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영을 정유준 옆으로 데려간 배현욱이 양다인에게 말했다.“양다인씨, 이런 힘든 일은 강비서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어요.”“……?”왜 꼭 이런 힘들고 험한 일은 그녀가 해야 하는 걸까?강하영은 겨우 반 시간 만에 취해서 인사불성이 된 정유준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도대체 정유준에게 술을 얼마나 먹인 거지?양다인은 순간 멍하게 서 있었다. 배현욱이 강하영을 불러올 줄은 몰랐다.그녀는 마음속의 불쾌함을 감추며 웃음을 터뜨렸다.“배 사장님, 유준씨는 그냥 저에게 맡기세요. 강비서는 요즘 몸이 좋지 않아요. 귀찮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양다인씨, 유준이는 술을 마신 후 조심해야 할 일이 많은데, 감당할 수 있겠어요?”“물론이죠.”“…….”강하영은 배현욱이 왜 굳이 자신을 끌고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정유준과 양다인은 조만간 사귀게 될 것이다. 빠져야 할 사람은 자신이다. 배현욱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강하영이 입을 열었다. “배 사장님! 양부팀장에게 돌보라고 하면 될 것 같아요. 저는 가 볼게요!”배현욱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돌아서서 가는 강하영을 쳐다보며 잠시 생각하더니, 곧 그녀를 따라갔다.“강비서, 유준이가 거위 고기에 알러지 있는 거 알지? 방금 양다인씨가 그 녀석한테 거위 고기를 먹였어!직업의식 투철한 우리 강비서는 틀림없이 알러지 약을 가지고 있겠지? 유준이한테 약을 먹이고, 의사가 올 때까지 옆에서 기다려야 하지 않겠어?”“…….” 강하영이 침묵하는 사이에 배현욱이 다시 말했다. “물론 강비서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상사의 생사를 나 몰라라 하는 비서를 뽑은 유준이의 안목을 탓할 수밖에 없지 뭐!”말을 마친 배현욱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강하영은 그 자리에 서서 잠깐 고민했다.가봐야 할까?그녀가 가지 않는다면 정유준은 분명 몹시 괴로울 것이다. 그녀는 그가 알러지 때문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녀가 간다면, 그와 양다인이 함께 있는 시간을
양다인은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잠든 남자를 확인한 그녀는 옷을 벗어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조심스럽게 침대로 올라갔다.아침 7시.정유준은 위가 불편한 느낌 때문에 잠에서 깼다. 자신이 호텔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음……유준씨, 깼어?”정유준은 소리나는 쪽으로 휙 돌아보았다. 양다인이 잠에 취한 몽롱한 눈을 하고, 부끄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순식간에 어젯밤의 화면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그는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었을 때, 누군가가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를 들었다.문을 열었을 때, 그는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들었고, 그 사람을 방으로 끌어들였다.강하영인 줄 알았는데, 양다인이었구나!정유준은 초조한 마음에 얼른 이불을 들추고 침대에서 내려왔다.양다인은 재빨리 일어나 앉아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준씨는 나하고 자고 싶지 않았던 거야?”정유준은 긴장한 표정으로 차갑게 말했다. “네가 나를 여기로 데려왔어?”양다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술을 마셨기 때문에, 유준씨를 데려다줄 수 없어서, 그냥 여기로 데려왔어.중간에 꿀물을 구해서 해장을 해주고 싶었는데, 주방이 다 퇴근하고 없더라.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유준씨가 갑자기 날 잡아끌더니, 그런 짓을 하고…….유준씨, 내가 싫으면……그냥 없었던 일로 해도 돼.”양다인은 CCTV 화면을 생각하며, 억울한 척 거짓말을 했다.정유준은 주먹을 꽉 쥐었다.“다인아, 이 일에 대해서는 내가 반드시 사과를 하든 책임을 지든 할게.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정유준의 말에 양다인은 몰래 안도의 숨을 쉬었다. 강하영이 왔었다는 것만 기억 못 하면 그것으로 되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요구대로 해주겠다고 약속한 양부모의 귀국만 기다리면, 있어야 할 것을 모두 가지게 된다!…………정유준이 집에 돌아왔을 때, 강하영은 막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정유준을 마주친 강하영은 무의식중에 그의 머리가 아직 아픈지 물어보려고 했다.그러나, 그녀가 입을 떼
양부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다인이 왔구나. 어서, 어서 앉아라.”양어머니는 정유준에게 시선을 주며 모르는 척 물었다. “다인아, 이분은?”양다인은 약간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엄마, 제가 자주 말했죠? 유준 씨예요.”양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사장님이었군요. 어서 앉아요.”자리에 앉은 정유준은 담담하게 앞에 선 부부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물을 따라 주기도 하고 수저를 놓아주기도 하며 그를 살뜰히 챙겼다.그들은 마지막으로 종업원에게 주문한 음식을 내오라고 말한 다음 자리에 앉았다.“다인아, 정 사장님은 딱 봐도 믿을 만한 사람이야. 네가 정사장님과 사귄다고 하면 우리는 외국에 있어도 안심할 수 있을 것 같구나.”“맞아, 맞아!” 양어머니가 맞장구를 치며 정유준을 바라보았다.“정사장님, 우리 다인이와는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정유준은 물티슈로 느릿느릿 손을 닦았다. 그가 무심하고 냉담한 말투로 물었다.“앞으로 어떻게 하다니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양어머니가 말했다. “당연히 결혼을 말하는 거죠.”“아직 그런 걸 논할 단계가 아닙니다. 제가 아직 해결 못한 일도 있고!”정유준이 냉정하게 대답했다.양다인이 배려하며 맞장구를 쳤다.“맞아요, 유준씨 정말 바빠요. 엄마 아빠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이제 막 남자 친구가 됐을 뿐인데!”양다인의 이 말에 정유준의 머릿속에는 문득 불륜녀가 되지 않을 거라던 강하영의 말이 떠올랐다. 마음이 갑자기 초조해진 정유준은 물티슈를 내려놓더니 벌떡 일어섰다.“식사 천천히 하십시오. 저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정유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양다인이 급히 뒤쫓아 나왔다. “유준씨! 화났어?”정유준은 걸음을 멈추고 차갑게 그녀를 돌아보았다.“양다인, 너한테 심한 말 하고 싶지 않아.”양다인은 눈시울을 붉혔다.“우리 그런 일까지 있었는데, 남자 친구도 아니야?”“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무슨 결정을 내릴 권리는 없어.”말을 마친 정유준이 몸을 돌려
양운희의 안색이 굳어졌다. 화가 난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말도 안 돼! 당신 이거 명예훼손이야! 내가 당장 고소할 수도 있다고.”양다인은 화난 척하며 일어섰다.“아주머니, 제 말을 못 믿겠으면, 강하영에게 전화해서 물어보세요! 저는 할 말 다 했어요. 강하영에게 알아서 잘 처신하라고 전해주세요!”말을 마친 양다인은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병실을 나섰다.마음이 불안해진 양운희의 귓가에 양다인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생각할수록 마음속의 의혹과 분노를 참을 수 없게 된 양운희는 결국 휴대전화를 들고 강하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간 난원, 정유준의 방 안에서 두 사람은 한창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핸드폰 진동 소리를 들은 강하영은 무의식중에 고개를 들어 침대 협탁을 보았다.그녀는 정유준의 가슴을 두드렸다.“전화 왔……음…….”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정유준은 몸을 숙여 강하영의 매혹적인 입술에 키스했다.결국 강하영은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 관계가 끝난 후, 강하영은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가, 휴대전화를 들고 욕실로 향했다.어머니에게서 여러 차례 부재중 전화가 걸려 온 것을 보고 강하영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그녀가 전화를 걸자 어머니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하영아, 너 방금 뭐 하느라 전화를 안 받아?”양운희의 말투가 엄숙했다.어머니의 목소리를 확인한 강하영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아직 관계의 여운이 다 가시지 않았던 강하영은 말할 때, 숨이 좀 거칠었다. “엄마, 방금 샤워하느라 전화 벨 소리를 못 들었어요.”양운희는 강하영의 숨소리를 알아채고 다시 엄하게 물었다.“너 지금 어디야?”강하영이 막 입을 열려고 하는데, 욕실 문이 열렸다.정유준이 냉정한 표정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누구 전화야?”정유준이 입을 여는 순간 강하영은 놀라서 얼른 전화를 끊었다.강하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우리 엄마 전화예요. 다음에는 들어오기 전에 노크 좀 해줄래요?”정유준이 그녀를 힐끗 보았다.
“빨리 비켜, 그녀에게 에이즈가 있을지도 몰라.”“염치없이! 돈을 위해 이런 짓을 하다니! 파렴치해!”“꺼져!!! 다 꺼져!!!”갑자기 양운희의 가슴을 찢는 것만 같은 고함소리가 병실에서 흘러나왔다.강하영은 이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얼른 사람들을 해치고 문을 열고 병실로 뛰어 들어갔다.병실은 온통 난장판이었고 여기저기에 깨진 유리 부스러기가 널려있었다.강하영은 목구멍을 솜 덩어리로 막아놓은 것처럼 침을 삼키기도 힘들었다.그녀는 병상에 앉아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큰 소리로 숨을 몰아쉬는 양운희을 천천히 바라보았다.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엄마……”“날 부르지 마!!”양운희는 노발대발하며 강하영을 향해 소리쳤다.강하영은 온몸을 떨며 목이 메어 말했다.“엄마, 화내지 마세요. 제 설명을 들어줄래요?”양운희는 눈물 자국이 가득한 얼굴로 강하영을 가리키며 물었다.“너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왜!”강하영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엄마, 엄마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에요. 진정하시고 우리 대화해 볼까요? 네?”“강하영! 너…… 너!”이야기를 반쯤 하던 양운희는 갑자기 두 눈을 뒤집으며 땅바닥에 곤두박질쳤다.“엄마!!”강하영은 급히 앞으로 달려들어 양운희의 몸을 잡고 바깥을 향해 날카로운 소리로 외쳤다.“간호사! 간호사!! 우리 엄마 살려주세요!!”곧이어 간호사가 병실 문을 밀치고 들어왔다.2분도 안 되어 의사도 급히 달려왔다.그들은 강하영을 문밖으로 밀어내고 응급 치료를 시작했다.원래 병실 문 밖에서 떠들썩하던 사람들은 이때 이미 자취를 감췄다.텅 비고 고요한 복도는 심연의 깊은 못처럼 사람을 점점 질식시키고 가라앉게 한다.강하영은 병실 밖 벤치에 주저앉아 텅 빈 눈으로 초점 없이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만약 그녀가 어젯밤에 잘못되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달려왔다면 오늘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그녀가 진작 발견했어야 했다.지난번에 그녀를 치어 죽이려 했던 사람이 잡히지 않았으니, 다른 행동이 있을 게 분
강하영은 입술이 가늘게 꿈틀거리는 양운희를 멍하니 바라보았지만,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귓가에 있는 기계에서 ‘띠’하는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강하영의 마음도 덩달아 싸늘해졌다……정유준이 병실 문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강하영의 가슴을 찢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그는 저도 모르게 숨이 막혔고 발걸음도 따라서 빨라졌다.그러나 들어가기도 전에 부진석이 강하영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그녀를 위로하는 모습을 보았다.옆으로 떨어진 두 손은 주먹을 불끈 쥐었고 마음속의 애석함은 분노로 대체되었다.정유준의 얼굴은 굳어졌고 허시원은 이런 정유준을 보자 가슴이 떨렸다.“사장님, 들어가시겠어요?”허시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정유준은 눈썹을 깔고 차가운 목소리고 지시했다.“조사해! 누가 했는지 알아봐!”허시원이 대답하며 몸을 돌리던 참에 정유준이 또 분부했다.“몇 명을 빈소에 안배하여 더는 차질이 없게 지키고 있어.”양운희는 친우가 많지 않기에 장례를 간단히 치르기로 했다.우인나와 부진석은 특별히 휴가를 내어 강하영과 함께 빈소를 지켰다.3일 동안 강하영은 거의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고 잠도 3, 4시간밖에 자지 못하였다.이런 강하영이 안쓰러워 우인나는 위로했다.“하영아, 가서 뭐 좀 먹고 자. 여긴 우리가 지킬게.”강하영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우인나가 한숨을 쉬고는 다시 앉으려는데 갑자기 한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고개를 돌려보니 양다인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우인나의 안색이 대번에 변하였다.양다인은 혼자 왔다. 빈소로 발을 들여놓자 우인나가 앞길을 막았다.“왜 왔어?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양다인은 눈썹을 치켜뜨며 말했다.“유준 씨를 대신해서 와도 안 되나요?”우인나는 무의식중에 강하영을 바라보았고 그의 표정이 여전한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려 양다인에게 경고를 했다.“함부로 굴면 내가 가만히 두지 않을 테야!”양다인은 웃으며 손을 뻗어 우인나를 밀쳤다. 그는 강하영과 옆에 있는 부진석을 번갈아 바라보았
전화가 끊어지자 정유준의 얼굴은 혐오감으로 물들었다.“사장님.”차를 운전하던 허시원이 말했다.“왜?”정유준이 미간을 비비며 물었다.“다인 씨의 양부모와 확인했습니다. 다인 씨의 증상과 같습니다. 양부모가 그러는데 다인 씨가 어릴 적에 입양하고 나서 대표님을 구해준 일을 자주 언급했다고 말했습니다.”이 말을 들은 정유준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답은 정해졌지만 양다인이 주는 느낌은 은근히 수상했다.정유준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는 허시원을 보며 말했다.“병원으로 가자.”허시원은 잠시 어리둥절해졌다.“대표님, 오후에 화상회의가 있습니다.”“저녁으로 미뤄.”정유준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허시원은 더는 말을 하지 않고 병원으로 운전했다. 병원 앞에 도착하여 정유준이 차에서 내리자 허시원이 그를 불렀다.“대표님. 다인 씨께서 자살시도를 하였습니다. 손목을 베였습니다.”정유준은 발검음을 주춤하며 미간을 찌푸리고 돌아서서 허시원을 바라보았다.“지금 어디에 있지?”“병원에 거의 다 왔습니다.”허시원이 대답했다.응급실에서 강하영은 기계 소리에 잠이 깼다.그녀는 무거운 눈꺼풀을 벌리고 커튼이 쳐진 환경을 힘없이 바라보았다.짙은 소독수 냄새가 끊임없이 코안을 파고들자 익숙한 냄새 때문에 코끝이 찡해졌다.갑자기 커튼이 열리며 부진석이 도시락을 들고 나타났다.강하영이 깨어난 것을 보고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하영 씨, 어디 아픈 데 없어요?”강하영은 메말라서 아픈 목을 참으며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없어요.”부진석은 도시락을 침대 머리맡에 놓고 옆에 앉았다.“하영씨도 참. 쉬라고 해도 말을 안 듣더니. 보세요. 울화가 치밀어 피를 토했잖아요.”강하영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쓰러지기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두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양다인과의 원한은 그녀가 조만간 갚을 것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후 서서히 증거를 찾을 것이다.강하영은 숨을 돌리며 물었다.“어머니 빈소는 ……”부진석은 조용히
캐리어를 끌고 나가는 순간 마이바흐가 들어왔다.정유준은 차 안에서 짐을 들고 문 앞에 멈춰 선 강하영을 한눈에 보았다.그는 차에서 내려 강하영에게 다가가 물었다.“뭐 하러 가?”강하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정 사장님께서 이미 결정을 내리셨으니 제 입장도 고려해 주세요.”정유준은 짐을 훑어보고 찬웃음을 띄우며 물었다.“너를 보내주게?”강하영은 평온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네!”정유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의사 선생님과 함께 있으려고? 이렇게 급해?”정유준이 화가 나서 짐을 찰까 봐 강하영은 두 캐리어를 몸 뒤로 합쳤다.“정 사장님께서 원하는 대로 생각하세요. 제가 이전에 말한 것처럼 저는 다른 사람의 감정에 개입하는 제3자 노릇을 하지 않아요. 정 사장님께서 한 달 후에 약혼한다 해도 저는 애인 노릇을 하지 않습니다.”그녀가 이렇게 말하자 정유준은 온몸에 찬 기운이 흘렀다.“내가 한 달 후에 약혼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강하영은 입가에 찬 웃음을 지었다.“직접 한 말도 잊으셨나요? 시간과 장소를 제공해 회억해 드릴까요?”강하영의 말속엔 가시가 박혀있었다. 정유준 뿐만 아니라 그녀도 이 가시에 찔렸다.정유준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이 여자는 다른 남자 앞에서 모든 감정을 드러내더니 유독 자신 앞에서만 늘 화나고 싶을 정도로 냉랭한 태도를 보인다. 그에게만 가시 박힌 말을 하는 습관을 길러놓았다.정유준의 두 눈은 얼음이 진 것처럼 차가웠다. 그는 강하영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계약을 끝낸다? 강하영, 그 대가를 감당할 수 있어?”“감당하기 어려워요. 그래도 난…….”강하영이 대답했다.“강하영! 마지막 한 달이야. 한 달 후 계약을 끝내!”정유준은 반항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말했다. 한 달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그러나 강하영은 어머니의 임종 유언을 어기고 싶지 않았다.“정 사장님, 제가 감당해 볼게요.”말이 떨어지자 남자는 한참 동안 침묵했다.이젠 정유준이 승낙하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