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듣고서 한서준의 입가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난 단 한 번도 내가 걔보다 얼마나 대단한지 생각해 본 적이 없어. 하지만 적어도 이번 거래로 넌 네가 원하던 자유를 얻을 수 있어.”도청기를 꼭 움켜쥐고 있는 유시아의 손을 살짝 두드리면서 덧붙였다.“급히 대답할 필요 없어. 천천히 기다릴게.”말을 마치고 바로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유시아는 꼭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펼치면서 그 속에 가만히 누워있는 도청기를 보았다.망설인 끝에 버리지는 못하고 가방 안에 깊숙이 챙겨두었다.홀로 정원에 남아 머리를 좀 식히고 나서야 유시아도 클럽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들어가자마자 로열블루 드레스를 입은 정유라가 정면으로 오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두 사람은 딱 마침 서로를 마주치게 되었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법 피해 갈 수 없었다.실은 정유라도 올 것이라고 어느 정도 예측은 하고 있었다. 임씨 가문과 정씨 가문은 세세 대대로 교제를 이어왔고 그 두 사람이 이혼했을지라도 그 교제는 끊이지 않을 거라고.딱 마침 그 예측이 현실로 바뀌는 순간이었다.유시아는 아랫입술을 사리물고 그녀와 그냥 스쳐 지나가려고 했으나 정유라의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시아 씨, 축하드려요...”차갑고 악독한 눈빛으로 유시아를 바라보면서 비아냥거렸다.“이제 곧 다시 사모님 소리 듣게 될 텐데 기분이 어떠세요?”“미안합니다만 그쪽과 상관없는 일이고 사적인 일이니, 대답할 의무가 없다고 봅니다.”아무런 표정도 없이 유시아가 말했다.이윽고 계속 고개를 숙이고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이때 정유라는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확 잡아당기며 죽일 듯이 노려보는데, 한참 지나고 나서야 독이 가득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미리 경고하는데, 사모님 소리는 나만 들을 수 있어! 넌 절대 그 자리에 오르지 못할 거야!”유시아는 그런 정유라의 두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임재욱 때문에 야생가 앞에서 자기를 납치하려고 했던 그때 그 모습이 떠올랐다.어쩌면 임재욱을 너무 사랑해서
유시아는 얼굴을 한쪽으로 돌려 임재욱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그럼, 정유라 씨한테 물어보러 가세요.”말은 하지 않아도 임재욱은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정유라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리가 없다면서.하여 더 이상 묻지도 않고 웃으면서 자기와 눈이 마주치게끔 유시아의 어깨를 꼭 움켜쥐었다.“무슨 말을 했든 마음에 두지 마. 그냥 혼자서 헛소리했다고 생각해.”유시아는 그런 그의 두 눈을 마주하면서 아랫입술을 살포시 깨물었다.“네.”오후쯤이 되자 손님들이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했다.따라서 임태훈의 포커페이스도 점점 벗겨지기 시작했는데, 임재욱이든 임청아든 염장지르는 법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그들이 데리고 온 유시아든 한서준이든 모두 임태훈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다.하필이면 비할 데 없이 위풍당당한 칠순 잔치로 데리고 왔으니, 화를 억누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임재욱은 그런 그의 눈치를 보고 싶지도 않고 끝나는 즉시 유시아를 데리고 나왔다.그림레이크로 돌아왔을 때 시간은 딱 마침 오후였다.도우미 허씨 아주머니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대표님, 아가씨, 오셨어요. 저녁 준비할까요?”“네.”임재욱은 신발을 갈아 신으면서 말했다.“담백한 음식으로 준비하세요.”칠순 잔치 자리에 산해진미로 별의별 음식이 다 있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집밥이다.“시아야, 넌 뭐 먹고 싶어?”“뭐나 상관없어요.”유시아 역시 하이힐을 벗고 푸근한 슬리퍼로 갈아신고서는 바로 침실로 향했다.늦은 밤, 임재욱은 서재에서 업무를 보고 유시아는 방안에서 조각상을 보고 스케치를 하고 있었다.용재휘의 손에서 화실을 건네받은 뒤로 임재욱은 별장에 방 한 칸을 마련하여 화실로 쓰게끔 했다.그녀가 지루해할까 봐 일부러 전문적인 도구와 조각상을 여러 개나 준비해 두었다.펜을 잡고 있는 유시아는 그림을 그리다가 서서히 넋이 나가기 시작했다.‘넌 네가 원하는 자유를 얻을 수 있어.’한서준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임재욱이 지금처럼 뭐나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유시아는 밤새 뒤척였다.임재욱의 곁에서 한쪽으로 누워 해가 서서히 떠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잠이 천천히 쏟아지기 시작했다.생각이 많아서인지 편히 자지 못했고 심지어 악몽까지 꾸었다.꿈속에서 임재욱은 블랙 코트를 입고 아주 높은 곳에 서 있었다.바람도 어찌나 강하게 불어오는지 그의 코트까지 휘날릴 지경이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올려다보면서 행여나 떨어져 내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어 계속 그를 불렀다.“재욱 씨, 재욱 씨...”돌아오는 대답이 없었고 자기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문득 눈을 떠보니 익숙한 천장과 크리스탈 라이트가 눈에 들어왔다.이곳은 두 사람의 침실이고 모든 것이 그대로다.유시아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흥건해진 땀을 닦았다.이윽고 고개를 돌려 알람을 확인했는데 때는 이미 11시로 달려가고 있었다.임재욱은 이미 일찍이 출근했고 침실에는 유시아 혼자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다행히도 오후에야 수업이 있기에 그리 당황하지는 않았다.침대에서 일어나 바로 욕실로 향했다.따뜻하게 샤워하고 나서 옷까지 갈아입고 밥 먹으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거실로 내려와 보니 젊은 하인이 뭉치라고 하는 고양이에게 말린 물고기를 먹이고 있었다.유시아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하인은 그제야 임재욱이 정한 규칙이 떠올랐는지 그녀를 향해 멋쩍게 웃었다.“내려오셨네요.”말하면서 고양이를 안고 위층으로 올라갈 예정이었다.“괜찮아요. 여기서 데리고 놀아도 돼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바로 부엌으로 향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토스트에 따뜻한 우유 한잔을 건네주었다.먹으려고 하던 찰나 문밖에서 익숙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려보니 임재욱이 아니라 강석호가 그 차에서 내려 별장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거실로 들어서자마자 강석호는 웃으며 유시아에게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유시아는 웃으며 입을 여는데.“재욱 씨가 뭘 또 놓고 갔나 봐요?”“USB를 놓고 오셨다고 그래서요. 오후에 회의가 열리는데 꼭 있어야 하거든요.”“올
유명 브랜드 맞춤 제작 디자인으로 전 세계에 100벌도 안 되는 걸로 기억하고 있다.잡지를 훑어보다가 임재욱은 유시아에게 어울릴 것 같아 전에 합작했었던 패션 회사에 연락해서 구매한 것이다.예쁘게 차려입으니 제 주인을 만난 것만 같았다.“시아야.”임재욱은 일어서서 그녀에게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갑자기 무슨 일이야?”“어젯밤에 잠을 좀 설쳤더니 머리가 아파서요. 집에만 있자니 답답해서 나왔어요.”임재욱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다른 한 손으로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슬며시 넘겨주었다.“집에만 있으면 그럴 수도 있어. 자주 나와서 걷는 것도 좋아...”그 광경에 강석호는 하고 싶었던 말을 모조리 삼켜버리고 USB만 놓고 자리를 비켜주었다.임재욱의 주의력은 오로지 유시아의 얼굴에만 있었다.“점심은 먹었어?”“입맛이 없어서 우유만 마시고 나왔어요.”유시아는 말하다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재욱 씨는요? 점심 먹었어요?”“직원 식당에서 대충.”양손으로 유시아의 허리를 감싸 안고 그녀의 이마에 살며시 기대었다.“근데 너 보자마자 갑자기 또 배가 고파...”유시아는 좀 지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며 그를 확 밀쳤다.“하여튼!” “네가 하도 예쁘게 하고 와서 그런 거야.”임재욱은 웃으면서 그녀를 안아 사무실 책상 위에 앉혔다.이마에 뽀뽀하고서 더없이 달콤한 목소리로 입을 여는데.“아직도 머리 아파? 응?”유시아는 뒤로 계속 피하면서 고개를 저었다.“그만해요...”아랑곳하지 않고 임재욱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하얀 목에 손을 대면서 동맥에 따라 움직이더니 간드러지게 훅 불기까지 했다.“여기는? 아파?”“재욱 씨...”도발적인 임재욱의 손길에 유시아는 점점 화끈거렸다.“내 목에 자국이라고 남기기만 해 봐요!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별장도 아닌데 함부로 그랬다가 지나가는 직원이 보기라도 하면 어떡하라고!’임재욱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턱을 탁 올리며 엄지로, 입술로 슬며시 문질렀다.“회사로 뿔쑥 찾아와서 일도
반월 별장, 인테리어 끝낸 신혼집, 증서 있음, 저가 매매...유시아는 순간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렸다.소현우와 함께 새로운 생활을 꿈꾸었던 그 신혼집, 피난처로 여겼던 그 따뜻한 곳이 어느새 저가로 매매되고 있었다.마우스를 꼭 잡고 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메인 페이지로 들어가게 되었다.별장 내부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고 별장 안은 어느새 텅텅 비어 있었다.소현우와 며칠 동안 정성껏 골랐던 가구들이 모조리 사라진 채 빈 껍데기만 남아 있었다.별장뿐만 아니라 소현우의 다른 아파트도 임재욱 밑으로 전이되었기에 똑같이 매매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이때 밖에서 문이 밀리면서 정장을 입은 비서가 차와 다과를 들고 들어왔다.그녀는 무심결에 소파 쪽을 보았는데 유시아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임재욱의 책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차 좀 드세요.”유시아는 찻잔을 건네받으며 웃었다.“고마워요.”따뜻한 찻잔을 손에 꼭 쥐고서 다시 입을 여는데.“회의는 언제쯤에 끝나요?”비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한 시간 정도 걸릴 거예요. 보통 회의 시간이 거의 한 시간 정도 되거든요.”기다림에 유시아가 지친 줄 알고 비서는 창가 쪽에 있는 헬스 기구를 가리키며 말했다.“심심하시면 저쪽으로 가셔서 운동하면서 시간 보내셔도 좋을 것 같아요.”유시아는 사무실을 훑어보더니 다시 묻는데.“여기서 운동하면 재욱 씨가 알 수 있을까요? 혹시 여기 안에 CCTV 있어요?”비서는 순간 실소를 금치 못했다.“아가씨께서 저기서 운동하신다고 한들 대표님께서 화내실 것도 아닌데요. 뭐가 걱정 되시죠?”유시아는 러닝 머신을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실은 제가 몸이 좀 뻣뻣해서 재욱 씨가 보고 놀릴까 봐 그래요. 자주 놀렸거든요.”“그렇다면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 안에 CCTV 없어요.”유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고마워요.”“그럼, 전 이만 나가서 일 보겠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얼마든지 부르세요. 바로 옆에 있어요.”비서가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한숨
위층도 마찬가지로 방마다 텅텅 비어 있었다. 풀 하나 나지 않는 사막처럼.유시아는 멍하니 이방 저방 돌아다니면서 무엇인가 계속 찾고 있는 모습이다.그러나 이곳에 소현우와 관련된 건 그 무엇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소현우가 떠난 지 하도 오래되어 이 별장 안에 남아 있던 그의 숨결마저도 서서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옅어져 버렸다. 하나도 남김없이.소현우가 없는 이상 이곳은 더 이상 피난처가 아니다.유시아는 2층 난간에 서서 텅텅 비어 있는 거실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고 밖으로 걸어나가 별장 구역을 벗어나 길거리에서 택시를 잡았다.“아저씨, HT 아파트로 가주세요.”그곳은 결혼 전 소현우가 살았던 아파트로 소운 그룹 옛 주소와 거리가 가까워 그곳에서 오랫동안 지냈었다.다만 그 아파트도 이제 곧 임재욱의 손에 의해 텅텅 비어버릴 것이다.하여 유시아는 먼저 손을 써서 소현우의 모든 물건을 미리 챙겨서 자기 집으로 가지고 갈 생각이다.아파트 안에는 물건이 그리 많지 않았다.소현우는 그녀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으면서 반월 별장을 구매했을 때 이미 많은 것들을 별장으로 옮겨 갔었다.지금 이곳에 남은 건 태반이 낡은 물건 들이고 소현우가 버리고 간 것들이다.전에는 그리고 소중한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임재욱이 몽땅 쓸어버리고 있자, 이곳에 있는 모든 것들이 더없이 소중해졌다.유시아는 특별히 이사 센터에 연락까지 했다.낡은 소파, 침대 시트, 찻잔...이곳에서 여러 해 동안 지낸 거라 안에 있는 물건들이 잡다했다.하지만 이사 센터 직원들의 도움으로 아주 빨리 포장을 끝낼 수 있었다.유시아가 물건을 체크하고 있을 때 한 직원이 다가와 물었다.“손님, 서재에 매입형 금고가 있는데, 중요한 거라도 들어있는지 확인해야 하는 게 아닙니까?”그 소리를 듣고서 유시아는 바로 서재로 향했다.전에 본 적이 있는 금고를 소현우가 쓰는 것도 봤었다.평소에 남의 일에 관심을 가지는 편이 아닌 그녀는 소현우에게 비밀번호도 알아낸 적이 없다.
수업하는 내내 유시아는 도저히 집중할 수 없었다.강의하고 있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금고 비밀번호만 유추하고 있었다.‘어머님 생신도 아니고 우리 결혼기념일도 아니야. 그렇다면 또 뭐가 있을까?’‘또 다른 소중한 날을 내가 잊고 있는 걸까? 그걸 비밀번호로 정한 걸까?’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슬슬 아프기까지 했다.수업을 마친 뒤, 퇴근하려고 한창 준비하고 있던 그때 임재욱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시아야, 아직도 머리 아파?”“많이 좋아졌어요. 근데 무슨 일이에요?”임재욱은 요즘 영문도 알 수 없는 채 스쿠터에 푹 빠지게 되었다. 어쩌면 유시아에게 푹 빠져서 스쿠터는 그냥 핑계일 지도 모른다.유난히 눈에 띄는 스쿠터를 타고 거의 매일 회사로 마중을 나왔었는데 오늘은 오지 않았다.스쿠터를 타고 다니면 차가 막히지 않아서 좋았는데.“시아야, 갑자기 회사에 급히 처리해야 할 업무가 생겨서 마중 가지 못했어. 조심해서 들어가고 밥 잘 챙겨 먹고 먼저 자. 좀 늦을 것 같으니 기다리지 말고.”임재욱의 그 말을 듣게 되는 순간 유시아는 순간 눈살이 찌푸려지면서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한동안 야근을 하지 않았을뿐더러 임재욱은 늘 제시간에 맞춰서 마중을 나왔었으니 말이다.오늘 도청 장치를 그의 사무실 의자 밑에 붙이자마자 야근한다고 하니 이 모든 것이 우연은 아닌 것 같았다. 아니면 도둑이 제 발에 저린 걸까?심지어 거짓말까지 하고서 몰래 반월 별장에 갔었고 HT 아파트의 모든 물건을 몰래 옮겨버리기도 했다.‘재욱 씨가 알아버린 걸까?’서로 이상한 느낌이 드는 순간이었다.한참 동안 돌아오는 답이 없자, 임재욱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시아야, 왜 그래?”“별거 아니에요.”유시아는 멋쩍은 웃음과 더불어 덧붙였다.“쉬면서 일하세요.”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더 스케치 화실은 정운시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저녁 무렵이 되니 차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몹시나 시끌벅적거렸다.차가
용재휘가 그림을 그만두었다는 말을 듣게 되는 순간 유시아는 입맛이 뚝 떨어져 버렸다.미술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이 있을뿐더러 용재휘의 그림 작품은 늘 살아 숨 쉬고 있는 느낌을 주곤 했다.그 말인즉슨, 그림을 그만두기에는 아까운 인재라는 말이다.임재욱과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만 않았어도 어쩌면 당분간 해외로 갈 일도 없이 평범하게 좋아하는 그림 그리면서 사랑을 쏟아부은 화실을 운영하면서 살았을지도 모른다.심하윤은 고개를 들자마자 한껏 어두워진 유시아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그런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워서인지 천천히 위로하기 시작했다.“시아야,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어. 언젠가는 가업 이어받으러 해외로 떠났어야 했어. 다만 부득이한 일로 좀 앞당겨진 것뿐이야. 삼촌이랑 숙모에게 자식이라고는 재휘 하나뿐인데, 당연히 가업을 이어가게끔 했을 거야. 내 말은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니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라는 거야. 미술에서 큰 성과를 따내지 못한 이상 재휘는 집안 어른들의 지시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어. 하물며 삼촌 눈에는 재휘 그림 실력은 한낱 보잘것없고 동네 아이들이나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계시거든.”유시아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어색한 분위기가 잠시 흐르고 심하윤은 한참 지나고 나서야 나지막이 물었다.“잘 지냈어?”실은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묻고 싶었으나 미안한 마음에 도통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임재욱 그 나쁜 놈 옆에서 잘 지낼 리가 없다는 걸 뻔히 알고 있는데.만약 심씨 가문의 일만 아니었다면 유시아는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면서.심하윤은 생각하면 할수록 죄책감이 깊어져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시아야,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실은 모르겠어...”그런 그녀를 향해 유시아는 봄날의 햇살처럼 웃었다.“괜찮아요. 저한테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어쩌면 재욱 씨랑 특별한 인연이 있어서 자꾸 이렇게 얽히고 있을 수도 있고요. 그리고 저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언니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일들은 없어요.”홀가분한 표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뭐?”“한서준 씨는 당당해요?”유시아는 바로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임씨 가문에 접근한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 할아버지, 재욱 씨 그리고 나까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청아 씨만이 한서준 씨를 사랑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쭉 모르는 척을 하며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한서준 씨 역시 청아 씨를 이용한 게 아닌가요?”마지막 한 마디에 한서준은 침묵하고 말았다.그렇다. 임청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유시아가 ‘스파이’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임씨 가문 천금을 노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임청아 대한 마음은 모략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점점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띠고 다가왔던 임청아가 어두운 자신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따라서 한서준은 임청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생기게 된 것이다.임태훈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꼭 자기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청아 씨 지금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에요.”“만약 청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차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려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택시에 오른 유시아는 긴 망설임 끝에 끝내는 더 스케치 화실 주소를 운전 기사에게 알렸다.차는 화실 맞은 편에 세워졌고 유시아는 화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화실 안의 상황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경호원들이 임태훈을 사이에 두고 화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임태훈은 벤틀리에 올라 강한 기운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화실로 향해 달려갔다.화실 안과 밖은 겉은
전화를 마치고 유시아는 혼자 밖에 없는 휴게실을 보고서 깊은 번뇌에 잠겼다.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임태훈처럼 막무가내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인이 있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태훈이 끔찍이 여기는 임청아를 유시아가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애꿎은 자기 화실을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집안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일단 남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으니,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유시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불안함도 점점 커졌다.지금 운영하고 있는 더 스케치 화실도 용재휘가 먼저 시작한 것인데, 그와 더불어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넘겨주었는데, 만약 이대로 화실을 망쳐버린다면 용재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임재욱과 임태훈이 어느 정도로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화실이 그들 싸움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단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그렇게 한참이나 심장을 조이고 있었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유시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 채팅방에 오늘 갑자기 일이 있다며 수업을 뒤로 미룬다고 알렸다.언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지는 소식을 기다리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톡을 보내고서 유시아는 더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바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병원 대문을 나오자마자 한서준이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유시아.”유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났다.직감이 알려주건대, 절대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화실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한서준은 쉽사리 유시아를 놓아 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물어볼 일이 있어.”말하면서 근처에 있는 지프차를 가리켰다.“차에 타서 얘기 하자.”“그쪽이랑 할 말
유시아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집사의 바람대로 타이르기 시작했다.“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하거든요. 일이 어찌 됐든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임청아 그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건강 회복되면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집에 감금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어찌 됐든 할아버지 마음은 한결같을 거예요. 청아 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 터놓고 얘기하고 나면 오해가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임청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아이 낳고 나면 할아버지도 서준이도 원한을 내려놓고 행복만 할 수 있다고요.”“근데 이렇게 몸도 아끼지 않고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가면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점점 더 짙어질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도우미 손에서 보신탕을 가져와 천천히 불며 임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임청아는 생각 밖으로 무척이나 순순하게 유시아의 말을 따랐고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보신탕을 받아 마셨다.도우미와 집사는 두 사람이 티키타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임청아가 뭐라도 먹기 시작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으며 자리까지 비켜주려고 했다.두 사람이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을까 봐 눈치껏 일어서려는 것이다.“작은 사모님, 아가씨와 천천히 얘기하고 계세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네, 가보세요.”도우미 일행이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한서준 씨는 알고 있어요?”임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잖아요.”요즘 임태훈뿐만 아니라 한서준도 눈을 부라리고 임청아를 찾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자 아파트도 호텔도 들어갈 수 없었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유시아 화실에 몸을 숨기고 지낸 것
임청아 이름 석 자가 임재욱의 입에서 나오자, 유시아는 순간 청천벽력을 맞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청아 씨가 왜 병원에 있는 거죠?”임청아는 임신한 것을 알고 매사에 조심하며 걸음 하나도 천천히 옮겼었다.게다가 해외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여 해외로 떠날 준비까지 마쳤다고 했었다.그런데 관건이 되는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할아버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임재욱은 말하면서 차갑게 웃었다.“네 화실에 청아 숨겨 놓았잖아. 할아버지께서 그걸 과연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 오늘 화실로 청아 데리러 갔었는데, 가지 않겠다고 청아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억지로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며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그렇다면 아이를 유산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의 습관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이 화살은 결국 유시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임재욱이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유시아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약해지는 마음에 언젠가는 구렁이에 빠지게 될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꾸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병원 주소 보내줄 테니 얼른 가 봐.”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고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같은 시각, 병원 안에서.임청아는 이미 수술을 마쳤고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이미 가문의 집사와 간호인이 옆에 있었고 병실 문 앞에는 임태훈이 보낸 경호원도 있었다.다만 경호원이 경계해야 할 상대는 유시아가 아니라 한서준이다.따라서 유시아는 별다른 막힘없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상에 누워 있는 임청아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주 공손하게 유시아에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임재욱은 멈칫거리고 말았다.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별거하자는 뜻이야?”“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유시아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으로 시연이한테 집중해도 되잖아요. 나도 마침 어머님 곁에 좀 있어드리고... 서로에게 지금 이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래. 네가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하자.”말을 마치고 그는 계속 밥을 먹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서 아련하게 웃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이튿날 아침, 유시아는 임재욱이 출근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상복 몇 벌과 일상용품을 챙겨 작은 트렁크 안에 놓고 바로 이채련한테 가려고 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유시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사모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죠?”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친척분이 좀 위독하신데 제가 옆에서 좀 챙겨드리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고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트렁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이채련이 지내고 있는 병실이 VIP 병실로 널찍한 객실까지 갖춰져 있다.유시아는 간호사에게 접이식 침대와 이불을 요구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잘 자리가 아늑하게 마련되었다.이채련은 더 이상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어 하루 24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다.얼굴도 하도 여위어 본연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그전에도 유시아는 이채련에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이채련은 행여나 자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흠이 생기게 될까 봐 동의하지 않았었다.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갖은 풍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