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서울.서울대학교병원.“축하합니다, 임신하셨습니다. 아기는 매우 건강합니다.”심윤아는 건네받은 보고서를 움켜쥐고 약간 놀란 기색을 보였다.‘임신?’심윤아는 놀라고 기뻤다. 그녀는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앞으로 정해진 날짜에 외래 오셔서 검사받으셔야 하세요. 아기 아빠도 함께 오셨어요? 함께 오셨으면 진료실로 들어오라고 하세요, 몇 가지 당부드릴 사항이 있습니다.”의사의 말에 심윤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심윤아는 어색하게 웃었다.“남편은 오늘 안 왔어요.”“참, 아무리 바빠도 임신한 아내의 곁에 있어야죠.”병원에서 나왔을 때, 밖에서 가랑비가 끊임없이 내리기 시작했다. 심윤아는 아랫배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여기에 작은 생명이 하나 있다니. 나와 수현 씨의 아이라니...’핸드폰의 진동을 느끼고 심윤아는 문자를 확인했다. 바로 남편 진수현이 보낸 메시지였다.「밖에 비가 많이 오네. 이 주소로 우산 좀 갖다줘.」심윤아는 주소를 읽어 보았다.「XX클럽하우스」‘여기가 어디지? 오늘 컨퍼런스 있다고 하지 않았나?’심윤아는 문자를 확인하고 나서 망설이지 않고 진씨 가문의 기사 진수에게 이 주소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진 기사님, 먼저 돌아가 계세요.”“사모님,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심윤아는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닙니다, 이따가 사모님과 함께 돌아가면 됩니다.”심윤아는 진수현을 기다려 그와 함께 집에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그녀의 말을 듣고 진씨 가문의 기사 진수는 재빨리 차를 몰고 떠났다.조금 전까지 가랑비만 계속 내렸지만, 지금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렸다.심윤아는 우산을 쓰고 클럽 입구까지 걸어갔다.이곳은 인테리어가 고급스러워 보이는 당구 클럽이었다. 심윤아는 소위 말하는 ‘입구 컷’을 당했다.“죄송합니다. 고객님, 회원 카드를 보여 주시겠습니까?”심윤아는 생각 끝에 결국 클럽 입구에서 나와 진수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수현 씨, 나 도착했어. 언제 끝날 것 같아? 밑에서 기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진수현은 눈을 내리깔고 빠르게 심윤아에게 소식을 전했다.「우산은 필요 없게 됐어, 먼저 돌아가.」이 뜬금없는 문자를 받았을 때, 심윤아는 문뜩 어리둥절 해졌다.‘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그녀는 그 자리에서 비를 맞으며 잠시 기다렸지만, 진수현은 다시 답장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정말 바쁜 일이 있는 것 같았다.심윤아는 일단 돌아가기로 했다.“잠깐만.”뒤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부르자, 심윤아는 고개를 돌렸다.잔뜩 멋을 부린 두 여자가 심윤아 앞으로 다가왔다. 그중 키가 큰 편인 여자가 그녀를 흘겨보며 시큰둥하게 물었다“네가 심윤아야?”그 여자의 얼굴에는 혐오가 가득 서려 있었다. 심윤아도 참지 않고 상대방의 질문에 당당하게 대답했다.“네, 그쪽은 누구죠?”“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소영이 돌아왔다는 거야. 제발 눈치 챙기고 진수현의 곁에서 물러나지?”심윤아는 동공이 움츠러들었다. 소영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지가 아주 오래된 것 같았다... 그동안 심윤아는 그녀의 존재를 거의 잊고 지냈다.그녀의 기분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심윤아를 불러세운 두 여자가 시큰둥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왜 그렇게 놀라는 거야? 설마 2년 동안 가짜 진씨 가문 사모님으로 지냈다고 그 자리에 눌러앉으려는 건 아니겠지? 그게 정말 네 자리라고 생각하는 거야?”심윤아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우산을 들고 있던 손마저 희끗희끗해졌다.“뭐야? 저 반응은 뭔데? 설마 소영이한테서 진수현을 뺏으려는 거야?”“주제도 모르고 어디 감히?”심윤아는 그녀들의 말에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돌아섰다. 이윽고 두 여자가 비아냥대는 소리는 빗속에 가려졌다.그녀가 진씨 가문으로 돌아올 때쯤, 집사가 인기척을 듣고 문을 열어주려고 현관으로 나갔다. 비에 잔뜩 젖은 사람이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집사는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집사는 심윤아의 얼굴을 똑똑히 본 후 다급히 소리쳤다.“사모님! 왜 이렇게 젖었어요? 어서
진수현은 그녀를 욕조에 내던지고 밖으로 나갔다.심윤아는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진수현이 떠나자 비로소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손을 뻗어 얼굴에 얼룩진 눈물을 가볍게 닦았다.잠시 후, 그녀는 욕실 문을 잠그고 병원에서 받은 임신 진단서를 주머니에서 꺼냈다.진단서 내용은 이미 빗물에 씻겨 얼룩졌고 글씨가 흐릿해졌다. 서프라이즈로 보여 주고 싶었는데, 이제 전혀 쓸모가 없어졌다.진수현과 한 이불을 덮고 잔 지도 2년이 되었는데, 그녀가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진수현은 한시도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편인 것은 맞지만, 굳이 그녀에게 일부러 그런 메시지를 보내어 우산을 가져오라고 해놓고 다시 돌아가라고 농락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 때문에 심윤아는 분명히 누군가가 그의 핸드폰을 가져가서 그녀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내고 그녀를 우스꽝스러운 꼴로 만들려 했을 것으로 생각했다.실제로 그녀가 우산을 쓰고 클럽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위층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키득거렸었다.심윤아는 비에 젖은 진단서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자기 자신을 비웃으며 천천히 진단서를 찢어버렸다.30분 후, 심윤아는 조용히 화장실에서 걸어 나왔다.진수현은 소파에 앉아 늘씬한 두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무릎에 노트북 하나를 올려놓고 못다 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심윤아가 나오는 것을 보고 진수현은 옆에 있는 생강차를 가리키며 말했다.“생강차야, 식기 전에 마셔.”“알았어.”심윤아는 앞으로 걸어가 생강차를 집어 들었다. 차를 마시려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심윤아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진수현을 불렀다.“진수현.”“왜? 할 말 있어?”진수현의 말투는 냉담했다. 그는 대답하면서도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심윤아는 진수현의 날카로운 턱선을 바라보며 창백해진 입술 삐쭉 내밀었다. 그리고 진수현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짜증이 났는지 별안간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눈을 마주쳤다.방금 샤워를 마치고 나온 심윤아는 핑크색이 겉도는 뽀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