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재건은 생각에 잠긴 윤윤서를 바라보며 물었다.“며칠 더 쉬라고 했잖아. 왜 벌써 출근했어?”“집에만 있는 것도 심심해서요.”“그래, 힘든 일은 잠시 강 비서한테 맡겨. 내가 알아서 보너스 챙겨줄 테니까.”이렇게 말하며 구재건은 블랙 카드를 꺼내 건네줬다.“네가 해야 할 일이 있어. 지금 당장.”“말씀하세요.”“내 옷장 정리 좀 해야겠어. 백화점에 가서 옷이나 사줘. 간 김에 네 것도 좀 사고.”구재건은 아직도 조예리가 몰래 사줬던 옷을 기억했다. 형편이 어려운 그에게 그 옷들은 가장 예쁘고 편한 것들이었다.그때부터 구재건은 비슷한 디자인의 옷에 빠지게 되었다. 유명해진 다음에도 똑같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골라도 비슷한 느낌을 내지 못했다. 조예리가 고른 것도 마찬가지였다.그러다가 몇 년 전, 윤윤서가 잘 보이겠다고 옷 몇 벌 선물한 적 있다. 그 옷들은 놀랍게도 마음에 꼭 들었다. 그 뒤로 구재건의 옷장은 그녀가 책임지기 시작했다.“...”블랙 카드를 바라보는 윤윤서의 심장은 자꾸만 욱신거렸다. 옷이든 뭐든 주는 대로 입고 쓰던 구재건이 첫사랑을 위해 꾸민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속으로도 겉으로도 만반의 준비를 하는 모습이었다.그녀는 애써 괜찮은 척하면서 카드를 받아 들었다.“네,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윤윤서는 사인을 받지 못한 서류를 들고 강우진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모델은 무조건 바꿀 것이라는 말도 전했다.“도대체 누군데 그러는 거예요! 으악!”비서가 당연히 그래야 하듯이, 그녀는 자신의 추측을 발설하지 않았다.“때가 되면 알게 될 거예요.”강우진은 여전히 궁금한 듯 윤윤서를 잡아당겼다. 그런데도 윤윤서는 입을 닫았다.“아무튼 모델 교체는 불가능할 것 같으니까, 팀장님들한테 전해줘요. 그리고 저 오후에 대표님 대신 백화점에 다녀와야 해요. 일은 또 우진 씨한테 맡겨야 할 것 같네요.”“네? 네에?!”강우진은 머리를 감싸고 절규했다. 윤윤서는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을 보탰다.“대신 대표님이 보너스 챙겨주신
이전의 세대들 사이에 그런 말이 돌기도 했다.세 살을 넘기지 않은 아이들은 영혼이 너무도 깨끗하여 일반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도 볼 수 있다고 말이다.예시를 들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의 성별을 알 수 있다고 했다.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말이었던지라 정확도가 꽤 높을 것이다.윤윤서는 비록 이런 과학적 근거가 없는 말을 믿지 않았지만, 기분은 좋았다.그녀는 자신의 배를 만지며 물었다.“아가야, 정말로 이 안에 여동생이 있는 거야?”다온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귀여운 목소리로 답했다.“네, 아주 예쁜 동생이에요. 예쁜 동생이 이모가 엄청 좋대요!”아이의 말을 들은 순간 가슴이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녀는 원래 이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의 아이는 그녀가 좋다고 말했다.그녀의 딸은 정말이지 불쌍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아이였다.지수연은 슬퍼하면서도 기뻐하는 듯한 윤윤서의 표정을 보곤 갈피를 잡지 못했다.“아이가 아무것도 모르고 한 말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그런 거 아니에요.”윤윤서는 고개를 저었다.줄곧 숨겨오던 비밀이었지만 다온이는 그녀의 딸이 그녀를 아주 좋아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않는가.그녀도 이기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었다.나쁜 마음을 먹지 말았어야 했다.아기에게 세상에 태어날 권리조차 주지 않는 것은 정말로 나쁜 짓이었다.그 순간 윤윤서는 그간의 망설임을 그만두었다.아기를 낳기로 했다.나중에 어떤 결과를 맞이하든 신경 쓰지 않고 반드시 낳을 생각이다.윤윤서는 깊은 한숨을 내쉰 뒤 지수연에게 말했다.“저 정말로 임신했어요.”하지만 아기의 성별을 몰랐다.그래도 다온이가 예쁜 여동생이라고 했으니 분명 딸일 거로 생각했다.지수연은 멍하니 서 있었다.며칠 전에 지수혁에게서 윤윤서의 근황을 들은 적 있었다.재원 그룹 대표의 전담 비서로 잘 지내고 있으며 여전히 솔로라고 말이다.그런데 윤윤서는 지금 그녀에게 임신했다고 말한다.충격적인 소식에 머리가 멍해진 지수연은 순간
윤윤서의 얼굴에 치욕의 감정이 드러났지만, 아내 빠르게 표정 관리를 했다.“전 지금 파트너로서 20억을 빌리겠다는 게 아니에요. 대표님 비서로서 빌리겠다는 거예요.”윤윤서는 구재건의 곁에서 꼬박 3년이나 일했다.그녀의 공로가 많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힘들었던 건 사실이었다.능력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좋았다.이 점을 구재건도 잘 알고 있었다.특히 윤윤서가 사직서를 내고 출근하지 않은 그 며칠 동안 강우진 혼자서는 확실히 전부 처리할 수 없었던지라 구재건은 하마터면 일정에 문제가 생길 뻔했다.업무 처리 능력만 따져보면 윤윤서에게 20억 빌려주는 것은 문제가 될 것 없었다.구재건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무릎으로 그녀의 다리를 벌렸다.“빌리는 건 돼. 하지만 그건 네 하기에 달렸어.”윤윤서는 입술을 짓이겼다.몰래 멀리 떠나려면 반드시 그녀가 주동적으로 구재건에게 키스해야 했다.여자의 입술은 부드럽고 달콤했다.구재건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꽉 붙잡으며 그녀를 더 깊이 탐하려고 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흥이 깨진 구재건은 짜증을 내며 힐끗 보았다.그러나 그의 표정이 빠르게 변했다.그는 윤윤서를 밀친 후 핸드폰을 들고 거실로 나갔다.윤윤서는 거칠어진 숨을 고르게 하곤 벗겨진 잠옷을 올렸다. 방으로 구재건의 목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이미 준비 다 되었다고 하지 않았나? 시간을 앞당겼다고? 그게 무슨 헛소리야!”비록 어투는 친절하지 못했지만 그의 목소리에선 다소 걱정이 묻어났다.윤윤서의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구재건은 비록 그녀를 싫어했지만 침대 위에서만큼 그녀를 밀어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대체 구재건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누구일까?'‘어떤 일이 벌어졌기에...'‘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밀어내게 할 수 있었던 걸까?'‘그리고, 20억 빌려주기로 한 약속은 어떻게 되는 거지? 이대로 끝인가?'‘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난 어떻게 멀리 떠나지?'윤윤서는 머리가 복잡했지만 잠자코 기다리
구재건이 문자를 보냈다.윤윤서는 그 문자를 확인했다.[오후에 나랑 함께 주얼리 앰버서더 촬영장으로 가. 네가 처리해야 할 임시로 변경된 계약서들이 있거든.]목구멍에 솜 덩어리가 막힌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주얼리 앰버서더는 조예리였다.그리고 변경된 계약서를 그녀에게 처리하라고 한다.윤윤서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그녀는 오후에 구재건을 따라 촬영장을 가야 할 뿐만 아니라 그의 첫사랑도 만나면서 최선을 다해 첫사랑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정말이지 행운의 여신은 그녀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하얀 손가락으로 핸드폰 화면을 몇 번 누르던 그녀는 답장을 보냈다.[네.]강우진은 그녀의 창백한 안색을 보며 물었다.“왜 그래요?”윤윤서는 웃음을 지으려 노력했다.“사형장으로 가야 할 것 같네요.”몇 시간 뒤 벌어질 일을 예상하였던지라 기다림마저 그녀에겐 소리 없는 고문이었다.그녀는 배가 살살 아픈 듯한 느낌에 배를 감싸 안았다. 이 통증은 오후까지 지속하였다.출발할 때 구재건은 차 안에서 시선을 내리깐 채 서류를 보고 있었다.윤윤서가 운전석에 앉자 그는 손에 든 서류를 내려놓았다.구재건은 커다란 손을 익숙하게 그녀의 옷 속으로 넣으며 손끝으로 보드라운 그녀의 살결을 쓸어 만졌다.그는 장시간 동안 펜을 잡고 있었던지라 가끔 손가락이 아팠다.그때마다 윤윤서의 허리를 만지고 있으면 빠르게 뻐근했던 손가락이 원래대로 돌아왔다.이것도 그가 모르는 사이에 생긴 작은 습관이었다.윤윤서는 담담한 얼굴로 능숙하게 시동을 걸었다.두 사람이 촬영장에 도착했을 때 촬영은 이미 막바지에 달하고 있었다.윤윤서는 촬영장 밖에서 수많은 조명을 받는 조예리를 보았다. 행성들이 지구를 에워싸고 도는 것처럼 그녀의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조예리는 실버 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목에는 아름다운 에메랄드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메이크업도 완벽해 꼭 흩날리는 머리카락마저 일부러 만든 것 같았다.해외에서 3년 동안 지냈다고 하더니 확실히 예
구재건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넌 내가 보답해야 하는 사람이야.”그는 조예리에게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조예리는 그가 힘든 시간을 보낼 때 유일하게 곁에 있어 주며 그를 달래주고 응원해준 사람이었던지라 꽁꽁 얼어붙은 그의 마음을 녹인 유일한 사람이었다.예전에 그는 조예리를 짝사랑하면서 그 마음을 일기에도 끄적인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날, 윤윤서를 안고 나서 모든 것이 변했다.처음에 그는 치욕스러웠다. 자신이 조예리에게 더욱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면서 화가 났다.하지만 밤이 찾아오면 그의 꿈속에 하얀 치마를 입은 조예리가 아닌 윤윤서가 어김없이 나타났다.윤윤서는 꼭 예쁜 요괴처럼 그의 몸에 들러붙어 그를 무한의 쾌락으로 끌어들이는 것 같았다.구재건은 원망스러웠지만, 그 방법이 없었다.나중에 그는 부단히 노력하여 끝내 성공하게 되었다.구재건이 조예리를 찾은 건 고마워서, 어떻게든 보답하기 위함이었다.조예리도 흔쾌히 받아들였다.구재건은 그때 아주 기뻤다.그는 드디어 윤윤서에게서 벗어나 걱정할 것 없이 조예리와 잘 될 줄 알았다.하지만 조예리를 향한 마음을 전부 표현하기도 전에 그 마음은 두 사람이 함께 보낸 시간 속에서 점차 옅어졌다.어딘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 원인을 찾지 못했다.그럼에도 구재건은 조예리에게 잘해주었다. 마음속 1순위 자리도 조예리로 했다.다만 조예리에게 잘해주는 행동엔 더 이상 그녀를 향한 사랑이 담겨 있지 않았다.그의 말에 조예리는 흥분했다.“난 너의 보답도, 고마운 마음도 필요 없어! 내가 원하는 건 나한테만 관심이 있고, 나한테만 신경 쓰는 거야!”구재건은 조예리의 손을 꼭 잡으며 달랬다.“난 너한테만 관심이 있고 너만 신경 쓰고 있어.”조예리는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계속 물었다.“그러면 나 좋아해? 날 좋아해 줄 수는 없어?”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피라미드 최상층에 있는 구재건이 얼마나 냉철한 사람인지. 그런데 유독 조예리에게만 다정하고 인내심이 있었
초겨울의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며 마른 나뭇가지를 흔들었다.조예리와 구재건에게 버려진 윤윤서는 길가에 서서 한참 기다렸다.두 사람이 돌아오지 않자 택시를 잡아 집으로 돌아갔다.따듯한 물로 샤워한 뒤 침대에 누웠다.이불을 몸에 꽁꽁 두른 후 텅 빈 옆자리를 보았다. 구재건이 오늘은 조예리와 밤을 보낼 것이니 돌아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이때 핸드폰이 울렸다.은행에서 보내온 알림 문자였다.구지오가 그녀의 계좌로 46.6억을 입금했다.뒤로 가득한 0의 개수를 보며 윤윤서는 순간 멍해졌다.곧이어 병원에서도 문자가 왔다. 어머니 병원비로 2억이 입금되었다는 알림 문자였다.그녀는 그저 20억을 빌려달라고 했을 뿐인데 구재건은 그녀에게 이렇듯 많은 돈을 주었다.윤윤서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기쁘면서도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두 사람의 원한은 아직 풀리지 않았지만 구재건이 보여준 행동은 확실히 설렐 만했다.잘생기고, 몸매도 좋고 체력도 좋았다.돈도 많았을 뿐 아니라 권력도 있었고 씀씀이도 컸다.대부분 그는 냉철한 사람이었지만 조금만 잘해주면 그녀는 정신을 잃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그녀는 만약 임신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곁에 더 오래 머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하지만 지금은...윤윤서는 아직 평평한 배를 만졌다.다시 한번 확신했다.구재건의 곁을 떠나야만 아이를 낳을 수 있다.그녀는 반드시 자신의 딸을 지킬 생각이었다.윤윤서는 침대에서 일어나 주방에 숨겨둔 태아 도플러를 꺼냈다.날짜를 계산하니 임신한 지 어느덧 6주가 되었다. 태아의 심박수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최근 구재건이 자주 집으로 들어왔기에 그녀는 병원에 가서 검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오늘 마침 들어오지 않았으니 전에 사둔 태아 도플러를 사용해보려고 했다.윤윤서는 설명서대로 배에 젤을 바른 뒤 기계를 꺼내 천천히 배 위에 올려놓았다.“두근, 두근, 두근...”아기의 심장 소리가 빠르게 들려왔다.순간 윤윤서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기분을 느꼈다.이 심장 소리는 그
구재건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자신의 허리에 올린 윤윤서의 손을 보았다. 조심스럽고도 자신의 비위를 맞추려는 게 눈에 보였다. 그녀의 예쁜 쇄골엔 어젯밤 그가 남긴 흔적이 가득했다.몸이 점점 후끈 달아오른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키스하려고 했지만, 벨트 착용을 마친 윤윤서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그의 입가로 그녀의 머리카락이 닿으면서 은은한 향기가 났다.구재건은 혀를 찼다.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윤윤서는 고개를 들며 기대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대표님, 저 오늘 오후부터 출근해도 될까요”구재건은 눈썹을 꿈틀거렸다.“어디 아파?”윤윤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소 민망한 얼굴로 답했다.“어젯밤에 너무 많이 해서 그런지 머리가 조금 아프네요.”구재건은 다른 대답을 했다.“최근에 많이 나약해졌네. 툭 하면 아프고 말이야.”윤윤서는 한숨을 내쉬었다.어젯밤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냈건만 오전 휴가를 허락받지 못했다.확실히 어젯밤 구재건은 너무도 거칠게 그녀를 대했다. 배가 아직도 살짝 아팠다.행여나 아이에게 문제가 생길까 봐 조금 푹 쉬고 싶었지만 구재건은 그녀에게 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윤윤서는 고개를 숙이며 현실을 받아들였다. 옷을 갈아입은 후 구재건과 함께 출근하려고 했다.그런데 구재건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먼저 현관으로 가면서 한마디 했다.“오후에 지각하지 마.”“...”윤윤서는 사실 놀랐다.고개를 들었을 때 구재건은 이미 나가버린 상태였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만 들려왔다.그녀는 들고 있던 겉옷을 내려놓았다. 다소 기쁘기도 하면서 섭섭하기도 했다.드디어 휴식할 수 있어서 기뻤지만 조예리가 돌아온 뒤로 구재건은 그녀의 말을 들어주기 시작했기에 조금 섭섭했다.아마 이것이 첫사랑의 위력일 것으로 생각했다.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마왕 같은 존재가 갑자기 부드러운 사람이 되었다.윤윤서는 고개를 저으며 머릿속에 든 생각을 떨쳐내려 했다.그녀는 일단 태아 도플러부터 다시 숨긴 후 아침을 먹었다.대략 2시간쯤
아기를 낳아본 사람으로서 지수연은 아주 능숙하게 윤윤서에게 굽이 낮은 신발 몇 켤레 골라주고 편한 옷과 임산부가 써도 무해한 화장품을 사주었다.지수연은 옷과 신발, 화장품 전부 윤윤서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지금 얼른 갈아입고 와. 8cm나 되는 하이힐 신고 내 앞에서 비틀대지 말고. 보기만 해도 가슴이 조마조마해지니까.”윤윤서는 그녀의 호의를 거절하기 어려웠기에 옷과 신발을 갈아입은 후 화장도 지우고 립밤 하나만 발랐다.지수연은 이런 윤윤서의 모습을 보곤 그제야 만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이렇게 입었어야지. 임신했으니까 굽 낮은 신발만 신어. 하이힐은 위험해서 안 돼.”윤윤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답으로 다온이의 장난감을 잔뜩 사주었다.다온이는 기쁜 듯 윤윤서의 얼굴에 뽀뽀 세례를 했고 나중에 그녀의 딸이 태어나면 오빠로서 커다란 선물을 주겠다며 말했다.윤윤서는 이렇게나 행복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 적 별로 없었다. 지수연과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점심까지 다 먹은 후였고 그제야 헤어졌다.회사로 출발하려고 할 때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윤윤서는 다소 수상해 하며 일단 통화 버튼을 눌렀다.다음 순간 기고만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윤윤서 씨 맞죠? 전 조예리 매니저예요.”윤윤서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무슨 일이죠?”매니저는 뻔뻔스럽게 큰소리를 쳤다.“우리 예리 계약서 때문에 연락했어요. 윤윤서 씨가 작성한 거 맞죠? 계약서에 문제가 있으니까 빨리 와서 확인하세요.”윤윤서는 차갑게 웃었다. 속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그녀는 구재건의 전담 비서로 몇 년 동안 일했던지라 업무에 아주 능숙했고 계약서에 문제가 생길 일도 없었다.조예리가 그녀를 부른다는 건 다른 목적이 있다는 의미였다.다만 설령 조예리의 목적이 불순하여 거부한다고 해도 다음번에 또 다른 수를 쓰며 그녀를 불러내려 할 것이다.그러니 차라리 속아 넘어가 주어 조예리의 목적을 파악하는 것이 나았다.이렇게 생각한 윤윤서는 지수연과 작별 인사를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