시은은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가 나도현에게 푹 빠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결국 그녀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도 없고 나도현은 애초에 그녀를 사랑하지도 않았다. 모든 건 양시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녀는 죽게 되는 한이 있어도 양시은이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고 싶었다.“이모, 우리 여기에 며칠 동안 있는 거예요? 엄마가 보고 싶어요. 이모, 혹시 하민이가 잘못한 거 있어요? 왜 하민이랑 놀아주지 않는 건데요?”아이들은 감정에 민감했다. 양채은이 자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온 뒤 자신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 순간 양채은은 마음이 누그러지며 아이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하민아, 만약 이모랑 엄마가 싸우면 하민이는 누구를 선택할 거야? 이모 말 믿어 줄 거야?”양채은은 양시은을 증오하고 있었지만 하민이 앞에서는 완전히 냉랭해질 수 없었다. 하민이는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조카였기 때문이다.전에 학교 다닐 때도 그녀는 학교 끝나자마자 하민이를 데리고 나와 간식도 사주면서 돌봐주었다. 심지어 돈만 생기면 하민이의
나도현은 차 키를 챙기고 외출하려고 하자 비서가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변호사님, 지금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아직 일정이 남아 있습니다만...”“오후 일정을 전부 뒤로 미루세요.”나도현은 말을 마친 후 성큼성큼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올라탄 그는 심지어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다.‘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양시은이 한 말 때문에 고분고분 찾아간다고?!'그는 다시 한번 고민하다가 결국 찾아가 보기로 했다.이때 검은색 차에 앉은 흉악한 얼굴의 두 남자가 나도현을 지켜보고 있었고 그중 한 사람이 옆에 있던 파트너의 어깨를 툭툭 쳤다.“이봐요, 저 사람 맞아요?”고개를 푹 숙인 채 핸드폰으로 문자를 주고받던 남자는 고개를 확 들어 호화로운 차에 올라타는 나도현을 보더니 이를 빠득 갈았다.“맞아요. 저 사람이에요. 저 사람 때문에 내 아들이 형량 아주 많이 받았다고요. 내가 죽어 재가 되어버린다고 해도 저 사람만큼은 절대 잊지 않을 거예요.”“그럼 지금 혼자 차에 올라탄 이 시점이 아주 좋은 기회가 아닌가요?”두 사람은 그렇게 몰래 나도현의 뒤를 따라가게 되었고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아하니 동료를 호출하는 것 같았다.양시은이 말한 무스 카페는 아주 외진 곳에 있었던지라 나도현은 내비게이션을 틀어서야 찾을 수 있었다. 카페 안으로 들어갔을 때 양시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이내 미간을 확 구겼다.‘이 여자가 설마 또 날 속인 건가?'가슴 속에 분노가 슬금슬금 피어올랐지만 고개를 돌리니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양시은을 발견했다.양시은은 양채은이 무슨 이유로 나도현을 부르라고 한 것인지 몰랐기에 일단 그에게 다가가는 수밖에 없었다.“왔어?”“어젯밤에는 신고하겠다고 협박하더니 오늘은...”나도현은 픽 소리를 내며 웃었다.“양시은, 이번엔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지?”“난...”양시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후 그녀는 안을 가리키며 말했다.“일단 안으로 들
양시은은 뭔가를 할 기분이 아니었고 하민이의 안전만 걱정되었던지라 거의 울면서 애원했다.“하민이는 네 친조카잖아. 대체 뭐 하려는 거야? 하민이로 협박하지 않아도 난 널 언제든지 도와줄 수 있어.”양채은 피식 차갑게 웃었다.“양시은, 넌 뼛속까지 가식적인 사람이야. 손에 쥐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면서 뭘 어떻게 도와주겠냐는 거지?”양시은은 그녀를 설득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짜증이 극에 달한 양채은이 먼저 말을 가로챘다.“됐어. 쓸데없는 말 듣고 싶지 않으니까 나도현이나 불러.”양시은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뭐 하려고?”양채은은 픽 웃었다.“그건 나와 도현 씨 일이야.”양시은은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나랑 나도현은 이미 서로 뼛속까지 증오하고 있는 사이라 내가 불러도 안 올 수도 있어.”양채은의 목소리는 너무도 냉랭했다.“그건 네 사정이고. 하민이 무사하길 바라면 어떻게든 불러와.”양시은 침묵했다.지금의 양채은은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상태였고 얼른 하민이를 데리고 오지 못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아무도 몰랐다. 어떻게든 일단 양채은을 안심시켜야 한다.“그래, 알았어. 하지만 매일 하민이 목소리를 들려줘. 영상 통화도 하게 해줘.”양채은은 흔쾌히 답했다.“좋아. 하지만 신고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알린다면 네가 얼마나 멍청한 짓을 했는지 직접 보여줄 거야.”양시은은 침을 꿀꺽 삼키며 멈추지 않는 떨림을 억누르고 진지하게 대답했다.“알았어.”이내 침묵이 흐르면서 전파 소리만 들려왔다. 그녀는 양채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그녀가 먼저 뜸을 들이며 입을 열었다.“채은아, 나는...”말을 마치기도 전에 신호음 소리가 들려왔다. 양채은은 전화를 끊어버린 것이다. 끊겨버린 전화를 보며 양시은은 머릿속이 하얘졌다.손가락을 움직이며 한참 망설이다가 결국 나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민이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난처한 일이라고 해도 그녀는 어떻게든 해야 했다.번호를 누른 순
하민이의 말을 들은 양채은은 속으로 비웃으면서 담담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표정은 다소 음험하게 보였다.“날 괴롭힌 사람이 네 엄마라면?”하민이는 순간 당황하고 말았지만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우리 엄마는 이모를 괴롭히지 않을 거예요.”양채은은 그저 차갑게 웃기만 할 뿐이다.왜 양시은의 아이는 멀쩡히 살아있는데 자신의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해보고 이렇듯 조용히 하늘나라로 갈 수밖에 없는 걸까. 마음속에 원망만 남은 그녀는 양시은을 절대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 생각했다.이상함을 감지한 하민이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엄마는요? 이모, 엄마 보러 갈래요.”양채은은 그런 하민이가 시끄럽게 느껴졌고 인내심 있게 말했다.“이모는 그냥 하민이랑 농담을 던진 거야. 이따가 도착하면 이모가 엄마한테 연락해줄게.”하민이는 그녀의 말에 바로 기분이 풀어져 즐거운 얼굴로 창밖의 풍경을 보았다.양시은은 아침 내내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는 양채은에 너무도 걱정되었다. 양채은은 항상 혼자 속으로 끙끙 앓으며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으니까. 뭐가 어찌 됐든 어젯밤 일에 관해서 그녀는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큰 희망을 품지 않고 전화를 걸었지만 뜻밖에도 양채은은 전화를 받아주었다. 양시은은 서둘러 설명했다.“채은아, 어젯밤 일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양채은의 목소리엔 떨림이 느껴졌다.“아직도 날 속이려고 그러는 거야? 너랑 나 사이엔 예전에도, 지금도 온통 거짓뿐인데 내가 어떻게 널 믿으라는 거야?”양시은은 목구멍이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채은아, 그럼 내가 하민이를 데리고 떠날게.”그녀는 힘겹게 이 말을 꺼냈다.“내 인생을 이미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양채은은 이를 빠득 갈며 말을 이었다.“떠나겠다고? 양시은, 난 네가 내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져줬으면 좋겠어.”“내가 어떻게 하면 화가 풀릴까?”양시은은 느껴지는 무력감에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양채은은 고개를 숙이더니 핸드폰을 혼
“걱정하지 말아요.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의사 선생님께 알려드릴게요.”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의 말을 들은 양채은은 그제야 마음이 놓여 눈을 감을 수 있었다.나도현은 어둠 속에서 양시은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고 술도 몇 잔 마셨지만 정신은 점점 더 멀쩡해졌다.똑똑똑.이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공허한 사무실에 더 크게 울려 퍼졌다. 그는 안 올 줄 알았던 양시은이 돌아온 것이라 생각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문을 열자 그 미소는 사라지고 싸늘함만 남게 되었다.“누구시죠?”라이더 복을 입은 남자는 느껴지는 서늘한 한기에 저도 모르게 몸을 덜덜 떨었다. 그는 얼른 들고 있던 쇼핑백을 건넸다.“나도현 씨 맞으시죠? 퀵 서비스입니다.”‘하, 머리를 쓰긴...'나도현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쇼핑백을 받은 후 문을 닫아버렸다.‘괜찮아.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두고 보자고!'배달 기사는 그제야 안도하며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갔다.야심한 밤 응급실은 전체 도시에서 가장 바쁜 곳이었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보호자는요?”간호사가 달려 나와 물었지만 젊은 커플은 고개를 저었다.“저희도 몰라요. 우연히 길에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해서 데리고 온 거예요. 배 속에 아이가 있다고 하니까 아이도 살려주세요.”“저희는 현재 산모분의 안전만 확보할 수 있습니다.”간호사는 조급해 미칠 지경이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신고였다. 다른 건 몰라도 일단 산모의 목숨부터 살려야 했으니까.밤새 치료한 끝에 양채은의 상태는 겨우 안정되었고 날 밝기 전에 그녀는 깨어나게 되었다. 눈앞에 보이는 하얀 천장에 자신이 어디로 실려 왔는지 깨닫고 황급히 약을 갈러 와준 간호사의 팔을 잡았다.깜짝 놀란 간호사는 그녀가 깨어난 것임을 확인한 후에야 진정했다.“아직 상태가 좋은 건 아니니 푹 쉬고 있으세요. 제가 담당 선생님을 불러드릴게요.”그러나 양채은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고 빤히 보면서 거의 히스테리를 부
양채은은 고개를 돌리자 눈 부신 빛을 보게 되었다. 황급히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너무 다급하게 움직였던 탓에 중심을 잃고 그만 넘어져 버렸고 작은 트럭은 휘청이며 달리더니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등을 스치며 뒤에서 멈추었다.‘아파!'온몸의 온기가 빠져나가며 점차 의식이 흐릿해졌다. 이마에선 어느새 식은땀이 가득했다. 복부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통증에 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올려 만져보았고 하체에선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트럭 운전자는 자신이 사고를 쳤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그녀를 힐끗 보더니 바로 시동을 걸며 도망쳐 버렸다.차가운 밤바람이 텅 빈 도로 위로 불어오고 있었고 그녀는 혼자 있었다. 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이 그녀의 이성을 붙잡고 있었고 가슴 속에선 증오의 불씨가 피어올랐다.양시은은 급하게 따라 나왔지만 양채은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늘 일을 그르치는 자신을 탓하며 원망하듯 머리를 때렸다.핸드폰을 들어 양채은에게 전화를 걸어보아도 양채은은 받지 않았고 아마도 여전히 자신을 원망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마 더는 그녀의 연락을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양채은이 진정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 후 다시 만나 대화를 해보기로 했다. 그녀와 나도현은 더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말할 생각이다.게다가 나도현은...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을 그만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였지만 전화기 너머로는 나도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시은...”양시은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나 힘들어. 채은이가 지금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겠고 할 말이 있으면 채은이 찾은 뒤에 해.”나도현은 흥미롭다는 어투로 말했다.“아, 그래? 양채은을 찾은 뒤에 삼자대면하고 싶은 건가?”양시은은 그가 너무도 원망스러웠지만 이를 빠득 갈며 그를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다.“채은이랑 결혼하기로 했으면 그럼 잘해줘. 채은이는 좋은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