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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눈 감고 심호흡해. 지금부터 몇 분 동안 모든 감각이 서서히 사라질 거야. 하지만 재생하는 과정이니까 조급해하지 마.”

주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문이 벌컥 열렸다.

“서윤아, 문은 왜 열어놓고 있어? 빚쟁이가 들이닥치면 어떡하려고?”

남루한 차림의 중년 부부가 입구에 나타났는데, 구부정한 등에 쓰레기로 가득 찬 포댓자루를 업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두 사람을 발견한 주태오는 감전이라도 당한 듯 화들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심지어 온몸이 떨림을 멈추지 않았다.

부모님이 힘들게 살고 있을 거라는 예상은 어느 정도 했지만, 이렇게 비참할 줄은 몰랐다.

ZX 그룹을 운영했을 때만 하더라도 두 분이 얼마나 잘 나갔는가?

지금은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했고, 불과 3년 만에 수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당신 누구야?!”

조하영도 주서윤처럼 엉겁결에 뒷걸음질 치다가 겁을 먹은 듯 서둘러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주민국은 조하영의 앞을 가로막으며 바닥에 무릎을 털썩 꿇더니 두려움에 떨며 말했다.

“우선 진정하시고 제발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시면 안 될까요? 오늘 새벽 3시부터 지금까지 쓰레기를 수거하러 다녔어요. 페트병을 엄청 많이 얻어서 아마 돈이 꽤 될 거예요. 한번 보실래요?”

말을 마친 주민국은 안간힘을 써서 등에 멘 포댓자루를 내려놓았다. 이내 활짝 열고는 더러운 페트병과 파지류를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이 장면을 본 주태오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 눈시울이 붉어졌다.

주민국은 오만하기로 소문난 상남자였다.

ZX 그룹의 회장으로서 그동안 잘 보이려고 애쓰는 사람이 셀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꼬리를 흔들며 구걸하는 강아지처럼 심지어 상대방이 누군지 제대로 확인조차 하지 않고 무릎 꿇고 용서부터 빌고 있다니!

지난 3년 동안 아버지가 대체 얼마나 비인간적인 고문과 학대를 겪었는지 가히 상상이 안 갔다.

죄책감과 고통, 슬픔 등 여러 가지 감정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아빠! 엄마! 저예요, 태오! 늦게 찾아뵈어서 죄송합니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주태오는 한층 격앙된 모습으로 주민국과 조하영의 팔을 잡고 무릎을 꿇었다.

강나리가 심장을 도려냈을 때조차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는데 지금은 걷잡을 수 없었다.

부모님과 여동생에 대한 미안함이 너무 컸다.

“태오? 주태오?”

조하영은 흠칫 놀라더니 고개를 들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 아들?! 이거 꿈 아니지?”

주민국은 넋을 잃고 말았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손을 뻗어 주태오의 얼굴을 더듬거렸다.

“아아! 아들아, 미안해. 아빠가 미안하다... 난 아버지로서 자격이 없구나.”

눈앞의 남자가 자기 아들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주민국은 주태오를 덥석 끌어안고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소이랑 헤어지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었는데... 널 강씨 일가 데릴사위로 보내는 자체가 잘못되었어. 그동안 돈과 권력에 눈이 멀어 정작 네 기분은 안중에도 없었거든. 설령 강씨 일가에서 도망쳤다고 한들 이해해. 이게 다 내 탓이야, 당해도 싸! 아들아, 정말 미안하다!”

말을 마친 주민국은 스스로 뺨을 때리려고 했다.

하지만 손을 번쩍 들어 올리는 순간 주태오에게 제지당했다.

그는 눈시울이 빨개진 채 말했다.

“아빠, 전 도망친 적이 없어요. 그때 저도 강씨 일가의 피해자였어요.”

주태오는 부모님께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모조리 털어놓았다.

“그랬구나... 난 우리 아들이 절대 도망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 세상에 이렇게 지독한 집안도 있다니.”

조하영은 창백한 얼굴로 주태오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마치 더는 아들과 헤어지기 싫은 듯 그의 손을 꼭 붙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오빠?”

이때, 주서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온몸이 근질거리는데? 특히 척추가 너무 가려워.”

주서윤이 입을 떼자 그제야 두 사람은 딸아이의 몸에 빼곡히 꽂혀 있는 은색 바늘을 발견하고 아연실색했다.

“아들, 서윤이 왜 저래?”

“괜찮아요, 시력이랑 청력을 회복시키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침을 놓아줬을 뿐이에요.”

주태오가 말했다.

“시력과 청력을 회복한다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니?”

주민국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럴 리가? 서윤은 이미 척추 신경이 죽어서 아무리 난다긴다하는 사람도 치료 불가능한데?”

척추 신경 괴사는 불치병이며, 또한 의학적으로도 공인된 사실이다.

따라서 주태오가 고작 침술만으로 주서윤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래, 서윤이가 더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해? 물론 여동생을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침을 놓으면 안 되지! 심지어 집에서 쓰는 바늘이라는 게 말이 돼? 얼른 빼!”

조하영은 주태오가 일반 바늘을 사용했다는 자체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엄마, 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정 의심이 간다면 끝까지 한번 지켜보세요.”

주태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하영을 도로 앉히고 주서윤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손을 뻗자 은색 바늘이 다시 움직였다.

뿌옇게 변한 주서윤의 눈동자가 갑자기 생기가 돌기 시작하더니 다리도 움찔했다.

이를 목격한 주민국과 조하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충격에 휩싸였다.

“어? 보인다! 드디어 보여요! 이제 들리기도 해요!”

주서윤은 기쁜 마음에 새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휠체어를 짚고 비틀거리면서 일어섰다.

“이럴 수가! 서윤이가 진짜 일어섰어.”

어안이 벙벙한 두 사람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서둘러 달려가 주서윤을 부축했다.

“알겠어! 서윤의 신경이 진짜 죽은 게 아니라서 조금만 자극했더니 스스로 회복한 거야.”

조하영의 머릿속에 문득 이러한 가설이 떠올랐다.

“그렇군.”

주민국도 납득이 가는 듯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왜냐하면 척추 신경 괴사는 치료 불가능한 병이기 때문이다.

아까만 해도 자칫 주태오가 의학 천재인 줄 알고 좋아했는데, 고작 소가 뒷걸음치다가 쥐 잡은 격이었다.

“태오야, 이번에 운이 좋아서 다행이야. 앞으로 경솔한 행동은 하지 마, 알겠지? 아직 의술이 허술한 편이니까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해.”

조하영은 불안한 마음에 신신당부했다. 주태오가 또다시 제멋대로 굴다가 누구 하나라도 다치면 큰일이지 않겠는가?

“네.”

주태오는 피식 웃기만 했다. 비록 터무니없는 해석에 불과했으나 부모님이 납득이 간다면 그만이었다.

“오빠!”

주서윤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주태오를 바라보았는데 마치 백 번 봐도 질리지 않은 듯싶었다.

사실 그녀는 이대로 실명할까 봐 너무 두려웠기에 볼 수 있을 때 자기 오빠를 마음껏 보고 싶었다.

“응, 이제 괜찮아. 이따가 약재를 좀 구해 올 테니까 일주일 동안 꼬박꼬박 먹으면 완치할 거야.”

주태오는 앞으로 다가가 부모님과 여동생을 끌어안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는 가족들이 고생하지 않도록 지켜주겠다고 속으로 맹세했다.

또한,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고통과 괴로움은 열 배, 백 배로 갚아 줄 것이다.

“참, 아들아. 강씨 일가에서 네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야. 얼른 도망가.”

이 사실을 문득 떠올린 조하영은 두 눈에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맞아요, 아까 오빠랑 흑범회 사람이 시비가 붙었는데 이따가 다시 찾아올지도 몰라요.”

주서윤도 발을 동동 굴렀다.

“뭐라고? 태오야, 그런 무법자들과 시비가 붙었다고? 망했네, 왜 이렇게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는 거야? 아직 찾아오지는 않았으니까 얼른 서윤을 데리고 도망쳐.”

주민국은 품속에서 꼬깃꼬깃 접은 잔돈을 꺼내 주태오의 손에 쥐여주었다.

“엄마 아빠가 무능해서 돈이 이것밖에 없구나. 얼른 챙겨서 출발해.”

“아빠...”

주민국이 쥐여준 돈을 받아든 주태오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싶었다.

반면, 조하영은 주태오의 팔을 잡아당기며 초조한 나머지 집 밖으로 밀어내려고 했다.

“넋 놓고 뭐 하는 거야? 얼른 네 동생 데리고 가라고. 어차피 아빠와 난 살 만큼 살아서 죽어도 그만이지만, 너희들이라도 무사해야지. 엄마 아빠는 복수 따위 꿈도 안 꾸니까 어떻게든 살아남을 생각부터 해, 알았어?”

부모님의 사랑은 끝이 없다더니, 두 사람은 감히 복수를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주태오를 입구까지 밀어낸 순간, 쓰레기장 입구에 백여 대에 가까운 SUV 차가 우르르 몰려와 빽빽하게 에워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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