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준은 피곤한 기색을 내비치며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일 있으면 바로 나한테 얘기해. 어머니 약은 이제 따로 보내줄게. 그리고 나 출장 가야 하니까 희민이도 나를 도와 잠시 맡아 줬으면 좋겠어.”“희민이는 내 아들이라 돌보는 건 당연하니까. 앞으로 돕는다는 말은 안 했으면 좋곘네요.”말을 마친 하영은 차 안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희민을 향해 웃으며 물었다.“희민아, 내려오지 않고 뭐 하고 있어?”작은 가방을 등에 메고 차에서 내린 희민이 하영이 앞으로 다가왔다.“엄마, 저는 두 사람 얘기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기다리고 있었어요.”하영은 말랑말랑한 희민의 작은 볼을 살짝 꼬집었다.“엄마 앞에서는 이것저것 신경 쓸 필요 없어.”하영을 향해 웃는 희민의 모습에 유준은 충격을 받고 말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희민이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사이가 좋아 보이는 하영과 희민을 지켜보던 정유준의 머릿속에 불현듯 어떤 생각이 스쳤다.‘만약 강하영이 내 곁에 있게 된다면 희민이가 점점 더 좋아지지 않을까?”세희도 기쁨에 휩싸였지만 표정은 여전히 찌푸려져 있었다. 그리고 뭔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세준의 옷을 잡아당겼다.“오빠, 설명 좀 해줘.”“뭘?”“이모가 나쁜 아빠 어머니인데, 엄마는 이모를 지영 언니라고 부르잖아, 그럼 아빠는 엄마를 뭐라고 불러야 해?”세희가 진지한 표정으로 묻자, 세준이는 약간 놀란 듯하더니 빠르게 대답해 줬다.“간단하잖아. 엄마는 아빠의 작은이모인 셈이지.”“그럼 오빠는 아빠의 삼촌이 되는 셈이네?”세준은 입꼬리에 경련을 일으켰다.“세희야, 너는 정말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세준의 말에 세희는 뒤늦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쳇! 오빠 미워!”유준은 떠나기 전에 희민과 지영을 핑계로 하영의 카톡을 추가했다. 비록 하영은 달갑지 않았지만, 지영 언니가 여기서 지내고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희민이 별장에 들어서니 강씨네 식구들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는데, 희민의 옷에 새겨진 커다란 로고를 발견
“애가 돈이 많은 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유국진은 조금 어이가 없었고, 미정은 그런 국진을 흘겼다.“우리랑 상관은 없지만, 저 옷이랑 모자를 우리 딸한테 입힐 수도 있잖아요! 그럼 얼마나 폼나겠어요?”유국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것도 맞는 말이네.”“게다가 저 녀석은 조금 멍청해 보이는 것 같으니까, 우리가 데리고 나가 놀면서 밥값을 계산하게 하면 밥값을 절약하게 되잖아요.”“역시 우리 여보가 제일 똑똑하다니까.”“당연하죠! 주말에 우리 저 애를 데리고 나가 놀아요!”“그래, 당신 말대로 하자.”“엄마, 나 왔으니까 나와서 좀 도와줘!”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세우던 도중에 문밖에서 강백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부부가 얼른 맞이하러 나갔다가, 보기만 해도 멋있어 보이는 검은 차가 문 앞에 세워져 있자 순간 멍해지고 말았다.그때 강백만이 차 뒤쪽에서 머리를 내밀었다.“엄마, 뭐 하고 있어? 내가 새로 뽑은 차야.”강미정은 깜짝 놀라 앞으로 다가가며, 차를 만져보고 싶었지만 차마 손을 대지 못했다.“이 차 얼마짜리야?”“몇억밖에 안 돼. 어때? 멋있지?”“우리 아들 출세했네! 이렇게 비싼 차를 다 사다니!”강미정도 흥분에 휩싸였다.“대체 무슨 돈으로 산 거야?”강백만은 엄지로 자기 얼굴을 가리켰다.“이 얼굴만 있으면 누가 감히 돈을 내놓으라고 하겠어?”자뻑에 심취한 강백만의 턱은 곧 하늘을 찌를 것 같았다.이때 하영은 현관문에 기대어 강씨네 식구들의 구역질 나는 얼굴을 지켜보고 있었다.‘저 인간들은 정말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줄 아나 보네.’한참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갑자기 어디선가 트럭 한 대가 나타나더니 하영의 집 앞에 멈춰 섰다.트럭에는 진흙투성이 감자와 고구마가 가득 쌓여 있었다.“이봐!”강백만은 트럭을 향해 소리쳤다.“물건들은 우리 집으로 옮기면 돼! 공간이 매우 넓으니까!”하영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지금 저 물건들을 전부 별장에 두겠다고?’아니나 다를까
지영은 끊임없이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고, 하영은 그런 그녀를 안아 주며, 의아함을 품고 식당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방금 지영 언니는 분명 어떤 남자를 발견하고 이렇게 변한 것 같았는데, 그 남자는 어느새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지영이 예전에도 다른 남자를 보고 발작을 일으킨 적이 있으니 하영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그때 멀지 않은 차 안에서 정주원이 싸늘한 눈빛으로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지영을 응시했다.지영의 곁에 있는 여자도 아는 얼굴이었다.‘예전에 정유준이 데리고 다니던 여자였지.’정주원은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걸고 안경을 벗더니, 여유로운 동작으로 안경을 닦기 시작했다.‘저 여자가 지금까지 살아있을 줄은 몰랐네…….’잠시 후, 정주원이 다시 안경을 썼고, 그때 곁에 있던 퓨대폰이 울렸다.힐끗 쳐다보니 양다인한테서 걸려 온 전화인 것을 발견하고, 천천히 손을 뻗어 전화를 받자, 전화기 너머로 양다인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정주원 씨, 이따 저녁에 시간 괜찮으시면 저랑 술 한잔하실래요?”그 말에 정주원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기 시작했다.“그럼요. 주소 보내면 내가 그쪽으로 갈게요.”……7시 30분.정주원은 약속대로 양다인과 한 술집에서 만났고, 주원이 입가에 우아한 미소를 띤 채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오래 기다렸어요?”양다인도 고개를 들어 주원을 발견하고 환히 웃었다.“아뇨, 저도 금방 도착했어요.”주원은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쳐 놓고는 자리에 앉았다.“제법 좋은 흥취를 갖고 있네요. 아쉽게도 나는 술을 잘 못 마셔서 괜히 양다인 씨 흥을 깰까 봐 걱정이네요.”주원의 말에 양다인의 눈가에 기쁨이 스쳤다.‘술을 잘 못 마시면, 내가 원하는 대로 되겠네!’양다인의 목적은 두 가지가 있었다.하나는 지난번에 정유준 얘기를 꺼냈을 때 표정이 좋지 않았던 것이고, 두 번째는 이참에 정주원을 침대에 쓰러뜨리는 것이다.요즘 소 노인이 이것저것 그녀의 잘못에 대해 트집만 잡지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할 생각이 없었다
지영은 정 노인의 눈에 들었고, 그녀를 세 번째 아내로 맞이했지만, 아직 나이가 어렸던 그녀는 정 노인을 좋아하지 않았다.그리고 정유준이 10살이 되던 해부터 정 노인에 대한 미움이 더욱 커지기 시작하면서, 그녀랑 나이가 비슷한 주원을 유혹하기 시작했다고 한다.그때 정주원의 나이는 29살이었는데, 마침 혈기 왕성한 나이였기에 청순하면서도 요염한 여인의 유혹을 도무지 뿌리칠 수 없었다.유혹에 넘어간 정주원의 가장 큰 실수는, 바로 정유준의 어머니와 몇 번 잠자리를 함께한 것이다.주원은 그 사실을 숨길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든 사실을 정 노인에게 알렸고, 정 노인은 크게 화를 내며 주원을 해외로 내쫓았는데, 그게 15년이나 된 것이다.말을 마친 주원은 괴로운 표정으로 눈을 들어 양다인을 바라보았다.“다인 씨도 내가 더럽게 느껴져요?”양다인은 조금 충격을 받긴 했지만, 주원의 모습에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아니요. 그건 그 여자의 잘못이지, 주원 씨 잘못이 아니잖아요.”주원은 다시 고개를 파묻고 약간 흐느낌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고마워요.”양다인은 주원이 이렇게 큰 비밀을 터놓은 것에 대해 기뻐하면서도, 한편 다음 진도를 빼지 않는 주원에게 약간 실망하기도 했다.주원에게는 누군가 그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만약 내가 도와줄 수 있다면? 주원 씨가 나한테 완전 마음을 열어 주지 않을까?’거기까지 생각에 미친 양다인의 눈빛이 사납게 변하기 시작했다.‘그렇다면 내가 직접 정주원의 마음을 열고, 완전히 나를 받아들이게 만들어 버릴 거야!’아크로빌.하영은 세 녀석을 씻겨 주고 침대에 눕혔다.세준과 세희는 빠르게 꿈나라로 향했지만, 희민은 아직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희민은 저녁에 할머니가 이성을 잃은 모습에 이상함을 느끼며 그 모습이 마음속에서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할머니는 정주원을 보고 난 뒤 겁에 질려하셨어. 그리고 정주원과 아버지 사이에 뭔가 사연이 있어 보였는데. 그리고, 할머니는 왜 본가로 돌아가 할아버지와
하영은 망연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바라봤다.‘정확히 내일 오후 몇 시인지 얘기해 주지 않았잖아…….’이미 잠에서 깬 하영은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아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강씨네 식구들 때문에 엉망이 된 거실이 눈에 들어오자 하영은 머리를 꾹꾹 누르며 주방으로 들어갔다.주방 문을 열기도 전에 어디선가 구역질이 날 것 같은 냄새가 풍겨 왔고, 그녀가 주방 문을 활짝 열었을 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멍해지고 말았다.주방엔 닭 8마리가 갇혀 있었다.바닥엔 온통 닭똥으로 가득했고, 닭들이 가스레인지 위로 마구 뛰어올라가 새하얀 가스레인지는 어느새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변했다.손잡이를 꽉 잡고 있지 않았다면 진작에 뒤로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아직 시기가 이른 것만 아니면 저런 인간들이 집에서 행패를 부리도록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하영은 주방 문을 닫아 버리고 2층에 올라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이제 계획을 시작해야겠어.’7시 30분.하영은 세 녀석들을 깨우기 시작했다.세희는 아직도 졸린지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하고, 머리를 흔들며 응석을 부리기 시작했다.“엄마, 어젯밤 배탈 때문에 늦게 잠들었는데, 좀 더 자고 싶어요…….”세희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세준과 희민도 한마디씩 거들었다.“엄마, 저도 배탈 났어요.”“엄마, 저도…….”그러자 하영이 걱정하며 묻기 시작했다.“심각한 거야? 엄마랑 같이 병원에 갈까?”그러자 세 녀석들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고, 세준이 입을 열었다.“엄마, 우리는 걱정 안 해도 돼요. 유산균을 먹으니 많이 좋아졌으니까, 출근해도 괜찮아요. 우리는 집에서 하루만 쉬면 괜찮을 것 같아요.”하영은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정말 괜찮겠어?”“그럼요. 우리끼리 늘 집에 있었잖아요. 아래층에 경호원 아저씨들도 있는데요 뭘.”“그래, 그럼 무슨 일 있으면 꼭 엄마한테 전화해. 먹을 건 엄마가 집으로 배달시켜 줄게.”“엄마, 제가 난원에 있는 도우미 아줌마한테 부탁해도 돼요.”하영이 생각해
세희는 입을 삐죽이며 입을 열었다.“우리가 가든 안 가든 무슨 상관이에요?”희민이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강미정의 귀에 세희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한참 쳐다보던 미정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귀여운 꼬마야, 이 집에 금방 온 것 같은데 내가 여기 주인으로서 맛있는 걸 사줄게. 벌써 점심시간이네.”미정의 말을 들은 세준과 세희는 하마터면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대체 누가 주인이라는 거야?’희민은 원래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라, 강미정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세준과 세희는 그 모습에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아줌마가 희민이 오빠를 데리고 나가는 건 안심할 수 없어요! 저도 갈래요!”세희가 잔뜩 경계심을 갖추고 미정을 바라보자, 애초에 두 짐 덩이를 데려갈 생각이 없었던 미정은 입을 삐죽거렸다.‘어차피 밥값을 낼 생각이 없었는데, 상관없지 뭐!’강씨네 식구들은 준비를 마친 뒤, 세 녀석들을 데리고 레스토랑으로 향했다.레스토랑에 도착한 강씨네 식구들은 아주 사치를 부리며 비싼 음식들로 가득 주문했고, 세준과 세희는 의아한 눈빛으로 미정을 바라보았다.‘갑자기 어디서 돈이라도 생겼나?’미정은 아주 친절하게 희민을 보며 입을 열었다.“꼬마야, 그냥 그렇게 있지 말고 어서 먹어! 정말 비싼 거야!”희민은 어쩔 수 없이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집으려는데, 유국진이 먼저 반찬을 집어 그릇에 담아 줬다.미간을 찌푸린 채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희민은 경직된 손으로 차마 젓가락을 움직이지 못했다.세준은 친절한 척 애쓰고 있는 강씨네 식구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희민이는 모르는 사람이 집어준 음식은 안 먹어요.”‘먹을 게 있는 것만으로 고맙게 생각해야지, 까다롭기는. 부잣집 아들래미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혼났을 거다!’그런데 뜻밖에도 강백만이 먼저 찬물을 끼얹듯 한 마디 뱉었다.“더러운 버릇이네! 우리 아빠가 음식을 집어줬으면 영광인 줄 알아야지!”미정은 그런 강백만을 얼른 제지했다.“입 다물고, 밥이나 먹어.”강백만은
세준은 일부로 목소리를 높여 세희를 향해 입을 열었다.“세희야, 저거 보여? 지난번에 어떤 사람이 저기서 1억 원에 당첨된 거 기억나?”세준이 세희의 손을 꼬집으며 눈짓을 하자, 세희도 이내 그 뜻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기억나!”두 사람의 대화에 미정은 귀를 쫑긋 세우더니, 1억 원이라는 숫자에 바로 시선을 세준이 얘기한 즉석 복권 자판기로 돌렸다.‘이 즉석 복권으로 1억 원에 당첨될 수 있다고?’미정이 미심쩍어할 때, 곁에 있던 강백만이 한마디 거들었다.“나도 알아! 내 친구도 해본 적 있는데, 몇백만 원 정도 걸렸었거든.”강백만의 말에 미정은 바로 의심을 거뒀고, 세준과 세희는 뜻하지 않게 강백만의 도움을 받게 된 심이니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희민도 동생들이 몰래 웃음을 터뜨리자, 그도 따라서 입꼬리를 올렸다.강미정이 즉석 복권 자판기 앞에서 한참 이것저것 연구하다가 천 원짜리 복권 몇 장을 구매하자, 세준이 옆에서 한 마디 끼어들었다.“그 정도로 사서 소용없을걸요? 게다가 천 원짜리로 천만 원은 당첨될 수 없을 거예요.”그 말에 미정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럼 어떻게 사야 당첨될 수 있는데?”세준은 잠시 생각에 잠긴 척하더니,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열었다“인터넷에서 어떤 어플을 본 적 있는데요, 이십만 원어치 사면 이백만 원이 당첨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강씨네 식구들의 눈이 갑자기 번쩍 뜨였다.‘이십만 원에 이백만 원이 당첨되면, 이백만 원이면 이천만 원이잖아!’참기 힘든 유혹이었지만, 강미정은 그래도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그 어플 이름이 뭔데? 그럼 네가 먼저 해보는 건 어때?”“알았어요!”세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가방에서 늘 갖고 다니던 노트북을 꺼내 어플을 찾아 애플 워치로 스캔하여 20만 원어치 복권을 구매했다.그러자 화면에 빠르게 복권 이미지가 떴고, 까만 부분을 클릭하면 당첨금을 확인할 수 있었다.세준이 하나씩 전부 클릭하고 나니 화면에 “270만
강백만은 방금 엄마가 입금한 돈이 전 재산이었기에 도무지 화를 억누를 수 없어, 세준을 보며 입을 열었다.“지금 그게 무슨 뜻이야? 한 마디로 지금 우리한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거야?”강백만의 말에 세준이 되물었다.“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뇨? 방금 540만 원 당첨되셨잖아요. 운이 나쁜 게 제 탓은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너!”하자터면 숨이 넘어갈 뻔한 강미정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세준을 가리켰다.“너 이 사기꾼 자식!”유국진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제자리에 서서 그대로 굳어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세준은 미소를 거두고 싸늘한 표정으로 강씨네 식구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이 게임은 우리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아줌마가 먼저 제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놀겠다고 했잖아요. 이런 복권은 백 퍼센트가 아니잖아요. 어른들이 그런 도리도 몰라요?”강미정의 귀에는 이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고, 그저 무작정 목청을 빼 들고 울부짖기 시작했다.“사기꾼아! 어린 나이에 벌써 나한테 사기를 쳐? 다들 뭐라고 얘기 좀 해 봐요!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지나가던 행인들은 어른 여자가 꼬마를 가리키며 사기꾼이라고 외치는 것을 보고, 경멸의 시선을 던져왔다.“본인이 놀겠다고 했으면서 어린아이 탓을 하다니, 저게 무슨 부모야?”“이제야 겨우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데, 사기꾼이란 게 말이 돼요?”“그러게 말이에요. 스스로 도박에 빠졌으면서 아이를 탓하다니, 이런 사람은 정말 처음 봐요.”“…….”주변에서 수군대는 소리에 강백만은 화가 치밀어 올라 사람들 앞으로 다가가며 소리를 질렀다.“당신들이 뭘 안다고 그래? 이 자식은 처음부터 우리와 맞먹으려 들었는데, 분명 사기를 친 게 틀림없어!”구경꾼들도 도무지 참을 수 없었는지 너도나도 한마디씩 던졌다.“정말 뻔뻔하네요. 세상에 사기꾼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린애한테 사기꾼이라고 하면 누가 믿겠어요?”“맞아요. 그렇게 못 믿겠으면 차라리 경찰서에 가서 따져보면 되잖아요. 왜 우리한테
시현은 아파서 이를 악물었다.“알았어, 알았어. 공주님 제발 살려주세요!!”세희는 그제야 흐뭇하게 손을 거두었다.“참, 지난번에 말한 그 사건 말이에요, 언제 해결하러 갈 거예요?”“시간이 좀 더 지나면.” 시현이 말했다. “네 몸은 아직 완전히 나아지지 않았으니까, 지금 계속 바쁘게 움직이면 안 돼. 만약에 저쪽에도 이런 악독한 귀신이 있다면, 너 또 상처를 입을지 몰라. 난 이미 죄책감 때문에 너와 결혼을 해서 평생 챙겨주고 싶으니까, 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 정말 방법이 없어.”세희는 웃으며 말했다.“내가 언제 시현 오빠와 결혼한다고 했어요?”“쳇.” 시현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내가 뭐가 어때서? 나도 어깨가 넓고 근육이 있는 미남이라고! 인기가 얼마나 많은데.”세희는 말문이 막혔다.‘정말 뻔뻔하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칭찬하다니.’세희는 숨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시현 오빠.”“응?”“내가 지금 귀신을 잡는 일을 종사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난 사실 아주 좋은 신붓감은 아니에요. 눈치 없는 귀신들이 가끔 날 찾아와서 귀찮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난 인우와 반대로, 팔자에 음기가 가득 찼거든요.”“그러면 어떻게 되는데?”“7월 중순이 되면 많은 귀신들이 날 찾아올 거예요. 그럼 난 일이 잘 안 풀리거나 심지어 다칠 수도 있거든요.”“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만약 우리가 함께 한다면, 그 귀신들은 심지어 시현 오빠를 귀찮게 할 거예요.”“그래서, 이것 때문에 네가 최고의 신붓감이 아니란 거야?” 시현은 말을 마치고 웃으며 말했다. “이까짓 일로 내가 물러설 수 있을 것 같아? 세희야, 너도 날 너무 얕본 것 같아.”“그때 가면 나 때문에 모든 일이 잘 안 풀릴 텐데, 그게 두렵지도 않아요?” 세희는 시현에게 물었다.시현은 입술을 구부리고 웃었다.“넌 우빈이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우빈에게 영향을 미치는 건 하나도 두렵지 않은 거야? 세희야, 넌 날 뭘로 보고.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난 두렵지
시현과 인우는 비록 귀신을 보지 못했지만, 지금 검은 연기가 자신의 앞에서 천천히 흩어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인우는 세희를 바라보며 물었다.“누나, 지금 어떻게 된 일이에요?”세희는 몸을 돌려 말했다.“그 귀신은 환생하고 싶지 않아서 이미 죽었어.”“귀신이 죽었다고?” 시현이 물었다.“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뜻이야?”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방을 바라보았다.“캐리 아저씨, 이제 그 여섯 명의 귀신을 좀 잡아주세요.”캐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불과 몇 분 만에 겁에 질린 그 귀신들을 세희의 앞으로 데려왔다.세희는 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당신들은 그 처녀귀신과 같은 선택을 할 건가요? 아니면 나와 같이 서낭당에 갈 건가요?”“서낭당에 갈래요!”“우리는 그 여자의 협박을 받아서 여기에 갇힌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벌써 떠났을 텐데!”“죽어도 우리를 괴롭히려 하다니!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이 귀신들은 그 처녀귀신이 사라진 후, 불평하기 시작했다.세희는 그들의 원망을 듣고, 마음속에 분노가 치솟았다.“지금 그 처녀귀신을 비난할 면목이 있는 거예요?!”세희는 노발대발하며 말했다.“당신들을 죽인 것은 그 여자의 잘못일지라도. 당신들은 자신에게 그 어떤 책임도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만약 당신들이 그 여자를 괴롭히지 않았다면, 오늘처럼 귀신으로 되어 이곳에 갇히지 않았겠죠!”“풉.” 한 여자 귀신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고요? 그 여자는 늘 자신의 성적을 가지고 남을 비웃었어요. 그러지만 않았어도 우리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세희는 이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남의 성적이 우수해서, 당신들은 또 그 사람을 따라잡을 수 없어서, 그걸 자랑이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정말 불쌍하네요! 이 세상에 당신들 같은 질투심이 강한 쓰레기가 없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안심해요, 당신들은 다음 생에도 이번 생에 지은 죗값을 치러야 하니까!”귀신들은 세희가 한 말에 화가 났지만, 캐리와 인우 때문에 화가
“말이 쉽지!” 처녀귀신은 화가 나서 말했다.“날 죽인 그 사람들은 비록 귀신이 되었지만, 나도 그들이 환생하지 못하게 붙잡아둬야 한단 말이에요!”세희는 눈살을 찌푸렸다.“그 여섯 명의 학생들이 당신을 죽인 사람이었어요?”“그렇지 않으면 내가 왜 그들을 죽였을 것 같아요??”“그 사람들 찾아 복수를 한 이상, 이제 그만 그들을 놓아줘요. 이렇게 자신을 괴롭혀가며 그들을 붙잡고 있을 필요가 더 있을까요?”“그럴 순 없어요! 이렇게 쉽게 환생을 하라고 하는 건 너무 말이 안 되니까!!”처녀귀신이 노발대발했다.세희는 웃었다.“당신은 집념이 너무 커서 줄곧 이곳에 갇혀 있는 거예요. 영원히 자신의 고통으로 자신을 괴롭히고 있잖아요. 만약 내려가서 벌을 받고 환생하여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난다면, 이것 또한 자신의 과거를 내려놓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니겠어요?”“이렇게까지 날 가르칠 필요 없어요!”처녀귀신이 말했다.“오늘 당신들이 죽든지, 아니면 내가 죽든지, 둘 중 하나 선택하자고요!”말을 마치자, 처녀귀신은 세희를 향해 공격하려 했다.세희는 바로 인우를 부르려고 했고, 이때 갑자기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빠른 속도로 달려온 캐리는 즉시 그 처녀귀신을 먼 곳으로 밀어냈다.“좋은 말로 타일러도 듣지 않고, 심지어 세희에게 손을 대려고 하다니. 오늘 사라질 준비를 하는 게 좋겠어!”캐리는 차가운 목소리로 붉은 옷을 입은 처녀귀신에게 말했다.“그게 뭐가 무섭다고.” 처녀귀신이 소리를 질렀다. “나도 이젠 지긋지긋해요! 이 더없이 더러운 세상! 내 부모님은 내가 학교폭력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들의 돈을 받고 바로 이 일이 없던 걸로 하자고 했어요. 내 오빠는 심지어 그들이 부자라는 것을 알고, 그들을 친구로 여겼고요! 환생할 게 뭐가 더 있겠어요? 환생해도 이렇게 더럽고 추악한 세상을 마주해야 하니까, 차라리 날 죽여요. 더 이상 이 징그러운 세상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처녀귀신의 말을 듣고, 캐리는 바로 손을 써서
세희가 이렇게 말하자, 세준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저녁 무렵, 인우는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세희가 이미 집에 있는 것을 보았고, 무척 흥분해하며 달려갔다.“누나, 돌아왔어요?” 인우는 싱글벙글 웃으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어때요, 다 나은 거예요?”세희는 의미심장하게 인우를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인우야, 오늘 저녁에 나 좀 도와줘.”“그래요.” 인우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학교에 가는 거 맞죠?”세희는 의아하게 인우를 바라보았다.“뭐야? 너 이제 무섭지도 않는 거야?”인우는 미소를 천천히 거두었다.“누나, 귀신은 무섭지만, 난 누나가 더 이상 그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요. 그때 누나가 그렇게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난 그날 정말 학교로 달려가서 그 귀신들을 죽이고 싶었어요. 그러나 시현 형이 누나의 생각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억지로 참고 가지 않았던 거예요.”세희는 뿌듯해하며 인우의 머리를 어루만졌다.“우리 인우 다 컸네. 누나를 걱정할 줄 다 알고.”인우는 세희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누나, 난 줄곧 누나를 걱정하고 있었어요. 다음에 이런 위험한 일을 하러 간다면, 꼭 나 데리고 가면 안 돼요? 난 누나를 지켜주고 싶어요.”“그래! 저녁에 우리 가족들 함께 밥을 먹은 후에 바로 출발하자!”“좋아요!”저녁에 하영과 유준 그리고 희민이 돌아왔다. 세희가 이미 퇴원한 것을 보고, 세 사람은 기뻐해하며 그녀를 에워싸고 수다를 떨었다.저녁을 먹은 다음, 하영은 세희를 데리고 위층에 가서 간단하게 몸을 씻어주고서야 세희를 보냈다.문을 나서자마자, 세희는 시현이 그의 포르쉐와 함께 집 앞 정원에 있는 것을 보았다.세희와 인우는 의아함을 느끼며 시현을 쳐다보았다.세희가 먼저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에요?”시현은 별장을 바라보았다.“세준이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나한테 연락했지 뭐. 네 기사 되어 달라고.”“우리 집에 기사가 없는 것도 아닌데. 그러면 시현 오빠가 너
“그래, 우빈아, 넌 15년 동안 세희를 좋아했고, 또 세희를 위해 많은 것을 바쳤지. 하지만 그거 알아? 세희는 아주 이성적인 사람이야. 세희가 만약 무슨 일을 알고 싶다면, 바로 감정 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호흡이 흐트러진 우빈은 시현을 바라보며 다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알아요.” 우빈이 대답했다.“세희는 그 누구보다도 감성적이고 또 이성적이죠.”“그럼 만약 세희가 정말 날 선택한다면, 넌 어쩔 계획이야?”“그런 건 없어요.”우빈은 솔직하게 말했다.“내가 말했잖아요, 난 세희의 모든 선택을 존중할 거라고. 마찬가지로 다른 걱정 할 필요 없어요. 세희에게 거절을 당했다고 복수를 할 정도는 아니니까요.”시현은 계속 물었다.“그러니까 내가 세희와 함께 하더라도 넌 세희와 계속 친구를 하겠다는 말이야?”우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나와 세희는 줄곧 친구였어요. 우리 두 사람이 사귀지 않아도, 앞으로 여전히 사이가 좋은 친구예요. 고 과장님, 세희를 좋아해도 되지만, 내가 세희와 계속 친구로 되는 것을 막을 순 없어요.”시현은 갑자기 웃었다.“그럼 됐어!”우빈은 시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시현은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서 버튼을 눌렀다.“난 내가 세희와 사귀면, 넌 불편해서 세희와 연락 끊을 줄 알았거든.”우빈은 말문이 막혔다.“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있어. 이제 세희를 포기하자고. 넌 정말 세희가 필요한 것 같으니까...”말을 하다 시현은 우빈을 힐끗 바라보았다.“네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들은 하지 않겠어. 아무튼 후에 생각해 봤는데, 만약 널 향한 내 개인적인 생각 때문에 세희를 포기한다면, 그건 널 무시하는 것과 같잖아.”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시현은 안으로 들어갔고 우빈도 뒤를 따랐다.두 사람이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서자, 우빈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그 결정은 틀리지 않았어요. 난 확실히 가족을 모두 잃었지만, 그래도 피와 살이 있는 사람이에요. 이 세상에 나 혼자만이 이런 상황이 아니잖아
시현은 말을 이어받으며 오른손을 들었다.“그때 내 오른손에 피가 가득 묻은 거 있지? 심지어 의사가 네 등의 썩은 살을 모두 베어낸 것을 직접 봤는데, 며칠째 잠을 못 잤어.”“에이, 그건 간단하죠!” 세희는 히죽거리며 말했다.“수면제 처방받으면 편안하게 잘 수 있지 않겠어요?”시현은 웃으며 침대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세희야, 날 원망하고 싶지 않아?”“원망이요?” 세희는 시현의 뜻을 잘 몰랐다.“내가 왜요?”시현은 콧등을 긁적였다.“내가 널 데리고 그곳에 가지 않았다면, 너도 이렇게 다치지 않았을 거야.”세희는 눈을 부라리며 시현을 바라보았다.“그건 시현 오빠 탓이 아니에요. 그 귀신들이 겁도 없이 나한테 덤빈 것뿐이니까요. 다 회복되면 그 귀신들 전부 잡아버릴 거예요!”“또 그곳에 가려고?” 시현은 경악하며 물었다.“그럼요!” 세희는 손을 내밀었다.“일곱 명의 귀신을 전부 다 데려갈 수 있다면, 염라대왕님은 좋다고 박수를 치실지도 몰라요.”시현은 세희의 얼굴에 나타난 즐거운 미소를 애틋하게 바라보았다.“난 오히려 네가 날 욕하면서 분풀이를 했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홀가분한 말투로 말하는 거 보니까 마음이 너무 아파.”“그럼 너무 재미없죠! 난 시현 오빠 돈 뜯어먹는 게 더 좋은 거 같은데? 내가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으면, 날 데리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오케이!” 시현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먹고 싶은 거 다 사줄게.”세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참, 세준 오빠가 그러던데, 미정 할머니를 찾아갔다면서요?”시현은 숨김없이 대답했다.“응, 가서 어떻게 해야 널 보호할 수 있을지에 대해 여쭤봤어.”“하하하.” 세희는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 “날 보호한다고요?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죠? 그리고 시현 오빠는 귀신도 안 보이는데, 어떻게 귀신과 싸우려는 거예요? 정의감과 용기로 귀신을 제압하려고요?”“내가 만약 내 정의감을 이용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엔 귀신이 없을 거야?”세희는 웃으며 말했다.“그냥
시현은 세준 그들에게 돌아가서 쉬라고 한 다음, 혼자 의자에 앉아 멀리서 세희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아주 평온하게 잠을 자고 있었고, 숨을 고르게 쉬고 있었다.이때 간호사가 걸어왔다. 시현은 그녀를 보며 얼른 일어나 물었다.“선생님.”간호사는 그를 쳐다보았다.“무슨 일이시죠?”“세희는 언제 중환자실에서 나올 수 있는 거죠?”“이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요 며칠 더 관찰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아가씨는 제가 본 여자아이들 중에서 가장 엄중한 상처를 입으신 환자라서요. 잘못하면 흉터가 남을 텐데... 어휴...”말이 끝나자, 간호사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시현은 그녀의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또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다.‘이번 생은 철저히 세희에게 빚진 셈이네.’사흘 후, 세희는 중환자실에서 나왔고, 이 일을 알게 된 하영과 유준도 얼른 병원에 찾아왔다.세희가 침대에 엎드려 멍을 때리는 것을 보며, 두 사람은 가슴이 아팠다.하영은 허리를 굽혀 세희의 머리를 어루만졌다.“세희야, 미안해. 네 오빠들이 아침에 금방 이 일을 알려줘서, 엄마와 아빠도 이제야 달려온 거야.”세희는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괜찮아요, 엄마. 이거 봐요, 나 아직 멀쩡하잖아요?”하영은 눈시울이 붉어졌다.“걱정 마. 무슨 방법을 써서더라도 네 등의 흉터를 치료할 테니까.”“사실 난 이런 거 신경 안 써요. 등일 뿐이니, 평소에 남에게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나 자신도 볼 수 없으니까, 심리적인 스트레스도 없어요.”“네가 꾸미길 좋아한다는 거, 여기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걸?” 세준은 벽에 기대며 말했다.세희는 고개를 돌려 세준을 보려 했지만, 상처가 땅기는 바람에 아파서 이를 악물었다.세준은 마음이 아파서 눈살을 찌푸렸다.“좀 움직이지 마. 나도 안 비웃을게.”유준은 세준을 바라보았다.“세준아, 너희들은 외국에 아는 사람이 많으니까,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좋은 성형과 의사를 찾아. 세희의 등에 절대로 흉터 남지 않게.”세준은
두려움과 걱정이 밀려오자, 시현은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눈을 뜨고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난 세희가 하는 일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데. 그럼 세희를 보호하려면 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지?’생각하다 시현은 핸드폰을 꺼내 세준에게 톡을 보냈다.[그 할머니 지금 어느 호텔에 계시는 거지?]얼마 지나지 않아, 세준은 시현에게 나미정이 지내고 있는 호텔 주소와 방번호를 보냈다.[고마워, 세준아.]세준은 이 문자를 보며 차갑게 웃었다.[세희의 일, 난 이대로 넘어가지 않을 거야.][날 때리고 싶든, 죽이고 싶든 네 마음대로 해. 다 내 잘못이니 나도 변명할 말이 없어.]이 문자를 보낸 후, 더 이상 답장이 들어오지 않았다.시현도 더 이상 아무것도 보내지 않고, 차에 시동을 걸어 호텔로 갔다.30분 후, 시현은 나미정이 있는 룸 앞에 도착했는데, 잠시 심사숙고한 다음,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곧 안에서 나미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만 기다려.”문을 열자, 시현이 문밖에 서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약간 의아해했다.“네가 바로 병원에 있었던 그 총각인가?”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할머니. 저와 잠깐 얘기를 좀 나누시면 안 될까요?”“그래.” 나미정은 몸을 비키며 말했다. “들어와서 말하자꾸나.”시현은 들어가서 소파에 앉았고, 나미정은 그의 옆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무슨 일로 날 찾는 거지?”시현은 긴장이 돼서 두 손을 비볐다.“할머니, 저도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저처럼 평범한 사람은 대체 어떻게 해야 세희의 안전을 보호할 수 있을까요?”“평범한 사람이라...”나미정은 웃기 시작했다.“왜, 네가 보기에 우리와 같은 무당은 평범하지 않은 건가?”시현은 멈칫하더니 얼른 설명했다.“그런 뜻이 아니에요. 아무튼 저희보다 강하고 특수한 능력이 있으시잖아요.”“그것도 다 하늘이 내려준 신기일 뿐이지.”나미정이 말했다.“그러나 우리도 평범한 사람들이야. 밥을 먹어야 하고, 또 때가 되면 죽는 법이니
세희는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부적은 비록 뚜렷하지는 않지만, 그녀는 여전히 강렬한 양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세희는 숨을 들이마신 다음 천천히 일어섰다. 그 순간, 옆에서 놀던 그 귀신들은 고개를 홱 돌리더니 모두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들의 시선을 알아챈 세희도 눈을 돌려 귀신들을 보았다.‘또 이런 느낌이야! 이곳을 못 나가게 하는 그런 느낌!’세희는 밀려오는 공포를 참으며 용기를 내어 문 앞으로 걸어갔다.문과 가까워질수록 주위의 음기는 더욱 강렬해졌다. 심지어 세희는 자신의 영혼이 억압된 느낌을 받았다.“누나, 무서워하지 마요!!”“세희야! 용기를 내서 그곳에서 나와! 그 귀신들은 널 건드리지도, 널 다치게 하지도 못할 거야!”“누나! 나랑 형들이랑 그리고 고 과장님이 여기서 누나를 기다리고 있어요!”인우와 나미정의 목소리를 듣고, 세희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그녀는 이를 악물며 가깝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다가갈 수 없는 문을 향해 계속 나아갔다.세희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고, 부적이 그려진 손을 들어 다시 시도했다.이번에 그 귀신들은 섬뜩하게 웃기 시작했다. 세희가 문손잡이에 손을 얹으려 하자, 그들은 재빨리 앞으로 돌진했다.이때, 매몰찬 음기가 덮쳐왔고, 세희는 부적이 있는 그 손을 들고 돌아섰다.그 귀신들은 하마터면 세희의 영혼과 닿을 뻔했다. 그러나 세희의 손에서 나는 강렬한 양기가 서려 있는 부적을 감지한 그들은 표정이 돌변했다.세희는 뒤로 물러섰고, 등이 문에 닿는 순간, 재빨리 몸을 돌려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문을 연 후, 그녀는 즉시 뛰쳐나갔다.이때, 줄곧 병상에 누워있던 세희는 눈을 번쩍 뜨더니 숨을 들이마셨다.세희가 깨어나는 것을 보고, 인우는 감격에 겨워 소리쳤다.“누나! 왜 이제야 깨어난 거예요!!”그러나 세희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눈을 천천히 감았다.인우는 완전히 멍해지더니 당황해진 표정으로 나미정을 바라보았다.나미정은 아주 침착하게 대답했다.“별일 아니야, 피곤해서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