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재휘가 그림을 그만두었다는 말을 듣게 되는 순간 유시아는 입맛이 뚝 떨어져 버렸다.미술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이 있을뿐더러 용재휘의 그림 작품은 늘 살아 숨 쉬고 있는 느낌을 주곤 했다.그 말인즉슨, 그림을 그만두기에는 아까운 인재라는 말이다.임재욱과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만 않았어도 어쩌면 당분간 해외로 갈 일도 없이 평범하게 좋아하는 그림 그리면서 사랑을 쏟아부은 화실을 운영하면서 살았을지도 모른다.심하윤은 고개를 들자마자 한껏 어두워진 유시아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그런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워서인지 천천히 위로하기 시작했다.“시아야,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어. 언젠가는 가업 이어받으러 해외로 떠났어야 했어. 다만 부득이한 일로 좀 앞당겨진 것뿐이야. 삼촌이랑 숙모에게 자식이라고는 재휘 하나뿐인데, 당연히 가업을 이어가게끔 했을 거야. 내 말은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니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라는 거야. 미술에서 큰 성과를 따내지 못한 이상 재휘는 집안 어른들의 지시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어. 하물며 삼촌 눈에는 재휘 그림 실력은 한낱 보잘것없고 동네 아이들이나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계시거든.”유시아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어색한 분위기가 잠시 흐르고 심하윤은 한참 지나고 나서야 나지막이 물었다.“잘 지냈어?”실은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묻고 싶었으나 미안한 마음에 도통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임재욱 그 나쁜 놈 옆에서 잘 지낼 리가 없다는 걸 뻔히 알고 있는데.만약 심씨 가문의 일만 아니었다면 유시아는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면서.심하윤은 생각하면 할수록 죄책감이 깊어져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시아야,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실은 모르겠어...”그런 그녀를 향해 유시아는 봄날의 햇살처럼 웃었다.“괜찮아요. 저한테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어쩌면 재욱 씨랑 특별한 인연이 있어서 자꾸 이렇게 얽히고 있을 수도 있고요. 그리고 저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언니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일들은 없어요.”홀가분한 표
5년 전, 피고석 자리에 처량하게 서 있던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유시아이다.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양손을 묶고 있는 수갑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유시아는 재판장의 선고를 들어야만 했다.한 적도 없는 일이지만 죄명에 따라 그 증거는 더없이 정확했다.하늘에 맹세코 절대 한 적이 없다고 해도 재판장의 소리는 서서히 숨통을 조여왔었다.임재욱을 상대로 단 한 번도 경계심을 일으킨 적이 없었던 유시아는 그의 함정에 아무런 의심도 없이 빠져들면서 그 어떠한 변명도 하지 못했다.‘3년’이라고 떡 하니 쓰여 있었던 재판서와 이혼 합의서는 그녀에게 준 임재욱의 신혼 선물이 된 셈이었다.어느덧 시간도 지났고 전에 있었던 일이라 유시아는 그 모든 걸 잊은 채 살고 있는 줄만 알았다.하지만 임재욱의 사무실에 다시 들어선 순간 악몽과도 같았던 그 모든 순간이 하나 둘씩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운명은 그토록 기묘하고 잔인하다고.하지도 않은 일을 신서현 하나 때문에 억지로 자기한테 뒤집어씌웠다고.하지만 지금은 한 번 해보려고 한다. 그때 하지도 않았던 일로 대가를 받아야만 했었던 ‘죄’들을.다시 감옥으로 보낼 것인지 아니면 임태훈처럼 위험 저택을 찾아서 죽일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다.임재욱의 마지노선을 건드리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해보고 싶었다.심하윤과 저녁을 다 먹고 나서 두 사람은 영화도 한 편 보았다.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쇼핑까지 하다 보니 그린레이크로 돌아왔을 때 시간은 이미 9시쯤 되어 있었다.별장 대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유시아는 임재욱이 평소에 자주 몰고 다니는 마이바흐를 보게 되었고 2층 침실의 전등도 켜져 있음을 보게 되었다.‘벌써 온 거야? 왜 전화 한 통 없었지?’유시아는 시선을 거두고 쇼핑백을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아가씨, 쇼핑하고 오셨어요?”허씨 아주머니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저녁은 드셨어요? 대표님께서 아가씨께 드릴 음식을 준비해 놓으라고 신신당부하셨어요.”유시아는 웃으며 대답했다.“먹고
복지원에서 자라서인지 임재욱은 대학교에 다녔을 때도 친구들과 그리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같은 기숙사를 사용하고 있는 친구들과 사이가 그나마 괜찮았을 뿐 집단 활동도 거의 참가하지 않았다.그때 유시아는 그런 임재욱이 폼난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와 정반대이다.고독하고 괴벽하며 무엇인가 사람이 뒤틀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임재욱은 그녀의 말을 듣고서 잠시 멈칫거리더니 웃으며 대답했다.“맞아. 듣다 보니 일리가 있네.”그 어떠한 반박도 하지 않자, 유시아는 오히려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더 이상 아랑곳하지 않고 옷방으로 들어가 잠옷을 꺼내서 욕실로 들어가려고 했다.욕조로 들어간 유시아는 사르르 몸이 녹아들었다.바로 그때 욕실의 간유리를 통해 임재욱의 우람진 몸이 시야로 들어왔다.이윽고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는데.“시아야, 문 열어.”당황한 유시아는 욕조 안으로 몸을 더 깊이 숨기려고 했다.“왜 그러는 거예요!”“내가 회사에서 말했었지? 회의 끝나고 나서 하던 거 마저 하자고. 근데 왜 도망갔어?”임재욱은 간드러지게 웃으면서 말했다.기분이 꽤 좋아 보였고 열쇠로 문을 열고 바로 들어왔다.욕실로 들어서는 순간 당황해 마지 못한 유시아의 얼굴이 보였는데.“거봐, 평생 도망갈 수는 없다고 분명히 얘기했잖아.”“...”임재욱은 과연 뱉은 말을 기필코 지키는 남자였다.한 번 도망간 그 대가는 어마어마했다.욕조 안에서 사랑을 탐구하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지난번 유시아가 술에 취해 있을 때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는데, 별다른 기억이 나지 않았다.하지만 그때와 달리 지금 두 사람 모두 정신이 멀쩡하다.임재욱의 남자다움을 몸으로도 머리로도 고스란히 제대로 느낀 유시아이다.굵은 팔다리로 물 안에서 해초처럼 유시아를 칭칭 감싸 안은 채 절대 놓아주려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마지막으로 달리고 있을 때 유시아는 겨우 크게 숨을 내쉬며 온몸에 힘이 쫙 풀려버렸다.젖어버린 머리카락이 어깨에 찰싹 붙어있어 더더욱 괴로웠다.만족한 임재욱
포악적인 임재욱의 모습에 이미 습관 되어 있는 유시아이다.임재욱의 성격을 바꿀 수 없거니와 그러고 싶은 의향조차 없다.지금 유시아가 할 수 있는 일은 자기 손실을 최대한으로 줄이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최선을 다해 지키는 것이다.가만히 생각해 보니 참으로 적응성이 강한 여성이다.임재욱은 그녀의 어깨를 확 감싸 안으며 말했다.“네가 부담하기에는 너무 큰 별장이었어. 달마다 여러 비용도 지급해야 하잖아.”임재욱이 알고 있는 바로는 유시아가 야생가에서 출근하면서 받은 월급 중의 절반을 반월 별장과 HT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받쳐야만 했었다.하물며 소현우도 없는 이상 집을 놔둬도 쓸모가 없다는 생각이었다.소현우가 남긴 집을 처리하지 않은 이상 유시아는 과거에서 나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관리사무소에 받칠 비용으로 부담만 더해질 것이다.이유라고 하기에는 좀 억지스러운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임재욱의 ‘변명’을 듣고서 유시아는 피식 웃었다.“하긴, 제가 대표님처럼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별장 하나를 따로 장만하여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그 말을 듣게 되는 순간 임재욱은 바로 말 속에 숨겨져 있는 그 뜻을 알아차렸다.그가 소현우의 흔적에 신경을 쓰듯이 유시아 역시 신서현을 기억하는 것이다.심지어 임재욱이 더더욱 신경 쓰는 편이다. 신서현을 위해 유시아를 감옥으로 보낼 정도로.“...”유시아의 말에 임재욱은 말 문이 턱 막혀 순간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유시아는 이미 그의 손을 뿌리쳤고 욕조에서 일어나서 샤워 타월로 몸을 감쌌다.이윽고 헤어 드라이기로 머리카락을 말리기 시작했는데.온몸이 이미 사르르 녹은 유시아는 머리를 말리자마자 바로 침대로 몸을 던졌다.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힘들었다.다행히도 밤새 두 사람은 서로를 터치하지 않은 채 덤덤하게 잠만 잤다.다음 날 아침, 핸드폰 벨 소리에 유시아가 깨어났다.눈을 떠 보니 침실에는 오직 유시아 혼자만 남아 있었고 임재욱은 이미 출근하고 없었다.침대 머리에
“임청아 씨는 단순한 사람이에요...”“어릴 적부터 고생 한번 한 적 없고 나쁜 사람을 만난 적도 없는데...”“청아 아프게 할 일은 없을 거야.”유시아의 말을 끊어버리면서 한서준이 덧붙였다.“우리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신경 쓰지 마.”말을 마치고 유시아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미간이 찌푸려진 유시아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침대에서 내려와 화장실로 향했다.점심시간이 다 되자, 유시아는 한 시간 전에 미리 집을 나섰다.실은 어제저녁에 심하윤과 밥을 먹을 때, 심하윤이 유시아에게 광고 회사를 소개해 주었다.친구가 운영하는 회사라면서 더 스케치 화실을 위해 무료로 광고를 해줄 수 있다고 그랬다.세부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유시아가 직접 담당자와 의논해야 했다.경제가 내리막을 타고 있는 이 시기에서 만약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화실에 학생들도 들이기 힘들 것이다.더 스케치 화실을 광고라도 하면서 어떻게든 홍보해야만 했다.유시아도 전에 화실 장부를 본 적이 있는데, 심하윤의 말에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용재휘가 화실을 넘겨준 이상 유시아는 반드시 보란 듯이 제대로 운영하면서 어떻게든 화실을 지켜야 한다.하여 시간을 자아내 광고 회사 담당자와 얘기하려고 온 것이다.심하윤의 소개로 찾아온 손님이라는 걸 알았을 때, 광고주는 무척이나 열정적으로 유시아를 접대했다.여러 가지 홍보 방안까지 보여주면서 운을 떼기 시작했다.“편하게 훑어보세요. 마음에 드시는 방안대로 실행에 옮기면 되거든요. 심씨 가문과 여러 해 동안 합작해 온 사이라 사양하실 필요 없어요.”유시아는 광고주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네, 고마워요.”말하면서 고개를 숙인 채 방안을 자세히 훑어보기 시작했다.그중의 한 방안으로 선택하고 나서 광고회사에서 나왔는데, 해는 이미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회사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은 사람이 부근에 있는 한 유리문 앞에 모여들어 시끌벅적했다.실은 광고회사가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단독 건물이 아니라
오후, 대학 병원에서.유시아가 병실에 앉아 병상에 누워있는 이채련을 보고서 살짝 넋이 나갔다.오랜만에 만나는 것이고 그동안 무척이나 수척해진 것만 같았다. 피부도 예전처럼 곱게 빛나지 않을 정도로.의사의 말로는 별다른 큰 문제는 없다고 한다.다만 적지 않은 충격으로 혈압이 높아지면서 당분간 휴식이 필요하다고 했을 뿐이다.더 이상 그 어떠한 충격도 정서 파동이 심해져서도 안 된다면서.유시아는 아직도 이 모든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이채련처럼 시야도 넓고 그동안 이러저러한 경험도 많이 쌓았을 것인데 이러한 사기극에 휘말리게 되었으니 말이다.바깥에서 문을 천천히 밀면서 간호사가 들어왔다.그녀는 이채련이 복용해야 할 약들을 침대 머리에 가지런히 놓고 입을 열었다.“환자분 깨어나시면 꼭 드시게 하세요.”유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고맙습니다...”두 사람의 말 소리에 이채련이 깨어났다.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는데 유시아를 보자마자 당황함은 곧 짙은 혐오로 변하고 말았다.“네가 어떻게 여기에?”“쓰러지셔서 제가 병원으로 모시고 온 거예요.”유시아는 덤덤하게 말했다.“괜찮으세요? 좀 어떠세요?”“내가 아프든 말든 너랑 무슨 상관이야?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이채련은 차가운 눈빛으로 유시아를 노려보며 덧붙였다.“우리 현우가 남겨준 집도 그놈한테 줬지? 이제 곧 결혼까지 해서 사모님 소리 들으려고? 한창 바쁠 텐데 나한테 이렇게 시간 들이는 이유가 뭐야? 그 사모님 자리에 내가 침을 뱉을 수도 있는데 두렵지도 않아?”욕설이 장마처럼 쏟아져 내려왔다.유시아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입을 열었다.“제 얼굴 보기 싫으시면 도우미 보내드릴게요.”이채련은 그녀를 싫어한다. 가능한 한 죽이고 싶을 정도로.유시아를 보게 되면 이채련은 하나뿐인 아들 소현우가 저절로 생각나기 때문이다.만약 소현우가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고집만 피우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결혼식 당일에 사고가 나지 않았더라면 사망할 일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소현우를 죽인 범인
“...”유시아는 입술을 사리물었다.“알았어요. 하루빨리 완쾌하시길 바랄게요.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병실 문을 닫았다.병실을 떠난 그녀는 이채련을 전담 마크하고 있는 간호사를 다시 찾아갔다.“죄송합니다만 우리 아주머니 좀 많이 신경 써 주세요. 제가 요즘 좀 바빠서 자주 올 수 없거든요. 이따가 가사 도우미가 올 거예요. 도우미도 연세가 꽤 있으시고 아주머니도 지금 날이 서 있는 상황이라 힘들어도 좀 많이 신경 써 주세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지갑에서 20만 원을 꺼내 간호사에게 주었다.“부탁 좀 할 게요.”“이러실 필요 없어요.”간호사는 연신 거절했다.“처음 겪어보는 케이스도 아니고 걱정하지 마세요. 제 직업이기도 하니 응당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돈은 됐어요.”아무리 밀어 넣어도 받으려고 하지 않자, 유시아는 하는 수 없이 돈을 도로 거두었다.그러고는 자기 전화번호를 남겨주는데.“만약 무슨 일 있으면 저한테 수시로 전화 주세요. 시아라고 부르시면 되고요.”간호사는 유시아의 전화번호를 핸드폰에 입력했다.“네, 걱정하지 마세요.”화실 수업을 미뤄버리고 유시아는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허씨 아주머니는 유시아의 이마에 작은 붕대가 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아가씨, 다치신 거예요?”“괜찮아요. 살짝 부딪힌 것뿐이에요.”유시아는 개의치 않아 하며 슬리퍼로 갈아 신고 위층으로 올라가려고 했다.하지만 순순히 보내주는 허씨 아주머니가 아니었다.유시아 앞을 가로막고서 이마를 천천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흉터라도 생기면 어떡하려고 그러세요. 감염될 수도 있는데... 홈닥터 오라고 할게요. 아니면 대표님과 병원으로 가셔서 검사받아 보실래요?”유시아는 어이가 없었다.“그 정도 아니에요. 그냥 아주 살짝 다친 거예요.”말을 마치고 허씨 아주머니를 돌아 바로 올라갔다.허씨 아주머니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이윽고
“손가락은 왜 그렇게 내밀고 있는 거예요?”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유시아는 의아하기만 했다.그와 반대로 임재욱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데.“용케 알아 보고 바보가 된 건 아니네.”“재욱 씨!”유시아는 그제야 알아차리면서 넓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솜 주먹으로 임재욱을 때리면서 애교 아닌 애교를 부리는데.“나빴어요! 재욱 씨야말로 바보 아니에요?”임재욱은 나지막이 웃으면서 여세를 몰아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들어 안았다.그렇게 한 몸이 된 채로 침실 안을 여기저기 돌아다녔다.유시아는 그의 목을 꼭 끌어안고서 얼굴을 가슴에 기대었다.불현듯 신서현과 함께 있을 때 그의 모습이 어떠한지 궁금하기도 했다.하지만 그 모습이 과연 어떠할지 알 길도 없었다.자기와 함께 있을 때는 이러한 모습인데, 왠지 싫지만은 않았다.알콩달콩한 분위기 속에 두 사람 모두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임재욱은 그녀를 들어 안은 채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조금 높은 서랍장 위로 내려놓았다.워낙 10센티미터 정도 키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이다.평소에 유시아는 늘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이렇게 내려다보는 건 처음이었다.살짝 붉어진 얼굴에는 아직도 수줍은 미소가 남아 있었다.한 송이의 백합처럼 순결하지만 강인해 보여 좋았다.임재욱은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턱에 입을 맞추었다.“시아야, 좋아?”그 질문에 유시아는 살짝 놀라면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그 질문 속에 다른 뜻이 들어있는 것도 같았다.유시아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임재욱은 뒤꿈치를 들고서 그녀의 얼굴에 뽀뽀했다.그러고는 애매하기 그지없게 웃기 시작하는데.“그럼, 내가 기분 좋게 만들어 줄까?”바로 그 뜻을 알아차린 유시아는 그를 확 밀어 버렸다.“안 돼요! 아직 날도 밝은데...”“커튼 치면 어두워지잖아.”임재욱은 말하면서 그녀를 서랍장 위에서 내려 주면서 그대로 안고 침대로 갔다.여름이라 해가 무척이나 길었다.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나서 임재욱은 곤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뭐?”“한서준 씨는 당당해요?”유시아는 바로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임씨 가문에 접근한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 할아버지, 재욱 씨 그리고 나까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청아 씨만이 한서준 씨를 사랑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쭉 모르는 척을 하며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한서준 씨 역시 청아 씨를 이용한 게 아닌가요?”마지막 한 마디에 한서준은 침묵하고 말았다.그렇다. 임청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유시아가 ‘스파이’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임씨 가문 천금을 노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임청아 대한 마음은 모략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점점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띠고 다가왔던 임청아가 어두운 자신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따라서 한서준은 임청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생기게 된 것이다.임태훈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꼭 자기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청아 씨 지금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에요.”“만약 청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차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려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택시에 오른 유시아는 긴 망설임 끝에 끝내는 더 스케치 화실 주소를 운전 기사에게 알렸다.차는 화실 맞은 편에 세워졌고 유시아는 화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화실 안의 상황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경호원들이 임태훈을 사이에 두고 화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임태훈은 벤틀리에 올라 강한 기운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화실로 향해 달려갔다.화실 안과 밖은 겉은
전화를 마치고 유시아는 혼자 밖에 없는 휴게실을 보고서 깊은 번뇌에 잠겼다.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임태훈처럼 막무가내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인이 있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태훈이 끔찍이 여기는 임청아를 유시아가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애꿎은 자기 화실을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집안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일단 남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으니,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유시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불안함도 점점 커졌다.지금 운영하고 있는 더 스케치 화실도 용재휘가 먼저 시작한 것인데, 그와 더불어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넘겨주었는데, 만약 이대로 화실을 망쳐버린다면 용재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임재욱과 임태훈이 어느 정도로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화실이 그들 싸움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단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그렇게 한참이나 심장을 조이고 있었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유시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 채팅방에 오늘 갑자기 일이 있다며 수업을 뒤로 미룬다고 알렸다.언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지는 소식을 기다리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톡을 보내고서 유시아는 더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바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병원 대문을 나오자마자 한서준이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유시아.”유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났다.직감이 알려주건대, 절대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화실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한서준은 쉽사리 유시아를 놓아 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물어볼 일이 있어.”말하면서 근처에 있는 지프차를 가리켰다.“차에 타서 얘기 하자.”“그쪽이랑 할 말
유시아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집사의 바람대로 타이르기 시작했다.“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하거든요. 일이 어찌 됐든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임청아 그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건강 회복되면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집에 감금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어찌 됐든 할아버지 마음은 한결같을 거예요. 청아 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 터놓고 얘기하고 나면 오해가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임청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아이 낳고 나면 할아버지도 서준이도 원한을 내려놓고 행복만 할 수 있다고요.”“근데 이렇게 몸도 아끼지 않고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가면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점점 더 짙어질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도우미 손에서 보신탕을 가져와 천천히 불며 임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임청아는 생각 밖으로 무척이나 순순하게 유시아의 말을 따랐고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보신탕을 받아 마셨다.도우미와 집사는 두 사람이 티키타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임청아가 뭐라도 먹기 시작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으며 자리까지 비켜주려고 했다.두 사람이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을까 봐 눈치껏 일어서려는 것이다.“작은 사모님, 아가씨와 천천히 얘기하고 계세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네, 가보세요.”도우미 일행이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한서준 씨는 알고 있어요?”임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잖아요.”요즘 임태훈뿐만 아니라 한서준도 눈을 부라리고 임청아를 찾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자 아파트도 호텔도 들어갈 수 없었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유시아 화실에 몸을 숨기고 지낸 것
임청아 이름 석 자가 임재욱의 입에서 나오자, 유시아는 순간 청천벽력을 맞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청아 씨가 왜 병원에 있는 거죠?”임청아는 임신한 것을 알고 매사에 조심하며 걸음 하나도 천천히 옮겼었다.게다가 해외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여 해외로 떠날 준비까지 마쳤다고 했었다.그런데 관건이 되는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할아버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임재욱은 말하면서 차갑게 웃었다.“네 화실에 청아 숨겨 놓았잖아. 할아버지께서 그걸 과연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 오늘 화실로 청아 데리러 갔었는데, 가지 않겠다고 청아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억지로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며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그렇다면 아이를 유산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의 습관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이 화살은 결국 유시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임재욱이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유시아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약해지는 마음에 언젠가는 구렁이에 빠지게 될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꾸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병원 주소 보내줄 테니 얼른 가 봐.”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고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같은 시각, 병원 안에서.임청아는 이미 수술을 마쳤고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이미 가문의 집사와 간호인이 옆에 있었고 병실 문 앞에는 임태훈이 보낸 경호원도 있었다.다만 경호원이 경계해야 할 상대는 유시아가 아니라 한서준이다.따라서 유시아는 별다른 막힘없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상에 누워 있는 임청아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주 공손하게 유시아에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임재욱은 멈칫거리고 말았다.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별거하자는 뜻이야?”“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유시아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으로 시연이한테 집중해도 되잖아요. 나도 마침 어머님 곁에 좀 있어드리고... 서로에게 지금 이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래. 네가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하자.”말을 마치고 그는 계속 밥을 먹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서 아련하게 웃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이튿날 아침, 유시아는 임재욱이 출근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상복 몇 벌과 일상용품을 챙겨 작은 트렁크 안에 놓고 바로 이채련한테 가려고 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유시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사모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죠?”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친척분이 좀 위독하신데 제가 옆에서 좀 챙겨드리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고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트렁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이채련이 지내고 있는 병실이 VIP 병실로 널찍한 객실까지 갖춰져 있다.유시아는 간호사에게 접이식 침대와 이불을 요구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잘 자리가 아늑하게 마련되었다.이채련은 더 이상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어 하루 24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다.얼굴도 하도 여위어 본연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그전에도 유시아는 이채련에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이채련은 행여나 자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흠이 생기게 될까 봐 동의하지 않았었다.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갖은 풍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