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2화

“...”

윤윤서의 입술은 창백하게 질렸다. 혀끝을 하도 잘근잘근 씹어서 입안에는 피비린내가 맴돌았다.

“하하!”

구재건의 허락을 받은 김정섭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더욱 노골적인 눈빛으로 술잔을 들이댔다.

“상사가 말했는데도 안 마실 거예요?”

윤윤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해서 그녀는 또다시 술잔을 밀어냈다.

“죄송해요. 저 진짜 술은 못 마셔요.”

“쯧, 성가시게 구네. 이러니까 상사한테 예쁨을 못 받지.”

김정섭은 더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럼 구 대표님 말씀대로 내가 가르쳐줄게.”

말을 마친 그는 갑자기 손을 뻗어 윤윤서의 턱을 잡았다. 그리고 억지로 술을 먹이려고 했다.

그들의 눈에 여자는, 특히 비서는 장식품에 불과하다. 고장 나면 하나 바꾸면 그만이었다. 주인도 신경 안 쓰는 장식품을 남은 더욱 아낄 필요가 없었다.

“웁...!”

윤윤서는 되는 대로 반항했다. 자극적인 액체는 코와 입을 타고 목과 가슴까지 흘러들었다. 하얀색 셔츠는 술에 적셔지며 속옷의 윤곽을 드러냈다.

괴롭힌 당한 고양이라도 된 것처럼, 윤윤서는 잔뜩 흐트러진 모습으로 버둥거렸다. 남자들은 거친 숨을 쉬며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짝!

뺨 때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윤윤서는 앞섬을 여미면서 뒷걸음질 쳤다. 김정섭은 콩알만 한 눈을 최대로 뜨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미친년이 감히 나를 때려?!”

그는 와인잔을 들어 윤윤서를 향해 던졌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튄 유리 파편은 윤윤서의 창백한 얼굴도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얼굴에는 곧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이고, 김 대표님! 진정하세요!”

피를 볼 필요까지는 없었기에 사람들은 김정섭을 말리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그의 곁으로 다가가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구 대표님 사람이에요. 언제 말을 바꿀지 모르는 일이니까 자중하세요.”

김정섭은 이제야 이성이 돌아왔다. 그는 힐끔거리며 구재건의 눈치를 살폈다.

구재건은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기분 좋은 듯 입꼬리를 올린 채 말이다. 윤윤서가 괴로워할수록 그는 더 기분이 좋았다. 뭐가 됐든 그녀가 치러야 할 대가라고 생각했다.

구재건의 눈빛과 마주한 순간 윤윤서는 차가운 바닷속으로 빠지는 것 같았다. 3년의 인내 끝에도 그의 악감정은 더욱 커지기만 했다.

그녀는 견딜 수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심호흡으로 감정을 정리한 그녀는 미리 준비해 놓은 사직서를 꺼냈다. 원래는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지만, 이제 보니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구재건은 시력이 좋았다. 윤윤서가 편지를 꺼낸 순간 그는 바로 사직서라는 글자를 봤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내 앞에서 사직서를 꺼내? ...감히?’

윤윤서는 구재건의 눈빛에도 굴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구 대표님, 오늘부로 저는 더 이상 재원그룹의 비서가 아니에요.”

얇은 사직서는 테이블에 떨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던 사람들은 전부 침묵에 잠겼다.

구재건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저 눈빛만 차가웠을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가 단단히 화났음을 눈치챘다.

“그걸 여기까지 들고 왔어? 얼마나 사직하고 싶었던 거야?”

구재건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그녀의 얼굴에 난 상처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일 아침 8시, 회사에 가서 사직 절차 밟고 가.”

“네.”

비서로 일하는 동안 다른 건 몰라도 연기 실력 하나는 엄청나게 늘었다.

윤윤서도 구재건이 화난 걸 알았다. 지금 한 말도 진심이 아닌 조롱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녀는 이미 떠나기로 결심했다. 지난 7년의 세월도 동시에 내려놓을 것이다.

룸을 나서는 그녀의 발걸음은 아주 가벼웠다.

문이 닫히고, 남자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기에 바빴다. 김정섭은 조심스러운 말투로 구재건을 불렀다.

“구 대표님...”

“꺼져!”

구재건은 차가운 표정으로 살기를 드러냈다.

‘오냐오냐해줬더니, 이게 주제도 모르고 나를 능멸해?’

“네, 그러면 쉬고 계세요.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김정섭은 후다닥 도망갔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떠나갔다.

구재건은 텅 빈 룸에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 밖으로 나가던 윤윤서의 뒷모습을 떠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흥, 이제 와서 나를 떠날 수 있을 것 같아?’

...

레스토랑에서 나온 윤윤서는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3년 전, 회사가 파산한 다음 그녀의 아버지 윤태호는 조금 남은 돈을 챙겨 들고 실종했다. 큰오빠 윤준서는 동네방네 돈을 빌리며 재기를 꿈꿨다.

그러나 창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없는 살림에 사기까지 당하는 바람에 안 그래도 어렵던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고혈압으로 쓰러진 어머니 이혜수는 그때부터 입원해서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다. 윤윤서는 이혜수의 병원을 옮기려고 병원에 가는 것이었다.

이제 사직도 했으니, 이 도시와의 모든 것을 끊어낼 생각이었다. 그는 가족들을 데리고 완전히 떠날 예정이었다.

이혜수의 병실에 들어가자마자, 주치의가 그녀를 발견하고 불러세웠다. 주치의는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윤윤서 씨, 어머님의 병원비를 큰오빠라는 분이 와서 전부 빼갔어요.”

“네?”

윤윤서는 제자리에 굳어버렸다. 그 돈은 그녀가 재원그룹에서 목숨 걸고 일해서 번 것이었다. 병원비 걱정 없이 이혜수를 치료하기 위해서 말이다.

병원을 옮긴 다음에도 그 돈은 꼭 필요했다. 그런 돈을 윤준서가 가로챈 모양이었다.

관련 챕터

최신 챕터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