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광대가 손가락을 튕기자 양서은을 비롯한 사람들이 순식간에 시선이 흐릿해지고 멍해졌다.“이놈을 죽여!”광대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양서은과 국제 수사국 요원들이 일제히 임지환을 향해 달려들었다.“그렇게 오지 말라고 부탁했는데 기어코 와서 상황을 귀찮게 만드네.”임지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양서은 일행이 아직 공격하기 전에 재빨리 몸을 움직여 거실을 빠져나갔다.“넌 내 손아귀에서 도망칠 수 없어!”광대는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뱀처럼 빠르게 몸을 날려 임지환의 길을 막았다.그리고 광대의 뒤에서는 양서은을 비롯한 사람들이 임지환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다.앞뒤로 협공을 당하자 순간 임지환의 눈빛이 차가워지며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그와 동시에 임지환의 손에는 은침 하나가 나타났다.은침을 쥔 순간, 임지환은 호랑이가 양떼 속으로 뛰어든 것처럼 사나운 기세로 포위망 속으로 돌진했다.사람들 속에서 매번 손에 쥔 은침이 움직일 때마다 한 명씩 쓰러져 갔다.1분도 채 되지 않아 양서은을 비롯한 국제 수사국 요원들이 전부 바닥에 쓰러져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임지환의 침술로 그들을 잠시 무력화시키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이것 말고 또 다른 비장의 카드가 있나?”임지환은 돌아서서 문을 막고 있는 광대를 바라보았다.이때 광대의 얼굴은 이미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고 아까의 여유로움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광대는 임지환이 자기 계획대로 세운 꼭두각시들을 이렇게 빠르게 처리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너를 과소평가한 건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쉽게 당할 사람은 아니야!”임지환을 상대할 비장의 카드가 무용지물이 되자 광대는 빠르게 결단을 내리고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임지환, 상처 입은 적을 너무 바싹 쫓지 마. 분명 다른 계략이 있을 거야!”이청월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경고했다.“여기서 이 무능한 녀석들을 잘 보고 있어. 금방 돌아올게. 걱정 마. 난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아.”말이 끝나기 무섭게
“됐어. 말해봐야 내 입만 아플 뿐이야. 그냥 너희들을 쓰러뜨리는 게 가장 효율적이겠어.” 임지환은 가볍게 웃으며 천천히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자 임지환의 체내에서 영기가 천천히 집결되었고 기다란 손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수많은 빗방울이 임지환의 몸에 닿기 직전에 보이지 않는 힘의 충격으로 튕겨 나갔다.“이건... 선천강기잖아!”이 광경을 본 킹콩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라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고 이내 얼굴에 처음으로 긴장한 표정을 드러냈다. 킹콩은 국제 수사국의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요원들과는 달랐다. 강력한 육체를 무기로 삼아 수많은 대사급 강자를 죽여왔기 때문에 한국의 대사들을 늘 얕잡아보는 편견이 있었다.하지만 임지환이 영기를 외부로 방출하는 순간, 킹콩은 진심으로 충격을 받았다.“아니야, 이건 선천강기가 아니야. 넌 어떤 비법을 이용해 강제로 경지를 끌어올렸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너처럼 젊은 나이에 대종사가 되는 건 불가능하지.”잠깐의 놀라움이 지나자 킹콩은 곧 냉정을 되찾았다.“말이 참 많군.”그러나 임지환은 킹콩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고 영기로 둘러싸인 주먹을 뻗어 허공에 대고 내질렀다.“진짜 대종사라 해도 내 부서지지 않는 강철 같은 몸뚱이로 충분히 맞서 싸울 수 있어. 하물며 너 같은 가짜가 날 상대할 수 있을까?”임지환의 주먹을 보자 킹콩의 눈에 경멸의 빛이 스쳤다. 그는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나서서 성난 황소처럼 임지환을 향해 무작정 돌진했다.“킹콩, 무리하지 마!”광대 가르도는 킹콩의 자폭과도 같은 무모한 행동을 보고 급히 경고했다.그러나 킹콩은 오히려 광대를 비웃으며 말했다. “절대적인 힘 앞에서는 비법이든 네 그 잘난 환술이든 아무 소용도 없어. 네가 상대하기 버거운 놈은 나 킹콩이 쉽게 처리할 수 있어.”자기 강력한 힘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난 킹콩은 죽음을 부르는 저승사자처럼 웃으며 힘을 모아 주먹을 내질렀다.펑!주먹과 주먹이 부딪히는 순간, 주변의 천
자기 손을 그냥 잘라버리다니, 진짜 대단한 놈이 틀림없었다.“그래도 생각보다 똑똑하네.”임지환은 킹콩의 결단력에 살짝 놀란 기색을 보였다.“근데... 그 손을 자른 이상 네가 살아남을 가능성도 사라진 거야.”킹콩은 극심한 고통을 참고 창백해진 얼굴로 이를 악물며 말했다. “내가 널 얕본 건 인정해. 하지만 남은 한 손만으로도 네 목을 비틀어버릴 수 있어!”킹콩은 말을 마치고 비틀거리며 임지환과 함께 죽을 각오를 한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모습은 마치 고대의 맹수처럼 비장해 보였다.“꿈도 참 야무지네. 그럴 기회는 없을 거야.”순간, 허청열이 이끄는 용수 부대가 들이닥치며 킹콩과 광대 두 사람을 겹겹이 포위했다.“정말 짜증 나는 놈들이네. 가르도, 넌 뒤에서 날 지원해. 내가 먼저 저 녀석을 처리하고 함께 이 포위망을 뚫고 나가자!”가르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킹콩은 신속하게 몸을 움직이며 손을 뻗어 임지환의 목을 잡으려 돌진했다.킹콩의 체형은 거의 임지환의 두 배에 맞먹었고 우람진 체형은 우뚝 솟은 작은 산처럼 거대했다.하지만 이렇게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체형 앞에서도 임지환은 여전히 일관된 평온한 표정으로 가볍게 주먹을 내질렀다.“아까 한번 당했는데 내가 또 똑같은 수법에 당할 것 같아?”킹콩은 발을 내디뎌 몸을 비틀어 임지환의 주먹을 피했고 엄청난 기세를 담은 튼튼한 팔로 임지환의 머리를 내리쳤다.“큰일이야!”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허청열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허청열이 장악한 정보에 따르면 킹콩은 원래 지하 세계 복싱 챔피언이었고 이후 거미줄에 합류한 뒤 대량의 체력 증강제를 복용해 거미줄 조직 내 최강 철인으로 불렸다.킹콩의 손에 목숨을 잃은 무도 고수와 대사들만 무려 50명이 넘었다.용수 병사들은 보통 사람의 체력 한계를 넘었지만 킹콩의 앞에서는 갓 걸음마를 뗀 아기처럼 무력해 보였다.이런 강력한 주먹을 임지환이 정통으로 받아들이면 아무리 무술 대가인 임지환이라 하더라도 버티기 힘들 것이
“킹콩이 말한 게 맞아. 난 저 녀석의 상대가 될 자격이 없어.”정신이 돌아온 가르도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날카로운 쌍검을 손에 쥔 채 유령처럼 빠르게 몸을 날리며 포위망에서 탈출을 시도했다.용수의 병사들은 날렵한 움직임을 보이는 가르도의 옷깃조차 건드릴 수 없었고 다들 눈앞이 흐릿해진 틈을 타서 광대 가르도는 이미 병사들을 뚫고 나갔다.그리고 그 과정에서 병사들의 몸에는 작은 칼자국이 생겼는데 이는 가르도가 급히 탈출하느라 미처 치명타를 가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긴박하지 않았다면 허청열이 이끄는 용수 병사들은 절반 이상이 가르도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허청열은 가르도가 탈출에 성공하는 순간 분노가 가득 찬 외침을 내지르며 그를 추격했다. 허청열은 용수의 교관으로서 거미줄 조직 최상급 킬러인 광대 가르도를 눈앞에서 놓치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비켜!”가르도는 임지환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걸 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이어 자기를 바짝 뒤쫓아오는 허청열을 향해 높은 소리로 호통쳤다.펑!가르도는 호통치는 동시에 흰색 탄환을 뒤로 던졌다. 탄환은 공중에서 갑자기 터지며 흰색 가루가 나타나 바람과 빗물에 휘날렸다.탁탁...가르도를 추격하던 허청열은 뜻밖의 상황에 순간적으로 몸을 비켜 옆으로 피했지만 어쩔 수 없이 거친 호흡을 따라 흰색 가루를 들이마시게 되었다.순간 허청열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몸이 통제되지 않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허청열의 뒤를 따르던 건장한 용수 병사들 역시 코와 입으로 가루가 들어오자마자 낫으로 베어진 벼처럼 하나둘 쓰러졌다.“다행이야... 탐랑이 준비해 준 약을 챙기기 잘했어. 이 약이 아니었다면 나도 킹콩처럼 비참하게 죽었을지도 몰라.”가르도는 미친 듯이 달리며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웠다.“임 선생님, 제발 저 자식을 잡아주세요!”허청열은 점점 멀어지는 가르도를 바라보며 초조한 마음에 급히 임지환을 향해 외치며 간
임지환의 왜소한 체형은 이 순간 산처럼 거대해 보였다.“임 대사, 당신의 실력은 이미 충분히 느꼈습니다. 저를 돌려보내 주기만 하면 거미줄 조직 킬러들이 더 이상 당신을 괴롭히지 않게 하겠습니다. 제가 목숨을 걸고 약속하겠습니다. 앞으로 거미줄 조직의 어떤 킬러도 한국 땅을 밟지 않도록 하겠습니다.”가르도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필사적으로 조건을 내걸었다.“네가 혼자서 거미줄 전체를 지휘할 수 있을 것 같아?”임지환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이런 말은 세 살짜리 아이나 속일 수 있지 내겐 통하지 않아.”임지환은 발을 들어 가르도의 머리를 밟았고 조금 힘을 주자 “우두둑”하는 소리가 들렸다.임지환이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이 머리는 터져버릴 것이란 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으으... 거미줄 조직 최고 리더는 제 친형입니다. 제 부탁이라면 우리 형이 반드시 들을 겁니다. 저를 살려만 주신다면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습니다!”임지환에게 머리를 밟힌 가르도는 흙을 입에 물고 제대로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가뜩이나 못생긴 얼굴은 더 우스꽝스럽고 기괴한 얼굴로 변했다.지금 당장 임지환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실력 차이가 너무 커서 필사적으로 임지환에게 목숨을 구걸할 수밖에 없었다.“네가 그런 배경이 있었구나. 그렇다면 널 살려주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겠군.”임지환은 웃으며 발을 떼고 가르도의 목에 박혀 있던 은침을 뽑았다.“임 대사, 당신은 가장 현명한 선택을 했습니다. 만약 저를 죽였더라면 거미줄 조직 킬러들이 절대 당신을 가만두지 않았을 겁니다.”가르도는 약간의 힘을 되찾고 바닥에서 겨우 일어나 입에 들어간 흙을 뱉어냈다.다시 살아난 느낌이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다.임지환은 가르도를 힐끗 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거미줄 조직 킬러들이 널 가만둘지는 모르겠지만 국제 수사국 사람들은 널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게 무슨 소리입니까?”그 말에 가르도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고 도망가려고 움직이려 했다.펑!바
밧줄로 꽁꽁 묶인 가르도도 임지환의 말에 콧방귀를 뀌며 비꼬듯 말했다.하지만 임지환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고 멀리 시선을 돌렸다.그 순간, 검은색 람보르기니가 시속 180마일 이상의 속도로 빗속을 뚫고 등장했다.이어지는 멋진 드리프트와 함께 차가 사람들 앞에 보란 듯이 멈춰 섰다.검은색 타이트한 가죽옷을 입고 물결치는 긴 머리의 여자 유란이 나비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모두의 시선이 유란에게 쏠린 가운데, 유란은 천천히 임지환 곁으로 다가가 공손한 태도로 보고했다.“임 선생님, 탐랑을 제외하고 이번에 한국에 잠입한 거미줄 조직 조직원 35명을 전부 처치했습니다.”“설마... 그럴 리가 없어!”가르도는 그 말에 흥분하며 참을 수 없는 듯 소리쳤다.그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임지환 쪽으로 다가가며 외쳤다.“임 선생님의 능력을 너 같은 못생긴 괴물이 어찌 알겠어? 계속 떠들면 지금 당장 죽여버릴 거야.”유란은 쌀쌀한 눈빛으로 가르도를 바라보며 이미 죽은 사람을 대하듯 무시했다.늘 사람을 풀처럼 여기며 서슴없이 죽이던 가르도마저도 그 순간에는 가슴이 두근거리며 온몸이 오싹했다.이 여자는 분명 수많은 사람을 죽였을 것이다.임지환은 멍하니 서 있는 양서은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 내가 농담하는 게 아니라는 걸 믿겠지?”“그래, 믿을게, 믿어! 임지환, 넌 알면 알수록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정말 궁금해.”이제 와서도 믿지 않는다면 양서은은 바보나 다름없었다.양서은은 유란에게서 진한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유란이 거미줄 조직 조직원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내 정체는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거야.”임지환은 간단하게 대답하고 주제를 바꿨다.“참, 거미줄 조직 놈들은 죽었지만 사후 처리는 너희 국제 수사국이 맡아야겠지?”양서은은 그 말을 듣고 경직된 얼굴로 대답했다.“그건 알고 있어.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죽었으니 나도 상사에게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러나 주위엔 수사국 대원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 김준은 귀신이라도 본 건가?“앞으로 다른 사람을 험담할 때는 들리지 않게 하는 게 좋을 거야.”수백 미터 떨어져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임지환의 목소리는 여전히 뚜렷하게 모든 사람의 귀에 들렸다.“임 선생님, 제가 잘못했습니다.”김준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떡 벌리고 있다가 서둘러 임지환에게 사과했다.조금 전까지 임지환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다른 수사국 대원들도 자신들이 임지환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은 것에 안도했다.이렇게 먼 거리에서도 사람을 다칠 수 있다니 너무나도 끔찍한 능력이었다.“한 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있다가 은침을 뽑으면 돼. 다음에 또 헛소리하면 그땐 무릎 꿇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거야.”임지환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임 선생님, 너그럽게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양서은도 무의식적으로 임지환에게 존칭을 썼다. 공간의 제한을 뛰어넘는 능력을 직접 목격하자 양서은의 마음속에서 임지환은 이미 하늘에서 내려온 신과 같은 존재로 자리 잡았다.“용주님, 거미줄 조직 사람들은 우리가 모두 처리했는데 그 탐랑이라는 자가 행방불명입니다. 어딘가에서 여전히 숨어있을 가능성이 큽니다.”이때 유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보고했다. 탐랑은 그야말로 악령처럼 임지환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마치 목에 걸린 가시 같은 불쾌한 존재였다. 이 탐랑을 제거하지 않으면 앞으로 큰 위협으로 남을 것이다.“탐랑에 대해서는 유란 씨가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제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면 탐랑은 이미 송씨 가문의 유람선에 몰래 숨어들었을 겁니다.”옆에 있던 허청열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허청열은 탐랑과 여러 번 겨뤄봤던 적이 있어서 그자의 성향을 거의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그렇다면 다행이야. 내가 또 번거롭게 추적할 필요가 없겠네. 이제 천천히 기다리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그물을 거두면 되겠어.”임지환은 가볍게 웃으며 태연하게 말했다.“임
경성 그룹은 이씨 가문의 손을 거치며 이미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장했다. 배지수의 신분도 자연히 덩달아 높아졌고 지금은 진성을 능가하는 위치에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지수는 진성이 이렇게까지 비굴해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지수야, 진 가주도 호의 외엔 딴 의미 부여가 없을 거야. 듣자 하니 이 초대장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살 수 없다고 하더구나. 강한시 지역에서 자산이 2000억을 넘는 갑부들만이 유람선에 오를 자격이 있다고 들었어.”척척박사라 불리는 한수경은 진성이 유람선 초대장을 건넨다는 말을 듣자 두 눈이 번쩍였다. 그래서 서둘러 초대장의 가치를 바로 짚어냈다.진화도 옆에서 한수경을 거들었다. “지수야, 이제 네 경성 그룹도 2000억의 기준선을 넘었으니 이 초대장을 받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없이 당연한 일이야.”진화는 얼마 전에 배지수에게 손을 대려는 마음을 접었었다. 하지만 진운이 진씨 가문을 떠난 지금, 경성 그룹도 재도약하자 진화는 다시 배지수에게 마음을 품게 되었다.“미안하지만 사양하겠어요.”배지수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제 동생 병 때문에 너무 지쳤어요. 제가 가더라도 사람들과 교류할 마음의 여유가 없을 거예요.”“지수야, 엄마가 요즘 기분도 꿀꿀한데 날 데리고 가서 기분 전환이라도 좀 해주렴. 어차피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잖아.”유옥진은 억지로 초대장을 배지수의 손에 쥐여주었다. 평소의 성격이라면 이미 한마디 했을 테지만 배준영 일로 배지수와 약간의 갈등이 있었기 때문에 참아온 것이었다.하지만 배지수가 사람들의 설득에도 계속 고집을 부리며 거절하자 유옥진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시간을 많이 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전 받을 수 없어요. 옛말에 군자는 남의 소중한 것을 빼앗지 않는다고 했죠. 게다가 이 초대장은 분명 중요한 의미가 있을 거예요.”배지수는 진심 어린 말투로 거절에 관해 해명했다.“이 초대장은 지수 씨 말대로 중요한 의미가 있긴 해요.”진성은 웃으며 말을 이었
자리에 앉은 후, 양쪽은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마쳤다.“민수 씨, 보아하니 이 지역 사람은 아닌 것 같네요?”임지환은 아무렇지 않은 척 슬쩍 물었다.육민수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목을 적시고 말했다.“저는 백운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이번에 내려온 건 여행을 통해 자신을 단련하기 위해서입니다.”“여행이라고요?”임지환은 순박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육민수를 보며 살짝 놀란 듯 물었다.“맞습니다, 이번이 산에서 처음 내려오는 겁니다.”육민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스승님께서 배울 건 거의 다 배웠으니 나머지는 여행을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그래요? 그렇다면 민수 씨는 은둔한 검수란 말이군요. 근데 민수 씨 등에 멘 그 상자 속에는 대체 어떤 절세 명검이 숨겨져 있는 겁니까?”임지환은 차를 든 채로 무심하게 말했다.윙!임지환의 말이 끝나는 순간, 맞은편에 앉아 있던 육민수의 표정이 돌연 엄숙해졌다.육민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임지환을 노려보며 물었다.“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왜 그러죠?”임지환이 담담하게 되물었다.“어떻게 내 상자 속에 검이 들어 있는 걸 알았습니까? 설마 날 계속 미행해 온 겁니까?”육민수는 칼집에서 칼날이 뽑혀 나온 듯한 기세를 뿜어내며 사람을 압도하는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발산했다.“진정해요, 난 당신에게 악의는 없어요.”임지환은 아무렇지 않은 듯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느긋하게 말했다.“왜 내가 상자 속에 있는 게 명검이란 걸 아는지 궁금한가요? 내가 그냥 추측한 거라면 믿을 수 있나요?”“믿습니다.”몇 초 동안 고민하던 육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임지환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민수 씨, 당신은 생각보다 훨씬 똑똑하군요.”육민수는 임지환을 지긋이 바라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당신도 생각보다 훨씬 더 속이 깊은 사람이군요.”“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자세히 들어보고 싶군요.”임지환은 육민수에게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세속의 일반인들은 그렇게 쉽게 검수의 존재를 알아채지
“넌 누구야? 이 녀석을 감싸려는 거야? 내 신발은 200만 원짜리 신발이야. 네 몸에 걸친 그 싼 구제 옷이랑은 비교도 안 된다고.”장해수는 임지환을 힐끔 보며 코웃음을 쳤다.비록 임지환은 육민수보다 훨씬 더 정상적인 사람 같아 보였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걸친 걸 다 합쳐도 10만 원이 넘지 않을 것 같았다.장해수는 이런 사람은 신경 쓸 필요도 없다고 여긴 것이다.“겨우 200만 원 갖고 이렇게 화내? 큰돈도 아니잖아.”이때 이청월이 뒤따라와 말했다.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샤넬 가방에서 돈뭉치를 꺼내어 바로 옆 빈 테이블에 올려놓았다.이청월의 행동은 아주 자연스럽고 매끄러웠다.“헉...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었나?”장해수는 임지환이 가리고 있던 시야에서 벗어난 이청월을 보자마자 시선을 이청월 몸에서 뗄 수 없었다.식당 안에 있던 다른 남자 손님들도 이청월의 뛰어난 외모를 보며 잠시 넋을 잃었다.이렇게 아무런 성형 수술 흔적도 없이도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여성은 요즘 시대에 참 보기 드물었다.사람들의 시선은 곧 임지환의 저렴한 옷차림으로 옮겨졌고 속으로는 질투가 활활 타올라 임지환을 모욕하기 시작했다.“또 여자 등쳐먹는 기생오라비야? 저렇게 예쁜 여자가 왜 저런 녀석이랑...”“아가씨 체면을 봐서 이 돈은 받아둘게. 근데 이건 만 원이 안 되잖아.”장해수는 순식간에 돈을 세어보곤 다시 빈정거렸다.그 돈뭉치는 60만이었고 장해수가 요구한 금액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네가 신은 신발이 진품이라 해도 최대 40만 원 정도일 거야. 더군다나 너 그거 짝퉁이잖아.”이청월은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그러니까 60만 원이면 충분하고도 남아.”“밥은 아무렇게나 먹어도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돼. 무슨 증거라도 있어? 내가 신은 신발이 짝퉁이라는 걸 입증할 증거 말이야.”장해수는 이청월의 정곡을 찌르는 말을 듣고 내심 당황했다.사실 이 신발은 장해수가 8만 원 주고 산 고퀄리티 짝퉁이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절대 그걸 인정할 수 없었다.
“손대지 마!”남자가 황급히 소리쳤지만 이미 한발 늦었다. 하얀 머리 청년은 손으로 검은 천을 살짝 벗겨냈다.윙!임지환은 갑자기 오싹한 냉기가 식당을 감도는 기묘한 기운을 느꼈다.다시 집중해서 감지하자 그건 다름 아닌 예리한 검기였다.남자는 하얀 머리 청년의 손목을 꽉 잡았고 아까와 달리 부드럽던 눈빛이 확 차갑고 날카로워졌다.“내 물건에 손대지 마. 안 그러면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남자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고 하얀 머리 청년의 손을 밀어내고는 다시 조심스럽게 검은 천을 덮으며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 정성스럽게 접었다.그 과정을 마친 후, 남자의 차가웠던 눈빛은 다시 온화하고 순박한 모습으로 돌아왔고 조그마한 살기도 없는 사람처럼 무난해 보였다.“겨우 너덜너덜한 상자 하나 가지고 뭘 그렇게 유난이야?”하얀 머리 청년은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날 이렇게 툭 쳐놓았으면 적어도 사과는 해야 하는 거 아니야?”“어떻게 사과하면 되겠어?”남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내 이 신발은 한정판이야. 200만 원이 넘는다고. 근데 네가 이렇게 더럽게 만들었으니 내가 어떻게 신고 다니겠냐고?”하얀 머리 청년은 뻔뻔하게 말했다.“그럼... 내가 어떻게 하길 원해?”남자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자기가 잘못한 게 맞다고 인정하는 듯했다.하얀 머리 청년 장해수는 흡족한 표정으로 웃으며 남자를 내려다봤다. 이 남자가 마을에서 처음으로 시내로 올라온 촌스럽고 순진한 사람이라 살짝 겁주기만 하면 쩔쩔맨다는 걸 알아차렸다.“간단하지. 신발값 물어내.”장해수는 의자를 하나 끌어다 앉아 다리를 꼬았다.“난... 돈 없어.”남자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이제야 남자는 돈이 없으면 영웅도 꼼짝 못 한다는 말이 실감 나는 것 같았다.“돈 없다고? 돈도 없으면서 음식점에 들어와? 난 네가 진짜 돈이 있든, 없든 하나도 상관없어. 오늘 신발값 물어내지 않으면 경찰 불러서 널 잡아넣을 거야.”장해수는 계속 몰아붙였다.“이 사람
“안 돼, 꼭 한 입 먹어봐. 안 그러면 내가 직접 먹여줄 거야.”이청월은 고귀한 신분을 자랑하는 여왕처럼 임지환에게 명령하듯 말했다.“그럼... 알았어.”이청월의 기대에 찬 눈빛을 보며 임지환은 마지못해 한 입 떼어먹었다.“어때? 너무 맛있지?”이청월은 기대에 가득 차서 물었다.“괜찮네...”임지환은 대충 웃어넘기고는 이내 물었다.“얼마나 더 걸을 거야?”“왜? 벌써 지친 거야?”이청월은 앞을 내다보고는 웃으며 말했다.“저 앞에 괜찮아 보이는 식당이 있는데 저기서 저녁 먹고 호텔로 가는 게 어때?”“그러자!”임지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세 번 절하고 아홉 번 꿇는 것까지 견뎠는데 이 정도는 문제도 아니었다.두 사람은 함께 운우 골목에 위치한 “천향 식당”에 들어갔다.식당 내부는 고풍스럽게 꾸며져 있었고 값비싼 홍목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심지어 최고급 백단향이 타오르고 있었다.아마도 이 과시적인 분위기에 관광객들이 약간 눌린 것인지 레스토랑 내부는 손님이 많지 않아 비교적 조용했다.임지환과 이청월은 2층에 올라가 자리를 잡고 음식을 주문했다.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심심한 이청월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놀고 있었다.임지환은 본능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곧 시선을 한 사람에게 고정했다.임지환의 시선을 잡은 사람은 식당 입구에 서 있던 한 남자였다.임지환이 특별한 취향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 남자가 너무 독특했기 때문이었다.남자는 우람진 체형에 날카로운 눈매와 눈동자를 가졌고 온몸에서 강렬한 고수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하지만 그 남자는 딱 봐도 특이한 헝겊으로 된 긴 상의와 긴 바지를 입고 있었고 발에는 헝겊신을 신고 있었다.남자의 등에는 길쭉한 상자를 검은 천으로 싸서 메고 있었는데,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었다.그 기묘한 차림 덕분에 임지환은 물론, 주위 사람들의 시선도 당연히 한 몸에 받았다.하지만 남자는 부끄러운 듯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식당 안쪽을 향해 바라
“나더러 제자를 받으라고?”임지환의 표정이 묘해졌다.전에 소태진이 제자 타령하더니 이번엔 이민재가 이러네...임지환은 이 노인들이 그렇게도 할 일이 없는 건지 궁금해졌다.“안 받아!”임지환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이민재는 임지환이 이렇게 단칼에 거절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해 잠시 멍해졌다.이래 봬도 명의라 불릴 만큼 명성이 자자한 자기가 어디를 가든 분명 환영받고 존중받을 정도인데 임지환에게 이토록 매정하게 거절당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거절하는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이민재는 조심스럽게 이유를 물었다.“넌 너무 늙었고 못생겼잖아. 내가 원하는 건 미인이란 말이야.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너한테 관심이 생기겠어?”임지환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네?”이민재는 입이 떡 벌어져 말을 잇지 못했다.설마 자기가 단호하게 거절당한 이유가 늙고 못생긴 데다 미인이 아니기 때문일 줄이라니, 놀라울 따름이었다.이청월이 옆에서 웃으며 입을 열었다.“영감, 내가 좋은 방법 하나 알려줄까?”“무슨 방법인데요?”이민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었다.“외국에 가서 성전환 수술하고 얼굴 리프팅까지 하고 오면 돼. 그러면 내가 임지환에게 널 제자 삼으라고 말해볼게.”이청월은 말을 마치자마자 배를 잡고 웃음을 터트렸다.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허청열과 화도윤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고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체면을 생각해서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당신들... 이건 너무하잖아요! 제자를 안 받는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사람을 모욕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이민재는 눈을 부라리며 씩씩댔고 분노가 가득 찬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평생 힘들게 쌓아온 명성이 오늘 하루 만에 모두 날아가는 기분이었다.“아직도 모르겠어? 내가 널 제자로 안 받는 이유는 네가 미인이 아니거나 늙어서도 아니야.”임지환은 조금 모자란 바보를 보는 듯한 눈빛을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그럼 도대체 왜 안 받는 겁니까?”이민재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임 대사, 정말 고맙습니다. 도윤아, 날 대신해서 임 대사를 정성껏 대접해라!”화연평은 그제야 임지환의 말을 따라 침대에 편안하게 누우며 화도윤에게 조용히 당부했다.임지환과 이청월도 더 이상 화연평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고 방을 나섰다.“임 선생님, 제가 자인 호텔에 방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화도윤이 싱글벙글 웃으며 얼른 쫓아 나와 임지환에게 말했다.“필요 없어. 우리가 직접 거기로 갈 테니 넌 여기서 화 장군님을 잘 돌봐.”임지환은 손을 흔들며 거절했다.“임지환, 우리가 간만에 금릉에 왔잖아. 제대로 한 번 쇼핑도 하고 맛있는 것도 사 먹자.”이청월은 지금 상황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그래, 네 말대로 하자.”임지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잠깐! 두 분, 멈춰주세요!”두 사람이 막 떠나려 할 때 이민재가 허겁지겁 뒤쫓아왔다.“이 침왕, 아직도 볼 일이 남았나요?”화도윤의 이마에 주름이 잡히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아까 이민재가 저지른 실수 때문에 아버지가 자칫 죽을 뻔했으니 화도윤의 마음속엔 여전히 이민재에 대한 불만이 남아 있었다.이민재가 의술로 유명하지 않았다면 이미 저택에서 쫓아냈을 것이다.“임 선생님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이민재는 아까와는 다르게 공손한 태도로 존댓말까지 써가며 말했다.“부디 가르침을 부탁드리겠습니다.”“뭘 묻고 싶은 거야?”임지환은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화 장군님 체내의 사악한 기운을 도대체 어떻게 제거하셨는지 궁금합니다.”이민재는 진심으로 지식에 굶주린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제가 침을 놓을 때 장군님 체내의 생기를 운용해 분명 어느 정도 효과를 보였는데 왜 결국엔...”“내가 왜 너에게 말해줘야 하지?”임지환이 이민재의 말을 끊었다.“그건...”이민재는 그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임지환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굳이 자기에게 말해줄 필요가 없다는 걸 이민재는 알고 있었다.“저는 의사로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
“아악!”비명이 또 방에서 들려왔고 이번엔 더 고통스럽고 무시무시했다.“날 들여보내 주세요!”화도윤은 방 안에서 들려오는 처절한 비명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화 회장님, 죄송합니다만, 그럴 순 없습니다.”허청열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화도윤을 막아섰다.“허 교관! 넌 정말 이대로 우리 아버지를 죽게 내버려두겠다는 건가?”화도윤의 눈은 핏발이 서서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물어뜯을 것 같은 야수 같았다.“저도 물론 장군님이 돌아가시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임 선생님 외에는 누구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임 선생님이 허락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들어가게 놔둘 순 없습니다.”허청열은 이를 악물고 단호하게 말했다.옆에 있던 이청월의 얼굴도 창백해졌다. 방 안에서 들려오는 비명이 너무나도 끔찍했기 때문이었다.“이대로 가다간 나조차도 장군님의 생명을 지탱하기 어려울 겁니다.”이민재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내 생각엔 먼저...”“끄악!”다시 한번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고 방 안은 곧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고 더 이상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화도윤과 허청열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할 말을 잃었다.“어휴... 이젠 무슨 말을 해도 늦었습니다.. 당신들, 사람을 잘못 믿은 겁니다.” 이민재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끼익...”바로 그때, 임지환이 문을 열고 나와 태연한 표정으로 물었다.“방금 뭐가 늦었다고 했어?”“넌 실력도 부족하면서 괜히 잘난 척하다가 화 장군님을 네 손으로 죽인 거야. 이제 어떻게 수습할지 지켜보겠어.”이민재는 냉랭하게 비웃으며 재밌는 구경이라도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임 선생님...”허청열이 조심스럽게 앞으로 다가와 조급한 얼굴로 물었다.“걱정 마, 장군님 체내의 사악한 기운은 내가 이미 완전히 제거했어. 이제 장군님 생명에는 더 이상 지장이 없을 거야.”임지환은 표정 변화도 없이 차분하게 대답했다.“정말입니까?”“임 선생님, 그 말씀, 정말입니까?”화도윤과 허청열은
“만약은 절대 없습니다!”화도윤의 눈빛이 갑자기 날카로워지며 은은하게 살기가 서렸다.“이 영감탱이가 아직도 제정신이 아니네. 말을 왜 이 따위로 해? 네가 실력이 바닥을 친다고 해서 임지환 실력도 바닥을 친다는 도리는 없잖아!”이청월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임지환을 깎아내리는 말이라 곧바로 받아쳤다.“이 버릇없는 계집, 닥치지 못해? 난 아직 네 죗값도 묻지 않았어!”이민재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손을 들었다.“이 침왕, 자중하십시오.”둘을 지켜보던 허청열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이청월 앞을 막아섰다.허청열의 몸에서 칼날이 칼집에서 막 빠져나오기 직전인 듯 날카로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좋아요, 저 녀석이 진짜 화 장군님을 살려낸다면 이 부러진 손은 그냥 넘어가 주겠습니다. 하지만 살려내지 못한다면 화 선생은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길 바랍니다.”이민재는 속으로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이민재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허청열과 싸워봤자 손쉽게 당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콜록콜록...”방 안에서 갑자기 거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그 기침 속에는 피를 토하는 소리까지 섞여 있는 듯했다.화도윤의 얼굴이 굳어지며 안으로 뛰어들 듯이 몸을 움찔했다.그러나 허청열이 화도윤을 막아섰고 고개를 저으며 냉정하게 말했다.“화 회장님, 임 선생님의 허락 없이는 우리가 밖에서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알겠네.”화도윤은 어쩔 수 없이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지금, 화도윤은 임지환에게 모든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한편, 방 안에서 오랜 시간 거친 숨을 몰아쉬던 화연평이 마침내 힘겹게 피곤이 가득한 눈을 떴다.화연평은 희미하게 보이는 임지환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임... 임 대사, 고... 고맙습니다.”“화 장군님, 아직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치료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조금 고통스러울 수도 있으니 꾹 참고 견뎌주시길
“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난 의사로서 수십 년간 수많은 생명을 구했고 의학계에서 꾸준히 명성을 쌓아왔어. 오늘 너 같은 풋내기에게 내 명예를 더럽히게 둘 수는 없어!”이민재는 수염을 부들부들 떨며 분노로 눈이 뒤집혀 거의 쌍욕이라도 할 듯한 기세였다.“이 영감탱이가 어쩜 이렇게 말이 안 통하지? 환자가 너 때문에 병이 더 악화했는데도 뭐라 하지 말라는 거야?”이청월은 눈을 부릅뜨고 이민재에게 쏘아붙였다.이민재가 일반 사람들에게는 오랜 명성을 자랑하는 침술의 대가일지 몰라도 이청월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중요한 건 단 하나, 임지환을 건드리는 건 절대 안 된다는 것뿐이었다.“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이민재는 이청월을 가리키며 화가 치밀어 올라 말을 잇지 못했다.“지금 화 장군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인데 넌 환자를 살릴 방법을 찾기보다 네 명성 걱정부터 앞서는구나. 내 생각엔 넌 그냥 명예에만 집착하는 돌팔이야!”이청월의 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고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민재의 급소를 정확히 찔렀다.“어디서 나타난 계집이 감히 어르신에게 말대꾸를 해? 오늘 내가 네 부모를 대신해 제대로 교육해 주마!”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이민재는 더 이상 체면 따위는 개의치 않고 손을 뻗어 이청월을 때리려 했다.하지만 이민재의 손이 이청월에게 닿기도 전에 임지환이 그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고 가볍게 힘을 주었다.딱!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민재의 팔이 임지환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부러지는 소리였다.“아악!”이민재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팔을 부여잡았고 그의 얼굴은 분노와 고통으로 붉게 달아올랐다.허청열과 화도윤은 이 광경에 놀라서 숨을 들이쉬며 얼굴이 창백해졌다.임지환의 행동은 너무나 대담했다. 침술의 왕이라 불리는 이민재의 팔을 부러뜨리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이 일이 의학계에 널리 퍼지기라도 하면 임지환은 의학계 전체의 적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허 교관, 지금부터 난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