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우는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그도 그의 어머니도 쉽게 이름 석 자만으로 유시아를 흔들 수 있다.이에 대해 임재욱은 아프면서도 어할 도리가 없어 괴로운 것이다.유시아가 모든 짐을 내려놓고 그 한 페이지를 넘기고 자기 옆에 얌전하게 있게 하려면 이채련의 노후 정도는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임재욱 역시 그럴 수만 있다면 흔쾌히 노후를 책임지려고 마음먹고 있었다.이채련은 이렇게 굳이 병실까지 찾아온 임재욱의 뜻을 알아차렸다.여자 하나 때문에 빳빳하게 들고 다니던 고개를 숙이기까지 하다니, 그 모습에 이채련은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따라서 이채련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한 번 타일러 볼게요.”그러더니 또다시 나지막이 말했다.“시아한테 잘해줘요. 귀엽고 사랑받아도 마땅한 아이잖아요. 시아한테 잘해 주면 시아는 절대 그쪽과 헤어지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임재욱 역시 입가에 미소를 살짝 띠었다.“네, 걱정하지 마세요. 꼭 그렇게 할 거예요.”...임재욱의 도움을 받아 이채련은 아주 순조롭게 이원 절차를 밟았다.새로 옮긴 병원은 도시 외곽에 있어 지리적으로 좀 외딴곳이긴 하나 공기도 환경도 일품이라 요양하기엔 적합하다.그 외에 임재욱은 해외에서 전문가를 모셔 와 이채련을 돌보게끔 했다.이원 하는 그날 임재욱은 회사에 일이 있어 유시아가 함께 갔었다.병실의 인테리어는 력셔리 그 자체였다.창문을 열면 꽃이 활짝 피어 있는 정원과 인공 호수가 보여 시야가 탁 트는 것이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평소에 다른 일들로 바삐 도는 유시아는 이곳으로 자주 찾아올 수 없어 이채련이 가장 좋아하는 백합이란 채색 앵무새 두 마리를 사서 친구가 되어주도록 했다.간병인과 함께 침실을 깨끗하고 청소하고 나서야 서서히 떠날 준비를 했다.“어머님, 편히 쉬고 계세요. 그 어떤 병도 마음 상태에 따라 좋고 나빠지는 것이니 매일 편한 마음으로 계시고요. 시간 나는 대로 바로 달려올게요.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전화해 주세요.”이채련의
‘도청기가 옮겨졌다고?’유시아는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숨이 턱 멈추는 듯했다.작은 도청기를 임재욱 사무실 의자 아래쪽에 붙여놓았는데, 눈에 띄지 않은 곳일 뿐만 아니라 평소에 청소를 자주 한다고 해도 절대 발견될 리가 없는 곳이다.임재욱은 과연 어떻게 알고 도청기를 옮긴 것일까?그 비밀은 어떻게 발견하게 된 것일까?그냥 단순하게 의자를 바꾸고 싶어서 그런 걸까?가장 마지막 추측이기를 유시아는 간절히 바랐다.사무실 안에 감시 카메라도 없거니와 그날 유시아 혼자만이 사무실에 있긴 했는데 자기를 의심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그렇게 스스로 안정을 주며 왠지 모르게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마음속의 커다란 짐이 놓이는 것처럼 가슴도 마침내 가라앉았다.더 이상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된다고.유시아는 심지어 한서준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거봐요, 안 먹힌다고 했죠? 이쯤에서 다시 하는 말인데, 재욱 씨한테 어떻게 할 생각하지 말아요. 결과는 뻔하잖아요.”“승패를 논하기에 아직 너무 이른 거 아니야?”한서준은 도로 질문을 던지며 피식 웃었다.“그보다도 넌 궁금하지 않아? 자기 여자한테 배신당한 임재욱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것도 다른 남자랑 같이 손을 잡고 배신을 때린 거라면 얼마나 빡칠지...”유시아는 그 말을 듣고서 한참 지나 대답했다.“실은 나도 궁금하긴 해요.”도청기를 의자 밑에 붙인 건 유시아가 사실이다.한서준과 손을 잡고 임재욱을 무너뜨리려는 마음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알고 싶었다.모든 걸 알고 난 임재욱의 반응을.4년 전과 4년 후, 임재욱 마음속의 자기는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인제와 보니 슬슬 그 답을 얻게 될 타이밍이 된 듯싶다.콜택시는 곧 도시에 이르렀고 유시아는 예전 그대로 수업에 집중했다.저녁 즈음, 학생들을 보내고 나서 퇴근하려고 위층에서 내려왔다.그때 휴게실 소파에서 잡지를 보며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임재욱이 시야로 들어왔다.“시아야, 퇴근했어?”그녀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임재욱은 잡지를 내
그런 임재욱과 반대로 신서현은 어디를 가나 밴과 매니저가 있었다.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여 연애했었지만, 단 한 번도 대놓고 당당하게 한 적이 없다.가장 용기를 낸 순간을 뽑으라면 아마 신서현 아버지에게 들킨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포옹하고 뽀뽀했던 그 순간, 그것이 전부였다.신서현은 호화로운 생활을 바라는 여자도 아니었다.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함께 하기를 바랐는데, 그러한 부분에 대해 임재욱은 죄책감을 느꼈었다.신서현에게 좋은 생활을 안겨다 주지 못한 것 같아서.지금 두 사람 모두 마음속으로 신서현을 떠올리고 있다.순간 두 사람 사이에 잠시 남아 넘실거렸던 달콤했던 분위기는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저녁을 먹고 나서 유시아는 위층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예전처럼 화실로 들어가 그림 그리기에 전념했다.오늘 간단하게 스케치하고 싶어 조각상을 모델로 삼아 천천히 선을 긋기 시작해다.아직 채 완성하지 못했는데, 누군가가 갑자기 조각상 앞을 가로막았다.욕실에서 이제 막 나온 임재욱이다.그는 회색 가운을 느슨하게 걸치고 의자를 유시아 앞으로 당겨와 앉았다.“내가 오늘 한가해서 그러는데, 모델로 서 줄게.”유시아는 웃었다.“오늘 엄청 바쁘실 텐데, 이럴 시간 있어요?”“왜?”임재욱은 눈썹을 들썩였다.“그려주기 싫어?”유시아는 연필 끝을 물고 그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씩 하고 웃었다.“누구나 모델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치골 라인 선명해요? 복근은 몇 개고요? 등 근육은 어때요? 역삼각형 몸매이긴 한가요?”유시아는 턱을 살짝 올리고 애교를 떠는 듯한 목소리로 연달아 질문을 던졌다.이런 평범한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꼈기 때문이다.도청기가 대우 그룹에서 나온 이상 회사 내부에서는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어쩌면 이미 조사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언젠가는 자기한테까지 파급될 테니 마지막 남은 이 순간이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 아닌가 싶었다.모든 게 밝혀지고 나면 어디로 가야 하는 지도 미지수이다.임재욱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어쩔
하얀 종이 위에는 조금 전 임재욱의 모습이 아니라 그의 뒷모습이었다.정장 차림에 손에 서류를 들고 고개를 약간 숙인 그의 모습, 떡 벌어진 어깨와 땅을 짚고 서 있는 긴 다리, 흑백을 뚫고 나오는 아우라에 저절로 눈이 부셨다.“유시아....”임재욱은 웃으면서 유시아를 품으로 끌어당겼다.“놀린 거 맞지? 온몸이 시큰할 정도로 그렇게 한 자세로 오랫동안 버티고 있었는지, 재밌었어?”유시아는 그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재욱 씨, 이 뒷모습도 재욱 씨잖아요.”다른 바가 있다면 4년 전의 임재욱이었다.그때 감옥에 들어가자마자 임재욱은 변호사를 데리고 이혼 합의서 초고를 들고 병원으로 찾아와 사인을 요구했었다.그날 임재욱이 입은 정장은 바로 지금 그림 속에 있는 흑백 정장이었다.그는 손에 이혼 합의서를 들고 단호하게 떠나는 뒷모습만 남겼었다.그 뒷모습이 가슴속에 낙인되어 지금껏 아프게 하고 있다.5년이 지났다고 하더라도 그 아픔은 처음 느꼈던 그때처럼 똑같았다.살짝 바람이 불어와도 상처가 다시 돋아나고 지난 일들이 밀물처럼 밀려와 숨을 턱턱 막히게 했다.유시아는 손으로 그림을 가리키며 설명했다.“여기 한 번 봐요. 재욱 씨가 들고 있는 저 서류는 내가 사인을 마친 이혼 합의서예요. 재욱 씨는 모르겠지만, 그때 전 재욱 씨 뒷모습을 끝까지 봤어요.”얼굴에 번졌던 웃음은 서서히 사라지고 임재욱은 가슴 한쪽 곁이 미어지기 시작했다.그날의 모든 순간을 임재욱 역시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이혼 합의서를 들고 감옥으로 찾아가 유시아에게 모욕을 주고 그녀의 신분을 박탈하면서 교도관에게 잘 부탁한다고 했었다.잘 부탁한다...간단한 말 한마디는 유시아에게 악몽처럼 다가왔었다.3년 동안 유시아는 그 짧고 긴 시간을 어떻게 버텨왔는지 임재욱은 모른다.하지만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가슴 속에 묻고 있던 한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었다.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부터 유시아의 기분이 신경 쓰였고 그녀의 눈물이 두려웠으며 매사에 조심스러
두 사람은 제각기 하고 싶은 말만 했다.유시아는 도청기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 했고 임재욱은 화제를 돌리느라 바빴다.“참 잘 그렸어. 분위가 아주 그냥...”유시아는 덤덤해 보이는 임재욱을 바라보면서 순간 놀림을 당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어디선가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라 손을 내밀어 그 그림을 빼앗아 왔다.이윽고 갈기갈기 찢어버려 공중에 확 던지며 소리를 질렀다.“임재욱 씨!”임재욱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고 화난 나머지 빨갛게 달아오른 유시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또 왜 이러는 거야?”유시아는 온몸을 살짝 떨며 또박또박 물었다.“도청기에 대해 얘기하고 있잖아요. 못 들었어요?”“들었어.”임재욱은 덤덤하게 대답했다.귀로도 마음으로도 유시아의 말을 똑똑히 들었는데.임재욱은 잠시 침묵하더니 운을 떼기 시작했다.“잡다한 일로 이러고 싶지 않아. 그럴 가치도 없는 일이고. 그러니 좀 그 일에 대해서 그만 얘기하면 안 돼?”“딱하고 싶은데요.”유시아는 다소 달갑지 않아 하는 모습을 보였다.“그래.”“그럼, 바른대로 알려줄게. 내 사무실에 감시 카메라는 없지만 도청기 제어하는 시스템이 있어.”대우 그룹의 모든 기밀이 임재욱 사무실에 있고 많은 프로젝트에 관한 사항들도 모두 그의 사무실에서 진행된다.그런 중요한 곳에 유시아와 같은 아마추어를 쉽게 들여서 도청기까지 붙이게 할 수 없단 말이다.하여 유시아가 사무실로 찾아온 그날부터 임재욱은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내가 지금까지 말하지 않는 건, 전에 이와 비슷한 일로 널 감옥에 들어가게 했었기 때문이야. 네가 한 짓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이라고 생각하면서 너랑은 상관없다고 여기면서 평생 말하지 않으려고 했어. 이걸로 손해를 보지 않은 건 내가 운이 좋아서 그렇고 만약 이대로 손해를 본다면 자업자득이라고 하면서.”임재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어루만지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지그시 바라보았다.“시아야, 내가 너한테 빚진 건 앞으로 천천히
늦은 밤, 별장 안은 유난히 더 조용하게 느껴졌다.어두운 침실에서 임재욱은 서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기절이라도 한 듯한 유시아를 바라보며 그는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그녀의 얼굴에 천천히 뽀뽀하고 나서 그는 옷을 걸치고 화실로 향했다.이곳은 평소에 유시아 혼자만의 아지트로 조각상이 일렬로 배열되어 있고 그녀가 좋아하는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임재욱은 화실 안쪽으로 들어가 허리를 숙여 유시아가 찢어 버린 그림 조각을 하나씩 주었다.다시 테이블로 가져와 천천히 맞추면서 정성껏 복귀 작업에 들어갔다.풀로 붙인 그림이라 아무리 작업 솜씨가 뛰어난 다고 한들 흔적은 눈에 선명했다.한눈에 보이는 것이 결코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마치 유시아를 대하는 것처럼 아무리 사랑해 주고 보살펴 준다고 해도 전에 안겨다 주었던 그 상처들을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 없듯이.사실이 이러한데도 임재욱은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지금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이기 때문이다.노력하면 가능성이라도 있지 노력마저 하지 않으면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옆에 강제로 묶어 두는 건 기껏해야 자기를 싫어할 뿐이고 적어도 임재욱은 앞으로 여한이 없게 된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이고 ‘산산조각’ 난 그림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더니 서재로 향했다.다음 날, 유시아는 거의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깨어났다.커튼을 거두지 않았으나 여름의 햇살은 무척이나 강렬하여 커튼을 뚫고 들어왔다.어젯밤 임재욱이 일방적으로 뜨겁게 사랑을 나눈 바람에 유시아는 몸도 아프고 머리가 아파 났다.하지만 배가 하도 고파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허씨 아주머니는 따뜻한 우유를 건네주며 계란 후라이도 해주었다.“아가씨, 대표님께서 이제 곧 오실 거예요. 같이 식사하러 오신다고 했는데, 일단 허기만 좀 채우시고 이따가 정식으로 식사 하세요.”유시아는 그 말을 듣고서 순간 얼굴이 어두워졌다.“점심에도 집에 와서 먹어요? 그렇게 할 일이 없나.”허씨 아주머니느 웃으며 말했다.“아가씨께서 맨날 혼자서 식사하
부엌 안으로 들어간 건 아니지만 풍겨 나오는 냄새로 봐서는 대충 짐작이 되었다.임재욱이 점심 먹으러 온다고 하여 쉐프들이 메뉴에 힘을 들였다는 것을.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바로 뒤돌아서서 위층으로 향했다.임재욱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더니 피식 웃고서 바로 따라갔다.여자를 달래는 건, 좋아하는 여자를 달래는 건, 그 또한 일종의 재미이다.침실로 들어서자마자 임재욱은 바로 목소리를 낮추어 ‘용서’를 빌기 시작했다.“화났어? 어디 아파? 내가 어젯밤에 좀 너무 심했지? 미안해... 어디 다쳤는지 한 번 봐봐.”임재욱은 말하면서 그녀를 침대로 데리고 왔다.“누워 봐봐, 한번 보자...”유시아는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면서 그를 확 밀쳐 버렸다.“대낮에 뭐라고 그러는 거예요! 낯간지럽게...”임재욱은 내내 웃으며 말했다.“남녀가 사랑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낯간지럽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게다가 어젯밤 너도 엄청 즐겼잖아. 침대 위에서는 엄청 즐기더니 지금은 또 아닌 가 봐? 이걸 보고 ‘침튀’라고 하나?”“시아쌤, 사람은 성실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유시아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임재욱은 계속 그녀를 놀렸다.대낮에 이러한 얘기를 입을 올리고 있으니, 유시아는 듣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웠다.그러다가 순간 어젯밤 침대 위에서 보였던 자기의 그러한 모습이 하나둘씩 떠올랐다.입으로는 욕하고 있지만 그의 리듬에 따라 계속 깊숙이 들어가면서 서서히 극에 달하는 그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했으니 말이다.천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어젯밤의 자신이 무척이나 부끄러웠다.흥분한 나머지 유시아는 발을 들어 그를 차려고 했다.다행히 눈치가 빠른 임재욱은 바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무릎을 막아 버렸다.“시아야, 평생 외롭게 지내고 싶어?”지난번 피팅룸에서 방심한 틈을 타 유시아의 공격이 제대로 먹혔으나 이번에 역사를 재현할 수 없었다.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유시아를 바라보며 임재욱은 그녀를 품속으로 끌어안았다.“가자, 배고프다.”무더위를 뚫고
“기분 나빠? 응?”오랫동안 돌아오는 답이 없자, 임재욱은 유시아의 고개를 돌렸다.다른 생각을 하듯 유시아는 눈꺼풀을 내리깔고서 그와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긴 눈초리는 두 눈을 완전히 덮어버려 모든 정서까지 감춰버렸다.임재욱은 그만 참지 못하고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유시아!”성까지 붙여서 부른다는 건 무슨 사달이 났음을 의미한다.유시아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임재욱과 두 눈을 마주쳤는데 이유 모를 긴장함과 두려움이 스쳐 지나갔다.그 모습에 임재욱은 살짝 당황하며 반성하기 시작했다.너무 언성을 높여 부른 건 아닌지, 무섭게 부른 건 아닌지, 유시아가 놀란 건 아니지.잠시 후, 그는 다시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앞으로 기분 나쁘면 내가 죽도록 미우면 얼마든지 소리치고 때려도 좋아. 근데 대우 그룹 가지고 장난하지 마. 알았어?”유시아는 그런 그의 두 눈을 바라보며 귀신한테 홀린 듯 물었다.“왜죠?”“그러다가 정말로 대우 그룹 잃게 된다면 내가 널 뭐로 먹여 살려? 네 전 시어머니는 또 어떻게 치료해 드리고.”속물이라고 해도 좋다. 임재욱은 어릴 적부터 돈의 힘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지내온 일인자이다.임재욱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거듭 강조했다.“돈만 있으면 암 환자도 가실 때까지 편하게 있다가 편하게 보내드릴 수 있어.”하물며 대우 그룹은 임태승의 명줄이나 다름없다.만약 유시아 지금처럼 행동한다면 언젠가 그의 귀에 들어갈 것이니 그 또한 트러블이다.유시아는 더 이상 변론할 도리가 없게 되자, 말을 아끼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처음부터 대우 그룹을 망칠 생각도 없었고 자기에 대한 임재욱의 마지노선을 테스트하고 싶었을 뿐이다.이제 대답도 얻게 되었고 그 대답이 예상 밖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두 사람은 결국 한 바탕 전쟁을 마치고 함께 점심을 먹었다.이윽고 임재욱은 차를 몰고 유시아를 더 스케치 화실로 바래다주었다.차에서 내릴 때 임재욱은 또다시 그녀에게 물었다.“저녁에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뭐?”“한서준 씨는 당당해요?”유시아는 바로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임씨 가문에 접근한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 할아버지, 재욱 씨 그리고 나까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청아 씨만이 한서준 씨를 사랑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쭉 모르는 척을 하며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한서준 씨 역시 청아 씨를 이용한 게 아닌가요?”마지막 한 마디에 한서준은 침묵하고 말았다.그렇다. 임청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유시아가 ‘스파이’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임씨 가문 천금을 노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임청아 대한 마음은 모략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점점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띠고 다가왔던 임청아가 어두운 자신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따라서 한서준은 임청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생기게 된 것이다.임태훈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꼭 자기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청아 씨 지금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에요.”“만약 청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차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려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택시에 오른 유시아는 긴 망설임 끝에 끝내는 더 스케치 화실 주소를 운전 기사에게 알렸다.차는 화실 맞은 편에 세워졌고 유시아는 화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화실 안의 상황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경호원들이 임태훈을 사이에 두고 화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임태훈은 벤틀리에 올라 강한 기운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화실로 향해 달려갔다.화실 안과 밖은 겉은
전화를 마치고 유시아는 혼자 밖에 없는 휴게실을 보고서 깊은 번뇌에 잠겼다.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임태훈처럼 막무가내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인이 있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태훈이 끔찍이 여기는 임청아를 유시아가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애꿎은 자기 화실을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집안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일단 남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으니,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유시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불안함도 점점 커졌다.지금 운영하고 있는 더 스케치 화실도 용재휘가 먼저 시작한 것인데, 그와 더불어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넘겨주었는데, 만약 이대로 화실을 망쳐버린다면 용재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임재욱과 임태훈이 어느 정도로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화실이 그들 싸움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단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그렇게 한참이나 심장을 조이고 있었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유시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 채팅방에 오늘 갑자기 일이 있다며 수업을 뒤로 미룬다고 알렸다.언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지는 소식을 기다리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톡을 보내고서 유시아는 더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바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병원 대문을 나오자마자 한서준이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유시아.”유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났다.직감이 알려주건대, 절대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화실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한서준은 쉽사리 유시아를 놓아 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물어볼 일이 있어.”말하면서 근처에 있는 지프차를 가리켰다.“차에 타서 얘기 하자.”“그쪽이랑 할 말
유시아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집사의 바람대로 타이르기 시작했다.“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하거든요. 일이 어찌 됐든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임청아 그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건강 회복되면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집에 감금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어찌 됐든 할아버지 마음은 한결같을 거예요. 청아 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 터놓고 얘기하고 나면 오해가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임청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아이 낳고 나면 할아버지도 서준이도 원한을 내려놓고 행복만 할 수 있다고요.”“근데 이렇게 몸도 아끼지 않고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가면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점점 더 짙어질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도우미 손에서 보신탕을 가져와 천천히 불며 임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임청아는 생각 밖으로 무척이나 순순하게 유시아의 말을 따랐고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보신탕을 받아 마셨다.도우미와 집사는 두 사람이 티키타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임청아가 뭐라도 먹기 시작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으며 자리까지 비켜주려고 했다.두 사람이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을까 봐 눈치껏 일어서려는 것이다.“작은 사모님, 아가씨와 천천히 얘기하고 계세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네, 가보세요.”도우미 일행이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한서준 씨는 알고 있어요?”임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잖아요.”요즘 임태훈뿐만 아니라 한서준도 눈을 부라리고 임청아를 찾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자 아파트도 호텔도 들어갈 수 없었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유시아 화실에 몸을 숨기고 지낸 것
임청아 이름 석 자가 임재욱의 입에서 나오자, 유시아는 순간 청천벽력을 맞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청아 씨가 왜 병원에 있는 거죠?”임청아는 임신한 것을 알고 매사에 조심하며 걸음 하나도 천천히 옮겼었다.게다가 해외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여 해외로 떠날 준비까지 마쳤다고 했었다.그런데 관건이 되는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할아버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임재욱은 말하면서 차갑게 웃었다.“네 화실에 청아 숨겨 놓았잖아. 할아버지께서 그걸 과연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 오늘 화실로 청아 데리러 갔었는데, 가지 않겠다고 청아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억지로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며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그렇다면 아이를 유산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의 습관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이 화살은 결국 유시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임재욱이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유시아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약해지는 마음에 언젠가는 구렁이에 빠지게 될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꾸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병원 주소 보내줄 테니 얼른 가 봐.”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고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같은 시각, 병원 안에서.임청아는 이미 수술을 마쳤고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이미 가문의 집사와 간호인이 옆에 있었고 병실 문 앞에는 임태훈이 보낸 경호원도 있었다.다만 경호원이 경계해야 할 상대는 유시아가 아니라 한서준이다.따라서 유시아는 별다른 막힘없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상에 누워 있는 임청아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주 공손하게 유시아에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임재욱은 멈칫거리고 말았다.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별거하자는 뜻이야?”“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유시아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으로 시연이한테 집중해도 되잖아요. 나도 마침 어머님 곁에 좀 있어드리고... 서로에게 지금 이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래. 네가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하자.”말을 마치고 그는 계속 밥을 먹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서 아련하게 웃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이튿날 아침, 유시아는 임재욱이 출근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상복 몇 벌과 일상용품을 챙겨 작은 트렁크 안에 놓고 바로 이채련한테 가려고 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유시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사모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죠?”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친척분이 좀 위독하신데 제가 옆에서 좀 챙겨드리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고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트렁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이채련이 지내고 있는 병실이 VIP 병실로 널찍한 객실까지 갖춰져 있다.유시아는 간호사에게 접이식 침대와 이불을 요구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잘 자리가 아늑하게 마련되었다.이채련은 더 이상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어 하루 24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다.얼굴도 하도 여위어 본연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그전에도 유시아는 이채련에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이채련은 행여나 자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흠이 생기게 될까 봐 동의하지 않았었다.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갖은 풍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