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지금 데리러 갈게.”유준의 말에 희민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벌써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희민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물었다.“혹시 조금 늦게 가도 괜찮아요?”희민의 말에 유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이유가 뭐지?”“엄마가 맛있는 거 사 갖고 온다고 하셨거든요.”그러다 갑자기 하영이 전화를 끊기 전에 캐리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라 다시 말을 이었다.“오시는 길에 엄마를 모시고 오는 건 어때요? 차가 없거든요. 지금 핸더슨 레스토랑에 있을 거예요.”희민의말에 곁에 있던 세준과 세희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래, 알았어.”통화가 끝나자, 세희는 답답한 듯 투덜거리기 시작했다.“희민 오빠, 왜 나쁜 아빠를 엄마한테 접근하게 하는 거야? 나쁜 사람이잖아!”희민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미안, 나는 그냥 아빠가 조금 불쌍해 보여서 그랬어.”그 말에 세준은 약간 한숨을 내쉬며 위로를 건넸다.“괜찮아. 이번 한 번인데 뭘. 괜찮으니까 희민이 너도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세준의 말에 희민은 침묵을 지켰다.11시.하영은 수진과 전화 통화를 하며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려고 마지막 계단으로 발을 내디뎠을 때, 갑자기 발을 헛디디며 몸이 앞으로 기울기 시작했다.그대로 휘청이며 바닥에 넘어지려는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긴 덕분에 그대로 품에 안겨버리고 말았다.하영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얼른 눈앞에 있는 사람을 밀어내고 인사를 건넸다.“고마워요!”인사를 건넨 그녀가 고개를 들어 보니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고, 남자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괜찮습니다.”그 남자가 말을 마치고 나서야 하영은 지난번 지영 언니와 애들을 데리고 나왔을 때 레스토랑 입구에서 마주친 남자라는 것을 알아봤다.“그쪽은…….”“죽고 싶어?”하영이 미처 말을 꺼내기 전에 귓가에 익숙한 남자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오자 하영은 미간을 찌푸렸다.‘정유준
답을 들을 수 없었던 하영은 할 수 없이 레스토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하영은 심란한 마음으로 뉴스라도 보면서 주의력을 돌리려고 휴대폰을 켰다.그런데 정유준이 사람을 때리는 영상이 벌써 실검에 떴는데, [MK 대표가 자기 큰형을 때리다!]라는 제목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그 기사에 하영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정주원이 중유준의 형이었어?’그 사실을 깨달은 하영의 머릿속에는 백지영이 정주원을 발견했을 때 겁에 질려 덜덜 떨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하영의 짐작이 맞다면, 정유준과 정주원의 모순은 거기서부터 시작됐을 것이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주원이 하영을 부축해 줬단 이유만으로 사람을 때릴 리는 없으니까.비록 맞은 사람은 정주원이지만 하영의, 무의식은 그가 좋은 사람은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유준은 정주원을 데리고 가는 길에도 그를 향한 폭행을 멈추지 않았다.본가 입구에 도착해서야 경호원을 시켜 주원을 끌어내리라고 한 뒤, 어두운 표정으로 차에서 내려 얼굴에 상처가 가득한 정주원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유준의 검은 눈동자는 서늘한 한기를 내뿜으며 정유준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경고를 날렸다.“잘 들어. 또다시 강하영 손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죽는 것만 못할 정도로 만들어버릴 줄 알아!”“그래?”정주원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고개를 쳐들고, 피 묻은 이를 드러내며 피식 웃었다.“만약 내가 건드리는 정도가 아닌 네 엄마를 괴롭혔던 것처럼 내 독점물로 만들어 버릴 거라면 어쩔 건데? 정유준, 네 엄마까지 내 여자로 만들었으니까, 네 여자도 똑같이 만들어 줄 수 있어!”주먹을 꽉 쥐고 있는 정유준의 검은 눈동자엔 끝없는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그럼 지금 당장 죽여줄게!”유준은 차 트렁크에서 야구 방망이를 꺼내 정주원의 머리를 내려치기 시작했고, 정주원은 머리를 감싸 안고 고통을 참았지만, 일그러진 표정에는 사악한 미소가 떠올랐다.중유준이 그를 죽이려고 달려들수록 주원은 더욱
아크로빌로 돌아오는 길에 하영은 계속 마음이 불안했고, 별장에 도착한 뒤에 무릎에 놓여 있던 햄버거도 챙기지 않은 탓에, 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하영은 바닥에 떨어져 흩어진 음식들을 보며 멍하니 있었고, 시원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서둘러 앞으로 다가가 음식을 주워담아 하영에게 건네주었다.하영은 뻣뻣한 동작으로 주머니를 건네받고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허시원 씨…….”하영의 부름에 시원은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강하영 씨가 묻고 싶은 게 뭔지 알지만, 그래도 묻지 마세요.”하영은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아래로 드리웠다.‘그래, 정유준과 다시 엮이기 싫다고 했으면서 그 사람 얘기 궁금해할 필요 없잖아.’하지만 하영은 정유준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 없었다.‘정주원에게 손을 댔는데, 어르신 성격에 과연 가만있을까? 어르신과는 사이가 늘 안 좋은 것 같았는데.’허시원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는지 위로를 건넸다.“강하영 씨,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이만 가 볼게요.”“네.”하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허시원이 떠나자 집으로 들어왔다.강씨네 식구들은 하영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의아한 시선을 던져왔다.“왜 저러는 거야? 표정을 보면 회사가 파산당한 것 같은 얼굴인데.”“설마, 회사가 망하면 우린 어쩌는 거야?”미정의 말에 유국진은 자기네 식구들 걱정부터 하기 시작했고 강백만도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급해하지 마. 내가 인터넷으로 찾아볼게.”강백만이 휴대폰으로 이리저리 검색해 보다가 TYC가 아직 멀쩡한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망한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강미정은 가슴을 쓸어내렸다.“다행이네. 회사가 망해서 죽어버린다고 해도 우리랑은 상관없는 일이야.”“엄마, 강하영 손에 먹을 것이 들려있는 것 같은데?”“아들, 네가 가서 가져와. 우리 아직 점심도 못 먹었잖아!”“알았어!”미정이 강백만을 떠밀자, 그는 하영의 앞으로 다가가 두말없이 손에 있는 음식을 낚아챘다.“우리
유준은 겨우 눈을 들어 올리더니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래, 늦었으니까 얼른 씻고 자.”희민은 괜히 유준을 귀찮게 할까 봐,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인 뒤 위층으로 올라갔다.세수하고 방으로 돌아온 희민은 컴퓨터 앞에 앉아 아래층에 있는 CCTV를 주시했다.정유준은 응접실에서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이마에는 여전히 핏자국이 있었고, 하얗고 잘생긴 얼굴에는 약간의 살기마저 드러났다.그 모습에 희민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예전에도 아빠가 슬픈 표정으로 술을 마시는 모습을 종종 보긴 했지만, 이번에는 상처투성인 채로 술을 마셨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엄마도 기분이 안 좋아 보이셨는데.’희민은 엄마가 아빠를 다치게 할 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얼른 레스토랑의 CCTV를 해킹해서 점심시간대로 시간을 돌리자, 정유준이 주원을 폭행하고 있는 화면이 나타났다.희민이 충격받은 얼굴로 화면을 지켜보고 있을 때 아래층에서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사장님! 정신 좀 차려보세요!”희민은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끼며 서둘러 아래층으로 달려갔다.그러자 바닥에 쓰러져 있는 유준의 모습에 희민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도우미한테 상황을 물었다.“어떻게 된 일이죠?”“작은 도련님, 사장님께서 고열로 인해 쓰러지셨습니다!”희민은 입술을 깨물더니 침착한 얼굴로 입을 뗐다.“주치의를 불러와요.”“네……, 알겠습니다!”“잠깐.”갑자기 유준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그가 비틀거리면서 바닥에서 일어났다.“주치의 부를 필요 없으니까, 상관하지 마!”그리고 다시 희민이 쪽으로 시선을 돌려 명령을 내렸다.“지금 당장 방으로 돌아가서 자!”“의사를 불러야 해요!”희민은 용기 내서 반박하기 시작했고, 곁에 있던 도우미도 설득하기 시작했다.“사장님, 주치의가 싫으시면 병원이라도 가 보세요.”정유준은 인내심을 잃은 듯 낮은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지금 당장 희민이를 방으로 들여보내!”그 말에 희민은 작은 주먹을 꽉 움켜
구 선생은 고개를 끄덕이고 체온계로 이마의 체온을 측정했다.정유준의 체온이 40도에 달하는 것을 보고 구 선생은 미간을 찌푸렸다.“좋기는 수액을 맞으면 열이 빨리 내릴 겁니다.”“그럴 필요 없어요. 약으로 처방해 주세요.”하영은 유준이 수액은 절대 맞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언젠가 고열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을 때 의사가 수액을 놓아 주자, 정신을 차린 그가 바로 바늘을 뽑아버렸다.그런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하영이였기에, 쓸데없는 힘을 빼고 싶지 않았다.“상처도 치료할까요?”“봉합해야 하나요?”하영의 물음에 구 선생은 고개를 저었다.“봉합까지 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그리고 구급상자에서 약을 꺼내며 하영에게 당부했다.“이건 해열제인데 술을 마신 뒤에도 복용할 수 있어요. 4시간에 한 번 드시면 되는데 열이 내리면 복용할 필요 없어요. 그리고 여기 소염제도 같이 하루에 1번 복용하면 돼요. 약은 여기 놔둘 테니까, 저는 이만 돌아갈게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세요.”“네, 고마워요.”“괜찮아요.”구 선생이 떠난 뒤 하영은 소독수와 면봉을 꺼냈다.그리고 유준의 이마 상처에 닿았을 때, 남자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눈앞에 있는 하영을 발견하고 쓴웃음을 지었다.“이젠 헛것마저 보이네.”순간 움직이던 손을 멈칫하던 하영은 마음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정유준 씨, 정신이 들었으면 이 약부터 먹어요.”하영은 그런 기분을 감추고 무심한 어조로 입을 열었는데, 유준은 하영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눈을 번쩍 떴다.이번에는 진짜 하영의 모습이 눈앞에 있자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약간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하영은 한쪽으로 이마의 상처를 치료해 주며 입을 열었다.“누가 죽고 싶어 한다길래 구경하러 왔어요. 어찌 됐든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잖아요.”“허……. 그 정도로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아.”그 말을 남긴 유준은 하영을 밀어내고 문 쪽으로 걸어갔고, 하영은 불쾌한 눈빛으로
하영은 입술을 꾹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하영……, 나 버리지 마……. 내가 잘못했어. 너한테 그렇게 대하는 게 아닌데, 가지마……, 미안해…….”유준의 말에 하영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미안하다.”는 그의 말을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모른다. 하영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렀다.시간이 이렇게 오래 흘렀지만, 여전히 유준에 대한 마음을 모질게 떨쳐내지 못했다. 정유준 때문에 상처받아 아파하고, 고열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에 당장 난원으로 달려왔다. 하영은 늘 두려운 마음에 유준을 피했지만, 그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그날 밤 하영은 날이 어슴푸레 밝을 때까지 밤새 유준의 곁을 지키다가, 침대맡에 엎드려 깜빡 잠들어 버렸다.아크로빌.캐리는 리사의 전화를 받고 바로 하영을 찾으러 갔지만, 방에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전화를 해봐도 받는 사람이 없자, 캐리는 할 수 없이 홀로 호텔로 향했다.호텔 방에 도착해서 리사가 문을 열어 주면서 캐리의 등 뒤를 살피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G는 같이 안 왔어?”“오늘 주말이라 애들과 함께하느라 못 왔어요.”캐리가 대충 둘러대자, 리사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아이가 있었어?”“네, 세쌍둥이거든요. G가 못 왔다고 탓하는 건 아니죠?”캐리의 말에 리사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었다.“아니, 오히려 애들 때문에 못 왔다는 게 더 마음에 들어. 부모가 애들 어릴 때 함께 하는 게 당연한 거야. 나는 일 때문에 애들을 뒷전으로 하는 사람들이 제일 싫거든.”캐리는 리사가 어린 시절에 부모의 사랑이 부족했다는 걸 잘 알고 일부러 그런 핑계를 댔다.그때 리사가 또 입을 열었다.“어제 내가 옛 친구를 만나러 갔는데, 내일모레 김제에 5년에 한 번 열리는 디자인 전시회가 있다고 하는데, 너랑 G도 참석할 거야?”“디자인 전시회요? 그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 G랑 상의해 봐야겠어요.”“듣자니 사교계에서 유명한 사람들은 다 온다고 하던데
게다가 하영의 몸에도 별다른 이상은 없었고, 한참 생각하던 하영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분명 잠결에 침대에 올라갔을 거야.’문밖에 있던 시원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대표님, 강하영 씨랑 화해하신 겁니까?”유준은 시선을 거두고 싸늘한 눈빛으로 시원을 바라보았다.“그렇게 할 일 없어?”“죄송합니다. 제가 선을 넘은 것 같습니다.”시원이 연신 고개를 저으며 답했고, 유준은 옷을 입으며 낮은 소리로 물었다.“정주원 쪽은 상황이 어때?”“갈비뼈 4개가 부러지고, 팔꿈치 파열이랑 뇌진탕이 왔는데, 현재 수술을 마친 상태입니다. 회복되려면 한참은 걸릴 것 같다고 하더군요.”유준의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에 싸늘한 한기가 스쳤다.“운이 좋았네.”“대표님, 그리고 강하영 씨와 관련된 일입니다.”허시원은 말을 하며 화장실 쪽을 힐끗 쳐다봤다.“뭔데?”“강씨네 식구들이 강하영 씨를 이용해 팔로워 수를 늘인 다음, 지금 라이브 방송으로 판매를 시작했더군요. 방송에서 보면 강하영 씨 집안에 물건들이 가득 널려있었습니다.”유준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싸늘한 말투로 명령을 내렸다.“플랫폼에 연락해서 계정을 정지시켜.”“알겠습니다!”하영은 허시원이 방을 떠난 뒤에야 화장실에서 나왔다.유준은 아직도 약간 빨갛게 물들어 있는 하영의 뺨을 보고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물었다.“예전엔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꼭 저렇게 말해야 적성이 풀리나 보지?’“별다른 일 없으면 먼저 갈게요.”하영이 소파에 놓인 가방을 챙기고 유준의 곁을 지나갈 때, 남자가 갑자기 하영의 팔을 잡아당겨 품에 가뒀다.하영은 퍼뜩 정신이 들며 얼른 두 팔을 올려 그를 막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유준을 보며 싸늘한 말투로 물었다.“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어젯밤 유준을 돌봐주러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과거를 잊고 다시 그와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유준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하영을 안은 손을 풀지
하영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정유준 씨, 우리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하영은 그대로 몸을 돌려 떠났다.유준은 하영이 주저하지 않고 떠나는 뒷모습과 떠나기 전 남긴 말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그렇지만 뒤쫓아 가고 싶은 욕망을 꾹 누르고, 모든 고통을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다.아크로빌.두 녀석은 집으로 돌아온 하영을 발견하고 얼른 뛰어왔고, 세희는 하영의 다리를 안고 흐느끼며 하영을 쳐다보았다.“엄마, 어디 갔었어요? 한참 찾았잖아요.”하영은 가슴이 시큰거려 얼른 웅크리고 앉아 세희를 안았다.“어젯밤에 일이 있어서 집에 오지 못했는데, 너희들한테 미처 얘기하지 못했어. 미안해.”세준은 하영 눈 밑의 다크서클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엄마, 어젯밤 못 주무셨어요?”“그래,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거든. 아침은 먹었어?”“먹었어요!”세희가 하영의 목을 껴안으며 말했다.“희민 오빠가 먹을 걸 보내줬거든요. 엄마, 다음부턴 말도 없이 사라지지 마세요. 네?”세희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이자 하영은 마음이 아팠다.“그래, 꼭 약속할게.”세준은 얼른 세희의 손을 잡아끌었다.“세희야, 엄마가 쉴 수 있게 우리는 방에 들어가 레고나 맞출까?”세희는 하영의 볼에 쪽 소리 나게 뽀뽀를 해주고 세준을 따라 방으로 올라갔다.하영이 자기 방에 돌아와 샤워하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려 했을 때, 아래층에서 울부짖는 듯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씨X, 내 계정이 왜 갑자기 정지된 거야?”‘계정 정지?’그 말에 하영은 피식 웃었다.‘추악한 모습을 보다 못한 네티즌들이 신고한 거겠지.’시장에서 파는 일반 고구마로 허풍을 쳐서 얼마를 사든 하나에 2만 원씩 판매하는데 누가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하영은 몸을 돌려 이불로 귀를 막아버리고 계속 잠을 청했다.아래층.강백만의 고함소리에 화장실에 있던 강미정이 서둘러 뛰쳐나왔다.“뭐야? 무슨 일인데?”강백만은 연신 휴대폰 화면만
시현은 아파서 이를 악물었다.“알았어, 알았어. 공주님 제발 살려주세요!!”세희는 그제야 흐뭇하게 손을 거두었다.“참, 지난번에 말한 그 사건 말이에요, 언제 해결하러 갈 거예요?”“시간이 좀 더 지나면.” 시현이 말했다. “네 몸은 아직 완전히 나아지지 않았으니까, 지금 계속 바쁘게 움직이면 안 돼. 만약에 저쪽에도 이런 악독한 귀신이 있다면, 너 또 상처를 입을지 몰라. 난 이미 죄책감 때문에 너와 결혼을 해서 평생 챙겨주고 싶으니까, 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 정말 방법이 없어.”세희는 웃으며 말했다.“내가 언제 시현 오빠와 결혼한다고 했어요?”“쳇.” 시현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내가 뭐가 어때서? 나도 어깨가 넓고 근육이 있는 미남이라고! 인기가 얼마나 많은데.”세희는 말문이 막혔다.‘정말 뻔뻔하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칭찬하다니.’세희는 숨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시현 오빠.”“응?”“내가 지금 귀신을 잡는 일을 종사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난 사실 아주 좋은 신붓감은 아니에요. 눈치 없는 귀신들이 가끔 날 찾아와서 귀찮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난 인우와 반대로, 팔자에 음기가 가득 찼거든요.”“그러면 어떻게 되는데?”“7월 중순이 되면 많은 귀신들이 날 찾아올 거예요. 그럼 난 일이 잘 안 풀리거나 심지어 다칠 수도 있거든요.”“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만약 우리가 함께 한다면, 그 귀신들은 심지어 시현 오빠를 귀찮게 할 거예요.”“그래서, 이것 때문에 네가 최고의 신붓감이 아니란 거야?” 시현은 말을 마치고 웃으며 말했다. “이까짓 일로 내가 물러설 수 있을 것 같아? 세희야, 너도 날 너무 얕본 것 같아.”“그때 가면 나 때문에 모든 일이 잘 안 풀릴 텐데, 그게 두렵지도 않아요?” 세희는 시현에게 물었다.시현은 입술을 구부리고 웃었다.“넌 우빈이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우빈에게 영향을 미치는 건 하나도 두렵지 않은 거야? 세희야, 넌 날 뭘로 보고.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난 두렵지
시현과 인우는 비록 귀신을 보지 못했지만, 지금 검은 연기가 자신의 앞에서 천천히 흩어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인우는 세희를 바라보며 물었다.“누나, 지금 어떻게 된 일이에요?”세희는 몸을 돌려 말했다.“그 귀신은 환생하고 싶지 않아서 이미 죽었어.”“귀신이 죽었다고?” 시현이 물었다.“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뜻이야?”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방을 바라보았다.“캐리 아저씨, 이제 그 여섯 명의 귀신을 좀 잡아주세요.”캐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불과 몇 분 만에 겁에 질린 그 귀신들을 세희의 앞으로 데려왔다.세희는 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당신들은 그 처녀귀신과 같은 선택을 할 건가요? 아니면 나와 같이 서낭당에 갈 건가요?”“서낭당에 갈래요!”“우리는 그 여자의 협박을 받아서 여기에 갇힌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벌써 떠났을 텐데!”“죽어도 우리를 괴롭히려 하다니!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이 귀신들은 그 처녀귀신이 사라진 후, 불평하기 시작했다.세희는 그들의 원망을 듣고, 마음속에 분노가 치솟았다.“지금 그 처녀귀신을 비난할 면목이 있는 거예요?!”세희는 노발대발하며 말했다.“당신들을 죽인 것은 그 여자의 잘못일지라도. 당신들은 자신에게 그 어떤 책임도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만약 당신들이 그 여자를 괴롭히지 않았다면, 오늘처럼 귀신으로 되어 이곳에 갇히지 않았겠죠!”“풉.” 한 여자 귀신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고요? 그 여자는 늘 자신의 성적을 가지고 남을 비웃었어요. 그러지만 않았어도 우리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세희는 이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남의 성적이 우수해서, 당신들은 또 그 사람을 따라잡을 수 없어서, 그걸 자랑이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정말 불쌍하네요! 이 세상에 당신들 같은 질투심이 강한 쓰레기가 없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안심해요, 당신들은 다음 생에도 이번 생에 지은 죗값을 치러야 하니까!”귀신들은 세희가 한 말에 화가 났지만, 캐리와 인우 때문에 화가
“말이 쉽지!” 처녀귀신은 화가 나서 말했다.“날 죽인 그 사람들은 비록 귀신이 되었지만, 나도 그들이 환생하지 못하게 붙잡아둬야 한단 말이에요!”세희는 눈살을 찌푸렸다.“그 여섯 명의 학생들이 당신을 죽인 사람이었어요?”“그렇지 않으면 내가 왜 그들을 죽였을 것 같아요??”“그 사람들 찾아 복수를 한 이상, 이제 그만 그들을 놓아줘요. 이렇게 자신을 괴롭혀가며 그들을 붙잡고 있을 필요가 더 있을까요?”“그럴 순 없어요! 이렇게 쉽게 환생을 하라고 하는 건 너무 말이 안 되니까!!”처녀귀신이 노발대발했다.세희는 웃었다.“당신은 집념이 너무 커서 줄곧 이곳에 갇혀 있는 거예요. 영원히 자신의 고통으로 자신을 괴롭히고 있잖아요. 만약 내려가서 벌을 받고 환생하여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난다면, 이것 또한 자신의 과거를 내려놓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니겠어요?”“이렇게까지 날 가르칠 필요 없어요!”처녀귀신이 말했다.“오늘 당신들이 죽든지, 아니면 내가 죽든지, 둘 중 하나 선택하자고요!”말을 마치자, 처녀귀신은 세희를 향해 공격하려 했다.세희는 바로 인우를 부르려고 했고, 이때 갑자기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빠른 속도로 달려온 캐리는 즉시 그 처녀귀신을 먼 곳으로 밀어냈다.“좋은 말로 타일러도 듣지 않고, 심지어 세희에게 손을 대려고 하다니. 오늘 사라질 준비를 하는 게 좋겠어!”캐리는 차가운 목소리로 붉은 옷을 입은 처녀귀신에게 말했다.“그게 뭐가 무섭다고.” 처녀귀신이 소리를 질렀다. “나도 이젠 지긋지긋해요! 이 더없이 더러운 세상! 내 부모님은 내가 학교폭력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들의 돈을 받고 바로 이 일이 없던 걸로 하자고 했어요. 내 오빠는 심지어 그들이 부자라는 것을 알고, 그들을 친구로 여겼고요! 환생할 게 뭐가 더 있겠어요? 환생해도 이렇게 더럽고 추악한 세상을 마주해야 하니까, 차라리 날 죽여요. 더 이상 이 징그러운 세상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처녀귀신의 말을 듣고, 캐리는 바로 손을 써서
세희가 이렇게 말하자, 세준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저녁 무렵, 인우는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세희가 이미 집에 있는 것을 보았고, 무척 흥분해하며 달려갔다.“누나, 돌아왔어요?” 인우는 싱글벙글 웃으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어때요, 다 나은 거예요?”세희는 의미심장하게 인우를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인우야, 오늘 저녁에 나 좀 도와줘.”“그래요.” 인우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학교에 가는 거 맞죠?”세희는 의아하게 인우를 바라보았다.“뭐야? 너 이제 무섭지도 않는 거야?”인우는 미소를 천천히 거두었다.“누나, 귀신은 무섭지만, 난 누나가 더 이상 그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요. 그때 누나가 그렇게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난 그날 정말 학교로 달려가서 그 귀신들을 죽이고 싶었어요. 그러나 시현 형이 누나의 생각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억지로 참고 가지 않았던 거예요.”세희는 뿌듯해하며 인우의 머리를 어루만졌다.“우리 인우 다 컸네. 누나를 걱정할 줄 다 알고.”인우는 세희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누나, 난 줄곧 누나를 걱정하고 있었어요. 다음에 이런 위험한 일을 하러 간다면, 꼭 나 데리고 가면 안 돼요? 난 누나를 지켜주고 싶어요.”“그래! 저녁에 우리 가족들 함께 밥을 먹은 후에 바로 출발하자!”“좋아요!”저녁에 하영과 유준 그리고 희민이 돌아왔다. 세희가 이미 퇴원한 것을 보고, 세 사람은 기뻐해하며 그녀를 에워싸고 수다를 떨었다.저녁을 먹은 다음, 하영은 세희를 데리고 위층에 가서 간단하게 몸을 씻어주고서야 세희를 보냈다.문을 나서자마자, 세희는 시현이 그의 포르쉐와 함께 집 앞 정원에 있는 것을 보았다.세희와 인우는 의아함을 느끼며 시현을 쳐다보았다.세희가 먼저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에요?”시현은 별장을 바라보았다.“세준이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나한테 연락했지 뭐. 네 기사 되어 달라고.”“우리 집에 기사가 없는 것도 아닌데. 그러면 시현 오빠가 너
“그래, 우빈아, 넌 15년 동안 세희를 좋아했고, 또 세희를 위해 많은 것을 바쳤지. 하지만 그거 알아? 세희는 아주 이성적인 사람이야. 세희가 만약 무슨 일을 알고 싶다면, 바로 감정 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호흡이 흐트러진 우빈은 시현을 바라보며 다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알아요.” 우빈이 대답했다.“세희는 그 누구보다도 감성적이고 또 이성적이죠.”“그럼 만약 세희가 정말 날 선택한다면, 넌 어쩔 계획이야?”“그런 건 없어요.”우빈은 솔직하게 말했다.“내가 말했잖아요, 난 세희의 모든 선택을 존중할 거라고. 마찬가지로 다른 걱정 할 필요 없어요. 세희에게 거절을 당했다고 복수를 할 정도는 아니니까요.”시현은 계속 물었다.“그러니까 내가 세희와 함께 하더라도 넌 세희와 계속 친구를 하겠다는 말이야?”우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나와 세희는 줄곧 친구였어요. 우리 두 사람이 사귀지 않아도, 앞으로 여전히 사이가 좋은 친구예요. 고 과장님, 세희를 좋아해도 되지만, 내가 세희와 계속 친구로 되는 것을 막을 순 없어요.”시현은 갑자기 웃었다.“그럼 됐어!”우빈은 시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시현은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서 버튼을 눌렀다.“난 내가 세희와 사귀면, 넌 불편해서 세희와 연락 끊을 줄 알았거든.”우빈은 말문이 막혔다.“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있어. 이제 세희를 포기하자고. 넌 정말 세희가 필요한 것 같으니까...”말을 하다 시현은 우빈을 힐끗 바라보았다.“네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들은 하지 않겠어. 아무튼 후에 생각해 봤는데, 만약 널 향한 내 개인적인 생각 때문에 세희를 포기한다면, 그건 널 무시하는 것과 같잖아.”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시현은 안으로 들어갔고 우빈도 뒤를 따랐다.두 사람이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서자, 우빈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그 결정은 틀리지 않았어요. 난 확실히 가족을 모두 잃었지만, 그래도 피와 살이 있는 사람이에요. 이 세상에 나 혼자만이 이런 상황이 아니잖아
시현은 말을 이어받으며 오른손을 들었다.“그때 내 오른손에 피가 가득 묻은 거 있지? 심지어 의사가 네 등의 썩은 살을 모두 베어낸 것을 직접 봤는데, 며칠째 잠을 못 잤어.”“에이, 그건 간단하죠!” 세희는 히죽거리며 말했다.“수면제 처방받으면 편안하게 잘 수 있지 않겠어요?”시현은 웃으며 침대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세희야, 날 원망하고 싶지 않아?”“원망이요?” 세희는 시현의 뜻을 잘 몰랐다.“내가 왜요?”시현은 콧등을 긁적였다.“내가 널 데리고 그곳에 가지 않았다면, 너도 이렇게 다치지 않았을 거야.”세희는 눈을 부라리며 시현을 바라보았다.“그건 시현 오빠 탓이 아니에요. 그 귀신들이 겁도 없이 나한테 덤빈 것뿐이니까요. 다 회복되면 그 귀신들 전부 잡아버릴 거예요!”“또 그곳에 가려고?” 시현은 경악하며 물었다.“그럼요!” 세희는 손을 내밀었다.“일곱 명의 귀신을 전부 다 데려갈 수 있다면, 염라대왕님은 좋다고 박수를 치실지도 몰라요.”시현은 세희의 얼굴에 나타난 즐거운 미소를 애틋하게 바라보았다.“난 오히려 네가 날 욕하면서 분풀이를 했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홀가분한 말투로 말하는 거 보니까 마음이 너무 아파.”“그럼 너무 재미없죠! 난 시현 오빠 돈 뜯어먹는 게 더 좋은 거 같은데? 내가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으면, 날 데리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오케이!” 시현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먹고 싶은 거 다 사줄게.”세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참, 세준 오빠가 그러던데, 미정 할머니를 찾아갔다면서요?”시현은 숨김없이 대답했다.“응, 가서 어떻게 해야 널 보호할 수 있을지에 대해 여쭤봤어.”“하하하.” 세희는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 “날 보호한다고요?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죠? 그리고 시현 오빠는 귀신도 안 보이는데, 어떻게 귀신과 싸우려는 거예요? 정의감과 용기로 귀신을 제압하려고요?”“내가 만약 내 정의감을 이용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엔 귀신이 없을 거야?”세희는 웃으며 말했다.“그냥
시현은 세준 그들에게 돌아가서 쉬라고 한 다음, 혼자 의자에 앉아 멀리서 세희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아주 평온하게 잠을 자고 있었고, 숨을 고르게 쉬고 있었다.이때 간호사가 걸어왔다. 시현은 그녀를 보며 얼른 일어나 물었다.“선생님.”간호사는 그를 쳐다보았다.“무슨 일이시죠?”“세희는 언제 중환자실에서 나올 수 있는 거죠?”“이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요 며칠 더 관찰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아가씨는 제가 본 여자아이들 중에서 가장 엄중한 상처를 입으신 환자라서요. 잘못하면 흉터가 남을 텐데... 어휴...”말이 끝나자, 간호사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시현은 그녀의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또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다.‘이번 생은 철저히 세희에게 빚진 셈이네.’사흘 후, 세희는 중환자실에서 나왔고, 이 일을 알게 된 하영과 유준도 얼른 병원에 찾아왔다.세희가 침대에 엎드려 멍을 때리는 것을 보며, 두 사람은 가슴이 아팠다.하영은 허리를 굽혀 세희의 머리를 어루만졌다.“세희야, 미안해. 네 오빠들이 아침에 금방 이 일을 알려줘서, 엄마와 아빠도 이제야 달려온 거야.”세희는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괜찮아요, 엄마. 이거 봐요, 나 아직 멀쩡하잖아요?”하영은 눈시울이 붉어졌다.“걱정 마. 무슨 방법을 써서더라도 네 등의 흉터를 치료할 테니까.”“사실 난 이런 거 신경 안 써요. 등일 뿐이니, 평소에 남에게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나 자신도 볼 수 없으니까, 심리적인 스트레스도 없어요.”“네가 꾸미길 좋아한다는 거, 여기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걸?” 세준은 벽에 기대며 말했다.세희는 고개를 돌려 세준을 보려 했지만, 상처가 땅기는 바람에 아파서 이를 악물었다.세준은 마음이 아파서 눈살을 찌푸렸다.“좀 움직이지 마. 나도 안 비웃을게.”유준은 세준을 바라보았다.“세준아, 너희들은 외국에 아는 사람이 많으니까,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좋은 성형과 의사를 찾아. 세희의 등에 절대로 흉터 남지 않게.”세준은
두려움과 걱정이 밀려오자, 시현은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눈을 뜨고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난 세희가 하는 일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데. 그럼 세희를 보호하려면 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지?’생각하다 시현은 핸드폰을 꺼내 세준에게 톡을 보냈다.[그 할머니 지금 어느 호텔에 계시는 거지?]얼마 지나지 않아, 세준은 시현에게 나미정이 지내고 있는 호텔 주소와 방번호를 보냈다.[고마워, 세준아.]세준은 이 문자를 보며 차갑게 웃었다.[세희의 일, 난 이대로 넘어가지 않을 거야.][날 때리고 싶든, 죽이고 싶든 네 마음대로 해. 다 내 잘못이니 나도 변명할 말이 없어.]이 문자를 보낸 후, 더 이상 답장이 들어오지 않았다.시현도 더 이상 아무것도 보내지 않고, 차에 시동을 걸어 호텔로 갔다.30분 후, 시현은 나미정이 있는 룸 앞에 도착했는데, 잠시 심사숙고한 다음,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곧 안에서 나미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만 기다려.”문을 열자, 시현이 문밖에 서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약간 의아해했다.“네가 바로 병원에 있었던 그 총각인가?”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할머니. 저와 잠깐 얘기를 좀 나누시면 안 될까요?”“그래.” 나미정은 몸을 비키며 말했다. “들어와서 말하자꾸나.”시현은 들어가서 소파에 앉았고, 나미정은 그의 옆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무슨 일로 날 찾는 거지?”시현은 긴장이 돼서 두 손을 비볐다.“할머니, 저도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저처럼 평범한 사람은 대체 어떻게 해야 세희의 안전을 보호할 수 있을까요?”“평범한 사람이라...”나미정은 웃기 시작했다.“왜, 네가 보기에 우리와 같은 무당은 평범하지 않은 건가?”시현은 멈칫하더니 얼른 설명했다.“그런 뜻이 아니에요. 아무튼 저희보다 강하고 특수한 능력이 있으시잖아요.”“그것도 다 하늘이 내려준 신기일 뿐이지.”나미정이 말했다.“그러나 우리도 평범한 사람들이야. 밥을 먹어야 하고, 또 때가 되면 죽는 법이니
세희는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부적은 비록 뚜렷하지는 않지만, 그녀는 여전히 강렬한 양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세희는 숨을 들이마신 다음 천천히 일어섰다. 그 순간, 옆에서 놀던 그 귀신들은 고개를 홱 돌리더니 모두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들의 시선을 알아챈 세희도 눈을 돌려 귀신들을 보았다.‘또 이런 느낌이야! 이곳을 못 나가게 하는 그런 느낌!’세희는 밀려오는 공포를 참으며 용기를 내어 문 앞으로 걸어갔다.문과 가까워질수록 주위의 음기는 더욱 강렬해졌다. 심지어 세희는 자신의 영혼이 억압된 느낌을 받았다.“누나, 무서워하지 마요!!”“세희야! 용기를 내서 그곳에서 나와! 그 귀신들은 널 건드리지도, 널 다치게 하지도 못할 거야!”“누나! 나랑 형들이랑 그리고 고 과장님이 여기서 누나를 기다리고 있어요!”인우와 나미정의 목소리를 듣고, 세희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그녀는 이를 악물며 가깝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다가갈 수 없는 문을 향해 계속 나아갔다.세희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고, 부적이 그려진 손을 들어 다시 시도했다.이번에 그 귀신들은 섬뜩하게 웃기 시작했다. 세희가 문손잡이에 손을 얹으려 하자, 그들은 재빨리 앞으로 돌진했다.이때, 매몰찬 음기가 덮쳐왔고, 세희는 부적이 있는 그 손을 들고 돌아섰다.그 귀신들은 하마터면 세희의 영혼과 닿을 뻔했다. 그러나 세희의 손에서 나는 강렬한 양기가 서려 있는 부적을 감지한 그들은 표정이 돌변했다.세희는 뒤로 물러섰고, 등이 문에 닿는 순간, 재빨리 몸을 돌려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문을 연 후, 그녀는 즉시 뛰쳐나갔다.이때, 줄곧 병상에 누워있던 세희는 눈을 번쩍 뜨더니 숨을 들이마셨다.세희가 깨어나는 것을 보고, 인우는 감격에 겨워 소리쳤다.“누나! 왜 이제야 깨어난 거예요!!”그러나 세희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눈을 천천히 감았다.인우는 완전히 멍해지더니 당황해진 표정으로 나미정을 바라보았다.나미정은 아주 침착하게 대답했다.“별일 아니야, 피곤해서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