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야 가족 기업이라, 나한테 모든 운영 지식을 가르쳐 줬는데, 하영 씨한테는 뭐가 있죠?”“확실히 저한텐 아무것도 없어요. 대신 반드시 노력해서 강해져야 할 이유가 있죠. 디자인만 해서 멀리갈 수 없다는 말씀은 저도 인정해요. 대중들도 언젠가 저의 디자인에 질리는 날이 오겠죠. 하지만 배움엔 끝이란 게 없는 법입니다. 리사 여사님은 무슨 근거로 저의 디자인 이론이 여기서 끝이라고 단정 지으시는 거죠? 길은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이고, 성공은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지 말로만 이뤄내는 게 아닙니다. 제가 TYC를 순조롭게 이끌어 온 것이야말로 제일 좋은 증거가 아니겠어요?”하영의 침착하고 분명한 말에 그녀를 보는 리사의 눈빛이 점점 변하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 환히 웃는 얼굴로 하영에게 말했다.“하영 씨는 다른 젊은 여성의 몸에서 볼 수 없는 기개를 갖고 있군요. 확실히 다시 보게 됐어요!”“인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하영은 말을 하며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환영해요.”리사도 손을 내밀어 하영의 손을 맞잡았다.“하영 씨 능력을 기대할게요.”같은 시각.검은색 슈트를 차려입은 몸매가 다부진 남자가 공항에서 나오고 있었다.허시원은 캐리어를 밀고 남자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데, 갑자기 남자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깜짝 놀란 허시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멈추고 상사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멀지 않은 곳에 하영과 캐리, 그리고 리사의 모습이 보였다.‘어쩐지 대표님께서 전용기를 거부하시더니, 캐리가 이 시간에 김제에 도착하고, 강하영 씨가 마중 나올 줄 예상했던 거였구나. 대표님은 왜 굳이 두 사람의 모습을 확인하려는 걸까?’“대표님, 차가 도착했습니다.”허시원이 입을 열어 유준의 주의력을 돌렸지만, 그는 굳은 얼굴로 강하영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기 시작했다.“큰일 났네.”허시원은 자기만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얼른 유준의 뒤를 따랐고, 하영과 캐리가 그런 정유준의 모습을 발견했는데, 리사마저도 두 사람의 시선을 따라 유준을 발견했
하영은 이를 악물었다.“정유준 씨,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렇게 독재자처럼 굴지 마시죠!”눈을 가늘게 뜬 유준의 눈가에 살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내가 독재자처럼 구는 거야, 아니면 네가 쓰레기 더미에서 뒹구는 거야?”“쓰레기 더미? 그러면 당신도 쓰레기겠네요?”말을 마친 하영은 몸을 돌려 캐리를 잡아끌며 말했다.“가자! 한밤중에 추위에 떨며 이런 사람이랑 싸우고 싶지 않아!”캐리도 고개를 끄덕이고 리사한테 입을 열었다.“차에 타시죠.”그들이 왜 싸우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던 리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차에 탔고, 세 사람은 유준의 서늘한 눈빛을 등 뒤로 하고 훌쩍 떠났다.허시원은 유준의 쓸쓸하고 처참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대표님께서는 강하영 씨가 분명 다른 남자를 감싸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왜 저러시는 걸까?’하영과 캐리는 리사를 오성급 호텔에 방을 잡아 주고 함께 아크로빌로 돌아왔다.차에서 내린 캐리는 갑자기 정원에 생긴 닭장과 8마리의 닭들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G, 언제부터 닭 키우는 취미를 가졌어?”하영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일단 들어가서 설명할게.”“그래.”별장 문을 여는 순간 캐리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고, 충격적인 표정으로 거실에 널려 있는 감자와 고구마들을 쳐다봤다.“세상에…… G, 내가 없는 사이 특산품에 관심이 생긴 거야?”하영은 거실에서 하루 종일 라이브 방송을 하는 강백만을 보며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진상 친척들이 우리 집을 차지했는데, 지금 라이브 방송하고 있는 거야.”캐리는 너무 놀라 입을 크게 벌렸다.“세상에, 그런 사람들도 다 있어?”하영은 피곤한지 눈을 비볐다.“응, 며칠 뒤에는 있을 곳도 사라지게 될 거야, 올라가자.”“그래.”토요일, 오전 9시.캐리는 일어나 세 녀석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 깜짝 놀라게 해 주려 했다.그런데 침대로 다가가니 희민의 베개에 적잖은 혈흔이 묻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반쯤
강미정은 고개를 들어 캐리를 발견하고 얼른 몸을 일으켰다.“당신 대체 누구야! 무단침입으로 경찰에 신고할 줄 알아!”“저요?”캐리는 자신을 가리키며 낄낄 웃었다.“그쪽 조상님인데요?”‘이 사람 뭐야? 다짜고짜 욕부터 하고, 경찰에 신고한다고?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강미정은 눈을 부릅뜨고 캐리를 향해 삿대질하기 시작했다.“뭐 이런 미친X이 다 있어? 다시 한번 말해 봐!”그러자 캐리도 진지한 얼굴로 다시 대답해 줬다.“뭐라고 하긴요. 그쪽 조상님이라고 했잖아요.”미정은 캐리한테 말려 아직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캐리가 또 한마디 덧붙였다.“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줄 알아요? 비켜요!”말을 마친 캐리는 미정을 한쪽으로 밀어냈고, 화가 치밀어 오른 미정은 허리에 손을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미친X이야?”캐리는 걸음을 멈추고 미정을 향해 씩 웃었다.“아줌마가 쉽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죠. 아줌마처럼 길거리에 파는 싸구려 같은 줄 알아요?”“너!”강미정은 모욕적인 욕에 치를 떨었고, 캐리는 미정을 향해 네가 뭘 어쩌겠냐는 듯 혀를 홀랑 내밀었다.계단 입구에서 캐리의 욕을 전부 들은 하영은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캐리, 이만 가자.”“그래!”세 녀석을 다독여준 뒤, 하영은 캐리와 함께 리사를 찾으러 갔다. 그런데 호텔 아래층에 도착하니 리사가 진작에 떠났다는 사실을 알았고, 캐리는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차에 올라탔다.“G, 일단 리사를 기다리자. 리사가 돌아오면, 네가 예전에 주문한 원단 원재료에 관해 제대로 얘기도 해보고, 리사가 소개해 준…….”“잠깐!”그때 하영이 캐리의 말을 끊었다.“네가 이미 원재료를 나한테 메일로 보내 줬잖아.”“뭐?”캐리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내가 언제 보내줬어? 너한테 서프라이즈 주려고 준비한 건데!”하영은 깜짝 놀랐다.‘캐리가 보낸 게 아니라고?’“나는 네가 서프라이즈로 나한테 보내준 줄 알았는데.”“아냐! 내가 준비한 서프라이즈는
“아빠.”“지금 데리러 갈게.”유준의 말에 희민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벌써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희민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물었다.“혹시 조금 늦게 가도 괜찮아요?”희민의 말에 유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이유가 뭐지?”“엄마가 맛있는 거 사 갖고 온다고 하셨거든요.”그러다 갑자기 하영이 전화를 끊기 전에 캐리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라 다시 말을 이었다.“오시는 길에 엄마를 모시고 오는 건 어때요? 차가 없거든요. 지금 핸더슨 레스토랑에 있을 거예요.”희민의말에 곁에 있던 세준과 세희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래, 알았어.”통화가 끝나자, 세희는 답답한 듯 투덜거리기 시작했다.“희민 오빠, 왜 나쁜 아빠를 엄마한테 접근하게 하는 거야? 나쁜 사람이잖아!”희민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미안, 나는 그냥 아빠가 조금 불쌍해 보여서 그랬어.”그 말에 세준은 약간 한숨을 내쉬며 위로를 건넸다.“괜찮아. 이번 한 번인데 뭘. 괜찮으니까 희민이 너도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세준의 말에 희민은 침묵을 지켰다.11시.하영은 수진과 전화 통화를 하며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려고 마지막 계단으로 발을 내디뎠을 때, 갑자기 발을 헛디디며 몸이 앞으로 기울기 시작했다.그대로 휘청이며 바닥에 넘어지려는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긴 덕분에 그대로 품에 안겨버리고 말았다.하영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얼른 눈앞에 있는 사람을 밀어내고 인사를 건넸다.“고마워요!”인사를 건넨 그녀가 고개를 들어 보니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고, 남자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괜찮습니다.”그 남자가 말을 마치고 나서야 하영은 지난번 지영 언니와 애들을 데리고 나왔을 때 레스토랑 입구에서 마주친 남자라는 것을 알아봤다.“그쪽은…….”“죽고 싶어?”하영이 미처 말을 꺼내기 전에 귓가에 익숙한 남자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오자 하영은 미간을 찌푸렸다.‘정유준
답을 들을 수 없었던 하영은 할 수 없이 레스토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하영은 심란한 마음으로 뉴스라도 보면서 주의력을 돌리려고 휴대폰을 켰다.그런데 정유준이 사람을 때리는 영상이 벌써 실검에 떴는데, [MK 대표가 자기 큰형을 때리다!]라는 제목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그 기사에 하영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정주원이 중유준의 형이었어?’그 사실을 깨달은 하영의 머릿속에는 백지영이 정주원을 발견했을 때 겁에 질려 덜덜 떨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하영의 짐작이 맞다면, 정유준과 정주원의 모순은 거기서부터 시작됐을 것이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주원이 하영을 부축해 줬단 이유만으로 사람을 때릴 리는 없으니까.비록 맞은 사람은 정주원이지만 하영의, 무의식은 그가 좋은 사람은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유준은 정주원을 데리고 가는 길에도 그를 향한 폭행을 멈추지 않았다.본가 입구에 도착해서야 경호원을 시켜 주원을 끌어내리라고 한 뒤, 어두운 표정으로 차에서 내려 얼굴에 상처가 가득한 정주원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유준의 검은 눈동자는 서늘한 한기를 내뿜으며 정유준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경고를 날렸다.“잘 들어. 또다시 강하영 손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죽는 것만 못할 정도로 만들어버릴 줄 알아!”“그래?”정주원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고개를 쳐들고, 피 묻은 이를 드러내며 피식 웃었다.“만약 내가 건드리는 정도가 아닌 네 엄마를 괴롭혔던 것처럼 내 독점물로 만들어 버릴 거라면 어쩔 건데? 정유준, 네 엄마까지 내 여자로 만들었으니까, 네 여자도 똑같이 만들어 줄 수 있어!”주먹을 꽉 쥐고 있는 정유준의 검은 눈동자엔 끝없는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그럼 지금 당장 죽여줄게!”유준은 차 트렁크에서 야구 방망이를 꺼내 정주원의 머리를 내려치기 시작했고, 정주원은 머리를 감싸 안고 고통을 참았지만, 일그러진 표정에는 사악한 미소가 떠올랐다.중유준이 그를 죽이려고 달려들수록 주원은 더욱
아크로빌로 돌아오는 길에 하영은 계속 마음이 불안했고, 별장에 도착한 뒤에 무릎에 놓여 있던 햄버거도 챙기지 않은 탓에, 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하영은 바닥에 떨어져 흩어진 음식들을 보며 멍하니 있었고, 시원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서둘러 앞으로 다가가 음식을 주워담아 하영에게 건네주었다.하영은 뻣뻣한 동작으로 주머니를 건네받고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허시원 씨…….”하영의 부름에 시원은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강하영 씨가 묻고 싶은 게 뭔지 알지만, 그래도 묻지 마세요.”하영은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아래로 드리웠다.‘그래, 정유준과 다시 엮이기 싫다고 했으면서 그 사람 얘기 궁금해할 필요 없잖아.’하지만 하영은 정유준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 없었다.‘정주원에게 손을 댔는데, 어르신 성격에 과연 가만있을까? 어르신과는 사이가 늘 안 좋은 것 같았는데.’허시원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는지 위로를 건넸다.“강하영 씨,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이만 가 볼게요.”“네.”하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허시원이 떠나자 집으로 들어왔다.강씨네 식구들은 하영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의아한 시선을 던져왔다.“왜 저러는 거야? 표정을 보면 회사가 파산당한 것 같은 얼굴인데.”“설마, 회사가 망하면 우린 어쩌는 거야?”미정의 말에 유국진은 자기네 식구들 걱정부터 하기 시작했고 강백만도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급해하지 마. 내가 인터넷으로 찾아볼게.”강백만이 휴대폰으로 이리저리 검색해 보다가 TYC가 아직 멀쩡한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망한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강미정은 가슴을 쓸어내렸다.“다행이네. 회사가 망해서 죽어버린다고 해도 우리랑은 상관없는 일이야.”“엄마, 강하영 손에 먹을 것이 들려있는 것 같은데?”“아들, 네가 가서 가져와. 우리 아직 점심도 못 먹었잖아!”“알았어!”미정이 강백만을 떠밀자, 그는 하영의 앞으로 다가가 두말없이 손에 있는 음식을 낚아챘다.“우리
유준은 겨우 눈을 들어 올리더니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래, 늦었으니까 얼른 씻고 자.”희민은 괜히 유준을 귀찮게 할까 봐,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인 뒤 위층으로 올라갔다.세수하고 방으로 돌아온 희민은 컴퓨터 앞에 앉아 아래층에 있는 CCTV를 주시했다.정유준은 응접실에서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이마에는 여전히 핏자국이 있었고, 하얗고 잘생긴 얼굴에는 약간의 살기마저 드러났다.그 모습에 희민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예전에도 아빠가 슬픈 표정으로 술을 마시는 모습을 종종 보긴 했지만, 이번에는 상처투성인 채로 술을 마셨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엄마도 기분이 안 좋아 보이셨는데.’희민은 엄마가 아빠를 다치게 할 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얼른 레스토랑의 CCTV를 해킹해서 점심시간대로 시간을 돌리자, 정유준이 주원을 폭행하고 있는 화면이 나타났다.희민이 충격받은 얼굴로 화면을 지켜보고 있을 때 아래층에서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사장님! 정신 좀 차려보세요!”희민은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끼며 서둘러 아래층으로 달려갔다.그러자 바닥에 쓰러져 있는 유준의 모습에 희민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도우미한테 상황을 물었다.“어떻게 된 일이죠?”“작은 도련님, 사장님께서 고열로 인해 쓰러지셨습니다!”희민은 입술을 깨물더니 침착한 얼굴로 입을 뗐다.“주치의를 불러와요.”“네……, 알겠습니다!”“잠깐.”갑자기 유준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그가 비틀거리면서 바닥에서 일어났다.“주치의 부를 필요 없으니까, 상관하지 마!”그리고 다시 희민이 쪽으로 시선을 돌려 명령을 내렸다.“지금 당장 방으로 돌아가서 자!”“의사를 불러야 해요!”희민은 용기 내서 반박하기 시작했고, 곁에 있던 도우미도 설득하기 시작했다.“사장님, 주치의가 싫으시면 병원이라도 가 보세요.”정유준은 인내심을 잃은 듯 낮은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지금 당장 희민이를 방으로 들여보내!”그 말에 희민은 작은 주먹을 꽉 움켜
구 선생은 고개를 끄덕이고 체온계로 이마의 체온을 측정했다.정유준의 체온이 40도에 달하는 것을 보고 구 선생은 미간을 찌푸렸다.“좋기는 수액을 맞으면 열이 빨리 내릴 겁니다.”“그럴 필요 없어요. 약으로 처방해 주세요.”하영은 유준이 수액은 절대 맞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언젠가 고열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을 때 의사가 수액을 놓아 주자, 정신을 차린 그가 바로 바늘을 뽑아버렸다.그런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하영이였기에, 쓸데없는 힘을 빼고 싶지 않았다.“상처도 치료할까요?”“봉합해야 하나요?”하영의 물음에 구 선생은 고개를 저었다.“봉합까지 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그리고 구급상자에서 약을 꺼내며 하영에게 당부했다.“이건 해열제인데 술을 마신 뒤에도 복용할 수 있어요. 4시간에 한 번 드시면 되는데 열이 내리면 복용할 필요 없어요. 그리고 여기 소염제도 같이 하루에 1번 복용하면 돼요. 약은 여기 놔둘 테니까, 저는 이만 돌아갈게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세요.”“네, 고마워요.”“괜찮아요.”구 선생이 떠난 뒤 하영은 소독수와 면봉을 꺼냈다.그리고 유준의 이마 상처에 닿았을 때, 남자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눈앞에 있는 하영을 발견하고 쓴웃음을 지었다.“이젠 헛것마저 보이네.”순간 움직이던 손을 멈칫하던 하영은 마음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정유준 씨, 정신이 들었으면 이 약부터 먹어요.”하영은 그런 기분을 감추고 무심한 어조로 입을 열었는데, 유준은 하영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눈을 번쩍 떴다.이번에는 진짜 하영의 모습이 눈앞에 있자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약간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하영은 한쪽으로 이마의 상처를 치료해 주며 입을 열었다.“누가 죽고 싶어 한다길래 구경하러 왔어요. 어찌 됐든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잖아요.”“허……. 그 정도로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아.”그 말을 남긴 유준은 하영을 밀어내고 문 쪽으로 걸어갔고, 하영은 불쾌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