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파 회사의 의류 공장은 김제에서 세 번째로 큰 공장으로, 생산 속도도 빠른 동시에 방직 라인도 갖추고 있었다.그러니 오늘 밤 반드시 구만욱에게 도움을 요청해 이번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한다.오후 4시.하영은 간병인에게 옷장 안에 옷을 전부 꺼내달라고 했고, 간병인은 하영이 옷을 갈아입는 걸 도와주며 물었다.“강하영 씨, 몸이 채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퇴원하시려고요?”“네, 잠시 일 때문에 나가봐야 하거든요. 만약 의사 선생님이 묻는다면 집에 뭐 좀 가지러 갔다고 전해 주세요.”“꼭 가야 해요?”간병인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상처가 벌어지게 되면 다시 꿰매야 할지도 몰라요.”그러자 하영이 가볍게 웃었다.“그냥 접대일 뿐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접대요? 강하영 씨, 술은 절대 마시면 안 돼요!”“네, 안심하세요. 저도 속에 숫자가 있어요.”간병인은 하영이 결심을 굳힌 것을 보고 더 얘기를 하지 않았고, 하영이 옷을 갈아입고 병실을 나선 뒤에야 소예준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런데 소예준도 전화를 받지 않으니, 간병인도 더 신경쓰지 않았다.하영이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고, 문이 열리니 똑같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있던 중주원을 마주쳤다.주원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웃으며 물었다.“벌써 퇴원해도 괜찮아요?”하영은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며 무덤덤하게 대답했다.“네.”“보아하니 퇴원 수속도 밟지 않고 몰래 빠져나가는 모양이네요.”하영은 눈은 웃지 않고 입꼬리만 올린 채 주원을 바라보았다.“괜한 오지랖을 부리는 것 같네요.”그러자 주원이 미소를 지어보였다.“같이 입원해 있는 동료 환자지간의 관심이라고 해두죠.”“고맙지만 사양할게요. 그쪽 상처가 저보다 더 심해 보이거든요.”“지금 제 상처를 걱정해 주는 겁니까?”“아뇨. 그냥 얘기해 본 거예요.”“강하영 씨는 정말 직설적이네요.”“모르는 사람에게 관심을 나눠줄 정도로 여유롭지 못 해서요.”하영의 말이 끝나자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주원은 손을 들었다.“
현욱은 사진을 다시 서류 봉투에 넣은 뒤 천천히 손을 내렸다.“미안. 이 일엔 더 이상 관여하지 않을게.”현욱은 유준의 입장에서 고려해 봐야 했다.만약 이 일이 현욱한테 일어났다면, 어쩌면 그도 인나를 의심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기 어머니의 참혹한 모습을 지켜봤을 유준의 심정이 어땠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자신의 친어머니가 눈앞에서 피투성이 된 채 죽어있다면, 누구라도 이성을 잃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유준은 서랍을 잠근 뒤 자리에서 일어나 시계를 확인했다.“또 할 얘기 있어?”“너랑 점심 같이 먹으려고 했지. 어디 나가려고?”“접대가 있으니 그만 돌아가 봐.”“그래, 알았다.”5시 30분.하영은 블랑제리 레스토랑 아래에 도착했다.올라가기 전 하영은 인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라도 접대가 늦어져 애들과 전화통화하기로 약속한 시간에 맞출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인나가 우울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하영아.”하영은 인나의 목소리가 이상한 것을 눈치 채고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목소리가 왜 그래?”인나는 약간 자책하는 하는 것 같았다.“하영아, 무슨 얼굴로 너를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공장에 대한 사실 나도 들었어. 그게 MK의 의류 공장이래.”혹시 인나에게 무슨 일 생긴 건 아닐까 걱정했던 하영은 그제야 안도하며 위로를 건넸다.“걱정할 필요 없어. 위약금 받아내서 다른 공장을 찾으면 한 달은 충분히 버틸 수 있어.”“진짜야?”“그럼.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애들은? 곁에 있어?”다급히 묻는 인나의 말에 하영이 웃으며 답해줬다.“금방 유치원에서 돌아왔어. 잠깐 바꿔줄까?”그러자 하영은 시간을 다시 확인했다.“응, 몇 마디만 할게.”인나는 계단 입구에서 위층을 향해 소리쳤다.“세희야, 세준아. 엄마한테서 전화왔어!”곧 전화기 너머로 애들이 급하게 계단을 뛰어내려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엄마!”울먹이는 세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보고 싶어요.”세준도 곁에서 한 마디 보탰다.“엄마
하영이 모르고 있었던 사실은 그 모습을 마침 유준과 허시원이 보게 됐다는 것이다.허시원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대표님, 방금 저 분 강하영 씨 같은데요.”“그래.”유준은 약간 어두운 눈빛으로 대답했다.“강하영 씨 지금 입원 중인 거 아니었어요? 왜 여기로 온 거죠? 지금 몸상태로 술을 드시면 안 될텐데.”허시원이 질문을 늘어놓자 유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불쾌한 눈으로 시원을 쳐다봤다.“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가서 물어보지 그래?”시원은 그제야 괜한 말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시선을 거두었다.“죄송합니다, 대표님.”유준은 그대로 하영의 건너편 방으로 들어갔다.같은 시각, 303호 룸.하영은 구만욱과 악수를 한 뒤 자리에 앉았다.“구 사장님, 제가 사장님이 좋아할만한 술을 가져왔어요.”하영은 술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웨이터에게 술을 열어달라고 하자, 구만욱은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역시 강 대표는 시원시원하다니까. 이 술은 내가 평소에 아까워서 마시지 못 하던 술이었는데.”그러자 하영은 웃으며 대답했다.“구 사장님은 농담도 잘 하신다니까요. 사모님한테 들었는데 캐비닛에 좋은 술이 참 많다고 하던데요.”‘사모님’이란 단어에 구만욱의 웃는 얼굴이 조금 부자연스러워졌다.“그냥 전업주부가 뭘 알겠어요?”웨이터가 술 두껑을 따주자 하영은 웃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구만욱에게 술을 따랐다.“구 사장님, 간만에 뵙는데 제가 방금 말실수를 한 것 같네요. 부디 기분 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하영은 일부러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 구만욱은 김제에서도 변태로 명성이 자자했으니까.당신 아내의 연락처도 갖고 있으니 너무 지나치게 굴지 말라고 경고하는 셈이었다.구만욱은 하영이 직접 술까지 따라주며 좋은 태도를 보이자 웃으며 답했다“이런 사소한 일로 내가 강 대표한테 화 낼 것 같습니까?”말을 하며 구만욱은 자기 손을 술잔을 건네던 하영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안 그래요?”그러자 하영의 몸이 살짝 굳더니 교묘하게
그런데 구만욱의 손은 하영의 어깨를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강 대표님, 나는 말이죠 기분 좋게 술을 마신 뒤에 사업 얘기를 하는 걸 좋아하거든요.”그 뜻을 모를 리 없는 하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녀가 술에 취하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원하는 바를 이루게 되면 그 어떤 부탁도 다 들어주겠지.하영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구 사장님도 저희 회사 사정을 잘 알고 계실 거예요. 지금 제 사정은 공장이 아직 완공되지 않은 것입니다. 구 사장님도 겪어봐서 아실 테지만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해결하기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아시잖아요. 이번만 함께 일하게 되면 앞으로 서로 돕고 발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좋은 기회 아닐까요?”구만욱은 하영의 어깨에 걸친 손을 조금씩 움직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강 대표님, 우리 회사는 지금 아주 순조롭게 잘 돌아가고 있어요. 문제에 부딪친 건 내가 아니라 강 대표잖아요.”구만욱이 하영의 곁으로 바짝 붙어 하영의 얼굴에 술냄새를 풍겼다.그는 손을 뻗어 하영의 들어올렸는데, 눈빛에 드리운 욕망의 빛이 서서히 강해지기 시작했다.“부탁을 하려면 그럴 듯하게 해야죠.”하영의 눈빛이 서늘하게 식어갔다.“구 사장님께서 함께 일할 의사가 없으시면…….”쾅!하영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누군가 방 문을 세게 걷어찼다.두 사람이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자, 유준이 싸늘한 기운을 풍기며 그들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구만욱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손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정, 정 대표님? 대표님께서 왜 여기…….”구만욱의 말이 끝나기 전에 유준은 그의 멱살을 잡고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하영은 깜짝 놀라 토끼 눈이 되었고, 정유준이 대체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유준은 또 발을 들어 구만욱의 배를 세게 걷어찼다.구만욱은 고통스러운지 연신 소리질렀다.“정 대표님! 할 말이 있으면 좋게 얘기로 하시죠. 제발 때리지 마세요!”유준은 곁눈질로 허시원을 향해 입을
유준의 마음이 어쩐지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내 어머니 일에 대해서, 아직 설명하지 않았잖아!”“설명이요?”하영은 피식 웃었다.“좋아요! 해드리죠!”하영은 유준을 향해 턱을 쳐들더니 그의 손바닥을 끌어다 자기 목에 올려놓았다.“설명은 여기 있으니까 원하면 가져가세요!”손끝으로 하영의 뜨거운 체온이 느껴지자 유준의 침울한 눈동자가 가늘어지기 시작했다.“강하영, 나 자극하지 마!”“자극?”하영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그렇게 한 적이 없었던 것도 아니잖아요! 정유준 씨, 그렇게 제가 한 짓이라고 단정한다면 차라리 저를 죽여요! 내 목숨따위 필요없다는 얘기는 그만하고! 몇 번이고 당신한테 의심받을 바에야 차라리 당신 손으로 죽여서 어머니 옆에 보내지 그래요? 제가 당신 어머니를 해쳤다고 직접 인정하길 원하시잖아요. 잘 들어요. 제가 일부러 그랬어요. 됐어요? 제가 일부러 당신한테 복수하려고 당신 어머니를 해친 거라구요. 당신이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요. 이제 만족해요?”하영은 말끝마다 유준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유준이 몇 번이고 그의 어머니를 언급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하영의 심리적 스트레스는 그의 어머니가 돌아간 뒤에도 전혀 나아진 적이 없었다. 그녀도 이제 지쳤으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닥쳐!”유준은 당장이라도 하영의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손을 거두어 들이려 했지만, 하영이 그런 그의 손을 꽉 잡았다.어쩌면 취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하영은 이때 거의 이성을 잃은 듯 했다.“정유준 씨, 차라리 절 죽여줘요!”화가 잔뜩 나 있는 유준의 눈은 점점 붉게 충혈되기 시작했다.“닥쳐! 닥치라고 했잖아!”“어차피 저한테 믿음이 없잖아요. 그럼 이렇게 괴롭히지 말고 통쾌하게 죽여주세요!”하영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유준을 향해 실망스럽다는 듯 소리질렀다.이어 유준의 손이 움츠러 들더니 빠르게 하영의 목을 잡아 당긴 뒤,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깨물었다.한차례
소예준은 3층에 도착하자마자 303호로 향하고 있는데, 다른 방에서 책상에 엎드린 채 쓰러져 있는 하영을 발견하고 얼른 겉옷을 벋어 하영의 몸에 덮어주었다.하영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가 소예준을 보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하영은 퉁퉁 부은 눈을 숨기려 했지만 결국 예준의 눈에 띄고 말았다.“하영아, 왜 울었어?”예준이 몸을 숙이고 묻자 하영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거짓말을 했다.“상처가 벌어져서 너무 아파서 울었어.”하영은 정유준을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예준이 또 당장 유준을 찾아가 싸울지도 모른다.하영의 말에 예준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자, 병원에 데려다 줄게. 다음부터 무슨 일이 있든 말도 없이 빠져 나오면 안 돼.”예준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속엔 절대 거절할 수 없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알았어.”하영이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소씨 집안.양다인은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소백중을 끌고 함께 바둑을 두자고 했다.그러자 소백중은 껄껄 웃으며 물었다.“오늘따라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나랑 바둑을 두려는 게야?”양다인은 소백중에게 차를 따라주며 약간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할아버지, 죄송해요. 그동안 제가 걱정 많이 끼쳐드렸죠? 차라리 할아버지께 폐를 끼쳐드리기 보다 국제 아파트로 돌아가 지내려고요.”소백중은 그 말에 깜짝 놀랐다.“얘가 지금 무슨 소리르 하는 거야? 집에 지낼 곳도 많고 돌봐줄 사람도 있는데 왜 굳이 나가서 살겠다는 거야?”양다인은 차를 따라 소백중 앞으로 내밀었다.“할아버지, 저는 그저 짐덩이잖아요.”“네가 왜 짐덩이라는 거야?”소백중은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설마 또 누가 너 괴롭혔어?”그러자 양다인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제가 많이 부족한 것 같아서요.”“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소백중이 굳은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놓자 양다인은 고개를 푹 숙였다.“할아버지, 삼촌네 식구들이 금방 돌아왔는데, 저를 반기지 않는 것 같아서요. 오빠가 지금 회사
소백중은 약간 의외라는 얼굴로 양다인을 힐끗 쳐다보며 흡족하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소진호도 양다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따로 고맙다는 인사를 더 전하지 않았다.이번 일은 이렇게 결정되고 부부는 소백중과 몇 마디 더 나눈 뒤 방으로 돌아갔고, 그때 소희원이 방문을 열며 물었다.“아빠, 방금 양다인이 불러서 무슨 얘기 했어요?”소진호는 복도를 한번 살핀 뒤 문을 닫고 대답했다.“양다인이 할아버지한테 나 회사로 복귀시켜달라고 하더구나.”그 말에 소희원은 깜짝 놀랐다.‘양다인의 몇 마디 말에 해결될 문제였다고?’서민희도 의자에 앉으며 약간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여보, 당신은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해요?”“글쎄, 난 여전히 그 애가 내 동생의 딸이라는 생각이 안 들어!”“아빠, 할아버지도 인정하셨고, 친자확인도 다 했는데 두 분이 아니라고 생각하셔도 소용없잖아요!”서민희는 바보 같은 딸을 보며 입을 열었다.“희원아, 너는 괜히 이번 일에 끼어들지 말고 어서 네 방으로 돌아가.”소희원은 입술을 달싹이며 뭐라고 얘기하려다가, 그저 고개를 끄덕인 뒤 방으로 돌아갔다.문을 닫은 뒤 소진호가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여동생은 생전에 고지식한 성격이라 말을 빙빙 돌려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어. 게다가 어떤 일로 누구에게 비위를 맞춰주는 법도 없었는데, 양다인 저 아이의 성격은 내 여동생이랑은 완전히 달라!”서민희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네, 그래도 이번에 어렵게 회사로 복귀하게 됐으니 반드시 예준이를 도와 회사 일을 잘 처리해 줘요. 어쨌든 우리가 빚진 건 사실이니까요. 우리가 제때 아버님을 말렸으면 아가씨와 서방님도 그렇게 목숨을 잃지 않았을 거예요.”소진호는 서민희의 손등을 다독였다.“양다인이 저렇게까지 호의를 보이는데, 우리도 그럴듯하게 대응해 줘야겠지.”“알았어요. 당신은 안심하고 회사 일에 집중해요. 양다인은 집에서 내가 잘 지켜보고 있을게요. 만약 소씨 집안의 재산을 노릴 것 같으면 바로 당신한테 얘기할게요.”“그
전화를 끊은 뒤에도 하영 마음의 의구심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그때 마침 예준이 화장실에서 나왔고, 하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사실을 그에게 알렸다.소예준은 자리에 앉으며 웃는 얼굴로 하영을 바라보았다.“네 생각은 어떤데?”“나도 잘 모르겠어. 만약 내가 수진 씨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내가 수진 씨를 못 믿는 것처럼 보이잖아.”소예준도 고개를 끄덕였다.“이상한 점을 못 찾겠으면 차라리 호의를 받아들이는 게 어때? 다만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건, 수진 씨는 일 처리에 있어서 늘 신중한 편이잖아. 이번에 너를 도와 찾은 공장엔 문제가 없을 테니까 안심해도 될 것 같아.”강하영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그래, 알았어. 일단 그렇게 해야겠어.”예준은 휴지를 뽑아 손을 닦았다.“하영아, 삼촌 만나 보고 싶지 않아?”그 말에 하영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삼촌?”“그래. 삼촌네 부부가 금방 귀국하셨는데 만약 네가 아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분명 기뻐하실 거야.”예준의 말에 하영은 쓴웃음을 지었다.“오빠, 나 아직은 친척들을 대면할 생각 없어. 오빠만 있으면 충분하거든.”예준은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았고, 간병인이 도시락을 챙겨 오자 그제야 병실을 떠났다.다음날.하영이 금방 아침 식사를 마쳤을 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간병인이 문을 열자, 허시원이 서류를 든 채 서 있었다.“강하영 씨.”허시원이 병실에 들어서며 하영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하영은 자신의 병실에 나타난 허시원을 보고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허 비서님이 무슨 일이죠?”“이것 때문입니다.”허시원은 손에 든 서류를 하영에게 건넸다.“사실 어제 일 때문에 대표님께서 적당한 의류 공장을 찾으라고 당부하셨거든요. 이건 계약서입니다.”하영은 계약서를 힐끗 쳐다보고 건네받지 않았다.“허 비서님, 공장이라면 이미 찾았으니 도움은 필요 없어요.”하영의 말에 허시원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강하영 씨는 어젯밤…….”하영은 그저 웃었다.“저도 회사
시현은 아파서 이를 악물었다.“알았어, 알았어. 공주님 제발 살려주세요!!”세희는 그제야 흐뭇하게 손을 거두었다.“참, 지난번에 말한 그 사건 말이에요, 언제 해결하러 갈 거예요?”“시간이 좀 더 지나면.” 시현이 말했다. “네 몸은 아직 완전히 나아지지 않았으니까, 지금 계속 바쁘게 움직이면 안 돼. 만약에 저쪽에도 이런 악독한 귀신이 있다면, 너 또 상처를 입을지 몰라. 난 이미 죄책감 때문에 너와 결혼을 해서 평생 챙겨주고 싶으니까, 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 정말 방법이 없어.”세희는 웃으며 말했다.“내가 언제 시현 오빠와 결혼한다고 했어요?”“쳇.” 시현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내가 뭐가 어때서? 나도 어깨가 넓고 근육이 있는 미남이라고! 인기가 얼마나 많은데.”세희는 말문이 막혔다.‘정말 뻔뻔하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칭찬하다니.’세희는 숨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시현 오빠.”“응?”“내가 지금 귀신을 잡는 일을 종사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난 사실 아주 좋은 신붓감은 아니에요. 눈치 없는 귀신들이 가끔 날 찾아와서 귀찮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난 인우와 반대로, 팔자에 음기가 가득 찼거든요.”“그러면 어떻게 되는데?”“7월 중순이 되면 많은 귀신들이 날 찾아올 거예요. 그럼 난 일이 잘 안 풀리거나 심지어 다칠 수도 있거든요.”“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만약 우리가 함께 한다면, 그 귀신들은 심지어 시현 오빠를 귀찮게 할 거예요.”“그래서, 이것 때문에 네가 최고의 신붓감이 아니란 거야?” 시현은 말을 마치고 웃으며 말했다. “이까짓 일로 내가 물러설 수 있을 것 같아? 세희야, 너도 날 너무 얕본 것 같아.”“그때 가면 나 때문에 모든 일이 잘 안 풀릴 텐데, 그게 두렵지도 않아요?” 세희는 시현에게 물었다.시현은 입술을 구부리고 웃었다.“넌 우빈이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우빈에게 영향을 미치는 건 하나도 두렵지 않은 거야? 세희야, 넌 날 뭘로 보고.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난 두렵지
시현과 인우는 비록 귀신을 보지 못했지만, 지금 검은 연기가 자신의 앞에서 천천히 흩어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인우는 세희를 바라보며 물었다.“누나, 지금 어떻게 된 일이에요?”세희는 몸을 돌려 말했다.“그 귀신은 환생하고 싶지 않아서 이미 죽었어.”“귀신이 죽었다고?” 시현이 물었다.“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뜻이야?”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방을 바라보았다.“캐리 아저씨, 이제 그 여섯 명의 귀신을 좀 잡아주세요.”캐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불과 몇 분 만에 겁에 질린 그 귀신들을 세희의 앞으로 데려왔다.세희는 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당신들은 그 처녀귀신과 같은 선택을 할 건가요? 아니면 나와 같이 서낭당에 갈 건가요?”“서낭당에 갈래요!”“우리는 그 여자의 협박을 받아서 여기에 갇힌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벌써 떠났을 텐데!”“죽어도 우리를 괴롭히려 하다니!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이 귀신들은 그 처녀귀신이 사라진 후, 불평하기 시작했다.세희는 그들의 원망을 듣고, 마음속에 분노가 치솟았다.“지금 그 처녀귀신을 비난할 면목이 있는 거예요?!”세희는 노발대발하며 말했다.“당신들을 죽인 것은 그 여자의 잘못일지라도. 당신들은 자신에게 그 어떤 책임도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만약 당신들이 그 여자를 괴롭히지 않았다면, 오늘처럼 귀신으로 되어 이곳에 갇히지 않았겠죠!”“풉.” 한 여자 귀신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고요? 그 여자는 늘 자신의 성적을 가지고 남을 비웃었어요. 그러지만 않았어도 우리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세희는 이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남의 성적이 우수해서, 당신들은 또 그 사람을 따라잡을 수 없어서, 그걸 자랑이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정말 불쌍하네요! 이 세상에 당신들 같은 질투심이 강한 쓰레기가 없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안심해요, 당신들은 다음 생에도 이번 생에 지은 죗값을 치러야 하니까!”귀신들은 세희가 한 말에 화가 났지만, 캐리와 인우 때문에 화가
“말이 쉽지!” 처녀귀신은 화가 나서 말했다.“날 죽인 그 사람들은 비록 귀신이 되었지만, 나도 그들이 환생하지 못하게 붙잡아둬야 한단 말이에요!”세희는 눈살을 찌푸렸다.“그 여섯 명의 학생들이 당신을 죽인 사람이었어요?”“그렇지 않으면 내가 왜 그들을 죽였을 것 같아요??”“그 사람들 찾아 복수를 한 이상, 이제 그만 그들을 놓아줘요. 이렇게 자신을 괴롭혀가며 그들을 붙잡고 있을 필요가 더 있을까요?”“그럴 순 없어요! 이렇게 쉽게 환생을 하라고 하는 건 너무 말이 안 되니까!!”처녀귀신이 노발대발했다.세희는 웃었다.“당신은 집념이 너무 커서 줄곧 이곳에 갇혀 있는 거예요. 영원히 자신의 고통으로 자신을 괴롭히고 있잖아요. 만약 내려가서 벌을 받고 환생하여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난다면, 이것 또한 자신의 과거를 내려놓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니겠어요?”“이렇게까지 날 가르칠 필요 없어요!”처녀귀신이 말했다.“오늘 당신들이 죽든지, 아니면 내가 죽든지, 둘 중 하나 선택하자고요!”말을 마치자, 처녀귀신은 세희를 향해 공격하려 했다.세희는 바로 인우를 부르려고 했고, 이때 갑자기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빠른 속도로 달려온 캐리는 즉시 그 처녀귀신을 먼 곳으로 밀어냈다.“좋은 말로 타일러도 듣지 않고, 심지어 세희에게 손을 대려고 하다니. 오늘 사라질 준비를 하는 게 좋겠어!”캐리는 차가운 목소리로 붉은 옷을 입은 처녀귀신에게 말했다.“그게 뭐가 무섭다고.” 처녀귀신이 소리를 질렀다. “나도 이젠 지긋지긋해요! 이 더없이 더러운 세상! 내 부모님은 내가 학교폭력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들의 돈을 받고 바로 이 일이 없던 걸로 하자고 했어요. 내 오빠는 심지어 그들이 부자라는 것을 알고, 그들을 친구로 여겼고요! 환생할 게 뭐가 더 있겠어요? 환생해도 이렇게 더럽고 추악한 세상을 마주해야 하니까, 차라리 날 죽여요. 더 이상 이 징그러운 세상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처녀귀신의 말을 듣고, 캐리는 바로 손을 써서
세희가 이렇게 말하자, 세준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저녁 무렵, 인우는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세희가 이미 집에 있는 것을 보았고, 무척 흥분해하며 달려갔다.“누나, 돌아왔어요?” 인우는 싱글벙글 웃으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어때요, 다 나은 거예요?”세희는 의미심장하게 인우를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인우야, 오늘 저녁에 나 좀 도와줘.”“그래요.” 인우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학교에 가는 거 맞죠?”세희는 의아하게 인우를 바라보았다.“뭐야? 너 이제 무섭지도 않는 거야?”인우는 미소를 천천히 거두었다.“누나, 귀신은 무섭지만, 난 누나가 더 이상 그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요. 그때 누나가 그렇게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난 그날 정말 학교로 달려가서 그 귀신들을 죽이고 싶었어요. 그러나 시현 형이 누나의 생각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억지로 참고 가지 않았던 거예요.”세희는 뿌듯해하며 인우의 머리를 어루만졌다.“우리 인우 다 컸네. 누나를 걱정할 줄 다 알고.”인우는 세희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누나, 난 줄곧 누나를 걱정하고 있었어요. 다음에 이런 위험한 일을 하러 간다면, 꼭 나 데리고 가면 안 돼요? 난 누나를 지켜주고 싶어요.”“그래! 저녁에 우리 가족들 함께 밥을 먹은 후에 바로 출발하자!”“좋아요!”저녁에 하영과 유준 그리고 희민이 돌아왔다. 세희가 이미 퇴원한 것을 보고, 세 사람은 기뻐해하며 그녀를 에워싸고 수다를 떨었다.저녁을 먹은 다음, 하영은 세희를 데리고 위층에 가서 간단하게 몸을 씻어주고서야 세희를 보냈다.문을 나서자마자, 세희는 시현이 그의 포르쉐와 함께 집 앞 정원에 있는 것을 보았다.세희와 인우는 의아함을 느끼며 시현을 쳐다보았다.세희가 먼저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에요?”시현은 별장을 바라보았다.“세준이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나한테 연락했지 뭐. 네 기사 되어 달라고.”“우리 집에 기사가 없는 것도 아닌데. 그러면 시현 오빠가 너
“그래, 우빈아, 넌 15년 동안 세희를 좋아했고, 또 세희를 위해 많은 것을 바쳤지. 하지만 그거 알아? 세희는 아주 이성적인 사람이야. 세희가 만약 무슨 일을 알고 싶다면, 바로 감정 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호흡이 흐트러진 우빈은 시현을 바라보며 다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알아요.” 우빈이 대답했다.“세희는 그 누구보다도 감성적이고 또 이성적이죠.”“그럼 만약 세희가 정말 날 선택한다면, 넌 어쩔 계획이야?”“그런 건 없어요.”우빈은 솔직하게 말했다.“내가 말했잖아요, 난 세희의 모든 선택을 존중할 거라고. 마찬가지로 다른 걱정 할 필요 없어요. 세희에게 거절을 당했다고 복수를 할 정도는 아니니까요.”시현은 계속 물었다.“그러니까 내가 세희와 함께 하더라도 넌 세희와 계속 친구를 하겠다는 말이야?”우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나와 세희는 줄곧 친구였어요. 우리 두 사람이 사귀지 않아도, 앞으로 여전히 사이가 좋은 친구예요. 고 과장님, 세희를 좋아해도 되지만, 내가 세희와 계속 친구로 되는 것을 막을 순 없어요.”시현은 갑자기 웃었다.“그럼 됐어!”우빈은 시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시현은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서 버튼을 눌렀다.“난 내가 세희와 사귀면, 넌 불편해서 세희와 연락 끊을 줄 알았거든.”우빈은 말문이 막혔다.“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있어. 이제 세희를 포기하자고. 넌 정말 세희가 필요한 것 같으니까...”말을 하다 시현은 우빈을 힐끗 바라보았다.“네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들은 하지 않겠어. 아무튼 후에 생각해 봤는데, 만약 널 향한 내 개인적인 생각 때문에 세희를 포기한다면, 그건 널 무시하는 것과 같잖아.”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시현은 안으로 들어갔고 우빈도 뒤를 따랐다.두 사람이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서자, 우빈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그 결정은 틀리지 않았어요. 난 확실히 가족을 모두 잃었지만, 그래도 피와 살이 있는 사람이에요. 이 세상에 나 혼자만이 이런 상황이 아니잖아
시현은 말을 이어받으며 오른손을 들었다.“그때 내 오른손에 피가 가득 묻은 거 있지? 심지어 의사가 네 등의 썩은 살을 모두 베어낸 것을 직접 봤는데, 며칠째 잠을 못 잤어.”“에이, 그건 간단하죠!” 세희는 히죽거리며 말했다.“수면제 처방받으면 편안하게 잘 수 있지 않겠어요?”시현은 웃으며 침대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세희야, 날 원망하고 싶지 않아?”“원망이요?” 세희는 시현의 뜻을 잘 몰랐다.“내가 왜요?”시현은 콧등을 긁적였다.“내가 널 데리고 그곳에 가지 않았다면, 너도 이렇게 다치지 않았을 거야.”세희는 눈을 부라리며 시현을 바라보았다.“그건 시현 오빠 탓이 아니에요. 그 귀신들이 겁도 없이 나한테 덤빈 것뿐이니까요. 다 회복되면 그 귀신들 전부 잡아버릴 거예요!”“또 그곳에 가려고?” 시현은 경악하며 물었다.“그럼요!” 세희는 손을 내밀었다.“일곱 명의 귀신을 전부 다 데려갈 수 있다면, 염라대왕님은 좋다고 박수를 치실지도 몰라요.”시현은 세희의 얼굴에 나타난 즐거운 미소를 애틋하게 바라보았다.“난 오히려 네가 날 욕하면서 분풀이를 했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홀가분한 말투로 말하는 거 보니까 마음이 너무 아파.”“그럼 너무 재미없죠! 난 시현 오빠 돈 뜯어먹는 게 더 좋은 거 같은데? 내가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으면, 날 데리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오케이!” 시현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먹고 싶은 거 다 사줄게.”세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참, 세준 오빠가 그러던데, 미정 할머니를 찾아갔다면서요?”시현은 숨김없이 대답했다.“응, 가서 어떻게 해야 널 보호할 수 있을지에 대해 여쭤봤어.”“하하하.” 세희는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 “날 보호한다고요?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죠? 그리고 시현 오빠는 귀신도 안 보이는데, 어떻게 귀신과 싸우려는 거예요? 정의감과 용기로 귀신을 제압하려고요?”“내가 만약 내 정의감을 이용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엔 귀신이 없을 거야?”세희는 웃으며 말했다.“그냥
시현은 세준 그들에게 돌아가서 쉬라고 한 다음, 혼자 의자에 앉아 멀리서 세희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아주 평온하게 잠을 자고 있었고, 숨을 고르게 쉬고 있었다.이때 간호사가 걸어왔다. 시현은 그녀를 보며 얼른 일어나 물었다.“선생님.”간호사는 그를 쳐다보았다.“무슨 일이시죠?”“세희는 언제 중환자실에서 나올 수 있는 거죠?”“이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요 며칠 더 관찰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아가씨는 제가 본 여자아이들 중에서 가장 엄중한 상처를 입으신 환자라서요. 잘못하면 흉터가 남을 텐데... 어휴...”말이 끝나자, 간호사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시현은 그녀의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또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다.‘이번 생은 철저히 세희에게 빚진 셈이네.’사흘 후, 세희는 중환자실에서 나왔고, 이 일을 알게 된 하영과 유준도 얼른 병원에 찾아왔다.세희가 침대에 엎드려 멍을 때리는 것을 보며, 두 사람은 가슴이 아팠다.하영은 허리를 굽혀 세희의 머리를 어루만졌다.“세희야, 미안해. 네 오빠들이 아침에 금방 이 일을 알려줘서, 엄마와 아빠도 이제야 달려온 거야.”세희는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괜찮아요, 엄마. 이거 봐요, 나 아직 멀쩡하잖아요?”하영은 눈시울이 붉어졌다.“걱정 마. 무슨 방법을 써서더라도 네 등의 흉터를 치료할 테니까.”“사실 난 이런 거 신경 안 써요. 등일 뿐이니, 평소에 남에게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나 자신도 볼 수 없으니까, 심리적인 스트레스도 없어요.”“네가 꾸미길 좋아한다는 거, 여기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걸?” 세준은 벽에 기대며 말했다.세희는 고개를 돌려 세준을 보려 했지만, 상처가 땅기는 바람에 아파서 이를 악물었다.세준은 마음이 아파서 눈살을 찌푸렸다.“좀 움직이지 마. 나도 안 비웃을게.”유준은 세준을 바라보았다.“세준아, 너희들은 외국에 아는 사람이 많으니까,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좋은 성형과 의사를 찾아. 세희의 등에 절대로 흉터 남지 않게.”세준은
두려움과 걱정이 밀려오자, 시현은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눈을 뜨고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난 세희가 하는 일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데. 그럼 세희를 보호하려면 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지?’생각하다 시현은 핸드폰을 꺼내 세준에게 톡을 보냈다.[그 할머니 지금 어느 호텔에 계시는 거지?]얼마 지나지 않아, 세준은 시현에게 나미정이 지내고 있는 호텔 주소와 방번호를 보냈다.[고마워, 세준아.]세준은 이 문자를 보며 차갑게 웃었다.[세희의 일, 난 이대로 넘어가지 않을 거야.][날 때리고 싶든, 죽이고 싶든 네 마음대로 해. 다 내 잘못이니 나도 변명할 말이 없어.]이 문자를 보낸 후, 더 이상 답장이 들어오지 않았다.시현도 더 이상 아무것도 보내지 않고, 차에 시동을 걸어 호텔로 갔다.30분 후, 시현은 나미정이 있는 룸 앞에 도착했는데, 잠시 심사숙고한 다음,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곧 안에서 나미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만 기다려.”문을 열자, 시현이 문밖에 서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약간 의아해했다.“네가 바로 병원에 있었던 그 총각인가?”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할머니. 저와 잠깐 얘기를 좀 나누시면 안 될까요?”“그래.” 나미정은 몸을 비키며 말했다. “들어와서 말하자꾸나.”시현은 들어가서 소파에 앉았고, 나미정은 그의 옆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무슨 일로 날 찾는 거지?”시현은 긴장이 돼서 두 손을 비볐다.“할머니, 저도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저처럼 평범한 사람은 대체 어떻게 해야 세희의 안전을 보호할 수 있을까요?”“평범한 사람이라...”나미정은 웃기 시작했다.“왜, 네가 보기에 우리와 같은 무당은 평범하지 않은 건가?”시현은 멈칫하더니 얼른 설명했다.“그런 뜻이 아니에요. 아무튼 저희보다 강하고 특수한 능력이 있으시잖아요.”“그것도 다 하늘이 내려준 신기일 뿐이지.”나미정이 말했다.“그러나 우리도 평범한 사람들이야. 밥을 먹어야 하고, 또 때가 되면 죽는 법이니
세희는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부적은 비록 뚜렷하지는 않지만, 그녀는 여전히 강렬한 양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세희는 숨을 들이마신 다음 천천히 일어섰다. 그 순간, 옆에서 놀던 그 귀신들은 고개를 홱 돌리더니 모두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들의 시선을 알아챈 세희도 눈을 돌려 귀신들을 보았다.‘또 이런 느낌이야! 이곳을 못 나가게 하는 그런 느낌!’세희는 밀려오는 공포를 참으며 용기를 내어 문 앞으로 걸어갔다.문과 가까워질수록 주위의 음기는 더욱 강렬해졌다. 심지어 세희는 자신의 영혼이 억압된 느낌을 받았다.“누나, 무서워하지 마요!!”“세희야! 용기를 내서 그곳에서 나와! 그 귀신들은 널 건드리지도, 널 다치게 하지도 못할 거야!”“누나! 나랑 형들이랑 그리고 고 과장님이 여기서 누나를 기다리고 있어요!”인우와 나미정의 목소리를 듣고, 세희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그녀는 이를 악물며 가깝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다가갈 수 없는 문을 향해 계속 나아갔다.세희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고, 부적이 그려진 손을 들어 다시 시도했다.이번에 그 귀신들은 섬뜩하게 웃기 시작했다. 세희가 문손잡이에 손을 얹으려 하자, 그들은 재빨리 앞으로 돌진했다.이때, 매몰찬 음기가 덮쳐왔고, 세희는 부적이 있는 그 손을 들고 돌아섰다.그 귀신들은 하마터면 세희의 영혼과 닿을 뻔했다. 그러나 세희의 손에서 나는 강렬한 양기가 서려 있는 부적을 감지한 그들은 표정이 돌변했다.세희는 뒤로 물러섰고, 등이 문에 닿는 순간, 재빨리 몸을 돌려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문을 연 후, 그녀는 즉시 뛰쳐나갔다.이때, 줄곧 병상에 누워있던 세희는 눈을 번쩍 뜨더니 숨을 들이마셨다.세희가 깨어나는 것을 보고, 인우는 감격에 겨워 소리쳤다.“누나! 왜 이제야 깨어난 거예요!!”그러나 세희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눈을 천천히 감았다.인우는 완전히 멍해지더니 당황해진 표정으로 나미정을 바라보았다.나미정은 아주 침착하게 대답했다.“별일 아니야, 피곤해서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