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윤서는 작게 심호흡하더니 애써 평온하게 말했다.“안녕하세요, 대표님.”구재건은 고개를 들어 거리감으로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그는 말없이 머리를 까딱할 뿐이었다.그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니 사직 절차를 밟을 서류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사인만 하면 되었다.윤윤서는 주저 없이 펜을 들고 사인했다. 구재건은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펜은 종이와 마찰하면서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사인을 끝낸 윤윤서는 펜과 서류를 원래 자리에 놓았다. 그리고 구재건을 향해 꾸벅 인사하며 덤덤하게 말했다.“그럼 안녕히 계세요.”말을 마친 윤윤서는 몸을 돌려 떠났다. 미련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문이 닫힌 순간 구재건을 주먹을 꽉 쥐었다.‘정말 가버린 거야? 왜?’사무실의 분위기는 빠르게 가라앉았다. 강우진은 이대로 얼음조각이 될 것만 같았다.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용기 내서 구재건에게 말했다.“대표님, 사인한 서류는 제가 인사팀에 가져갈까요?”“꺼져.”구재건은 종래로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가는 빨갛게 달아올랐다.살기가 단단히 서린 것이 마왕 못지않았다.“네.”강우진은 후덜덜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서류를 챙겨서 나왔다. 사무실에서 나온 그는 바로 인사팀에 가는 것이 아닌 자리에 앉았다.사인한 서류를 보고 그는 한숨을 쉬었다.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과거에 얽매인 채 살아간다면 영원히 그때 그 순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안 맞는 사람을 붙잡으려고 한 윤윤서나, 전혀 안 괜찮으면서 괜찮은 척하는 구재건처럼...생각해 보니 구재건은 꺼지라고 했지 알았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잠시 서류 제출을 보류할 생각이었다.이렇게 생각하며 그는 사인 된 사직서를 문서 파쇄기 안에 넣었다. 기계가 작동하는 소리와 함께 사인 된 서류는 조금씩 삼켜지기 시작했다.빠르게 작동하는 칼날 아래서 종잇장은 눈꽃이 되어 내렸다.“아차, 실수로 사직 서류를 파쇄기에 넣어버렸네
밤이 깊어 지고...구재건은 커다란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은 채 미간을 꼭 찌푸렸다.그는 또 꿈을 꾸었다. 꿈속에는 여자의 서투른 손놀림과 함께 협박의 말이 들려왔다.“내 말 들어요. 안 그러면 재건 씨가 조예리를 좋아한다고 소문 내 버릴 거니까요. 소문이 나면 모두가 재건 씨를 비웃겠죠? 스캔들의 주인공이라면 장학금도 없겠네요. 그렇게 허망하게 학교에서 쫓겨나고 싶어요?”폐쇄된 교실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햇빛은 두꺼운 커튼을 뚫고 들어오지 못했다. 오직 초가을의 바람만이 살살 불어와 탁한 공기에 시원함을 더해줬다.어린 구재건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셔츠 단추는 완전히 풀어져서 단단한 가슴 근육을 드러냈다. 바지 벨트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어깨에는 여자의 손이 닿아 있었다.“내가 진작 이렇게 될 거라고 했죠?”도발적인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재건 씨도 좋잖아, 안 그래요?”“...”구재건의 이마에는 핏줄이 튀어나왔다. 따듯한 손길에 따라 말로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 신경을 감쌌다.그는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 와중에도 싫어하는 사람에게 반응을 일으키는 몸뚱아리가 한스러웠다.이를 꽉 악문 그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속마음과 달리 몸은 자꾸만 바들바들 떨렸다.결국 정신은 육체에 져버리고 말았다. 머릿속에 하얀빛이 스친 것도 잠시 그는 기분 좋은 신음을 냈다.곧이어 구재건은 거칠게 숨을 쉬며 눈을 떴다. 하체는 축축해져 있었다.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불을 켜고 욕실에 들어갔다. 샤워기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면서 바디위시의 향기가 맴돌기 시작했다. 윤윤서의 몸에서 자주 나던 냄새였다.머리를 저으며 생각을 떨쳐낸 그는 샤워에 집중했다. 그러나 다시 눈을 뜨자, 샤워기 아래에 쓰러져 있던 윤윤서의 모습이 떠올랐다. 요정같이 매혹적인 모습이었다.꿈에서 충분히 만족했는데도 몸은 또다시 반응하기 시작했다. 윤윤서가 사직했다는 생각에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그는 그날 이후
“윤준서 이 새끼가...”윤윤서는 화가 나다 못해 숨이 다 막혔다. 그러나 욕해 봤자 정작 욕보이는 건 자신과 이혜수였기에 결국 참아냈다.택시 기사는 그녀가 힘겹게 숨을 고르는 것을 보고 걱정되는 표정으로 물었다.“괜찮으세요?”윤윤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이제 아이를 지울 돈도 없었다. 돈을 마련할 방법은 따로 생각해야 할 것 같았다.그녀는 지갑을 뒤져서 현금 5만 원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돈을 택시 기사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죄송한데 다시 호텔로 데려다주세요.”“네.”5만 원권을 받은 택시 기사는 거스름돈을 찾아주고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호텔에 돌아왔을 때 태양은 중천에 있었다. 따듯한 햇살이 몸을 비추는 데도 그녀는 전혀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피곤한 기색으로 안에 들어가자 호텔 매니저가 다가와서 말했다.“윤윤서 씨, 전에 미리 지불하신 투숙 비용을 다 썼는데 계속 투숙하실 건가요?”윤윤서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그녀는 주먹을 꼭 쥐면서 말했다.“아뇨. 다른 일이 있어서 곧 나갈 거예요.”“알겠습니다.”매니저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친절하게 벨보이도 보내줬다.윤윤서가 트렁크를 끌고 떠난 다음 매니저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는 굽신거리면서 말했다.“네, 도련님. 윤윤서 씨는 금방 떠났습니다.”“알았어요.”전화를 끊은 구지오는 구재건의 사무실을 향해 걸어갔다.그는 구재건의 사촌 동생이었다. 구재건의 성공하기 전에는 비정규직에서 일하는 지방대 출신이었다.그러나 지금, 그는 백영 최고 갑부의 사촌 동생으로 도련님이라고 불렸다. 어딜 가도 최상의 대접을 받았다. 두 사람이 나고 자란 시골마저 예전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발달했다.물론 구지오가 대접받는 건 그만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구재건이 직접 할 수 없는 어두운 일은 전부 그가 도맡아서 했다. 예를 들어 마음에 안 드는 협력사거나, 말 한 드는 윤윤서거나... 구재건의 심기를 거스르는 사람이라면 그는 절대 봐주지 않았다..
윤윤서는 이를 꽉 악물었다. 그는 최선의 용기를 다 해 구재건을 떠난 것이었다.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전에 했던 마음의 준비가 아까웠다.“도와줘요... 제발...”구재건은 콧방귀를 뀌었다. 윤윤서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은 모양이었다.한편 윤윤서의 상의는 이미 벗겨져 있었다. 예쁜 쇄골은 공기 중에 그대로 드러났다.한 사람이 흘린 침이 그녀의 얼굴에 뚝 떨어졌다. 끈적한 느낌과 역겨운 냄새는 웬만한 악몽보다도 끔찍했다.“안돼!”반항하다 못한 윤윤서는 결국 울다시피 외쳤다.“대표님이랑 할게요!”“뭘?”구재건은 아주 여유로웠다. 그는 노련한 사냥꾼처럼 함정에 빠진 사냥감을 노리고 있었다.윤윤서는 눈을 꾹 감더니 결국 타협을 선택했다.“대표님이랑... 자겠다고요...”이 말이 나온 순간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차량들의 헤드라이트가 이곳을 밝혔다. 눈 부신 빛에 주변은 낮이 된 것처럼 밝아졌다.차 안에서는 경호원들이 내려왔다. 그들은 손쉽게 부랑인들을 멀리 끌어갔다.그중 눈치가 없는 한 사람은 윤윤서에게 흠뻑 빠져있었다. 그는 경호원의 손에서 벗어나더니 다시 윤윤서를 향해 덮치려고 했다.구재건은 성큼성큼 걸어가서 그의 머리를 차버렸다. 부랑인은 꽥 소리 지르며 바닥에 쓰러지더니 피와 부러진 이빨을 토해냈다.가방에서 현금다발을 꺼낸 구재건은 부랑인들 앞에 내던졌다. 현금을 가지고 다니는 건 대학교 시절에 생긴 습관이다. 부자가 된 다음에도 그 습관은 사라지지 않았다.현금은 우수수 떨어졌다. 달빛 아래에서 핏빛으로 물든 꽃잎처럼 보였다. 부랑인들은 우르르 몰려들더니 미친개처럼 빼앗아대기 시작했다.윤윤서는 바닥에 쓰러진 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옷을 입었다. 구재건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힘없이 쓰러져 있는 것이 아주 연약해 보였다. 도망칠 능력도 없으면서 감히 벗어나려고 한 대가였다.구재건은 차갑게 웃으며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차 안으로 끌어갔다. 구지오와 경호원은 눈치껏 따라가지 않았다.비틀거리며 차 안으로 이끌린 윤윤서는 다리를
윤윤서는 몸을 흠칫 떨더니 머리를 돌렸다.“만약... 제가 임신했다면 어떻게 할 거예요?”구재건은 그녀의 발그레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경멸 섞인 표정으로 되물었다.“너한테 내 아이를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당연히 없죠. 제 주제는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선을 넘는 일은 없을 거예요.”“좋아.”구재건은 이제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싸늘하게 경고를 덧붙였다.“윤 비서도 알다시피 재원이 좀 발이 넓어. 백영의 의료기관 중 3분의 1이 재원에 영향받는 거 알지?”병원에서 병을 보이는 것은 실명제다. 수술은 더더욱 그랬다.구재건의 뜻은 아주 명확했다. 만약 거짓말을 한다면 들통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윤윤서는 얼굴이 굳었다. 만약 구재건이 말하지 않았다면 정말 까먹을 뻔했다.다행히 구재건은 아직 조사를 시작하지 않았다. 그녀는 구재건의 의심이 조사할 정도로 커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수술은 아무래도 다른 도시에 가서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아랫배를 바라보며 끝없는 슬픔에 빠졌다.‘네 아버지 참 독종이지?’그녀는 곧 다시 고개를 들어 구재건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대표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은 없을 거예요.”“그래.”머리를 끄덕인 구재건은 드레스 룸에 갔다. 잠시 후에는 깔끔한 차림새로 다시 나왔다.그는 넥타이를 정리하며 한결같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난 이만 나갈게.”“저녁에 돌아오시나요?”“아니.”“알겠습니다.”윤윤서는 구재건을 배웅해 줬다. 출입문을 열던 구재건은 또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너...”“회사에는 최대한 빨리 복귀할게요. 다시는 사직하지 않을 거예요. 3년의 계약은 폐기하고 대표님이 질릴 때까지 있을게요.”윤윤서는 구재건의 성향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충심을 표했다.구재건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의 표현에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역시 구지오에게 연락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그러나 그는 몰랐다. 윤윤서의
윤윤서는 오후 동안 집에서 쉬다가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지수혁이 친절하게 말했다.“네가 제일 좋아하는 오렌지주스 먼저 주문했어.”“고마워.”오렌지주스를 마시고 난 윤윤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네가 부탁할 일이라는 건 뭐야?”윤윤서는 자신의 주제를 잘 알았다. 재벌 3세가 집안 망한 그녀에게 부탁할 일이라고는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그게...”지수혁은 자신의 명함을 꺼내 윤윤서에게 건네줬다.“나 요즘 엔터 회사 키우고 있어. 그래서 너한테 대본 부탁하려고 했지.”그는 대학교 때부터 창업하고 싶어 했다.시장 조사 결과 백영의 대부분 산업을 재원그룹이 차지했다. 오직 엔터 쪽에만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었다. 재원그룹이 발 담그고 있는 건 여전했지만 키우는 연예인은 한 명뿐이었다.그래서 지수혁은 이 기회를 빌려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볼 생각이었다. 그의 부모는 망할 것이라고 단정 지은 듯 투자금을 아주 조금만 줬다. 그래서 그는 단가 낮춘 영화 한 편을 실험으로 제작해 보려고 했다.배우, 감독, 스태프... 이런 건 미리 준비된 리스트가 있었지만 작가는 아무리 봐도 마땅치 않았다. 실력 좋은 작가는 지나치게 비싸고, 실력이 떨어지는 작가는 대본 질량이 말도 안 됐다.얼마 전 유준서와 통화하면서 그는 문득 윤윤서가 떠올랐다.“대본?”윤윤서는 머리를 숙여 지수혁의 명함을 바라봤다. 위에는 빛아트 대표이사라고 적혀 있었다. 회사 소개를 보니 규모가 꽤 큰 것 같았다.자신이 없었던 윤윤서는 일단 거절했다.“한 적 있는 일기는 한데... 흠, 난 남들처럼 전문적으로 배운 게 아니라 기초가 모자라.”“또 하기 전부터 겁먹는다. 우리 학교 다닐 때 연극부에서 누가 제일 유명했는지 잊었어? 대본도 쓰고, 연기도 하고, 감독도 할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야.”집안이 망하기 전의 윤윤서는 세상 부러운 것 없는 사람이었다. 얼굴 예쁘지, 공부 잘하지, 심지어 그녀는 경영학과의 수석이었다.시간을 보내느라 가입한 연극 동아리에서는 그녀가
“안녕하세요, 구 대표님.”지수혁은 먼저 인사를 건넸다.“저는 지수혁이라고 해요. 윤서 친구예요.”“친구?”구재건은 지수혁이 아닌 윤윤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윤 비서한테 이런 친구가 있는 줄은 몰랐네.”윤윤서는 입술이 창백해졌다. 구재건의 말속에 숨은 뜻을 알았던 것이다.그녀는 구재건을 너무 잘 알았다. 두 사람이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고 해도, 그는 그녀 주변에 다른 남자가 나타나는 걸 싫어했다.그녀와 지수혁은 그런 사이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설명이 오히려 반작용만 일으킬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아예 입을 다물었다.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를 보아 낸 지수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구재건과 함께 온 여자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다들 아는 사이 같은데, 만난 김에 같이 식사할까요?”윤윤서는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구재건이 당당하게 말했다.“그러죠.”윤윤서는 결국 아무 말도 못 했다. 거절의 말도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미안하다는 듯이 바라보자, 지수혁은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흔들었다. 애초에 구재건과의 식사 자리를 거절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다시 자리에 앉고, 윤윤서는 대화를 나누다가 구재건과 함께 온 여자가 톱스타 임지연이라는 것을 알았다.임지연은 아주 예쁘게 생겼다. 연기 실력도 훌륭했다. 요즘에는 중요한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까지 받았다. 실력도 배경도 단단한 배우였다.그러나 이걸로 구재건의 관심을 이끌기는 역부족이었다. 윤윤서는 그의 곁에 3년이나 있었다. 그가 일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여자는 그에게 생리적 욕구를 해결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전에도 협력사에서 인플루언서, 모델, 혹은 연예인을 부른 적 있었다. 물론 번마다 내쫓겼지만 말이다.임지연과는 식사도 함께하는 걸 봐서 평범한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 더군다나 임지연은 아주 똑똑했다. 과하게 밀어붙이지 않는 것이 우아해 보이기까지 했다.구재건의 말 한마디로 분위기가 식을 때는 그녀가 나서서 깔끔하게
백양은 밤이 더 화려한 도시다. 환한 조명은 도시 구석구석을 밝게 비췄다.선바이저도 막지 못한 빛이었다. 만약 누군가 차 바로 곁에 서 있으면 분명히 보일 것이다.윤윤서는 눈시울을 붉히며 수치심에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대표님 꼭 이렇게 하셔야겠어요?”자신이 그를 아직 좋아한다는 점을 이용해서 너무 심하게 괴롭힌다고 생각했다.“불만 있어?”구재건은 시선을 내리깔더니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착한 척하려면 끝까지 해야지. 내가 네 속셈도 못 알아볼 줄 알아? 내 눈은 장식으로 보여?”윤윤서는 흠칫 놀랐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심장이 심하게 욱신거려서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그녀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구재건이 지켜보고 있었다.“네가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어차피 결국에는 나한테서 못 벗어날 테니까.”말을 마친 구재건은 그녀의 뽀얀 얼굴을 탁탁 쳤다. 적당한 힘은 통증을 주는 것보다 분위기를 뜨겁게 만들었다.“그러니까 알아서 잘해.”“...”밀물처럼 밀려온 무기력함에 윤윤서의 눈가는 더욱 촉촉해졌다.그녀는 정말 들킬 줄 몰랐다. 그래도 다행히 임신 사실은 들키지 않았다. 안 그러면 더 무서운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이 상황을 슬퍼해야 하는지, 좋아해야 하는지 헷갈렸다. 그녀가 주저하고 있을 때 구재건이 시계를 보며 말했다.“10분 남았어.”10분 후에도 임무를 완성하지 못하면 낯선 사람 앞에서 하게 된다. 그녀가 수치스러워할수록 구재건은 더 신이 날 것이다.“...”윤윤서는 몸을 흠칫 떨었다. 눈초리까지 파르르 떨렸다. 대리 기사 앞에서 그런 짓을 하는 모습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녀에게 구재건은 악몽 그 자체였다.윤윤서는 입술을 꼭 깨물고 있다가 결국 손을 뻗어 그의 바지 벨트를 잡았다. 차 안에는 금세 야릇한 분위기가 맴돌기 시작했다.가끔 밖에서는 자동차 경적이 들렸다. 그때마다 긴장한 윤윤서는 콧등에 땀방울이 맺혔다. 그러나 구재건은 일부러 그런 것인지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힘이 빠진 손이 시큰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