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수현은 그녀에게 물수건을 건네줄 수밖에 없었다.“현민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 알려줬으니까, 여기는 나에게 맡겨도 돼. 안심해. 내가 윤아 씨를 잘 돌볼 테니까.”진수현은 구석에 누워 시체처럼 움직이지 않는 심윤아를 한 번 쳐다보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응.”그러고 나서 밖으로 나갔다.문이 닫히자, 방안은 조용해졌다. 잠시 후 강소영은 다시 수건을 찬물에 적시고 심윤아 쪽으로 걸어왔다.“윤아 씨, 제가 닦아드려도 되죠?”심윤아는 온몸에 힘이 풀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간병인을 불러주세요. 소영 씨에게 너무 번거롭게 해드리고 싶지 않아요.”심윤아가 제안하자, 강소영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귀찮기는요, 간병인보다 제가 더 정성껏 보살펴 드릴게요. 물론 윤아 씨가 괜찮다고 한다면요.”강소영이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서니 심윤아도 더 밀어낼 수 없었다. 심윤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심윤아가 승낙하자 강소영은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옷 단추를 풀어 주었다.어색함을 피하려고 심윤아는 눈을 감았다. 덕분에 강소영이 그녀의 단추를 풀어 줄 때 그녀를 훑어보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강소영은 입술을 일자로 꾹 다물었고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만약 그녀가 방금 잘못 본 게 아니었다면 진수현은 젖은 수건을 들고 그녀의 몸을 닦아주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의 옷깃까지 잡아당기고 손을 넣으려 했으니 말이다.‘두 사람의 관계가 언제 이렇게 가까워진 걸까? 설마 내가 출국해 있던 사이에 무슨 일들이 일어나기라도 했을까?’강소영은 눈썹을 살며시 치켜올렸고 조바심이 났다.심윤아의 옷 단추를 풀어보지 않았다면 강소영은 심윤아의 몸매가 이렇게 글래머러스 한지 몰랐을 것이다. 반듯하게 누워 있었지만, 가슴은 풍만했다. 그리고 그녀의 피부색은 약간의 핑크빛을 띠고 있었다. 여자인 강소영이 봐도 혹할 정도로 일품이었다.강소영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나직하게 말했다.“사실 요 몇 년 동안 아주 고마웠어요.”심윤아는 눈을
그녀는 강소영처럼 돌려 말하지 않았고 돌직구를 날렸다. 그러자 강소영은 갑자기 어색해졌다.“저는...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심윤아는 그녀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할 겨를이 없었다.떠나기 전에 고현민은 심윤아에게 약을 처방해 주며 말했다.“친구분이 약을 먹기를 원하지 않지만, 지금 상태라면 약을 먹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처방하는 것은 모두 한약이니, 부작용 같은 건 없을 거야. 안심하고 며칠만 복용하면 돼.”“알겠어.”강소영은 한약을 받아들였다.세 사람은 클리닉을 떠나 진씨 가문으로 돌아갔다.진씨 가문에 도착한 후, 심윤아는 서둘러 차 문을 열고 곧장 방으로 돌아가 깊이 자고 싶었다. 그러나 차에서 내릴 때, 그녀는 걸음걸이마저 비틀거렸고, 하마터면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도 그 순간에 먼저 차에서 내린 진수현이 제때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했다.진수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약도 수액도 싫다고 고집을 부려? 참...”강소영은 차에서 내리면서 두 사람의 갑작스럽게 가까워진 광경을 보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심윤아를 부축했다.“수현 씨, 내가 할게.”강소영은 심윤아를 부축하여 저택으로 들어가면서 도우미들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그러자 도우미들은 강소영을 보고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의아한 눈빛을 보였다.강소영이 심윤아를 부축하여 위층으로 올라간 후, 도우미들은 참지 못하고 한 곳에 모여 수군대기 시작했다.“내가 잘못 본 건가? 방금 저분이 강소영 아가씨잖아?”“그게 누구야?”별장에 있는 연차가 쌓인 도우미들은 모두 강소영을 알고 있었지만, 새로 온 도우미들은 알지 못했다.“강소영, 우리 도련님께서 좋아하시는 여자잖아, 이것도 모르고 있었어?”“도련님께서 좋아하시는 분이라고?”처음 알게 된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하지만 도련님은 이미 결혼한 몸이잖아?”“재벌가의 결혼은 대부분 상업적인 이익을 위한 수단일 뿐이지, 진정한 사랑은 따로 있다니까...”진씨 가문에 오랜
“그래.”떠나기 전에 강소영은 방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갑자기 옷걸이에 걸려 있는 남성 수제 양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런 스타일은 진수현만이 소화할 수 있었다.강소영은 얼굴이 창백해졌고 입술을 꾹 다문 채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진수현의 뒤를 따라 나갔다.두 사람이 방에서 나가기를 기다린 후, 심윤아는 눈을 떴고, 그녀는 새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아이를 갖게 된 것은... 어떻게 해야 할까?’임신한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예를 들어, 진수현을 좋아하는 감정을 숨기는 일이라면 그녀는 1년, 2년, 심지어 10년이라도 숨길 수 있었다.하지만 임신은 그런 감정을 숨기듯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배가 불러 나온다면 눈에 띄기 마련인데, 숨긴다고 숨겨질 일이 아니었다.생각할수록 심윤아는 머리가 어질어질해졌고 점차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잠결에 심윤아는 누군가 자신의 옷깃을 풀어 헤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곧이어 어떤 차가운 물체가 그녀의 몸을 덮었다. 아직 열이 펄펄 끓고 있던 몸에 차가운 물건이 닿게 되었으니, 심윤아는 편안함을 느낄 뿐이었다. 심윤아는 신음을 내며 무의식적으로 손발을 들어 상대의 팔에 매달렸다.곧이어 그녀는 잠결에도 끙끙거리는 신음과 거친 숨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녀의 뒷목을 다소 거칠게 부여잡았고 촉촉하게 그녀의 입술에 입술을 포개는 것 같은 촉감을 느꼈다. 이어서 무언가가 그녀의 입 속으로 파고들었다.심윤아는 눈을 꼭 감고 미간을 찌푸리며 입속으로 들어온 그 물체를 물어뜯었다. 순간 피비린내가 입안 가득 퍼졌고, 그와 동시에 남자의 고통스러운 숨소리가 들려왔다.그 후 그녀는 남자가 자기 뺨을 힘껏 꼬집으며 푸념하는 것을 어렴풋이 들었다.“골칫덩어리라니까, 강아지도 아니고 왜 물어?”그녀는 아파서 투덜거리는 그 사람의 손을 밀치고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그녀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다.도우미 한 명이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녀가 깨어나자 기뻐하며 앞으
그 순간 심윤아는 가슴이 떨리고 눈빛이 흔들렸다. 뭔가 단단히 책잡힌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침착하게 대응했다. 창백한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숨김없이 당당하게 말했다.“수현 씨, 다 봤잖아.”오히려 당당한 심윤아의 태도에 진수현은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진수현은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손이 들려있는 빈 약그릇을 가리키며 말했다.“내가 주방에서 고생스럽게 달인 약을 이렇게 한 입도 안 마시고 다 버린 거야?”심윤아가 그를 힐끗 쳐다보고 대답했다.“약 안 먹을 거라고 했었잖아.”말이 끝나자, 심윤아는 빈 그릇을 들고 나갔다. 그러자 진수현이 그녀를 쫓아 나오며 비아냥거렸다.“보아하니 어젯밤은 일부러 비를 맞은 거구나?”심윤아는 잠시 멈칫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아니, 내가 왜 그런 짓을 해?”그러나 진수현은 여전히 회의적인 태도로 그녀를 몰아세웠다.“그래? 그러면 왜 병원에 가는 것도, 약 먹는 것도 다 거부하는 거야?”심윤아는 우선 닥치는 대로 얼렁뚱땅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약이 너무 써서 마시고 싶지 않았어.”“그저 그런 이유라고?”체념할 법도 한 상황에서 진수현은 끝까지 눈을 가늘게 뜨고 대화를 이어가려 했다.“어제...”진수현은 문자메시지 해프닝에 대해 심윤아가 뭔가 단서를 발견한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어 서둘러 해명하려고 하다가, 또다시 절대로 그럴 리 없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어쨌든 그녀는 클럽 입구조차 통과하지 못했으니, 그 해프닝에 대해 알 리가 없을 것 같았다.심윤아는 계속 대화를 이어가다가 혹시라도 실수로 하지 말아야 할 얘기를 꺼낼까 걱정되어, 더 이상 진수현과 실랑이를 하지 않았다.그녀는 지금 비밀을 가지고 있었고 그 비밀을 절대로 진수현에게 들켜서는 안 됐다.마침 도우미가 음식을 들고 들어왔고 심윤아는 그 틈을 타서 음식을 먹으러 갔다. 그녀는 아직 환자였기 때문에 도우미들이 준비한 음식은 모두 담백한 선식이었다. 심윤아는 입맛이 없어서 그냥 대충 먹고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옆자리는 차가웠다.심윤아는 빨간 입술을 깨물었고 눈빛이 점차 어두워졌다.아침 일찍 도우미가 음식과 국 한 그릇을 가져왔다.그녀는 세수하고 나와 강한 한약 냄새를 맡더니 눈썹을 찌푸렸다.“사모님, 이 약은...”심윤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까칠한 말투로 말했다.“내가 이 약을 다시 달여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요? 왜 또 가져왔어요?”평소에는 온순한 그녀였지만, 그녀의 갑작스러운 까칠함에 도우미는 놀랐다.심윤아는 말을 마친 후 자신이 좀 까칠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을 차리고 손을 올려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미안해요.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아서요. 약은 갖고 내려가세요.”도우미는 약을 가지고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부엌으로 돌아오자, 집사는 도우미가 약이 가득 담긴 그릇을 도로 가져온 것을 보고 나이 든 얼굴에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작은 사모님은 계속 약 안 드시겠다고 하셔?”도우미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했다.집사는 도우미의 불만스러운 말투를 듣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작은 사모님께서 평소에 우리를 어떻게 대하는지 잘 알고 있잖아? 오늘은 작은 사모님께서 아프고 기분이 좋지 않아서 그러셨을 거야. 이런 일로 작은 사모님께 안 좋은 감정을 가지지 마.”집사의 엄격한 지시를 들은 도우미는 얼굴이 붉어지더니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이런 일로 작은 사모님께 안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작은 사모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사모님이야.”‘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사모님이라고? 그런데 어제는 다들 도련님이 좋아하는 사람은 강소영이라고 하지 않았나? 아니면 그들의 사모님이 곧 교체되는 것일까?’도우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사람 아직도 약 안 마시려고 해요?”집사와 도우미는 잠시 멍하니 올려다보았다.“도련님...”진수현은 정장 재킷을 팔에 걸치고 손에 차 키를 들고 차가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 물음에 도우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도련님, 진단서는 이미 다 버렸습니다.”진수현의 눈썹이 찌푸려졌다.“뭐라고요?”도우미는 진수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두운 아우라에 놀라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당황한 목소리로 설명했다.“죄송합니다. 도련님. 제게 일부러 버린 건 아니고요. 그 진단서는 이미 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습니다. 저는 당시에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그녀는 주인집에서 버린 물건에 대해 알고 싶은 욕망은 없었다.그리고 진수현의 회사 기밀문서는 평소에 모두 분쇄해서 버렸다. 그녀는 그저 월급날을 기다리며 안일한 생활을 꿈꾸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날에도 다른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이틀 전부터 약을 달이며 그녀는 사모님이 아파서 약을 드신다고 생각했다. 해열제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그녀의 말에 진수현은 눈살을 찌푸렸다.진수현은 심윤아가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다.비가 너무 많이 오면 우산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더라도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운전기사에게 전화해서 데리러 오라고 할 수도 있었고,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집에 올 수도 있었다.왜 굳이 그 큰비를 다 맞으며 돌아온 것일까?집사는 걱정스럽게 말했다.“도련님, 작은 사모님 어디 편찮으신 걸까요?”진수현은 손에 쥔 차 키와 재킷을 집사에게 건넸다.“위층에 갔다 올게요.”집사는 얼른 재킷을 건네받았다.심윤아는 도우미가 내려간 다음 잠시 쉬려고 했지만 전화가 울렸다. 임진그룹 비서의 전화였다. 심윤아가 최근 맡은 프로젝트에 관한 일이었다.심윤아가 어제 하루 출근을 하지 않았기에 프로젝트를 진행할 사람이 없었다.전화를 끊고 심윤아는 관자놀이를 살살 문질렀다.회사는 바쁘게 돌아갔고 그녀가 하루 출근하지 않았으니, 일들이 쌓이기 시작했을 것이다.상황을 보니 오늘 회사에 복귀해야 할 것 같았다.심윤아는 자신의 노트북을 가져와 이메일에 로그인했다. 이때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도우미라고 생각하고 신경 쓰지 않고 이메일을 열고 일을
왜 이런 문제가 또 발생하는 걸까?심윤아는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리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모니터 화면을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담담하게 말했다.“어제는 먹고 싶지 않았고 오늘은 몸이 좋아져서 마실 필요 없어.”그녀의 차분한 표정에 진수현은 입술을 씰룩거렸다.“그래? 그럼, 진단서는 어떻게 된 거야?”마우스로 스크롤을 내리던 심윤아의 손이 갑자기 ‘진단서’라는 세 글자를 듣고 멈췄다.심윤아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할 뻔했다.그러나 가까이에서 들리는 진수현의 숨결이 그가 방금 분명히 이 말을 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진수현은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진단서에 관해 얘기하자 그녀의 손가락이 멈칫하는 것을 보았다.그녀의 행동에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그녀는 자신에게 숨기는 있었다.잠시 후 심윤아는 생각을 정리하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잘생긴 눈에는 의심이 가득했다.“무슨 진단서?”진수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연기를 아주 잘했다. 눈빛과 표정은 물론이고 말투도 평소와 똑같았다.만약 진수현이 그녀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그녀의 연기에 속았을 것이다.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지켜보며 말했다.“내가 묻잖아. 무슨 진단서냐고!”이 말을 듣고 심윤아는 놀란 듯했다.“수현 씨가 묻는 게 어떤 진단서인지 모르겠네.”처음에 심윤아는 그가 진단서에 관해 얘기하자 겁을 먹었다.속으라 그가 진단서를 직접 본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그가 임신 사실을 알고 있나?하지만 심윤아는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았다.심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그녀는 온실 속 화초에서 갖은 역경 이겨내고 모두가 존경하는 심비서로 성장했다.진 씨 그룹과 협력하고 싶어 하는 기업의 대표들은 그녀를 만나면 모두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그것은 그녀가 단지 진수현의 부인일 뿐만 아니라 모두 그녀의 능력을 인정하기 때문이기도 하다.2년간 갈고닦은 실력으로 이미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거듭났다.이제는 더 이상 무슨 일이 생기면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심윤아는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두 사람이 어색해 지는 일이 없게 모르고 있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그냥 비즈니스라고 생각하고 서로 원하는 것을 얻으면 되는 것이었다.고민이 끝나자, 심윤아는 진수현을 밀어내며 침착하게 말했다.“어차피 넌 아닐 거야.”“내가 아닐 거라니? 그럼 다른 사람이 나 보다 너에 대해 더 잘 안다는 거야? 그게 누군데?”진수현은 그녀의 말 때문에 자기가 화를 내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심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가 자기 말에 대꾸하지 않자, 진수현은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움켜쥐고 사악하게 물었다.“남자야, 여자야?”그녀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세게 주었다.심윤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밀어냈다.“아파. 나 건드리지 마.”진수현은 손에 주었던 힘을 조금 풀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물었다.“건드리지 않을게. 그러니까 똑바로 얘기해. 너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누군데? 그리고 그 진단서는 도대체 뭐야?”심윤아는 그의 끈질긴 물음에 속수무책이었고 다음과 같이 말할 수밖에 없었다.“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해. 나 자신만 이해한다고. 아까도 그냥 한 말이야. 됐어? 그리고 진단서는 네가 무슨 얘길 하는 건지 모르겠어. 회사에서 아니면 어디서 봤다는 거야? 똑바로 말해줘야 내가 대답할 거 아니야?”그녀가 먼저 의문을 던지자, 진수현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말할수록 의심만 더 커졌다.“도우미가 말했어. 쓰레기통을 치울 때 진단서 한 장을 발견했다고.”‘한 장의 진단서?’심윤아는 담담하게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무슨 진단서? 어디 있어?”“이미 찢었던데. 보관해 뒀어. 우리 방에서 발견했다던데, 네 것 아니야?”심윤아는 말했다.“찢겨져 있었다고? 기억나. 내 것이야.”말을 마치고 그녀는 진수현의 눈을 피해 다시 모니터를 보았다.“병원에서 받은 진단서야. 그게 왜?”진수현은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물었다.“병원에서 왜 너한테 진단서를 끊어줘?”심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