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아는 어쩔 수 없이 성질을 참으며 제자리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민재가 20분 정도 지난 후에야 서둘러 도착해 얼굴인식을 한 후에야 그녀는 별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윤아 씨, 제가 모셔다드릴까요?”그가 말을 마치자 윤아도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부탁할게요."현재 민재의 행동으로 볼 때 그는 수현이 그녀의 두 아이를 데려간 것을 아직 모르기 때문에 그녀를 돕고 있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래서 윤아는 당연히 그에게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민재의 안내로 그녀는 빨리 수현의 거처에 도착했다."윤아 씨, 도착했습니다.”앞에 있는 큰 집을 바라보며 초인종을 누르려는데 민재가 막아서며 입을 열었다."윤아 씨, 제가 출입문 비밀번호를 알려드릴 테니 그냥 들어가시면 됩니다.”그 말에 윤아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세요, 그럼.”민재는 비밀번호를 알려준 뒤 그대로 자리를 떴고, 윤아는 비밀번호를 입력해 무사히 현관으로 들어갔다.이 별장은 조용했고 들어서면 분수가 있었는데, 양쪽의 불빛이 서로 어울려 주위가 대낮처럼 밝았다.윤아가 별장으로 들어간 후에는 또 다른 도어락이 있었는데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그녀의 마음은 복잡했다.왜냐하면 출입문 비밀번호가 그녀의 생일이었기 때문이다.비밀번호를 입력하자 문이 자동으로 열렸고 그녀가 들어가자마자 로봇의 목소리가 들렸다."주인님, 실내 배기 시스템, 공기 순환이 시작되었습니다.”실내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녀는 곧장 들어가려다 티끌 하나 없이 청소된 카펫을 보고는 옆 캐비닛에서 슬리퍼를 갈아 신고 들어갔다.실내는 조용하니 한 사람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윤아는 주위를 살피며 눈썹을 찡그렸다. 수현이 정말로 여기에 사는지 의심이 되었기 때문이었다.휴대전화를 꺼내 다시 수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연결되지 않았다.그래서 그녀는 수현에게 연락하는 것은 포기하고 일단 찾아보기로 했다. 그녀는 아래층을 한 바퀴 돌았지만 사람을 찾지 못해 2층으로 올라갔다.마침내 한 침실의 욕실
이 말에 윤아는 언짢은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다."시치미 떼지 마, 아이가 여기 없다면 어디 있는데?” 그녀가 아이를 찾으러 왔다고 했을 때부터 수현은 추측을 했다. 그녀는 이 시간에 이미 아이를 집에 데려왔을 텐데...어떤 가능성이 뇌리를 스친 수현은 문득 윤아의 어깨를 감싸며 눈을 가늘게 떴다."아이들이 사라졌어?”"무슨 뜻이야, 아이가 왜 보이지 않는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수현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래서, 아이들이 진짜 사라진 거야?”"…”그는 자신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거나 다른 말로 빙빙 돌리지 않고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소식이 사실인지 확인만 반복한다.설마..."네가 데려간 게 아니야?”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현은 그녀를 넘어 밖으로 나갔고 윤아도 얼른 몸을 돌려 뒤쫓았다."진수현.”"잠깐만.”휴대전화를 손에 든 수현은 그녀에게 먼저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고 제스처를 취했지만, 휴대전화를 가져간 후에야 자신의 휴대전화가 베터리가 없어 꺼진 것을 알았다.지금 가서 충전하고 키려면 너무 오래 걸린다.여기까지 생각한 수현은 윤아에게 손을 내밀었다."핸드폰 좀 줘봐.”"왜?”"이 비서한테 전화하려고.”윤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휴대전화를 그에게 건네주었다.수현은 핸드폰을 가지고 이민재에게 직접 전화를 했고, 그쪽에서 받자마자 두 아이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말했다."지금 당장 사람을 불러 학교 CCTV에 아이를 누가 데려갔는지 확인하고 사람을 찾아서 주변을 샅샅이 뒤지세요.”옆에 선 윤아는 그의 말을 들으며 눈썹을 찡그렸다.전화를 끊은 뒤에야 그녀는 다시 한번 물었다."윤이랑 훈이, 정말 네가 데리고 온게 아닌 거야?”그녀는 여전히 믿지 않았다, 수현 말고 누가 조용히 아이를 데려갈 것인가?심지어 그녀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말이다.아이를 뺏으려던 수현 말고는 아무도 생각나지 않았다.수현은 휴대전화를 돌려주면서 되물었다."우리 집에 아이의 흔적이 있는 것 같아?”"여긴 없지만 일부러 아이를 숨길지 누가
"잘 생각해 봐, 나 말고 정말 아무도 아이를 데려갈 사람이 없는 거야? 윤이와 훈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잖아. 그들은 매우 똑똑해서 전혀 낯선 사람과 함부로 떠나지 않을 것 같은데.”그가 이렇게 말하자 윤아는 오히려 침묵을 지켰다.맞아, 윤이와 훈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야, 둘 다 항상 똑똑해, 윤이가 조금 단순하더라도 훈이는 절대 낯선 사람의 차에 함부로 타지 않을 건데.그러니... 아마도 지인이 그들을 데려갔을 것이다.그런데 어떤 지인이라면 아이들이 이렇게 기꺼이 차에 탔을까? 심지어 아버지라 하면서 아이를 데려갈 동기까지 갖췄다니...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윤아는 다시 눈을 떴다."너 말고는 정말 생각나는 사람이 없어.”"…”그는 하마터면 기가 차 웃음이 나올 뻔했다."심윤아, 내가 정말 그런 동기가 있었다면 이런 말을 했을 것 같아? 설사 내가 아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해도 네가 나를 어떻게 할 수 있겠어?”윤아는 입술을 오므리며 다소 억척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너 말고 또 누가 있겠니?”"네가 생각했을 땐?”"무슨 말이야? 당신은 이미 짐작 가는 사람이 있어?”"ㅎ.”그러자 수현은 냉소를 지으며 하얀 셔츠를 몸에 걸치고는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누군지 금방 알게 될 거야.”그의 이런 모습을 보고 윤아는 그가 아무래도 뜸을 들이고 있는 것 같아 따지려고 했다. 하지만 이때 수현은 갑자기 손을 뻗어 허리춤에 두른 수건을 뜯어냈다.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던 윤아가 마침내 반응했다.그녀는 놀라서 눈을 부릅뜨고 믿을 수 없는 듯이 수현을 바라보았다.그것도 오랫동안..."충분히 봤어?“수현은 입가에 있는 듯 없는 듯 웃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의 목소리는 윤아를 반응시켰다."너 미쳤어?”"내가 옷 갈아입는 걸 보고 싶어서 여기 계속 있었던 거 아니야?”수현은 마치 옆에 사람이 없다는 듯 태연자약하게 바지를 입고 벨트를 매고 무표정한 얼굴로 벨트의 단추를 잠갔다.비록 그의 몸은 5년 전에 이미 보았지만…윤아는 귀가
결국 윤아는 차에 앉았다.차는 빠르게 별장을 떠났고 길에 들어서기 전, 수현은 그녀에게 말했다.“이선우 집주소 알려줘.”오 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선우라는 이름을 다시 입에 올릴 때 그는 이를 악물었다.“선우?”이 이름을 들은 윤아도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하지만 곧 다른 일을 떠올리고는 잠시 침묵한 후, 수현에게 선우 집주소를 알려주었다.전후 십 초가 되지 않는 시간이 흘렀다.주소를 받은 수현은 꽤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윤아가 자신과 한바탕 다툴 거라고 여겼는데 이렇게 빠르게 알아챌 줄은 몰랐다.목적지가 생긴 후, 차는 길에 들어섰다.선우를 찾으러 가는 길에서 차 안은 제법 조용했다.윤아는 사색에 잠겼다. 여기에 오기 전, 그녀는 한 번도 선우가 아이를 데려갈 거라고 의심하지 않았다.그저 수현이 자신과 아이를 뺏으려 했으나 그녀가 동의하지 않아 몰래 아이를 데려갔다는 생각뿐이었다.하지만 수현이 선우 집주소를 달라는 말과 아이들 담임 선생님이 전에 했던 말들을 떠올려보니 그녀는 그제야 빠르게 반응할 수 있었다.선생님은 전에 선우가 아이들 아빠라고 여겼기 때문에 두번째도 자연스럽게 오해한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의식적으로 아이 아빠가 데려갔다는 선생님의 말에 수현이라고 오해했다.이건 아이들이 수현의 핏줄이라고 인정하는 격이 되어버렸다.윤아는 손을 뻗어 이마를 감쌌다. 정말이지 멍청한 자신 때문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무력감이 들었다.대부분 일을 처리할 때 윤아는 제법 침착했다. 하지만 아이에 연관된 일이라면 그녀는 충동적으로 변했고 마음을 가라앉히며 차분히 생각할 수 없었다.만약 수현이 귀띔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심지어 선우가 아이를 데려갔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이때, 수현의 핸드폰이 갑자기 진동했다. 윤아는 그의 핸드폰을 한눈 보았는데 전과 다른 핸드폰인 것을 발견했다.이 핸드폰의 색깔은 전에 사용하던 것과 달랐는데 아마 그의 예비용 폰인 것 같았다.그는 차의 블루투스를 연결한 후, 전화를 받았다.“찾아냈습니
차 안은 매우 조용했다. 윤아는 자리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수현은 신호등 십자로에서 차를 세웠다.그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가만히 앉아있었는데 뭘 생각하는지 알아챌 수 없었다. 잠시 후, 그는 입을 열었다.“네 눈엔 안 좋은 일은 전부 내가 한 거로 보여?”“...”“아이가 사라지자마자 넌 내가 데려갔다고 생각 했잖아.”“당연한 거 아니야?”윤아는 되물었다.“매일 학교에 가서 아이들 환심을 사려고 애를 썼잖아. 그게 아이들을 데려가려는 생각 아니었어? 그럴 생각 없었다고 장담할 수 있어?”“내가 이 모든 걸 한 이유는 그저 아이들에게 보상해 주고 싶은 마음 뿐이었어. 다른 건...”“이런 얘기하고 싶지 않으니까 빨리 운전이나 해. 빨간 불 거의 다 지나가.”수현이 아이를 데려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윤아는 아주 조급했다. 도대체 누가 아이를 데려갔단 말인가?후에 선우가 데려간 걸 발견했을 때 비록 안심이 되긴 했지만 미리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은 점에 대해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아이를 데려갈 때 선우가 왜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전에 매몰차게 선우를 거절한 일을 생각하면 윤아는 조금 무서웠다.선우가 화난 마음에 어떤 일을 할지 몰라 두려웠다. 하지만 그를 알고 지낸 오랜 시간이 알려주기를 선우는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현재 이건 확정되지 않은 일이었고 두 눈으로 직접 아이를 본 후 답을 내릴 수 있을 거다.수현도 아이들이 걱정 되었는지 그녀와 계속 다투지 않았다. 선우가 지내는 곳은 뜻밖에도 수현의 거처와 멀지 않았다. 이십 분 정도 운전하면 도착할 수 있었다.도착한 후, 윤아는 얼른 차에서 내렸다.원래 직접 선우를 찾아가려고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수현의 길을 막았다.“너 먼저 돌아가.”이 말에 수현은 눈썹을 올렸다.“뭐?”“나 혼자 들어가서 선우 찾으면 돼. 넌 따라오지 마.”수현과 선우는 전엔 친구였지만 나중에 사이가 틀어지면서 분위기가 평화롭지 않았
수현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마침 사람이 없어 그는 직접 윤아를 끌고 들어갔다.“네가 뭔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다 적혀 있는 거 몰라? 딱 보면 알지.”윤아는 입술을 꾹 다물며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려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뭔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다 적혀 있다고? 언제부터 감정 표현이 이렇게 뻔했지?이미 엘리베이터에 들어섰기 때문에 윤아는 손목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수현은 아직도 꽉 잡고 있었는데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진수현, 이거 놔줘.”수현의 얇은 입술엔 예쁜 각도가 살며시 자리 잡고 있었다.“놓았다간 윤이와 훈이가 우리가 함께 데리러 왔다는 걸 어떻게 알아?”“놓을 거야, 말 거야?”수현은 그녀를 보지 않으면서 아예 듣지 못한 척했다.계속 몸부림을 쳐도 수현이 놓아주질 않으니 윤아는 화가 치솟아 그의 손을 깨물며 이발 공격을 했다.수현은 원래 윤아가 어떻게 애써도 놓아주지 않겠다고 생각했다.얼마나 어렵게 잡은 손인데 당연히 쉽게 놓아줄 리가 없었다. 윤아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힘을 놓고 말할 때 그가 훨씬 압도적이었으니까.하지만 깨물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윤아는 수현의 팔을 장난삼아 문 게 아니었다. 이발은 정말 그의 살결을 파고들어 선홍색 피를 보였다.수현은 손목에서 찌릿한 아픔이 전해져 오는 것을 느끼고 끙하고 아픈 소리를 내며 손의 힘을 풀었다.이 순간을 빌어 윤아는 얼른 자기 손을 수현의 손바닥에서 빼어내며 뒤로 몇 걸음 후퇴했다.그녀가 물러날 때, 수현은 눈썹을 찌푸리고 그녀를 보았다. 윤아의 입가에 묻은 선홍색 피를 보고 그는 자리에 멍해 있었다.잠시 후, 그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팔을 보았다.역시나 상처가 났다.그러니까 윤아의 입가에 묻은 그 선홍색 자국이... 바로 그의 피였다.피는 원래도 붉고 도톰한 그녀의 입술을 더 탐스럽게 만들었다. 이 장면을 본 수현의 눈동자에도 알 수 없는 욕망이 일렁였고 목젖도 따라서 아래위로 움직였다.윤아는 뒤로 물러선
일 초 후, 진 비서 얼굴에 자리 잡았던 웃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아쉽게도 윤아는 지금 두 아이에게만 정신이 팔렸었던 지라 진 비서의 표정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단지 집안을 둘러보며 그에게 물었다.“진 비서님, 선우 지금 안에 있나요?”“대표님께서 안에 계시긴 한데요...”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아는 급히 집안에 들어갔고, 수현은 이를 보자 차가운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진 비서는 이런 수현을 보더니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그의 길을 막았다.그러자 수현은 싸늘한 시선으로 진 비서를 쏘아보았고 진 비서는 두려움에 목을 움츠렸다. 결국 그는 수현의 강한 압박감에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수현은 코웃음을 치며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집안에 들어가니 멀리서 윤이 웃음소리와 성인 남성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윤아는 이 소리를 따라 찾아갔고 결국 베란다에서 선우와 아이들을 발견했다.베란다 테이블엔 여러가지 간식과 장난감이 놓여 있었는데 윤이는 지금 빵빵한 볼로 오물오물 씹고 있었고 훈이는 조금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앉아있었다.원래 베란다 끝자락에 앉아 있었던 선우도 지금 몸을 일으키면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윤아야, 왔어?”멀지 않은 허공에서 윤아와 선우의 시선이 맞닿았다. 그녀는 선우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입을 꾹 다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윤이 입가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닦아주었다.“윤이 너 꿀꿀이야? 어떻게 이렇게 먹을 수 있어?”“윤이는 꿀꿀이 아니거든요? 꿀꿀이 못생겼단 말이에요.”모녀가 말하고 있는 동안 선우도 가까이 다가왔다.“미안해. 오늘 학교를 지나가다가 갑자기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 데려왔어. 너한테 알린다는 걸 그만 잊어버렸네. 많이 걱정 했어?”윤아는 간신히 입꼬리를 올리며 선우의 말에 대답하려고 했을 때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많이 걱정하지는 않았고 그냥 급한 마음에 오래 찾아다니긴 했어.”“...”윤아는
이러다간 분명 큰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이런 생각이 머리에 자리 잡자마자 윤아는 얼른 윤이를 안고 일어섰다.“진 비서님 보낼 필요 없어. 시간도 늦었는데 비서님도 집에 돌아가 식사해야지. 나 혼자 아이들 데리고 가면 돼.”역시나 그녀가 입을 열자마자 선우는 그녀에게 주의를 돌렸다.윤아를 마주할 때 선우는 온화한 표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윤아야, 정말 필요 없어?”“어. 나 혼자 가면 돼.”“그래. 그러면 조심해서 들어가고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나한테 전화해.”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알겠어.”가기 전, 선우는 윤이에게 작은 봉지를 건넸다.“이건 윤이와 훈이 선물이야.”“아니야...”“그냥 받아. 전에 윤이가 이미 받았어.”윤아는 어쩔 수 없이 윤이가 봉지를 받는 걸 허락했다. 선우와 작별 인사를 한 후, 그녀는 떠나려 했다.그러나 이때 곁에 서있던 수현이 갑자기 그녀를 향해 걸어오더니 허리를 굽혀 훈이를 번쩍 들어 안았다.훈이도 깜짝 놀라 무의식적으로 수현의 목을 감싸안았는데 작은 몸은 한껏 경직되어 있었다.수현에게 안긴 건 처음이었다. 훈이는 제법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아저씨들이 안아준 거랑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윤아는 이 장면을 보고 별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한시라도 빨리 여기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었다.선우는 원래 자리에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두 사람이 아이 한 명씩 안고 가는 모습을 쳐다보았다.한참이 지나서야 진 비서는 선우 곁에 다가가 분개하며 말했다.“대표님, 진수현 대표 정말 너무 합니다. 어떻게 감히 여기를 찾아올 생각을 한 답니까?”이 말을 듣자 선우는 피식 웃으며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몸을 돌려 베란다에 있는 의자에 앉아 테이블 위에서 아이들이 채 마시지 않은 음료를 들었다.곁에 있던 진 비서는 이를 보자 얼른 다가갔다.“대표님, 이건 아이들이 마시다 남긴 겁니다. 제가 바꿔드릴게요.”“됐습니다.”선우는 연이어 몇 모금 마셨고, 이를 본 진 비서는 마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