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서울.서울대학교병원.“축하합니다, 임신하셨습니다. 아기는 매우 건강합니다.”심윤아는 건네받은 보고서를 움켜쥐고 약간 놀란 기색을 보였다.‘임신?’심윤아는 놀라고 기뻤다. 그녀는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앞으로 정해진 날짜에 외래 오셔서 검사받으셔야 하세요. 아기 아빠도 함께 오셨어요? 함께 오셨으면 진료실로 들어오라고 하세요, 몇 가지 당부드릴 사항이 있습니다.”의사의 말에 심윤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심윤아는 어색하게 웃었다.“남편은 오늘 안 왔어요.”“참, 아무리 바빠도 임신한 아내의 곁에 있어야죠.”병원에서 나왔을 때, 밖에서 가랑비가 끊임없이 내리기 시작했다. 심윤아는 아랫배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여기에 작은 생명이 하나 있다니. 나와 수현 씨의 아이라니...’핸드폰의 진동을 느끼고 심윤아는 문자를 확인했다. 바로 남편 진수현이 보낸 메시지였다.「밖에 비가 많이 오네. 이 주소로 우산 좀 갖다줘.」심윤아는 주소를 읽어 보았다.「XX클럽하우스」‘여기가 어디지? 오늘 컨퍼런스 있다고 하지 않았나?’심윤아는 문자를 확인하고 나서 망설이지 않고 진씨 가문의 기사 진수에게 이 주소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진 기사님, 먼저 돌아가 계세요.”“사모님,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심윤아는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닙니다, 이따가 사모님과 함께 돌아가면 됩니다.”심윤아는 진수현을 기다려 그와 함께 집에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그녀의 말을 듣고 진씨 가문의 기사 진수는 재빨리 차를 몰고 떠났다.조금 전까지 가랑비만 계속 내렸지만, 지금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렸다.심윤아는 우산을 쓰고 클럽 입구까지 걸어갔다.이곳은 인테리어가 고급스러워 보이는 당구 클럽이었다. 심윤아는 소위 말하는 ‘입구 컷’을 당했다.“죄송합니다. 고객님, 회원 카드를 보여 주시겠습니까?”심윤아는 생각 끝에 결국 클럽 입구에서 나와 진수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수현 씨, 나 도착했어. 언제 끝날 것 같아? 밑에서 기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진수현은 눈을 내리깔고 빠르게 심윤아에게 소식을 전했다.「우산은 필요 없게 됐어, 먼저 돌아가.」이 뜬금없는 문자를 받았을 때, 심윤아는 문뜩 어리둥절 해졌다.‘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그녀는 그 자리에서 비를 맞으며 잠시 기다렸지만, 진수현은 다시 답장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정말 바쁜 일이 있는 것 같았다.심윤아는 일단 돌아가기로 했다.“잠깐만.”뒤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부르자, 심윤아는 고개를 돌렸다.잔뜩 멋을 부린 두 여자가 심윤아 앞으로 다가왔다. 그중 키가 큰 편인 여자가 그녀를 흘겨보며 시큰둥하게 물었다“네가 심윤아야?”그 여자의 얼굴에는 혐오가 가득 서려 있었다. 심윤아도 참지 않고 상대방의 질문에 당당하게 대답했다.“네, 그쪽은 누구죠?”“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소영이 돌아왔다는 거야. 제발 눈치 챙기고 진수현의 곁에서 물러나지?”심윤아는 동공이 움츠러들었다. 소영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지가 아주 오래된 것 같았다... 그동안 심윤아는 그녀의 존재를 거의 잊고 지냈다.그녀의 기분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심윤아를 불러세운 두 여자가 시큰둥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왜 그렇게 놀라는 거야? 설마 2년 동안 가짜 진씨 가문 사모님으로 지냈다고 그 자리에 눌러앉으려는 건 아니겠지? 그게 정말 네 자리라고 생각하는 거야?”심윤아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우산을 들고 있던 손마저 희끗희끗해졌다.“뭐야? 저 반응은 뭔데? 설마 소영이한테서 진수현을 뺏으려는 거야?”“주제도 모르고 어디 감히?”심윤아는 그녀들의 말에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돌아섰다. 이윽고 두 여자가 비아냥대는 소리는 빗속에 가려졌다.그녀가 진씨 가문으로 돌아올 때쯤, 집사가 인기척을 듣고 문을 열어주려고 현관으로 나갔다. 비에 잔뜩 젖은 사람이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집사는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집사는 심윤아의 얼굴을 똑똑히 본 후 다급히 소리쳤다.“사모님! 왜 이렇게 젖었어요? 어서
진수현은 그녀를 욕조에 내던지고 밖으로 나갔다.심윤아는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진수현이 떠나자 비로소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손을 뻗어 얼굴에 얼룩진 눈물을 가볍게 닦았다.잠시 후, 그녀는 욕실 문을 잠그고 병원에서 받은 임신 진단서를 주머니에서 꺼냈다.진단서 내용은 이미 빗물에 씻겨 얼룩졌고 글씨가 흐릿해졌다. 서프라이즈로 보여 주고 싶었는데, 이제 전혀 쓸모가 없어졌다.진수현과 한 이불을 덮고 잔 지도 2년이 되었는데, 그녀가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진수현은 한시도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편인 것은 맞지만, 굳이 그녀에게 일부러 그런 메시지를 보내어 우산을 가져오라고 해놓고 다시 돌아가라고 농락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 때문에 심윤아는 분명히 누군가가 그의 핸드폰을 가져가서 그녀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내고 그녀를 우스꽝스러운 꼴로 만들려 했을 것으로 생각했다.실제로 그녀가 우산을 쓰고 클럽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위층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키득거렸었다.심윤아는 비에 젖은 진단서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자기 자신을 비웃으며 천천히 진단서를 찢어버렸다.30분 후, 심윤아는 조용히 화장실에서 걸어 나왔다.진수현은 소파에 앉아 늘씬한 두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무릎에 노트북 하나를 올려놓고 못다 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심윤아가 나오는 것을 보고 진수현은 옆에 있는 생강차를 가리키며 말했다.“생강차야, 식기 전에 마셔.”“알았어.”심윤아는 앞으로 걸어가 생강차를 집어 들었다. 차를 마시려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심윤아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진수현을 불렀다.“진수현.”“왜? 할 말 있어?”진수현의 말투는 냉담했다. 그는 대답하면서도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심윤아는 진수현의 날카로운 턱선을 바라보며 창백해진 입술 삐쭉 내밀었다. 그리고 진수현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짜증이 났는지 별안간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눈을 마주쳤다.방금 샤워를 마치고 나온 심윤아는 핑크색이 겉도는 뽀얀
심씨 가문이 몰락하기 전, 심윤아를 쫓는 남자들이 부지기수였지만, 지금까지 그녀의 눈에 들어온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모두 심씨 가문의 큰아가씨가 가식적이라고 손가락질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한 무리의 남자들은 심윤아를 희롱하며 은밀히 그녀의 몸값을 부르기까지 했다.그녀가 가장 초라하고 굴욕을 당하고 있을 때, 진수현이 돌아왔다. 그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호들갑을 떨던 한 무리의 남자들에게 비참하기 짝이 없는 대가를 치르게 하고 나서, 심씨 가문의 빚을 대신 갚아 준 다음 그녀에게 청혼했다.“윤아야, 나랑 약혼해 줘.”심윤아는 깜짝 놀랐고 한참 동안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진수현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놀라긴? 내가 덮치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지 마, 가짜 약혼일 뿐이야. 할머니가 아프셔서 급하게 약혼해야 해. 그런데 할머니는 너를 많이 좋아하시니까, 우리 둘이 가짜 약혼이라도 해서 어르신을 즐겁게 해드리는 게 어떨지 싶어. 대신 내가 심씨 가문을 되살릴 수 있게 도움을 줄게.”‘아, 가짜 약혼이었구나.’알고 보니 진수현은 심윤아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할머니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가짜 약혼을 하자는 말이었다. 진수현의 마음을 알게 되었음에도 심윤아는 기꺼이 승낙했다. 진수현의 마음속에 자기가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약혼 후 심윤아는 진수현과 지내는 것이 사뭇 어색했다.두 사람은 죽마고우였지만, 줄곧 친한 친구로 지내왔다. 하루아침에 진수현이 약혼자가 되어버리자, 심윤아는 설명할 수 없는 어색함을 견딜 수 없었다.반면, 진수현은 오히려 자연스럽게 각종 연회 행사에 모두 그녀를 데리고 다녔다.1년 후, 진씨 가문 큰 사모님의 병세가 다시 악화되자,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식을 올렸다. 그렇게 심윤아는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진시 가문 작은 사모님이 되었다.이런 사연도 모르고, 죽마고우 한 쌍이 마침내 결실을 보았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잠
다음날.심윤아는 일어나서 약간 감기 기운 때문에 서랍에서 감기약을 꺼내고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랐다.감기약을 입에 넣자마자 심윤아는 무슨 생각이 나서인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더니 욕실로 달려가 삼키려고 했던 감기약을 뱉어냈다.그녀는 세면대 옆에 엎드려 가글을 하며 방금 삼킨 쓴맛을 모두 토해냈다.“왜 그래? 어디 불편해?”허스키한 남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문 앞에서 들려오자, 심윤아는 깜짝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진수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눈이 마주치는 순간, 심윤아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아니야, 약을 잘못 먹어서 그래.”말을 마치자, 그녀는 손을 뻗어 입가의 물기를 닦고 욕실에서 나갔다.진수현은 몸을 돌려 조금 전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진수현은 심윤아가 어젯밤 집에 돌아왔을 때부터 어딘가 평소와 다른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아침밥을 먹고 나서 부부가 함께 외출했다. 진수현은 안색이 창백한 심윤아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내 차 타는 게 어때?”심윤아는 어젯밤 비를 맞은 탓에 자고 일어난 후, 확실히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그녀가 막 고개를 끄덕이려 하자, 진수현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진수현은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확인했고 소영에게서 전화인 것을 보고 잠시 자리를 피해 전화를 받으려 했다. 하지만 고개를 든 순간, 심윤아는 이미 가버리고 없었다.두 사람은 부부지만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해 주는 편이어서 심윤아는 평소에도 진수현의 통화를 엿듣는 습관이 없었다.두 사람 모두 그런 식으로 서로를 배려하며 지내왔다.하지만 오늘 진수현은 급급하게 자리를 피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찔렸다.그러나 그 느낌은 오래가지 않았고 그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심윤아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를 두고 그를 훑어보았다. 진수현의 표정에서 심윤아는 그에게 전화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심윤아를 대할 때는 없었던 온화한 표정이었다. 심윤아는 심호흡하고 부러움을
“정말 괜찮아요. 어제 부탁했던 일은 다 했나요?”몇 마디 말도 없이 다시 업무에 관련된 이야기로 넘어오자, 임연수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정리한 자료를 가져다준 다음, 서둘러 심윤아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라주었다.“윤아 님, 병원에 가기 싫으시면 따뜻한 물이라도 많이 마셔요.”임연수는 애당초 심윤아가 불러들인 그녀의 어시스턴트로서, 평상시에 열과 성을 다하여 일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일 외에는 어떠한 사적인 왕래도 없었다.그 때문에 심윤아는 임연수가 자기에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많이 쓸 줄은 몰랐다.심윤아는 금세 마음이 따뜻해졌고 따뜻한 물을 몇 모금 마셨다.으스스 추위를 타고 있던 심윤아는 따뜻한 물을 조금 마신 후에 심윤아는 마침내 편안해졌다. 그러나 임연수는 여전히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윤아 님, 오늘 업무 보고는 제가 할까요? 사무실에서 좀 쉬세요.”심윤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다만 컨디션이 좀 저조할 뿐이라, 심윤아는 그렇게까지 억지를 부리고 싶지 않았다.만약 자잘한 일에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고 자기 일을 대신하도록 한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스스로가 게을러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습관이 되면 앞으로 그녀가 불편할 때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 싶기도 했다.심윤아는 수중에 있는 자료를 다 정리한 후에 일어나서 진수현의 사무실로 갔다.그녀의 사무실은 진수현의 사무실 사이엔 거리가 좀 있었다. 평소 같으면 별것 아닌 거리였지만, 오늘은 감기 기운 탓인지 더 멀게 느껴졌다. 심윤아는 피곤한 기색으로 걸어갔다.“똑똑.”“들어와.”차갑고 허스키한 남자의 목소리가 문틈 사이로 들려오고 나서야 심윤아는 문을 밀었다.문을 열어젖힌 후, 심윤아는 사무실에 한 점의 그림자가 더 있는 것을 발견했다.하얀 원피스가 강소영의 가녀린 허리라인을 그대로 드러냈고,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몸쪽으로 늘어져 있었다. 이때 통유리창으로 들어온 햇살은 강소영을 더욱 아름답게 비추었다.상대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