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심윤아는 일어나서 약간 감기 기운 때문에 서랍에서 감기약을 꺼내고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랐다.감기약을 입에 넣자마자 심윤아는 무슨 생각이 나서인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더니 욕실로 달려가 삼키려고 했던 감기약을 뱉어냈다.그녀는 세면대 옆에 엎드려 가글을 하며 방금 삼킨 쓴맛을 모두 토해냈다.“왜 그래? 어디 불편해?”허스키한 남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문 앞에서 들려오자, 심윤아는 깜짝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진수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눈이 마주치는 순간, 심윤아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아니야, 약을 잘못 먹어서 그래.”말을 마치자, 그녀는 손을 뻗어 입가의 물기를 닦고 욕실에서 나갔다.진수현은 몸을 돌려 조금 전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진수현은 심윤아가 어젯밤 집에 돌아왔을 때부터 어딘가 평소와 다른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아침밥을 먹고 나서 부부가 함께 외출했다. 진수현은 안색이 창백한 심윤아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내 차 타는 게 어때?”심윤아는 어젯밤 비를 맞은 탓에 자고 일어난 후, 확실히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그녀가 막 고개를 끄덕이려 하자, 진수현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진수현은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확인했고 소영에게서 전화인 것을 보고 잠시 자리를 피해 전화를 받으려 했다. 하지만 고개를 든 순간, 심윤아는 이미 가버리고 없었다.두 사람은 부부지만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해 주는 편이어서 심윤아는 평소에도 진수현의 통화를 엿듣는 습관이 없었다.두 사람 모두 그런 식으로 서로를 배려하며 지내왔다.하지만 오늘 진수현은 급급하게 자리를 피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찔렸다.그러나 그 느낌은 오래가지 않았고 그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심윤아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를 두고 그를 훑어보았다. 진수현의 표정에서 심윤아는 그에게 전화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심윤아를 대할 때는 없었던 온화한 표정이었다. 심윤아는 심호흡하고 부러움을
“정말 괜찮아요. 어제 부탁했던 일은 다 했나요?”몇 마디 말도 없이 다시 업무에 관련된 이야기로 넘어오자, 임연수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정리한 자료를 가져다준 다음, 서둘러 심윤아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라주었다.“윤아 님, 병원에 가기 싫으시면 따뜻한 물이라도 많이 마셔요.”임연수는 애당초 심윤아가 불러들인 그녀의 어시스턴트로서, 평상시에 열과 성을 다하여 일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일 외에는 어떠한 사적인 왕래도 없었다.그 때문에 심윤아는 임연수가 자기에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많이 쓸 줄은 몰랐다.심윤아는 금세 마음이 따뜻해졌고 따뜻한 물을 몇 모금 마셨다.으스스 추위를 타고 있던 심윤아는 따뜻한 물을 조금 마신 후에 심윤아는 마침내 편안해졌다. 그러나 임연수는 여전히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윤아 님, 오늘 업무 보고는 제가 할까요? 사무실에서 좀 쉬세요.”심윤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다만 컨디션이 좀 저조할 뿐이라, 심윤아는 그렇게까지 억지를 부리고 싶지 않았다.만약 자잘한 일에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고 자기 일을 대신하도록 한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스스로가 게을러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습관이 되면 앞으로 그녀가 불편할 때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 싶기도 했다.심윤아는 수중에 있는 자료를 다 정리한 후에 일어나서 진수현의 사무실로 갔다.그녀의 사무실은 진수현의 사무실 사이엔 거리가 좀 있었다. 평소 같으면 별것 아닌 거리였지만, 오늘은 감기 기운 탓인지 더 멀게 느껴졌다. 심윤아는 피곤한 기색으로 걸어갔다.“똑똑.”“들어와.”차갑고 허스키한 남자의 목소리가 문틈 사이로 들려오고 나서야 심윤아는 문을 밀었다.문을 열어젖힌 후, 심윤아는 사무실에 한 점의 그림자가 더 있는 것을 발견했다.하얀 원피스가 강소영의 가녀린 허리라인을 그대로 드러냈고,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몸쪽으로 늘어져 있었다. 이때 통유리창으로 들어온 햇살은 강소영을 더욱 아름답게 비추었다.상대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심윤아는 좀 난감했다.“그냥 비 좀 맞았을 뿐이야.”말이 끝나자, 그녀는 앞으로 나와 어제 자 업무 보고서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이것은 어제 자 업무 보고서야. 다른 일도 있어서 이만 가볼게.”“두 사람 옛이야기도 나누고 좋은 시간 보내세요.”심윤아가 강소영을 바라보자, 강소영은 곧 웃음을 지었다.심윤아는 나갔으나 진수현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수현 씨?”강소영이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진수현의 이런 모습을 보고 강소영은 마음속으로 이유를 알 수 없는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긋나긋하게 말했다.“내가 보기에 윤아 씨의 컨디션이 확실히 좋지 않아 보이거든, 비록 지금은 수현 씨의 비서로 일하고 있지만, 파산하기 전에는 어쨌든 심씨 가문의 큰 아가씨였잖아, 너무 매몰차게 굴지 마.”‘매몰차게 굴어? 누가? 내가?’진수현은 마음속으로 허탈하게 웃었다.‘어느 누가 감히 심윤아를 가혹하게 할 수 있다고, 참!’그러나 진수현은 이런 생각들을 꺼내지 않았고 다만 대답만 재깍 했다.“응.”심윤아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는 참지 못하고 책상에 엎드렸다. 현기증이 더 심해졌다.조금 뒤 심윤아는 임연수의 목소리를 들었다.“윤아 님, 급한 거 아니면 돌아가서 쉬세요.”심윤아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몹시 괴로워하며 작은 소리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아유, 나 눈 좀 붙일게.”말을 마치고 심윤아는 깊은 잠에 빠졌다.심윤아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그녀는 열여덟 살의 나이로 돌아갔다. 그날은 심윤아와 진수현의 성년식 파티였다. 양가의 성년식은 함께 거행되었는데, 당시 심윤아는 자기가 좋아하는 남색의 미니스커트를 입었고 일부러 웨이브 파마를 하고 손톱까지 받고, 그날이 가기 전에 진수현에게 고백하려고 했다.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진수현을 찾아다녔고, 마침내 작은 정원에서 진수현을 찾았다.그녀는 치맛자락을 들고 걸어가려 할 때 진수현의 친구 몇
그러나 이 일에 대해서 심윤아는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그해 그녀도 물에 빠졌었다. 그녀는 고열에 시달리고 나서도 큰 병에 걸렸었다. 의식이 돌아온 뒤로 많은 기억을 잃었고 자기가 어쩌다 물에 빠졌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그리고 친구들은 그녀가 장난치다가 실수로 물에 빠졌다고 했다.하지만 심윤아는 자신이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었다고 느끼지만, 아쉽게도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 후로 나이가 들고 시간이 오래 지날수록 당시의 기억들은 더 철저하게 잊혀갔다.심윤아는 진수현이 자기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을 이렇게까지 마음에 담아둘 줄은 몰랐다.‘차라리 진수현을 구하기 위해 뛰어내린 사람이 나였더라면 좋았을 텐데...’지금, 이 순간 심윤아는 꿈과 현실을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했다.가슴은 큰 바위에 눌린 것처럼 답답하고 괴로웠고, 두통은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왜 그때 진수현을 구하기 위해 강가에 뛰어내린 사람이 그녀가 아니었을까?‘만약에... 만약에...’갑자기 눈앞에 진수현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의 눈빛은 한없이 차가웠다.“윤아야, 아이는 지워.”곧이어 그의 곁에 강소영이 나타났고 그녀는 진수현의 곁에 껌딱지처럼 달라붙었다.“윤아 씨, 아이를 지우지 않으려는 게 설마 우리 관계를 망치려는 건 아니겠지?”관계를 망치려 한다는 소리를 들은 진수현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 그는 몇 걸음 앞으로 다가오더니 심윤아의 턱을 움켜쥐고 말했다.“말 들어, 그렇지 않으면 나도 강압적으로 아이를 지우라고 할 수밖에 없으니까.”진수현은 심윤아의 턱을 쥐어뜯을 정도로 손에 힘을 줬다.심윤아는 몸부림치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이미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리고 문득 창밖으로 뒤로 밀려나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방금... 꿈이었나? 어떻게 그렇게 생생할 수가 있을까...’심윤아가 한숨을 내쉬었다.“윤아 씨, 깼어요?”부드러운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심윤아가 고개를 들자, 강소영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눈에 들
병원에 가면 틀림없이 임신 사실을 들키게 될 테니, 심윤아는 병원에 갈 수 없었다.우스꽝스럽게도 심윤아는 아이의 존재를 끝까지 숨기고 싶었다. 그녀는 얼마 남지 않은 자존심이라도 지키고 싶었다.심윤아는 진수현에게 가짜 결혼을 승낙하던 순간에 이미 소위 말하는 자존심 따위는 개나 줘버려야 한다는 현실을 깨달았었다.사랑하는 사람인 진수현 앞에서 그녀가 무슨 자존심을 내세울 수 있었을까? 하지만 아이의 존재를 알리는 것은 그동안 내려놨던 자존심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심윤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아무리 자존심을 내려놓은 지 오래됐다고 해도 존엄까지 잃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 할 순 없었다.진수현은 그녀의 말을 들은 후, 눈살을 한껏 찌푸리더니 갑자기 핸들을 꺾어 갓길에 차를 세웠다.심윤아는 진수현의 돌발행동을 보고 당장 차에서 내리라는 줄로 알고 손을 뻗어 차 문을 열려고 했다.“딸깍!”순간 차 문이 잠겼고 진수현은 백미러를 통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병원에 안 가려는 이유가 도대체 뭐야?”어젯밤 비를 맞고 돌아온 이후로 진수현은 심윤아의 행동이 수상하게 느껴졌다.심윤아는 침착하게 대답했다.“정말 아파 죽을 정도라면, 내가 병원에 가려고 했을 거야.”진수현은 실눈을 뜨고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자 강소영이 끼어들었다.“수현 씨, 나 때문인 거 같아. 난... 여기서 먼저 내릴게. 윤아 씨를 모시고 병원에 다녀와. 더 이상 미루면 안 될 것 같아, 윤아 씨 상태가 아주 위태로워 보여.”말을 마치고 강소영은 몸을 진수현 쪽으로 기울이며 차 문의 잠금 스위치를 누르려고 했다. 그러자 진수현이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제지했다. 그렇게 심윤아는 두 사람의 살결이 맞닿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진수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심윤아를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 강소영을 보고 말했다.“딴소리하지 마, 네 탓 아니야.”강소영은 진수현의 손에 잡힌 자기 팔목을 쳐다보며 수줍게 웃었다
심윤아는 눈을 내리깔고 생각했다. 강소영은 외모가 예쁘장하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인성도 매우 훌륭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진수현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심윤아는 자기가 진수현이었어도 강소영을 좋아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강소영은 친구를 만난 후, 바로 다가가서 한참 동안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 남자는 흰 가운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심윤아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이며 걸어왔다.“안녕하세요, 소영이의 친구시죠? 제 이름은 고현민입니다.”심윤아도 고현민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안녕하세요.”“열이 있다고 들었는데, 맞나요?”고현민은 손등을 심윤아의 이마에 대보며 나직하게 물었다.갑작스러운 접근에 심윤아는 무의식적으로 옆으로 비켜섰고, 그녀의 반응에 고현민은 웃으며 속삭였다.“열이 있는지 확인해 보려는 겁니다.”그러고 나서 고현민은 말을 잇지 않고 온도계를 내밀었다.“체온부터 측정해 봅시다.”심윤아는 체온계를 건네받았다.뒤이어 진수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체온계 사용법은 알아?”심윤아는 어이가 없었고 상대조차 하지 않았다.‘어떻게 체온계조차 쓸 줄 모른다고 생각할 수가 있지?’다만 머리가 어지러운 탓에 심윤아는 동작이 느릿느릿했다. 고현민은 체온을 측정하고 잠시 기다려 보자고 했다.강소영은 상황을 지켜보다가 이 기회를 틈타 고현민에 진수현을 소개하였다.“수현 씨, 이 친구가 바로 내가 전에도 몇 번 언급했던 고현민이야. 의학 방면에서 거둔 성과가 대단하지만, 자유를 추구하고 누구 밑에서 일할 성격이 아니라, 귀국한 후에 소소한 클리닉을 차리게 된 거야. 그리고 현민아, 인사해, 수현 씨야, 내...”그녀는 잠시 뜸을 들인 후에야 수줍게 말했다“내 친구야.”‘친구?”친구라는 호칭에 고현민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무심코 심윤아의 얼굴에 눈길을 돌렸다가 다시 진수현을 보고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저는 고현민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한참 후에야 진수현은 손을 들어 상대방과 가볍게
‘뭐? 억지 부린다고 한 거야?’심윤아는 흠칫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네가 좋아하는 소영 씨보다 이해심이 많을 수는 없겠지.”무심코 한 마디가 그렇게 툭 튀어나왔다.순간, 진수현은 어리둥절했고 심윤아도 화들짝 놀랐다.‘내가...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한 거지?’심윤아가 자기 자신이 잘못 말한 것을 후회하고 있을 때, 진수현이 그녀의 턱을 치켜들며 그윽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진수현은 그윽한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매부리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심윤아를 쳐다봤다.“너 지금 질투하는 거야?”심윤아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하지만 심윤아는 손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의 솜방망이 같은 주먹에 진수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진수현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아주 솜방망이가 따로 없네.”“제대로 맞아 볼래?”심윤아는 발끈하고 나서 뻗었던 손을 거둬들이려 했다. 그러다 결국 뒤로 넘어져 소파에 파묻혔다. 일어나려고 아등바등했지만 기운이 없었다.진수현은 그 자리에 서서 착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몇 번 쳐다보고 나서 한마디 했다.“기다려 봐.”그러고 나서 화장실로 가서 물이 담긴 플라스틱 대야와 수건을 가지고 나와 그녀 옆에 있는 의자에 놓았다.진수현은 수건을 찬물에 적셔 심윤아를 닦아주기 시작했다.“뭐 하는 거야?”그가 수건을 들고 가까이 다가오자, 심윤아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피했다.진수현은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고 눈살을 찌푸렸다“가만히 좀 있어.”심윤아는 필요 없다고 말하려 했지만 수건이 그녀의 피부에 닿자, 가뭄에 내린 단비 같다는 느낌이 순간적으로 밀려와 다시 그녀는 거절할 수 없었다.그녀는 물리적인 방법으로라도 최대한 빨리 체온을 내려야 했다.‘어차피 물리적으로 체온을 낮추는 것뿐이야...’심윤아는 잠깐의 생각 끝에 더는 진수현을 밀어내지 않았다.진수현은 심윤아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 주고, 이어서 발그레 해진 뺨을
진수현은 그녀에게 물수건을 건네줄 수밖에 없었다.“현민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 알려줬으니까, 여기는 나에게 맡겨도 돼. 안심해. 내가 윤아 씨를 잘 돌볼 테니까.”진수현은 구석에 누워 시체처럼 움직이지 않는 심윤아를 한 번 쳐다보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응.”그러고 나서 밖으로 나갔다.문이 닫히자, 방안은 조용해졌다. 잠시 후 강소영은 다시 수건을 찬물에 적시고 심윤아 쪽으로 걸어왔다.“윤아 씨, 제가 닦아드려도 되죠?”심윤아는 온몸에 힘이 풀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간병인을 불러주세요. 소영 씨에게 너무 번거롭게 해드리고 싶지 않아요.”심윤아가 제안하자, 강소영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귀찮기는요, 간병인보다 제가 더 정성껏 보살펴 드릴게요. 물론 윤아 씨가 괜찮다고 한다면요.”강소영이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서니 심윤아도 더 밀어낼 수 없었다. 심윤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심윤아가 승낙하자 강소영은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옷 단추를 풀어 주었다.어색함을 피하려고 심윤아는 눈을 감았다. 덕분에 강소영이 그녀의 단추를 풀어 줄 때 그녀를 훑어보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강소영은 입술을 일자로 꾹 다물었고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만약 그녀가 방금 잘못 본 게 아니었다면 진수현은 젖은 수건을 들고 그녀의 몸을 닦아주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의 옷깃까지 잡아당기고 손을 넣으려 했으니 말이다.‘두 사람의 관계가 언제 이렇게 가까워진 걸까? 설마 내가 출국해 있던 사이에 무슨 일들이 일어나기라도 했을까?’강소영은 눈썹을 살며시 치켜올렸고 조바심이 났다.심윤아의 옷 단추를 풀어보지 않았다면 강소영은 심윤아의 몸매가 이렇게 글래머러스 한지 몰랐을 것이다. 반듯하게 누워 있었지만, 가슴은 풍만했다. 그리고 그녀의 피부색은 약간의 핑크빛을 띠고 있었다. 여자인 강소영이 봐도 혹할 정도로 일품이었다.강소영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나직하게 말했다.“사실 요 몇 년 동안 아주 고마웠어요.”심윤아는 눈을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