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그룹은 이씨 가문의 손을 거치며 이미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장했다. 배지수의 신분도 자연히 덩달아 높아졌고 지금은 진성을 능가하는 위치에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지수는 진성이 이렇게까지 비굴해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지수야, 진 가주도 호의 외엔 딴 의미 부여가 없을 거야. 듣자 하니 이 초대장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살 수 없다고 하더구나. 강한시 지역에서 자산이 2000억을 넘는 갑부들만이 유람선에 오를 자격이 있다고 들었어.”척척박사라 불리는 한수경은 진성이 유람선 초대장을 건넨다는 말을 듣자 두 눈이 번쩍였다. 그래서 서둘러 초대장의 가치를 바로 짚어냈다.진화도 옆에서 한수경을 거들었다. “지수야, 이제 네 경성 그룹도 2000억의 기준선을 넘었으니 이 초대장을 받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없이 당연한 일이야.”진화는 얼마 전에 배지수에게 손을 대려는 마음을 접었었다. 하지만 진운이 진씨 가문을 떠난 지금, 경성 그룹도 재도약하자 진화는 다시 배지수에게 마음을 품게 되었다.“미안하지만 사양하겠어요.”배지수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제 동생 병 때문에 너무 지쳤어요. 제가 가더라도 사람들과 교류할 마음의 여유가 없을 거예요.”“지수야, 엄마가 요즘 기분도 꿀꿀한데 날 데리고 가서 기분 전환이라도 좀 해주렴. 어차피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잖아.”유옥진은 억지로 초대장을 배지수의 손에 쥐여주었다. 평소의 성격이라면 이미 한마디 했을 테지만 배준영 일로 배지수와 약간의 갈등이 있었기 때문에 참아온 것이었다.하지만 배지수가 사람들의 설득에도 계속 고집을 부리며 거절하자 유옥진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시간을 많이 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전 받을 수 없어요. 옛말에 군자는 남의 소중한 것을 빼앗지 않는다고 했죠. 게다가 이 초대장은 분명 중요한 의미가 있을 거예요.”배지수는 진심 어린 말투로 거절에 관해 해명했다.“이 초대장은 지수 씨 말대로 중요한 의미가 있긴 해요.”진성은 웃으며 말을 이었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가 어느새 결전의 날이 성큼 다가왔다.날이 채 밝기도 전에 오래된 한국형 차량이 천천히 용문산으로 들어섰다.“문주 님, 도착했습니다.”운전사 정호가 차를 저택 문밖에 멈추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화려한 한복을 입은 강진수는 천천히 눈을 뜨고 차에서 내렸다. 오늘 강진수는 운전사 외에 아무도 데려오지 않았다. 그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저택의 초인종을 눌렀다.잠시 후, 대문이 천천히 열렸다.“들어오시죠.”헐렁한 운동복을 입은 임지환이 문을 열고 냉랭한 표정을 지으며 강진수를 힐끔 쳐다봤다.하지만 강진수는 저택에 들어가지 않고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난 그저 용두 지팡이을 회수하러 왔을 뿐이고 임 대사를 요트에 데리고 가기 위해 찾아왔어요.”“내가 당신과의 약속을 어길까 봐 두려운 겁니까?” 임지환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질문을 던졌다.그 질문에 강진수는 비꼬듯이 웃으며 말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죠. 이번에 내 전 재산을 걸었으니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나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 피해를 보게 될 테니까요.”“알겠어요. 같이 가주면 될게 아닌가요.”임지환은 몸을 돌려 거실에 미리 놓아둔 용두 지팡이을 가져와 곧바로 조수석에 올라탔다.“불과 이틀 만에 임 대사의 몸이 어쩐지 더 야윈 것 같은데요?”강진수는 눈에 띄게 체형이 바짝 마른 임지환을 의문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하지만 강진수는 이내 자기가 너무 긴장해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진 거라고 여겼다.“역시 네 말이 맞았어. 강진수가 왔네.”2층 침실의 통유리 창문 앞에 서 있던 이청월은 한국형 차량이 용문산을 떠나는 것을 보며 휴대폰을 꺼냈다.“좋아. 난 이미 요트에 잠입했어. 이제 시간 내서 계획대로 허청열에게 전화해 이 상황을 알려주기만 하면 돼.”휴대폰 너머에서는 임지환과 고도로 흡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청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다. “너도 조심해. 그들이 노리는 최우선 목표는 바로 너니까.”“그놈들은 한
“배지수, 넌 참 배은망덕한 여자구나. 근데 배에 오르면 네가 한 말이 얼마나 우스운지 곧 알게 될 거야. 네가 코딱지만 한 경성 그룹 하나로 운명을 바꾸겠다는 건 지나가던 개도 웃을 허무맹랑한 망상이야.”진화는 배지수의 생각을 듣고 냉소를 지으며 비웃고는 이내 배지수를 따라 창밖을 바라보았다.배지수는 진화의 비웃음에도 그저 무심하게 웃어넘겼다.진화는 비록 진씨 가문의 차기 가주이긴 하지만 안목은 가주답지 않게 매우 좁았다.배지수가 이렇게 과감하게 진씨 가문과 친밀한 관계를 끊은 이유는 더 이상 진화와 얽히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게다가 배지수는 이번에 임 대사를 만나기 위해 배에 오르려고 한 것이고 진화는 임 대사에 비하면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반 시간 후, 벤츠는 부두에 도착했다.진화는 말없이 배지수 모녀를 버려두고 부두를 떠났다.배지수 역시 진화의 쌀쌀한 태도에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진성이 준 초대장을 꺼내 들고 유옥진과 함께 송씨 가문의 희망호 유람선에 올랐다.이 호화 유람선은 총 5층으로 되어 있었으며 카지노, 레스토랑, 바 등 각종 오락 시설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다. 그야말로 이동식 호텔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호화로웠다.“지수야, 이 유람선 정말 눈부시구나. 우리도 유람선 하나 사면 어떻겠니? 그 유람선 타고 소항으로 돌아가면 네 외삼촌들이 얼마나 부러워할지 몰라.”송씨 가문 유람선의 웅장하고 호화로운 모습에 유옥진은 신나기도 하고 질투도 나서 배지수 몰래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엄마, 농담도 잘하시네요.”배지수는 유옥진의 말에 어떤 반응을 해야 몰라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중형 유람선 하나만 해도 백억 단위예요. 이런 5성급 유람선은 몇백억은 족히 할걸요. 내 회사를 팔아야만 살 수 있을걸요... 그렇지 않으면 어떤 수단으로도 살 수 없어요.”경성 그룹의 현재 시가는 2000억을 넘지만 배지수가 손에 쥐고 있는 현금은 겨우 몇십 억일 뿐이었다.회사의 주식을 싹싹 끌어모아도 겨우 억만장자 클럽에 간신히 들어갈
배지수의 눈에는 의심과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은 갑자기 나타난 이 여자의 말에 당혹스러워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아가씨, 사람 잘못 본 거 아닌가요?”임지환은 눈살을 찌푸리며 냉정한 시선으로 배지수를 바라보았다. “난 아가씨를 전혀 모르는데요?”임지환의 시선은 결연했고 냉담함마저 살짝 담겨 있었다.“이 여자는 누구야? 감히 임 대사님께 저런 식으로 말하다니, 죽고 싶어 환장했나?”“경호원들은 뭐 하는 거야? 이런 정체불명의 여자도 감히 들여보내? 무슨 소동을 일으키려고 하는 거야?”“거기 누구 없어? 얼른 이 여자를 끌어내! 임 대사님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안 된다고!”갑자기 나타난 여자가 임지환과 애매한 관계일 거라 예상했던 그룹 회장들은 임지환이 의아해하는 모습을 보자 약속이라도 한 듯 이구동성으로 호통쳤다.순식간에 배지수는 모든 사람의 화살을 받게 되었다.“끌어낼 필요 없어. 이 아가씨가 사람을 잘못 본 걸 거야.”임지환은 손을 내저으며 배지수를 끌어내려고 준비하던 경호원들을 제지했다.“사람을 잘못 봤다고? 부부로 3년을 살았는데 내가 어떻게 사람을 잘못 보겠어?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너만큼은 절대 잘못 볼 리 없어!”배지수는 고개를 꼿꼿이 세우며 완강함이 가득한 얼굴로 받아쳤다.“헐...”순간,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은 차가운 숨을 들이마셨다.이 여자의 말은 그들에게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임 대사가 이미 결혼했단 말인가?“부부로 3년 살았다고? 네가 다른 사람과 날 헷갈린 게 분명하네. 내가 언제 너 같은 속물근성을 가진 여자를 아내로 맞았다는 거야? 웃기지 마.”임지환은 표정이 변하지 않았지만 눈빛은 한층 더 차가워졌고 그 눈빛에는 조롱과 비난이 섞여 있었다.“너 나 망신 주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배지수는 눈을 부릅뜨고 임지환을 노려보았다.하지만 보면 볼수록 임지환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전에 없던 낯선 기운이었다.“웃기고 자빠졌네. 임 대사님 같은 분이 너랑 결혼했을 리가 있나?
“네가 계속 이렇게 무례하게 굴면 우리 승천 강철이 너희 경성 그룹과의 협력을 중단할 수밖에 없어. 알겠어?”승천 강철의 회장 유태서도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배지수를 위협했다.유태서가 버럭 화내자 배지수의 얼굴에도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승천 강철은 경성 그룹의 가장 중요한 협력 파트너인데 협력이 중단되면 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터였다.이런 상황에서 배지수는 어쩔 수 없이 서둘러 해명했다. “유 회장님, 오해예요. 아마 제가 이분을 딴 사람과 착각했나 봐요.”“그렇다면 다행이야. 임 대사님을 잘못 건드리기라도 하면 나까지 곤란해지거든. 그 책임은 네가 지기에는 너무 무거울걸.”유태서는 콧방귀를 뀌며 차갑게 말했다.“오해라면 나도 더 이상 너와 따지지 않겠어. 하지만 네가 계속 소란을 피우면 나도 무정하게 대할 수밖에 없어.”임지환은 냉랭한 말투로 쏘아붙이고는 곧장 로비 안쪽의 휴게실로 들어갔다.그룹 회장들도 한 발짝 뒤에서 조용히 임지환을 따라갔다.조금 전까지 떠들썩하던 갑판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배지수와 유옥진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지수야, 우리 정말 사람을 잘못 본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가 없잖아... 임지환 그 폐물이랑 이렇게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을 수가 있나?”매운 귀싸대기를 한 대 맞은 유옥진은 여전히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방금 본 사람은 외모가 임지환과 똑같았지만 성격은 완전히 딴판이었다.“나도 잘 모르겠어요.”배지수의 표정도 갈피를 잡지 못한 것 같았다.그때, 2층에서 어쩔 수 없는 듯한 답답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장모님, 제가 지수와 이혼했어도 굳이 저를 그렇게 헐뜯으실 필요는 없잖아요?”놀란 모녀의 시선 속에서 웨이터 복장을 한 임지환이 2층에서 천천히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임지환! 방금 넌 여기에...”배지수는 임지환이 다시 나타나자 당황해서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방금 내가 어쨌어?”임지환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반짝였다.모녀는 임지환의 모습을 넋 놓고 멍하니 바라
임지환이 입을 열어 상황을 설명하려던 순간, 유람선의 뚱뚱한 인사 담당자가 다급하게 쫓아 나왔다.“임지환, 너 여기서 뭘 빈둥거리고 있어? 주방 쪽에서 계속 재촉하잖아. 네가 임 사장님 친척 아니었으면 내가 벌써 널 배에서 내쫓았을 거야!”뚱뚱한 인사 담당자는 씩씩거리며 말을 마치고 거침없이 임지환을 향해 걸어왔다.“어쨌든 경고는 했어. 네가 안 가면 나중에 무슨 위험이 생겨도 내가 널 챙길 여력은 없을 거야.”임지환은 배지수를 힐끗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너나 잘해. 내가 가든 말든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배지수는 콧방귀를 뀌며 다시 예전의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배지수가 대중 앞에서 그렇게 큰 망신을 당한 건 전적으로 이 녀석 때문이었다. 임지환이 임 대사와 비슷하게 생기지만 않았다면 사람을 잘못 알아볼 일도 없었을 거다.지금 이렇게 평온한 태도로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참을 만큼 참은 셈이었다.“내가 할 말은 다 했으니까 결정은 네가 알아서 해.”임지환은 마지막으로 한마디 던지고 인사 담당자와 함께 다시 배 안의 작업실로 들어갔다.“이 녀석은 진짜 어디를 가도 계속 귀찮게 따라붙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창피당한 것도 다 이 녀석 때문이야. 하필이면 왜 임 대사랑 똑같게 생겨 먹었어?”유옥진은 임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잔뜩 화가 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저 녀석만 아니었어도 내가 어떻게 임 대사님께 그런 실수를 했겠어요?”배지수 역시 모든 잘못을 임지환에게 돌렸다. 그녀가 속으로 짠 모든 계획이 임지환 때문에 전부 틀어졌다. 이번엔 임 대사님을 설득해 배주영을 치료하는 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강한시 거물급 인물들 앞에서 체면을 완전히 구겼다. 앞으로 강한시에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란 말인가?“이번엔 정말 철저히 망했어요. 우리 빨리 배에서 내리죠. 더 이상 창피당하기 전에.”배지수는 쓴웃음을 지으며 유옥진에게 말했다. 사실 배지수는 임 대사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현실은 그녀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쳐 엄청난 충격을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임지환이 담담한 말투로 지시했다.유란은 그 말을 듣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환하게 웃었다.방금 자기가 임지환의 허락도 없이 배지수를 일부러 난처한 곤경으로 밀어 넣은 것을 임지환이 혹시 질책할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었다.“그리고 진태양과 대결할 때는 적당히 끝내도록 해. 진지하게 싸우면 네가 이기기 힘들 거야.”임지환은 진지한 얼굴로 당부했다.“임 선생님,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유란도 상황을 잘 알고 있습니다.”유란은 말을 마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우려를 드러냈다.“전에 임 선생님께서 제게 선생님이 이기는 쪽에 돈을 걸라고 하셨는데 이번에 지면 손해가 만만치 않을 텐데요.”“괜찮아, 거미줄 조직 킬러들 현상금만으로도 이번 손해는 충분히 보상할 수 있어. 그리고 이번에 난 손해만 본 게 아니야.”임지환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임지환이 용두 지팡이에서 얻은 그 작은 보물 지도가 조 단위의 가치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다른 일이 없으면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미리 준비해 둔 인조 가면입니다. 필요하시면 제가 직접 씌워드릴까요?” 유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임지환은 유란에게서 인조 가면을 받아서 들며 차분히 말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넌 가서 볼일 봐. 시간이 지나다 보면 강진수 같은 늙은 여우가 의심할지도 몰라.”“알겠습니다!”유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빠르게 화장실을 나갔다.유란이 떠난 뒤, 임지환은 화장실 밖 거울 앞에 서서 인조 가면을 썼다. 그러자 순식간에 임지환은 밝고 잘생긴 청년으로 변신했다.거울 속 자신을 보며 임지환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중얼댔다. “그물은 충분히 펼쳤으니 이제 회수할 때가 됐군!”...유람선의 최상층 커플 스위트룸.외국에서 온 화교 남녀가 마주 앉아 있었고 그들 옆에는 다양한 총기가 줄지어 있었다.“유레카, 이번 작전 목표가 드디어 나타났어. 탐랑과 약속한 시간까지 이제 5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짧고 둔탁한 총성이 연이어 울려 퍼졌다.총알은 하나도 빠짐없이 접시에 명중했다.“너희 킬러들은 정말 신중하구나. 내가 조금이라도 반응이 늦었으면 벌써 벌집이 됐겠지?”임지환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연기를 하며 두 사람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서로 같은 처지야. 중요한 일이라 신중할 수밖에 없지.”유레카가 총을 내려놓고 눈앞의 낯선 소년을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탐랑은 항상 우리랑 단독으로 연락하던데 왜 갑자기 사람을 보낸 거지?”“이번엔 여기 유람선에 사람이 너무 많아. 한 사람만으로는 감당이 안 되니까. 너희 둘 말고도 이번 작전에 참여한 사람 중 탐랑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임지환은 자연스럽게 대답을 이어갔다.브루스는 그 말을 듣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건 그렇지. 우리 부부는 탐랑과 오랜 파트너니까 말이야.”“그 임 대사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광대랑 킹콩도 그놈에게 당했다고 들었어. 본부에서는 이번에 아예 배에 폭탄 열 개를 설치하라고 지시했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우리 목숨도 위험할 거야.”유레카의 얼굴엔 심각한 표정이 스쳤다.“폭탄? 너희도 나랑 같은 생각을 했구나. 나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폭탄을 설치했어. 너희가 설치한 곳을 알려줘야 계획이 완벽해질 수 있어.”임지환은 일부러 놀란 표정을 지으며 폭탄의 위치를 캐내려 했다.“정말 바보가 따로 없구나.”브루스는 임지환을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탐랑이 내 ‘폭탄 전문가'라는 별명을 너한테 안 알려줬나 보네? 다행히 내가 미리 표시해 두고 지도를 그려놨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브루스는 말을 마치고 곧 가방에서 손수 그린 지도를 꺼내려 했다.삐빅...바로 그때, 유레카의 핸드폰에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계획 변경. 내 지시를 기다려라. 탐랑으로부터]그 문자를 보자마자 유레카의 표정은 순식간에 급격하게 어두워졌다.그녀는 휴대폰을 집어넣고 총을 들어 임지환을 겨누며 차갑게 물었다.“넌 대체 누구야?”“유레카, 갑자기
자리에 앉은 후, 양쪽은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마쳤다.“민수 씨, 보아하니 이 지역 사람은 아닌 것 같네요?”임지환은 아무렇지 않은 척 슬쩍 물었다.육민수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목을 적시고 말했다.“저는 백운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이번에 내려온 건 여행을 통해 자신을 단련하기 위해서입니다.”“여행이라고요?”임지환은 순박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육민수를 보며 살짝 놀란 듯 물었다.“맞습니다, 이번이 산에서 처음 내려오는 겁니다.”육민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스승님께서 배울 건 거의 다 배웠으니 나머지는 여행을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그래요? 그렇다면 민수 씨는 은둔한 검수란 말이군요. 근데 민수 씨 등에 멘 그 상자 속에는 대체 어떤 절세 명검이 숨겨져 있는 겁니까?”임지환은 차를 든 채로 무심하게 말했다.윙!임지환의 말이 끝나는 순간, 맞은편에 앉아 있던 육민수의 표정이 돌연 엄숙해졌다.육민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임지환을 노려보며 물었다.“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왜 그러죠?”임지환이 담담하게 되물었다.“어떻게 내 상자 속에 검이 들어 있는 걸 알았습니까? 설마 날 계속 미행해 온 겁니까?”육민수는 칼집에서 칼날이 뽑혀 나온 듯한 기세를 뿜어내며 사람을 압도하는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발산했다.“진정해요, 난 당신에게 악의는 없어요.”임지환은 아무렇지 않은 듯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느긋하게 말했다.“왜 내가 상자 속에 있는 게 명검이란 걸 아는지 궁금한가요? 내가 그냥 추측한 거라면 믿을 수 있나요?”“믿습니다.”몇 초 동안 고민하던 육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임지환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민수 씨, 당신은 생각보다 훨씬 똑똑하군요.”육민수는 임지환을 지긋이 바라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당신도 생각보다 훨씬 더 속이 깊은 사람이군요.”“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자세히 들어보고 싶군요.”임지환은 육민수에게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세속의 일반인들은 그렇게 쉽게 검수의 존재를 알아채지
“넌 누구야? 이 녀석을 감싸려는 거야? 내 신발은 200만 원짜리 신발이야. 네 몸에 걸친 그 싼 구제 옷이랑은 비교도 안 된다고.”장해수는 임지환을 힐끔 보며 코웃음을 쳤다.비록 임지환은 육민수보다 훨씬 더 정상적인 사람 같아 보였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걸친 걸 다 합쳐도 10만 원이 넘지 않을 것 같았다.장해수는 이런 사람은 신경 쓸 필요도 없다고 여긴 것이다.“겨우 200만 원 갖고 이렇게 화내? 큰돈도 아니잖아.”이때 이청월이 뒤따라와 말했다.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샤넬 가방에서 돈뭉치를 꺼내어 바로 옆 빈 테이블에 올려놓았다.이청월의 행동은 아주 자연스럽고 매끄러웠다.“헉...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었나?”장해수는 임지환이 가리고 있던 시야에서 벗어난 이청월을 보자마자 시선을 이청월 몸에서 뗄 수 없었다.식당 안에 있던 다른 남자 손님들도 이청월의 뛰어난 외모를 보며 잠시 넋을 잃었다.이렇게 아무런 성형 수술 흔적도 없이도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여성은 요즘 시대에 참 보기 드물었다.사람들의 시선은 곧 임지환의 저렴한 옷차림으로 옮겨졌고 속으로는 질투가 활활 타올라 임지환을 모욕하기 시작했다.“또 여자 등쳐먹는 기생오라비야? 저렇게 예쁜 여자가 왜 저런 녀석이랑...”“아가씨 체면을 봐서 이 돈은 받아둘게. 근데 이건 만 원이 안 되잖아.”장해수는 순식간에 돈을 세어보곤 다시 빈정거렸다.그 돈뭉치는 60만이었고 장해수가 요구한 금액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네가 신은 신발이 진품이라 해도 최대 40만 원 정도일 거야. 더군다나 너 그거 짝퉁이잖아.”이청월은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그러니까 60만 원이면 충분하고도 남아.”“밥은 아무렇게나 먹어도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돼. 무슨 증거라도 있어? 내가 신은 신발이 짝퉁이라는 걸 입증할 증거 말이야.”장해수는 이청월의 정곡을 찌르는 말을 듣고 내심 당황했다.사실 이 신발은 장해수가 8만 원 주고 산 고퀄리티 짝퉁이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절대 그걸 인정할 수 없었다.
“손대지 마!”남자가 황급히 소리쳤지만 이미 한발 늦었다. 하얀 머리 청년은 손으로 검은 천을 살짝 벗겨냈다.윙!임지환은 갑자기 오싹한 냉기가 식당을 감도는 기묘한 기운을 느꼈다.다시 집중해서 감지하자 그건 다름 아닌 예리한 검기였다.남자는 하얀 머리 청년의 손목을 꽉 잡았고 아까와 달리 부드럽던 눈빛이 확 차갑고 날카로워졌다.“내 물건에 손대지 마. 안 그러면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남자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고 하얀 머리 청년의 손을 밀어내고는 다시 조심스럽게 검은 천을 덮으며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 정성스럽게 접었다.그 과정을 마친 후, 남자의 차가웠던 눈빛은 다시 온화하고 순박한 모습으로 돌아왔고 조그마한 살기도 없는 사람처럼 무난해 보였다.“겨우 너덜너덜한 상자 하나 가지고 뭘 그렇게 유난이야?”하얀 머리 청년은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날 이렇게 툭 쳐놓았으면 적어도 사과는 해야 하는 거 아니야?”“어떻게 사과하면 되겠어?”남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내 이 신발은 한정판이야. 200만 원이 넘는다고. 근데 네가 이렇게 더럽게 만들었으니 내가 어떻게 신고 다니겠냐고?”하얀 머리 청년은 뻔뻔하게 말했다.“그럼... 내가 어떻게 하길 원해?”남자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자기가 잘못한 게 맞다고 인정하는 듯했다.하얀 머리 청년 장해수는 흡족한 표정으로 웃으며 남자를 내려다봤다. 이 남자가 마을에서 처음으로 시내로 올라온 촌스럽고 순진한 사람이라 살짝 겁주기만 하면 쩔쩔맨다는 걸 알아차렸다.“간단하지. 신발값 물어내.”장해수는 의자를 하나 끌어다 앉아 다리를 꼬았다.“난... 돈 없어.”남자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이제야 남자는 돈이 없으면 영웅도 꼼짝 못 한다는 말이 실감 나는 것 같았다.“돈 없다고? 돈도 없으면서 음식점에 들어와? 난 네가 진짜 돈이 있든, 없든 하나도 상관없어. 오늘 신발값 물어내지 않으면 경찰 불러서 널 잡아넣을 거야.”장해수는 계속 몰아붙였다.“이 사람
“안 돼, 꼭 한 입 먹어봐. 안 그러면 내가 직접 먹여줄 거야.”이청월은 고귀한 신분을 자랑하는 여왕처럼 임지환에게 명령하듯 말했다.“그럼... 알았어.”이청월의 기대에 찬 눈빛을 보며 임지환은 마지못해 한 입 떼어먹었다.“어때? 너무 맛있지?”이청월은 기대에 가득 차서 물었다.“괜찮네...”임지환은 대충 웃어넘기고는 이내 물었다.“얼마나 더 걸을 거야?”“왜? 벌써 지친 거야?”이청월은 앞을 내다보고는 웃으며 말했다.“저 앞에 괜찮아 보이는 식당이 있는데 저기서 저녁 먹고 호텔로 가는 게 어때?”“그러자!”임지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세 번 절하고 아홉 번 꿇는 것까지 견뎠는데 이 정도는 문제도 아니었다.두 사람은 함께 운우 골목에 위치한 “천향 식당”에 들어갔다.식당 내부는 고풍스럽게 꾸며져 있었고 값비싼 홍목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심지어 최고급 백단향이 타오르고 있었다.아마도 이 과시적인 분위기에 관광객들이 약간 눌린 것인지 레스토랑 내부는 손님이 많지 않아 비교적 조용했다.임지환과 이청월은 2층에 올라가 자리를 잡고 음식을 주문했다.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심심한 이청월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놀고 있었다.임지환은 본능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곧 시선을 한 사람에게 고정했다.임지환의 시선을 잡은 사람은 식당 입구에 서 있던 한 남자였다.임지환이 특별한 취향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 남자가 너무 독특했기 때문이었다.남자는 우람진 체형에 날카로운 눈매와 눈동자를 가졌고 온몸에서 강렬한 고수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하지만 그 남자는 딱 봐도 특이한 헝겊으로 된 긴 상의와 긴 바지를 입고 있었고 발에는 헝겊신을 신고 있었다.남자의 등에는 길쭉한 상자를 검은 천으로 싸서 메고 있었는데,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었다.그 기묘한 차림 덕분에 임지환은 물론, 주위 사람들의 시선도 당연히 한 몸에 받았다.하지만 남자는 부끄러운 듯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식당 안쪽을 향해 바라
“나더러 제자를 받으라고?”임지환의 표정이 묘해졌다.전에 소태진이 제자 타령하더니 이번엔 이민재가 이러네...임지환은 이 노인들이 그렇게도 할 일이 없는 건지 궁금해졌다.“안 받아!”임지환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이민재는 임지환이 이렇게 단칼에 거절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해 잠시 멍해졌다.이래 봬도 명의라 불릴 만큼 명성이 자자한 자기가 어디를 가든 분명 환영받고 존중받을 정도인데 임지환에게 이토록 매정하게 거절당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거절하는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이민재는 조심스럽게 이유를 물었다.“넌 너무 늙었고 못생겼잖아. 내가 원하는 건 미인이란 말이야.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너한테 관심이 생기겠어?”임지환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네?”이민재는 입이 떡 벌어져 말을 잇지 못했다.설마 자기가 단호하게 거절당한 이유가 늙고 못생긴 데다 미인이 아니기 때문일 줄이라니, 놀라울 따름이었다.이청월이 옆에서 웃으며 입을 열었다.“영감, 내가 좋은 방법 하나 알려줄까?”“무슨 방법인데요?”이민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었다.“외국에 가서 성전환 수술하고 얼굴 리프팅까지 하고 오면 돼. 그러면 내가 임지환에게 널 제자 삼으라고 말해볼게.”이청월은 말을 마치자마자 배를 잡고 웃음을 터트렸다.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허청열과 화도윤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고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체면을 생각해서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당신들... 이건 너무하잖아요! 제자를 안 받는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사람을 모욕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이민재는 눈을 부라리며 씩씩댔고 분노가 가득 찬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평생 힘들게 쌓아온 명성이 오늘 하루 만에 모두 날아가는 기분이었다.“아직도 모르겠어? 내가 널 제자로 안 받는 이유는 네가 미인이 아니거나 늙어서도 아니야.”임지환은 조금 모자란 바보를 보는 듯한 눈빛을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그럼 도대체 왜 안 받는 겁니까?”이민재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임 대사, 정말 고맙습니다. 도윤아, 날 대신해서 임 대사를 정성껏 대접해라!”화연평은 그제야 임지환의 말을 따라 침대에 편안하게 누우며 화도윤에게 조용히 당부했다.임지환과 이청월도 더 이상 화연평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고 방을 나섰다.“임 선생님, 제가 자인 호텔에 방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화도윤이 싱글벙글 웃으며 얼른 쫓아 나와 임지환에게 말했다.“필요 없어. 우리가 직접 거기로 갈 테니 넌 여기서 화 장군님을 잘 돌봐.”임지환은 손을 흔들며 거절했다.“임지환, 우리가 간만에 금릉에 왔잖아. 제대로 한 번 쇼핑도 하고 맛있는 것도 사 먹자.”이청월은 지금 상황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그래, 네 말대로 하자.”임지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잠깐! 두 분, 멈춰주세요!”두 사람이 막 떠나려 할 때 이민재가 허겁지겁 뒤쫓아왔다.“이 침왕, 아직도 볼 일이 남았나요?”화도윤의 이마에 주름이 잡히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아까 이민재가 저지른 실수 때문에 아버지가 자칫 죽을 뻔했으니 화도윤의 마음속엔 여전히 이민재에 대한 불만이 남아 있었다.이민재가 의술로 유명하지 않았다면 이미 저택에서 쫓아냈을 것이다.“임 선생님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이민재는 아까와는 다르게 공손한 태도로 존댓말까지 써가며 말했다.“부디 가르침을 부탁드리겠습니다.”“뭘 묻고 싶은 거야?”임지환은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화 장군님 체내의 사악한 기운을 도대체 어떻게 제거하셨는지 궁금합니다.”이민재는 진심으로 지식에 굶주린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제가 침을 놓을 때 장군님 체내의 생기를 운용해 분명 어느 정도 효과를 보였는데 왜 결국엔...”“내가 왜 너에게 말해줘야 하지?”임지환이 이민재의 말을 끊었다.“그건...”이민재는 그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임지환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굳이 자기에게 말해줄 필요가 없다는 걸 이민재는 알고 있었다.“저는 의사로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
“아악!”비명이 또 방에서 들려왔고 이번엔 더 고통스럽고 무시무시했다.“날 들여보내 주세요!”화도윤은 방 안에서 들려오는 처절한 비명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화 회장님, 죄송합니다만, 그럴 순 없습니다.”허청열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화도윤을 막아섰다.“허 교관! 넌 정말 이대로 우리 아버지를 죽게 내버려두겠다는 건가?”화도윤의 눈은 핏발이 서서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물어뜯을 것 같은 야수 같았다.“저도 물론 장군님이 돌아가시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임 선생님 외에는 누구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임 선생님이 허락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들어가게 놔둘 순 없습니다.”허청열은 이를 악물고 단호하게 말했다.옆에 있던 이청월의 얼굴도 창백해졌다. 방 안에서 들려오는 비명이 너무나도 끔찍했기 때문이었다.“이대로 가다간 나조차도 장군님의 생명을 지탱하기 어려울 겁니다.”이민재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내 생각엔 먼저...”“끄악!”다시 한번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고 방 안은 곧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고 더 이상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화도윤과 허청열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할 말을 잃었다.“어휴... 이젠 무슨 말을 해도 늦었습니다.. 당신들, 사람을 잘못 믿은 겁니다.” 이민재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끼익...”바로 그때, 임지환이 문을 열고 나와 태연한 표정으로 물었다.“방금 뭐가 늦었다고 했어?”“넌 실력도 부족하면서 괜히 잘난 척하다가 화 장군님을 네 손으로 죽인 거야. 이제 어떻게 수습할지 지켜보겠어.”이민재는 냉랭하게 비웃으며 재밌는 구경이라도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임 선생님...”허청열이 조심스럽게 앞으로 다가와 조급한 얼굴로 물었다.“걱정 마, 장군님 체내의 사악한 기운은 내가 이미 완전히 제거했어. 이제 장군님 생명에는 더 이상 지장이 없을 거야.”임지환은 표정 변화도 없이 차분하게 대답했다.“정말입니까?”“임 선생님, 그 말씀, 정말입니까?”화도윤과 허청열은
“만약은 절대 없습니다!”화도윤의 눈빛이 갑자기 날카로워지며 은은하게 살기가 서렸다.“이 영감탱이가 아직도 제정신이 아니네. 말을 왜 이 따위로 해? 네가 실력이 바닥을 친다고 해서 임지환 실력도 바닥을 친다는 도리는 없잖아!”이청월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임지환을 깎아내리는 말이라 곧바로 받아쳤다.“이 버릇없는 계집, 닥치지 못해? 난 아직 네 죗값도 묻지 않았어!”이민재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손을 들었다.“이 침왕, 자중하십시오.”둘을 지켜보던 허청열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이청월 앞을 막아섰다.허청열의 몸에서 칼날이 칼집에서 막 빠져나오기 직전인 듯 날카로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좋아요, 저 녀석이 진짜 화 장군님을 살려낸다면 이 부러진 손은 그냥 넘어가 주겠습니다. 하지만 살려내지 못한다면 화 선생은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길 바랍니다.”이민재는 속으로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이민재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허청열과 싸워봤자 손쉽게 당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콜록콜록...”방 안에서 갑자기 거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그 기침 속에는 피를 토하는 소리까지 섞여 있는 듯했다.화도윤의 얼굴이 굳어지며 안으로 뛰어들 듯이 몸을 움찔했다.그러나 허청열이 화도윤을 막아섰고 고개를 저으며 냉정하게 말했다.“화 회장님, 임 선생님의 허락 없이는 우리가 밖에서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알겠네.”화도윤은 어쩔 수 없이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지금, 화도윤은 임지환에게 모든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한편, 방 안에서 오랜 시간 거친 숨을 몰아쉬던 화연평이 마침내 힘겹게 피곤이 가득한 눈을 떴다.화연평은 희미하게 보이는 임지환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임... 임 대사, 고... 고맙습니다.”“화 장군님, 아직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치료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조금 고통스러울 수도 있으니 꾹 참고 견뎌주시길
“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난 의사로서 수십 년간 수많은 생명을 구했고 의학계에서 꾸준히 명성을 쌓아왔어. 오늘 너 같은 풋내기에게 내 명예를 더럽히게 둘 수는 없어!”이민재는 수염을 부들부들 떨며 분노로 눈이 뒤집혀 거의 쌍욕이라도 할 듯한 기세였다.“이 영감탱이가 어쩜 이렇게 말이 안 통하지? 환자가 너 때문에 병이 더 악화했는데도 뭐라 하지 말라는 거야?”이청월은 눈을 부릅뜨고 이민재에게 쏘아붙였다.이민재가 일반 사람들에게는 오랜 명성을 자랑하는 침술의 대가일지 몰라도 이청월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중요한 건 단 하나, 임지환을 건드리는 건 절대 안 된다는 것뿐이었다.“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이민재는 이청월을 가리키며 화가 치밀어 올라 말을 잇지 못했다.“지금 화 장군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인데 넌 환자를 살릴 방법을 찾기보다 네 명성 걱정부터 앞서는구나. 내 생각엔 넌 그냥 명예에만 집착하는 돌팔이야!”이청월의 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고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민재의 급소를 정확히 찔렀다.“어디서 나타난 계집이 감히 어르신에게 말대꾸를 해? 오늘 내가 네 부모를 대신해 제대로 교육해 주마!”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이민재는 더 이상 체면 따위는 개의치 않고 손을 뻗어 이청월을 때리려 했다.하지만 이민재의 손이 이청월에게 닿기도 전에 임지환이 그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고 가볍게 힘을 주었다.딱!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민재의 팔이 임지환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부러지는 소리였다.“아악!”이민재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팔을 부여잡았고 그의 얼굴은 분노와 고통으로 붉게 달아올랐다.허청열과 화도윤은 이 광경에 놀라서 숨을 들이쉬며 얼굴이 창백해졌다.임지환의 행동은 너무나 대담했다. 침술의 왕이라 불리는 이민재의 팔을 부러뜨리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이 일이 의학계에 널리 퍼지기라도 하면 임지환은 의학계 전체의 적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허 교관, 지금부터 난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