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서울.서울대학교병원.“축하합니다, 임신하셨습니다. 아기는 매우 건강합니다.”심윤아는 건네받은 보고서를 움켜쥐고 약간 놀란 기색을 보였다.‘임신?’심윤아는 놀라고 기뻤다. 그녀는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앞으로 정해진 날짜에 외래 오셔서 검사받으셔야 하세요. 아기 아빠도 함께 오셨어요? 함께 오셨으면 진료실로 들어오라고 하세요, 몇 가지 당부드릴 사항이 있습니다.”의사의 말에 심윤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심윤아는 어색하게 웃었다.“남편은 오늘 안 왔어요.”“참, 아무리 바빠도 임신한 아내의 곁에 있어야죠.”병원에서 나왔을 때, 밖에서 가랑비가 끊임없이 내리기 시작했다. 심윤아는 아랫배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여기에 작은 생명이 하나 있다니. 나와 수현 씨의 아이라니...’핸드폰의 진동을 느끼고 심윤아는 문자를 확인했다. 바로 남편 진수현이 보낸 메시지였다.「밖에 비가 많이 오네. 이 주소로 우산 좀 갖다줘.」심윤아는 주소를 읽어 보았다.「XX클럽하우스」‘여기가 어디지? 오늘 컨퍼런스 있다고 하지 않았나?’심윤아는 문자를 확인하고 나서 망설이지 않고 진씨 가문의 기사 진수에게 이 주소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진 기사님, 먼저 돌아가 계세요.”“사모님,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심윤아는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닙니다, 이따가 사모님과 함께 돌아가면 됩니다.”심윤아는 진수현을 기다려 그와 함께 집에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그녀의 말을 듣고 진씨 가문의 기사 진수는 재빨리 차를 몰고 떠났다.조금 전까지 가랑비만 계속 내렸지만, 지금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렸다.심윤아는 우산을 쓰고 클럽 입구까지 걸어갔다.이곳은 인테리어가 고급스러워 보이는 당구 클럽이었다. 심윤아는 소위 말하는 ‘입구 컷’을 당했다.“죄송합니다. 고객님, 회원 카드를 보여 주시겠습니까?”심윤아는 생각 끝에 결국 클럽 입구에서 나와 진수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수현 씨, 나 도착했어. 언제 끝날 것 같아? 밑에서 기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진수현은 눈을 내리깔고 빠르게 심윤아에게 소식을 전했다.「우산은 필요 없게 됐어, 먼저 돌아가.」이 뜬금없는 문자를 받았을 때, 심윤아는 문뜩 어리둥절 해졌다.‘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그녀는 그 자리에서 비를 맞으며 잠시 기다렸지만, 진수현은 다시 답장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정말 바쁜 일이 있는 것 같았다.심윤아는 일단 돌아가기로 했다.“잠깐만.”뒤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부르자, 심윤아는 고개를 돌렸다.잔뜩 멋을 부린 두 여자가 심윤아 앞으로 다가왔다. 그중 키가 큰 편인 여자가 그녀를 흘겨보며 시큰둥하게 물었다“네가 심윤아야?”그 여자의 얼굴에는 혐오가 가득 서려 있었다. 심윤아도 참지 않고 상대방의 질문에 당당하게 대답했다.“네, 그쪽은 누구죠?”“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소영이 돌아왔다는 거야. 제발 눈치 챙기고 진수현의 곁에서 물러나지?”심윤아는 동공이 움츠러들었다. 소영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지가 아주 오래된 것 같았다... 그동안 심윤아는 그녀의 존재를 거의 잊고 지냈다.그녀의 기분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심윤아를 불러세운 두 여자가 시큰둥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왜 그렇게 놀라는 거야? 설마 2년 동안 가짜 진씨 가문 사모님으로 지냈다고 그 자리에 눌러앉으려는 건 아니겠지? 그게 정말 네 자리라고 생각하는 거야?”심윤아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우산을 들고 있던 손마저 희끗희끗해졌다.“뭐야? 저 반응은 뭔데? 설마 소영이한테서 진수현을 뺏으려는 거야?”“주제도 모르고 어디 감히?”심윤아는 그녀들의 말에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돌아섰다. 이윽고 두 여자가 비아냥대는 소리는 빗속에 가려졌다.그녀가 진씨 가문으로 돌아올 때쯤, 집사가 인기척을 듣고 문을 열어주려고 현관으로 나갔다. 비에 잔뜩 젖은 사람이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집사는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집사는 심윤아의 얼굴을 똑똑히 본 후 다급히 소리쳤다.“사모님! 왜 이렇게 젖었어요? 어서
진수현은 그녀를 욕조에 내던지고 밖으로 나갔다.심윤아는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진수현이 떠나자 비로소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손을 뻗어 얼굴에 얼룩진 눈물을 가볍게 닦았다.잠시 후, 그녀는 욕실 문을 잠그고 병원에서 받은 임신 진단서를 주머니에서 꺼냈다.진단서 내용은 이미 빗물에 씻겨 얼룩졌고 글씨가 흐릿해졌다. 서프라이즈로 보여 주고 싶었는데, 이제 전혀 쓸모가 없어졌다.진수현과 한 이불을 덮고 잔 지도 2년이 되었는데, 그녀가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진수현은 한시도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편인 것은 맞지만, 굳이 그녀에게 일부러 그런 메시지를 보내어 우산을 가져오라고 해놓고 다시 돌아가라고 농락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 때문에 심윤아는 분명히 누군가가 그의 핸드폰을 가져가서 그녀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내고 그녀를 우스꽝스러운 꼴로 만들려 했을 것으로 생각했다.실제로 그녀가 우산을 쓰고 클럽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위층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키득거렸었다.심윤아는 비에 젖은 진단서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자기 자신을 비웃으며 천천히 진단서를 찢어버렸다.30분 후, 심윤아는 조용히 화장실에서 걸어 나왔다.진수현은 소파에 앉아 늘씬한 두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무릎에 노트북 하나를 올려놓고 못다 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심윤아가 나오는 것을 보고 진수현은 옆에 있는 생강차를 가리키며 말했다.“생강차야, 식기 전에 마셔.”“알았어.”심윤아는 앞으로 걸어가 생강차를 집어 들었다. 차를 마시려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심윤아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진수현을 불렀다.“진수현.”“왜? 할 말 있어?”진수현의 말투는 냉담했다. 그는 대답하면서도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심윤아는 진수현의 날카로운 턱선을 바라보며 창백해진 입술 삐쭉 내밀었다. 그리고 진수현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짜증이 났는지 별안간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눈을 마주쳤다.방금 샤워를 마치고 나온 심윤아는 핑크색이 겉도는 뽀얀
심씨 가문이 몰락하기 전, 심윤아를 쫓는 남자들이 부지기수였지만, 지금까지 그녀의 눈에 들어온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모두 심씨 가문의 큰아가씨가 가식적이라고 손가락질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한 무리의 남자들은 심윤아를 희롱하며 은밀히 그녀의 몸값을 부르기까지 했다.그녀가 가장 초라하고 굴욕을 당하고 있을 때, 진수현이 돌아왔다. 그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호들갑을 떨던 한 무리의 남자들에게 비참하기 짝이 없는 대가를 치르게 하고 나서, 심씨 가문의 빚을 대신 갚아 준 다음 그녀에게 청혼했다.“윤아야, 나랑 약혼해 줘.”심윤아는 깜짝 놀랐고 한참 동안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진수현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놀라긴? 내가 덮치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지 마, 가짜 약혼일 뿐이야. 할머니가 아프셔서 급하게 약혼해야 해. 그런데 할머니는 너를 많이 좋아하시니까, 우리 둘이 가짜 약혼이라도 해서 어르신을 즐겁게 해드리는 게 어떨지 싶어. 대신 내가 심씨 가문을 되살릴 수 있게 도움을 줄게.”‘아, 가짜 약혼이었구나.’알고 보니 진수현은 심윤아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할머니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가짜 약혼을 하자는 말이었다. 진수현의 마음을 알게 되었음에도 심윤아는 기꺼이 승낙했다. 진수현의 마음속에 자기가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약혼 후 심윤아는 진수현과 지내는 것이 사뭇 어색했다.두 사람은 죽마고우였지만, 줄곧 친한 친구로 지내왔다. 하루아침에 진수현이 약혼자가 되어버리자, 심윤아는 설명할 수 없는 어색함을 견딜 수 없었다.반면, 진수현은 오히려 자연스럽게 각종 연회 행사에 모두 그녀를 데리고 다녔다.1년 후, 진씨 가문 큰 사모님의 병세가 다시 악화되자,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식을 올렸다. 그렇게 심윤아는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진시 가문 작은 사모님이 되었다.이런 사연도 모르고, 죽마고우 한 쌍이 마침내 결실을 보았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잠
다음날.심윤아는 일어나서 약간 감기 기운 때문에 서랍에서 감기약을 꺼내고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랐다.감기약을 입에 넣자마자 심윤아는 무슨 생각이 나서인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더니 욕실로 달려가 삼키려고 했던 감기약을 뱉어냈다.그녀는 세면대 옆에 엎드려 가글을 하며 방금 삼킨 쓴맛을 모두 토해냈다.“왜 그래? 어디 불편해?”허스키한 남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문 앞에서 들려오자, 심윤아는 깜짝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진수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눈이 마주치는 순간, 심윤아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아니야, 약을 잘못 먹어서 그래.”말을 마치자, 그녀는 손을 뻗어 입가의 물기를 닦고 욕실에서 나갔다.진수현은 몸을 돌려 조금 전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진수현은 심윤아가 어젯밤 집에 돌아왔을 때부터 어딘가 평소와 다른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아침밥을 먹고 나서 부부가 함께 외출했다. 진수현은 안색이 창백한 심윤아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내 차 타는 게 어때?”심윤아는 어젯밤 비를 맞은 탓에 자고 일어난 후, 확실히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그녀가 막 고개를 끄덕이려 하자, 진수현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진수현은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확인했고 소영에게서 전화인 것을 보고 잠시 자리를 피해 전화를 받으려 했다. 하지만 고개를 든 순간, 심윤아는 이미 가버리고 없었다.두 사람은 부부지만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해 주는 편이어서 심윤아는 평소에도 진수현의 통화를 엿듣는 습관이 없었다.두 사람 모두 그런 식으로 서로를 배려하며 지내왔다.하지만 오늘 진수현은 급급하게 자리를 피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찔렸다.그러나 그 느낌은 오래가지 않았고 그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심윤아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를 두고 그를 훑어보았다. 진수현의 표정에서 심윤아는 그에게 전화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심윤아를 대할 때는 없었던 온화한 표정이었다. 심윤아는 심호흡하고 부러움을
“정말 괜찮아요. 어제 부탁했던 일은 다 했나요?”몇 마디 말도 없이 다시 업무에 관련된 이야기로 넘어오자, 임연수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정리한 자료를 가져다준 다음, 서둘러 심윤아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라주었다.“윤아 님, 병원에 가기 싫으시면 따뜻한 물이라도 많이 마셔요.”임연수는 애당초 심윤아가 불러들인 그녀의 어시스턴트로서, 평상시에 열과 성을 다하여 일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일 외에는 어떠한 사적인 왕래도 없었다.그 때문에 심윤아는 임연수가 자기에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많이 쓸 줄은 몰랐다.심윤아는 금세 마음이 따뜻해졌고 따뜻한 물을 몇 모금 마셨다.으스스 추위를 타고 있던 심윤아는 따뜻한 물을 조금 마신 후에 심윤아는 마침내 편안해졌다. 그러나 임연수는 여전히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윤아 님, 오늘 업무 보고는 제가 할까요? 사무실에서 좀 쉬세요.”심윤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다만 컨디션이 좀 저조할 뿐이라, 심윤아는 그렇게까지 억지를 부리고 싶지 않았다.만약 자잘한 일에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고 자기 일을 대신하도록 한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스스로가 게을러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습관이 되면 앞으로 그녀가 불편할 때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 싶기도 했다.심윤아는 수중에 있는 자료를 다 정리한 후에 일어나서 진수현의 사무실로 갔다.그녀의 사무실은 진수현의 사무실 사이엔 거리가 좀 있었다. 평소 같으면 별것 아닌 거리였지만, 오늘은 감기 기운 탓인지 더 멀게 느껴졌다. 심윤아는 피곤한 기색으로 걸어갔다.“똑똑.”“들어와.”차갑고 허스키한 남자의 목소리가 문틈 사이로 들려오고 나서야 심윤아는 문을 밀었다.문을 열어젖힌 후, 심윤아는 사무실에 한 점의 그림자가 더 있는 것을 발견했다.하얀 원피스가 강소영의 가녀린 허리라인을 그대로 드러냈고,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몸쪽으로 늘어져 있었다. 이때 통유리창으로 들어온 햇살은 강소영을 더욱 아름답게 비추었다.상대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심윤아는 좀 난감했다.“그냥 비 좀 맞았을 뿐이야.”말이 끝나자, 그녀는 앞으로 나와 어제 자 업무 보고서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이것은 어제 자 업무 보고서야. 다른 일도 있어서 이만 가볼게.”“두 사람 옛이야기도 나누고 좋은 시간 보내세요.”심윤아가 강소영을 바라보자, 강소영은 곧 웃음을 지었다.심윤아는 나갔으나 진수현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수현 씨?”강소영이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진수현의 이런 모습을 보고 강소영은 마음속으로 이유를 알 수 없는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긋나긋하게 말했다.“내가 보기에 윤아 씨의 컨디션이 확실히 좋지 않아 보이거든, 비록 지금은 수현 씨의 비서로 일하고 있지만, 파산하기 전에는 어쨌든 심씨 가문의 큰 아가씨였잖아, 너무 매몰차게 굴지 마.”‘매몰차게 굴어? 누가? 내가?’진수현은 마음속으로 허탈하게 웃었다.‘어느 누가 감히 심윤아를 가혹하게 할 수 있다고, 참!’그러나 진수현은 이런 생각들을 꺼내지 않았고 다만 대답만 재깍 했다.“응.”심윤아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는 참지 못하고 책상에 엎드렸다. 현기증이 더 심해졌다.조금 뒤 심윤아는 임연수의 목소리를 들었다.“윤아 님, 급한 거 아니면 돌아가서 쉬세요.”심윤아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몹시 괴로워하며 작은 소리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아유, 나 눈 좀 붙일게.”말을 마치고 심윤아는 깊은 잠에 빠졌다.심윤아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그녀는 열여덟 살의 나이로 돌아갔다. 그날은 심윤아와 진수현의 성년식 파티였다. 양가의 성년식은 함께 거행되었는데, 당시 심윤아는 자기가 좋아하는 남색의 미니스커트를 입었고 일부러 웨이브 파마를 하고 손톱까지 받고, 그날이 가기 전에 진수현에게 고백하려고 했다.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진수현을 찾아다녔고, 마침내 작은 정원에서 진수현을 찾았다.그녀는 치맛자락을 들고 걸어가려 할 때 진수현의 친구 몇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