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아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이때 뒤에서 안내 데스크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시아쌤, 솔로들 배 아프게 그렇게 대놓고 염장 지르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소리에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무척이나 부러워하는 안내 데스크 직원의 표정이 시야로 들어왔다.유시아는 살짝 멋쩍어하며 웃더니 가방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2시간 정도 수업하고 나서 퇴근 시간이 되자 임재욱이 제시간에 맞춰 픽업하러 와 있었다.그는 유시아를 데리고 샤브샤브 먹으러 갔다.“할아버지한테서 전화가 왔었는데, 다음 주 화요일에 집으로 한 번 오라고 하셨어. 같이 먹자고 그러셨어.”유시아는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천천히 고개를 들어 망설이며 입을 여는데.“재욱 씨만 부른 거 아니에요...”자기를 좋아할 리가 없는 임태훈이라 생각하며 임재욱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집으로 초대할 리도 없다고 여겼다.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불가능하게 여겨졌다.임재욱은 유시아에게 채소를 건네주면서 말했다.“시아야, 넌 내 여자야. 내 여자라면 당연히 나랑 같이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앞으로 우리 집이 곧 네 집이 될 것인데, 그곳에서 지내지 않아도 가족 모임에는 참석해야 해.”유시아는 고개를 다시 푹 숙였고 젓가락도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임재욱은 유시아를 데리고 임태훈의 칠순 잔치에 참석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집안 모임까지 데리고 갈 생각이다.이 모든 건 딱 한 가지 사실만을 설명해 주고 있다.간단한 연애만이 아니라 유시아를 아내로 맞이하며 임씨 가문의 일원으로 들이려고 한다는 것.임재욱은 오랫동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유시아를 바라보며 웃으며 물었다.“무슨 생각 하고 있어?”유시아는 대답하지 않고 질문을 질문으로 받아버렸다.“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요? 나를 그 집으로 데리고 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아냐고요?”“알아. 넌 앞으로 임씨 가문의 일원이 될 것이고 내 아내가 되리라는 것.”임재욱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거듭
그 말을 듣고서 유시아는 살짝 놀라는 모습이었다.“네? 청아 씨가 약혼한다고요? 누구랑 하는데요? 한서준 씨랑 하는 거예요?”임재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토끼 눈이 되어버린 유시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임청아 임신했다고 그랬어. 그래서...”비록 신세대에 살고 있는 임태훈이지만 사상이 유독 보수적인 편이다.심지어 가부장적인 모습까지 지니고 있어 더더욱 가관이다.임태훈에게 있어서 임씨 가문 남자들은 함부로 하고 다녀도 되지만 여자는 절대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이다.사생활이 복잡하면 여기저기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이라고.하여 임청아와 한서준의 혼사를 동의하지 않던 임태훈은 임청아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물론 오늘 집안 모임에서 한서준에게 여러 협의서에 사인까지 하게 했다.예를 들면, 임청아의 혼전 재산을 노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성과 지나친 교제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심지어 귀가 시간을 비롯한 여러 가지 세부적인 사항까지 규정해 주었다.하나뿐인 친손녀이고 어릴 적부터 보호를 받으며 자라왔기 때문에 유난히 조심스러웠다.손녀 사윗감이 무척이나 성에 차지 않았지만, 손녀가 좋아하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없었다.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대충 시집보낼 수 없었다.유시아는 그 말을 듣고서 미간을 찌푸렸는데.“한서준 씨는...”대우 그룹까지 넘보던 야망 덩어리가 과연 임청아에게 행복을 안겨다 줄 수 있는지 걱정되었다.유시아는 임태훈의 손을 빌려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임신 한 방으로 모든 게 이뤄질 줄은 몰랐다.걱정한 기색이 역력한 유시아를 바라보며 임재욱은 그녀의 턱을 살짝 꼬집었다.“왜 못 믿는 거야? 임청아한테 진심일 수도 있잖아.”유시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한서준 씨가 전에 무슨 일을 했었는지 모르는 건 아니죠? 그 사람 눈에는 그 누구든 카드가 될 수 있다고요. 청아 씨까지 포함해서요.”도청기 일로 전화를 했을 때도 한서준은 명확히 알려준 바가 있다.지금 임청아를 이용하는
임재욱은 시간을 빼서 유시아를 데리고 맞춤 제작 숍으로 행했다.약혼식에 어울릴 만한 드레스로 유시아에게 선물해 줄 생각이었다.그렇게 사이즈를 재고 디자인을 고르고 나서 두 사람은 근처에 있는 백화점으로 갔다.임청아에게 줄 약혼 선물을 고르려고.비록 이복동생인 임청아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지만 아이를 가지고 약혼까지 하는 건 축하할 만한 일이다.임재욱은 무척이나 부러웠고 속으로 은은히 바라기도 했다.임청아에게 선물을 전하며 그 복을 이어받으려고 했다.어쩌면 그 운과 복을 이어받아 유시아와 곧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고 말이다.두 사람은 백화점을 돌다가 선물 숍에 들어섰다.임재욱은 단번에 조각 배가 눈에 들어왔고 유시아는 나무로 만든 오르골이 마음에 들었다.별로 망설이지도 않고 유시아는 바로 말했다.“재욱 씨는 저거 사고 난 오르골로 할래요. 선물은 많을수록 좋잖아요.”하지만 임재욱은 즉시 반박 의견을 드러냈다.“안 돼. 우린 한 가족인데, 선물은 하나만 해야 해.”“뭐라고 그러는 거예요.”유시아는 발을 동동 그렸다.“재욱 씨, 우리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가족이라고 할 수 없죠.”“매일 같이 먹고 같이 자는 데, 가족이나 다름없잖아.”임재욱은 당당하게 그럴 듯이 말했다.이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고 있을 때, 멀지 않은 곳에서 한서준과 임청아가 다가오는것이 보였다.두 사람은 커플 셔츠를 입고 다정하게 걸어왔다.임청아는 아이를 품고 나서 하이힐을 거두고 편안한 운동화로 바꿔 신게 되었다.한 손에 밀크티를 들고 한서준의 팔짱을 낀 채로 수호 기사에게 보호받는 공주님처럼 보였다.임청아의 성질을 죽이고 얌전한 모습만 드러내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오직 한서준 뿐인 것만 같았다.“임 대표님, 유시아 씨...”한서준은 두 사람을 보자마자 자연스레 임청아를 데리고 인사하러 왔다.“쇼핑하러 나온 거예요?”임재욱도 웃으며 말했다.“약혼 선물로 뭘 주면 좋을지 보러 나온 거예요.”웃는 얼굴에 침 뱉을 리 없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임청아를 바라보며 유시아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어릴 적부터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자란 그녀는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두운지 모르고 있다.하여 임청아와 한서준의 미래에 대하여 유시아는 그리 긍정적인 태도는 아니다.귀띔이라고 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지금 이 상황에서 그 어떠한 말도 임청아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알콩달콩한 그들의 분위기를 깨는 것 같기도 하고.한참을 망설이고 사색한 끝에 유시아는 다시 천천히 운을 떼기 시작했다.“요즘 잘 지냈어요? 한서준 씨랑 말이에요.”임청아는 웃으며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그럼요. 잘 지내고 있어요. 그러지 않고서야 제가 설마 미쳤다고 서준이랑 결혼하겠어요?”말하면서 그녀는 얼음으로 가득 채워진 수박 주스를 들었다.단 한 모금 만으로 무더운 여름을 한 방에 날려줄 수 있는 최고의 히트키가 아닌가 싶다.임청아의 행동에 유시아는 화들짝 놀라며 재빠르게 손을 내밀어 말리기 시작했다.“어머, 안 돼요. 산모가 이렇게 차가운 걸 마시면 안 돼요.”아이를 품은 적이 있었던 유시아라 이에 대해 잘 알고 있다.비록 아이를 낳은 건 아니지만 임신했을 때 관련 서재를 많이 찾아봤었다.산모는 차가운 걸 마시면 안 된다고 어느 한 책에 명백히 적혀 있었다.유시아는 종업원을 불러 차가운 주스가 아닌 일반 주스를 부탁한다고 했다.차가운 걸 무척이나 선호하는 임청아는 유시아의 배려가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애틋한 눈빛으로 빼앗긴 주스를 바라보며 입을 여는데.“괜찮아요. 조금만 마시면...”“안 돼요. 아이한테 좋지 않아서 그래요.”유시아는 단호하게 주스를 빼앗아 왔다.이윽고 인내심을 안고 천천히 타일러 주기 시작했다.“임신하고 차가운 걸 마시면 아주 잠깐만 좋을 뿐이지 배가 엄청 아플 거예요. 아이한테도 물론 좋지 않고요. 아이 낳고 나서 그때 마음껏 마시도록 해요. 힘들어도 청아 씨를 위해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 조금만 참으세요.”유시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임청
“시아 씨...”임청아는 유시아가 손에 꼭 쥐고 있던 주스를 가져와 시원하게 한 모금 마셨다.문득 후회가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여는데.“다른 사람한테는 제발 비밀로 해주세요. 할아버지께서 아시게 되면 큰일 날지도 몰라요.”만약 임태훈이 사실 여부에 대해 알게 된다면 아마 두 사람의 결혼을 없던 일로 할지도 모른다.앞으로 이러한 거짓 스토리를 함께 꾸며낸 한서준을 더더욱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괜히 말했어.’‘그저 주스 한 모금 마시겠다고... 참나!’주스 한 모금 때문에 이처럼 중요한 일을 털어버리지 말았어야 했다며 내심 후회하고 있는 임청아이다.유시아는 일단 그녀의 바람대로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비밀로 해줄게요.”그만 참지 못하고 한 마디 덧붙이는데.“근데 거짓말은 아니라고 봐요. 앞으로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한서준 씨도 청아 씨한테 거짓말하게 되는 날이 올 수도 있고요.”“절대 그럴 리 없어요. 감히 그럴 용기도 없는 사람이고요.”한서준 이름 석 자가 나오자마자 임청아는 금세 얼굴이 환해졌다.두 눈에 별이 반짝이는 듯이 세상을 다 가진 여자처럼 보였다.“저한테 뭐나 다 말하는 사람이에요. 어릴 적 일까지 하나도 숨김없이.”한창 말하고 있던 그때 임재욱과 한서준이 음식을 가득 들고 돌아왔다.따라서 두 사람은 이에 대해 그만 얘기하고 말머리를 돌리기 바빴다.임청아의 말을 듣고 다시 한서준을 보게 되자 유시아는 순간 기분이 가라앉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입맛까지 잃어버려 집히는 대로 대충 먹고 나서 바로 임재욱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어두운 하늘을 밝게 비춰주는 조명들은 하나가 되어 둘도 없는 광경을 자아내고 있다.그 속에서 차가 오고 가고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목적을 안고 거리를 누비고 있다.시원한 밤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오자 왠지 모르게 기분이 확 트이는 것만 같았다.차에 오른 두 사람, 임재욱은 유시아를 위해 직접 안전벨트를 해주고 있었다.그때 임재욱은 그만 참지 못하고 입을 여는데.“시아야, 너 지
유시아는 빨간색으로 된 초대장을 만지며 그 위에 찍힌 남운대 배지를 바라보았는데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꽃다운 시절을 보냈던 남운대, 한때 스승이었던 선생님이 아직도 수업을 가르치고 있을 수도 있고 엄격했던 기숙사 선생님도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수도 있다.그리고 그곳에는 임재욱을 쫓아다녔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몇 년간 시간이 흐리긴 했지만 뭐가 달라졌을까?문득 지금의 남운대가 궁금해졌지만 그와 함께 두려움도 밀려왔다.임재욱은 남운대의 저명한 교우로서 지금은 대우 그룹의 총책임자일 뿐만 아니라 남운대에 다닐 때도 걸출한 인물로 명성이 자자했던 사람이다.장학금을 싹쓸이하고 농구도 식은 죽 먹기로 잘했으며 모든 학과에서 ‘A’를 받았던 엄친아 중의 엄친아이다.마치 전설 속의 인물과 같다고 할까?그런 임재욱과 달리 유시아는 지금 내놓을 만한 게 없다.남운대에 다녔을 때는 나름대로 우수한 편이었지만 중도에 퇴학하면서 학업을 그만두게 되었다.감옥에서 나온 뒤, 남운대에 복학 신청을 제출한 적이 있지만 매몰차게 거절을 당했었다.좋았던 기억보다는 아팠던 기억이 많은 곳이라 유시아는 망설이게 되었다.“그냥 재욱 씨 혼자 가요...”유시아는 초대장을 다시 임재욱에게 밀어 넣었다.“화실에 수업도 있고 그럴 시간이 없어요.”눈치가 빠른 임재욱은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망설이는 이유는 알게 되었다.가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럴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자기한테 수없이 거절을 당했던 곳일 뿐만 아니라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와르르 무너졌던 곳이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는 다르다.명성이 자자했던 남운대의 임재욱은 지금도 여전히 대우 그룹의 총책임자로 카리스마가 넘친다.“시아야...”임재욱은 손을 꼭 잡고 말했다.“나랑 같이 가자. 꼭 같이 가줬으면 좋겠어. 과거를 잊을 수 없다면 차라리 그 과거를 직면해 보는 건 어때?”유시아에게 많은 걸 빚진 임재욱은 시발점인 그곳에서 빚을 천천히 갚기 시작해야 한다
말하다 보니 유시아는 점점 감개무량해지기 시작했다.“오랜만에 온 게 맞는 것 같아요.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변해있을 줄이야.”임재욱은 그런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마침내 그녀의 손을 잡고 덩달아 감개에 빠지는데.“너뿐만 아니라 나도 참 오랜만이야.”졸업하자마자 임태훈이 찾아와서 정운시로 가야만 했으니 말이다.그 뒤로 별의별 일들을 다 겪으면서 다시는 이 도시에 발을 들여놓을 새가 없었다.유시아가 감옥에 들어가고 나서 임재욱은 더더욱 이 도시를 멀리하게 되었다.업무상 필요한 곳이고 꼭 가야만 했던 출장지였어도 회사 동료에게 모두 떠맡겨 버렸다.유시아 이름으로 된 화실을 짓는 것에 대해서도 임재욱은 직접 현장에 오지 않았었고 모든 걸 온라인으로 소통했다.무엇을 피하고 있는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그 역시 선뜻 답을 뱉어낼 수 없었다.어느 한 순간부터 그 모든 건 습관이 되어 있었고 자기도 모르게 그 습관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다.하지만 초대장을 받게 되는 순간 그 습관을 어겨 한 번 직접 와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유시아가 싫다고 해도 직접 몰래 와서 볼 생각이었다.다행인 것은 유시아도 그와 같은 마음이었다는 것이다.늦은 밤이 되어서야 두 사람은 호텔에 도착했다.시간도 애매하고 하여 임재욱은 배달 앱을 열어 야식을 주문했다.이튿날 아침, 두 사람은 일찍 일어나서 케쥬얼한 커플 옷으로 맞춰 입고 선글라스까지 꼈다.캠퍼스 커플이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택시에 올라 남운대로 행했다.남운대는 총 다섯 개 교육구로 나누어져 있고 유시아 화실은 바로 미술과 강의동 가장 뒤쪽에 자리 잡고 있다.그리 큰 편은 아니지만 인테리어가 정교한 것이 전형적인 고딕 건축 스타일이다.유시아 화실은 이미 대외로 개방되었다.때때로 미술과 사생들이 삼삼오오 참관하러 오기도 하고 나지막이 의논하는 모습도 보였다.남운대 화실이 아니라 유시아 화실이라는 명명에 대해 의문을 품은 것이다.화실을 둘러보면서 유시아는 수많은 작품
그 뒤로 남운대 미술과에 떡 하니 붙은 유시아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유병철은 직접 딸을 남운대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의 가장 큰 꿈은 해외로 유학을 가는 것이었다.하지만 남운대 교환 학생의 정액은 한정되어 있고 요구도 만만치 않았다.그 기회를 잡을 수 있는지 그대로 뽑히게 되는지 모든 건 미지수였다.그럴 때마다 유병철은 늘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안을 해주었었다.“괜찮아. 교환 학생으로 가지 못하면 자비로 가면 돼.”“한두 푼도 아니고...”유시아는 매번 쓴웃음을 지으며 꿈과 점점 멀어져 갔었다.미술은 거의 돈을 태우는 듯한 학과라고 보면 된다.관련 도구도 가격이 만만치 않고 해외로 유학하러 가려면 학비에 생활비까지 적어도 몇천만 원은 든다.유병철은 늘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유시아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희망을 주었다.“돈은 모으면 그만이야. 걱정하지 마.”평소에 한두 푼씩 꼼꼼하게 모아 유병철은 작은 아파트를 사고 나서 남은 돈을 모두 한 카드에 넣었다.그는 장난삼아 유시아에게 드림 카드라며 말한 적도 있다.하지만 대학을 마치기도 전에 꿈을 향해 다가가기도 전에 유시아는 감옥으로 향하게 되었다.‘만약 아빠가 살아 계신다면 나 보고 실망하겠지?’정성껏 키워주셨는데 남자 하나 때문에 모든 걸 잃었으니 말이다.자랑으로 여기시면서 힘든 세월을 살아오셨는데, 자아까지 잃어버린 유시아이니 말이다.이런저런 생각이 들면서 유시아는 서서히 쓸쓸해지기 시작했다.어두워진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임재욱은 입술을 사리물었다.유병철에 대해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은 듯 유시아를 데리고 다른 작품 앞으로 걸어갔다.점심이 다가오자 두 사람은 남운대 식당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유시아가 화실에서 하도 오래 있어서 식당으로 향했을 때 음식들은 거의 바닥이 나 있었다.임재욱은 그녀의 작은 손을 잡고 다른 곳을 제안했다.“먹자골목으로 가지 않을래?”“아니요.”유시아는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그냥 있는 대로 대충 먹어요.”식당 음식을 먹은 지 오래된 그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