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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정원준은 사이다 반박에 원서윤도 감탄했다. 여승재 친구라 그런지 정말 한마음 한뜻으로 여승재의 쉴드를 쳐주고 있었다.

원서윤은 위가 뒤틀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술기운이 갑자기 확 올라와서 그런 것 같았다. 비틀거리며 자세를 고쳐 앉은 원서윤은 가슴에서 전해진 통증을 애써 참아내며 매혹적이지만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원준 씨, 원준 씨가 여자였으면 민예원 씨가 비집고 들어올 자리가 없었을 것 같은데요?”

원서윤이 이렇게 말하며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정원준은 원서윤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몰라 다시 곱씹었다. 그러더니 잘생긴 얼굴이 순간 빨갛게 달아올랐다.

정원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원서윤 앞으로 다가오더니 손찌검이라도 하려는 듯 손을 들며 욕설을 퍼부었다.

“원서윤 씨, 한 번도 착하다는 말 들어본 적 없죠? 원씨 가문은 죄다 냉혈한 사람들뿐인가? 왜 하나같이 이렇게 차갑기만 하지?”

말이 끝나기 바쁘게 정원준이 원서윤의 뺨을 후려쳤다.

원서윤은 전혀 피하지 않았다. 미소를 유지한 채 차가운 눈으로 약이 잔뜩 오른 정원준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하지만 이내 누군가 문을 걷어차서 열더니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정원준이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원서윤은 주먹의 여파와 알코올의 작용하에 꽉 잡고 있던 정신줄을 놓치고 말았다. 그렇게 원서윤은 여자 향수 냄새가 풍기는 누군가의 품에 안겼다.

원서윤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역겹다는 듯 밀어냈다.

“저리 가요. 나 이 향수 냄새 싫어요. 너무 센데. 우웩...”

원서윤은 속에 들었던 걸 왈칵 토해냈다. 그것도 누군가의 몸에 토한 것 같았다. 그러자 냄새가 점점 더 역겨워졌다.

원서윤이 거세게 발버둥 쳤다.

“이거 놔요. 더러워요. 냄새가 너무 더러워요.”

“이게 누구때문인데. 원서윤, 좀 얌전히 있어.”

여승재가 치밀어오르는 화를 꾹꾹 누르며 위압감이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술에 취한 원서윤은 잠깐이나마 가면을 벗고 ‘민낯’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었다. 원서윤은 입을 삐쭉 내밀더니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사나워? 그냥 몸에서 나는 냄새가 싫다고 했을 뿐인데. 오빠, 앞으로 이 향수 쓰지 마. 알았지?”

‘오빠?’

원서윤을 안고 밖으로 나가던 여승재가 멈칫했다. 품에 안긴 원서윤은 아직도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고 있었다.

“왜 입을 꾹 다물고 있어? 오빠. 오빠가 그렇게 아무 말도 안 하면 나 힘들다고.”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여승재의 목소리는 어느새 한없이 부드러워졌다.

원서윤은 여승재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술기운이 점점 그녀의 대뇌를 마비하고 있었고 머릿속은 혼돈 상태였다. 꿈인지 현실인지 전혀 구분할 수 없었다.

룸에서 나오는데 뒤에서 정원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승재, 잊지 마. 예원 씨 뱃속에 아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방음 조치가 된 문이 닫혔다.

남자 화장실을 지나가는데 안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며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안에서 가끔 남자의 비명과 애원이 들렸다.

“잘못했어요. 내가 정말 잘못했어요. 그 여자가 여 대표님 사람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신고하지 않을게요. 그러니 제발 용서해 주세요. 아직 죽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아악.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소리가 점점 귓가에서 멀어졌다.

원서윤은 여승재에게 안겨 한 방으로 향했다. 방안은 암막 커튼이 쳐져 있어 새어 들어오는 불빛 하나 없이 캄캄했다.

여승재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해장국을 끓이더니 침대로 다가가 잠이 든 원서윤을 억지로 깨웠다.

여승재는 한쪽 팔을 원서윤의 목뒤로 집어넣어 그녀가 조금 더 편안하게 누울 수 있게 해주고는 해장국을 한술 떠서 호호 불더니 입술로 온도를 확인하고 나서야 원서윤 입가로 가져갔다.

원서윤이 무의식적으로 혀를 내밀어 한 모금 마시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지훈아, 너 요리 실력이 어째 아들보다 못한 것 같다?”

촤락.

사발이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지더니 산산이 깨지며 뜨거운 해장국이 그대로 얼어붙은 여승재의 몸에 튕겼다.

침대에 누운 원서윤은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초롱초롱한 눈을 반쯤 감은 채 술주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오빠, 그거 알아? 지훈이 정말 너무 짜증 나. 맨날 비싼 명품 들고 오는데 내가 스폰받는 애인인 줄 아나 봐.”

“더 짜증 나는 게 뭔지 알아? 한번 들러붙으면 끝도 없어. 못 만나는 상황이면 몇 시간에 한 번씩 페이스톡 해야 한다니까.”

“짜증 나 죽겠어 정말.”

원서윤이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이내 다시 잠이 들었다. 잠들기 전 마지막 기억은 누군가 힘차게 문을 닫고 나간 것이었다.

‘간다고?’

이튿날 아침.

숙취로 인한 두통에 원서윤은 억지로 잠에서 깼다.

막연한 표정으로 침대에서 일어난 원서윤은 이곳이 호텔 일반 스위트룸임을 알아봤다.

민예원이 최고급 스위트룸에서 같이 지내자고 열정적으로 초대하지만 않았다면 팀에서 배정한 일반실에 들어가는 게 맞았다.

딩동.

원서윤이 깨질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겨우 씻고 나오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호텔리어가 원서윤의 캐리어를 들고 나타났다. 민예원이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헤벌쭉 웃으며 인사했다.

“언니, 죄송해요. 선생님께 부탁드려봤는데 선생님이 혼자 스위트룸에서 지내라고 해서요. 선생님이 좀 쓸데없는 걱정이 많아요. 언니, 마음 상했죠?”

그 뜻인즉 민예원이 어제 늦잠을 잤어도 여승재는 민예원의 업무 능력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민예원이 회의 시간도 잊고 늦잠을 잔 걸 원서윤 탓으로 돌렸다는 말이었다.

하여 여승재가 아끼는 애기가 더는 ‘상처’받거나 ‘함정’에 빠지지 않게 그 일을 주도한 원서윤을 방에서 내쫓는 것으로 시름을 놓으려는 것이었다.

원서윤은 이 상황이 그저 우스웠지만 민예원과 함께 지내지 않을 수 있어서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해 여승재의 결정에 무조건 찬성이었다.

민예원은 눈치 없이 원서윤이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선뜻 방으로 들어오더니 다소 좁아 보이는 거실에 서서 주변을 빙 둘러보고는 기분이 상했다는 듯 입을 삐쭉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작아도 너무 작잖아요. 이게 어디 사람 사는 데예요? 안 되겠어요. 지금 당장 선생님께 전화해서 큰 방으로 바꿔줄게요.”

그때 민예원의 핸드폰 화면이 켜졌다. 딱 봐도 페이스톡이었다.

민예원은 빨개진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선생님 오늘 뭔가 이상해요. 내가 그렇게 보고 싶은지 한두 시간에 한 번씩 페이스톡을 걸어오네요.”

민예원이 투덜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민예원은 끼어들기 싫어 캐리어를 끌고 방으로 들어가 정리했다.

통화는 20분간 지속되었다. 두 사람은 마치 온 세상을 핑크빛으로 물들일 것처럼 끝도 없이 꽁냥거렸다.

민예원이 여승재와 토론했다.

“선생님, 서윤 언니가 지내는 방이 너무 작아요. 바꿔주면 안 돼요?”

“원서윤 씨는 거기서 지내는 게 신분에 맞아.”

여승재가 바로 거절했다.

민예원이 얼른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가더니 다급하게 귀띔했다.

“선생님, 나 지금 서윤 언니랑 같이 있어요. 그렇게 말하지 마요. 안 그래도 방 바꾸는 것 때문에 마음 상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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