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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어머, 미안. 내가 실수로 밟았어요.”

한 여자가 고소하다는 기색을 비추며 말했다.

발목을 까지 내려왔던 지예의 드레스 자락이 허벅지까지 찢겨 흠집이 생겼다.

하얗고 매끄러운 그녀의 다리가 보일 듯 말 듯했다.

지예가 고개를 돌리자 낯익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우진의 여동생 유우희였다.

예전부터 유우희는 지예를 많이 괴롭혔지만 지예는 매번 우진을 생각해서 화를 참아 왔다.

하지만 이젠 달랐다.

‘이젠 그냥 당하고만 있지 않아.’

거의 모든 사람이 지예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예를 도발적으로 노려보던 우희는 테이블에서 음료수 잔을 집어 든 상대를 보며 문득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예감이 맞았다.

지예는 그녀에게 음료를 쏟았고 그러자 우희가 비명을 질렀다.

우희의 비싼 드레스가 순식간에 얼룩졌다.

“어이구, 미안해요. 손이 미끄러졌네요.”

지예가 눈썹을 추켜올리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대담한 행동에 주위 사람들은 놀라 숨을 들이켰다.

“기지예! 너 미쳤어?”

우희가 소리쳤다.

유문식의 생신 잔칫날이었기에 지예는 더 이상 밉살스럽게 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화가 난 우희를 보며 말했다.

“제가 정말 손이 미끄러져서 그랬어요.”

우희는 너무 화가 나 미쳐버릴 것 같았다.

‘기지예, 저년 분명히 고의야.’

그녀가 지예를 향해 달려드는 순간 우진이 나타나 그녀를 붙잡았다.

우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조용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우희, 너 그만해. 오늘은 할아버지 생신이야. 이따가 엄마가 알면 크게 혼날 거야, 너!”

우희는 억울한 듯 눈시울을 붉혔다.

“오빠, 오빠도 봤잖아. 기지예, 저년이 일부러 나한테 뿌린 거. 오빠가 당장 나한테 사과하라고 해.”

잠시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때 윤희는 자신의 부모와 함께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그동안 쌓였던 울분이 싹 가시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니 유씨 가문의 가족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뭔가를 결심한 윤주는 부모님을 안심시키고 지예 쪽으로 다가갔다.

“오빠, 정말 가만히 있을 거야? 빨리 기지예한테 나에게 사과하라고 하라고.”

우진이 가만히 있자 지예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우희가 그를 재촉했다.

그때 윤희가 다가와 우희를 위해 말했다.

“지예야, 이렇게 어린 우희가 네게 무슨 나쁜 짓을 했다고 이렇게까지 해? 이번 일은 네가 좀 심했어. 오늘은 할아버지 생신 잔치야. 그러니 괜히 소란 피우지 마.”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의 말은 조금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우희는 실제로 올해 겨우 17살이었고 아직 어린아이였다.

25살의 지예가 자기보다 어린 우희에게 복수하는 것이 좀 옹졸하게 보일 수도 있었다.

순식간에 경멸의 시선들이 지예에게 쏠렸다.

우진이 그녀를 보고 말했다.

“지예야, 네가 우희에게 사과하고 이번 일은 여기서 끝내.”

주변에서 자신을 도와주자 우희는 순식간에 의기양양해지면서 지예를 향해 웃었다.

예전 같았으면 지예는 이 상황에서 괴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지예는 허리를 곧게 펴고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이미 말했잖아? 정말 미안하다고. 손이 미끄러졌다고.”

어조가 날카로워서 상대는 조금도 미안한 기색을 느낄 수 없었다.

윤희는 지예를 잡으려다 자신을 쓰레기 보듯 쳐다보는 지예의 눈빛에 어색하게 손을 멈추었다.

바로 윤희가 말했다.

“지예야, 자꾸 이러면 어머니 아버지도 널 감쌀 수 없어.”

“그 사람들이 언제 나를 감싸주기나 했어?”

지예는 무슨 우스갯소리를 들은 듯 비꼬는 눈빛으로 날카롭게 말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예는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우희가 아무리 무례해도 유씨 가문의 사람이었다. 유문식이 아무리 지예를 편애하더라도 매우 난처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예는 찢어진 치맛자락을 아예 완전히 둘로 나누었다.

긴치마가 짧아지며 하얗게 곧게 뻗은 다리가 밖으로 노출되었다.

그녀의 행동에 우진의 안색이 좋지 않게 변했다.

“지예야!”

지예는 그를 무시했다.

그녀는 다시 유문식을 향해 걸어갔고 유문식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예야...”

“할아버지, 제가 급한 일이 생겨서 일찍 가봐야 할 거 같아요. 정말 죄송해요.”

지예는 먼저 미안한 마음을 표한 뒤 준비한 선물을 유문식에게 건넸다.

유문식은 그녀의 모든 의도를 간파했다.

그는 붙잡지 않고 말했다.

“우진이에게 데려다주라고 하마.”

그녀를 혼자 돌려보내는 것과 유씨 가문의 상속인이 데려다주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유문식은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행동은 여전히 완전 지예의 편이었다.

윤희는 이를 깨물었다.

‘기지예, 네가 뭔데? 무슨 권리로 내 인생을 강탈해 가는 거야?’

‘그래, 이건 할아버지께서 나이가 드셔서 판단력이 흐려져서 그러신 걸 거야.’

윤희는 승복할 수 없었다.

우진과 지예가 문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고 윤희가 얼른 두 사람을 따라갔다.

저택 밖.

지예가 걸음을 멈추었다.

“우진 씨, 3일 줄게. 할아버지에게 우리 이야기 잘 말씀드려. 그때까지도 당신이 말하지 않으면 내가 말할 거니까.”

우진은 지예의 잘린 드레스를 보자 딴생각이 들었다.

“그렇게나 빨리 나랑 선을 긋고 싶어?”

지예는 우진을 노려보았고 역겨워하며 말했다.

“선을 긋기는 무슨? 당신하고 윤희는 이미 나하고 남남이야.”

우진이 멈칫하더니 다시 변명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지예가 먼저 말했다.

“왜 또 그냥 친구사이라고 말하려고? 어떤 친구길래 침대 위에서 같이 나뒹구는지 궁금하네.”

7년 동안 우진은 지예에 대한 감정이 점차 줄어들었다.

우진조차도 처음에는 그 사실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윤희가 나타난 이후 그의 우선순위는 언제나 윤희였다.

‘말로는 친구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핑계로 썸을 탄 거야.’

‘자신이 이런 관계를 즐겼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겠지?’

‘윤희와의 관계에서 책임질 필요도 없는 짜릿함을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여전히 결혼을 기다리는 내가 있으니 안심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내가 이제 모든 것을 알게 되니까. 자신의 실수라고 여겨서 파혼 제의를 순순히 받아준 거겠지.’

지예는 우진의 행동에 대해 그 이상 더 합리적인 해석을 할 수 없었다.

우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막 입을 열려하자 윤희가 달려 나왔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우진에게 다가가 말했다.

“우진 씨.”

다정하게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우진과 서로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드러냈다.

지예가 보기에 윤희는 일부러 자신에게 보이려고 그런 거 같았다.

지예는 그런 윤희를 상대하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숙여 휴대폰으로 콜택시를 불렀다.

윤희가 말했다.

“지예야, 내가 우리 집 운전기사에게 데려다 달라고 할까? 예전 그 기사님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어조가 간곡해서 누가 들으면 정말 지예를 생각해서 하는 말 같았다.

지예가 냉소를 지었다.

“아니야. 그 더러운 차는 너나 타고 다녀.”

그녀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우진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화가 나 손을 뻗어서 윤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윤희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깜짝 놀랐지만 크게 기쁘기도 했다.

우진이 지예를 노려보며 말했다.

“파혼에 대해서는 내가 할아버지께 말씀드릴게. 넌 후회나 하지 마.”

지예가 웃었다.

“그런 걱정은 마.”

지예는 우진이 윤희의 어깨를 감싸는 모습을 보고도 질투심을 드러내기는커녕 오히려 차분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우진은 지예의 혐오스러워하는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밖에서 고급차 한 대가 들어왔다.

세 사람이 동시에 그 차를 쳐다보았을 때 부진철이 그 차에서 내렸다.

잘생긴 이목구비의 그는 늘씬한 몸매 위로 검은색 트렌치코트를 걸쳤다.

금테 안경테 사이로 보이는 긴다란 눈은 차분하면서 진중한 이미지를 더하며 온몸에서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우진을 쳐다보는 그의 검은 눈동자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우진은 윤희의 어깨에서 손을 내리며 ‘외삼촌’하고 불렀다.

외삼촌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부진철은 우진보다 고작 네 살 위였다.

그러나 실력이나 항렬에서 우진은 부진철과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부진철은 대답 대신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우진이 그의 뒤를 살피며 물었다.

“엄마는 함께 안 온 거예요?”

‘오늘 아침에 전화로 공항에 도착한다고 했는데.’

‘올 시간이 다 되었는데 대체 왜 아직 오시지 않은 거지.’

“네 엄마는 잠깐 일이 생겨서 바로 못 와.”

부진철은 대답을 하고 다시 지예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들어가지 않고 여기서 뭐해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집에 가려고요. 다음에 뵐게요.”

지예는 사실대로 말했다.

부진철이 말했다.

“지금 택시를 기다리는 거예요?”

망설이다가 지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데려다 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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