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미안. 내가 실수로 밟았어요.” 한 여자가 고소하다는 기색을 비추며 말했다. 발목을 까지 내려왔던 지예의 드레스 자락이 허벅지까지 찢겨 흠집이 생겼다. 하얗고 매끄러운 그녀의 다리가 보일 듯 말 듯했다. 지예가 고개를 돌리자 낯익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우진의 여동생 유우희였다. 예전부터 유우희는 지예를 많이 괴롭혔지만 지예는 매번 우진을 생각해서 화를 참아 왔다. 하지만 이젠 달랐다. ‘이젠 그냥 당하고만 있지 않아.’ 거의 모든 사람이 지예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예를 도발적으로 노려보던 우희는 테이블에서 음료수 잔을 집어 든 상대를 보며 문득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예감이 맞았다. 지예는 그녀에게 음료를 쏟았고 그러자 우희가 비명을 질렀다. 우희의 비싼 드레스가 순식간에 얼룩졌다. “어이구, 미안해요. 손이 미끄러졌네요.” 지예가 눈썹을 추켜올리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대담한 행동에 주위 사람들은 놀라 숨을 들이켰다. “기지예! 너 미쳤어?” 우희가 소리쳤다. 유문식의 생신 잔칫날이었기에 지예는 더 이상 밉살스럽게 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화가 난 우희를 보며 말했다. “제가 정말 손이 미끄러져서 그랬어요.” 우희는 너무 화가 나 미쳐버릴 것 같았다. ‘기지예, 저년 분명히 고의야.’그녀가 지예를 향해 달려드는 순간 우진이 나타나 그녀를 붙잡았다. 우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조용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우희, 너 그만해. 오늘은 할아버지 생신이야. 이따가 엄마가 알면 크게 혼날 거야, 너!” 우희는 억울한 듯 눈시울을 붉혔다. “오빠, 오빠도 봤잖아. 기지예, 저년이 일부러 나한테 뿌린 거. 오빠가 당장 나한테 사과하라고 해.” 잠시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때 윤희는 자신의 부모와 함께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그동안 쌓였던 울분이 싹 가시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니 유씨 가문의 가족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그의 말을 들은 세 사람은 모두 놀랐다. ‘언제부터 삼촌이 저렇게 다른 사람에게 친절했지?’ 우진이 생각한 부진철은 늘 차갑고 매정한 사람이었다. 성인이 된 후 오랫동안 해외에서 과학 연구를 해온 그가 누구와 친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지금 삼촌이 먼저 지예를 데려다주겠다고?’ 우진은 의아하면서 이상하게 경계심이 들었다. “외삼촌 걱정마세요. 제가 데려다주면 돼요.” “할아버지 생신 잔치야. 넌 아직 할 일이 많잖아.” 말을 할 때 진철의 시선이 우진과 윤희를 오갔고 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윤희는 손가락을 떨며 불편함을 느꼈다. ‘이 남자 기가 왜 이리 세?’ ‘지예하고 잘 아는 사이인가?’ 윤희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했지만 지예에 대한 질투심이 더 컸다. 진철은 두 사람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차의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가 친절하게 말했다. “지예 씨, 타세요.” 상황이 이래서 지예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우진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고 그의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다. ‘언제부터 지예와 삼촌이 저렇게 가까웠지?’ 생각에 잠겨있는데 윤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예도 참, 약혼자 앞에서 다른 남자랑 저렇게 간다고? 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 차 안. 진철과 지예, 두 사람은 멀찍이 좌우로 앉아있었다. 지예는 눈을 아래로 두고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궁리했다. 진철은 은근하면서도 절제된 눈빛으로 예쁜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우진이랑 싸웠어요?” 냉담한 어조에서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예 역시 그를 속일 생각이 없었기에 솔직히 말했다. “전 이미 그 사람과 헤어졌어요.” 지예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드레스 보내주셔서 감사해요. 돈은 제가 나중에 보낼게요.” “아니에요. 원래 선물로 드린 겁니다.” 차 안이 다시 잠잠해졌다. 운전기사는 차를 매우 부드럽게 운전했다. 지예는 약간 긴장
“이거 놔! 경찰에 신고할 거야! 이 미친년아!” 윤희는 아파서 눈물을 펑펑 쏟아냈고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지푸라기가 되어 붙잡혀 있었다. 강수연은 냉소를 지으며 힘껏 잡아당겨 그녀의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는 세게 뺨을 때렸고 윤희의 얼굴에 삽시간에 손바닥 자국이 하나 생겼다. 지켜보던 몇몇 사람들은 모두 강수연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정신을 차리고 맞서려던 윤희는 한쪽 뺨을 또다시 한 대 얻어맞았다. “허 그래, 내 남자의 어깨에 기대니까 좋아?” 윤희는 너무 맞아서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침침했다. 그녀는 아직 무슨 영문인지 몰라 정신이 없었는데 강수연이 들어오자마자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뺨을 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거 완전 똘아이 아니야.’ “수연아, 그만해.” 화가 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룸 안에서 울렸고 윤희와 강수연을 떨어뜨려 놓은 그의 안색은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윤희가 억울하게 울자 다른 사람들이 다가와 위로했다. “윤희야 울지 마. 절대 이건 그냥 두면 안돼. 우진 오빠가 오면 너 대신 다 해결해 줄 거니 걱정 마.” “알았어, 넌 수건이랑 얼음 좀 가져와, 양쪽 얼굴이 부어서...” 강수연은 자신을 노려보는 주병진을 보니 기가 막혔다. “네가 말한 접대라는 게 여자랑 노는 거냐?” 강수연이 룸으로 뛰어들었을 때 안에는 주병진과 그의 두 친구 그리고 여자는 윤희만 있었다. 그녀는 안에 여자가 있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 여자가 주병진과 붙어 있다는 게 문제였다. ‘이런 걸 어느 아내가 참아?’ “수연아. 윤희는 내 친구야.” ‘응? 뭔가 익숙한 대사인데?’ 입구에 서 있던 지예가 얼떨떨해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룸 안의 혼란스러운 장면을 지켜보던 우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게 무슨 일이야?”그의 낮은 목소리를 듣고 윤희는 더욱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우진에게 그녀 얼굴이 뚜렷하게 한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지금 뺨을 맞고 눈이 벌겋게 달아올라 한없이 불쌍해 보였다. “우
우진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경해시에서 성이 부씨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야.’ ‘거기에 부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외삼촌?’ 심문실 문이 다시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역시 진철이었다. 그는 단추를 모두 채운 흰색 셔츠를 입었고 그 위에 회색 조끼를 걸쳤다. 검은색 바지는 그의 다리를 늘씬하게 보이게 했다. 또렷한 이목구비에 머리는 잔머리 없이 깔끔하게 정리했다. 안경 뒤의 눈매는 날카롭고 냉정한 이미지를 전달했다. 온몸에서 절제와 기품이 자연스럽게 흘렀다. “아이고, 부 선생.” 임현성이 먼저 진철을 마중했다. 진철은 “형님”이라고 부르며 손에 든 선물을 건넸다. “이건 현일이가 전해드리라고 제게 부탁한 겁니다.” 임현일은 진철과 함께 일하는 유능한 인재로 겨우 30살도 안된 천재 과학자였다. 임현성은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눈가에 주름이 잡히도록 밝게 웃었다. “우리 현일이가 부 선생과 함께 일하는 것도 감사한 일인데, 이렇게 여기까지 오시게 했군요.” 진철은 별일 아니란 듯이 대답했다. 사실 진철이 가져온 선물은 핑계에 불과했다. 그의 눈이 지예와 마주치자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피했다. 우진은 이 모든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그의 눈빛이 가라앉더니 진철의 앞을 가로막았다. “외삼촌.” 두 사람의 제형은 비슷하지만 우진의 기세는 진철보다 훨씬 약했다. 진철이 윗사람이었고 능력 역시 더 강했기에 그는 눈을 가늘게 떨구었다. “여기서 뭐 해?” 진철의 질문에 우진이 대답했다. “일이 좀 생겨서요. 변호사는 불렀...” 말을 다하기도 전에 진철이 말을 끊었다. “기윤희 씨 때문이야?”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자 윤희는 자신에 대한 의외의 관심에 조금 놀랐다. 그녀는 진철을 보고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다가 진철의 다음 말을 듣고 당황했다. “우진아, 넌 유씨 가문의 후계자야. 밖에서 경거망동은 하지 말아야지.” 진철의 목소리는 낮으면서 차가웠고, 그의 잘생긴 얼
진철이 섬세한 배려가 지예를 당황시켰다. 그녀는 새 옷을 받아 갈아입었다. 헐렁헐렁한 반팔과 옅은 색의 긴 바지였다. 스타일이 단순해서 오히려 맘에 들었다. 커튼을 젖히고 지예가 말했다. “부 선생님, 옷값은 제가 보내드릴게요.” 요 몇 년 동안 그녀는 큰일이 일어나지 않게 아주 조심했다. 사실 그녀는 우진과 결혼하기 위해 엄청난 압박들을 이겨내야 했다. 기씨 가문의 모든 사람들은 그녀가 빨리 파혼하고 그 자리를 윤희에게 양보하기를 바랐다. 유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녀가 무엇을 하든 배후에서 누군가 일을 꾸며 그녀를 막다른 곳으로 내몰았다. 진철은 카톡의 QR코드를 열었다. 손을 쭉 뻗으며 말했다. “그럼 친구 추가하시죠.” 지예는 당황해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그녀는 예전에 진철이 우진의 외삼촌이라는 것을 알고 가장 먼저 그의 연락처를 삭제했다. ‘모르는 줄 알았는데, 알고 있었어?’ ‘그럼 내게 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다는 건가?’ 지예는 난처해하며 QR코드를 스캔하고 저장할 때 “부 선생님”이라고 이름을 썼다. “시간 나실 때 밥 한 끼 사주세요.” 휴대폰을 거둔 진철의 가느다란 두 눈에 유쾌한 미소가 번지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지예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바깥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졌고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다가 우진과 마주치게 되었다.그의 외투는 팔에 걸쳐져 있었고 다부진 얼굴의 표정은 어둡고 무서워 보였다. 굳게 닫은 입은 낯선 사람의 접근을 거부하는 듯했다. 진철과 지예를 보자 우진의 분노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 ‘지예가 입고 있는 옷은 아까 옷이 아니라 새 옷이야.’ ‘외삼촌이 사 준 건가?’ “외삼촌, 이번에는 언제 돌아가세요?” 우진이 직접적으로 물었다. 그는 지예가 진철과 함께 서 있는 모습이 불쾌했다. “내가 언제 가든 너하고 무슨 상관이야?” 진철은 냉랭한 태도로 우진을 위아래로 살펴보며 말했다. “넌 네 걱정
관리실에서 CCTV를 본 후 진철은 상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군가가 지예의 집 문 앞에 썩은 계란과 쓰레기를 버렸다. 화가 난 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반면 지예는 담담하기만 했다. “지예 씨, 경찰에 신고하세요. 얼굴이 또렷하게 찍혔으니 분명 이 사람을 잡을 수 있을 거예요.” 관리실 직원은 지예에게 경찰에 신고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그녀가 거절했다. 그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주먹을 꽉 쥐며 참았다. “누군지 알 거 같아요.” ‘나쁜 짓을 할 때 일반적으로 아무도 모르게 해야 정상인데 이건 CCTV가 있는 걸 알면서 일부러 그런 거 같아. 마치 날 도발하려는 것처럼.’ ‘이렇게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뒤에 든든한 배후가 있다는 거지.’ “제가 도와드릴까요?” “아니요.” 지예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지만 마음속에서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것들이 지금 나를 정말 우습게 여기네.’ ‘그럼 잘못 생각했다는 걸 똑똑히 알려줘야겠지?’ 이미 밤 11시였지만 지예는 곧장 기씨 가문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가사도우미는 이를 막지 못해 급히 전화를 걸어 저택의 경비원을 불렀다. 거실에서 오미수는 마음 아파하며 윤희의 얼굴에 찜질을 해주고 있었다. “윤희야, 많이 아파?” 윤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요. 그러니 엄마도 지예를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지예도 불쌍하잖아요. 만약 제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지예는 여전히 이 집에서 아가씨 대접을 받았을 텐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지예는 바로 네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가짜야. 걔만 아니었어도 네가 밖에서 그렇게 많이 힘들게 살지 않았을 거야. 넌 너무 착해서 탈이야. 앞으로는 절대 그런 소리는 하지도 마. 우리 기씨 가문에 딸은 오직 너 하나이니까. 네 오빠에게 여동생 하나뿐이야.”오미수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런 오미수의 태도는 윤희가 딱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어쨌든 제가 없는 동안 지예를 가족으로 생각하고 살았잖아요.” “가족? 그런
지예는 표정 하나 전혀 바뀌지 않았다. “알고 싶지 않아요. 별로 관심 없어요.” 그녀는 혼자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무슨 일을 하든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 저 여자가 그걸로 날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남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는 지예에 오미수는 씁쓸함을 느꼈다. 지예가 거실을 둘러보니 아수라장으로 변한 게 참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카톡 지갑을 열었다. “청소비 주세요.” 지예는 아파트 입구의 쓰레기를 돈을 주고 치울 사람을 찾으려고 했다. ‘돈은 일을 벌인 사람이 내야지.’ 어쨌든 기씨 가문이 벌인 일이었다. 기영석이 인상을 구겼다. “무슨 청소비? 기지예, 우리 기씨 가문에 돈이 많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막 퍼주지는 않아.” 기영석이 보기에 지예의 말은 가난한 사람의 터무니없는 요구였다. 윤희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 사실 사람은 그녀가 몰래 찾아서 보낸 거고 기영석과 오미수는 그것을 몰랐다. ‘기지예, 저 뻔뻔한 미친년.’ 윤희는 속으로 욕설을 퍼붓고는 지예가 다른 말을 하기 전에 돈을 보냈다. 그녀는 200만 원을 송금했다. 윤희의 안색이 불편해 보였다. “됐지? 기지예, 너 빨리 우리 집에서 나가.” 입금됐다는 표시를 보며 지예는 만족했다. 돈이 많고 적고는 사실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녀의 목적은 상대에게 똑같이 되돌려 주는 것이었다. ‘역시 윤희 네 짓이었구나.’ 지예가 비웃으며 윤희를 향해 눈썹을 치켜올리자 윤희는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윤희 자신의 힘으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지예가 돌아가려고 하자 오미수가 위협하며 소리쳤다. “기지예, 빨리 유씨 가문과 파혼해. 그 자리는 원래 우리 윤희것이니까.” 기씨 가문은 일찍이 경해시에서의 영향력이 매우 눈에 띄게 커졌지만 기영석이 이끈 후 줄곧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기씨 가문의 최고 어른인 기석현과 유씨 가문의 최고 어른인 유문식 사이에 친분이 없었다면 지예와 우
“혹시 좋아하시는 사람이 있어요?” 지예는 놀란 눈으로 진철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의 두 눈은 안경에 가려져 있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예는 정말 궁금했다. ‘어떤 여자길래 부 선생님 같은 남자가 저리 적극적으로 나오는 거지?’ “누군지 알고 싶어요?” 진철이 되물었다. 순간 왠지 모르게 지예의 심장이 뛰었다.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들고 있던 잔을 쳐다보았다. “부 선생님께 실례가 됐다면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그래 부 선생이 좋으면 그만이지 이게 무슨 오지랖이야?’ 진철은 따뜻한 시선을 거두며 조용히 말했다. “나중에 다 알게 될 거예요.” 그리고는 화제를 돌려 몇 마디 잡담을 나누고 지예에게 일찍 쉬라고 했다. 밖에서는 비가 다시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지예가 잘 준비를 하고 침대 위로 올라가자 빠르게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온몸의 긴장이 풀렸다. 그녀는 자기 전 휴대폰에 읽지 않은 메시지가 몇 개를 확인했다. [강수연: 지예 씨, 오늘 폐를 끼치게 돼서 너무 미안해요. 잔금은 이미 지예 씨 계좌로 이체했어요. 더 보낸 비용은 정신적 보상금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 [강수연: 남편의 진짜 모습을 보게 해 줘서 고마워요. 미련 없이 이혼을 하기로 결심했어요.] 지예가 문자메시지를 확인하고 계좌를 보니 과연 비용의 거의 두 배나 되는 돈이 입금되어 있었다. 그녀는 한 줄의 회신을 했다. [수연 씨는 훨씬 괜찮은 사람이에요. 주병진 씨와 어울리지 않아요.] ‘주병진은 유우진의 친한 친구라고 했지? 지금 보니 정말 유유상종이야.’ ‘모두 똑같은 쓰레기 같은 놈들.’ 지예는 뒤척이며 잠을 자다가 갈증으로 잠시 잠에서 깼다. 그녀는 주방에 가서 물을 따라 마시려고 방을 나갔다. 그러다 거실에 있는 진철을 보게 되었다. 그는 편한 실내복 차림에 검은 머리가 헝클어져 있어서 지예가 서 있는 각도에서는 그의 턱만 또렷하게 보일 뿐이었다. 진철은 서랍에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