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백만, 몇천만 달러? 심지어 좀 더 비싸더라도 임기욱은 진료비를 낼 자신이 있었다. 이승휘와 유재영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염무현이 아무런 기계도 쓰지 않고 자신을 십여 분 만에 살렸다고 했다. ‘침구 세트 두 개만 썼는데 치료비가 비싸면 얼마나 비싸겠어.’이승휘는 미간을 찌푸렸다. “전 재산의 절반이라고 합니다.” “얼마라고요?” 임기욱은 이승휘가 농담하는 줄 알고 두 눈을 번쩍 떴고, 이승휘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게 염무현 씨가 정한 규칙이랍니다. 그분에게 치료받은 사람은 모두 전 재산의 절반을 진료비로 내야 한답니다.” “병을 못 고쳐도 돈을 줘야 합니까?” 임기욱의 질문에 이승휘와 유재영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승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임기욱 씨가 말씀하시는 상황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염라대왕에게 병을 보이는데 치료할 수 없는 병이 있을까.’치료받은 환자마다 싱글벙글 웃으며 돈을 지급하고는 잔뜩 들떠서 떠났다.임기욱은 연신 눈살을 찌푸리며 두 눈에 복잡한 기색이 스쳤다.‘전 재산의 절반이라니, 말도 안 돼! 그저 보통 부자였다면 원래도 얼마 없는 돈을 주면 그만이겠지만, 나는 슈퍼 갑부라서 재산이 엄청나다고!’이런 식이면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손해보는 게 아닌가? 이건 공평하지 않았다. 돈 많은 사람들을 바보로 알고 기만하는 건가? 가난한 집의 돈만 돈이고, 부잣집의 돈은 뭐 하늘에서 떨어지나!다들 이런 불공평한 규칙을 따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분명 염무현이 사기 치는 게 틀림없었다. 가장 중요한 건 염무현 본인이 직접 정확한 금액을 말하지 않았고, 임기욱도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기에 신뢰적인 부분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임기욱은 이런 생각들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딴생각을 굴리기 시작했다.한편 수술실 안, 두 의사는 도명철이 보는 앞에서 도우순을 살리려고 온 힘을 다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하며 안간힘을 다 써보았지만, 도우순은 이미 완전히 숨을 거둔 상태라 전부 무
“그 얘기 들었어요? 도 매니저님 그만둔대요.”“뭐라고요? 도 매니저님 어제까지도 출근했잖아요. 어제 누구랑 다투고 급히 떠나던데, 왜 갑자기 그만둔대요?”“도 매니저님 염무현 씨와 다퉜잖아요. 세상에, 설마 염무현이란 사람 진짜 숨겨둔 힘이라도 있는 것 아니에요, 도 매니저님도 상대할 수 없을 만큼?”사무실에서 직원들은 쑥덕쑥덕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아까 총무 부서 직원한테서 들었는데, 우서준 씨 아침 일찍 와서 사직서 내고 인사부에서 결정이 나기도 전에 갔대요.”“다른 회사로 옮긴 게 아니면 겁에 질려서 일분일초도 못 버티는 것 말고는 별다른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요.”“염무현이라는 사람, 뒷배가 그렇게 대단해요?”우예원도 의아했다. 과거 우서준은 염무현에게 시비를 걸었던 탓에 총무 부서로 쫓겨나서 에어컨이나 관리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도명철 차례인가?우서준은 보통 사원이라 그럴 수 있다지만 도명철은 영업팀 매니저였고, 게다가 도씨 가문은 혜리 그룹에도 지분이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 다 쫓겨나도 그는 아닐 줄 알았다.하지연이 하이힐을 신고 또각또각 걸어왔다.“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영업팀 매니저였던 도명철 씨가 집안 사정으로 일을 그만두게 되었어요. 영업팀의 프로젝트는 잠시 두 팀장님이 책임지도록 하고, 회사에서 이른 시일 내에 새 매니저님을 보낼 테니까 그전까지 모두 하던 일 그대로 하시면 돼요.”아니나 다를까 도명철은 정말로 회사를 그만뒀다.“하 팀장님, 도 매니저님 집에 무슨 일 생겼대요?”누군가 이렇게 물었다.사실 직원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무슨 재밌는 일이 있는지 기대하고 있었다. 집안 사정이라니, 대충 들어도 아무렇게나 둘러댄 핑계가 분명했다.“이건 도명철 씨 개인 사정이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하지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하지만 여러분들이 이리저리 추측하면서 제대로 일하지 않을까 봐 그냥 알려드릴게요. 어젯밤, 도명철 씨 아버님께서 갑자기 돌아가셔서 일 처리를 마저 하려고 그만둔 겁니다.”그랬구나!
우예원은 그래도 예의상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거의 다 쌌어요. 늦어도 내일이면 나갈 겁니다. 집 안도 다 깨끗이 청소했고, 가구나 가전제품도 망가진 게 없어요.”“문제가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직접 봐야 알죠.”집주인은 능청스레 한 바퀴 돌아봤지만 확실히 트집 잡을 곳이 없었다.우예원은 집안 물건을 소중히 여겨 종래로 망가트린 적이 없었기에 아주 떳떳하게 말했다.“보시다시피 아무 문제 없으니까 이제 보증금 돌려주셔야죠?”“무슨 소리지?”집주인이 표정을 굳히며 콧방귀를 뀌었다.“아가씨가 계약을 어긴 것도 위약금 안 받았는데, 뻔뻔하게 나한테 보증금을 요구해요?”“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우예원은 황급히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카톡으로 연락할 땐 이런 말 없었잖아요. 아저씨가 된다고 해서 저도 짐 정리한 건데.”집주인은 음침하게 웃었다.“생각이 바뀌었어요. 말로만 한 약속은 법적 효력이 없지. 세입자가 계약을 어길 시, 집주인은 보증금을 가져갈 권리가 있어요. 그게 이 바닥 규정인 거 모르나?”집주인은 우예원과 카톡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우예원의 룸메이트가 일찍 여기서 나갔고 우예원 혼자 이 집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몹쓸 꿍꿍이가 생겼다.갓 대학을 졸업해서 사회 경험도 없고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여자애 하나쯤 다루기 쉽지 않겠나!“아니, 어떻게 한 입으로 두말하세요!”우예원은 속이 탔다. 40만 원이 큰돈은 아니지만 사회 초년생인 우예원에겐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이를 보자 집주인의 두 눈이 음침하게 번뜩이며 더러운 눈빛으로 우예원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나도 알지, 요즘 대학생들 살기 어려운 거!”그는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나랑 한번 하면 보증금 돌려줄지 생각해 볼게, 어때요?”“무슨 말씀 하시는 건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네요.”우예원은 깜짝 놀라 두 손으로 옷깃을 막으며 뒤로 몇 발짝 물러났다.집주인은 더욱더 거침없이 다가가며 음탕한 미소를 지었다.“한 번이면 돼요. 몇 분 안 돼서 40만 원 받는데, 회사 가
우예원이 눈물 젖은 불쌍한 모습으로 애걸복걸 빌었지만, 그 모습에 집주인은 연민은커녕 오히려 더욱 흥분하여 그녀의 옷을 찢기 시작했다.짜악-우예원의 겉옷이 찢어지면서 그녀의 여리고 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그러자 집주인은 삽시간에 굶주린 늑대가 어린 양을 보듯 눈을 무섭게 뜨며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우예원이 절망에 빠진 순간 누군가 방문을 뻥 걷어찼다.쾅!듬직한 실루엣이 문 앞에 나타났다.“그 손 치워!”집주인이 당황한 틈을 타 그에게서 벗어난 우예원은 옷을 여민 채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바들바들 떨었다.문을 박차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염무현이었다. 우현민이 그에게 우예원이 이사하는 걸 도와달라고 부탁했지만 우예원은 짐도 많지 않았고, 무엇보다 염무현과 단둘이 있기엔 왠지 모르게 어색해서 거절했었다.우현민이 염무현에게 주소를 알려줬기에 다행히 최악의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당신은 누군데 함부로 여길 들어와? 이거 주거 침입이야!”집주인은 잠깐 놀랐지만 곧바로 으름장을 놓았다.“고소당하고 싶어? 눈치가 있으면 오지랖 떨지 말고 꺼져. 아니면 무단침입으로 신고할 테니까.”염무현은 되레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갔다.“신고해. 어디 한번 보자고, 경찰이 당신을 잡아갈지 나를 잡아갈지.”순식간에 기세가 꺾인 집주인은 180도 태도를 바꾸며 역겨운 미소를 지었다.“자네, 이거 다 오해야. 다 오해라니까?”염무현은 뻔뻔한 그의 말을 무시하고 우예원을 향해 물었다.“넌 어때? 괜찮아?”“괜... 괜찮아.”우예원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고,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그 모습을 본 집주인은 눈알을 굴리며 생각했다.‘이대로는 안 되겠어. 상황을 바꿔야지, 안 그러면 나한테 너무 불리하겠어.”그는 일부러 오만한 태도로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이봐 자네, 들었지? 이 아가씨도 괜찮다잖아. 속 좁게 그러지 말고 이 일은 이대로 넘어가자고. 보증금 40만 원에, 이 아가씨 월세도 절반 돌려줄게. 어때?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그럼... 조심해.”우예원은 복잡한 심경으로 말했다.감옥에 다녀온 염무현을 생각해 다시는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으나,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뱉지 못했다.집주인은 표정이 갈수록 일그러지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고!”그는 휴대폰을 꺼내어 재빨리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고, 곧바로 잔뜩 아부 섞인 어투로 말했다.“준구 형님, 저 진씨요. 여기 문제가 좀 생겼는데 형님께서 해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참, 부하들도 데려오세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형님들 헛걸음하시게 둘 순 없으니 야식값은 물론이고, 깜짝선물도 준비했습니다! 여기 형님들이 만족하실만한 엄청난 미인이 있어요. 우리 함께 즐겨보자고요. 좋아요, 그럼 기다리겠습니다!”통화를 마친 집주인은 든든한 뒷배가 생긴 것 같아 즉시 거들먹거렸다.“자네, 들었지? 준구 형님은 이 바닥에서 유명해. 북파 두목과도 어울렸던 사람이야. 서씨 가문이라고 들어봤는지 몰라. 서해 어둠의 세계에서 왕좌로 불린다고! 무섭지? 얼른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빌어. 머리 열 번 조아리면서 200만... 아니지, 내 좋은 일 망쳐놨으니까 400만 원 내놔. 깔끔하게 돈으로 보상하면 보내줄게. 하지만 저 계집은 안 돼. 쟤는 여기 있어야지, 안 그러면 내가 준구 형님에게 할 말이 없잖아. 내 말 안 들려? 귀먹었어?”짜악!우렁찬 소리와 함께 손바닥이 역겨운 집주인의 주름진 얼굴로 향했다.그는 곧바로 제자리에서 튕겨 나갔고, 순식간에 부서진 유리 테이블 조각 위를 처참하게 뒹굴었다.반쪽 얼굴이 빠른 속도로 빨갛게 부어올랐다. 선명한 손바닥 자국과 함께 입을 벌려 피를 뱉자 이빨 몇 개가 섞여 나왔다.다른 한쪽도 부서진 유리 조각에 긁히고 베여 피범벅이었다.화장실에서 씻고 있던 우예원은 요란한 소리에 심장이 철렁했다.‘그렇게 걱정하던 일이 결국 일어났네.’4년을 감옥에서 지냈는데 왜 그는 전혀 달라진 게 없을까.툭하면
“이런 젠장!” 준구는 진씨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덜컥 놀랐다. “어떤 미친놈이 간이 배 밖으로 나와서 내가 뒤를 봐주고 있는 사람을 건드려. 개를 때릴 때도 주인 허락 받아야 하는 거 몰라?” 한 무리 부하들이 화가 잔뜩 난 채 몇몇은 뒤 허리에 고정된 칼을 뽑아 들었고, 일부는 야구 방망이를 들고 공격적으로 달려들었다. 우예원은 당황한 나머지 황급히 얼굴을 닦고 화장실을 뛰쳐나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염무현이 다시 손을 쓰는 건 막아야 한다. 그가 나쁜 길로 들어서는 걸 막기 위해 우예원은 오늘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대체 어떤 놈인지 얼굴이나 보자!” 앞장서서 방으로 쳐들어가던 준구의 표정이 순간 우스꽝스러워졌다. “무... 무... 무현 님, 무현 님이셨군요!”문을 열고 달려 들어올 때만 해도 화가 났던 준구의 표정이, 염무현을 보자 충격에 이어 곧바로 아부 섞인 웃음으로 바뀌었다.하도 얼굴이 빨리 바뀐 탓에 미처 따라가지 못한 얼굴 근육이 앞뒤로 뒤엉키며 무척 괴이하고도 웃긴 표정이 되었다.염무현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고, 각지고 잘생긴 얼굴 위로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당신 나 알아?” 준구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횡설수설 말했다.“압니다... 아는 걸 넘어서 영광스럽게도 인사까지 했었습니다...”“그래? 난 왜 기억이 안 나지.” 염무현의 말투가 점점 더 차가워졌다. ‘감정에 호소하는 건가?’염라대왕 앞에서 감히 한낱 버러지가 감정을 호소하다니!식은땀을 흘리던 준구는 말을 더듬으며 설명했다.“지난번 정진 영천에서 무현 님의 기품을 보는 영광을 누렸습니다...”“똑바로 말해!”염무현의 두 눈이 번뜩이며 살기를 내뿜었다.털썩!준구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로 무릎을 꿇었다. 더 이상 부하들 앞에서 체면을 구기는 것도 개의치 않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전 그때 서운혁 밑에 있다가 무현 님께 혼났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공씨 가문에 들어와 김범식 형님을 따르고 있습니다.”염무현은 차가운 눈빛을 거
부하들은 겁에 질려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크게 외쳤다.“무현 님, 저희가 잘못했습니다!”이윽고 저마다 창피한 듯 고개를 숙였다.그 모습을 본 우예원은 깜짝 놀랐다. 집주인이 사람을 부를 때만 해도 문제가 커질 거라고 예상했는데, 양측이 싸우기도 전에 이미 끝나고 말았다. 그것도 상대가 단체로 무릎을 꿇는 모습으로!제일 놀란 사람은 집주인 진씨였다. 엄밀히 말하면 놀랐다기보다 충격적이었다!큰 기대를 품고 자신을 도와달라고 불렀던 사람이 상대에게 무릎을 꿇고, 그것도 모자라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며 상대의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그는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덜덜 떨면서, 속으로 이게 꿈이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했다.하지만 준구 일행의 행동을 본 순간, 마지막 남은 환상마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다.‘상대를 잘못 건드렸다!’“잘못했다는 말 한마디면 없던 일이 되나?”염무현의 두 눈이 다시 한번 서늘하게 번뜩이자 준구는 깜짝 놀라며 황급히 말했다.“저희가 어떻게 하면 화가 풀리시겠습니까, 말씀만 하세요.”“저 자식이 내 동생한테 개수작을 부리고 너희들까지 불러서 도와달라고 했어.”염무현이 차갑게 말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진작 너희들에게 몹쓸 짓을 당하고도 남았겠지?”준구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물었다.“그 말씀은...?”“뿌리부터 제거해야지!” 염무현의 말 속엔 숨은 뜻이 있었다.‘뿌리부터?’준구는 곧바로 그의 말뜻을 깨닫고 요점을 파악했다.“알겠습니다, 무현 님!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는 곧바로 자리에서 벌떡 튀어 오르며 집주인을 가리킨 채 부하들에게 명령했다.“저놈 좀 잡아!”“준구 형님, 뭐 하는 겁니까?” 사지를 벌린 채 땅바닥에 눌린 집주인은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가며 두려움에 떨었다.준구는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망할 자식, 감히 무현 님까지 건드리고 우리까지 끌어들여? 내가 방금 너 때문에 죽을 뻔했어! 이건 다 네가 자초한 일이니까 누굴 탓하지도 마!”말을 마치기도 전에 준구는 집
“짐은 다 챙겼어?”염무현의 질문에 우예원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응, 다 쌌어.”“무현 님, 제가 두 분 아래층까지 배웅해 드릴게요.”준구는 서둘러 앞으로 다가갔다. “됐어, 너희들은 이만 가봐.” 염무현은 크고 작은 가방을 한 손에 가볍게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우예원의 손목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준구와 그의 부하들은 동시에 허리를 굽혔다.“무현 님, 조심히 가십시오.”우예원은 순순히 염무현을 따라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고, 1층에 도착하고 나서야 상대방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욱 놀라웠던 건 싫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고 오히려 마음이 든든했다는 것이었다. 아파트 문을 나서며 우예원은 염무현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어렴풋이 몇 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당시 중학교에 막 입학한 우예원은 같은 반 학생 몇 명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는데, 그때도 염무현은 오빠라고 나서서 그녀를 괴롭혔던 애들을 대신 혼내줬다.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마치 지금처럼...사실 우예원이 방금 전 화장실에서 달려 나왔을 때, 염무현은 이미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기에 손을 쓰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염라대왕의 신분으로 굳이 준구의 손을 빌려 집주인을 처벌하진 않았을 것이다. ‘네가 폭력을 쓰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 적어도 네가 보는 앞에서는 때리지 말아야지.’한편 월셋집에서 부하들은 오늘 운이 너무 좋았다고 한탄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 준구 형님 덕분입니다. 형님 없었으면 저희 모두 오늘 당장 끝날 목숨이었어요. 무현 님이 말씀하지 않아도 범식 형님이 저희를 가만두지 않았을 겁니다!”“뿌리부터 뽑으라는 게 그런 말이었군요. 역시 준구 형님 똑똑하십니다. 존경합니다, 형님!”“저였으면 진작 당황해서 무현 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도 몰랐을 겁니다.”잔뜩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고 있던 준구가 얼른 다시 표정을 굳히며 미간을 찡그린 채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