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진과 엄명월이 진주시에 도착하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다.남초윤에게서 걸려온 전화다. 받자마자 무턱대고 물었다. “SY그룹이 드디어 배현수와 송인아의 관계에 대해 입을 열었어. 유진아, 너 지금 배현수와 무슨 상황이야? 배현수의 약혼 소식은 또 어떻게 된 거야? 전에는 감히 물어보지도 못했어!”조유진은 순간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몰랐다.“말하자면 길어. 나중에 얘기할까? 나 지금 막 진주시에 도착했어.”남초윤은 어리둥절한 듯 물었다.“진주시? 왜 갑자기 진주시에 간 거야?”“출장 왔어. 성행 그룹에 취직했어. 차가 와서 이만 끊을게. 저녁에 호텔에 도착하면 연락할게.”전화를 끊은 조유진은 차에 탄 후 궁금한 마음에 SNS에 들어갔다.SY그룹이 공식성명을 발표했다.또한 이 성명에는 SY그룹에 막강한 변호인단이 있고 루머 유포자가 있으면 엄중히 경고한다는 내용까지 있었다.내용 아래에 있는 네티즌들의 열띤 댓글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망했어. 배 대표가 진짜로 순정파인가 봐. 또 조햇살과 같이 있는 거 아니야?][동공 지진... 배 대표는 조햇살에게만 마음이 있다는 뜻인가?][그럼 엄씨 집안 그 딸은 어떻게 된 거야?][설마 엄환희 씨와 조햇살이 똑같이 생긴 거야? 대역 게임이라도 한 거야?][연극도 이보다 더 재미있지 않을 거야! 점점 더 흥미진진해지네!][설마. 엄씨 아가씨와 조햇살이 같은 사람이라고 하지 마. 막장도 이런 막장이 있다고?][아니, 돈도 많고 권력도 있는 사람이 잘생긴 남자가 여자를 한 명밖에 안 만났다고? 이런 판타지 이야기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눈 뜨고 거짓말을 해도 이렇게 말하지 못하지!][아아! 절대 인정할 수 없어! 조햇살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거야? 왜 이렇게 운이 좋아!][배 대표가 또 조햇살과 함께하면 행복하기를 바랄게! 대신 SY 주식이 바닥을 치기도 바라!]...이런 댓글을 본 조유진은 마음을 이루 말로 형용하기 어려웠다.배현수가 드디어 나서서 그녀를 두둔해 주니 당연히 기뻤다.
가게 안의 손님들이 계산한 후 연이어 퇴장했다.곧 떠들썩하던 불야항 바 안이 점점 조용해졌다.배현수는 카시트 쪽에 앉았고 육지율은 한쪽 무대 끝에 앉았다.그리고 강이찬은 계단에 앉았다.멀리 떨어져 앉은 세 사람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며 말을 하지 않았다.배현수가 코웃음을 쳤다.“손님들 다 나갔으니 계속해.”육지율은 손가락을 들어 강이찬을 가리키며 말했다.“강이찬, 너는 평소에 제일 성실한 척해놓고 알고 보니 제일 쪼잔했어! 너 지금 행동이 등에서 칼을 꽂는 것과 뭐가 달라?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이렇게 배신할 수 있어?”주먹을 꽉 쥔 강이찬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두컴컴한 빛 속에서 그의 얼굴의 감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육지율의 개 같은 성질은 또다시 참지 못하고 성큼성큼 걸어가 또 싸우려고 했다.그러다가 배현수에게 가로막혔다.강이찬은 바닥에 떨어진 코트를 들고 툭툭 치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다 때렸어? 충분히 때렸으면 먼저 갈게.”“지금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육지율은 또다시 앞으로 돌진했다.배현수는 육지율을 막으며 고개를 돌려 강이찬에게 말했다.“강이찬, 밖에서 기다려. 할 말 있어.”강이찬은 고개만 끄덕이더니 아무 말 없이 나갔다.육지율은 이를 갈았다.“강이찬, 너 오늘 이 문밖으로 나갈 생각하지도 마! 나가는 순간 우리 인연은 끝이니까!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놈에게는 좋은 결말이 없어!”이 말에 불야항 바를 나가던 강이찬의 걸음이 갑자기 뚝 멈췄다.그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더니 시뻘건 두 눈으로 육지율을 노려보며 말했다.“그래, 나 강이찬! 감정적이야! 육지율, 만약 너의 친동생이 비참하게 죽는다면 너는 어떨 것 같아? 너의 일이 아니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육지율은 목덜미에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아무리 바보 멍청이라도 형제를 배신하지는 않아! 너의 동생? 강이진이 내 여동생이었다면 나는 진작 죽였을 거야! 이런 결과가 다 누구 탓인데 그래!”이 말을 들은 강이
담배를 깨문 강이찬은 얼떨떨한 얼굴을 짓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그러게 말이야. 앞으로 가능성이 없는 일은 억지로 하려 하지 마. 나같이 담배를 못 피우는 사람에게 라이터를 줘봤자 소용이 없는 것처럼 말이야.”그러더니 손을 번쩍 들어 손에 들고 있던 라이터를 저 멀리 강에 던졌다.‘풍덩’하는 작은 소리가 났다.강물에 작은 잔물결이 일었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을 되찾았다.이 라이터는 SY그룹을 설립할 때 배현수가 선물한 것이다.창업은 곧 접대를 의미한다.담배도 술도 할 줄 모르면 고객 대응이 어렵다.하지만 이제는 필요 없다.친분도 없는데 이 라이터를 남겨서 뭐하겠는가?강을 바라보는 배현수의 시선은 점점 깊어졌다.“나를 친구로 생각하든 말든 강이찬, 너에게 미안한 마음은 없어. 지금 너는 주식을 돈으로 바꿔서 이곳을 떠났어. 예전에 너와 약속했던 1조 원의 재산이 지금 실현되었네? 내가 감옥에 있었던 3년 동안, 네가 SY그룹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아. 그러니까 이건 네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들이야. 그러니까 나도 너를 막지 않을게.”강이찬은 이를 악물더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증권감독위원회에서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어. 혹시 네가 미리 얘기한 거야?”배현수는 부인하지 않았다.“별로 큰일도 아니잖아. 증권감독위원회가 너를 찾는다고 해도 기껏해야 일상적인 조사일 뿐이야. 벌금 정도 물겠지. 하지만 네가 꼭 가겠다면 아무도 막을 수 없어.”강이찬의 손가락 사이로 타오르고 있던 담배는 찬 바람이 불자 선홍빛을 띠었다.“대학 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14년이 지났어. 하지만 우리는 결코 같은 편이 아니었어. 배현수, 앞으로 너는 네 길을 가고 나는 내 길을 가고, 각자 다른 길을 가는 게 좋을 것 같아.”배현수는 가볍게 웃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처음 약속은 지켰으니 더 이상 같이 이 길을 걸을 필요가 없겠지. 그동안 고마웠어.”“그래. 그럼 그렇게 해.”강이찬은 타버린 담배꽁초를 버리더니 코트를 들고 강
조유진의 전화였다.배현수는 감정을 추스른 후 아무렇지 않은 듯 전화를 받았다.“진주시에 도착했어?”“네, 오후에 공장을 둘러보고 이제 막 호텔에 들어왔어요.”전화기 너머로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를 들은 조유진이 물었다.“지금 어디예요?”배현수는 가볍게 웃더니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순찰 중?”조유진은 진심으로 받아들였다.“네, 순찰 중이요... 그런데 잘 안 돼요?”“아니.”배현수는 휴대전화를 손에 쥔 채 난간에 한쪽 팔을 기댔다.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는 여유로운 듯 보였다.건축자재 공장의 최근 자료를 보는 조유진은 휴대폰을 얼굴과 어깨에 끼고 통화를 하면서 말했다.“그래서 지금 대체 어디에 있는 건데요?”“불야항 바, 육지율이 술 마시자고 해서.”“전화기 너머로 바람 소리가 들려요.”그러자 배현수가 말했다.“귀가 밝네? 가게 안에 오래 있었더니 답답해서 바람 쐬러 나왔어.”조유진이 갑자기 물었다.“강이찬 씨와 완전히 끝난 거예요?”배현수는 순간 넋을 잃었다. 눈살마저 찌푸려졌다.“소식이 아주 빠르네. 유진아, 왜 갑자기 내 일에 이렇게 관심이 많은 거야? 나중에 결혼하면 네 손에 죽는 거 아니야?”나태한 배현수의 말투는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하지만 그럴수록 더 이상하게 들렸다.조유진은 일부러 한마디 했다.“아직 결혼하겠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결혼 후에 아내가 엄격하게 관리할까 봐 걱정돼요? 신경 쓸지 말지도 아직 생각하지 못했어요.”배현수는 한 손에 휴대전화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담배를 든 채 난간에 느슨하게 기댔다.“네가 나 신경 써주지 않으면 누가 나를 신경 써주는데?”담뱃재가 한 움큼 타오르자 남자는 툭툭 털었다. 그러자 담뱃재가 사방에 흩날렸다.조유진은 입꼬리를 치켜세우며 말했다.“말꼬리 잡지 말아요. 강이찬 씨가 2조 원의 주식을 현금화해서 SY그룹을 떠났잖아요. 두 사람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거예요?”“나 하나만 신경 써. 강이찬까지 신경 쓸 필요 없어.”배현수는 사실 조유진에게 이런
휴대전화를 잡고 있는 조유진의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는 마치 가까운 곳에서 속삭이는 듯 귓불이 뜨거웠다.배현수는 비아냥거렸다.“왜 말이 없어? 나 위로해주고 싶지 않은 거야?”아이까지 낳았지만 사실 친밀한 스킨십의 횟수는 많지 않다.7년 사이 겨우 20여 차례였다.조유진이 부끄러워하는 게 어쩌면 당연했다. 그녀는 투덜거리며 말했다.“그냥 친구부터 하자면서요? 배 대표님, 설마 이렇게 쉽게 모든 일들을 처리하나요?”두 사람이 알고 지낸 시간은 매우 긴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 평범한 연애를 하고 동거하는 커플보다 어쩌면 더 짧은 지도 모른다.심지어 배현수는 육지율과 함께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조유진은 두 사람의 감정과 순서가 늘 혼란스럽다고 생각했다.모르는 사람은 그들이 이미 한 번 이혼한 줄 안다.그러나 그들은 구청에 가서 신고한 적조차 없다.남초윤은 늘 본인이 육지율과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 사이도 아닌 두 사람은 혼인 신고한 지도 벌써 3년 가까이 된다.그녀와 배현수가 정상이 아닐까, 아니면 남초윤과 육지율이 비정상인 것일까?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혼인 신고를 하는 것을 조유진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차라리 평생 혼자 살지언정 말이다. 외롭게 살면 살았지 결혼 자체에 대한 로망은 없다.하지만 상대가 배현수이기 때문에 결혼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배현수는 담담하게 웃더니 손에 낀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쉽게 해결하려 한다고? 쉽게 구청까지 갔으면 좋겠네.”조유진이 귀띔했다.“배 대표님, 수습 기간이 아직 안 지났네요. 오늘 강이찬 씨와 사이가 틀어져서 말하고 싶지 않고 기분이 안 좋은 건 이해해요. 현수 씨는 늘 자기감정을 숨기려 하니까요. 이건 감점 요소인 것을 알죠?”그 말을 들은 배현수는 어이가 없었다.“유진 공주님, 그럼 저는 지금 몇 점입니까?”조유진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눈사람을 만들었으니까 10점 더할게요. 백소미에게서 나를 구했으니까 그것도 10점,
호텔 방 스탠드를 끈 조유진은 베개 옆에 휴대전화를 둔 채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전화 끊을까요?”“완전히 잠들고 나면 끊어.”조유진은 이불 안에서 한 바퀴 돌며 휴대전화를 더 가까이 가져가더니 입꼬리를 올렸다.예전에 두 사람이 연애할 때, 이렇게 자주 보이스 톡을 했다.할 말이 없거나 상대방이 바빠도 계속 보이스 톡으로 통화하면서 각자 할 일을 했다.옆에 없어도 항상 같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것처럼 말이다.이 밤이 7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강가에서 육지율은 한껏 흥분한 기분으로 손에 외투를 들고 불야항 바에서 나왔다.멀지 않은 난간에 기대어 눈살을 찌푸리더니 어수룩한 모습으로 말했다.“유진 공주님, 저는 지금 몇 점입니까?”육지율은 이상한 말투로 괴상하게 배현수의 말을 따라 했다.배현수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여기 있은 지 얼마나 됐어?”“유진 공주님, 이 말할 때부터.”육지율은 비아냥거렸다.“유진 공주와 전화할 때 얼마나 몰입하면 옆에 사람이 이렇게 오래 서 있는데도 모르는 거야?”배현수는 강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왜, 눈에 거슬려? 거슬리면 여기로 뛰어들던가.”육지율은 입을 달싹였다.“배현수, 너 정말. 연애에 빠져서는! 구린내 나 죽겠어! 연애질 많이 하면 일찍 죽는 거 알아?”배현수는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빨리 죽든 늦게 죽든 너처럼 혼자 늙어 죽는 것보다 낫지.”“지금 누구 말하는 거야?”“이렇게 똑똑히 말하는데도 못 알아들었어? 모른 척하기는.”육지율은 이를 악물었다.“X발!”배현수는 통화 중인 휴대전화를 들고 그에게 흔들었다.“간다. 집에 가서 마누라와 얘기해야 해서.”육지율은 배현수가 걸어가는 방향을 향해 발길질했다.“결혼했어? 혼인 신고 했어? 유진 공주가 시집가기로 약속했어? 그런데 웬 마누라는! 상대방이 원하는지도 봐야지!”“어떤 집 마누라는 있으나 마나 하던데. 아무리 늦게 들어가도 전혀 신경 쓰지 않더라고. 누구는 마누라가 없어도
배현수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유진아?”몇 번을 외쳤지만 반응이 없다.배현수가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오려 할 때 전화기에서 은은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정신을 반쯤 차린 그는 침대 머리맡에 앉아 손을 들어 눈썹을 만지작거렸다.“유진아, 말 좀 해. 왜 울어?”전화기 너머의 조유진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손을 들어 눈물을 훔쳤다. 목이 멘 듯 계속 울먹였다.휴대전화를 들고 잔뜩 웅크린 채 쉰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악몽 꿨어요.”“무슨 악몽?”조유진은 한참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스위스에서 유산하는 꿈을 꿨는데 여권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스위스 그 집에 갇혀 출구를 찾지 못했어요. 선유와 셀리나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요. 나 혼자 안에 있었어요. 이곳저곳 다 돌아다녔지만 문이 굳게 잠겨 있었어요. 창문까지 꼭 닫혀 바람이 잘 통하지 않았어요. 창문을 깨고 나가려고 하는데 밖에서 갑자기... 갑자기 피투성이의 아기들이 나타나서... 우렁찬 울음소리가...”그리고 놀라서 깼다.배현수는 조유진에게 별일 없는 것을 확인하고 한시름 놓았다. 무슨 일이 발생한 줄 알았다.하지만 한숨을 내쉬며 미처 진정할 겨를도 없이 가슴 부위에 또 한 번의 충격과 함께 둔한 통증이 느껴졌다.이 꿈은 정말 기괴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조유진이 이 악몽을 꾸는 것이 현실과 아예 동떨어진 것도 아니다.이제 막 유산한 지 아직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다.마음의 상처는 몸의 상처보다 더 클 수 있다.그녀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잠재의식 속의 상처가 더 치명적인 법이다.“현수 씨, 잠이 안 와요. 너무 무서워요. 휴대폰 배터리가 거의 없어요.”말을 할수록 조유진은 점점 더 흐느꼈다. 배현수의 심장도 점점 더 답답했다.배현수가 한마디 달랬다.“불부터 켜.”조유진은 ‘네’라고 대답한 뒤 불을 켰다.불을 켜자 악몽도 조금씩 사라졌다.이불을 끌어안은 조유진은 침대 머리맡에 기댔다. 이마엔 땀이 맺혀 있었다.배현수는 마음이
전화 너머의 조유진은 순간 멈칫했다.입을 벌려 무엇인가 말하기도 전에 배현수의 침착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한 시간 정도면 진주에 도착할 것 같아. 호텔의 구체적인 위치를 알려줘.”조유진은 휴대전화를 쥔 채 아무런 대답 없이 한참 동안 멍하니 있었다.배현수가 불렀다.“유진아?”조유진은 급히 ‘어’라고 외쳤다. 그리고 바로 호텔 위치와 방 번호를 알려줬다.전화기 너머로 경미한 자동차 주행 소리가 들려왔다.조유진은 문득 무엇인가 생각난 듯 말했다.“서 비서님과 같이 안 있었어요?”“새벽이잖아. 서정호를 부르면 적어도 40, 50분은 늦어.”서정호는 도시 외곽에 살고 있다.한편 배현수가 살고 있는 산성 별장은 뉴타운 근교에 있다. 두 곳의 거리가 좀 멀다.조유진은 살짝 흐느끼는 목소리로 물었다.“앞이 잘 보여요? 너무 위험하지 않아요?”“자율주행 시스템을 장착해 큰 문제는 없어.”그의 목소리는 예전과 다름없이 차분했다. 마치 이 모든 행동이 평소와 같은 것처럼 말이다.그런데 사실... 이것은 미친 짓이다.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이 한밤중에 혼자 차를 몰고 진주시로 그녀를 찾으러 왔다. 서 비서더러 운전하라고 부르지 않은 것은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조유진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눈시울을 붉혔다.“현수 씨, 나 그저 악몽 꾼 것뿐이에요.”“알고 있어.”“한밤중에 차를 몰고 올 필요는 없어요. 낮에 비행기를 타거나 서 비서님에게 운전 부탁해서 와도 돼요.”이번에는 배현수가 몇 초 동안 침묵을 지켰다.서로 말이 없는 통화 사이에 작고 가벼운 전류 소리가 들렸다.배현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너 지금 내가 필요하잖아. 낮에는 슬퍼하지 않을 텐데 그때 가서 뭘 해?”뜨거운 눈물이 이불 위에 떨어졌다.이 말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서로만이 알 것이다.그녀가 스위스에서 유산했을 때, 그녀가 그를 가장 필요로 했을 때, 그가 곁에 있어 주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조유진은 가볍게 코를 훌쩍였다.“그럼 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