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이 떨렸다. 만년필을 쥐고 있는 손가락이 하얗게 질렸다.큰 결심을 한 후 서명란에 드디어 사인했다.이 서명을 한순간 더는 되돌릴 길이 없다.강이찬이 다시 고개를 들자 눈꼬리가 붉게 물든 것이 보였다.심미경은 별말 없이 과감하게 이혼 합의서 중 하나를 가져갔다.심지어 웃으며 말했다.“사인했으니까 강 사장님 언제 시간 되실까요? 가정 법원에 서류 제출하러 가야 될 것 같은데 오늘 시간 있나요?”강이찬은 가슴이 아팠다. 그녀의 말에 대답 대신 한마디 물었다.“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이에요? 대제주시에서 있을 거예요? 아니면 원주 고향으로 돌아갈 거예요?”이혼 합의서를 가방에 쑤셔 넣은 심미경은 사실대로 말했다.“엄마 말이 맞았어요. 떠난 사람 곁으로 다시 돌아가는 게 아니었어요. 대제주시와 원주는 나와 맞지 않아요. 전에 준 4천만 원, 엄마가 다시 보내줬어요. 이 돈으로 대선국에 가서 1년 더 전공을 공부할 계획이에요.”“4천만 원으로 되겠어요? 대선국은 소비가 꽤 센 편인데 돈이 부족하면...”“강이찬 씨, 이찬 씨의 가장 큰 약점이 무엇인지 알아요? 당신의 관심이 필요할 때 이찬 씨는 한번도 나에게 신경 쓴 적이 없어요. 하지만 이제 필요 없어졌을 때 오히려 이런 행동을 하고 있고요. 내가 못 된 것일까요? 아니면 이찬 씨가 잘못한 것일까요?”강이찬은 실소를 터뜨렸다.“이제 그럴 기회조차 없잖아요. 아니에요?”강이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들고 떠나려 했다.그러자 강이찬이 말했다.“내가 데려다줄게요.”심미경은 거절했다.“아니요. 어차피 얼마 후에 가정 법원에서 만나야 하잖아요. 우리 사이가 완전히 끝나는 날 그때 데려다줘요.”“그래요.”“가정 법원도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 비자가 나오면 바로 대제주시를 떠날 거라.”강이찬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지만 얼굴은 최대한 웃으며 말했다.“알겠어요.”심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퇴사 수속을 마친 뒤 회사를 떠났다.차에 오른 그녀는 가볍게 숨을 들이마신 후 시동을 걸었다.고개를
호텔에서 배현수는 한창 노트북 앞에서 볼일을 보고 있다.간병인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대표님, 큰일났어요. 어머니께서 계속 아버지를 찾으러 가겠다더니 미친 듯이 뛰어나가 계단에서 떨어졌어요!”배현수는 깜짝 놀랐다.“지금 어떤데요?!”“다리가 부러져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언제 돌아오세요? 요 며칠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저 혼자로서는 감당이 안 됩니다.”배현수는 휴대전화를 쥔 채 눈썹을 만졌다. 머리가 지끈거렸다.“내일 아침에 갈게요. 병원 주소와 병실을 문자로 보내주세요.”“네, 알겠습니다.”전화를 끊자마자 방문이 열렸다.조유진이 음식을 손에 든 채 들어왔다.“근처에서 마라탕 2인분을 샀어요.”배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손에 있는 음식을 건네받았다.“왜 아직도 이런 걸 먹어? 저녁에 맛있는 거 사주려고 했는데.”“오랜만에 먹는 거예요.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밖에 나가기 싫어요.”조유진은 먼지투성이가 된 얼굴로 세수를 하고 욕실에서 나왔다.배현수는 음식 포장을 뜯고 있었다. 뚜껑을 열자 마라탕 향이 확 풍겨왔다.조유진이 앉자 배현수는 일회용 젓가락을 건넸다.그러나 한참 동안 배현수를 쳐다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현수 씨, 나에게 말 안 한 비밀 같은 거 없어요?”“비밀?”있긴 있지만 서프라이즈를 줄 계획이었다.혹시 무엇이라도 발견한 것일까?조유진은 젓가락을 들고 무심한 얼굴로 마라탕을 먹었다.“먹고 얘기해요. 배고파 죽겠어요.”공장에서 오후 내내 바쁘게 일했더니 벌써 배가 고팠다.머리를 풀어헤치고 머리를 숙여 음식을 먹는 탓에 머리카락이 계속 흘러내렸다.손을 들어 몇 번이고 만지작거렸지만 젓가락을 멈출 수 없었다. 결국 짜증이나 무의식적으로 양미간을 약간 찡그렸다.배현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책상 위의 머리띠를 집어 들더니 벌떡 일어나 그녀의 뒤에 섰다.어깨까지 늘어뜨린 그녀의 긴 머리를 큰 손으로 쓸어올렸다.하지만 동작이 미숙하고 머리카락이 너무 찰랑거려 여러 번 시도했지만 묶을 수 없
조유진은 다시 고개를 가로젓더니 마라탕을 먹으며 말했다.“현수 씨가 하는 일인데요, 뭐.”조유진은 또다시 물었다.“강이찬 씨와 갈라진 이유도 강이진의 죽음 때문이에요?”배현수는 ‘응’이라고 대답했다.조유진은 마라탕 국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천천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맑은 눈으로 나긋하게 말했다.“내가 모르는 일이 또 있어요?”“유진아.”배현수는 왠지 모르게 목소리가 뻣뻣해졌다.“강이진의 일에 대해 말하지 않은 이유는 네가 혹시라도..”조유진이 갑자기 물었다.“혹시 잡혀들어갈 수도 있는 거예요?”“뭐라고?”조유진은 생각에 잠긴 듯 눈살을 찌푸렸다.“강이찬 씨가 강이진의 복수를 위해 현수 씨를 신고하면 더 큰 일이 생길 수도 있냐고요?”“아니. 강이진은 719부대 안에서 죽었어. 719부대는 징벌과 악을 제거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어. 719 가 하는 일은 누구에게도 설명할 필요가 없어.”솔직히 말해서 719의 배후에는 한국의 대통령이 있다. 설립 백 년 동안 이 조직은 한국에 너무 많은 기여를 했다.좀 더 솔직히 말하면 719부대는 한국을 도와 공개적으로 할 수 없는 모든 일을 했다.조유진은 음식을 소화한 뒤 눈을 깜빡였다.“그래서 공해에서 사고 난 뒤 실종됐을 때도 719에서 회복 중이었어요?”“응.”“지난번에 백소미를 719부대 멤버로 만들겠다고 약속했잖아요. 그 말도 진심이에요?”배현수는 거침없이 대답했다.“진심이야.”조유진은 입술을 달싹였다.“719부대의 모든 행동은 전부 비밀리에 진행되는 거예요?”“응.”조유진은 머리가 멍해졌다.“그럼 앞으로 자주 죽을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 아니에요?”배현수는 가느다란 그녀의 손가락을 살짝 쥐며 다독였다.“그렇지 않아. 한국에 몰래 있던 드래곤 파 세력 대부분은 이미 철수했어. 당분간 그럴 일은 없어.”“앞으로 드래곤 파 같은 잔혹한 조직세력을 또 만날 수도 있다는 말이네요?”배현수도 솔직하게 대답했다.“응.”“총 쏘는 방법 좀 가르쳐 줄래요?”배현수가
배현수는 그녀의 뒤통수를 쓰다듬더니 깊은 검은 눈빛으로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어떻게 보답할 건데? 말로 보답하는 것은 성의가 없어 보여. 몸으로 보답하는 게 어때?”조유진은 단칼에 거절했다.“지금은 안 돼요.”배현수가 물었다.“왜 안 돼?”“90점이 되면 다시 얘기해요. 이제 겨우 15점이잖아요.”배현수는 입을 내밀며 조롱했다.“유진아, 연애는 내가 제일 못하는 과목이야.”이번 생에 시험에 합격한 적이 없다.15점, 아주 심각한 불합격이다.조유진은 그의 목을 껴안고 부드러운 입술로 가볍게 키스했다.“배현수는 뭐든 잘하잖아요. 기대할게요.”“아이를 달래는 건?”남자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아 고개를 숙여 키스하려고 했다. 이때 핸드폰이 울렸다.서정호에게서 걸려온 전화이다. 바로 전화를 받았다.“배 대표님, 도착했습니다.”“701호.”전화를 끊은 후, 조유진이 물었다.“서 비서도 오는 거예요?”배현수는 몇 초 동안 그녀를 올려다보다가 아쉬운 듯 말했다.“내일 아침 대제주시로 가야 할 것 같아. 서정호가 운전할 것이고.”“남아서 같이 설을 쇠자고 했잖아요?”“요양원 쪽에 일이 생겼어. 엄마가 다리가 부러져서 치료를 받아야 해.”그리고 돌아가서 옥패에 대한 일을 조사해야 했다.조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빨리 대제주시로 돌아가요. 앞으로 같이 설 쇨 날이 많으니까.”배현수는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다시 입을 다물었다.서프라이즈는 남겨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저녁, 조유진은 샤워하고 피곤한 몸으로 침대에 누워 배현수의 품에 안겼다.그를 등진 채 있었다. 조유진의 차갑고 가냘픈 등은 그의 따뜻한 가슴에 맞닿았다.남자의 가벼운 키스가 그녀의 뒷목에 이어졌다.조유진은 몸을 돌리지 않은 채 그의 팔베개를 베고 있었다. 뼈마디가 뚜렷한 큰 손을 잡고 가는 손가락으로 얇은 굳은살을 만졌다.이 두 손은 총을 쥔 적도 있고 사람을 향해 총을 쏜 적도 있다. 피로 물들였다.배현수의
배현수는 선과 악 사이를 걸었다.너무 많은 일을 짊어지고 있었고 돈 때문에 서로 죽이고 죽는 세상에서 온전하고 깨끗한 손으로 왕좌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손을 들어 조유진의 눈을 지그시 가리더니 웃으며 말했다.“그것들은 좋은 일도 아니고 자랑할 과거도 아니야. 유진아... 정말 듣고 싶어?”사실 과거의 좋지 않은 일들을 배현수는 언급하고 싶지 않다.하지만 조유진이 정말 알고 싶어 한다면 들려주는 것쯤은 개의치 않다.신뢰를 쌓아야 했고 신뢰를 쌓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었던 과거를 상대방에게 완전히 드러내 상대방이 자신을 완전히 간파하게 하는 것이다.조유진은 자기 눈을 가린 그의 손을 떼더니 맑은 눈동자로 단호하고 냉정하게 말했다.“알고 싶어요.”배현수의 눈빛은 무거웠지만 얼굴에는 담담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듣고 나면 잠이 안 올 거야.”얼마나 비참할지 조유진은 짐작이 간다.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담백하게 과거를 말했다. 적나라한 잔인함과 몸싸움이었다.조유진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심장에 뭉툭한 통증이 느껴졌다.이 사람은 성격이 오만하고 남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맞고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평범한 일이다.그의 밥상 앞에 있는 음식을 뒤집고 바닥에 있는 만두를 주워 먹으라고 강요하는 일은 사소하면서도 흔한 것이다.배현수는 그녀의 머리맡에 기대어 옆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07853은 내 번호야, 오랫동안 이 번호로 불렸어. 감옥에서 나와 처음 비즈니스 이야기를 하러 갔는데 육지율이 고객사와 어떻게 얘기했는지 오자마자 나에게 협박했어. 고객사가 07853을 외치자 나는 정말로 대답했어. 거의 무의식적으로. 고객사들은 아주 기뻐하더라고. 나 때문에. 사실 자존심 때문이라도 거래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결국에는 했어. 하지만 나중에는 뒤에서 조종해서 그 회사를 파산시켰고 ‘07853'이라는 번호를 부른 사람은 더 이상 내 비즈니스 영역에 나타나지 않았어. 그러고 나서 SY그룹이 커지면서 아무도 07853이라
이날 밤, 배현수는 조유진이 몰랐던 과거를 낱낱이 털어놓았다.그의 과거를 들은 조유진은 심장을 쥐어뜯는 듯 아팠다.그의 품에 기대어 한참을 가라앉히고서야 잠이 들었다.창밖에는 차가운 북풍이 불고 있다.방안에는 두 몸이 서로 부둥켜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다음 날 아침, 배현수와 서정호는 진주시를 떠나 대제주시로 돌아갔다.병원에 도착하자 간병인이 깨진 보라색 옥패를 배현수에게 주었다.유심히 살펴본 배현수는 옥패를 주머니에 넣었다.“이 옥패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세요.”간병인은 알지 못했지만 배현수의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배 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배현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우리 어머니를 돌보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당연한 일입니다.”배현수가 병실로 들어왔다.예지은은 다리가 부러져 깁스하고 병상에 누워있다. 거동이 불편해도 좀처럼 가만히 있지 못했다.어두웠던 눈빛도 배현수의 모습을 보자 바로 맑아졌다.“아들아, 왔구나!”배현수는 병상 옆 의자에 앉아 깁스한 다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왜 말을 안 들어요? 계속 이러시면 아버지가 보러 오시지 않을 거예요.”예지은은 그 말을 듣더니 입술을 달싹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성준 씨도 안 오고 아들도 안 오고... 너는 대들기까지 하고!”배현수의 말투는 늘 차갑고 부드럽지 않았다.정신 상태가 좋지 않은 예지은은 계속 횡설수설했다. 사랑이 부족하고 관심이 결핍해 아이같이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옆에 있던 간병인이 말했다.“배 대표님, 사모님이 평소에 외로워하시니 얘기 좀 잘 나누세요.”배현수는 그제야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대든 거 아니에요. 계속 말을 안 듣잖아요. 다리가 부러진 것은 안 아파요?”예지은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응, 아파.”“그럼 다음에도 그럴 거예요?”“나도 모르겠어. 아들아, 집에 데려다줘. 응? 너의 아버지와 너도 날 보러 오지도 않고, 나 혼자 여기 있는 것이 너무 외로워.”배현수
배현수는 깜짝 놀라 예지은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안정희의 아이예요? 그 아이는 어디에 있어요?”예지은은 온통 눈물투성이가 된 채 배현수를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팔로 머리를 잡고 말했다.“나한테 묻지 마... 나도 몰라... 정말 몰라!”“그럼 엄준은요? 성남시 엄씨 집안 사람들과 관련이 있어요? 엄마가 엄준의 딸을 데려간 거예요?”예지은은 미친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묻지 마. 네가 말한 그런 사람, 나는 모르니까! 진짜 몰라...”배현수는 다시 한번 물었다.“엄준, 엄씨 집안! 정말 몰라요?”“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어! 나는 엄씨 성을 가진 사람을 몰라... 물어보지 마! 머리 아파!”예지은의 표정을 보니 거짓말이 아닌 것 같다.배현수는 약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예지은이 데려간 게 엄환희만 아니면 그게 누군지 상관없다.그런데 그 아이를 죽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 아이가 안정희의 진짜 딸일까?배현수의 다급한 질문은 예지은을 자극했다.예지은은 배현수를 보기 싫은 듯 이불을 뒤집어쓰고 등을 돌렸다.“너 가, 가!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으니까! 나을 아껴주는 사람은 성준 씨뿐이야! 성준 씨가 있었다면 너를 반드시 혼냈을 거야!”배현수가 자리에 가만히 서 있자 예지은은 도자기 컵을 집어 들어 그에게 뿌렸다.“너와 같이 집에 가지 않을 거야! 너의 집은 우리 집이 아니야! 나는 육씨네 집으로 돌아갈 거야! 육씨 저택이야말로 나와 성준 씨의 집이니까...”말을 하던 예지은은 참을 수 없이 울었다.눈빛은 점점 흐트러졌다.“하지만 육씨 저택에도 성준 씨는 없어... 성준 씨, 어디 간 거야? 너무 보고 싶어...”도자기 컵이 바닥에 깨져 널브러졌다.배현수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컵이 깨지는 소리를 들은 간병인이 문을 두드렸다.“배 대표님, 도와드릴까요?”배현수는 돌아서서 병실을 나가며 간병인에게 말했다.“저희 어머니가 이상한 소리 또 하면 한 마디도 빠짐없이 알려 주세요.”“예, 배 대표님.”병상
뒷좌석에 앉아 있는 배현수는 차갑고 늘씬한 손가락으로 약지의 플래티넘 반지를 돌렸다.사랑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같이 설을 쇠기로 약속했어. 어기고 싶지 않아.”“아 참, 셀리나가 그 핑크 다이아몬드를 보내왔어요. 배 대표님의 책상 위에 올려놨습니다. 설을 같이 쇨 거면 잊지 말고...”“필요 없어.”서정호는 새해 전야에 그가 청혼할 줄 알았다. 하지만 아직도 그녀의 마음을 못 얻은 듯하다...진주시.더한의 자료를 뒤지던 조유진의 눈길에 실주주에게서 멈췄다.더한의 배후에 있는 실 주주는 자연인이 아니라 열오라는 회사이다.상장하지 않은 더한은 열오가 더한의 지분 90%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열오... 이름이 익숙하다.조유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강이찬의 지분 10%를 사들여 SY그룹 주식시장에 이름을 올린 그 열오?조유진은 SY그룹의 현재 주주 구성을 살펴봤다. 열오라는 회사가 지분 10%를 보유하고 있었다.회사소개서를 클릭해보니 같은 회사였다.왠지 불안한 마음에 배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한편 배현수는 이제 막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왔다. 걸려온 전화를 보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전화를 받자마자 먼저 입을 열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보고 싶어서 전화한 거야?”이제야 겨우 12시임을 확인한 조유진은 입을 달싹였다.“그게 아니라...”용건을 말하려는데 배현수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나 보고 싶은 거 아니야, 그럼 끊는다?”“잠깐만요.”조유진이 그를 불렀다.“현수 씨, 정말 중요한 일이에요.”남자는 휴대전화를 손에 쥔 채 침대 옆에 앉아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럼 몸으로 보답하기로 한 거야?”조유진은 피식 웃었다.“업무적인 일이에요.”배현수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늦은 시간까지 일해?”조유진은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현수 씨도 한두 시까지 자주 일하잖아요.”방금 목욕한 배현수는 몸이 나른한 상태라 약간 산만한 듯 보였다.“그건 예전에 지루해도 할 게 일밖에 없으니까.”조유진은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