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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지예의 말이 끝났을 때 창밖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진의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는 무정하게 떠나는 지예의 뒷모습을 보고 이를 악물며 냉소했다.

“그래. 기지예, 후회하지 마!”

지예는 잠시 발걸음을 멈출 뿐 돌아보지는 않고 그대로 떠났다.

밖은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지예는 한 손으로 아랫배를 누르고 다른 한 손을 흔들어 택시를 잡았다.

30분이 지나도 여전히 택시가 잡히지 못했다.

그녀는 눈썹을 찡그리며 더블을 외치자 마침내 멀리서 택시가 다가왔다.

그때 오미수에게 전화가 왔다.

[너 방금 우진이를 만났어?]

오미수가 다짜고짜 물었다.

지예는 못마땅해하며 쪼그리고 앉아 고통으로 괴로운 배를 문질렀다.

“내가 누구를 만나든 아줌마와 무슨 상관이에요?”

윤희가 기씨 가문에 돌아온 후 지예는 그 집을 나와 혼자 살고 있었다.

평소에도 기씨 가문은 지예와 우진을 빨리 파혼 시키려고 자주 연락해 압박했다.

기씨 가문에서 지예는 마치 안방을 차지하고 있는 손님과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진짜 아가씨가 돌아왔으니 지예에게 그 자리를 양보해달라고 요구했다.

사실 우진의 결혼 문제는 기씨 가문과 유씨 가문이 따로 상의하면 되는 일이었고 지예에게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유씨 가문의 최고 어른인 유문식이 지예를 이미 자신의 손자며느리라고 여기고 있어서 결혼 문제를 처음부터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지예, 너 지금 무슨 태도야? 어쨌든 우리 기씨 집안이 널 20년 넘게 키워줬어. 그리고 너 때문에 우리 윤희가 밖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오미수의 목소리는 야박하고 날카로웠다.

지예가 코웃음을 쳤다.

“그럼 그때 아기였던 제가 병원에서 우리 둘이 누워 있던 침대가 몰래 바뀌었다는 말인가요?”

오미수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다.

물론 그녀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니, 가만히 듣고 있으면 마치 윤희가 겪은 고생이 정말로 지예의 잘못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지예 역시 윤희만큼 피해자였다.

게다가 기씨 가문이 그녀에게 딱히 잘해 준 것도 없었다.

[기지예, 넌 우리 윤희한테 고마워 해야해. 그러니 어서 우진이와 파혼해. 원래 네 것이 아닌 건 탐내지 마.]

택시가 지예 앞에 멈췄다.

그녀는 차에 타며 소리쳤다.

“난 이미 쓰레기 같은 그놈 버렸으니 윤희한테 주워가라고 해요. 제게 고마워할 필요가 없다고요.”

그녀는 바로 전화를 끊고 오미수의 전화번호를 차단했다.

내리는 비가 차창을 두드렸고 안개로 인해 밖이 자욱했다.

피곤한 듯 등을 기댄 지예의 얼굴은 창백하기만 했다.

오늘 일이 그녀를 너무 지치게 만들었다.

그녀는 너무 황당무계한 일이 벌어져 꼭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누구나 그녀와 우진이는 곧 결혼할 사이라고 생각했다. 그녀 자신도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순식간에 변했다.

‘우진 씨가 그럴 줄이야.’

지예는 눈을 감은 채 터져 나오려는 슬픔을 애써 억눌렀고 집에 도착하자 겨우 잠잠해졌다.

집에 들어간 그녀는 먼저 진통제를 먹었다.

그리고 우진이 집안에 남긴 모든 것을 치우기 시작했다.

우진은 지예의 집에서 자는 일이 거의 없었다.

드물게 몇 번 자고 간 것도 모두 그녀가 조르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지예가 옷장에서 우진의 외투를 꺼내 쓰레기봉투에 쑤셔 넣으려고 하자 주머니에서 물건 두 개가 떨어졌다.

하나는 콘돔.

다른 하나는 여자가 착용하는 진주 귀걸이였다.

지예는 윤희가 그 귀걸이를 한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우웩!”

지예는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세면대에 두 손을 짚고 허리를 구부린 채 헛구역질을 했다.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속이 뒤집혔다.

‘역겨워.’

‘7년의 연예 기간 동안 서로에게 충실했다고 생각했는데 모두 내 착각이었어.’

지예는 우진과 관련된 모든 물건을 집안에서 버렸다.

그리고 밤새 업체를 시켜서 집 안팎을 몇 번이나 소독하고 청소를 했다. 그랬더니 지예의 기분이 한결 편안해졌다.

...

일주일 후.

지예가 새 고객의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표에는 부부의 나이, 생일, 별자리, 혈액형 등이 분명하게 적혀 있었다.

관련 기획을 위해 고민하던 중에 그녀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낯선 전화번호였다.

전화를 받지 않고 끊어버렸지만 상대방이 여러 번 계속 전화를 했다.

지예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지막 벨이 울리고 끊어지려는 순간 그녀는 수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

지예가 한마디를 채 하기도 전에 상대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기지예! 너 내 전화번호 차단했어?]

우진은 지금 대표실에 앉아 있었는데 화가 나 안색이 어둡고 무서웠다.

옆에 있는 비서는 전전긍긍하며 우진의 손에 있는 자신의 휴대폰을 보았고 우진이 괜히 화풀이를 해 망가질까 봐 걱정했다.

지예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내가 당신 번호 차단한 게 뭐가 어때서?”

그녀는 파혼하는 날 우진의 모든 연락처를 차단했다.

그 후로 일주일이 지났는데, 다시 말해 우진은 7일 만에 처음으로 그녀에게 연락한 것이다.

지예의 얼굴에 비아냥거리는 표정이 가득했다.

우진은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내일이 우리 할아버지 생신 잔치야. 함께 참석해야 해.]

유문식은 자신의 칠순 잔치에 경해시 각계 유명 인사들을 초대했다.

당연히 손자인 우진도 그 자리에 빠질 수 없었다.

지예가 눈살을 찌푸렸다.

“할아버지께 우리 헤어졌다고 얘기 안 했어?”

우진은 냉소를 지었다.

[지예, 너 정말 너무 한 거 아니야? 할아버지는 방금 수술을 받으셔서 괜히 우리 때문에 충격을 받으면 안 된다고.]

지예는 침묵했다.

그녀는 더 이상 우진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유문식이 그녀를 늘 잘 대해주었기에 마음이 약해졌다.

한참을 고민한 그녀가 말했다.

“내가 할아버지께 잠시 급한 일로 출장을 가야 한다고 얘기하면...”

거절하는 그녀의 말을 듣던 우진은 화가 나 주먹을 불끈 쥐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네가 하는 일에 무슨 급한 출장? 우리 할아버지가 치매에 걸린 것도 아닌데 그것도 눈치채시지 못할까?]

지예는 심리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졸업 후 그녀는 전공과는 정반대의 직업을 갖게 되었다.

우진에게 감정상담사는 힘들고 좋은 평가를 듣지 못하는 직업이었다. 그래서 그는 한때 지예가 일을 그만두면 자신이 생활을 책임지겠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예는 그의 제안을 매번 거절했다.

그 때문에 둘이 오랫동안 냉전기를 갖기도 했었다.

지예의 마음이 더 약해졌다.

더 이상 핑계를 찾을 수 없게 된 그녀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할아버지 생신 잔치에는 갈게. 하지만 당신과는 함께 가지 않을 거야.”

그리고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

우진이 다시 전화를 할까 봐 지예는 이 번호 역시 차단했다.

...

저녁이 되었다.

지예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택배 기사가 그녀의 택배 두개가 도착했다고 말했다.

“택배? 제가 인터넷에서 주문한 적이 없는데...”

“기지예 씨 맞나요?”

택배기사가 물었다.

“네.”

“그럼, 맞습니다. 하나는 유 대표께서 보내신 거고 다른 하나는 부 선생님이 보낸 겁니다.”

‘유 대표라면 우진 씨가 보낸 거고.’

‘다른 하나는...’

지예는 택배 수취를 모두 거절하려고 했다.

이런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택배기사가 접은 쪽지 하나를 꺼내 건넸다.

“부 선생님이 이걸 보시면 거절하지 않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쪽지를 폈다.

글씨가 깔끔하고 필체에 힘이 있었다.

이를 본 지예는 담담하게 손에 쪽지를 쥐고 고개를 들었다.

“죄송한데, 유 대표가 보낸 택배는 받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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