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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여승재가 지켜보고 있어도 이 일은 그렇게 간단히 넘어갈 수 없었다.게다가 여승재 앞에서 민예원을 겨냥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원서윤을 향해 비아냥과 조롱을 퍼부었다.객석에 앉아 있는 여승재는 무표정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고 아델레이드는 한층 더 도발적으로 나섰다.

“의사 선생님, 민예원 총괄을 이 자리로 데려오지 못하겠다면 차라리 본인이 나서는 게 어때요?”

명백한 도발이었다. 시작도 되지 않은 첫 협상의 기 싸움이 이미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원서윤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응수했다.

“아델레이드 님, 경항시에 처음 오셨군요. 손님이라면 손님으로서의 예의를 끝까지 지켜주세요. 저희가 사과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반드시 제대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상대측 제약사는 해외에서 들어온 대규모 기업으로, 그들의 대표 아델레이드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맞받아쳤다.

“원서윤 씨, 저도 당신네 나라의 문화를 좋아합니다. 특히 ‘빨리빨리 문화’가 있다고 하던데요.”

아델레이드는 난소 낭종 제거 특효약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제약사의 대표였다. 그는 이번 협상이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그들을 찾아온 상황이라는 점을 은근히 내비치며, 궁지에 몰린 것은 그들이 아니란 뜻으로 대놓고 이 상황을 비꼬았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몇몇 임원들은 속이 타들어 가는 듯한 표정이었다. 팀 내에서도 부정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임원이 조용히 속삭였다.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하다가, 민 총괄님이 오시기 전에 큰일나는 거 아니야? 민 총괄님은 여 대표님이 직접 키운 제자고, 협상 전문가잖아. 괜히 나서서 일을 그르치면 어쩌려고!”

“맞아! 민 총괄님이 일부러 늦게 오시는 것도 전략의 일환일 텐데, 의사 선생님이 뭘 안다고! 이번 협상이 실패하면 다 그녀 책임이야!”

“정말이지! 의료 쪽 사람이라 그런지 다른 업계에 대해 전혀 이해가 없는 거 아닌가?”

원서윤은 마치 덫에 걸린 듯했다.

한발 물러서면 아델레이드가 약점을 잡고 문제 삼을 것이고, 한 발 앞으로 나아가면 민예원이 져야 할 책임을 대신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원서윤 선생님이 해결하게 놔두세요.”

여승재가 단호한 어조로 말하자, 모두가 원서윤을 바라봤다.하지만 원서윤은 그 시선들을 외면하고 나서 오히려 빛을 등지고 앉아 있는 여승재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승재는 너무나 태연하게 말했다. 이 상황의 심각성이나 결과에 대해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는 듯, 너무나 가볍게 말했다.

민예원이 계속해서 모습을 보이지 않자, 상대측은 점점 더 공격적으로 나왔다. 첫 번째 협상의 상황은 점점 더 위태로워졌다.

여승재는 한 마디의 불평도 없이 민예원을 지키기 위해 아델레이드의 공격이 원서윤에게 돌렸다. 그는 프로젝트에 대한 모든 책임을 원서윤에게 넘기고 민예원을 보호하려 했다. 그는 원서윤을 극도로 불리한 상황에 몰아넣고 있었다.

“여 대표님, 저는 그저 프로젝트팀원 중 한 명일 뿐입니다!”

원서윤은 이를 악물고 한 자 한 자 내뱉었다. 그러자 여승재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프로젝트가 실패해서 민예원 총괄에게 피해가 가게 되면, 서윤 씨가 원하는 것도 다 없던 일로 되는 거예요.”

여승재는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직설적이고 위협적인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그가 신경 쓰는 건 오직 민예원이었다. 원서윤은 그제야 이 모든 상황에서도 이 남자는 사랑에 빠지면 누구보다도 열정적이고, 어떤 이익이 걸려있든 다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승재는 나를 희생시켜서라도 민예원에게 닥칠 위기를 막으려는 건가 봐...’

“원서윤 씨가 예원이를 대신해서, 첫 번째 협상을 시작하겠습니다.”

여승재의 말에 회의는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아델레이드는 도덕적 우위를 점하며 공격을 퍼부었다. 원서윤은 계속 침묵을 지켰고,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임원들은 한숨을 쉬며 단언했다.

“끝났어. 이번 협상은 백 퍼센트 문제가 생길 거야.”

팀원들도 수군댔다.

“실패하면 다 원서윤 씨 때문이에요. 외부 사람이 괜히 끼어들어서 일을 망친 거예요. 민 총괄님이었으면 이 케이스는 분명히 성공했을 텐데...”

소란스러운 대화들이 이어졌다. 아델레이드는 다시 거칠게 말했다.

“약 한 알에 11만 원. 의사 선생님, 선생님께서 예쁘장하게 생긴 덕분에 이 정도로 깎아준 거예요. 이 가격에서 단 한 푼이라도 깎으려 한다면, 우리 협상은 여기서 끝입니다.”

“그럼 더는 진행할 필요 없겠네요.”

원서윤은 총괄 자리에 앉아 여유롭게 말했다.

여승재의 눈빛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원서윤은 그 시선에 전에 없던 불쾌함을 느꼈다.

그리고 여승재를 제외한 모두가 그녀의 말에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델레이드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의사 선생님, 고전에서 여자는 머리가 길면 생각이 짧다고 하더군요. 오늘 덕분에 그 말을 실감하게 되네요.”

“그렇다면 아델레이드 님은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설이 내린다는 말도 들어보셨을 텐데, 직접 체감하고 싶으신가요?”

원서윤은 휴대전화를 꺼내 몇 번 화면을 넘겼다. 프로젝터가 연결되었고, 몇 개의 짧은 영상들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영상 속에는 아델레이드가 팀 내 남자 간호사와 의사들을 성추행하는 장면들이 담겨 있었고, 심지어는 그들에게 약물을 투여해 몰래 데려가려는 모습까지 포착되어 있었다.

“성추행, 강간 미수... 어느 나라에서든 형사 범죄일 텐데요. 아델레이드 님, 제가 지금 당장 112에 신고를 해도 될까요?”

원서윤은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여 가슴을 테이블 위에 살짝 얹었다. 그녀의 매혹적인 몸짓에는 그만의 성숙함이 깃들어 있었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살짝 웃는 모습이었지만, 그 속에는 청초한 느낌마저 있었다.성숙하면서도 순수한, 묘한 매력... 여승재는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깊고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의 휴대전화는 계속 진동하고 있었고, 민예원이 전화하고 있었으며, 수십 개의 읽지 않은 메시지들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무시했고, 아무도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아델레이드는 자극받아 원서윤에게 거칠게 나서려 했지만, 원서윤은 이미 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손뼉을 쳤다. 그러자 호텔의 보안 요원들이 쏟아져 들어와 그를 제압했다. 아델레이드는 바닥에 눌려 경찰에 의해 끌려 나갔다.

첫 번째 협상에서 상대측 대표가 체포되면서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심리전에서 단숨에 우위를 차지했다.

회의가 끝났다. 처음에는 비난받고 무시당했던 원서윤은 이제 팀의 선두 주자가 되었다. 모두가 그녀를 칭찬하고 아부하며, 몇몇 주요 임원들은 명함을 건네며 나중에 꼭 같이 식사하자는 말을 건넸다.

“서윤 씨, 보니까 이거 사전에 다 준비해 두신 거죠? 보안 요원도 직접 부르셨나요?”

시청의 주요 인사가 그녀와 웃으며 묻자, 원서윤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증거는 미리 준비한 게 맞아요. 보안 요원과 경찰은 아마 다른 팀원이 불렀을 거예요. 방금 문틈으로 보안 요원이 밖에 있는 걸 보고 불렀어요.”

회의실을 나선 후, 모퉁이를 돌면 바로 엘리베이터 앞이었다.

엘리베이터와 아직 거리가 조금 남았지만 어딘가에서 끊어질 듯 말 듯한 흐느낌이 들려왔다. 어린 여자가 남자의 넓은 가슴에 기대어 억울하다는 듯 울먹이고 있었다.

“오빠, 언니를 탓하지 마. 언니가 스위트룸에 갔다 온 건 맞지만, 내가 방에서 자는 줄은 몰랐을 거야. 그래서 깨우지 못했을 거야...”

‘대단하신 총괄님이 첫 협상에 늦은 이유가 늦잠을 자서였다고?'

민예원은 계속 울먹이며 말했다.

“그리고 언니가 청소를 요청하면서 방에 아무도 없다고 말했던 터라 호텔직원들도 내방에 와보지 않았을 거야. 그러다 보니 시간이 많이 지체됐어... 언니는 정말 실수로 그런 거니까 언니를 미워하지 마. 응?”

그 말까지 다 듣고 난 원서윤은 마치 태연하게 엘리베이터에 앞으로 걸어가 내려가는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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