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욱을 굳게 믿고 지나간 모든 원한을 내려놓고 그와 함께 여생을 행복하게 지내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이러한 방식으로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리라 생각지도 못했다.아니, 어쩌면 임재욱의 인생에 있어서 유시아는 평생 조연밖에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자기의 처지가 하도 처참해서인지 유시아는 그만 참지 못하고 실소해 버렸다.‘역시나 하느님은 날 봐주려고 한 적이 없어.’‘도대체 얼마나 더 행복해지려고 이러한 시련을 주시는 건지.’임재욱이 그녀에게 준 신혼 선물은 참으로 특수했다.그리고 문득 정유라가 해줬던 말도 떠올랐다.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여자라고 했던 깊은 뜻이 담겨 있던 그 말....그렇게 얼마나 지났는지, 별장 출입문이 그제야 안에서 밖으로 열리기 시작했다.임재욱은 자기 차에 올랐고 습관대로 차 조명을 켰다.순간 눈부신 하얀 불빛에 유난히 가냘파 보이는 여인의 그림자가 비쳤다.‘유시아?’임재욱은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고 바로 차에서 내렸다.“시아야...”유시아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어 그녀의 팔을 살며시 잡아당겼는데, 작은 손은 더없이 차가운 것이 온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다급한 마음에 다시 유시아의 이마를 만져 보았는데, 열이나 얼굴은 좀 뜨거웠다.“시아야, 네가 왜... 네가 왜 여기에 있어?”“나... 안 들어갔어요. 들어갈 자격이 없는 걸 알고 단 한 걸음도 들어가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렇게 밖에서 재욱 씨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그를 향해 웃었다.“재욱 씨, 우리 집이 싫어요? 들어오기 그렇게 싫어요?”이때 별장 2층에서 그녀가 지냈던 침실 조명이 밝게 켜졌다.누군가가 안에서 커튼을 거두었고 잠옷을 입은 채 머리까지 풀어 헤쳤다.젊은 여자가 지금 창문 앞에 서서 조용히 유시아를 내려다보고 있다.“재욱 씨, 왜 집에 오지 않으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 결혼했어요. 결혼하고 우리 둘만이 집이 생겼는데, 왜 오지 않으려고 하는 거죠? 이 시간까지 여
“시아야.”임재욱은 그녀의 어깨를 꼭 잡았다.“이제 막 집에 가려고 했었어...”어두운 불빛 아래서 유시아는 참담하게 웃었다.“재욱 씨, 여기가 재욱 씨 집이잖아요. 아니에요?”그가 사랑하는 신서현이 이곳에 있으므로 그의 마음도 이곳에 있는 격이다.“난 단 한 번도 널 버리려고 한 적이 없어. 시아야, 제발 날 좀 믿어줘. 내가 여기 온 이유는 시연이가 자기 언니를 너무 보고 싶어 해서 이곳에서 좀 지내겠다고 해서 그런 거야. 신씨 가문 사람들을 내가 챙기지 않으면 다들 죽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야.”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유시아에게 이성적으로 접근할 예정이었다.“신씨 가문 사람들뿐만 아니라 소현우 어머니까지 내가 챙기고 있잖아. 가장 좋은 병원으로 모셔다드리고 가장 훌륭한 의사까지 안배해 드리고 가장 좋은 약도 써 드리고 있잖아...”“어머님에 대해서 내가 언제 재욱 씨 속인 적 있어요?”반문하면서 유시아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그의 옷깃을 잡았다.눈물은 또다시 걷잡을 수 없이 흘리기 시작했다.“어머님께 그동안 어떻게 했는지 잘 알고 있어요. 근데 재욱 씨가 나한테 한 일은 도가 지나치잖아요. 남운대에서 돌아온 뒤로 바보처럼 재욱 씨의 모든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고 그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내가 어떤 기분이었을 것 같아요? 너무 아프고 비참해요. 만약 엉겁결에 이곳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면, 평생 이렇게 속일 생각이었던 거예요? 그리고 난 여전히 바보처럼 ‘조심해서 일찍 들어와요’라고 하겠죠?”임재욱은 이를 악물고 그녀를 한참 동안 지그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널 속인 건 널 위해서 그런 거야. 그 사람들한테 영향받지 말라고.”신서현, 이 이름 석 자는 유시아에게 있어서 악몽이자 벗어날 수 없는 그늘이다.만약 가능하다면 임재욱은 그녀가 평생 이 이름을 떠올리지 말았으면 한다.“그렇군요. 고마워요.”유시아는 말을 마치고 손을 내밀어 차 문을 열었다.차가운 밤바람이 차 안으로 들어오자, 임재욱은 그제
역시나 운명은 두 사람과 아주 큰 장난을 쓰고 있었다.믿음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세워지지 않고 아이러니하게도 어렵게 세워진 믿음은 와르르 무너지기 여간 쉽지 않다.적어도 지금으로서 유시아는 다시 그를 쉽게 믿지 않을 것이다.임재욱은 침대 머리에 가만히 기대어 서서히 초점을 흩트렸다.보고 있는 것은 없으나 마음속은 꽉 채워진 채, 때론 또 엄청 텅텅 비어있는 것처럼 느껴졌다.유시아가 잠을 설칠까 봐 임재욱은 홈닥터에게 수면제 성분이 들어가 있는 약도 좀 첨부해 달라고 부탁했다.하여 유시아는 밤새 아주 잠을 깊이 잤다.다음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어느새 8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밤새 꿈도 꾸지 않고 푹 잔 것이 컨디션도 제법 좋아진 것만 같았다.고개를 돌려보니 자기를 마주한 채 자는 임재욱이 보였다.아침 햇살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임재욱의 얼굴에 비치자, 그의 이목구비는 더더욱 또렷하게 보였고 천금으로 살 수 없는 예술품과 같았다.유시아의 허리를 꼭 안고 있는 그는 마치 그녀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손을 내밀어 그의 팔을 떼려고 했으나 결국 인기척에 그가 깨나고 말았다.“자기야...”눈을 천천히 뜨고 잠결에 유시아를 부르며 이마에 뽀뽀까지 했다.“잘 잤어?”‘자기야’라는 호칭에 유시아는 순간 당황했다.순간 유시아는 어젯밤에 있었던 모든 일이 꿈이었으면 했고 가능하다면 기억이 삭제되었으면 했다.그렇게라도 계속 자신을 속여 이 남자의 부드러움에 몸을 푹 잠기고 싶었다.하지만 기억은 생생하고 잊히지 않았다.어젯밤의 기만이 실마리가 되어 그동안에 있었던 모든 불쾌함을 일일이 끄집어냈다.“왜 그래?”임재욱은 말하면서 조금 더 다가가 턱으로 그녀의 이마를 비볐다.“열은 다행히 내렸네. 자기야, 좀 어때?”“많이 좋아졌어요. 고마워요.”말함과 동시에 유시아는 그의 팔을 허리에서 떼어버리고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수도를 켜자 물이 콸콸 나오기 시작했다.한 손으로 세면대를 짚은 채 정신을 놓
지난번에는 딱 반나절 동안 임재욱의 아내로 지냈었는데, 이번에는 무려 이틀이나 혼인 관계를 유지했다.지난번에 비하면 엄청 운이 좋은 것이다.사람은 만족할 줄 알아야 하고 자기 것이 아닌 물건이라 사람을 바라지 말아야 한다.이틀... 48시간...유시아에게 있어서 이 정도면 충분하다.임재욱의 물건, 돈, 그리고 사람까지 유시아는 그 무엇도 원하지 않는다.임재욱에게 멀어져 평생 보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결말이다.그가 그러한 일을 할 때 그만의 이유가 있듯이 유시아 역시 자기만의 견지가 있는 것이다.길이 다르면 굳이 같이 걸음 맞춰 걸을 필요가 없다.이쯤에서 헤어지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 방법일 지도 모른다.“이혼...”임재욱은 나지막이 이 두 글자를 곱씹더니 가볍게 씩 웃었다.“유시아, 꿈도 꾸지 마!”임재욱은 유시아의 몸을 돌려 자기와 마주하게 했다.“너도 소현우 어머니 챙겼잖아. 아니, 챙기고 있잖아! 근데 왜 나한테는 그러지 못하게 하는 건데? 같은 입장이잖아! 내가 너한테 하얀 거짓말을 해서 그게 용서가 안 돼? 응?”“똑같지 않아요.”“어머님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으셨고, 여자잖아요. 하지만 신시연은 다르잖아요. 신서현 여동생이고 닮은 구석도 제법 많고 우울증까지 있어서 재욱 씨 보살핌이 필요하고...”예전에 신시연과 마찰이 생길 때마다 임재욱은 주저 없이 신시연의 편을 들어 주었고 모든 잘못을 유시아에게 돌렸다.신시연이 극도로 어리석은 수단으로 유시아를 모험했을 때도 임재욱은 유시아를 믿지 않았었다.그 이유는 단 하나, 유시아는 유병철의 딸이기 때문이다.신서현을 차로 들이박아 죽여 버린 범죄자의 딸이기 때문에 용서가 되지 않는 것이다.악몽 같은 그 시절로 돌아가라는 건 유시아를 두 번 죽이니 격이다.이젠 제발 그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은 유시이다.전에는 신서현을 이길 수가 없었고 지금은 역시 신시연을 이길 리가 없었다.두려워서 항복하는 것이고 모든 것을 선뜻 양보하는 것이다.“유시아!”임재욱은 그녀의 말을
필경 그때 신씨 가문에 남은 일가족을 정운시로 데리고 온 건 임재욱 본인이기 때문이다.이 도시에서 임재욱은 그들의 유일의 버팀목이므로 신서현이 아니더라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하지만 유시아는 그러한 말들을 듣기 귀찮아졌는데 손을 내밀어 그를 밀쳐내고 홀로 밖에 있는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임재욱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유시아에게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에 시간이 좀 필요하고 쉽지 않은 일인 것 같다면서.임재욱은 수도꼭지를 닫고 한바탕 씻고는 옷방으로 다가가 외출 준비를 마치고 나왔다.“난 이만 출근하러 갈게. 집에 가만히 있든 아니면 밖에 나가서 좀 돌아다니든 네가 편한 대로 해. 어디로 가든 집에 꼭 돌아오고. 내가 직접 가서 널 잡아 오게 하지 말고.”말을 마치고 그는 손을 내밀어 테이블 위에서 차키를 가지고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시아는 여전히 전과 같은 자세로 소파에 앉아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밖을 내다보며 갑자기 쓴웃음을 지었다.‘유시아, 너 진짜 대박이다.’임재욱이 신씨 가문에게 도움을 준 것에 대해 불만을 안고 심지어 질투까지 했으니 말이다.‘이건 좀 아니야.’살짝 정신을 놓고 있던 그때 집 전화가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유시아는 임재욱이 무엇인가 놓고 간 줄 알고 바로 받았다.“여보세요?”“여보세요, 재욱 오빠...”간드러진 여자 목소리였고 유시아는 단번에 신시연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어젯밤의 모든 것이 다시 생각나기 시작했고 고개를 들어 2층을 바라보았을 때 신시연이 창가에 서 있던 것도 생각났다.그뿐만 아니라 외국으로 나가기 전에 기고만장하고 활기가 넘쳤던 그 신시연도 생각이 났다.분명히 같은 사람이나 한 사람으로 겹쳐보기 힘들었다.한편, 신시연은 계속 말하고 있었다.“오빠, 저 무서워요. 우리 엄마 아빠 호시 이대로 돌아가시는 거 아니에요? 만약 두 분 다 돌아가시면 전 어떡하죠? 오빠, 저녁에 이리로 와서 저랑 좀 같이 있어 주면 안 돼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어둠이 내려앉은 때라 술집 안은 북적거렸다.술집을 좋아하는 젊은 남녀들로, 근처에서 출근하는 회사 직원들로, 막히는 도로를 피하고자 잠시 이곳으로 숨은 사람들로....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져 시끌벅적한 장면을 만들어냈다.잠시 모든 정서를 내려놓은 채 스트레스도 좀 풀 생각으로 찾아온 이들도 많았다.유시아는 가장 구석 자리로 다가가 앉아 와인 한 병이랑 피스타치오를 주문했다.종업원이 주문을 받고 자리를 떠나자마자 임재욱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시아야, 너 지금 어디야?”유시아는 순간 멈칫거리다가 바로 대답했다.“화실 근처에 있는 kt 술집에 있어요.”임재욱과 숨바꼭질을 하기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다.만약 이대로 가뭇없이 사라진다면, 임재욱은 백 천 가지 방법으로 그녀를 찾아내고 말 것이다.유시아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순순히 밖으로 돌아다니게 가만히 놔둔 것으로 봐도 임재욱은 그녀가 제 발로 도망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멀리 도망간다고 한들 스스로 돌아와야 하니 말이다.필경 아직 숨이 붙어있는 이채련이 그의 손에 있다.솔직히 말했어도 임재욱은 여전히 불쾌해했다.“그런 복잡한 곳에는 왜 간 거야?”“택시가 잡히지 않아서요.”유시아는 솔직하게 말했다.“지하철역까지는 너무 멀고 힐을 신어서 걷고 싶지도 않아서요.”임재욱은 계속 물었다.“그럼, 나한테 전화하지 그랬어. 왜 안 했어?”유시아는 입술을 사리 물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바쁠까 봐, 행여나 방해가 될까 봐.”유시아는 알고 있다.그에게는 짐이 많다는 것을, 해야 하는 일이 많다는 것을.그중에서 자기는 가장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라 소홀히 해도 된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모욕을 자초하고 싶지 않아 일찌감치 포기한 것이다.임재욱은 한숨을 길게 내뱉으며 말했다.“얌전하게 기다리고 있어. 화실 앞이라 얼마 걸리지 않을 거야.”말을 마치고 전화가 끊겼다.임재욱은 차 문을 열
핸들을 잡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어 보니 신시연의 도우미 김향화였다.임재욱은 눈살을 찌푸리며 수신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전화기 너머 다소 떨리는 듯한 김향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얼른 TK 대학 병원으로 좀 와보세요. 아가씨께서... 자살 시도를 하셨어요...”순간 임재욱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네? 어떻게 된 겁니까?”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한편, 김향화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아가씨께서 대표님께 전화를 드렸는데, 받지 않으셨다고 자기를 버리셨다고 그러면서 한참 동안 울고 있었어요. 옆에서 계속 타일러 주고 있었는데, 갑자기 과일을 사달라고 하시면서 저를 밖으로 내보내시고 다시 돌아와 보니 이미...”“알았어요.”“일단 조급해하지 말고 잘 지키고 있어요. 금방 갈게요.”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고 유시아를 바라보았다.“시아야...”“저기 앞에 세워주면 돼요.”유시아는 그를 바라보며 가볍게 웃는 듯했다.“마침 외식이나 하고 지하철 타고 집에 가면 돼요.”임재욱은 눈살을 찌푸린 채 양손으로 핸들을 꼭 잡고서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시연이 자살 시도했다고 그러는 데 가서 위로 좀 해줘야 할 것 같아. 같이 보러 가자. 그러고 나서 같이 밥 먹고 같이 집에 가자.”그 말을 듣고서 유시아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려 밖을 내다보았다.“나를 보고 싶지 않아 할 것 같은데요.”이치가 없는 말은 아니다.전에 신시연은 유병철이 신서현을 죽었다는 이유로 내내 유시아에게 시비를 걸었었다.요즘 부모님께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고 유일한 친언니가 한창 그리워질 시기인데, 이때 유시와 마주하게 된다면 그건 좀 억지가 아닌가 싶다.그렇게 생각하면서 임재욱은 망설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얼마 걸리지 않을 거야. 두 사람 마주치게 하지도 않을게. 넌 차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돼.”“...”유시아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고 임재욱의 말에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임재욱은 백미
임청아는 멍하니 걷다가 뒤에서 소리가 나자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유시아를 보고서 그녀 역시 멈칫거렸지만, 곧 웃으며 입을 열었다.“시아 씨가 왜 여기에 있는 거죠?”“재욱 씨 따라온 거예요. 옛 친구 병문안을 왔거든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임청아가 손에 쥐고 있는 병원 진단서 같은 것을 보았다.그만 참지 못하고 입을 여는데.“청아 씨는요? 어디 아픈 거예요?”임청아의 모습을 보아하니 아마 심적으로 아픈 것이 확실해 보였고 육체적으로 아픈 것보다 몇천 배는 괴로워 보였다.우울증을 앓고 있는 신시연에게 자살과 자해와 같은 경향이 있었기에 임청아 역시 그러한 상황일까 봐 걱정되었다.“별거 아니에요.”임청아는 말하면서 진단서를 몸 뒤로 숨기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참,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다행이에요. 듣자 하니 화실을 경영하고 있다면서요?”유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런데요?”“화실에 지낼 만한 곳이 있을까요?”“그건 왜...”더 스케치 화실 안에 작은 휴게실이 있는 건 사실이다.용재휘가 운영하고 있을 때 일부러 쉴 공간을 만들어낸 것이다.용재휘는 뜨문뜨문 그곳에서 밤을 보내기도 했었다.유시아가 화실을 이어받은 뒤로 그녀는 휴게실까지 깨끗하게 청소하였기에 한 사람이 지내기에는 충분한 그런 곳이다.하지만 공주 침대에 길들어져 있는 부잣집 따님이 자기에는 모든 조건이 부실할지도 모른다.“화실 키 저한테 주세요.”임청아는 말하면서 손을 내밀었다.“집에 가고 싶지 않고 호텔에서 자고 싶지도 않아요. 시아 씨한테 마침 지낼만한 곳이 있다고 하니 하룻밤만 신세 좀 질게요.”지금 임청아는 호텔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상황이다.주민 등록증을 호텔 쪽에 건네기만 하면 임태훈은 바로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숙박 조건에 대해 별다른 요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방이 막혀 있고 길거리에 노숙만 하지 않게 하면 된다.그러한 의미에서 유시아의 화실이 최고의 선택지가 된 것이다.“무슨 일 있어요?”유시아는 키를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