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아는 얼굴을 한쪽으로 돌려 임재욱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그럼, 정유라 씨한테 물어보러 가세요.”말은 하지 않아도 임재욱은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정유라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리가 없다면서.하여 더 이상 묻지도 않고 웃으면서 자기와 눈이 마주치게끔 유시아의 어깨를 꼭 움켜쥐었다.“무슨 말을 했든 마음에 두지 마. 그냥 혼자서 헛소리했다고 생각해.”유시아는 그런 그의 두 눈을 마주하면서 아랫입술을 살포시 깨물었다.“네.”오후쯤이 되자 손님들이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했다.따라서 임태훈의 포커페이스도 점점 벗겨지기 시작했는데, 임재욱이든 임청아든 염장지르는 법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그들이 데리고 온 유시아든 한서준이든 모두 임태훈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다.하필이면 비할 데 없이 위풍당당한 칠순 잔치로 데리고 왔으니, 화를 억누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임재욱은 그런 그의 눈치를 보고 싶지도 않고 끝나는 즉시 유시아를 데리고 나왔다.그림레이크로 돌아왔을 때 시간은 딱 마침 오후였다.도우미 허씨 아주머니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대표님, 아가씨, 오셨어요. 저녁 준비할까요?”“네.”임재욱은 신발을 갈아 신으면서 말했다.“담백한 음식으로 준비하세요.”칠순 잔치 자리에 산해진미로 별의별 음식이 다 있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집밥이다.“시아야, 넌 뭐 먹고 싶어?”“뭐나 상관없어요.”유시아 역시 하이힐을 벗고 푸근한 슬리퍼로 갈아신고서는 바로 침실로 향했다.늦은 밤, 임재욱은 서재에서 업무를 보고 유시아는 방안에서 조각상을 보고 스케치를 하고 있었다.용재휘의 손에서 화실을 건네받은 뒤로 임재욱은 별장에 방 한 칸을 마련하여 화실로 쓰게끔 했다.그녀가 지루해할까 봐 일부러 전문적인 도구와 조각상을 여러 개나 준비해 두었다.펜을 잡고 있는 유시아는 그림을 그리다가 서서히 넋이 나가기 시작했다.‘넌 네가 원하는 자유를 얻을 수 있어.’한서준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임재욱이 지금처럼 뭐나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유시아는 밤새 뒤척였다.임재욱의 곁에서 한쪽으로 누워 해가 서서히 떠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잠이 천천히 쏟아지기 시작했다.생각이 많아서인지 편히 자지 못했고 심지어 악몽까지 꾸었다.꿈속에서 임재욱은 블랙 코트를 입고 아주 높은 곳에 서 있었다.바람도 어찌나 강하게 불어오는지 그의 코트까지 휘날릴 지경이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올려다보면서 행여나 떨어져 내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어 계속 그를 불렀다.“재욱 씨, 재욱 씨...”돌아오는 대답이 없었고 자기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문득 눈을 떠보니 익숙한 천장과 크리스탈 라이트가 눈에 들어왔다.이곳은 두 사람의 침실이고 모든 것이 그대로다.유시아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흥건해진 땀을 닦았다.이윽고 고개를 돌려 알람을 확인했는데 때는 이미 11시로 달려가고 있었다.임재욱은 이미 일찍이 출근했고 침실에는 유시아 혼자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다행히도 오후에야 수업이 있기에 그리 당황하지는 않았다.침대에서 일어나 바로 욕실로 향했다.따뜻하게 샤워하고 나서 옷까지 갈아입고 밥 먹으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거실로 내려와 보니 젊은 하인이 뭉치라고 하는 고양이에게 말린 물고기를 먹이고 있었다.유시아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하인은 그제야 임재욱이 정한 규칙이 떠올랐는지 그녀를 향해 멋쩍게 웃었다.“내려오셨네요.”말하면서 고양이를 안고 위층으로 올라갈 예정이었다.“괜찮아요. 여기서 데리고 놀아도 돼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바로 부엌으로 향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토스트에 따뜻한 우유 한잔을 건네주었다.먹으려고 하던 찰나 문밖에서 익숙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려보니 임재욱이 아니라 강석호가 그 차에서 내려 별장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거실로 들어서자마자 강석호는 웃으며 유시아에게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유시아는 웃으며 입을 여는데.“재욱 씨가 뭘 또 놓고 갔나 봐요?”“USB를 놓고 오셨다고 그래서요. 오후에 회의가 열리는데 꼭 있어야 하거든요.”“올
유명 브랜드 맞춤 제작 디자인으로 전 세계에 100벌도 안 되는 걸로 기억하고 있다.잡지를 훑어보다가 임재욱은 유시아에게 어울릴 것 같아 전에 합작했었던 패션 회사에 연락해서 구매한 것이다.예쁘게 차려입으니 제 주인을 만난 것만 같았다.“시아야.”임재욱은 일어서서 그녀에게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갑자기 무슨 일이야?”“어젯밤에 잠을 좀 설쳤더니 머리가 아파서요. 집에만 있자니 답답해서 나왔어요.”임재욱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다른 한 손으로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슬며시 넘겨주었다.“집에만 있으면 그럴 수도 있어. 자주 나와서 걷는 것도 좋아...”그 광경에 강석호는 하고 싶었던 말을 모조리 삼켜버리고 USB만 놓고 자리를 비켜주었다.임재욱의 주의력은 오로지 유시아의 얼굴에만 있었다.“점심은 먹었어?”“입맛이 없어서 우유만 마시고 나왔어요.”유시아는 말하다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재욱 씨는요? 점심 먹었어요?”“직원 식당에서 대충.”양손으로 유시아의 허리를 감싸 안고 그녀의 이마에 살며시 기대었다.“근데 너 보자마자 갑자기 또 배가 고파...”유시아는 좀 지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며 그를 확 밀쳤다.“하여튼!” “네가 하도 예쁘게 하고 와서 그런 거야.”임재욱은 웃으면서 그녀를 안아 사무실 책상 위에 앉혔다.이마에 뽀뽀하고서 더없이 달콤한 목소리로 입을 여는데.“아직도 머리 아파? 응?”유시아는 뒤로 계속 피하면서 고개를 저었다.“그만해요...”아랑곳하지 않고 임재욱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하얀 목에 손을 대면서 동맥에 따라 움직이더니 간드러지게 훅 불기까지 했다.“여기는? 아파?”“재욱 씨...”도발적인 임재욱의 손길에 유시아는 점점 화끈거렸다.“내 목에 자국이라고 남기기만 해 봐요!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별장도 아닌데 함부로 그랬다가 지나가는 직원이 보기라도 하면 어떡하라고!’임재욱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턱을 탁 올리며 엄지로, 입술로 슬며시 문질렀다.“회사로 뿔쑥 찾아와서 일도
반월 별장, 인테리어 끝낸 신혼집, 증서 있음, 저가 매매...유시아는 순간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렸다.소현우와 함께 새로운 생활을 꿈꾸었던 그 신혼집, 피난처로 여겼던 그 따뜻한 곳이 어느새 저가로 매매되고 있었다.마우스를 꼭 잡고 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메인 페이지로 들어가게 되었다.별장 내부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고 별장 안은 어느새 텅텅 비어 있었다.소현우와 며칠 동안 정성껏 골랐던 가구들이 모조리 사라진 채 빈 껍데기만 남아 있었다.별장뿐만 아니라 소현우의 다른 아파트도 임재욱 밑으로 전이되었기에 똑같이 매매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이때 밖에서 문이 밀리면서 정장을 입은 비서가 차와 다과를 들고 들어왔다.그녀는 무심결에 소파 쪽을 보았는데 유시아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임재욱의 책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차 좀 드세요.”유시아는 찻잔을 건네받으며 웃었다.“고마워요.”따뜻한 찻잔을 손에 꼭 쥐고서 다시 입을 여는데.“회의는 언제쯤에 끝나요?”비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한 시간 정도 걸릴 거예요. 보통 회의 시간이 거의 한 시간 정도 되거든요.”기다림에 유시아가 지친 줄 알고 비서는 창가 쪽에 있는 헬스 기구를 가리키며 말했다.“심심하시면 저쪽으로 가셔서 운동하면서 시간 보내셔도 좋을 것 같아요.”유시아는 사무실을 훑어보더니 다시 묻는데.“여기서 운동하면 재욱 씨가 알 수 있을까요? 혹시 여기 안에 CCTV 있어요?”비서는 순간 실소를 금치 못했다.“아가씨께서 저기서 운동하신다고 한들 대표님께서 화내실 것도 아닌데요. 뭐가 걱정 되시죠?”유시아는 러닝 머신을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실은 제가 몸이 좀 뻣뻣해서 재욱 씨가 보고 놀릴까 봐 그래요. 자주 놀렸거든요.”“그렇다면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 안에 CCTV 없어요.”유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고마워요.”“그럼, 전 이만 나가서 일 보겠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얼마든지 부르세요. 바로 옆에 있어요.”비서가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한숨
위층도 마찬가지로 방마다 텅텅 비어 있었다. 풀 하나 나지 않는 사막처럼.유시아는 멍하니 이방 저방 돌아다니면서 무엇인가 계속 찾고 있는 모습이다.그러나 이곳에 소현우와 관련된 건 그 무엇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소현우가 떠난 지 하도 오래되어 이 별장 안에 남아 있던 그의 숨결마저도 서서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옅어져 버렸다. 하나도 남김없이.소현우가 없는 이상 이곳은 더 이상 피난처가 아니다.유시아는 2층 난간에 서서 텅텅 비어 있는 거실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고 밖으로 걸어나가 별장 구역을 벗어나 길거리에서 택시를 잡았다.“아저씨, HT 아파트로 가주세요.”그곳은 결혼 전 소현우가 살았던 아파트로 소운 그룹 옛 주소와 거리가 가까워 그곳에서 오랫동안 지냈었다.다만 그 아파트도 이제 곧 임재욱의 손에 의해 텅텅 비어버릴 것이다.하여 유시아는 먼저 손을 써서 소현우의 모든 물건을 미리 챙겨서 자기 집으로 가지고 갈 생각이다.아파트 안에는 물건이 그리 많지 않았다.소현우는 그녀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으면서 반월 별장을 구매했을 때 이미 많은 것들을 별장으로 옮겨 갔었다.지금 이곳에 남은 건 태반이 낡은 물건 들이고 소현우가 버리고 간 것들이다.전에는 그리고 소중한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임재욱이 몽땅 쓸어버리고 있자, 이곳에 있는 모든 것들이 더없이 소중해졌다.유시아는 특별히 이사 센터에 연락까지 했다.낡은 소파, 침대 시트, 찻잔...이곳에서 여러 해 동안 지낸 거라 안에 있는 물건들이 잡다했다.하지만 이사 센터 직원들의 도움으로 아주 빨리 포장을 끝낼 수 있었다.유시아가 물건을 체크하고 있을 때 한 직원이 다가와 물었다.“손님, 서재에 매입형 금고가 있는데, 중요한 거라도 들어있는지 확인해야 하는 게 아닙니까?”그 소리를 듣고서 유시아는 바로 서재로 향했다.전에 본 적이 있는 금고를 소현우가 쓰는 것도 봤었다.평소에 남의 일에 관심을 가지는 편이 아닌 그녀는 소현우에게 비밀번호도 알아낸 적이 없다.
수업하는 내내 유시아는 도저히 집중할 수 없었다.강의하고 있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금고 비밀번호만 유추하고 있었다.‘어머님 생신도 아니고 우리 결혼기념일도 아니야. 그렇다면 또 뭐가 있을까?’‘또 다른 소중한 날을 내가 잊고 있는 걸까? 그걸 비밀번호로 정한 걸까?’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슬슬 아프기까지 했다.수업을 마친 뒤, 퇴근하려고 한창 준비하고 있던 그때 임재욱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시아야, 아직도 머리 아파?”“많이 좋아졌어요. 근데 무슨 일이에요?”임재욱은 요즘 영문도 알 수 없는 채 스쿠터에 푹 빠지게 되었다. 어쩌면 유시아에게 푹 빠져서 스쿠터는 그냥 핑계일 지도 모른다.유난히 눈에 띄는 스쿠터를 타고 거의 매일 회사로 마중을 나왔었는데 오늘은 오지 않았다.스쿠터를 타고 다니면 차가 막히지 않아서 좋았는데.“시아야, 갑자기 회사에 급히 처리해야 할 업무가 생겨서 마중 가지 못했어. 조심해서 들어가고 밥 잘 챙겨 먹고 먼저 자. 좀 늦을 것 같으니 기다리지 말고.”임재욱의 그 말을 듣게 되는 순간 유시아는 순간 눈살이 찌푸려지면서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한동안 야근을 하지 않았을뿐더러 임재욱은 늘 제시간에 맞춰서 마중을 나왔었으니 말이다.오늘 도청 장치를 그의 사무실 의자 밑에 붙이자마자 야근한다고 하니 이 모든 것이 우연은 아닌 것 같았다. 아니면 도둑이 제 발에 저린 걸까?심지어 거짓말까지 하고서 몰래 반월 별장에 갔었고 HT 아파트의 모든 물건을 몰래 옮겨버리기도 했다.‘재욱 씨가 알아버린 걸까?’서로 이상한 느낌이 드는 순간이었다.한참 동안 돌아오는 답이 없자, 임재욱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시아야, 왜 그래?”“별거 아니에요.”유시아는 멋쩍은 웃음과 더불어 덧붙였다.“쉬면서 일하세요.”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더 스케치 화실은 정운시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저녁 무렵이 되니 차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몹시나 시끌벅적거렸다.차가
용재휘가 그림을 그만두었다는 말을 듣게 되는 순간 유시아는 입맛이 뚝 떨어져 버렸다.미술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이 있을뿐더러 용재휘의 그림 작품은 늘 살아 숨 쉬고 있는 느낌을 주곤 했다.그 말인즉슨, 그림을 그만두기에는 아까운 인재라는 말이다.임재욱과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만 않았어도 어쩌면 당분간 해외로 갈 일도 없이 평범하게 좋아하는 그림 그리면서 사랑을 쏟아부은 화실을 운영하면서 살았을지도 모른다.심하윤은 고개를 들자마자 한껏 어두워진 유시아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그런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워서인지 천천히 위로하기 시작했다.“시아야,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어. 언젠가는 가업 이어받으러 해외로 떠났어야 했어. 다만 부득이한 일로 좀 앞당겨진 것뿐이야. 삼촌이랑 숙모에게 자식이라고는 재휘 하나뿐인데, 당연히 가업을 이어가게끔 했을 거야. 내 말은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니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라는 거야. 미술에서 큰 성과를 따내지 못한 이상 재휘는 집안 어른들의 지시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어. 하물며 삼촌 눈에는 재휘 그림 실력은 한낱 보잘것없고 동네 아이들이나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계시거든.”유시아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어색한 분위기가 잠시 흐르고 심하윤은 한참 지나고 나서야 나지막이 물었다.“잘 지냈어?”실은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묻고 싶었으나 미안한 마음에 도통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임재욱 그 나쁜 놈 옆에서 잘 지낼 리가 없다는 걸 뻔히 알고 있는데.만약 심씨 가문의 일만 아니었다면 유시아는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면서.심하윤은 생각하면 할수록 죄책감이 깊어져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시아야,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실은 모르겠어...”그런 그녀를 향해 유시아는 봄날의 햇살처럼 웃었다.“괜찮아요. 저한테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어쩌면 재욱 씨랑 특별한 인연이 있어서 자꾸 이렇게 얽히고 있을 수도 있고요. 그리고 저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언니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일들은 없어요.”홀가분한 표
5년 전, 피고석 자리에 처량하게 서 있던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유시아이다.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양손을 묶고 있는 수갑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유시아는 재판장의 선고를 들어야만 했다.한 적도 없는 일이지만 죄명에 따라 그 증거는 더없이 정확했다.하늘에 맹세코 절대 한 적이 없다고 해도 재판장의 소리는 서서히 숨통을 조여왔었다.임재욱을 상대로 단 한 번도 경계심을 일으킨 적이 없었던 유시아는 그의 함정에 아무런 의심도 없이 빠져들면서 그 어떠한 변명도 하지 못했다.‘3년’이라고 떡 하니 쓰여 있었던 재판서와 이혼 합의서는 그녀에게 준 임재욱의 신혼 선물이 된 셈이었다.어느덧 시간도 지났고 전에 있었던 일이라 유시아는 그 모든 걸 잊은 채 살고 있는 줄만 알았다.하지만 임재욱의 사무실에 다시 들어선 순간 악몽과도 같았던 그 모든 순간이 하나 둘씩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운명은 그토록 기묘하고 잔인하다고.하지도 않은 일을 신서현 하나 때문에 억지로 자기한테 뒤집어씌웠다고.하지만 지금은 한 번 해보려고 한다. 그때 하지도 않았던 일로 대가를 받아야만 했었던 ‘죄’들을.다시 감옥으로 보낼 것인지 아니면 임태훈처럼 위험 저택을 찾아서 죽일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다.임재욱의 마지노선을 건드리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해보고 싶었다.심하윤과 저녁을 다 먹고 나서 두 사람은 영화도 한 편 보았다.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쇼핑까지 하다 보니 그린레이크로 돌아왔을 때 시간은 이미 9시쯤 되어 있었다.별장 대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유시아는 임재욱이 평소에 자주 몰고 다니는 마이바흐를 보게 되었고 2층 침실의 전등도 켜져 있음을 보게 되었다.‘벌써 온 거야? 왜 전화 한 통 없었지?’유시아는 시선을 거두고 쇼핑백을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아가씨, 쇼핑하고 오셨어요?”허씨 아주머니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저녁은 드셨어요? 대표님께서 아가씨께 드릴 음식을 준비해 놓으라고 신신당부하셨어요.”유시아는 웃으며 대답했다.“먹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