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윤서는 이를 꽉 악물었다. 그는 최선의 용기를 다 해 구재건을 떠난 것이었다.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전에 했던 마음의 준비가 아까웠다.“도와줘요... 제발...”구재건은 콧방귀를 뀌었다. 윤윤서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은 모양이었다.한편 윤윤서의 상의는 이미 벗겨져 있었다. 예쁜 쇄골은 공기 중에 그대로 드러났다.한 사람이 흘린 침이 그녀의 얼굴에 뚝 떨어졌다. 끈적한 느낌과 역겨운 냄새는 웬만한 악몽보다도 끔찍했다.“안돼!”반항하다 못한 윤윤서는 결국 울다시피 외쳤다.“대표님이랑 할게요!”“뭘?”구재건은 아주 여유로웠다. 그는 노련한 사냥꾼처럼 함정에 빠진 사냥감을 노리고 있었다.윤윤서는 눈을 꾹 감더니 결국 타협을 선택했다.“대표님이랑... 자겠다고요...”이 말이 나온 순간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차량들의 헤드라이트가 이곳을 밝혔다. 눈 부신 빛에 주변은 낮이 된 것처럼 밝아졌다.차 안에서는 경호원들이 내려왔다. 그들은 손쉽게 부랑인들을 멀리 끌어갔다.그중 눈치가 없는 한 사람은 윤윤서에게 흠뻑 빠져있었다. 그는 경호원의 손에서 벗어나더니 다시 윤윤서를 향해 덮치려고 했다.구재건은 성큼성큼 걸어가서 그의 머리를 차버렸다. 부랑인은 꽥 소리 지르며 바닥에 쓰러지더니 피와 부러진 이빨을 토해냈다.가방에서 현금다발을 꺼낸 구재건은 부랑인들 앞에 내던졌다. 현금을 가지고 다니는 건 대학교 시절에 생긴 습관이다. 부자가 된 다음에도 그 습관은 사라지지 않았다.현금은 우수수 떨어졌다. 달빛 아래에서 핏빛으로 물든 꽃잎처럼 보였다. 부랑인들은 우르르 몰려들더니 미친개처럼 빼앗아대기 시작했다.윤윤서는 바닥에 쓰러진 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옷을 입었다. 구재건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힘없이 쓰러져 있는 것이 아주 연약해 보였다. 도망칠 능력도 없으면서 감히 벗어나려고 한 대가였다.구재건은 차갑게 웃으며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차 안으로 끌어갔다. 구지오와 경호원은 눈치껏 따라가지 않았다.비틀거리며 차 안으로 이끌린 윤윤서는 다리를
윤윤서는 몸을 흠칫 떨더니 머리를 돌렸다.“만약... 제가 임신했다면 어떻게 할 거예요?”구재건은 그녀의 발그레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경멸 섞인 표정으로 되물었다.“너한테 내 아이를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당연히 없죠. 제 주제는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선을 넘는 일은 없을 거예요.”“좋아.”구재건은 이제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싸늘하게 경고를 덧붙였다.“윤 비서도 알다시피 재원이 좀 발이 넓어. 백영의 의료기관 중 3분의 1이 재원에 영향받는 거 알지?”병원에서 병을 보이는 것은 실명제다. 수술은 더더욱 그랬다.구재건의 뜻은 아주 명확했다. 만약 거짓말을 한다면 들통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윤윤서는 얼굴이 굳었다. 만약 구재건이 말하지 않았다면 정말 까먹을 뻔했다.다행히 구재건은 아직 조사를 시작하지 않았다. 그녀는 구재건의 의심이 조사할 정도로 커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수술은 아무래도 다른 도시에 가서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아랫배를 바라보며 끝없는 슬픔에 빠졌다.‘네 아버지 참 독종이지?’그녀는 곧 다시 고개를 들어 구재건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대표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은 없을 거예요.”“그래.”머리를 끄덕인 구재건은 드레스 룸에 갔다. 잠시 후에는 깔끔한 차림새로 다시 나왔다.그는 넥타이를 정리하며 한결같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난 이만 나갈게.”“저녁에 돌아오시나요?”“아니.”“알겠습니다.”윤윤서는 구재건을 배웅해 줬다. 출입문을 열던 구재건은 또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너...”“회사에는 최대한 빨리 복귀할게요. 다시는 사직하지 않을 거예요. 3년의 계약은 폐기하고 대표님이 질릴 때까지 있을게요.”윤윤서는 구재건의 성향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충심을 표했다.구재건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의 표현에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역시 구지오에게 연락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그러나 그는 몰랐다. 윤윤서의
윤윤서는 오후 동안 집에서 쉬다가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지수혁이 친절하게 말했다.“네가 제일 좋아하는 오렌지주스 먼저 주문했어.”“고마워.”오렌지주스를 마시고 난 윤윤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네가 부탁할 일이라는 건 뭐야?”윤윤서는 자신의 주제를 잘 알았다. 재벌 3세가 집안 망한 그녀에게 부탁할 일이라고는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그게...”지수혁은 자신의 명함을 꺼내 윤윤서에게 건네줬다.“나 요즘 엔터 회사 키우고 있어. 그래서 너한테 대본 부탁하려고 했지.”그는 대학교 때부터 창업하고 싶어 했다.시장 조사 결과 백영의 대부분 산업을 재원그룹이 차지했다. 오직 엔터 쪽에만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었다. 재원그룹이 발 담그고 있는 건 여전했지만 키우는 연예인은 한 명뿐이었다.그래서 지수혁은 이 기회를 빌려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볼 생각이었다. 그의 부모는 망할 것이라고 단정 지은 듯 투자금을 아주 조금만 줬다. 그래서 그는 단가 낮춘 영화 한 편을 실험으로 제작해 보려고 했다.배우, 감독, 스태프... 이런 건 미리 준비된 리스트가 있었지만 작가는 아무리 봐도 마땅치 않았다. 실력 좋은 작가는 지나치게 비싸고, 실력이 떨어지는 작가는 대본 질량이 말도 안 됐다.얼마 전 유준서와 통화하면서 그는 문득 윤윤서가 떠올랐다.“대본?”윤윤서는 머리를 숙여 지수혁의 명함을 바라봤다. 위에는 빛아트 대표이사라고 적혀 있었다. 회사 소개를 보니 규모가 꽤 큰 것 같았다.자신이 없었던 윤윤서는 일단 거절했다.“한 적 있는 일기는 한데... 흠, 난 남들처럼 전문적으로 배운 게 아니라 기초가 모자라.”“또 하기 전부터 겁먹는다. 우리 학교 다닐 때 연극부에서 누가 제일 유명했는지 잊었어? 대본도 쓰고, 연기도 하고, 감독도 할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야.”집안이 망하기 전의 윤윤서는 세상 부러운 것 없는 사람이었다. 얼굴 예쁘지, 공부 잘하지, 심지어 그녀는 경영학과의 수석이었다.시간을 보내느라 가입한 연극 동아리에서는 그녀가
“안녕하세요, 구 대표님.”지수혁은 먼저 인사를 건넸다.“저는 지수혁이라고 해요. 윤서 친구예요.”“친구?”구재건은 지수혁이 아닌 윤윤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윤 비서한테 이런 친구가 있는 줄은 몰랐네.”윤윤서는 입술이 창백해졌다. 구재건의 말속에 숨은 뜻을 알았던 것이다.그녀는 구재건을 너무 잘 알았다. 두 사람이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고 해도, 그는 그녀 주변에 다른 남자가 나타나는 걸 싫어했다.그녀와 지수혁은 그런 사이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설명이 오히려 반작용만 일으킬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아예 입을 다물었다.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를 보아 낸 지수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구재건과 함께 온 여자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다들 아는 사이 같은데, 만난 김에 같이 식사할까요?”윤윤서는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구재건이 당당하게 말했다.“그러죠.”윤윤서는 결국 아무 말도 못 했다. 거절의 말도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미안하다는 듯이 바라보자, 지수혁은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흔들었다. 애초에 구재건과의 식사 자리를 거절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다시 자리에 앉고, 윤윤서는 대화를 나누다가 구재건과 함께 온 여자가 톱스타 임지연이라는 것을 알았다.임지연은 아주 예쁘게 생겼다. 연기 실력도 훌륭했다. 요즘에는 중요한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까지 받았다. 실력도 배경도 단단한 배우였다.그러나 이걸로 구재건의 관심을 이끌기는 역부족이었다. 윤윤서는 그의 곁에 3년이나 있었다. 그가 일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여자는 그에게 생리적 욕구를 해결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전에도 협력사에서 인플루언서, 모델, 혹은 연예인을 부른 적 있었다. 물론 번마다 내쫓겼지만 말이다.임지연과는 식사도 함께하는 걸 봐서 평범한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 더군다나 임지연은 아주 똑똑했다. 과하게 밀어붙이지 않는 것이 우아해 보이기까지 했다.구재건의 말 한마디로 분위기가 식을 때는 그녀가 나서서 깔끔하게
백양은 밤이 더 화려한 도시다. 환한 조명은 도시 구석구석을 밝게 비췄다.선바이저도 막지 못한 빛이었다. 만약 누군가 차 바로 곁에 서 있으면 분명히 보일 것이다.윤윤서는 눈시울을 붉히며 수치심에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대표님 꼭 이렇게 하셔야겠어요?”자신이 그를 아직 좋아한다는 점을 이용해서 너무 심하게 괴롭힌다고 생각했다.“불만 있어?”구재건은 시선을 내리깔더니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착한 척하려면 끝까지 해야지. 내가 네 속셈도 못 알아볼 줄 알아? 내 눈은 장식으로 보여?”윤윤서는 흠칫 놀랐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심장이 심하게 욱신거려서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그녀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구재건이 지켜보고 있었다.“네가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어차피 결국에는 나한테서 못 벗어날 테니까.”말을 마친 구재건은 그녀의 뽀얀 얼굴을 탁탁 쳤다. 적당한 힘은 통증을 주는 것보다 분위기를 뜨겁게 만들었다.“그러니까 알아서 잘해.”“...”밀물처럼 밀려온 무기력함에 윤윤서의 눈가는 더욱 촉촉해졌다.그녀는 정말 들킬 줄 몰랐다. 그래도 다행히 임신 사실은 들키지 않았다. 안 그러면 더 무서운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이 상황을 슬퍼해야 하는지, 좋아해야 하는지 헷갈렸다. 그녀가 주저하고 있을 때 구재건이 시계를 보며 말했다.“10분 남았어.”10분 후에도 임무를 완성하지 못하면 낯선 사람 앞에서 하게 된다. 그녀가 수치스러워할수록 구재건은 더 신이 날 것이다.“...”윤윤서는 몸을 흠칫 떨었다. 눈초리까지 파르르 떨렸다. 대리 기사 앞에서 그런 짓을 하는 모습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녀에게 구재건은 악몽 그 자체였다.윤윤서는 입술을 꼭 깨물고 있다가 결국 손을 뻗어 그의 바지 벨트를 잡았다. 차 안에는 금세 야릇한 분위기가 맴돌기 시작했다.가끔 밖에서는 자동차 경적이 들렸다. 그때마다 긴장한 윤윤서는 콧등에 땀방울이 맺혔다. 그러나 구재건은 일부러 그런 것인지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힘이 빠진 손이 시큰거리는
마음이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할 일은 해야 했다. 윤윤서는 집에서 며칠만 쉬다가 금방 직장으로 돌아갔다.강우진은 눈치껏 그녀가 사직했던 일을 숨기고 있었다. 구재건도 신경 쓸 사람이 아니기에 대부분 사람이 모르고 있었다.심지어 강우진은 윤윤서 대신 인사팀에 휴가 신청까지 냈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그녀의 일을 대신했다. 감동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윤윤서가 출근 복장으로 안경을 낀 채 다시 나타난 것을 보고, 그는 고생도 끝이라는 걸 알았다. 이제 더 이상 혼자 마음 졸일 필요가 없었다. 그동안 한 고생에도 복이 뒤따랐다.“우진 씨, 저...”“흡... 아무 말도 하지 마요. 저는 다 이해해요.”윤윤서가 말하기도 전에 그는 손을 들어 말렸다. 그러고는 드라마 여자주인공처럼 처량하게 눈물을 흘렸다.“돌아왔으면 됐어요. 그러면 됐어요.”“그동안 수고했어요. 저는 인사팀에 가봐야겠어요. 사직서는 어떻게 처리할지 모르겠네요.”회사에 돌아왔으니, 그녀는 이제 일에 집중할 생각이다. 속마음은 더 깊이 숨기고 돈 버는 데만 열중할 것이다.“그러게요.”강우진은 아주 똑똑했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을 밝히지 않고 말했다.“제가 가서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일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에요. 오늘 일 다 할 수는 있을라나...”강우진의 암시를 알아챈 윤윤서는 호탕하게 말했다.“우진 씨 일은 제가 할게요.”“요즘 너무 무리했더니 몸이 안 좋아졌는지 머리도 어지럽네요.”“월급 받으면 크게 한턱낼게요.”“역시 윤서 씨는 최고의 동료예요!”강우진은 급 활기찬 모습으로 서류를 꺼내 윤윤서에게 건네줬다.“이건 마케팅팀, 기회팀, 그리고 영업팀이 같이 하고 있는 프로젝트예요. 대표님 사인 좀 받아줘요.”윤윤서는 서류를 바라보다가 강우진을 힐끗 노려보며 말했다.“제가 일까지 대신해 주기로 했는데 이러는 게 어디 있어요?”이 심부름은 듣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다른 서류와 함께 보내서 사인받으면 되는 걸 그녀에게 직접 부탁했다는 건 구재건에게 가서 혼나고
사무실 안에서는 두 사람의 말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구지오가 말했다.“그리고 지난번 같이 식사한 임지연 씨랑도 얘기 끝났어요. 예리 누나가 돌아오면 잘 도와주겠다고 했어요.”“응.”구재건의 담담한 대답을 듣자 그녀는 마음이 더욱 차가워졌다. 그날 밤 임지연과 비밀리에 얘기하던 것이 이런 일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요즘 연예계에서는 연기를 아무리 못하고, 외모가 아무리 딸려도, 돈만 있으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구재건에게 가장 차고 넘치는 것이 바로 돈이었다.그러나 그는 단순히 돈만 쓰지 않았다. 특별히 임지연을 만나 부탁까지 해가면서 인맥을 만들어줬다. 마음이 없으면 절대 하지 못할 일이었다.사무실 안에서 두 사람은 아직도 얘기하고 있었다. 구지오는 책상 앞에 서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형, 근데 내가 보기에는 예리 누나랑 공개 연애하는 게 무엇보다 잘 먹힐 것 같아.”이 말을 들은 구재건은 잠깐 멈칫했다. 그 순간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것 같았다.그러다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그는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안 돼. 나랑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야.”구지오는 어떻게 더 설득할지 몰랐다.그도 알고 있었다. 윤윤서가 대학교 시절의 구재건을 얼마나 괴롭혔는지를 말이다. 윤윤서 때문에 구재건은 친구 한 명 없이 그 힘든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조예리는 구재건과 같은 지역 출신이었다. 그녀는 남몰래 구재건에게 이것저것 사 줬다고 한다. 크기로는 한정판 저서, 작기로는 옷, 양말, 키링 같은 게 있었다.세심한 그녀는 응원의 편지까지 썼다. 언젠가 성공하는 날이 있으면 더 이상 윤윤서의 그늘에서 살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그녀는 구재건의 가장 고달픈 시절의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존재다. 지금 구재건이 지극정성 도와줄 가치가 있다고, 구지오는 생각했다.구지오가 유일하게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서로 좋아하는 두 사람이 만나지 않는 것이다. 조예리가 해외로 가버린 이유 중에는 연기 공부도 있지만, 구재건에게 고백했다가 차
구재건은 생각에 잠긴 윤윤서를 바라보며 물었다.“며칠 더 쉬라고 했잖아. 왜 벌써 출근했어?”“집에만 있는 것도 심심해서요.”“그래, 힘든 일은 잠시 강 비서한테 맡겨. 내가 알아서 보너스 챙겨줄 테니까.”이렇게 말하며 구재건은 블랙 카드를 꺼내 건네줬다.“네가 해야 할 일이 있어. 지금 당장.”“말씀하세요.”“내 옷장 정리 좀 해야겠어. 백화점에 가서 옷이나 사줘. 간 김에 네 것도 좀 사고.”구재건은 아직도 조예리가 몰래 사줬던 옷을 기억했다. 형편이 어려운 그에게 그 옷들은 가장 예쁘고 편한 것들이었다.그때부터 구재건은 비슷한 디자인의 옷에 빠지게 되었다. 유명해진 다음에도 똑같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골라도 비슷한 느낌을 내지 못했다. 조예리가 고른 것도 마찬가지였다.그러다가 몇 년 전, 윤윤서가 잘 보이겠다고 옷 몇 벌 선물한 적 있다. 그 옷들은 놀랍게도 마음에 꼭 들었다. 그 뒤로 구재건의 옷장은 그녀가 책임지기 시작했다.“...”블랙 카드를 바라보는 윤윤서의 심장은 자꾸만 욱신거렸다. 옷이든 뭐든 주는 대로 입고 쓰던 구재건이 첫사랑을 위해 꾸민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속으로도 겉으로도 만반의 준비를 하는 모습이었다.그녀는 애써 괜찮은 척하면서 카드를 받아 들었다.“네,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윤윤서는 사인을 받지 못한 서류를 들고 강우진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모델은 무조건 바꿀 것이라는 말도 전했다.“도대체 누군데 그러는 거예요! 으악!”비서가 당연히 그래야 하듯이, 그녀는 자신의 추측을 발설하지 않았다.“때가 되면 알게 될 거예요.”강우진은 여전히 궁금한 듯 윤윤서를 잡아당겼다. 그런데도 윤윤서는 입을 닫았다.“아무튼 모델 교체는 불가능할 것 같으니까, 팀장님들한테 전해줘요. 그리고 저 오후에 대표님 대신 백화점에 다녀와야 해요. 일은 또 우진 씨한테 맡겨야 할 것 같네요.”“네? 네에?!”강우진은 머리를 감싸고 절규했다. 윤윤서는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을 보탰다.“대신 대표님이 보너스 챙겨주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