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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윤윤서는 작게 심호흡하더니 애써 평온하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구재건은 고개를 들어 거리감으로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그는 말없이 머리를 까딱할 뿐이었다.

그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니 사직 절차를 밟을 서류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사인만 하면 되었다.

윤윤서는 주저 없이 펜을 들고 사인했다. 구재건은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펜은 종이와 마찰하면서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사인을 끝낸 윤윤서는 펜과 서류를 원래 자리에 놓았다. 그리고 구재건을 향해 꾸벅 인사하며 덤덤하게 말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말을 마친 윤윤서는 몸을 돌려 떠났다. 미련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문이 닫힌 순간 구재건을 주먹을 꽉 쥐었다.

‘정말 가버린 거야? 왜?’

사무실의 분위기는 빠르게 가라앉았다. 강우진은 이대로 얼음조각이 될 것만 같았다.

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용기 내서 구재건에게 말했다.

“대표님, 사인한 서류는 제가 인사팀에 가져갈까요?”

“꺼져.”

구재건은 종래로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가는 빨갛게 달아올랐다.

살기가 단단히 서린 것이 마왕 못지않았다.

“네.”

강우진은 후덜덜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서류를 챙겨서 나왔다. 사무실에서 나온 그는 바로 인사팀에 가는 것이 아닌 자리에 앉았다.

사인한 서류를 보고 그는 한숨을 쉬었다.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과거에 얽매인 채 살아간다면 영원히 그때 그 순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안 맞는 사람을 붙잡으려고 한 윤윤서나, 전혀 안 괜찮으면서 괜찮은 척하는 구재건처럼...

생각해 보니 구재건은 꺼지라고 했지 알았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잠시 서류 제출을 보류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며 그는 사인 된 사직서를 문서 파쇄기 안에 넣었다. 기계가 작동하는 소리와 함께 사인 된 서류는 조금씩 삼켜지기 시작했다.

빠르게 작동하는 칼날 아래서 종잇장은 눈꽃이 되어 내렸다.

“아차, 실수로 사직 서류를 파쇄기에 넣어버렸네? 안 되겠다, 필요할 때 윤서 씨 한 번 더 불러야지.”

강우진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일을 계속했다.

...

회사에서 나온 윤윤서는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비록 가슴 통증은 여전했지만 어깨는 한없이 가벼웠다.

이제 그녀와 구재건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다. 앞으로는 아이 일만 해결하면 되었다.

윤윤서는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갔다. 한바탕 검사를 받고 나서는 의사에게 결과지를 건네줬다. 의사는 자세히 펼쳐보다가 말했다.

“HCG 수치, 즉 인간 융모성 생식선 자극호르몬이 안정적으로 오르고 있습니다. 태아의 발육이 양호하다는 뜻이죠. 일주일이 지나면 심장이 생길 겁니다. 그런데도 인공 유산... 하실 겁니까?”

윤윤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쉬웠던 의사는 한 번 더 설득하려고 했다.

“조금 더 생각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뇨.”

의사는 더 이상 묻지 않고 타자하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수술은 내일로 잡아 드릴게요. 일반적인 수술과 통증 없는 수술이 있는데, 어떻게 선택하시겠어요?”

“일반적인 거요.”

윤윤서에게는 200만 원의 생활비밖에 없었다.

통증이 없는 수술을 받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식으로라도 아이를 기억하고 싶었다. 그녀와 인연이 닿지 않아 태어나지 못한 아이를 말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었다.

수술 일정을 잡고 난 윤윤서는 호텔에 돌아갔다. 하루 내내 바쁘게 돌아치고 나니 몸과 마음이 피곤했다.

그러나 누워서 쉬기도 전에 또다시 구역질이 났다. 윤윤서는 입을 막고 화장실에 달려갔다. 먹은 것이 없는지라 나오는 것은 신물밖에 없었다.

한참 게워 내고 나서야 그녀는 살 것 같았다. 벽을 짚고 천천히 일어서서는 비틀비틀 침실로 돌아가 입을 닦았다.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던 중 검사 결과지가 함께 딸려 나왔다. 그중에는 B형 초음파 사진도 있었다.

의사의 말대로 아이는 잘 자라나고 있었다. 아직 세포만 한 크기이기는 하지만 벌써 태어난 다음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하루 내 참았던 눈물이 결국 흘러나왔다.

그녀는 아이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그녀는 어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다.

구재건은 그녀를 혐오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역시 미움만 받고 자랄 것이다.

그녀에게는 아픈 어머니와 능력 없는 오빠도 있었다. 집도 없는 주제에 어떻게 아이를 낳는단 말인가?

“미안해. 엄마가 능력 없어서...”

윤윤서는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도무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오늘은 그녀가 구재건을 떠나고 아이도 포기한 날이다. 앞으로의 나날은 그녀 혼자 마주해야 한다.

침대 끝에 앉은 그녀는 어깨가 덜덜 떨릴 정도로 울었다. 후에 울다가 지친 것인지 저도 모르게 카펫에 쓰러져서 잠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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