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주시, 강하 컴퍼니.폭설이 내린 뒤의 대제주시는 티끌 한 점 없이 맑았다.엘리베이터에서 나온 심미경은 다시 이 회사에 다시 발을 들여놓자 만감이 교차했다.처음 입사했을 때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방황했던 기억이 났다.회사 사람들은 그녀가 퇴사 수속을 하러 왔다고만 생각할 뿐, 강이찬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모른다.어떤 동료가 물었다.“미경 씨, 왜 이렇게 오랫동안 출근을 안 했어요?”심미경은 가방을 든 채 웃으며 말했다.“한동안 아팠어요. 이제 다 나았고요. 오늘 퇴사 수속하러 왔어요.”임신한 후 교통사고가 나서 오랫동안 병가를 냈지만 회사는 그녀의 자리도 남겨두고 있었고 국민연금도 계속 내고 있었다.하지만 오늘, 그녀는 이것들을 처리하러 온 것만은 아니다.이혼 계약서에 사인 받으러 왔다.전에 여러 번 재촉했지만 강이찬은 계속 서명하지 않았다.바로 어젯밤, 강이찬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더니 변호사에게 이혼 합의서를 새로 작성하게 했다며 오늘 와서 보고 문제가 없으면 사인하자고 했다.그래서 심미경이 오늘 사무실로 온 것이다.사무실 문이 열리자 강이찬과 변호사는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그들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다시 만난 강이찬은 약간 의기소침해 보였다.비서 진민우가 물었다.“사모님, 커피와 차, 어떤 것으로 드릴까요?”심미경은 담담하게 웃었다.“괜찮아요. 사인만 하고 바로 갈 거라 안 마실래요.”강이찬은 깊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했지만 결국 삼켜버렸다.이혼 합의서를 그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새로 작성한 거예요. 위자료 부분만 자세히 보면 될 거예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얼마든지 말해요. 변호사보고 추가하고 할게요.”심미경은 위자료 관련 조항을 자세히 보았다.강이찬은 재산의 거의 절반을 그녀에게 나누어줬다.심미경의 눈살이 점점 찌푸려졌다.“이 재산은 이찬 씨의 혼전 재산이에요. 내가 절반이나 나눠 가져가는 것은 도리가 아니에요. 내가 회사 일적으로 도운 것도 없는데요.”그녀는 이혼 합의
손이 떨렸다. 만년필을 쥐고 있는 손가락이 하얗게 질렸다.큰 결심을 한 후 서명란에 드디어 사인했다.이 서명을 한순간 더는 되돌릴 길이 없다.강이찬이 다시 고개를 들자 눈꼬리가 붉게 물든 것이 보였다.심미경은 별말 없이 과감하게 이혼 합의서 중 하나를 가져갔다.심지어 웃으며 말했다.“사인했으니까 강 사장님 언제 시간 되실까요? 가정 법원에 서류 제출하러 가야 될 것 같은데 오늘 시간 있나요?”강이찬은 가슴이 아팠다. 그녀의 말에 대답 대신 한마디 물었다.“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이에요? 대제주시에서 있을 거예요? 아니면 원주 고향으로 돌아갈 거예요?”이혼 합의서를 가방에 쑤셔 넣은 심미경은 사실대로 말했다.“엄마 말이 맞았어요. 떠난 사람 곁으로 다시 돌아가는 게 아니었어요. 대제주시와 원주는 나와 맞지 않아요. 전에 준 4천만 원, 엄마가 다시 보내줬어요. 이 돈으로 대선국에 가서 1년 더 전공을 공부할 계획이에요.”“4천만 원으로 되겠어요? 대선국은 소비가 꽤 센 편인데 돈이 부족하면...”“강이찬 씨, 이찬 씨의 가장 큰 약점이 무엇인지 알아요? 당신의 관심이 필요할 때 이찬 씨는 한번도 나에게 신경 쓴 적이 없어요. 하지만 이제 필요 없어졌을 때 오히려 이런 행동을 하고 있고요. 내가 못 된 것일까요? 아니면 이찬 씨가 잘못한 것일까요?”강이찬은 실소를 터뜨렸다.“이제 그럴 기회조차 없잖아요. 아니에요?”강이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들고 떠나려 했다.그러자 강이찬이 말했다.“내가 데려다줄게요.”심미경은 거절했다.“아니요. 어차피 얼마 후에 가정 법원에서 만나야 하잖아요. 우리 사이가 완전히 끝나는 날 그때 데려다줘요.”“그래요.”“가정 법원도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 비자가 나오면 바로 대제주시를 떠날 거라.”강이찬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지만 얼굴은 최대한 웃으며 말했다.“알겠어요.”심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퇴사 수속을 마친 뒤 회사를 떠났다.차에 오른 그녀는 가볍게 숨을 들이마신 후 시동을 걸었다.고개를
호텔에서 배현수는 한창 노트북 앞에서 볼일을 보고 있다.간병인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대표님, 큰일났어요. 어머니께서 계속 아버지를 찾으러 가겠다더니 미친 듯이 뛰어나가 계단에서 떨어졌어요!”배현수는 깜짝 놀랐다.“지금 어떤데요?!”“다리가 부러져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언제 돌아오세요? 요 며칠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저 혼자로서는 감당이 안 됩니다.”배현수는 휴대전화를 쥔 채 눈썹을 만졌다. 머리가 지끈거렸다.“내일 아침에 갈게요. 병원 주소와 병실을 문자로 보내주세요.”“네, 알겠습니다.”전화를 끊자마자 방문이 열렸다.조유진이 음식을 손에 든 채 들어왔다.“근처에서 마라탕 2인분을 샀어요.”배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손에 있는 음식을 건네받았다.“왜 아직도 이런 걸 먹어? 저녁에 맛있는 거 사주려고 했는데.”“오랜만에 먹는 거예요.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밖에 나가기 싫어요.”조유진은 먼지투성이가 된 얼굴로 세수를 하고 욕실에서 나왔다.배현수는 음식 포장을 뜯고 있었다. 뚜껑을 열자 마라탕 향이 확 풍겨왔다.조유진이 앉자 배현수는 일회용 젓가락을 건넸다.그러나 한참 동안 배현수를 쳐다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현수 씨, 나에게 말 안 한 비밀 같은 거 없어요?”“비밀?”있긴 있지만 서프라이즈를 줄 계획이었다.혹시 무엇이라도 발견한 것일까?조유진은 젓가락을 들고 무심한 얼굴로 마라탕을 먹었다.“먹고 얘기해요. 배고파 죽겠어요.”공장에서 오후 내내 바쁘게 일했더니 벌써 배가 고팠다.머리를 풀어헤치고 머리를 숙여 음식을 먹는 탓에 머리카락이 계속 흘러내렸다.손을 들어 몇 번이고 만지작거렸지만 젓가락을 멈출 수 없었다. 결국 짜증이나 무의식적으로 양미간을 약간 찡그렸다.배현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책상 위의 머리띠를 집어 들더니 벌떡 일어나 그녀의 뒤에 섰다.어깨까지 늘어뜨린 그녀의 긴 머리를 큰 손으로 쓸어올렸다.하지만 동작이 미숙하고 머리카락이 너무 찰랑거려 여러 번 시도했지만 묶을 수 없
조유진은 다시 고개를 가로젓더니 마라탕을 먹으며 말했다.“현수 씨가 하는 일인데요, 뭐.”조유진은 또다시 물었다.“강이찬 씨와 갈라진 이유도 강이진의 죽음 때문이에요?”배현수는 ‘응’이라고 대답했다.조유진은 마라탕 국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천천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맑은 눈으로 나긋하게 말했다.“내가 모르는 일이 또 있어요?”“유진아.”배현수는 왠지 모르게 목소리가 뻣뻣해졌다.“강이진의 일에 대해 말하지 않은 이유는 네가 혹시라도..”조유진이 갑자기 물었다.“혹시 잡혀들어갈 수도 있는 거예요?”“뭐라고?”조유진은 생각에 잠긴 듯 눈살을 찌푸렸다.“강이찬 씨가 강이진의 복수를 위해 현수 씨를 신고하면 더 큰 일이 생길 수도 있냐고요?”“아니. 강이진은 719부대 안에서 죽었어. 719부대는 징벌과 악을 제거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어. 719 가 하는 일은 누구에게도 설명할 필요가 없어.”솔직히 말해서 719의 배후에는 한국의 대통령이 있다. 설립 백 년 동안 이 조직은 한국에 너무 많은 기여를 했다.좀 더 솔직히 말하면 719부대는 한국을 도와 공개적으로 할 수 없는 모든 일을 했다.조유진은 음식을 소화한 뒤 눈을 깜빡였다.“그래서 공해에서 사고 난 뒤 실종됐을 때도 719에서 회복 중이었어요?”“응.”“지난번에 백소미를 719부대 멤버로 만들겠다고 약속했잖아요. 그 말도 진심이에요?”배현수는 거침없이 대답했다.“진심이야.”조유진은 입술을 달싹였다.“719부대의 모든 행동은 전부 비밀리에 진행되는 거예요?”“응.”조유진은 머리가 멍해졌다.“그럼 앞으로 자주 죽을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 아니에요?”배현수는 가느다란 그녀의 손가락을 살짝 쥐며 다독였다.“그렇지 않아. 한국에 몰래 있던 드래곤 파 세력 대부분은 이미 철수했어. 당분간 그럴 일은 없어.”“앞으로 드래곤 파 같은 잔혹한 조직세력을 또 만날 수도 있다는 말이네요?”배현수도 솔직하게 대답했다.“응.”“총 쏘는 방법 좀 가르쳐 줄래요?”배현수가
배현수는 그녀의 뒤통수를 쓰다듬더니 깊은 검은 눈빛으로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어떻게 보답할 건데? 말로 보답하는 것은 성의가 없어 보여. 몸으로 보답하는 게 어때?”조유진은 단칼에 거절했다.“지금은 안 돼요.”배현수가 물었다.“왜 안 돼?”“90점이 되면 다시 얘기해요. 이제 겨우 15점이잖아요.”배현수는 입을 내밀며 조롱했다.“유진아, 연애는 내가 제일 못하는 과목이야.”이번 생에 시험에 합격한 적이 없다.15점, 아주 심각한 불합격이다.조유진은 그의 목을 껴안고 부드러운 입술로 가볍게 키스했다.“배현수는 뭐든 잘하잖아요. 기대할게요.”“아이를 달래는 건?”남자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아 고개를 숙여 키스하려고 했다. 이때 핸드폰이 울렸다.서정호에게서 걸려온 전화이다. 바로 전화를 받았다.“배 대표님, 도착했습니다.”“701호.”전화를 끊은 후, 조유진이 물었다.“서 비서도 오는 거예요?”배현수는 몇 초 동안 그녀를 올려다보다가 아쉬운 듯 말했다.“내일 아침 대제주시로 가야 할 것 같아. 서정호가 운전할 것이고.”“남아서 같이 설을 쇠자고 했잖아요?”“요양원 쪽에 일이 생겼어. 엄마가 다리가 부러져서 치료를 받아야 해.”그리고 돌아가서 옥패에 대한 일을 조사해야 했다.조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빨리 대제주시로 돌아가요. 앞으로 같이 설 쇨 날이 많으니까.”배현수는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다시 입을 다물었다.서프라이즈는 남겨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저녁, 조유진은 샤워하고 피곤한 몸으로 침대에 누워 배현수의 품에 안겼다.그를 등진 채 있었다. 조유진의 차갑고 가냘픈 등은 그의 따뜻한 가슴에 맞닿았다.남자의 가벼운 키스가 그녀의 뒷목에 이어졌다.조유진은 몸을 돌리지 않은 채 그의 팔베개를 베고 있었다. 뼈마디가 뚜렷한 큰 손을 잡고 가는 손가락으로 얇은 굳은살을 만졌다.이 두 손은 총을 쥔 적도 있고 사람을 향해 총을 쏜 적도 있다. 피로 물들였다.배현수의
배현수는 선과 악 사이를 걸었다.너무 많은 일을 짊어지고 있었고 돈 때문에 서로 죽이고 죽는 세상에서 온전하고 깨끗한 손으로 왕좌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손을 들어 조유진의 눈을 지그시 가리더니 웃으며 말했다.“그것들은 좋은 일도 아니고 자랑할 과거도 아니야. 유진아... 정말 듣고 싶어?”사실 과거의 좋지 않은 일들을 배현수는 언급하고 싶지 않다.하지만 조유진이 정말 알고 싶어 한다면 들려주는 것쯤은 개의치 않다.신뢰를 쌓아야 했고 신뢰를 쌓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었던 과거를 상대방에게 완전히 드러내 상대방이 자신을 완전히 간파하게 하는 것이다.조유진은 자기 눈을 가린 그의 손을 떼더니 맑은 눈동자로 단호하고 냉정하게 말했다.“알고 싶어요.”배현수의 눈빛은 무거웠지만 얼굴에는 담담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듣고 나면 잠이 안 올 거야.”얼마나 비참할지 조유진은 짐작이 간다.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담백하게 과거를 말했다. 적나라한 잔인함과 몸싸움이었다.조유진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심장에 뭉툭한 통증이 느껴졌다.이 사람은 성격이 오만하고 남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맞고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평범한 일이다.그의 밥상 앞에 있는 음식을 뒤집고 바닥에 있는 만두를 주워 먹으라고 강요하는 일은 사소하면서도 흔한 것이다.배현수는 그녀의 머리맡에 기대어 옆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07853은 내 번호야, 오랫동안 이 번호로 불렸어. 감옥에서 나와 처음 비즈니스 이야기를 하러 갔는데 육지율이 고객사와 어떻게 얘기했는지 오자마자 나에게 협박했어. 고객사가 07853을 외치자 나는 정말로 대답했어. 거의 무의식적으로. 고객사들은 아주 기뻐하더라고. 나 때문에. 사실 자존심 때문이라도 거래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결국에는 했어. 하지만 나중에는 뒤에서 조종해서 그 회사를 파산시켰고 ‘07853'이라는 번호를 부른 사람은 더 이상 내 비즈니스 영역에 나타나지 않았어. 그러고 나서 SY그룹이 커지면서 아무도 07853이라
이날 밤, 배현수는 조유진이 몰랐던 과거를 낱낱이 털어놓았다.그의 과거를 들은 조유진은 심장을 쥐어뜯는 듯 아팠다.그의 품에 기대어 한참을 가라앉히고서야 잠이 들었다.창밖에는 차가운 북풍이 불고 있다.방안에는 두 몸이 서로 부둥켜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다음 날 아침, 배현수와 서정호는 진주시를 떠나 대제주시로 돌아갔다.병원에 도착하자 간병인이 깨진 보라색 옥패를 배현수에게 주었다.유심히 살펴본 배현수는 옥패를 주머니에 넣었다.“이 옥패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세요.”간병인은 알지 못했지만 배현수의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배 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배현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우리 어머니를 돌보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당연한 일입니다.”배현수가 병실로 들어왔다.예지은은 다리가 부러져 깁스하고 병상에 누워있다. 거동이 불편해도 좀처럼 가만히 있지 못했다.어두웠던 눈빛도 배현수의 모습을 보자 바로 맑아졌다.“아들아, 왔구나!”배현수는 병상 옆 의자에 앉아 깁스한 다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왜 말을 안 들어요? 계속 이러시면 아버지가 보러 오시지 않을 거예요.”예지은은 그 말을 듣더니 입술을 달싹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성준 씨도 안 오고 아들도 안 오고... 너는 대들기까지 하고!”배현수의 말투는 늘 차갑고 부드럽지 않았다.정신 상태가 좋지 않은 예지은은 계속 횡설수설했다. 사랑이 부족하고 관심이 결핍해 아이같이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옆에 있던 간병인이 말했다.“배 대표님, 사모님이 평소에 외로워하시니 얘기 좀 잘 나누세요.”배현수는 그제야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대든 거 아니에요. 계속 말을 안 듣잖아요. 다리가 부러진 것은 안 아파요?”예지은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응, 아파.”“그럼 다음에도 그럴 거예요?”“나도 모르겠어. 아들아, 집에 데려다줘. 응? 너의 아버지와 너도 날 보러 오지도 않고, 나 혼자 여기 있는 것이 너무 외로워.”배현수
배현수는 깜짝 놀라 예지은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안정희의 아이예요? 그 아이는 어디에 있어요?”예지은은 온통 눈물투성이가 된 채 배현수를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팔로 머리를 잡고 말했다.“나한테 묻지 마... 나도 몰라... 정말 몰라!”“그럼 엄준은요? 성남시 엄씨 집안 사람들과 관련이 있어요? 엄마가 엄준의 딸을 데려간 거예요?”예지은은 미친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묻지 마. 네가 말한 그런 사람, 나는 모르니까! 진짜 몰라...”배현수는 다시 한번 물었다.“엄준, 엄씨 집안! 정말 몰라요?”“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어! 나는 엄씨 성을 가진 사람을 몰라... 물어보지 마! 머리 아파!”예지은의 표정을 보니 거짓말이 아닌 것 같다.배현수는 약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예지은이 데려간 게 엄환희만 아니면 그게 누군지 상관없다.그런데 그 아이를 죽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 아이가 안정희의 진짜 딸일까?배현수의 다급한 질문은 예지은을 자극했다.예지은은 배현수를 보기 싫은 듯 이불을 뒤집어쓰고 등을 돌렸다.“너 가, 가!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으니까! 나을 아껴주는 사람은 성준 씨뿐이야! 성준 씨가 있었다면 너를 반드시 혼냈을 거야!”배현수가 자리에 가만히 서 있자 예지은은 도자기 컵을 집어 들어 그에게 뿌렸다.“너와 같이 집에 가지 않을 거야! 너의 집은 우리 집이 아니야! 나는 육씨네 집으로 돌아갈 거야! 육씨 저택이야말로 나와 성준 씨의 집이니까...”말을 하던 예지은은 참을 수 없이 울었다.눈빛은 점점 흐트러졌다.“하지만 육씨 저택에도 성준 씨는 없어... 성준 씨, 어디 간 거야? 너무 보고 싶어...”도자기 컵이 바닥에 깨져 널브러졌다.배현수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컵이 깨지는 소리를 들은 간병인이 문을 두드렸다.“배 대표님, 도와드릴까요?”배현수는 돌아서서 병실을 나가며 간병인에게 말했다.“저희 어머니가 이상한 소리 또 하면 한 마디도 빠짐없이 알려 주세요.”“예, 배 대표님.”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