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6화

밤이 깊어 지고...

구재건은 커다란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은 채 미간을 꼭 찌푸렸다.

그는 또 꿈을 꾸었다. 꿈속에는 여자의 서투른 손놀림과 함께 협박의 말이 들려왔다.

“내 말 들어요. 안 그러면 재건 씨가 조예리를 좋아한다고 소문 내 버릴 거니까요. 소문이 나면 모두가 재건 씨를 비웃겠죠? 스캔들의 주인공이라면 장학금도 없겠네요. 그렇게 허망하게 학교에서 쫓겨나고 싶어요?”

폐쇄된 교실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햇빛은 두꺼운 커튼을 뚫고 들어오지 못했다. 오직 초가을의 바람만이 살살 불어와 탁한 공기에 시원함을 더해줬다.

어린 구재건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셔츠 단추는 완전히 풀어져서 단단한 가슴 근육을 드러냈다. 바지 벨트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어깨에는 여자의 손이 닿아 있었다.

“내가 진작 이렇게 될 거라고 했죠?”

도발적인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재건 씨도 좋잖아, 안 그래요?”

“...”

구재건의 이마에는 핏줄이 튀어나왔다. 따듯한 손길에 따라 말로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 신경을 감쌌다.

그는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 와중에도 싫어하는 사람에게 반응을 일으키는 몸뚱아리가 한스러웠다.

이를 꽉 악문 그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속마음과 달리 몸은 자꾸만 바들바들 떨렸다.

결국 정신은 육체에 져버리고 말았다. 머릿속에 하얀빛이 스친 것도 잠시 그는 기분 좋은 신음을 냈다.

곧이어 구재건은 거칠게 숨을 쉬며 눈을 떴다. 하체는 축축해져 있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불을 켜고 욕실에 들어갔다. 샤워기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면서 바디위시의 향기가 맴돌기 시작했다. 윤윤서의 몸에서 자주 나던 냄새였다.

머리를 저으며 생각을 떨쳐낸 그는 샤워에 집중했다. 그러나 다시 눈을 뜨자, 샤워기 아래에 쓰러져 있던 윤윤서의 모습이 떠올랐다. 요정같이 매혹적인 모습이었다.

꿈에서 충분히 만족했는데도 몸은 또다시 반응하기 시작했다. 윤윤서가 사직했다는 생각에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는 그날 이후로 윤윤서의 손길에 빠졌다는 걸 한 번도 인정한 적 없었다. 그날 이후로 꿈에 나오는 여자가 그녀뿐인데도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윤윤서에 대한 증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럴수록 더 파괴하고 싶기만 했다.

욕실에서 나온 그는 사촌 동생 구지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탁할 일이 있어.”

그는 아직 만족하지 못했다. 윤윤서를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더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녀는 잘못한 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이튿날.

윤윤서는 적당히 정리하고 나서 수술받으러 병원에 갔다.

호텔을 나서기 바쁘게 어지럼증이 밀려왔다. 휘청거리는 와중에 구역질도 올라왔다.

“웁!”

윤윤서는 후다닥 쓰레기통 앞으로 달려가서 신물을 토해냈다. 이때 커다란 손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걱정하는 듯 물었다.

“괜찮아?”

“네, 감사합니다...”

윤윤서는 감사 인사를 하자마자 표정이 굳어버렸다. 그녀는 상대를 확 밀치며 말했다.

“오빠가 무슨 낯으로 돌아와!”

윤준서는 윤윤서의 오빠로 이혜수의 병원비를 가로채 간 장본인이다.

윤윤서의 말을 듣고도 그는 웃기만 할 뿐 화가 나 보이지는 않았다.

“너 어디 아파? 왜 갑자기 토하고 그래?”

“...속이 불편해서 병원에 가는 길이었어.”

사실 집안이 망하기 전, 윤준서도 꽤 잘난 사람이었다. 일이 바쁜 윤태호는 집에 자주 돌아오지 못했다. 그때마다 그녀보다 3살 만은 윤준서가 아버지 노릇을 해줬다.

윤준서는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해줬다. 이혜수가 보다 못해 잔소리할 정도였다. 그때마다 윤준서는 이렇게 말했다.

“옷에 가방 몇 개 샀을 뿐이에요. 애가 별을 따달라는 것도 아니고, 몇억 원 쓰면 어때요.”

그녀가 윤준서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이랬다.

“윤서는 우리 집안 공주님이야. 공주님이면 당연히 제일 좋은 거로 해야지.”

집안이 망했을 때도 윤준서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친구들과 연락하면서 뭐든 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모든 돈을 끌어서 투자한 사업은 친구라는 놈이 돈을 들고 튀면서 끝났다. 윤준서의 마지막 희망도 꺼지게 되었다.

떠난 아버지, 배신한 친구, 혼절한 어머니, 그리고 무기력한 현실...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그는 술집에서 살면서 싸움질만 했다. 돈이 없으면 윤윤서에게서 받았다. 윤윤서가 안 주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다. 옛정 때문인지 윤윤서도 거절의 마음을 굳게 먹지 못했다.

“병원? 내가 데려다줄게.”

윤준서는 그녀를 부축하려고 했다.

“차도 없으면서 어떻게 데려다주려고?”

“대신 택시 불러줄 수 있잖아.”

윤윤서는 입술을 깨물더니 결국 마음이 약해졌다.

“알았어...”

두 사람은 함께 택시에 올라탔다. 윤윤서는 윤준서에게 말했다.

“병원 앞까지 데려다주면 돼. 안까지 따라오지 마.”

그녀는 아무에게도 아이의 일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응.”

윤준서는 이렇게 대답하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너 안색이 너무 안 좋다. 가는 길에 조금이라도 자.”

윤윤서는 머리를 끄덕이고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택시 기사의 부름을 듣고 눈을 떴다. 곁에 있던 윤준서는 어느샌가 사라져 있었다.

“남자분은 중간에 내렸어요. 아가씨를 깨우지 말라고 하면서요.”

윤윤서는 갑자기 사라진 윤준서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 한두 번 있었던 것도 아니고 말이다.

“택시비 얼마예요?”

“만 사천 원이요.”

“네.”

택시비를 내려고 하자, 윤윤서의 핸드폰에는 잔액이 부족하다는 알림이 떴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그녀에게는 아직 200만 원의 생활비가 있었다.

윤윤서는 황급히 은행 잔고를 확인했다. 200만 원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관련 챕터

최신 챕터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